'다게레오타입'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11.10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2. 2011.09.12 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3. 2011.09.02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4







사진사 150년-1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1989년 사진예술이 세상에 공표된지 꼭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에 창간호를 내게 된 ‘사진예술’ 에서는 창간특집으로 세계 사진사 150년을 요약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기획으로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를 준비한 본지에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사진사상 한 전기를 이룬 사건들과 그 뒷 이야기를 연재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특집에는 프랑스의 통신사 시그마에서 기사와 사진제공을 해 주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니엡스박물관 앞에 있는 니엡스동상
사진의 발명가인 니엡스의 초상(왼쪽)  사진을 공동발명한 루이스 다게르의 초상(오른쪽)
1839년 1월 7일 파리에서는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인 프랑스와 아라고에 의해 굉장한 뉴스가 발표되었다. 바로 사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세계는 사진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갖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프랑스 문화성이 개최하는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관심을 끈다. 이미 일반적으로 루이스 다게르에 의해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믿어온 터에 새삼스럽게 던져지는 이 물음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은 누구에 의해 발명되었는가? 프랑스 통신사인 시그마(SYGMA)가 제공하는 대답은 이러하다. 사진의 탄생을 알리는 뉴스가 발표된 1839년 8월 7일 역시 아라고에 의해 요셉니세포르 니엡스가 만들고 루이스 다게르가 개량한 발명품의 세부자료들이 발표되었다. 이와함께 프랑스 정부는 제작자로부터 그 발명품을 구입하고 즉시 전인류에게 그 발명품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는 사실 1839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에 이미 니엡스는 그의 동생 클라우드와 함께 사진술로 이루는 최초의 결과를 얻어냈다. 감광판에 새겨진 사진이 암실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불안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클라우드는 그의 연구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니엡스는 연구를 계속해 1816년 5월 28일에 기적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진을 만든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니엡스 가족이 살던 아름다운 고장인 Domaine De Gras에서 일어났다. 니엡스는 그의 암실 카메라를 창가에 놓아두었는데 몇시간 동안 햇빛이 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질산으로 만든 염화은 인화지에 그의 첫번째 이미지를 고정시켰는데 그 이미지가 최초의 네가티브였다.
그리고 6년 후인 1822년에 마침내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 첫 번째 포지티브였다. 화학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엡스는 어려운 분야를 탐구하였고 유태 아스팔트 물질을 이용, 그 연구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유태 아스팔트는 보통 라벤더유와 오일 속에 잘 녹지만 햇빛을 받은 후에는 녹지 않는다. 따라서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이 아스팔트를 고르게 칠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상 첫사진을 만들어냈고 여기에 ‘Set Table' 이란 제목을 붙였다.
1822년 니엡스가 아스팔트의 용해로 만든 사진 ‘A Set Table'
1816년 니엡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사진
한편 니엡스는 당시 같은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던 루이스 다게르와 오랫동안 서신교환을 하다가 그와 연계하여 공동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니엡스는 그의 발명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다게르와 공동연구를 했지만 다게르는 사업에 대한 직감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곧 그가 유일한 사진의 창시자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니엡스는 이미 사진술의 공식적인 탄생이 이루어지기 6년전에 죽었고 따라서 다게르의 이름만이 언급되어졌던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판매되는 최초의 사진기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바로 다게레오 타입(Daguerreo Type)이었다. 불운한 천재 니세포르 니엡스는 1765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이 진정한 천재는 생전에 그가 가치를 두고 연구했던 업적을 모두 잃어버렸을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그의 명예를 회복받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도 니엡스에게는 그의 명예를 위해 동상 하나 설립하는 것조차 거절했었다. 프랑스에는 다게르의 이름과 관련된 거리가 수없이 많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기에 차있지만 니엡스라는 이름은 쓸쓸하게 남아있다.
사실 니엡스는 사진술 이전에도 여러 가지를 발명해낸 발명가였다. 즉 나폴레옹의 적에 의한 봉쇄선으로 프랑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설탕이 부족하였었다, 그때 니엡스는 으깬 Zucchini로부터 설탕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사탕무우에서 뽑아낸 설탕을 더 선호했다. 또 정부가 말리 근해의 물을 끌어올리려 할 때 그는 그의 ‘내연식 엔진’을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모터가 대신 선택되었다. 법정에 그가 발명자로서의 우선권을 제출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발명한 엔진은 여러해 뒤에 자동차산업이 채택하여 사용한 연료분사장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나다르가 사용했던 기계들
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카메라 종류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걸작품인 사진술의 발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이스 다게르의 책략에 넘어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루이스 다게르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색가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 여자들 때문에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다게르는 은판 위에 수은이 가득든 숟가락을 놓아 둔 것을 잊고 자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깜짝 놀랐다. 여성이 현상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이 결과 사람들은 한 시간이 아니라 단지 20분만에 사진을 현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법이 보강되었기 때문에 다게르는 연약한 이시도르 니엡스(니엡스의 아들)에게 계약에 있어 그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니엡스가 사후에 당한 또한번의 패배였다. 파리 근교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진박물관을 설립한 Jean Fage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고 기술이고 예술인 사진을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가장 먼저 기록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한 몇몇 천재적인 인물중 한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중 하나인 혁명의 창시자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 옛적에 한 천재가 살았었다. 150년 그 이전에.
(사진 기사제공/ Sygma, 번역/강용석)

니엡스의 최초의 카메라. 물론 세계 최초의 사진 장비이다.
프랑스 사진박물관의 관장이며 큐레이터인 Jean Fage와 Andre' Fage. 1855년부터 1895년까지의 스튜디오 장비들(시계방향으로)

