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째 테마 사진적 재현과 형상이탈 
  
  앞서 언급된 아홉 가지 테마 내용들은 사진적 재현에 관하여 대체로 객체에서 주체로, 코드에서 탈코드로, 혹은 논리 중심에서 감각 중심으로의 사변적 이동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공통된 맥락은 한 마디로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의미적 규명으로부터 “탈퇴”를 말하는데, 이는 모더니즘의 “형상이탈(deconstruction de Forme)”1)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종의 “계열적(패러다임) 이탈”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20세기 후반 소위 후기구조주의라는 사변적인 운동에 있어 가장 분명한 개념적 변화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한 “이성”에 대한 일종의 탈-구조주의적인 혹은 탈-계몽적인 사변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을 보는 관점 즉 철학을 크게 양과 음의 두 양대 산맥으로 나누어 볼 때(물론 이러한 구별은 엄밀히 말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사회와 집단사회를 지배해 온 인식론(양의 세계)과 정신과 개체를 우선으로 하고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대상까지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존재론(음의 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후기구조주의는 약간의 담론적인 모순이 있지만 구조주의의 개념적인 지주로서 간주되는 인식론적 사고로부터 이탈 즉 존재론적 사고로의 이동에 관계된다. 흔히 말하는 개혁이나 혁신은 과거에 규정된 의미의 탈당 쉽게 말해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모더니티)을 말하는데 이는 르네상스 이후 계몽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유효한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또 그러한 형상이탈의 연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이탈”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진보적 이탈의 연속 즉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사변적(존재론적) 경향을 후기구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똑 같은 모더니즘 이탈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이성의 영역 밖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의미와 형상의 옷을 요구하는 인식론적 혹은 형상론적 관점(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에서 볼 때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탈을 탈-모더니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엄밀히 말해 인식론적 용어이며, 동시에 가장 최근에 양식과 의미의 옷을 수여 받은 새로운 모더니즘 개념인 셈이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의미로 하나의 예술적 양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정신)은 거시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관계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몇 세기 전부터 (과학적 사고의 맹신으로 인하여) 단지 망각되고 소외된 존재의 재발견 혹은 그러한 인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록 과학적 인식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존재론(형이상학)을 오랫동안 철학의 큰 줄기로 간주하는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사변적 급변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반(anti)-구조주의 즉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변적 이동은 과학적 논리를 기초로 한 인식론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종의 극복으로 이해되며 존재론적 관점(특히 유럽의 프랑스 철학)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상들은 사실상 그간 오랫동안 인식론에서 무시되었던 비 인식적, 말하자면 비 상식적 대상들(음영들 ombres)이다. 그래서 의미와 논리에 익숙한 규명론자(말하자면 인식론자)들은 이러한 음의 실체를 “포스트”라는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혀 흔히 또 다른 양식의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유럽의 존재론자들은 소위 포스트모던한 대상들을 단지 의미의 생성-변전(devenir-forme)에서 한 단계의 존재로 이해할 뿐이지 엄밀히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대상(실존 existence)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변적 대상을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을 상상으로의 복귀 혹은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 말할 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인식론적 관점)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코드의 존재적 재발견은 흔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상”으로 이해되고 그 명칭도 당연히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념적 이해와 설명은 모더니즘과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데 흔히 오랫동안 물질사회에서 소외된 (생성 혹은 질료)존재론적 개념으로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예술(창조)적 맥락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또한 당연히 존재론적 설명을 우선으로 하고 이론적으로 과학적 지식이 아닌 설화적 지식을 그 배경(장 프랑수아 료타르,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 1984)으로 하고 있다. 보다 더 정확한 사변적 이해를 위하여 우선 모든 대상을 논리와 의미 즉 과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의 철학적 개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티(modernity / modernite)라고 하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중세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 에서 유래하며 과거와는 다른 신식 혹은 새로움이라는 의미로 5-6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용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도입하였는데 한편으로 그 용어의 절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modernism)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는 르네상스 이후 정확히 말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과학의 진보 등 일련의 근대적 사건과 특히 18세기 계몽시대의 이성(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가치관에 관련한다. 그래서 “모던”은 연대적으로 흔히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적 구분으로서 “근대(modern)”를 지칭하고 또한 개념적으로도 크게 계몽시대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사실상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물질 중심의 사변적인 큰 패러다임을 말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볼 때 상대적인 용어로 도입된 경우인데 그 개념적인 측면에서 “모더니티”는 각 시기마다 그 시대의 전통(규명된 형상)과는 다른 뭔가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치 “신구 논쟁”처럼 언제나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한다. 즉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상대적인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 이때의 용어는 “현대”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전통적인 형상(Form)에 도전하고 혁신을 이루어 내려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형상이탈” 혹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진보나 혁명”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모더니즘 관점에서 19세기의 현대성과 20세기의 현대성은 분명히 따로 있으며 오랫동안 구조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각각의 새로운 정신들, 다시 말해 일련의 “형상이탈”들을 시간적으로 일종의 계단식 발전을 거처 궁극적으로 총체적 역사발전을 이루게 하는 사변적인 진보들로 간주하였고 또한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모더니즘의 역사성은 그처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마치 고대는 새로운 탄생의 토대가 되고 새로움은 언제나 또 다른 새로움을 위한 출발이 되듯이 언제나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이는 곧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본질 즉 끝없는 새로움을 향한 발전적 역사성을 말한다. 그래서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이나 기술적 발전에 있으며 여기서 진보라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양식 혹은 공리(모더니즘의 역사성)를 말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이러한 진보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형상이탈들은 20세기를 접어들면서 일어나는데 예컨대 인상주의로부터 입체파, 다다, 구성주의, 표현주의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더욱이 아방-가르드의 표명은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로 간주된다. 이러한 진보적 사고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컴퓨터의 지속적인 기술 발전과 같이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와 혁신 그리고 의미의 새로움에 관계한다.2) 그러나 형이상학에 대한 지나친 멸시와 지나친 물질 숭배 사상으로 인한 인간주체의 상실과 삶의 질적 문제에서 이러한 사고는 50년대 이후 분명한 사변적인 착각으로 나타난다 : 이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3),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인간이 무한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과학적 사고(대표적으로 자연을 인간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시킨 산업혁명) 그리고 평등을 빙자한 자유 지상주의와 획일성, 진보의 필연성과 무한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4)과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진보 사상과 자연지배 사상이 결합된 오늘날 모더니즘 정신 즉 과학적 사고의 배경을 이룬다. 결국 인간의 유한한 측면(나약함)을 제거하여 인간을 의도적으로 절대화한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화는 결국 20세기 후반 실패한 모험으로 끝나는데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와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알다시피 1950년대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천명한 그의 모더니즘 공리5)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은 중세의 “신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을 “인간(이성) 절대주의”로 대치하여 당시 새로운 사변적 패러다임을 세웠는데 이는 오늘날 물질에서 정신으로 지향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로 이성과 물질을 향한 전통적 형상에 대한 계열적 이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특징은 흔히 현실의 재현성(repr esentativite), 의미를 갖는 목적성(signification), 새로움을 말하는 독창성(originalite), 작가의 주관성(subjectivite)을 들 수 있고  모더니즘적 작품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특징에 의해 인정된 모든 “상징적 미적인 작품”을 말하기도 한다. 사진의 영역에서 예를 든다면 20세기 사진을 외형적으로 하나의 코드화된 메시지 혹은 함축적인 상징(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 뒤봐)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의미와 과학적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스투디움(studi-um)은 이러한 논리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특히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사진을 읽는 일종의 암호(코드)로 간주되었다. 또한 지금까지의 사진의 역사에서 역사의 나열은 단순한 논리적 사고에서 마치 퍼즐과 같은 짜집기 형식으로 인위적인 의미 부여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의 새로움은 우선 시간의 역사성과 의미 창출 특히 예술에 있어 매체 고유의 형식에 있으며 이러한 논리 속에서 모더니즘은 끝없이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에 모든 발전의 토대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탈은 모더니즘의 형상이탈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이탈이다. 쉽게 말해 형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재현성, 의미성 그리고 독창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총체적인 규칙과 과학적 지식들의 근거를 이루는 보편적 의미와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탈은 오랫동안 우리의 논리적 의식(상식)에서 소외되고 망각된 존재들(음영) 이를테면 무의미, 탈-코드, 동성애, 직감, 특히 사진에 있어 푼크툼(punctum)과 같은 비인식적이고 비상식적인 것들의 추적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러한 형상이탈은 르네상스 이후 모든 역사적 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계몽주의적 계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극복, 비판, 진보, 개혁, 혁명)이라는 의미로서의 “포스트”(예를 들자면 후기인상주의 혹은 후기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그 자체로부터 정 반대 방향을 갖는 큰 형상이탈의 의미로서 포스트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급하자면 “탈 모더니즘적 현상들에 관한 사상적 포착”을 말한다. 또한 “인간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적 구속성을 수용) 속에서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인 혹은 개체와 집단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유한성의 철학”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인간 유한성의 수용은 그간 소외되었던 많은 형이상학적인 것들, 즉 이성과 인식이 도달치 못하는 음영(ombres)에 대한 학문적 이해와 추적으로 간주된다.

  그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정신은 현대 계몽주의자가 전제하는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현재 무한한 가능성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에 대한 우리의 거만한 태도를 다시 인간의 유한한 공간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의도로도 이해된다 : 오늘날 이성 절대주의의 물질사회에서 생태학적 위기, 인간성 상실, 자아상실, 주체와 주제의 증발 등은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논리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증거임과 동시에 파멸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화된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무한한 새로움의 환상과 절대적 맹신을 축출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도를 갖는다. 그러한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 상태(etre/esprit)”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계급적 개념을 탈피하고 그 정신적인 측면에서 “문화적 자유성(La liberte de la culture)”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일종의 형이상학의 회귀 혹은 망각된 존재(음영)의 정신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적은 어떤 새로운 의미 즉 양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근본적으로 무의미와 탈-코드에 대한 사변적인 추구임과 동시에 규명할 수 없는 존재의 발견과 제스처에 관계(오늘날 프랑스 철학의 가장 중심된 담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기구조주의자들(특히 생성 존재론자들)은 이러한 사변적 경향을 아주 더물게 포스트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라고 언급하고 또한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적어도 유럽에서 좁은 의미로 단지 오늘날 물질사회에서 나타난 미국식 표현적 예술 양식(대표적으로 제프 쿤, 신디 셔먼, 낸 골딘 등)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들 의식에 오랫동안 익숙한 모더니즘적 혹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마치 또 하나의 모더니즘의 형상(물질적 형식이나 유행으로서 “후기”-모더니즘 ?)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그러한 획일적 유행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이해를 무의미와 비 인식으로 대변되는 존재론적 음영의 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사회와 집단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아직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모더니즘적 “의미적 수용”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 예술적 장르에서 선구자들이 표현적 대상으로 개척한 탈-모더니즘의 특징들 예컨대 자아상실, 주체의 증발, 도용, 모작, 혼용, 잡종 등과 같은 이슈들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물질사회의 한계와 모순으로부터 출현하는데 이것들은 일종의 자본주의의 병폐와 배설물에 대한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예술적 메시지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추적은 사실상 애초에 의미화 되지 않은 무의미 혹은 탈-코드의 “음영”이였는데 이때의 탈-코드적 추적은 모더니즘에 대한 정신적 이탈로 간주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신적 행위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상태라는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수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말(그러나 점진적으로 60년대 초부터) 예술의 전반적인 영역에 적용된 예술적 공통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1980년대를 돌면서 모더니즘에 익숙한 눈으로 볼 때 외형상으로 마치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것처럼 혼란과 혼동 그리고 다변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엄격한 현대성(모더니즘)과 결별하면서 형식의 자유(다양성)와 절충주의(혼용과 잡종) 그리고 환상주의(연출)적인 특징을 갖는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고갈되어 그 위기가 도래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적 표현 양식이나 형태 속에 보다 넓은 모더니즘의 재 번역과 전통적 요소와 절충을 행한다”(사전적 정의들, 라루스 사전).  이러한 재 번역과 절충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의미의 형상으로 말하는데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에 대한 모더니즘적 번역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 없는 명분과 논리 없는 대상은 없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이러한 탈-코드들이 일단 음지에서 양지로 들어오면 다시 말해 일단 객관적으로 의미의 옷을 입고 나면 그때부터 탈-코드는 즉각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형상(형식)이 되어 평범과 진부를 향한 하나의 양식(bon sens)혹은 패러다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론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는 단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형식으로만 보일 뿐이고 언제나 그것을 양식적 관점에서 모더니즘의 형상이탈로만 간주할 것이다.
 