1889년 Ducos De Hauron에 의해 쓰였던 Melanochromsocope(왼쪽사진)
1900년의 것으로 1/5000초에 작동하는 ‘Sigriste' (왼쪽)와 Star Streo cham 1022.(오른쪽 사진)
스그마통신이 제공한 앞에서의 글은 150년전 사진술발명 초기 니엡스와 다게르간의 미묘한 갈등에서 야기된 실상을 오늘날 이 시점에서 재검토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보려는 배려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당시 약화된 니엡스의 공적을 다시 높이려는 운동으로 간주할수 있다. 그래서 지난날 이미 발표된 사진사중에서 사진술 발명초기의 사실의 일부를 여기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려 한다. 다게르의 사진술에 대한 연구실험은 1831년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실마리를 잡는 단계로 발전했다. 즉 니엡스가 헤리오 그래피의 개량에 심혈을 쏟고 있을 때 다게르는 한발 앞서고 있었다. 다게르의 초창기 사진술에 대한 연구는 니엡스와 동일한 은을 바른 동판과 영상을 고정시키는 옥도를 사용한 실험이었다. 1831년에 그는 은맥기한 동판에 옥도의 증기를 쪼여서 만든 옥화은이 높은 감광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광이 되어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날 정도의 강한 감광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게르는 감광성을 높이는데 그 연구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옥화은판을 가지고 갖가지 연구를 시도해 보고 또한 노출을 여러 가지로 조정해 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요컨대 니엡스나 다게르는 ‘현상’이라는 개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광선을 쪼여서 그대로 화상을 나타나게 하는 연구에다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적이 일어났다. 다게르는 여느때와 같이 옥화은판을 검은상자속에 넣고 노광을 시켜봤지만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노광을 시킨 은판을 연마해서 한번 더 사용할 목적으로 그날은 그것을 그대로 화학약품을 보관 하는 장속에 넣어두었다. 몇일 후에 그판을 꺼내어보니 넣어 둘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옥화은판위에 선명한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다게르는 깜짝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지만 왜 화상이 나타났는가에 대한 원인은 몰랐다. 또 다게르는 노광을 시킨 옥화은판을 약품이 들어있는 장속에 넣고 수일후에 꺼내보니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분명히 장속의 약품에 의한 작용이라고 생각한 다게르는 매일같이 약품을 조사해 봤지만 같은 결과로 영상이 나타났다. 마지막 시험으로 수은이 든 병만을 남겨놓고 다른 약품은 모두 제거해 봐도 결과는 동일했다. 그리고 장속에서 수은이 든 병을 꺼내고 옥화은판을 넣어두었는데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게르는 영상을 나타나게 하는 에너지는 수은의 증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어 잠상이 현상에 의해 나타난다는 현대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잠상에서 현상처리에 의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프로세스의 발견은 니엡스가 고민하던 장시간노출의 결점을 해결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래 수시간이 걸렸던 노출은 20분 내지 30분정도로 단축되었으며 옥화은 대신에 추화은을 사용하므로 해서 노출은 1분에서 5분정도로 단축되었다. 또한 다게르는 이 프로세스가 최종적으로 영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염의 포화용액으로 영상을 보호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이것은 지금의 정착방법으로 다게르는 현상과 정착이라는 두가지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1925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라이카 N228 24×36mm형이다.(왼쪽) 마이크로 스파이카메라. 크기는 4.5×6mm(오른쪽)
니엡스가 역사상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낸 Dumaine De Gras의 자택. 문제의 2층 창문이 열려져 있다.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을 때 니세포르 니엡스는 벌써 4년전에 사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니세포르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시돌에게 인계되었기 때문에 10년간의 기한부계약은 파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게르는 아들 이시돌을 감언이설로 계약의 일부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진술의 발명은 디세포르와 다게르의 약속으로 두 사람의 공동연구의 성과이기 때문에 완성의 공로는 당연히 두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일방적으로 다게레오 타입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천문대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라고박사는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의의와 그 성능을 인정하고 1839년 1월7일 과학 학사원에서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아라고박사는 프랑스정부에게 사진술 발명의 권리를 매수하도록 권장했다.
1월 14일에는 다게르와 이시돌 니엡스의 두사람과 당시의 내무장관 듀카딜과의 사이에 가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15일에는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은 이 발명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댓가로 다게르는 종신연금 6천프랑, 니엡스의 아들에게는 동일하게 4천프랑이 지급되게 하고 두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망인이 각기 그 반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하는 내용의 법안이 기초되어 의회에 회부되었다. 이 법안은 프랑스 하원을 7월 3일 통과하고 7월30일에는 상원을 통과했다. 특히 아라고박사는 7월3일 하원에서의 강연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특질과 효용성을 역설했다. 사진의 장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정확한 기록성, 신속성 그리고 진실성이라는 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용성을 예건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사진예술













Posted by stormwatch :





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최봉림


 

 

I. 들어가면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라는 용어는 현대 미학과 예술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키워드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의와 평가는 필자들에 따라 너무나 굴곡과 편차가 심하다.  발음 속에 내재된 필자들의 억양, 그리고 의도에는 아방가르드의 외연마저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 그 진화의 양상에는 공통된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 임의적 정의, 미학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가 일쑤다. 필자의 미학적 취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거나, 혹은 ‘소외된 데카당스’ 예술로 비난한다. 그러나 논리적 수미일관성, 실증적 자료, 필자의 예술관의 피력을 동반한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단 하나만의 객관적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미학과 비평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행하는 필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범주 규정이 특정 운동, 인물을 일시적으로 거명한다 할지라도 이 어사의 미학적 기원과는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들이 정의하는 아방가르드의 경계, 안과 밖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특정 문예사조들, 특정 문예그룹들, 혹은 특정 문예운동들과는 달리,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처럼 그 전성기를 일정 시기로 국한할 수 있는 시대적 미학개념이라기 보다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도래할 초시대적 개념이면서, 산업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낭만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생겨난 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관점에 따라 낭만주의, 심지어는 자연주의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포섭할 수 광의적 미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정의와 적용이 임의적일 경우, 그것은 미학과 비평의 역사를 오도하거나, 근대와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혼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 문맥, 그 어의의 역사적 변이를 고려치 않고, 단지 그것을 자신의 비평적 판단, 미학적 분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아방가르드’는 임의적 비평, 이분법적 분류를 위한 프로쿠루테스의 침대로 사용될 수 있다.

II. 상반된 아방가르드 : 모더니티 혹은 키치
아방가르드라는 어사의 의미작용을 설득력 있게 조작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의 예술적 상황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분할, 비평하는 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자신의 미학적 주장을 아방가르드라는 광의적 용어에 투사하면서 현대 예술의 주요 양상들을 지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들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초시대적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근, 현대예술에 포괄적 접근을 허용하는 용어로 기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예술의 주요 양상은 ‘아방가르드’로 정의되며, 아방가르드는 근, 현대예술의 긍정적 상황과 부정적 양상을 가르는 경계 개념이 된다. 그 경계선 이편에는 아방가르드를 통해 현대 예술의 새로운 긍정을 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있고, 저편에는 그것을 통해 현대 미술의 불모성을 보는 장 클레르 Jean Clair (1940- )가 있다. 20세기 중반부 미국 미술비평을 주도한 전자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우리가 현재 소유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주1)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리 피카소 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비평가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근대성의 우스꽝스런 희화일 뿐이다.”주2)그들은 한편으로 예리하게 설정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통해 20세기 미술 전반을 조망하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의 정의, 그 비평적 사용을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미학적 개념의 이해에 적지 않은 혼선을 야기한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중요한 에세이는 「Partisan Review」의 1939년 가을 호에 실린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 그리고 동일 잡지의 1940년 7-8월 호에 실린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이다. 이 둘의 글에서 미국의 평론가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을 개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두 특성을 설파한다. 그 첫째는 예술을 사회로부터 분리, 격리시켜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활동영역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각 예술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순수시 pure poetry, 추상 abstract 혹은 비구상 nonobjective 미술을 ‘아방가르드’로 옹호하기 위한 그린버그의 알리바이다.
그린버그는 최초의 아방가르드를, 예술사의 정설에 따라, 낭만주의에 침윤된 보헤미아 그룹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래한 대중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부르주아의 범속성, 그들의 진보에 대한 맹신 그리고 이상을 모르는 실리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예술로의 도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꿨다.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과 절연된 순수한 예술, 사회적 잔재가 배제된 절대적 예술을 추구했다. “공중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아방가르드 시인 혹은 예술가는 예술을 엄격히 규정하고,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논외가 되는 그런 절대의 표현으로 고양시키면서 그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주제 혹은 내용은 역병처럼 기피의 대상이 된다.”주3)
그린버그가 말하는 아방가르드의 ‘주제 혹은 내용의 기피’는 부르주아 사회의 범속적 일상의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까닭에, 예술은 세속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정신활동의 영역이 된다. 현실의 재현을 기피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미학과 아카데믹한 예술형식의 부정을 동반한다. 현실의 재현을 지향하는 ‘모방 imitation’ 이론은 물론이고, 미술의 경우, 문학적 ‘주제 혹은 내용’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문학성을 모방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ut pictura poesis’주4) 역시 거부의 대상이 된다. 범속한 사회 현실과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추구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현실의 사실주의적 모방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현실보다 우월한 실체적 현실의 모방과도 단절한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는, 실체적 본질 God조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모방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과 문학의 창조 규율들과 창조 과정의 절차들 그 자체를 결국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추상 abstract’ 예술의 탄생한다.”주5)             
그린버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질적 저하는 문학성을 재현의 모델로 삼은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기인한다. 회화의 본질, 순수성을 저버리고 문학을 전범으로 삼아, 이야기 historia의 재현을 모색한데서 비롯된다. 아카데미 회화라 통칭되는 이 조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이라는 문학적 담론에 의거한 이야기 서술 narration에 전념했고, 선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제도화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삼차원적 효과를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려는 기예들에 몰두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문학과 조각과 같은 여타 매체의 재현효과를 모델로 삼은 아카데미 회화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라는 예술들의 혼용 confusions of arts 경향의 전형적 희생양이다. 따라서 회화 장르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현실 환영주의 효과 illusionist effects에 사로잡혀, 회화 매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저버린 해묵은 아카데미즘을 극복한 일군의 화가들이 된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의 총체적 정의는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매체의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여타의 예술 매체들의 방법, 수단, 절차와의 단호한 단절을 꾀하는 예술가 집단이다. 아방가르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작업하는 특정 매체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그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물성 materiality, 작업 과정들에 전념하면서, 타 매체들의 특성에 영향 받고, 타 매체들의 속성들이 개입되는 것을 청교도적으로 금기시한다. “(...) 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들 활동 영역의 순수성과 영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성과를 성취했으며, 그것은 전 문화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다.”주6)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로, 브랑쿠지, 클레, 마티스, 그리고 세잔느조차 그들의 영감은 그들이 작업한 매체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의 예술이 주는 흥미로운 감동은 거의 전부, 공간의 발명과 배열, 평면, 형상, 컬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순수한 우려와 이러한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데 있는 듯하다.”