그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미적 측면에서 그리고 조형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모더니즘의 최신 유행이나 양식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표현양식과 기법이 아닌 자아상실, 동성애, 여성해방과 같은 최근에 유행하는 예술적 명분이나 슬로건 위에 첨단 기법이나 구성상의 획기적인 기술로 제작된 사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적 행위는 사진을 음악으로 간주할 때 최신 대중가요 따라 부르기와 뭐가 다른가 ?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본 존재론적 테마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내용상의 의도는 사진적 행위에 있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분명한 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혹은 정의라고 하는 진술도 사실상 “설득”이 아닌가 ? 다시 말해 이러한 것을 이렇게 찍어야 한다, 그러한 분류의 대상은 사진의 재현 대상이 아니다, 혹은 반드시 이러한 논리와 형태로 찍어야 한다라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설득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명성은 흔히 즉각적으로 혹은 이미 또 다른 논리와 의미의 규칙(형상이탈 이후)을 만들기 때문인데 이는 양의 세계에서 끝없는 인식의 확장 즉 의미의 새로움과 규칙의 연속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재현의 대상을 그와 같이 분명하고 정언적인 형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개념에서 전위적인 새로운 규명에 관계하거나 혹은 특정한 대책이나 대안 없이 제시하는 비구체적인 진보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언제나 시간적인 전후를 가지는데 가령 어느 시점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앞과 뒤는 신구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서로 역사적인 상관 관계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분명한 역사성과 논리성을 갖고 또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양식(유행, 스타일, 방식 등)”을 동반하지 않는가 ?

  결국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분명한 사변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 전자의 경우는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물질적인 실체이고 후자는 후기구조주의 혹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사변적인 이해인 것이다. 예컨대 존재론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마치 숲 속에서 숲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우리들의 테마들이 묻는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에 대한 답을 굳이 밝히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의미와 논리의 눈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어두운 동공(ombres)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
1) 여기서 말하는 “이탈”은 우선 어원적으로 파괴 혹은 분해(deconstruction)라는 전복적인 용어에서 번역상 의역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현재의 형상(가치관, 규명된 것, 인식, 유행 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형상 위에서 보다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형상을 위한 사고의 이탈(소위 모더니티 즉 현대성)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은 흔히 말해 새로운 유행이나 패러다임 혹은 모든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데 모더니즘 계열에서 공통적으로 역사성과 미래지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인상파 그림들의 공통점은 전통 미술과는 달리 당시의 근대화된 사회의 특성(변화와 유동성, 도시의 삶에 있어 인상적인 것)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살롱 아카데미의 역사화 같은 전통적 주제와 규범을 거부하고 순수한 색채와 자유로운 회화적 표현을 우선으로 하면서 그 소재들은 농촌이나 들의 풍경보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에 관계한다. 마네의 경우 자연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하는 터전으로서 자연이었다(자연주의 사실주의 역시 상상이 아닌 인간 생활과 사실에 관한 주제를 화폭에 담는다). 물체의 경중이나 색조의 조절로 물체를 조절했고 변화무쌍한 반사광을 표현하여 고정된 외관이 아닌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근대의 삶을 표현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러한 정신은 20세기 전반기 아방가르드들의 새로움을 위한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결국 1950년대 소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공리를 보게된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의 형상이탈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아닌 탈-모더니즘의 새로운 계열적 이탈(포스트모더니즘)이 된다.

3) 인간이 직접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의식은 곧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 전환(종교개혁과 종의 기원)”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의 확립은 인간 내면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인식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히 주어지지만 스스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 결국 계몽사상은 인간에게 인간 이성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야기 시킨다.

4) 현대의 계몽주의는 좋아지기 위해서 변해야 한다는 또는 사회가 변하면 좋아진다는 무조건적인 믿음. 무엇 때문에 사회와 인간이 변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기술 물질 만능시대에 기술 개혁과 새로움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을 추구하는 진보들은 사실상 현 계몽주의(이성, 물질, 과학지상, 집단 획일주의자) 체제를 정당화하는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다.

5) 하나의 원칙 즉 “각각의 예술에서 유일한 고유의 영역은 그 매체의 천성(특수성)이 유일한 것을 갖는 모든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또한 하나의 방법 즉 “각 예술은 다른 예술에서 빌려진 효과와 방법들을 제거함으로써 순수정화(purification) 된다”라고 미국의 비평가 그린버그가 천명한 예술적 공리를 말한다. 결국 이러한 순수정화는 예술 창작에 있어 차후 엄격한 분석을 가지고 왔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그림, 조각, 사진 등 각 예술의 어떤 근본적인 존재(essence)를 믿었는데 이는 결국 각 매체의 고유의 양식과 스타일이라는 분명한 형상의 발전(모더니즘의 형상이탈)으로 간주했다.
 
 
글·이경률
(사진이론 박사)

이번호로 이경률 박사의 연재가 끝나고 새해부터 이경률박사의 새 기획물로 독자 여러분과 만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도판 :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그림자 (동판, 초)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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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테마 사진과 관객 그리고 푼크툼의 확장
 
  우리 세상은 수많은 신호(sign)들로 가득 차있다. 또한 우리의 삶 역시 끝없는 신호의 연속에 있다. 여기서 삶이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 현상만이 아닌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흔히 신호라고 하면 비를 알리는 먹구름의 출현이나 감기의 증세로서 두통과 같은 자연현상은 물론이고 교통표지판, 출발을 알리는 깃발, 컴퓨터 모니터의 아이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초인종, 개 짖는 소리 등과 같은 일상적 신호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것들로 일반적으로 학습과 약속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신호들이다. 사실상 이런 경우에는 신호라고 말하기보다 어떤 분명하고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일종의 문화적 코드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어떤 신호들은, 특히 상황 속에 나타나는 신호들은 그 지시대상이 일반적인 코드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다소 불확실하고 모호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의 신호 개념은 단순한 코드로서의 신호가 아닌 무엇을 암시하는 상황적인 신호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유와 원인이 분명한 하나의 약속이나 메시지로서 신호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리고 뭔가 불확실한 원인이나 본질을 암시하는 현상들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현상들 또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 예컨대 경제위기를 알리는 환율의 폭등, 교육의 위기를 알리는 조기유학과 사교육의 열풍과 같은 사회적 현상들, 심지어 어떤 상황에 대한 불길한 징조나 직감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신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하는 신호의 개념은 단지 통신수단으로서 신호만이 아닌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특히 정신적 현상을 중요시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본 일종의 존재론적인 “현상”(자연현상)1)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라는 같은 용어를 언급하더라도 위와 같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신호 즉 코드와 약속에 관계되는 신호(양의 세계)와 단지 불확실한 본질에 대한 일종의 암시로서 나타나는 신호(음의 세계)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자의 경우는 발신자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신호(발신 신호)인 반면 후자의 경우는 언제나 발신자의 불확실한 의미를 가지면서 수신자의 경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신호(수신 신호)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사실주의 형태로 출현하는 사진은 그 지시대상이 분명한 코드에 관계하든 불확실한 어떤 대상을 암시하든 여하간 그 자체가 신호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모든 기호학적 현상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또한 기호학적 논리(구조주의)로 사진의 모든 미학적 현상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사진을 기호학적인 분석에서 하나의 신호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진적 사실주의만이 가지는 특수성, 즉 현실에 대한 “절대적 복사(analogon)”와 그로 인한 “신빙성(Ca a ete/ 과거사실의 절대적 증거)” 쉽게 말해 사진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실에 존재하는 신호의 증거로 인식(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 발명 이후 몇몇 이론가들 특히 심리학이나 언어학에 관계하는 연구자들은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서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진의 개념은 대부분의 경우 전달적 매체로서 신호가 아니라 무의식이나 기억과 같은 사실상 인간의 형이상학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암시적인 신호에 관계하였다(이럴 경우 사진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이론적 은유로 간주된다). 또한 벤야민의 아우라의 발견에서부터 앙드레 바쟁의 자동생성 그리고 바르트의 집요한 사진적 추적 혹은 뒤봐의 “사진적 행위”나 클라우스의 “사진적인 것” 역시 사진을 “존재의 암시적 신호”로 간주하는 조건을 달고 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신호로서의 사진을 분석하기 위해 우선 기호학적 견지에서 신호의 일반 체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신호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부재 속의 존재의 암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의 출현과 부재의 관점에서 볼 때 흔히 지금 우리가 감지하는 무엇(제스처, 오브제, 사건이나 사실)이 거기에 있다(in praesentia)라고 하는 것은 출현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감지할 수 없고 부재하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무엇”이 있다(in absentia)라고 할 때 “알려주는 무엇”은 출현이 아닌 존재의 신호다. 라랑드(Lalande) 철학 사전에서 신호의 일반적 진술은 “하나의 신호는 감지 불가능하거나 부재하는 사물의 자리에 있는 정신적인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호는) 어떤 작동을 실행하기 위하여 다른 신호들과 결합할 목적으로 이용되는 하나의 물질적인 형태(figure) 혹은 감지할 수 있는 오브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퍼스(C.S. Peirce)가 제안한 신호의 일반적 정의에서도 “하나의 신호는 어떤 관계 혹은 어떤 명목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대신하는 무엇이다”2)라고 진술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정의들은 공통적으로 부재하는 무엇(지시대상 ref erent)을 알리기 위한 무엇(지시 혹은 참조 ref erence / 지시소 deictique)을 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신호는 홀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며 언제나 그물망과 같이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에 의해 통합된 신호 체제 속에 있다.3)

  신호들의 분류와 체제는 신호를 보는 관점에 따라 혹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신호는 공통적으로 어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신호를 앞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신호의 세계 즉 신호 체계는 신호와 그 지시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비에 대한 구름과 같이 지극히 자연적인 신호에서부터 심지어 어떤 자극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직관적인 신호들까지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예컨대 일반적인 분류에서 의도적인 신호들(생명의 신호, 우정의 신호)을 비의도적인 신호들(감기에 대한 열 혹은 피곤에 대한 창백)로부터 구별한다. 언어 소통에 따른 신호의 구별도 있는데 무언(sourds-muets)의 신호가 있는가 하면 다른 것들은 말(langage parle)로 언급되는 신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신호의 분류는 신호와 그 지시대상과의 작동(기능)적인 측면에서 본 신호의 정의 즉 논리적 관계에 따른 분류다.4) 이와 같이 상황적인 의미과정에서 본 신호의 정의는 “하나의 신호는 우선 그것이 행하는 것인데 이는 그 신호의 의미다”5)라고 정의한 19세기말 퍼스의 유형학적인 분류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퍼스는 신호들을 유사성에 의한 도상(icon)과 문화적 코드에 관계하는 상징(symbol)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특별한 신호인 지표(index)로 나누고 있는데(퍼스의 유형학적 분류)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신호체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퍼스의 유형학적 분류는 20세기 초 당시 새로운 학문이었던 기호학(semiologie)이 형성될 때부터 70년대 말까지 당시 지배적이었던 소쉬르(P. Saussure)의 기표와 기의로 대변되는 구조주의 관점 즉 신호의 이원론적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비주류)되었다. 그때까지 단지 신호의 특수한 유형으로만 인식되었던 퍼스의 존재론적 신호의 발견 즉 인덱스 재발견은 당시 70년대 말 코드와 의미 그리고 이데올로기 분석에 몰두했던 기호 - 구조주의자들을 소위 후기 구조주의의 삼원론적 신호체제(기표 기의 지표)로 이동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는 70년대 물질과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갖는 구조주의자들이 그들의 분석적인 모순과 한계 속에서 그때까지 구조주의의 지배적인 관점인 코드와 이데올로기의 논리적이고 의미론적인 분석을 넘어 오랫동안 잊혀졌던 존재론적 대상(음의 세계)의 추적의 가장 좋은 이론적 배경으로서 퍼스의 지시론적 개념을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진적 사실주의(사진과 영화의 영상 이미지)는 그때 많은 연구자들(대표적으로 바르트와 에코)의 이러한 추적에 있어 가장 좋은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6)

  여하간 그때부터 사진을 이해하는 관점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상징과 코드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단순한 자국으로만 이해되는 특수한 매체로 생각하는 관점 이는 곧 의미론적 관점에서 지시론(혹은 존재론)적 관점으로의 개념적인 이동을 말한다. 가령 어떤 작가가 장미를 찍은 사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진은 어떠한 조작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장미를 재현하고 있을 때 기호학적 측면에서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재현된 장미는 도상(icon)으로서 그 재현대상과 분명한 유사관계 속에서 대상의 절대적 복사물(현실의 거울로서의 사진 P. Dubois)로 인식되는 관점이 그 첫번째이고  두번째 관점은 찍혀진 장미의 해석학적인 측면이다. 즉 장미는 문화적 상징(symbol)으로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정열이나 사랑과 같은 공통된 의미를 던지는 하나의 코드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인 관점(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 P. Dubois)은 언제나 작가와 재현된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사진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때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적 견해와는 전혀 상관없는 거의 일방적인 사진 메시지(의미의 폭력)를 부여받는 결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하나의 인덱스로 볼 때 찍혀진 장미는 모래 위의 남겨진 발자국처럼 단지 사진적 장치7)에 의해 생산된 자국(trace)으로 출현한다(현실의 자국으로서 사진 P. Dubois). 이때 장미는 마치 모래 위의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규정할 수 없듯이 특별히 사진의 경우 작가가 왜 찍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사실상 전혀 알 수 없다. 즉 이것은 특정한 “의미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진은 작가의 번역이 아니라 대상의 선별에 의한 절대적 복사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작가가 재현한 장미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름다움 사랑 정열과 같은 공통된 코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경험과 주관적 인상을 배경으로 하는 통속이나 속물 혹은 환상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상에 대한 재현일 수 있다.
 
그때 재현된 대상 즉 주제로서 선별된 장미는 산 위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같이 단지 암시적인 신호나 징후에 불과할 뿐이고 그 지시대상은 대부분의 예술사진에서 대중의 코드를 초월한 무의미의 메시지를 은닉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심벌이나 상징적 문화적 코드로만 이해될 것이고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만약 재현된 장미를 문화적 상징의 상용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비평가(텍스트)로부터 강요당한다면 장미는 사실상 판박이 이상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혀진 장미는 재현된 상황 속에서 사진의 신빙성이 유발시키는 사진의 “실용성(pragmatique)” 즉 “푼크툼의 확장”에 의해 관객의 논리와 의미 사이의 공백을 뚫고 작가의 진정한 예술적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은 의미와 의미 사이에 은닉된 바로 이러한 탈코드의 추적에 있다. 그것은 벤야민의 아우라의 발견 이후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누명으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탈코드 메시지에 대한 존재론적 재발견인 셈이다.    

  이와 같이 사진을 자국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오늘날 사진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놓고 있는데 그것은 “사진은 본질적으로 발신신호가 아니라 수신신호라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사진 이미지의 개념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볼 때 사진적 장치의 모든 진술은 어떤 이미지든 여하간 인간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사진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 개념적 본질에서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날로그(analogue)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digital)이다. 우선 아날로그적인 본질은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유사관계에서 사진을 이해하는 개념(도상) 혹은 어떤 메시지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시각적인 작품으로서 이미지를 생각하는 개념(상징)이다. 다시 말해 어떤 양식 혹은 규정된 의미로부터 재현에 일치하는 모든 것을 사진 예술로 이해하는 사고들을 말한다 : 사진 이미지는 기술적 계열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단지 코드화 되어질 뿐이라는 사고, 사진 읽기에 있어 모든 기호의 기능적인 측면을 우선으로 하는 언어학적인 사고 방식 혹은 우연과 특이함에 대한 발견의 즐거움. 이와 같은 사고들은 유사(analogue)와 재현을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간주되는데 인식론적 측면에서 사진과 그림의 구별(특히 조형적인 측면)을 모호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방식에 의한 모든 사진적 분석은 결과물로부터 방출되는 의미적인 “발신”에 있는데 그럴 경우 사진의 대상은 거의 대부분 특이함과 이상함에만 관계한다. 그때 사진은 신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발신신호가 된다.

  그러나 사진을 수신신호로 보는 것은 사진의 디지털(지시 혹은 지침)적인 본질에 관계하며 사진의 이해와 분석을 작가와 사진의 관계가 아닌 사진과 관객의 관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사진만이 갖는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개념 즉 한편으로 퍼스의 기호학적 카테고리의 인덱스와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수신신호의 특징인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P. Dubois). 사진 이미지는 어떤 메시지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히 화학-물리적인 결과 즉 “자국”으로 이해되는 개념으로 작품의 결과로서 메시지의 표현이 아니라 실질적 사건이나 사실의 지표(index)로서 지시적인 이미지(흔히 표상이라고도 한다)일 뿐이다. 그 점에 관해 필립 뒤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 “사진적 이미지는 그 사진이 있게 한 행위 그 자체 이상 생각할 수 없다 (...) (재현된 사진 이미지의) 지시적인 상황과 분리될 수 없는 일종의 절대적 행위-이미지로 간주되는 사진은 그것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실용적인 본성을 단언하는데 결국 사진은 우선 그 지시에서 의미를 찾는다”8).
 
다시 말해 사진은 사진적 행위의 결과로서 출현한 자국 위에서 우선적으로 객관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 자국의 상황(연기 발자국 혹은 장미 등의 인덱스)에 관련된 관객의 주관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예 도판 1). 그래서 사진 이미지 그 자체는 사실상 메시지가 아니며 의미적 관점(해석이나 번역)에서 사진은 텅 비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의미적으로 텅 빈 자국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주관적 의미로 채워질 것이다. 그때 사진 이미지는 관객의 연상 유도체 역할을 하는 셈인데 이는 사진적 사실주의의 신빙성이 관객에게 강요하는 “실용적인 유연성”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찍혀진 자국의 실용적 차원은 사진적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관객으로의 일방적인 방출이 아닌 수신자의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수신신호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진적 신호를 방출적 차원에서 정의하는 기호학적 틀(구조주의)에서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를 정확히 분석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순이고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영상 이미지의 출발점이 되는 사진은 본원적으로 그 절대적 신빙성으로 인하여 관객의 주관적 해석 즉 자신의 경험과 경향을 통하여 연상의 환유적 확장(푼크툼의 확장)을 갖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진 이미지를 더 이상 일방적인 메시지의 방출이 아닌 수신 신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흔히 우리가 사진의 제한된 프레임에서 재현된 대상이 주는 사진의 연속성도 결국 관객의 주관적 연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은 특징적으로 환유적 확장(주관적 “경향”)을 가지는데 흔히 대중매체 (특히 현시광고)가 관객에게 강요하는 연상의 은유적 확장(의미와 상징의 연속 : 일방적인 의미전달의 폭력과 조작을 동반하는데 이는 오늘날 주체상실 혹은 자아상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과는 대조를 이룬다(움베르토 에코). 지하철 안 광고사진이 보여주는 지극히 평범한 대상이나 전혀 특이함이 없는 제스처라 할지라도 거기에 관객의 체험적 의식이 투영되는 순간 자신의 회한과 아쉬움에 눈물을 적시기도 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관객의 주관적 연상의 폭발 즉 푼크툼의 확장에 빚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수신신호로서 사진을 예술적 매체로서 보다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메시지로 만들고 있다. 

  결국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사진적 메시지는 의미와 의미의 연속적 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 사이의 어두운 동공에 은닉된 존재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어두운 동공(음영의 존재들)을 환히 비추는 것 역시 주관적 연상에 의한 감정의 폭발이며 또한 필립 뒤봐는 “사진적 행위”에서(80년대 보다 발전적인 문맥에서) 사진은 사진 촬영에 있어 전후 그리고 촬영 순간의 모든 조합에 의해 형성되는 “의미의 증거(une preuve de sens)”가 아니라 단지 “존재의 증거(une preuve d'existence)”라고 언급하고 있다. ●
 
<주>
1) 인공의 개념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자연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물질중심의 양의 세계에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적 현상으로만 파악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 강 바다 비 바람 홍수 가뭄 등과 같은 물질적 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리와 인식을 벗어난 음의 세계까지도 인정하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의 개념은 단지 물질적 대상 뿐만 아니라 어떤 현상의 속성 혹은 천성과 같은 본질적인 것 심지어 절대자로서의 신, 영감, 직관 혹은 통찰력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상까지도 자연으로서 간주하는 보다 거시적인 정신적 개념이다(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신스콜라주의자들과 같은 존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개념은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단순한 물질적인 자연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개념은 현상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에서 이해되는데 이는 논리와 실증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고 현상을 본질과 동일시하는 유물론자들의 자연개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C. S. Peirce, Ecrits sur le signe, Seuil, Paris, 1978.

3) Martine Joly, Introduction a  l'analyse de l'image, Nathan, coll., Paris, 1993 / Martine Joly, L'image et les signes, approche s miologique de l'image fixe, Nathan, coll., Paris, 1994, Chapitre I 참조

4) 예컨대 “신호는 그 두 개의 안면 사이의 서로 다른 논리적인 관계들을 놓고 있는데 에코의 예를 빌리자면 이러한 관계들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 x = x 이다는 일치(identificate)관계 / 붉은 깃발 + 반달 모양의 낫 + 망치 = 공산주의라는 동등(equivalence)관계 / 불이 있기 때문에 연기가 있다는 연역(deduction)관계 / 혹은 총이 있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귀납(induction) 혹은 추론(inf erence)관계.” Umberto Eco, Semiotique et philosophie du langage, trad, fr., PUF, Paris, 1988.

5) 같은 책

6) 사실상 퍼스는 지표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사진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이론적 모델인 지표적 속성(index)을 위해 도입한 것이지 사진이 함축한 존재론적 이론이나 의미를 초월하는 무의미(non sens)를 설명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70년대 말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그들의 이론적 모델로서 도입한 것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본 사진의 지표적 속성 그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는 존재론적인 메시지 즉 "탈코드"의 추적이었다. 그래서 사진-인덱스론은 퍼스의 인덱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사진적 사실주의를 하나의 기호체제(사진은 모든 신호의 유형을 포함한다)로 보았을 때 인덱스의 지시론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이해하고 읽는 관점을 말하고 있는데 결국 사진은 마치 산 위에서 피어나는 연기에 비유되고 그 지시대상은 재현된 신호와의 관계에서 일치와 동등이 아닌 다수의 원인성을 이끄는 연역이나 귀납적인 추론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의 해석을 하나의 정답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경험적인 경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7) 이때 사진기는 인간 행위의 수단으로 단순한 기계적 역할과 구분하기 위해 “사진적 장치”라는 용어를 쓴다, Jean-Marie Schaeffer, L'image precaire, du dispositif photographique, Edition du Seuil, Paris, 1987.

8)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han, paris, 1990, chapitre II
 
글·이경률
(사진이론 박사)
 
도판 1 : 로버트 프랭크, US 285 New Mex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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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20세기 현대 사진의 출발을 1950년대 사진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영상사진과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거리 사진의 출현으로 잡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건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진으로부터의 “이탈”을 들 수 있는데 흔히 전자의 이탈을 재현 대상의 내적 혁명이라고 할 때 후자의 이탈은 외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 중 보도사진의 사건-이미지가 아닌 시적 언어로서의 사진 이미지를 말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영상사진 계열은 그후 특히 1970년대 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나아가 후기 구조주의(기호- 구조주의)의 탁월한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①

사진을 하나의 코드나 의미 전달을 위한 언어로 간주한 전통적 개념과는 달리 프랭크 이후 새로운 사진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진을 표현적 언어로서 이해하였고 거기서 단순한 의미론적 해석이 아닌 사진을 완전한 하나의 “감각”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적인 재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프랭크를 따르는 거의 대부분의 젊은 사진가들은 더 이상 미국 전통사진을 지배해 온 인본주의나 대자연의 예찬과 같은 사건 중심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인 문제, 꿈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문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문제 그리고 거의 추상적인 문제를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미국 전통사진의 주류에서 볼 때 유럽적 경향으로 간주되었고 점진적으로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와서는 순수 사진 영역에서 지배적인 새로운 사진 경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듀안 마이클스, 레 크림스, 랄프 으젠 미트야드, 랄프 깁슨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전후 미국 작가들 중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현대주의자의 혈통을 갖는 작가는 예외적으로 로버트 프랭크와 그의 동업자이자 후배인 랄프 깁슨(Ralph Gibson)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스위스인 프랭크가 실존주의적인 유럽적 경향을 미국에 이식시켰다면 미국인 깁슨은 자신의 이태리 시리즈 사진을 통해 이태리적 경향을 미국이 아닌 오히려 유럽에 이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깁슨의 유럽적 혈통은 건축성과 초현실성에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 - 30년대 만 레이(Man Ray)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과 러시아 구성주의 사진과 앙드레 케르테즈(Andre Kertesz) 계열의 초현실주의 사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과 빌 브란트(Bill Brandt)의 강렬한 리듬과 볼륨, 공간의 질이 창조하는 초현실성 또한 거대한 풍경이 보여주는 큰 구도(Close up) 등이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빌 브란트는 “꽉 찬 물질은 빈 공간의 신비를 연결하고 바다의 수평선은 언제나 시적 인상을 준다”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의 “단편 미학”과 큰 구도의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사진가들의 모델이었던 프랭크의 강렬한 심적 동요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깁슨의 사진은 프랭크의 경우처럼 허무, 소외, 번뇌 등의 많은 정신적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성이나 관능과 같은 사진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전통적인 취향을 보였다. 결국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미국 사진의 맥과 새로운 유럽적 경향을 접맥하면서 특히 1970년대 이후 사진의 또 다른 경향을 세웠다.
 