주7)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는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특성과 순수성의 탐구를 보다 강조하는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1766년에 출간된 레싱 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들』의 현대적 후속편에 해당한다. 레싱의 글은 18세기 후반, 한편으로는 그 당시를 지배한 ‘시는 회화의 말하는 방식이며, 회화는 말없는 시의 양상’이라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예술 상호간의 화합, 예술 매체간의 상호 혼용을 선구적으로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예술 매체의 차이,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매체들에 고유한 질서와 규율 속에서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그린버그의 글은 모더니티의 태동을 위한 레싱의 주장을 ‘아방가르드’의 전투적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다 새로운’ 모더니티를 위한 주장이다.
당연히 조형미술에 종사하는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레싱의 주장을 본받아, “문학성과 주제를 강력히 배제하며” “여러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확립하려 시도”한다.주8) 그리고 각 매체에 고유한 특성, 순수한 본질을 따른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회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승복하는 역사다. 회화 매체의 저항은 주로 사실주의적 원근법 공간 (재현)을 위해 회화의 (지지체인) 평면에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 to hole through’ 노력들에 대한 회화면의 저항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승복을 행하면서 회화는 (외계 현실의) 모방과 아울러 ‘문학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실주의적 모방과 상관관계를 맺는 회화와 조각의 혼용을 제거한다. (한편 조각은 돌, 금속, 나무 등과 같은 재료들을 그 특성과는 무관한 형상들로 만들려는 예술가의 노력에 그 재료들이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한다.) 회화는 명암 대조법과 음영 부조법을 포기한다. 붓질 brush strokes은 대부분 붓질 그 자체를 위해 분명히 드러난다.”주9)
이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를 간략히 정의 내려도 될 듯싶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 자족성 속에서 각 예술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작가 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형예술의 경우, 매체의 순수성 속에서 추상, 비구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 아방가르드들이, 그의 가치판단을 인용한다면, 예술 생산에 있어서 ‘현재의 최상 present supremac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키치는 간단명료하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모방 이론에 침윤된 아카데미 회화,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보듬으며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을 저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상업 예술이다. 그것들 모두는 모더니즘, 그린버그 용어로 애기한다면,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로 옆에, 저편에 있으면서 아방가르드와 대립한다.
반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가 키치로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 상동물 structural homologue이다. 그 구조적 등가성은 무엇보다도 예술 완성의 시간성에 있다. 둘 모두는 우선 현재를 부정하면서, 예술 완성의 시간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와 형태의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의 도식, 동일한 목적론적 비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신고전주의 미학을 주재했던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드라마 축을, 아방가르드는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체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방가르드의 전범들을 보유한다 (...) 그런데 찬란한 미래가 완성될 전범들의 수탁자가 되리라는 이 사고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착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사회주의적 종말론은 기독교가 영원한 구원을 설정했던 지점에, 인류의 미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반 자체를 설정했던 것이다.” 주10)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공산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조적 동일성은 완성의 시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식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도 등가적이다. 차이점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공식 미술로 삼는 서구의 경우, 그 지배구조가 현대 미술관들의 프로그램 전략 혹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과 같은 대규모 미술행사들을 통해 예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 공산당의 강령을 통해 명시적으로 작용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공식 미술을 각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각 사회가 요구하고 수용하는 기대지평에 순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규범들의 대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화가들이 서구의 화가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적 층위에서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애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의 회화나 소련의 회화나 공공연하게 혹은 음험하게 제시한 전범에 눈에 보이지 않게 혹은 눈에 띄게 순응한다는 것이다. 회화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회화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복종해야만 한다.” 주11)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으로 등가적인 아방가르드는, 잘 클레르에게 있어서, “인간 드라마가 배척되고, 현실이 쫓겨나고, 너무나 손쉽고 편안하며, 아울러 그 다양한 표명들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미술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주12)  더욱이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미술계의 지적 조야함, 비평의 악취미, 수많은 기관장들의 교양과 취향의 결핍”에 기대는 “일찍 꺼져버리는 즐거운 예술의 거품”주13) 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린버그가 키치라 명명한 현대의 저급한 미술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비평가에게 있어서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저급하고 공식화된 모상들을 simulacra 원재료로 사용하여 진정한 예술에 무감각한 자들의 몰취미를 부추기고 가꾸면서, 그것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주14)  결국, 그린버그가 현대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켰던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장 클레르와 더불어 등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모더니티, 아방가르드/키치라는 도식을 사용했다면, 장 클레르는 아방가르드=그린버그의 키치라는 등식을 사용한 셈이 되었다.