랄프 깁슨은 1960년대  “사진 행위는 더 이상  어떻게 찍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에 있다”고 선언했다. 즉 사진적 의도는 찍혀진 대상(objet photographiee)이 아닌 찍혀진 주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대답은 “감각 안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1970년대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3부작 시리즈(Triologie)인 <몽유병자(The somnanbulist, 1970)>와 <바다 기행 (Days at Sea 1973)> 그리고 <데자 - 뷰(D eja - vu, 1975)>에서 그는 유럽적 경향인 건축적인 단순함과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년 후 다시 깁슨은 “주제는 단지 사고의 반사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사진은 시각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각의 질이다”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 말은 사진이 표명하는 것은 감각에 의한 비구체적인 추상 즉 “사진적 추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추상은 형태가 없는 무형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에 있어 추상의 표현은 색이나 선의 조합에 의한 그림의 추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의 신호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재현된 신호를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현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추상적 표현을 외적 형상(forme)으로부터 재현된 내재적 형상(figure)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형상을 인덱스라고 하고 내재적 형상은 그 인덱스의 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은 한 마디로 공통된 문화적 실행과 사는 방식 그리고 살아온 경험의 외적 인덱스라고 하고 그 지시대상은 단지 감각으로만 포착되는 시적 언어를 말한다.
 
흔히 사진에서 “깁슨적이다”라고 말하는 사진의 독특한 특징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의 사진들은 다소 지나치게 요약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반-의미와 인덱스 그리고 열린 공간의 크게 세 가지 개념적인 특징을 가진다. 우선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전혀 다른 반 - 의미적인 사진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읽기에 있어 사진을 의미로 본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게 위장된 그러나 임의적으로 고착된 기능주의이고 전체적으로 의미의 부조리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모든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이(대체로 즉각적으로 왜곡 조작될 수 있는) 의미적 관계에 의해 서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구조주의)은 부조리적 사고이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왜냐하면 출현 자체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현되는 장면의 주제가 아니라 감성(affect)과 성(性)적 에너지인데 이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묶이지 않는다. 예컨대 모자 벽 신체와 같은 단편적인 장면(사진 1)에서 사실상 재현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제가 없다. 이러한 주제의 부재는 결국 반-다큐멘터리적인 의미의 박탈을 가지고 온다.
 
전형적인 순수사진인 깁슨 사진을 흔히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재현된 대상으로부터 의미 분석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 시인이 방출하는 음색을 음미하는 것과 같이 그 대상으로부터 환기되는 무엇을 포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진행 과정은 정확히 시를 읽은 것과 같은 반-의미적 읽기에 관계한다. 예컨대 우리는 잡지 기사와 시를 혼동하지 않는다 : 잡지 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언어가 지시하는 분명한 의미들의 조합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시를 읽을 때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적인 조합은 수정되어 근본적으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때 의미적인 조합은 단지 시적 메시지의 배경을 이룰 뿐이고 시가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생기는 여운과 같은 일종의 감각적 추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사진 역시 그 읽기에 있어 분명히 다르다. 이 두 종류의 사진 읽기는 비록 같은 물리적 진행 과정에서 시각적으로 읽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보는 방법(la maniere de voir)”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각적이든 의미적이든 무엇을 “보여준다”라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가를 말하고 반면 순수 사진가는 언제나 의미와 상징의 영역을 넘어 응시자로 하여금 무엇을 “환기시키기”를 원하는 사진가이다.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에서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을 충분히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수사진은 관객에게 대상으로부터 어떤 특정한 은유적인 것을 연상하도록 (거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인 환유적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감동은 사실상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환유적 확장 과정에서 삼인칭 “그(He)”는 응시자 각자의 경우를 말하는 일인칭 “나(I)”로 이동되고 또한 거기서 서로 서로 반죽되어 결국 우리들 공통된 감각인 “우리(We)”로 이동되는 의미적 변화가 있게 된다.②

랄프 깁슨의 사진 혹은 깁슨 스타일의 사진이 가지는 두 번째 개념적인 특징은 인덱스화(indexation)이다. 단편적인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큰 구도 등은 인지 가능한 보이는 세상의 단편으로부터 안 보이는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몸통 즉 형이상학적 실체를 지시하는 인덱스(index)이다. 여기서 인덱스는 언제나 외적 형상의 세계로부터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사진의 위대한 특징인 “인덱스적 이중 구조(시각과 환기 동시에)”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사진은 인덱스화 된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보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보라”라는 무언의 자동생성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사진에서 하늘로 가득 찬 틀로부터 나오는 팔, 돌려진 머리 뒤로 여전히 흘러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 등이 지시하는 것은 단지 무언의 어떤 출현을 증언하는 침묵인 셈이다. 결국 사진의 이중성은 마치 양복의 겉감과 안감과 같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의미적인 영역인 상부구조와 그것이 지시하는 비 인식의 존재이자 형이상학적 존재의 영역인 하부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분으로부터 무언의 몸통을 지시하는 것을 단편화 된 미학 즉 단편 미학(fragmentati
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프레임에 의해 잘려진 단편 즉 사진의 부분(프레임 내부)이 틀 밖의 동체를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단순한 사진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상황의 단편이 인지 불가능한 감각적인 몸통을 지시하는 미학을 말한다. 그것은 비 물질적이고 환기적이고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인 음색을 말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을 단적으로 말해 상부의 인지 대상이 하부의 존재론적 대상을 지시하는 인덱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얼굴은 그 동체를 대변한다”라는 “얼굴화 된 세상(Le monde visagefi /질 들뢰즈)”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예컨대 시적 음색이나 음악의 순수 혹은 형용할 수 없는 귀족성이나 세련미 등은 무형의 존재로 언제나 그 실체를 대변하는 인지 가능한 단편 즉 일종의 표현적 대용물을 돌출 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돌출은 마치 빙산의 하부에서 수면에 나온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인식 영역으로 돌출된 단편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에서 이해된다.
 
한편으로 볼 때 깁슨의 사진에서 도장, 낙인, 상형문자, 웨이브 친 깃발, 이데오그램,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자물쇠 채워진 문, 포도주 병 등의 단편화된 많은 형태들은 모든 감정적 에너지와 다양한 신호를 방출시키는 출발점으로서 현실에 돌출된 표면적 형태(표면화된 형상)들이다. 이때 단편은 그 전체보다 더 완전하다. 예컨대 “깁슨은 미켈란젤로처럼 잘려진 조각이 완전한 조각보다 더 조각적이라고 생각했다”③  또 한편으로 볼 때 렌즈나 틀의 단순 구성에 의한 큰 구도 즉 클로즈업(Clouse up)은 결국 이미지에서 극히 안정적이고 분명한 진술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진술을 가진다.
 
 깁슨의 사진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상 생활의 스냅사진과 같이 흔들림이나 율동 혹은 흐림에 의한 암시적인 움직임(file)은 전혀 없다. 반면 이미지들은 분명한 명암 대비(큰 대각선 명암, 줄 무늬, 얼룩무늬, 직조 등)로 나타나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내용을 교묘히 감싸는 “표면적 조건”(Regis Durand)을 만든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에 거슬러 싸우는 사진의 전투와 죽음과 같은 정(靜)적인 유령을 격리시키는 움직임의 제스처에 익숙해 왔다. 응고된 엄숙함이 보장하는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오싹하게 한다” ④  이와 같이 극히 정적인 이미지의 출현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형이상학적 감정을 발산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감정 - 이미지(image-affections)”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 말은 “(응고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임이 감각과 행위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이미지” ⑤  를 말한다.
 
끝으로 깁슨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세 번째 요소는 특별한 공간 구성에 있다. 그의 사진은 우연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사진으로 마치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이 철저한 건축적인 사고로부터 형성된다. 그래서 사진들의 공간은 건축적인 찬란함과 조각적인 경향 그리고 그래픽적인 완벽한 형식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건축적인 장소로 이해된다(사진 2). 또한 사진의 지시된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진화된다.
 
거기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포토-스틸(photo-stills) 형식의 프레임 즉 큰 구도(Clouse up)에 의한 단편화는 대상을 단지 가깝게 보여지기 위한 강압적인 요소가 아니라 확대된 대상이 출현하자마자 모든 문맥과 서술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프레임 밖으로 방사하는 어떤 강렬한 힘을 발생시킨다. 이때 표면은 수수께끼가 되고 그 공간은 “아무 공간” 즉 “완벽히 이상한 공간, 가장 순수한 자리로 잡혀지는 감정적인 공간이 된다. (...) 이러한 공간은 이미지를 지시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미지를 연상의 다양한 조합들로 열어주고 또한 이미지를 출구에서 추상적인 단계로 지나게 한다” ⑥  이는 곧 열린 공간으로의 도약이다.
 
앞서 말한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는 깁슨의 에로틱한 사진들이다. 특히 깁슨의 후기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몇 몇 누드(에로틱) 사진들은 관능적 욕구를 보다 암시적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 예컨대 장면들은 에로틱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재현이 아닌 여자 신체의 단편들을 보여 주면서 관능적 욕구를 지시적으로 얼굴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서 재현상의 주제로 보여지는 허리끈, 붉은 손톱의 여자 손, 검은 스타킹 등의 단편적인 성적 물신들(사진 3, 4)은 단순한 자료적인 진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얼굴화 된 “신체-얼굴들(corps-visages)”이다. 이는 비 물질적 감성과 성(性)적 에너지의 분출구임과 동시에 그러한 감정의 전율(누구나 공통된 성적 욕구)을 지시하는 사진적 자국(index)이다.

결론적으로 깁슨의 사진은 보이는 세계의 시각이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의 촉각이 된다. 대상과 관객 사이에서 볼 때 재현된 단편은 관객으로 확장되는 존재론적 이동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동은 인식의 상부구조에서 비 인식의 하부구조로, 의미의 영역에서 탈-의미의 영역으로, 진술된 단편에서 내재된 몸통으로의 이동을 말한다. 깁슨의 사진은 결코 형식주의나 표현주의적인 재현이 아니라 단지 인덱스화 혹은 얼굴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상징이나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징후적이고 또한 시적인 “생성-얼굴(devenir-visage)”이고 그때 사방으로 방출되는 감각의 음색은 “사진적 추(abstraiphotographiq
ue)”이다. ●
 
<주요 참고도서>
Courant Continu, Ralph Gibson, Marval, Paris, 1998.
L'Histoire de France, Paris Audiovisuel, Paris, 1991.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L'Oeil flottant : Un voyage vertical, Paris Musees audiovisuel, Paris, 1986.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주)
① 물론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 모델로서 사진 담론은 실질적으로 퍼스(C. S. Peirce)이론과 바르트의 참조주의가 도입되는 1980년대 초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미국 구조주의 분석 중심의 담론에서 프랭크 사진의 분석은 존재론적 시각이 아니라 보다 의미론적인 내용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② 이미지의 장면을 떠나 사방으로 방사되어 퍼지는 연상의 확장 이것을 필립 뒤봐는 “푼크툼의 확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기억의 확장은 관객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확산되는 환유적 확장이다. 역으로 은유적 확장은 분명한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광고나 의도된 대중 전파 매체의 일방적 전달(문화적 사회적 코드)에 관계한다(움베르토 에코).

③ 이러한 단편 미학은 흔히 미술의 미니멀주의와 비교된다. 조각에서 미니멀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관객에 의해 선택된 공간 속으로 합병될 수 있고 또한 사진의 경우도 역시 사진 이미지가 관객이 선택한 주관적 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창조적인 측면은 사실상 전혀 다른 데 있다. 깁슨의 사진에서 중요한 점은 미니멀 조각처럼 단순화 된 형태와 그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로부터 환기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내재적 형상)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깁슨의 사진에서 단순한 볼륨은(기하학적 특징)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적 언어는 단순한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④ Regis Durand, “un regard en reponse : le monde-visage de Ralph Gibso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p. 24.

⑤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은 레지 뒤랑의 “얼굴 개념”(들뢰즈의 분석에서 차용)을 설명한다. 이 말은 질 들뢰즈의 운동-이미지(L'image - mouvement)와 같은 개념을 가지며 특히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를 “탄착(impact)”이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말하자면 부동의 진술) 남은 잔여 찌꺼기(혹은 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개념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탈코드, 무의미)이다”.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p. 97, in Regis Durand, op. cit.

⑥  Gilles Deleuze, op. cit., p. 154-155.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Chiaroscuro 1974-97 시리즈 중
(사진 2) Quadrants 1975 시리즈 중
(사진 3) Infanta 1977-98 시리즈 중
(사진 4) L'Histoire de France 1972-98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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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테마 공유된 주관성과 감각의 뇌관
 
소위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자신의 순수한 주관적 메시지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편적 앎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된 객관 타당한 코드에 관계하거나 혹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순수한 감각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슬그머니 이미 공론화된 이슈나 의미화된 논리적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이 객관적이라는 것과 주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구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 타당성에 대한 논리적 사고로부터 온 일종의 착각이다. 엄밀히 말해 어떤 사실이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다, 혹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다 라는 것은 집단사회의 획일적인 사고로부터 강요된 편견적인 인식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나 혹은 타인이 생각하는 것을 어떤 특정한 기준이나 규정에 의해 일종의 흑백논리 방식으로 객관과 주관을 구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형성된 보편적인 앎(지식)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를 쉽게 판단하고 있다.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흔히 이러한 원칙에 의해 작가는 스스로 논리적 이유를 세우면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객관적인가 혹은 주관적인가를 판단한다. 소위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자신의 순수한 주관적 메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편적 앎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된 객관 타당한 코드에 관계하거나 혹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순수한 감각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슬그머니 이미 공론화된 이슈나 의미화된 논리적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메시지가 일반적 경향을 갖는 대중과 완전히 유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보편 타당한 논리를 요구하는 대중과의 관계에서 관객의 최소한의 공론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작가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표현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적인 사고(인식론)를 가지는데, 사실상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창작적 출발점을 이러한 대중과의 공론을 위해 자신들의 경험이 아닌 외부로부터 형성된 앎의 체계에 의존하기도 한다. 특히 시각적 표현에 있어 단지 복사적 진술만을 허락하는 사진의 경우 이러한 두려움과 스스로의 강요는 더욱 더 분명하다. 이는 예술적 행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가 의식에 관계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객관이라는 개념은 대중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을 중심으로 볼 때 외부 즉 집단이 보편적으로 규정해 놓은 인식론적 사실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타인과 교감할 수 없는 비논리적이고 개인적인 사고의 총체를 주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과 주관은 관점에 따라 서로 상대적이고, 존재론적 측면에서 볼 때 “생성-진화(devenir-forme)”적인 관계에서 이해된다. 쉽게 말해 이러한 두 영역의 분명한 구별은 사실상 모호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병리학적인 콤플렉스나 혐오 혹은 지나친 편견 등의 극단적인 주관성과 학문적인 관점에서 통용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객관성의 구별은 분명 반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성은 이러한 구별에 필연적인 걸림돌이 된다. 객관과 주관에 대한 개념상의 모호성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한편으로 볼 때, 집단 사회에서 규정해 놓은 객관성은 사실상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 편견적인 객관성이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는 인디언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발견자가 아니라 침략자일 수 있듯이 또한 종교적 이슈를 같이 하는 교회공동체에서 그들의 정당한 행위와 공통된 사고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관적 사고로 볼 수 있듯이 한 집단 밖의 다른 집단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정당성과 객관성은 일종의 집단 이기주의의 묵인된 객관성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모두에게 감각적으로 인정되는 공통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소 보편적 측면을 갖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집단의 안정과 이익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확신(특히 집단의 감시와 통제)을 위해 그러한 사실들이 객관 타당한 의미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불관용)1)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주관적인 사고로 간주된다. 그럴 경우 그것은 말하자면 공통된 사견 즉 공유된 주관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볼 때, 객관과 주관에 대한 획일적 판단의 맹신은 그들의 개념에 대하여 불변하는 어떤 정태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소위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객관적 규정은 “무엇은 무엇인 것 같다” 혹은 “무엇은 무엇처럼 보인다”라는 주관적 감각(figure)에서 진화된 형상(form)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규정된 “무엇인 사실”을 절대적 객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한 징후의 형태로 현실에 직접 출현하는 존재적인 그 무엇(figure 내재적 형상 혹은 안 보이는 세계의 실존)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하나의 감각적 실체로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주관적 사고의 비 구체화된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성은 아직 형상으로 공인되지 않았지만 이미 객관성의 가능태(態)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지금 현재 태양은 불변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화 과정에서 변전하는 모습이다 : 태양은 그 생성 단계인 우주의 빅뱅에 의해 탄생한 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 젊은 항성으로 존재하지만 그 진화 과정에서 최후의 항성인 백색 왜성을 거쳐 결국 소멸의 단계를 가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싼 많은 시물라크르의 지표들(fiure의 주관적 출현) 역시 생성의 단계에서 막 출발되어 각기 다른 형상들(객관)로 진화하는 과도기적인 존재들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자 개인의 주관적 감각 속에서 출현하는 지표들은 진화적인 관점에서 사실상 잠정적인 객관인 셈이다. 작가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감지된 많은 주관적인 감각들은 간혹 전혀 문화적 코드가 다른 것을 배경으로 하는 특별한 경우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거의 똑 같은 일상 생활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감각들은 이미 공유되고 인정된 주관성들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관객과 교차되는 경험에 관계하고 그때 사진은 우리 모두의 경험적인 혹은 상황적인 전달체로서 그 메시지는 대중의 객관성 그 바로 밑 문턱에 있는 셈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의 출현은 이미 알고 있듯이 절대적인 과거 사실을 말하는 시각적인 출현(analogon 외시)과 그 출현이 함축하는 의미적인 출현(signification 내시 혹은 공시)의 서로 다른 두 요소의 조합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후자의 출현은 다시 코드화된 앎을 배경으로 하는 의미 체계와 사진이 외시하는 것으로부터 직접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탈 코드의 무의미 체계로 나누어진다. 결국 사진은 퍼스의 신호체계와 같이 절대적 복사를 말하는 도상(icon)과 의미 체계를 우선으로 하는 상징(symbol) 그리고 원인성에 의한 지표(index 징후)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사진은 대상과의 절대적 닮음 이외에도 상징과 징후의 또 다른 메시지들을 가지는데 특히 징후로서의 물리적 자국을 말하는 지표 혹은 인덱스는 그림이 가질 수 없는 사진만이 가지는 특별한 재현 체계(자동 생성 혹은 사진적인 것)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마치 삼중으로 된 샌드위치처럼 단지 관점의 변화에 따른 사진의 이해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사진 그 자체의 분류 기준은 아니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볼 때 작가의 입장에서 어떤 대상 혹은 어떤 현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할 때 세 가지의 유형상의 경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첫 째의 경우는 자료, 보고, 탐구, 등의 목적을 위한 대상이나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복사적 진술(도상)을 말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그림의 재현 대상(초상이나 역사그림)이 아닌 오늘날 거의 사진에 의해 독점된 재현 방식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의미와 함축의 시각적 재현(상징)으로 그 재현의 출발점이 비록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객관적으로 인정된 문화적 사회적 코드와 앎에 관계하는 경우이다.
 
흔히 이러한 경우에 사진은 하나의 언어로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전달적 기능을 수행하며 그때 작가의 의도는 특정한 하나의 집단 소위 대중의 객관적 인식과 이데올로기 달리 말해 예술적 언어가 아니더라도 일반적 이론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외재화된 형상)에 관계한다. 예컨대 사진의 주제로서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소외를 암시하는 물질사회의 병폐들(자아상실, 저항, 차별 등)은 오늘날(21세기) 더 이상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이미 명분과 이슈 혹은 타당성을 말하는 이론적인 객관성으로 함축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제들이 새로운 예술적 유행을 형성하면서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하나의 의미를 규정하는 사실적 보고나 추상적 언어에 대한 시각적인 번역으로 간주된다.
 
그럴 경우 이러한 주제들은 집단 사회에서 묵인된 보편 타당한 객관성 즉 이미 외재화된 형상임과 동시에 진부와 평범의 진화 단계로 발전하는 진행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명분과 이슈(예컨대 정체성, 페미니즘, 동성애, 주체상실 등 80년대 이후 새로운 예술적 주제들)로부터 재현된 사진은 비록 작가의 경험에 의한 재현이라고 할지라도 창작의 본원적인 의미와는 달리 대중의 객관적 인식에 대한 반복과 확인적 작업(새로운 의미의 승인과 확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진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진들이 표현적 측면에서 예술적 가치를 상실한 무의미한 사진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주제가 아직 의미의 옷을 입지 않은 생성(내재적 형상)의 형태로서 진정한 창작의 대상으로서 간주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의 의도는 엄밀히 말해 공유된 주관성이 아닌 이미 혹은 새롭게 묵인된 객관성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대상을 재현하는 세 번째의 경우는 앞서 말한 일반적인 객관성 즉 외재화된 형상이 아닌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잠정적인 의미의 가능태를 추적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산 위에 피어나는 연기나 모래 위에 낙인된 발자국과 같은 징후(index)의 포착 즉 “생성의 재현”으로 인식의 영역 주변에서 부유하는 음의 존재(음영 ombres)에 대한 추적2)을 말한다. 이러한 생성 혹은 내재적 형상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일반적으로 현상학적인 방법으로만 추적 가능할 뿐인데 그때 카메라는 감각의 지팡이 역할을 하며 또한 찍혀진 대상은 그 생성의 흔적이나 자국 이외 어떠한 객관적 의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곧 묵인된 객관성이 아닌 인정된 주관성을 말한다. “사진은 단지 암시적 출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모든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생의 고뇌, 번민, 욕망 등의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을 함축한다”라고 뒤안 마이클스(Duane Michals)가 사진을 새로 정의하듯이(사진1) 의미의 생성으로서 내재적 형상(figure / forme immanente)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되고 추상화된 형태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잠정적이고, 예언적이고, 주관적이고, 정신적이고 상상적인 무형의 형상”3)을 말한다. 그림의 경우 이러한 무형의 형상들은 작가 자신의 직감과 감각에 의해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의 경우는 대상의 복사적 진술에 의한 징후 즉 생성의 누설(자동생성)로만 허락될 뿐이다. 사진은 “의미 이전에 인덱스”4)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객관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누설5)을 말한다.

  그래서 작가들의 진정한 사진적 재현 대상은 외부로부터 형성된 자신의 앎과 지적 체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내적 관찰로부터 포착된 감각(생성의 징후) 즉 지극히 주관적 인상이다. 달리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의 외관이나 장면의 재현이 아닌 자신의 측면(aspects de soim me)에 대한 시각화”6)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성은 흔히 공통된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보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징후와 관계한다. 이러한 내재적 형상을 누설하기 위해 작가는 한 장의 사진에 가장 즉각적인 징후 말하자면 폭탄의 뇌관을 장치하는데 이러한 감각의 뇌관을 흔히 푼크툼, 아우라, 탈 코드, 시니피앵스라고 언급하고 있다.
 
혹은 뒤안 마이클스 사진의 경우처럼 여러 장의 사진을 이용하는 시퀀스적 영화 방식을 동원하여 마치 연극이 끝난 뒤 관객이 가지는 감각의 여운과 같이 관객의 사고 순환 후 생기는 잔여 감정 즉 “사고-감정(pensee-emotion)”7)을 유발시키는 감각적 뇌관을 장치하기도 한다. 결국 이와 같이 장치된 사진은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교차된 경험”8)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그때 사진은 관객에게 “유일한 이미지, 유일한 도덕 혹은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고유의 관점이나 경험에 따라 번역되는 상황의 연속으로 이해된다”9). 그것은 집단사회에서 획일적인 의미로 묵인된 객관성이 아니라 공유된 감각의 주관성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사진은 명분과 이슈로 무장된 열 장의 사진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 심연에서 잊혀진 애수와 회한을 깨우는 단 한 장의 주관적 사진이다. ●
 
<주>
1) 헨드릭 빌렘 반 룬/김희숙 정보라 옮김, 톨레랑스 책 참조

2) 창작의 의미는 결국 절대자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미지의 검은 배경에서 작가 고유의 감각에 의해 은닉된 존재를 발굴하는 것이다.

3) Henri Van Lier, Histoir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83.

4) Philippe Dubois, L'act photographique, Natan, Paris, 1990.

5) 흔히 사진을 인덱스로 간주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무엇을 재현한다는 것으로 이는 논리와 명분의 객관성을 중요시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없다. 20세기 후반 퍼스 이론은 사진이론에  새로운 관점(지표)을 형성하도록 한 중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소위 "형이상학의 재발견"이라는 후기 구조주의 이론을 위한 하나의 설명적인 모델일 뿐이다. 그래서 사진 인덱스에서 사실상 인덱스 그 자체의 논리적인 이론(대부분의 인식론자들의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논리와 의미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인 현상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중요하다.

6) Macro Livin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1998, Paris.

7) Michel Foucault, "Pensee-Emotion", Duane Michals, Paris Adiovisuel, Paris, 1982, p. 6, 유사한 용어로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여섯 번째 테마 주9 참조)

8) 같은 책

9) Macro Livinstone,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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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테마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은 의미적으로 텅 빈 사진이다.
 