III.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의 의미론
어떻게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예술의 모더니티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것은 서구 현대 미술의 부정적 조류, 경향으로 통칭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용어는 그린버그에게 있어서는 쿠르베에서 피카소, 한스 아르프 Hans Arp까지 감쌀 수 있으며, 장 클레르에게 있어서는 말레비치, 마리네티, 몬드리안에서 앤디 워홀, 이브 클렝 Yves Klein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날 예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에 결부된 급진적이며 체제 부정적이라는 정치적 무게를 털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정치 성향, 미학적 취향에 따라 아방가르드는 ‘선험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역사적 출현과 그 용례의 역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그 개념과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미학적 해석, 비평적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미술사학자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출현은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백작이 1815년에 출간한 선집,『문학과 철학 그리고 산업에 대한 견해 Opinions littéraires, philosophiques et industrielles』에서 부터이다. 산업에 의한 사회의 부흥 그리고 인간애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정에 불탄 이 사회주의자는 예술가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부대 avant-garde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긍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공리주의적 이상 사회의 도래를 위한 ‘성직자적 임무’, ‘계몽자’의 역할을 촉구했다.주15) 이러한 논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푸리에주의자인 가브리엘 데지레 라베르당 Gabriel-Désiré Laverdant의 1845년의 책,『예술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De la mission de l`art et du rôle des artistes』에서 되풀이된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가장 높은 비상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표명한다. 예술은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다. 따라서 예술이 그 고유한 임무를 선창자에 걸맞게 완수하고, 예술가는 진정으로 전위부대 avant-garde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의 운명은 어떠한지를 알아야만 한다 (...) 행복의 찬가와 함께, 슬프고 절망적인 시가와 함께 (...)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을 거친 붓으로 폭로해야 한다.”주16)
바로 여기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범주에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개념이 태동한다. 아방가르드 의미론의 기원에 위치하는 까닭에,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명백히 드러난다. 아방가르드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인 전위부대처럼 앞장서서 길을 트는 예술가 집단이다. 미래에 도래할 이상적 사회에 열광하고, 인류의 진보를 계시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는 전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계시하는 ‘성직자적 임무’와 인류의 운명을 선도하려는 ‘계몽가’의 의지로 무장한 예술가 진영을 고려하는 역사적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엽,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전반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심지어는 전통적 풍습, 윤리, 의식구조까지 송두리째 변혁하려 했던 두 예술운동을 알고 있다. 새로운 ‘이상적 도시’, 파시즘을 위해 광적인 선동자 역할을 담당한 이태리의 미래주의 Futurism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엔지니어의 기능을 담당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는 결코 성직자나 계몽 철학자의 면모는 아니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소환한 아방가르드와 그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 ‘계몽가’로 주창한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주17)  회화 장르에만 국한한다면, 그들은 이상적 미래 사회에 걸 맞는 디오라마 Diorama와 파노라마 Panorama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극사실적 회화로 완벽한 현실의 환영감을 주는 새로운 무대미술 장치인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그들이 보기에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이미지였다. 1831년 5월 12일자「Le Globe」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기술적 technique 관점에서 우리는 회화에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디오라마는 아직은 무척 불완전하다. 그것은 아주 최신의 발명이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예술가들은 바로 이렇게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주18)
 새로이 도래할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발명을 촉구하는 이 발언은 아방가르드를 새로운 매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고 탐색하는 예술가들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언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전혀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새로움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커다란 무대화를 보는 색다름이었고, 후자의 새로움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높이와 길이 100m에서 120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벽화의 새로움, 그리고 그 무대화를 위에서 아래로 관람하는 특이함이었다. 반면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의 화풍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비판한 신고전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주19)  재현의 주제 혹은 소재도 거의 전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이 애호한 역사화, 종교화의 범주에서 길어온 것이었고,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내러티브에 집착했다. 아카데미 회화를 강력한 스펙터클과 오락을 환호하는 대중사회에 걸맞게 매머드로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주창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환호한 ‘새로운 회화 예술’의 전범인 디오라마가 언제, 어떻게 ‘기술적 관점에서’ 완성되는지를 알고 있다.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창시자인 작크 다게르 Jacques Daguerre는 1836년 사진이라는 광화학적 기록의 발명을 통해 ‘완전한’ 현실의 재현을 이룩하며,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비춰지는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착시효과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Lumière 형제의 활동‘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완전한’ 무대화로 완성된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주창자들에게 ‘새로운 회화 예술’로 비쳤던 디오라마,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완성인 사진과 활동사진의 재현 모두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원칙인 선 원근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실 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1839년에 그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이나 정지한 낱장의 사진을 움직이는 연속사진으로 발전시킨 활동사진의 현실의 모사는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한 선 원근법의 편리한 재현도구로 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오라마, 사진, 활동사진 모두는 재현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이자 재현의 원칙인 선 원근법, 현실 환영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회화의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천거한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갱신된 아카데미 회화, 혹은 대중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점증하는 강도로 확인되는 산만한 오락”주20) 의 원칙에 부응하는 상업적 아카데미즘에 지나지 않았다.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은 젊게 치장한 복고주의, 상업적 아카데미즘을 아방가르드 회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1860년대 중반에 작성한 그의 단상 초고집인『내 마음을 벌거벗고 Mon cœur mis à nu』에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아방가르드를 조롱으로 비난했다.