인간의 기억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진 정신적 현상은 없다. 아무리 생리학이나 의학이 발달해도 우리의 기억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적 사고는 보편적 진리의 타당성을 위해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고 특히 19세기말부터 합리론과 경험론 특히 실증주의의 명분 아래 더욱 가속화되어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고 있다.

  분명한 논리를 앞세우는 과학적 사고는 물질 중심의 많은 철학적 유파들과 20세기초 구조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사변적 배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정신적 현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과학적인 철학(형이상학)도 당시 과학 지상주의(양의 세계) 시대에 또 다른 큰 줄기(음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의식의 발견과 심리학의 지속적인 발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그 차체를 실증하는 물리적 혹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니체와 베르그송의 반-과학주의 사고 그리고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철학에 있어 사실상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예로 인간의 “기억”이라는 정신적 현상을 볼 때 기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리학적인 관점으로 기억 현상은 의학과 그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더 이상 신비한 신체의 생리 현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기억 현상은 소뇌와 대뇌의 유기적 관계에서 어떤 분비물의 작용으로 우리가 기억하거나 혹은 망각이나 치매현상을 일으킨다고 설명된다. 이는 흔히 일반적으로 과학적 사고에 의한 기억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기억은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창고에서 어떤 외부조건에 의해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돌출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정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의식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치 육안으로 보이는 빙각의 일산이 침수된 빙하의 거대한 하단을 이끌고 있듯이 우리의 정신은 단지 의식에 표출된 기억이나 인식 현상을 말하는 상부구조(혹은 양의 세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배경(fond)이 되는 흔히 심리학에서 무의식(혹은 철학적으로 비인식)이라는 거대한 하부구조(음의 세계)와 함께 이중으로 된 구조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델을 설정하는데 그 중에서 사진의 잠상을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시각적으로 출현한 사진을 의식이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흔히 “사진을 기억의 은유”로 규정(Philippe Dubois)하기도 한다.

  그와 같이 표출된 기억은 거대한 하부구조 안에서 그 원인적인 것(현상학에서 본질)과 관계를 가지고 또한 연속적으로 서로 상관관계(대부분의 경우 원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이러한 연쇄적인 반응을 연상1)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하는 기억(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은 언제나 그 의식의 원인성을 갖는 무의식(비인식)의 세계와 관계하며 이때 상부에 나타난 기억들은 일종의 징후로 간주된다.2) 그러나 과학적 인식은 단지 표출된 징후로부터 보편 타당한 하나의 가설이나 원칙을 세워 혹은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그 징후의 본원적인 실체를 논리적 혹은 의미적으로 밝히는 것(이와 같이 가설적으로 밝혀진 본질을 “형상 form”이라고 한다)을 우선으로 하는 사고이다.
 
그래서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 가능한 대상(의미의 틀을 갖는 형상)으로부터 제외된 현실의 많은 징후들(의미의 영역 밖의 비인식의 대상들)은 그들 역시 가설적인 형상들을 가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예외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학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플라톤 동굴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대상들로 단지 무의식의 세계(혹은 하부세계)에서 잠정적인 존재로만 남게된다(생성 존재론). 가령 어떤 현상이 비록 누구에게나 감지되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보편 타당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은 단지 징후로만 출현할 뿐이다.

  구조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방법론은 상부구조에 출현한 대상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논리와 의미의 타당성을 그 근거로 대상을 분석하는 방식 즉 코드화 된 징후들의 체계적인 분석에 기본을 둔다고 할 때 후기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의미와 코드의 옷을 입지 않은 많은 징후들의 비논리적인 대상(시물라크르 figure)으로부터 하부구조의 그 원인적인 생성을 추적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물질 중심의 편협적인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된 정신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의 이동(대표적으로 예술의 포스트 모더니즘)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70년대 말부터 구조주의자들은 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분석적 방법론(대표적으로 기표 signifiant와 기의 signifie 의 소쉬르 기호학)의 한계로부터 또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였는데 우선 그들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19세기 말 미국의 철학자이자 기호 논리학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신호체계(논리적 실용론)에서 징후로만 존재하는 현실의 많은 대상들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의 출발점이면서 또한 그 이론적인 모델이 되었다. 특히 퍼스의 인덱스 개념은 후기 구조주의 개념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쉬르의 기호체계에서 현실에 출현하는 기호는 두 가지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는 달리, 퍼스는 현실의 신호체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퍼스는 자신의 책 “신호 체계의 서술 Logic as semiotic ; the theory of Signes (1895-1902)”에서 그 첫 기호 유형으로 아이콘(icon 도상)을 들면서 아이콘은 마치 교통표지판의 신호나 화장실의 성별 구별을 위한 그림처럼 “대상이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특징을 근거로 하여 단순히 아이콘이 외시하는 대상으로 보내는 신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신호로 상징(symbol)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징이 외시하는 대상에 보내는 신호로 이러한 대상은 참조에 의한 상징적 번역을 결정하게 하는 어떤 법칙 혹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연상을 근거로 한다.” 예컨대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평화를 뜻하는 비둘기 혹은 특히 현시 광고에서 보여지는 많은 의미적인 제스처나 대상들은 바로 이러한 신호체계에 속한다. 그와 같이 상징은 가장 보편적인 우리들의 지적인 앎과 이성 즉 문화적인 코드(사진에서 스투디움)에 관계한다.

  퍼스는 이러한 아이콘과 상징이 다소 분명한 그 지시대상들을 가지는 것과는 반대로 단지 불특정한 지시대상을 지시하는 또 다른 신호체계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징후 혹은 인덱스(index)로 발자국이나 연기 등과 같이 “지시대상과 실질적인 연결 혹은 물리적 연상에 의한 원인적 관계를 가지는 신호를 말한다.” 징후 즉 인덱스의 특수성은 앞서 말한 두 신호체계에서 보여지는 지시대상과의 유사성 혹은 상징성(의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인성”에 있고 언제나 일 대 다수의 지시대상을 갖고 있다.

  19세기 말 퍼스는 이러한 인덱스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언급하였는데 프로이드가 사진(양화)을 무의식으로부터 상부구조에 표출된 의식(기억)이라고 비유하는 것과는 달리 빛과 그림자로 찍혀진 사진은 발자국이나 연기와 같이 하나의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퍼스의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진을 언급했고 그의 징후론은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객관 타당한 의미의 부재와 대상의 불확실성의 이유로 사실상 기호학적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약 70년 후인 1970년대 말 당시 비평가들 특히 기호- 구조주의자들(후기 구조주의로의 이동)은 퍼스가 언급한 인덱스의 개념을 다시 인용하면서 사진을 더 이상 필연적 유사성에 의한 이미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 사진 영상(특히 스냅사진)은 “절대적 닮음이라는 이유에서 단순한 아이콘이나 보편적인 상징이 아닌 개인적인 대상과 기억이나 의미와의 물리적 접촉에 의한 상황적 원인성을 갖는 하나의 신호”라고 규정하고 또한 “이러한 닮음은 자연에 한 점 한 점 관련되도록 물리적으로 강요된 상황 속에서 생산된 사진에 의거하고 있다”3). 그와 같이 “사진은 어떤 상황들 이상 생각할 수 없다”4)라고 설명된다. 쉽게 말해 사진에서 재현된 대상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발자국과 같은 자국으로 이러한 발자국이 있게 한 원인성 즉 그러한 상황만을 말하고 있다. 보여진 발자국은 사실상 어떤 특정한 대상(발자국의 주인 즉 의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의 경험과 주관적인 경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발자국(사진)의 의미는 사실상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을 의미가 아닌 징후(index)로 간주하는 개념은 오랫동안 사진을 의미와 코드의 분석적 대상으로 간주해 온 당시 기호- 구조주의 학자들5)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곧 후기 구조주의의 결정적인 이론적 형성에 중요한 축을 세우게 했다.6) 또한 모더니즘의 탈당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론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인덱스 개념 즉 로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가 70년대 말부터 집요하게 추적한 “사진적인 것”의 개념이었다.

  사진을 인덱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침수된 빙하(하부구조)를 끌고 있는 빙각의 일산(상부구조)을 말하는 것으로 하부에 존재하는 본질(작가의 본원적인 의도)과의 유사관계가 아닌 원인관계에서 출현한 징후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찍혀진 모래 위의 발자국에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강압적으로 부여하는 분석적인 구조주의자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벤야민의 아우라 발견 이후 처음으로 사진에서 이러한 탈-의미의 개념을 언급한 이는 앙드레 바젱(Andre  Bazin)인데 그는 그의 “자동생성(la genese automa-tique)”에서 그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 “처음으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는 엄격한 규범에 따르는 인간의 창조적인 중재 없이 자동으로 형성된다. (...) 모든 예술이 인간의 출현 위에서 세워지지만 유일하게 사진은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한다.
 
사진은 우리에게 마치 꽃이나 눈의 결정처럼 “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꽃과 눈의 아름다움은 식물이나 자연현상의 오리지널들과 분리할 수 없다.(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7) 여기서 찍혀진 꽃이나 눈은 아름다움이라는 하부구조의 본질을 재현하기 위해 단지 징후로서 선별된 대상일 뿐이지 사실상 일반적인 꽃이나 눈에 관한 상징이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림의 경우와 같이 작가가 감지한 본원적인 음색을 재현하고자 할 때 의도적인 자신의 번역이 가능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진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선별한다. 그런데 그 대상은 원인적인 관계에서 단지 징후를 말하는 일종의 신호탄이나 유도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멀리 산 넘어 피어나는 연기와 같은 것으로 그 연기(사진)의 객관적 의미를 규명하기에는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완전한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황의 원인성”인데 분명한 것은 그 원인이 하부구조를 말하는 산 넘어 존재한다는 사실(사진의 신빙성으로부터)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응시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관련된 의식(연상의 경향)을 가지게 된다 : 예컨대 농부는 산불을 생각할 것이고 군인은 전쟁을 생각할 것이다. 이때 연기에 비유되는 사진은 이러한 연상을 갖도록 하는 일종의 연상 유도체(conduct-eur)역할을 하며 그때 사진을 “생성”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라고 한다. 결국 사진적인 것(index)의 지시대상은 하부구조에 은닉된 본원적인 음색(작가의 창작적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8)
  창작의 관점에서 사진작가들이 재현하려는 것은 앞의 여러 테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편 타당한 의미나 언어로서 표현 가능한 상황들이 아니라 의미의 옷을 입지 않은 내재적 상황이나 음색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사진적 재현은 대부분의 경우 징후로만 가능하며 그때 징후로서 상부에 표출된 대상들은 하부구조의 동체(본질)를 암시할 수 있는 그 동체의 “상황적인 단편들”인 경우가 많다. 그때 이러한 징후들을 마치 얼굴사진으로 그 사람을 대변하듯이 “얼굴화 된(visagefiee) 형상들”9)이라고 한다. 가장 좋은 예로 포도주를 찍은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사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포도주는 어떤 문화적인 코드로서 축제나 파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연기나 발자국처럼 각자 포도주와 연관된 기억의 환기에 관계하는 인덱스 즉 얼굴화 된 본체의 단편(혹은 푼크툼)이다. 사진은 그때 텅 빈 의미 공간(반-의미적인 사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순간 응시자는 보여진 포도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억의 연상적 확장(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을 경험할 것이다. 텅 빈 공간은 곧 바로 응시자의 의식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동생성의 순간이고 타인의 경우가 자신의 경우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거기서 사진의 위대한 힘을 확인할 것이다. 왜냐면 마치 자극된 뇌관에 의해 내향성 폭발이 일어나듯이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감정의 연쇄적 돌출은 곧 감동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은 의미적으로 텅 빈 사진이다. ●
 
<주>
1) 연상에는 현재에서 과거로 하강하는 수직 연상과 그 수직 연상 이후 과거의 거대한 기억 창고에서 일어나는 수평 연상이 있는데 그때의 연상은 시간적인 전후가 없는 무시간적인 연상이다(Henri Bergson의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의 무시간성).

2) 기억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의식에 표출되는데 그 중 시각적인 자극이 가장 중요하다.

3) 퍼스 신호체계에 관한 위의 몇몇 인용구는 C.S. Peirce, Ecrits sur le signe, Paris, Seuil, L’ordre philosophique, 1978, cite par Philippe Dubois, L’act photographique, Natan, Paris, 1990, pp.58 - 63에 관계한다.

4) Philippe Dubois, 앞의 책

5) 당시 기호 구조주의자(semio-structuralisme)는 크게 전통적 기호학자 분석가(메츠, 에코, 바르트, 렝드켄 등)들과 이데올로기 비평가들로 나누어지는데 후자는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 첫 부류는 감각 심리학에서 본 이론가들로 1965년 프랑스 구조주의 이전의 구조주의자들이고, 둘째 부류는 아른하임 바젱, 다미슈, 보드리, 부르디으 등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갖는 구조주의자들이다. 마지막 부류는 사진의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구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된다.