“군사적 메타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편애에 대하여. 이 모든 메타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투적인 문학
돌파 지점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다.
(...)
군사적 메타포들을 더 첨가하면,
투쟁 시인들.
아방가르드 문학인들.
이러한 군사적 메타포를 사용하는 습관은 전투적인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다시 말해 순응적인, 하인으로 태어난, 오직 사회집단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리킨다.”주21)

사실 19세기의 프랑스가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군사용어를 미학적 용어로 전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혁명이 야기한 전반적인 삶의 정치화의 귀결이다.”주22) 프랑스 혁명이후 계속 되풀이된 정변 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예술을 연계시키는 사고를 대변했다. 보들레르가 아방가르드를 조롱한 것은 바로 사회의 진보에 예술이 ‘하인’으로 종속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예술을 숭고한 정신활동으로 신봉하고, 예술을 통한 유한한 삶의 구원을 믿었던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에 봉사하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부인하는 태도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혐오하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처럼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언제나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고, 현실 환영주의적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그리고 다게레오타입에 열광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아방가르드는 당시를 지배한 상투적 사고체계에 저항하는 ‘전투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정신’이었다. 보들레르의 조롱 섞인 글이 보여주듯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는 그 용어가 회자되는 만큼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약한 영향력과 예술적 성과 때문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개념의 명료성을 상실한 채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다의적 어휘로 변색되었다.
소명을 부여 받은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에서 아무런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린버그가 상찬한 아방가르드, 즉 ‘모더니티’의 태동에 기여하지 못한데 있는 듯하다. 모더니티에 참여하기는커녕,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찾은 예가 보여주듯이, 갱신된 복고주의에 머문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주의의 전성기가 19세기 초반부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여전히 시효를 상실하지 않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회화 예술’의 ‘열린 방향’을 모더니티에서 탐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의 모더니티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2제정과 더불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받은 아방가르드가 회화에 본질적인 형식의 제 문제, 회화의 순수한 물리적 조건에 침잠한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IV. 나가면서 혹은 제언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고립된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며, 이들은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혁명적인 작업들로 그것을 ‘실험하고’, 이 작업들을 아카데미즘, 전통, 질서에 충실한 반대자들의 비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자들이다. 그 대표자들은 제 형식들을 바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천명하고, 현 예술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사상과 원칙을 폐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의 비전’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를 들면, 관습,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작업방식들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예술을 비웃는다.”주23)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모순되게도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이 전파했던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이 환멸로 바뀌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향도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을 일정 부분 수렴하지만,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남용, 일탈하는 미학적 해석, 비평적 평가들이 쇄도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윤색되었고, 마르크시즘은 그것을 데카당한 서구예술로 간주했다. 미술상 역시 이 용어를 남용하면서 장사 속을 챙겼고, 큐레이터, 작가들도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홍보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성직자의 임무’로서 표명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디오라마와 같은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개념은 상당 부분 부식되었다.
언어의 의미작용은 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형되고, 추가되고, 탈락되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평의 용어가, 살아 있는 미학적 개념이 이데올로기, 미학적 취향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비평의 효율성, 논쟁의 성과, 의사소통의 실질성에 부득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효율적 비평, 성과 있는 논쟁, 실질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 언어의 탄생에 관계된 역사적 문맥, 본원적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무절제한 전략적, 편의적 사용에 의해 어사의 내포 connotation는 무한정 확대되는 반면, 그 외연 denotation은 계속 줄어들어 의사전달에 장애를 초래하는 현상은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사태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라는 어휘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장 클레르가 상정한 아방가르드의 완성의 시간도식은, 그의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의 역사적 의미작용을 포괄하는 혜안이다. 이 탁월한 안목을 변화된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하자.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완성을 더 이상 현재에서 과거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기를 주장하면서, 현재 예술의 진중한 판단을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넘겨버린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상주의를 ‘밑바닥에서’ 다시 세우려했을 때 사회학에서 행했던 바와 동일한 재건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예술의 완성이 현재의 앞에 있건 혹은 역으로 뒤에 있건, 그것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남는다. 아방가르드는 황금시대를 과거에서 상상하지 않고, 미래로 투사했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매몰되는 정신이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몽롱해진 정신이기를 원했다. 진보의 사고는 잃어버린 낙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이론은 방향이 바뀐 노스탤지어일 뿐이었다.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예술의 완성을 투사했던 것이다.” 주24)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이 사라지는 미래, ‘불완전한 디오라마’가 완성되는 미래 등,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장 클레르의 지적처럼 아방가르드의 범주는 사회적, 미학적 완성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미학적 시도의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가 옹호한 아방가르드, 즉 매체의 문제에 전념한 ‘순수한’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들 예술의 완성을 미래에서 구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장 클레르가 아방가르드로 규정한 몬드리안, 이브 클렝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에서 살펴본 의미론의 핵심 사안을 이루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현실참여 engagement를 행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디오라마를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로 간주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의 경솔하고 깊이 없는 미학 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야만성, 모든 오물을’ 전통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폭로하여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만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의미론에 충실한 예들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행 아방가르드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나 상충되어, 현실적 용례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탐구한 작가와 예술집단만을, 그러니까 마리 

네티 Marinetti의 미래주의나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의 러시아 구성주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혹은 한스 학케 Hans Haacke, 앨런 세큘러 Allan Sekula  등등만을 아방가르드의 개념, 범주로 축소해 고려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본원적 의미론에 부합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비평, 보다 생산적인 미학적 논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작가 군들로만 아방가르드의 개념과 범주를 축소, 제한한다 해도, 아방가르드 연구의 볼륨은 만만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회자되지만 혹은 너무 회자되어 아방가르드와 유사한 의미의 혼란에 빠진 미학과 비평의 용어 하나를 거명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1)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I,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11.

2) Jean Clair,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p. 71.

3) Clement Greenberg, art. cit., p. 8.

4) ‘시는 회화와 같고, 회화는 시와 유사하다’는 말로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연유하며, 문학 담론에 의거한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특성을 지칭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역사적 전개와 이론에 대해서는 W. Lee Rensselaer,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을 참조할 것.

5) Ibid.

6)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John O`Brian (ed.), op. cit., p. 32.

7)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9.

8) <<Towards a Newer Laocoon>>, art. cit., p. 23.

9) Ibid., p. 34. 괄호안의 어사는 필자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며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의 의미는 선 원근법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외계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

10) Jean Clair, op. cit., p. 77.

11) Ibid., p. 91.

12)  Ibid., p. 87.

13)  Ibid., pp. 79-80.

14) Cf.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12.

15) Cf. André Chastel,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p. 79.

16)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p. 9에서 재인용.

17) 생시몽은 아방가르드에 화가, 조각가 상징의 창조자 즉 문학인을 포함시켰다. 

18) Nicos Hadjincolau,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p. 52에서 재인용.

19)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결코 두 학파를 절충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학파, 즉 고전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파, 즉 낭만주의적 경향은 완전한 예술로서 삶의 진정한 기호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1831년 5월 2일자「Le Globe」, ibid에서 재인용. 

20)  Walter Benjamin,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p. 169.

21)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pp. 634-635.

22)  Francis Haskell,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 107.

23) Etienne Souriau,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p. 209.

24) Jean Clair, op. cit., p. 35.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Benjamin (Walter),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Chastel (André),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Clair (Jean),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Ibid.
Hadjincolau (Nicos),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Haskell (Francis),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oggioli (Renato),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Rensselaer (W. Lee),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

Souriau (Etienne),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출처:『미술평단』, 제90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8, pp.18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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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테마 사진과 아우라 현상
 
 
 
 
사진 용어에는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용어는 사진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론(음의 세계)적 용어이다. 이때 용어의 개념은 앎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의 신비에 가까운 감정의 음색(tonalite)으로 의미의 영역밖에 존재(플라톤 동굴의 어둠)하는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응시자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느날 오래된 사진첩을 뒤지다가 발견한 돌아가신 어머님의 사진을 보았을 때 웃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이라든지, 시골 대청 마루 위에 걸려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유령같이 모여 있는 어느 가족, 연도가 1951년이라고 적힌 낡은 사진에서 웃고 있는 익명의 군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 가로등만 훤히 켜진 아무도 없는 대도시의 야경 사진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오싹한 공포감, 혹은 지하철 광고 사진에 흐리게 잡힌 어느 소녀의 옆모습이 주는 어떤 아쉬운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러한 감정들은 모두 보여진 대상으로부터 “나” 즉 “경험적인 연상”과 관계한다. 특히 찍혀진 인물의 운명(과거 속의 미래)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이러한 사진적 현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틴어 어원을 갖는 아우라는 그 사전적 정의를 참조해 보면 종교적 후광, 무리(halo) 등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감싸는 정신적인 분위기로, 사진의 어떤 객관적 의미보다는 주관적인 가치를, 또한 물질적이라기보다 신비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한다. 이는 또한 “미적이고 의미적인 방식에서 절단된 낡은 타원이 가끔씩 쬐는 수증기 같은 원에 비유하고 또 그것은 일종의 가벼운 원(기체)이다. 그 속에서 훈영(후광)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마치 토스칸과 옴브리(이탈리아)의 옛 거장들이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수행하고 있는 성인들 얼굴 주위에 그려 넣는 금관과 같은 것이다.”1)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라를 상기할 때 우선 모델의 “성스러운 것” 혹은 “이미지의 유일성”과 연관시켜 흔히 이미지 그 자체에서 또 다른 의미나 구체적인 사실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초상은 아우라의 마지막 피난소이고 그 아우라가 인간의 얼굴 위에 최후의 불똥을 던진다”라고 1930년대 당시 재생 이미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하여 탈 신성화와 세속화(아우라의 상실)를 주장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아우라는 일종의 사진 이미지 그 자체에 실질적으로 이미 함축되어 있는(전혀 응시자와 관계없이) “신성한 이미지” 혹은 그러한 실체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객관적 논리만을 수용하는 양의 세계(모더니즘)에서 볼 때 “아우라”는 흔히 복제된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작품의 개성이나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칭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단지 지나치게 구조화된 기호-논리에 의한 비유적인 수사학에 불과하다. 아우라는 결코 실체론적 대상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현상이 언어의 역사와 사진 물리학 혹은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설명된다 하여도 사실상 아우라의 정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단지 의미의 과잉을 말하는 푼크툼의 비논리적 영역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은 대량 복제로 인하여 이미지 그 자체에서 분실된 “오리진”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미 함축되고 의미화된 대상에 대한 응시자의 무반응 혹은 무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아우라의 현상을 다소 비현실적인 형태로 사진이 은닉한 또 다른 고유한 이미지로 생각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오랫동안 우리가 의미적인 분석에 너무 익숙해 왔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사진에서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진의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응시자의 주관적 기억 연상에 관계할 뿐이다. 역으로 창작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아우라의 음색(대표적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된 사진 이미지(사진적인 것)는 다시 한번 더 언급하지만 대상에 이미 본원적으로 내포된 장면의 재현(미술의 경우)이 아니라 사실상 작가도 모르는 전혀 불확실한 감각적인 재현(사진의 징후)일 뿐이다.
 
왜냐면 사진기는 번역적인 도구가 아닌 내면으로 향한 일종의 더듬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작가가 감지한 아우라를 흔히 자신만이 감지하는, 극히 주관적인 감각적인 “느낌(sens)” 또는 “기분(humeur)”3), 쉽게 말해 “직감(intuition)”이라 할 수 있다.

  아우라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을 해보면 철학적으로 실체론과 존재론의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론들은 인식(陽  pist mologie)과 비인식(ontologie / 음영 蔭映 ombres) 혹은 실체와 존재의 철학적인 대립 속에서 서로 공존하여 왔다. 실체론적으로 본 아우라는 보다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아우라는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대상이 흐리고 불확실한 실체 혹은 그러한 효과가 만들어 내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근본적으로 사진의 흐린 효과(레미니센스의 은유)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 라틴어에서 아우라는 그 첫 의미로 가벼운 입김, 안개, 바람 그리고 공기와 대기까지 지칭한다. 또한 생리학적 용어로 어떤 신체, 어떤 실체의 방출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만질 수 없는 유동 즉 입김은 신체와 실체에 의해 생산된다. 사진에서 아우라의 물리적 실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효과에 빚지고 한다.

  한편으로 아우라는 사진의 부드러운 중간 톤을 말하는 메조-틴토(mezzo-tinto)로부터 야기된다. 원래 이것은 연속판인 동판(부식)에서 색조의 “연속(continuit )”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의 절대적인 연속적 색의 변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중간 색조는 시각적으로 아주 부드러운 효과(거의 환상적)를 준다. 이러한 효과는 전통적 그림의 대기 원근 효과, 즉 “스푸마토(sfumato)”처럼 그림의 중요한 “환기적 효과”와 동일시되었는데, 한때 19세기의 많은 사진들(특히 초상사진들)에 있어 이러한 심리적인 효과(비현실적인 초상)를 위해 메조-틴토를 의도적으로 선호했다. 게다가 제작 과정의 긴 노출시간과 기술적 문제로 당시에는 이것을 하나의 효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딱 한 장만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다게레오타입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중간 톤은 모델을 유령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재현하였다.5)
 