6) Philippe Dubois, 앞의 책.

7) Andre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1945) in Qu’est-ce que le cinema?, Tome I, Ed. du Cerf, Paris, 1975, pp.11-19. 그러나 바쟁은 퍼스의 인덱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50년대 당시 퍼스의 이론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고려해 보면 자신의 자동생성 개념은 기호학적 추론이 아닌 사진의 존재론적 개념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된다.

8) “생성”은 원점, 제로 상태, 출발점으로서 시작을 말한다. 본원적 음색의 사진적 재현이 자국으로서 사진이고 다시 말해 출현된 사진은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생성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그 지시대상으로 한다. 좀  더 확장적으로 말해 거의 모든 예술의 시공간적 출현은 이와 같은 사진의 인덱스의 원리에서 하나의 징후(사진적인 것)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개념의 변화(물질이 아닌 정신적 관점)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9) 얼굴화 된 것은 곧 인덱스화 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표현적 움직임(Le movement d’expression!)”라고 하는 존재론적 감정들을 끌고 있다(들뢰즈의 용어, “단편미학”에 관계한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를 또한 “탄착 impacts”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부동의 진술) 남는 잔여 찌꺼기(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푼크툼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 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무의미, 탈코드)을 말한다. Gilles Deleuse, Cinema, L’image-movement, Minuit, 1983

글 .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프랑스 역사”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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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테마 스투디움과 푼크툼
 
 거의 대부분의 사진에서 재현된 대상은 그것이 함축하거나 상징하는 의미 즉 문화적인 코드를 가질 수 있다. 가령 시골 초가집과 토담이 보이는 배경에 엉뚱하게도 현대식 양식으로 지은 주유소의 원색적인 건물을 병치시킨 사진이라든지 혹은 황량한 아스팔트 틈 사이로 돋아난 이름 모를 잡초를 보여주는 사진 등은 언제나 우리들의 문화적 코드에서 읽혀진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어느 시골 간이역에 짐 보따리와 지팡이를 쥐고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 본 듯한 향수어린 시골 풍경사진, 웃지도 울지도 않는 평범한 아줌마의 어설프고 어색한 사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재현된 대상 뒤에서 다소 분명한 함축적 의미(신구 문명의 교차, 생명력, 소외된 계층 등)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을 보는 순간 응시자의 앎과 지식이라는 의식 속에서 즉각적으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누구나 공감하는 객관 타당한 의미 속에서 이해되는 문화적 코드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찍혀진 대상이나 상황 혹은 그 분위기가 문화적으로 약속된 의미 속에서 이해되는 개념적인 것을 총체적으로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하는데 그때 우리가 사진에서 느끼는 것은 거의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평범한 감정을 들추어낸다. 이 용어는 언어학적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뜻하는 내시(connotation)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인 용어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스투디움은 근본적으로 응시자의 주관적 관점이 아닌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문화적 앎을 지칭하기 때문이다.1)

  그러나 사진에는 이러한 문화적인 코드와는 관계없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응시자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 감지되는 푼크툼(punctum)이다. 이 용어는 스투디움에 대비되는 총체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위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80년 그의 책 “밝은 방”에서 명명한 지극히 개념적인 말이다. 스투디움 개념이 보여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언제나 일 대 일의 대응 관계의 분명한 객관적 의미를 가질 때, 푼크툼은 흔히 우리가 인식의 실체로 인정하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구체적인 현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는 대상과 그 지시 대상 사이에서 언제나 일 대 다수의 불특정하고 불확실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 굳이 푼크툼을 정의하자면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찍혀진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의미(뜻)한다”라는 객관적 영역 밖에서 뭔가 분명히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의미의 과잉 혹은 결핍”을 말한다. 이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푼크툼은 의미를 갖지 않는 무(無)개념이 아닌 탈-의미 혹은 탈-코드(sans code),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화적 코드로부터 이탈한 다른 종류의 주관적 의미(가능태로서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도달치 못하는 영역 속에서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어떤 이상한 현상이나 대상 혹은 예견치 않았던 사실에 대한 의문을 말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논리로 볼 때 언제나 의식의 혼동과 무질서를 동반한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개념은 형상이탈(deconstruction)에 관계하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선구자들의 진보적 예술 행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흔히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표현 대상도 사실상 이성과 의미 그리고 문화적인 앎으로부터 이탈된 형이상학적 대상인 것이다.2)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사진에 있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이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좋은 사진의 대상은 언제나 푼크툼의 재현만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논제에 대한 분명한 해명은 사실상 모호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푼크툼은 의미적인 관점(인식론 혹은 형상론)에서 볼 때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개념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푼크툼의 개념은 어떤 특정한 형상을 갖지 않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존재론적 관점에서만 이해되는 개념이다.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위해 우선 역사적으로 사진에 대한 관점의 변화, 즉 인식론적 규명에서 존재론3)적 시각으로의 의미적인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을 보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4) 우선 사진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닮음 혹은 복사로 보는 견해 즉 현실의 거울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진을 보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객관적 유사성에 국한되어  결국 사진은 근본적으로 현실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당시 사진에 관한 많은 담론들은 단순히 사진의 모방력에 관계하고 있다 : 사진적 재현을 부정적 측면으로 이해한 보들레르(C. Baudelaire)는 기계적으로 완벽한 사진적 모방은 예술가의 천재성과 탁월한 재능과 절대적으로 대립되며 사진을 언제까지나 예술의 종으로 간주했다. 그와 같이 몇몇 픽토리얼리즘에 관계되는 철학적 담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사진에 대한 대부분의 사진적 견해는 예술로서의 표현적 사진이 아닌 단순한 현실의 복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사진을 더 이상 단순한 현실의 모사로만 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진을 현실의 모사(mimesie)가 아닌 그 이면에 숨겨진 “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을 보는 관점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진을 언어가 아닌 단순한 사진 고유의 현상 즉 “현실의 자국”으로 보는 경우5)이다. “모든 사진 영상은 현실의 변형적 번역 즉 문화적이고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코드로 분석된다”라고 언급하듯이 사진을 현실의 변형으로 볼 때 사진적 행위를 상징적 문화적 그리고 이념적인 “코드화(codificaion)”에 둘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있다 : 외재적 코드화와 내재적 코드화. 사진을 외적으로 코드화 된 장치로 보는 관점은 오랫동안 언어학적인 분석 방법을 우선적으로 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e)에 관계하는데 사진의 분석에서 언제나 관객에게 언어나 코드와 같이 일종의 암호풀이와 같은 분석(이미지-상징 혹은 이미지-코드)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특히 “기호-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이론화된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찍혀진 대상이 이미 작가와 관객이 암암리에 약속된 공통된 의미 혹은 코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보여진 그 대상으로부터 분석적 이해와 번역적 해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한 의미론적 관점과 논리적인 체계에서 이해되는 전형적인 사진의 이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문화적 인류학적 혹은 과학적인 참조에 의해 객관 타당한 의미 속에서 잡혀진 사진을 “외적인 코드화”로 볼 수 있는데 많은 보도사진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은 반드시 번역을 위한 어떠한 비평이 필요하며 언제나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진술된 텍스트를 대하듯이 우리의 앎과 지식(스투디움)을 중심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때 재현된 이미지와 코드와의 언어학적 연결은 결국 비평의 기능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한 상징이나 코드를 초월하여 어떤 경험적인 사실이 아닌 감각적인 측면에서 존재론적 “내부적 진실”을 폭로하는 사진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언제나 객관적 의미와 익숙된 문화적 코드를 초월하여 단지 사인들(signes)로만 출현한다. 이때 사진을 “내적으로 코드화 된 장치” 혹은 코드 그 자체를 넘어 “내재화된 존재의 사진적 출현(음영 ombres)”이라고 한다. 이러한 출현은 대부분의 경우 사진기의 객관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비밀스런 본질(essence)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외적 현실(코드와 의미)을 초월한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비평은 최근 수 십 년간 가장 중요한 사진의 관점이며, 또한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탈-언어(코드)적인 관점으로 1970년대 후반 많은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가지고 온 존재론적인 시각(후기 구조주의)이기도 하다 : 대표적으로 영상사진과 조형사진(포스트모더니즘).

  그러나 여기서 재현되는 내재적인 형상 혹은 초월적인 코드를 비록 그 대상이 우리의 앎과 인식을 초월한 의미의 이탈(음영계)이라고 할지라도 그 대상을 일반적으로 푼크툼(punctum)이라고 하지 않고 탈-의미 혹은 시니피앵스(signifiance)라고 한다. 왜냐면 푼크툼은 작가와 사진의 관계에서가 아닌 장면과 그 장면을 응시하는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 엄밀히 말해 관객의 의식이 사진에 투영되어 자아의 정신적 반응을 일으키는 지극히 주관적인 사진적 현상(아우라의 정의)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푼크툼의 용어는 사진을 문화적 코드로 보는 관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현실의 자국” 즉 사진을 사진적인 것 혹은 인덱스로 보는 관점(사진을 보는 세 번 째 관점)에서 언급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개념은 사실상 개념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의미의 영역을 벗어난 내재적 형상 혹은 작가가 감지한 은밀한 감각의 음색과 같은 문맥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작가와 재현된 사진의 함축적 관계에서가 아닌 기계적 생산물인 있는 그대로의 사진적 사실주의의 절대적인 외시와 관객과의 지극히 주관적 관계에서 이해된다.6) 그래서 푼크툼의 출현(말하자면)은 작가의 예술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극히 평범한 광고 사진의 한 귀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아주 낯선 장면 혹은 수수께끼 같은 익명의 대상이나 상황 등에서도 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의 공통점은 사진적 형태로 나타나는 “이상함”, “특이한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불확실한 것”이다. 이때 감각의 주체는 응시자이고 언제나 장면으로부터 응시자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음색을 갖게 한다. 그것은 사진이 내포하는 함축적인 의미(스투디움)가 아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상식 밖의 무엇이다. 이것이 장면을 떠나 응시자의 감각을 관통하는 화살(pointe)과 같은 감정의 동요자 즉 푼크툼이다.7) 그때 출현하는 음색(impression)의 이미지는 이성의 가장자리에서 부유(浮游)하는 달무리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바르트는 일인칭 서술 형식으로 기록한 그의 책 “밝은 방”에서 바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감각의 설명을 의미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이상하고 특이한 대상들(구두끈, 썩은 이빨, 베레모, 긴 손톱, 큰 구두 등)에 빌리고 있고, 또한 그는 푼크툼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스투디움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문화적인 기능에서 충분히 친숙한 의미의 확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논리적인 감각은 사실상 이미 1930년대 발터 벤야민이 발견한 “아우라(aura)”의 누설과 그후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언급한 사진의 존재론적인 특성(자동 생성) 그리고 바르트의 제 3의 의미 즉 옵튜스(obtus)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이는 곧 영상 이미지에 은닉된 탈-코드에 대한 최종적인 진술임과 동시에 사진-인덱스론(photo-index)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
 
<주>
1) 바르트는 우리가 사진에 관심을 갖거나 그 사진들을 정치적인 증거물로 보거나 역사적인 좋은 증거물로 그것들을 음미하는 것은 바로 스투디움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형상들과 제스처들 그리고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은 문화적<이러한 내시(connotation)는 스투디움 안에서 출현된다>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과거에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공동체 사회에서 그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비교적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밝혀진 현상이나 대상 역시 스투디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2)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은 형상론(인식론)자들이 70년대 말부터 수용된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생성 존재론)을 배경으로 일종의 탈-의미 혹은 아직 의미의 옷을 입지 않는 모습(figure) 즉 시물라크르에 의미의 옷을 입힌 예술적 표현에 관계하고 있다.

3) 여기서 존재론은 모든 대상을 형상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형상적 존재론이 아니라 생성-진화 혹은 생성-변전(devenir-forme)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의 한 단계로서 이해하는 생성 존재론을 말한다. 예술적 실행에 있어 전통적 모더니즘의 논리적 시행에서 탈-의미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행위로의 이동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에 의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4) 참조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um, Paris, 1990.

5) 대략 후기 구조주의의 출발 시기로 간주되는 1970년대 말부터 이론화되는 생성 존재론적 관점으로 사진을 단지 빛의 낙인 혹은 징후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이해한다.

6) 왜냐하면 사진적 사실주의는 본원적으로 재현된 대상에 절대적인 신빙성(앙드레 바쟁의 자동 생성)을 주기 때문이다.