그때 그 극단적인 부드러움 속에서 언제나 인물을 감싸는 무엇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아우라로 보았다. 사실상 1930년대 벤야민의 텍스트에 예로서 언급된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동판 위에서의 메조-틴토처럼 극도로 부드러운 흐린 안개 효과에 관계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아우라는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사진에 직접 출현한다. 아우라 현상은 사진적인 실험에서 정확히 물리적 현상으로 실재하는데 그것은 무리(halo)이다. 무리(달, 해의 무리와 같은)는 예를 들어 창에 의해 아주 강하게 비친 실내를 촬영할 때 또 카메라를 창으로 향하게 하여 촬영할 때 특별히 생기는 빛의 방사로 나타난다 : 그때 인화 작업에서 창가들은 마치 빛에 의해 먹혀진 것과 같이 흐려지고 불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일종의 후광(aureole)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된다. 물론 근본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오랫동안 유리판으로 작업한 19세기 많은 사진가들이 애착을 가진 것은 밀착 인화에서 유리판의 부드러운 입자(연속적인 중간 톤)로 인하여 사진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현실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극도로 선명한 입자(pique)도 아니고 더욱이 칼로타입에서 종이의 거친 입자가 주는 흐린 효과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광학적으로 빛이 표면의 감광층을 지나 유리판을 통과할 때 유리판의 두께로 인하여 생기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인화에서 시각적으로 가벼운 무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표적으로 으젠 앗제의 많은 유리판 사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벤야민의 존재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진 그 자체에서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기입하는 사인처럼 자신의 독창적인 사진적 효과로 간주되었다. 특히 논리와 의미를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아우라는 어떤 작품의 존재적인 유일성을 보장해 주는 필요조건 즉 독창성(authenticite)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모더니즘은 그처럼 아우라의 실체론적 개념에 의미적인 옷을 입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우라는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 즉 빛의 굴절이나 경계면의 흐린 효과 혹은 빛 바랜 세피아 색으로부터 야기되는 물리-심리적 효과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20세기에 들어 와서 렌즈와 음화의 급속한 질적 향상은 사실상 아우라에 대한 관심을 실체론적인 분석(인식론)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 정신 현상으로 이동시켰다. 왜냐하면 아우라 현상은 단지 흐린 효과에서만 유발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선명한 사진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유동적이고 주관적이고 또한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처럼 대상과 응시자의 쌍방적인 정신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처음으로 초월적인 사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무리(halo) 혹은 그림에서 성인의 후광으로 이미 알려진 “아우라”라는 용어를 차용한 발터 벤야민은 사실상 아우라 현상을 앞서 언급한 실체론적 방법으로 밝히지 않는다 : 벤야민은 힐과 아담슨, 으젠 앗제, 오귀스트 잔더 등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사진을 사진 그 자체에서 발하는 비현실적 출현을 직접 기술하고 있다.
 
 그는 사진에 출현하는 현재적인 이미지와 그 출현 속에 지나간 과거의 여운(reste) 혹은 향수(nostalgie)가 발한다고 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과거 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예리한 감정,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이것은 그림이나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고 유일하게 사진에서만 출현하는데 응시자의 내부에서 은밀하고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리를 만든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6) 벤야민은 모든 것이 괴상하고 모조적으로 나타나는 카프카(Franz Kafka)의 젊은 사진(옛날 사진들)에서 또한 뉴 해븐(New Haven) 항구의 어부들을 보여주는 힐과 아담슨(Hill and Adamson)의 사진에서 아우라의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아주 정확한 사진기술은 손으로 그려진 어떠한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어떤 마술적인 것을 누설하고 있다.
 
사진사의 노련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색한 모델의 포즈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슬그머니 사진과 유사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 스스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튀는 일종의 불똥을 찾게 된다. (...)”7) 여기서 말하는 불똥은 어떤 이상함, 회고적인 시각, 멜랑꼴리 등과 같은 응시자의 경험과 체험에 관련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음색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 그 자체에서 응시자로 전염된 존재론적인 출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라에 대한 벤자민의 존재론적 발견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사진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의 실체론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그후 이러한 존재론적인 재발견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자동 생성(La genese automatique)”을 거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참조주의까지 무려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아우라는 신비적이고 회고적이고 또한 역사적인 문맥으로 축소되면서 더 이상 실체론적인 의문을 달지 않을 확실한 어떤 사진적 공리가 된다 : 푼크툼. ●
 
1) Alain Buisine, Eugene Atget ou la melancolie en photographie, Edition Jacqueline Chambon, Paris, 1994, p. 118.

2) 아우라는 원래 사진의 대상과 응시자의 관계에서 주관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용어의 진화에 따라 모든 예술작품에 함축된 “오리진” 혹은 “독창성”과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실체론적 관점에서 아우라는 대상을 흐리게 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회고적인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일종의 환기적 효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3) 이러한 용어들는 “나”라는 이성의 범주 즉 주관적 관념론(칸트)의 범위를 벗어나 거의 신비론과 유신론에 가까운 번역 불가능한 존재론적 용어들이다. 유사한 용어로는 강렬한 인상, 도취, 황홀, 절정, 기질, 음색, 멜랑콜리 (독/stimmung, gemut, 불/tonalite , impression, temperament ...)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추적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창작의 원동력이다. 참조. Alain Bonfand, Paul Klee, L'oeil en trop, Edition de la diff erence, Paris, 1988. 그때 아우라는 사진적 매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이론적 용어(1930년대)이다.

4)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이다. 결코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은 기억”이다(Philippe Dubois)라는 명제에서 흐린 사진을 기억의 쇠약 혹은 망각으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우리들의 “논리적 기억(la m emoire logique)” 때문이다. 참고, 앙리 베르그송의 “무시간적 기억 회상”(La matiere et la memoire).

5) 유령과 같은 이러한 초상은 손으로 직접 그려진 사실주의 초상화(예로 현대미술에서 게랄트 리히터의 “48명의 유명 초상”)를 상기시킨다.
  
6) 사진이 그림과 달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발견으로 약 15년 후 앙드레 바쟁이 언급하는 “자동생성(일종의 무의식적 연상)”과 같은 문맥을 가진다.

7) W. Benjamin, “La petit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Poesie et revolution, Danoel, paris, 1971.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으젠 앗제, 브로카 길 41번지,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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