7)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러한 상처, 이러한 찌름, 이러한 표시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는 라틴어에 존재한다 : 이러한 단어는 단어가 또한 구두점의 개념(idea)으로 보내지고 내가 말하는 사진들이 사실상 이러한 예민한 점들로부터 점이 찍히고 가끔씩 얼룩이 지는 것보다 훨씬 나에게 와 닿는다 : 정확히 말해 이러한 상처들과 표시들은 점들이다. 그래서 스투디움을 교란시키는 이러한 두 번 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면 푼크툼, 그것 역시 찔린 자국, 작은 구멍, 작은 자국, 베인 작은 상처 그리고 또한 즉각적인 한방이다. 사진의 푼크툼, 그것은 그 자체에서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죽이고 나의 심금을 울리는) 우연이다.”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Gallimard, pp. 48-49.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Minigang, Amsterdam Avenue, New York,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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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테마 사진과 아우라 현상
 
 
 
 
사진 용어에는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용어는 사진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론(음의 세계)적 용어이다. 이때 용어의 개념은 앎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의 신비에 가까운 감정의 음색(tonalite)으로 의미의 영역밖에 존재(플라톤 동굴의 어둠)하는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응시자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느날 오래된 사진첩을 뒤지다가 발견한 돌아가신 어머님의 사진을 보았을 때 웃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이라든지, 시골 대청 마루 위에 걸려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유령같이 모여 있는 어느 가족, 연도가 1951년이라고 적힌 낡은 사진에서 웃고 있는 익명의 군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 가로등만 훤히 켜진 아무도 없는 대도시의 야경 사진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오싹한 공포감, 혹은 지하철 광고 사진에 흐리게 잡힌 어느 소녀의 옆모습이 주는 어떤 아쉬운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러한 감정들은 모두 보여진 대상으로부터 “나” 즉 “경험적인 연상”과 관계한다. 특히 찍혀진 인물의 운명(과거 속의 미래)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이러한 사진적 현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틴어 어원을 갖는 아우라는 그 사전적 정의를 참조해 보면 종교적 후광, 무리(halo) 등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감싸는 정신적인 분위기로, 사진의 어떤 객관적 의미보다는 주관적인 가치를, 또한 물질적이라기보다 신비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한다. 이는 또한 “미적이고 의미적인 방식에서 절단된 낡은 타원이 가끔씩 쬐는 수증기 같은 원에 비유하고 또 그것은 일종의 가벼운 원(기체)이다. 그 속에서 훈영(후광)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마치 토스칸과 옴브리(이탈리아)의 옛 거장들이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수행하고 있는 성인들 얼굴 주위에 그려 넣는 금관과 같은 것이다.”1)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라를 상기할 때 우선 모델의 “성스러운 것” 혹은 “이미지의 유일성”과 연관시켜 흔히 이미지 그 자체에서 또 다른 의미나 구체적인 사실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초상은 아우라의 마지막 피난소이고 그 아우라가 인간의 얼굴 위에 최후의 불똥을 던진다”라고 1930년대 당시 재생 이미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하여 탈 신성화와 세속화(아우라의 상실)를 주장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아우라는 일종의 사진 이미지 그 자체에 실질적으로 이미 함축되어 있는(전혀 응시자와 관계없이) “신성한 이미지” 혹은 그러한 실체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객관적 논리만을 수용하는 양의 세계(모더니즘)에서 볼 때 “아우라”는 흔히 복제된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작품의 개성이나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칭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단지 지나치게 구조화된 기호-논리에 의한 비유적인 수사학에 불과하다. 아우라는 결코 실체론적 대상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현상이 언어의 역사와 사진 물리학 혹은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설명된다 하여도 사실상 아우라의 정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단지 의미의 과잉을 말하는 푼크툼의 비논리적 영역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은 대량 복제로 인하여 이미지 그 자체에서 분실된 “오리진”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미 함축되고 의미화된 대상에 대한 응시자의 무반응 혹은 무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아우라의 현상을 다소 비현실적인 형태로 사진이 은닉한 또 다른 고유한 이미지로 생각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오랫동안 우리가 의미적인 분석에 너무 익숙해 왔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사진에서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진의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응시자의 주관적 기억 연상에 관계할 뿐이다. 역으로 창작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아우라의 음색(대표적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된 사진 이미지(사진적인 것)는 다시 한번 더 언급하지만 대상에 이미 본원적으로 내포된 장면의 재현(미술의 경우)이 아니라 사실상 작가도 모르는 전혀 불확실한 감각적인 재현(사진의 징후)일 뿐이다.
 
왜냐면 사진기는 번역적인 도구가 아닌 내면으로 향한 일종의 더듬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작가가 감지한 아우라를 흔히 자신만이 감지하는, 극히 주관적인 감각적인 “느낌(sens)” 또는 “기분(humeur)”3), 쉽게 말해 “직감(intuition)”이라 할 수 있다.

  아우라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을 해보면 철학적으로 실체론과 존재론의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론들은 인식(陽  pist mologie)과 비인식(ontologie / 음영 蔭映 ombres) 혹은 실체와 존재의 철학적인 대립 속에서 서로 공존하여 왔다. 실체론적으로 본 아우라는 보다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아우라는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대상이 흐리고 불확실한 실체 혹은 그러한 효과가 만들어 내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근본적으로 사진의 흐린 효과(레미니센스의 은유)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 라틴어에서 아우라는 그 첫 의미로 가벼운 입김, 안개, 바람 그리고 공기와 대기까지 지칭한다. 또한 생리학적 용어로 어떤 신체, 어떤 실체의 방출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만질 수 없는 유동 즉 입김은 신체와 실체에 의해 생산된다. 사진에서 아우라의 물리적 실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효과에 빚지고 한다.

  한편으로 아우라는 사진의 부드러운 중간 톤을 말하는 메조-틴토(mezzo-tinto)로부터 야기된다. 원래 이것은 연속판인 동판(부식)에서 색조의 “연속(continuit )”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의 절대적인 연속적 색의 변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중간 색조는 시각적으로 아주 부드러운 효과(거의 환상적)를 준다. 이러한 효과는 전통적 그림의 대기 원근 효과, 즉 “스푸마토(sfumato)”처럼 그림의 중요한 “환기적 효과”와 동일시되었는데, 한때 19세기의 많은 사진들(특히 초상사진들)에 있어 이러한 심리적인 효과(비현실적인 초상)를 위해 메조-틴토를 의도적으로 선호했다. 게다가 제작 과정의 긴 노출시간과 기술적 문제로 당시에는 이것을 하나의 효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딱 한 장만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다게레오타입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중간 톤은 모델을 유령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재현하였다.5)
 
그때 그 극단적인 부드러움 속에서 언제나 인물을 감싸는 무엇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아우라로 보았다. 사실상 1930년대 벤야민의 텍스트에 예로서 언급된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동판 위에서의 메조-틴토처럼 극도로 부드러운 흐린 안개 효과에 관계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아우라는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사진에 직접 출현한다. 아우라 현상은 사진적인 실험에서 정확히 물리적 현상으로 실재하는데 그것은 무리(halo)이다. 무리(달, 해의 무리와 같은)는 예를 들어 창에 의해 아주 강하게 비친 실내를 촬영할 때 또 카메라를 창으로 향하게 하여 촬영할 때 특별히 생기는 빛의 방사로 나타난다 : 그때 인화 작업에서 창가들은 마치 빛에 의해 먹혀진 것과 같이 흐려지고 불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일종의 후광(aureole)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된다. 물론 근본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오랫동안 유리판으로 작업한 19세기 많은 사진가들이 애착을 가진 것은 밀착 인화에서 유리판의 부드러운 입자(연속적인 중간 톤)로 인하여 사진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현실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극도로 선명한 입자(pique)도 아니고 더욱이 칼로타입에서 종이의 거친 입자가 주는 흐린 효과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광학적으로 빛이 표면의 감광층을 지나 유리판을 통과할 때 유리판의 두께로 인하여 생기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인화에서 시각적으로 가벼운 무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표적으로 으젠 앗제의 많은 유리판 사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벤야민의 존재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진 그 자체에서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기입하는 사인처럼 자신의 독창적인 사진적 효과로 간주되었다. 특히 논리와 의미를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아우라는 어떤 작품의 존재적인 유일성을 보장해 주는 필요조건 즉 독창성(authenticite)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모더니즘은 그처럼 아우라의 실체론적 개념에 의미적인 옷을 입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우라는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 즉 빛의 굴절이나 경계면의 흐린 효과 혹은 빛 바랜 세피아 색으로부터 야기되는 물리-심리적 효과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20세기에 들어 와서 렌즈와 음화의 급속한 질적 향상은 사실상 아우라에 대한 관심을 실체론적인 분석(인식론)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 정신 현상으로 이동시켰다. 왜냐하면 아우라 현상은 단지 흐린 효과에서만 유발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선명한 사진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유동적이고 주관적이고 또한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처럼 대상과 응시자의 쌍방적인 정신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처음으로 초월적인 사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무리(halo) 혹은 그림에서 성인의 후광으로 이미 알려진 “아우라”라는 용어를 차용한 발터 벤야민은 사실상 아우라 현상을 앞서 언급한 실체론적 방법으로 밝히지 않는다 : 벤야민은 힐과 아담슨, 으젠 앗제, 오귀스트 잔더 등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사진을 사진 그 자체에서 발하는 비현실적 출현을 직접 기술하고 있다.
 
 그는 사진에 출현하는 현재적인 이미지와 그 출현 속에 지나간 과거의 여운(reste) 혹은 향수(nostalgie)가 발한다고 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과거 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예리한 감정,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이것은 그림이나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고 유일하게 사진에서만 출현하는데 응시자의 내부에서 은밀하고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리를 만든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6) 벤야민은 모든 것이 괴상하고 모조적으로 나타나는 카프카(Franz Kafka)의 젊은 사진(옛날 사진들)에서 또한 뉴 해븐(New Haven) 항구의 어부들을 보여주는 힐과 아담슨(Hill and Adamson)의 사진에서 아우라의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아주 정확한 사진기술은 손으로 그려진 어떠한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어떤 마술적인 것을 누설하고 있다.
 
사진사의 노련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색한 모델의 포즈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슬그머니 사진과 유사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 스스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튀는 일종의 불똥을 찾게 된다. (...)”7) 여기서 말하는 불똥은 어떤 이상함, 회고적인 시각, 멜랑꼴리 등과 같은 응시자의 경험과 체험에 관련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음색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 그 자체에서 응시자로 전염된 존재론적인 출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라에 대한 벤자민의 존재론적 발견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사진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의 실체론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그후 이러한 존재론적인 재발견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자동 생성(La genese automatique)”을 거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참조주의까지 무려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아우라는 신비적이고 회고적이고 또한 역사적인 문맥으로 축소되면서 더 이상 실체론적인 의문을 달지 않을 확실한 어떤 사진적 공리가 된다 : 푼크툼. ●
 
1) Alain Buisine, Eugene Atget ou la melancolie en photographie, Edition Jacqueline Chambon, Paris, 1994, p. 118.

2) 아우라는 원래 사진의 대상과 응시자의 관계에서 주관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용어의 진화에 따라 모든 예술작품에 함축된 “오리진” 혹은 “독창성”과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실체론적 관점에서 아우라는 대상을 흐리게 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회고적인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일종의 환기적 효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3) 이러한 용어들는 “나”라는 이성의 범주 즉 주관적 관념론(칸트)의 범위를 벗어나 거의 신비론과 유신론에 가까운 번역 불가능한 존재론적 용어들이다. 유사한 용어로는 강렬한 인상, 도취, 황홀, 절정, 기질, 음색, 멜랑콜리 (독/stimmung, gemut, 불/tonalite , impression, temperament ...)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추적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창작의 원동력이다. 참조. Alain Bonfand, Paul Klee, L'oeil en trop, Edition de la diff erence, Paris, 1988. 그때 아우라는 사진적 매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이론적 용어(1930년대)이다.

4)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이다. 결코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은 기억”이다(Philippe Dubois)라는 명제에서 흐린 사진을 기억의 쇠약 혹은 망각으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우리들의 “논리적 기억(la m emoire logique)” 때문이다. 참고, 앙리 베르그송의 “무시간적 기억 회상”(La matiere et la memoire).

5) 유령과 같은 이러한 초상은 손으로 직접 그려진 사실주의 초상화(예로 현대미술에서 게랄트 리히터의 “48명의 유명 초상”)를 상기시킨다.
  
6) 사진이 그림과 달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발견으로 약 15년 후 앙드레 바쟁이 언급하는 “자동생성(일종의 무의식적 연상)”과 같은 문맥을 가진다.

7) W. Benjamin, “La petit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Poesie et revolution, Danoel, paris, 1971.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으젠 앗제, 브로카 길 41번지,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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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테마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말할 때 언제나 반쪽 세상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가 방아 찧는 달의 앞면만 보고 ‘저게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달의 뒷면은 인공위성을 동원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앞면에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은 단지 상상과 추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세상에는 가시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달의 뒷면과 같이 은닉된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펴면 세상 모든 일이 두 눈에 들어오고, 하루종일 우리의 눈과 귀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뉴스와 심지어 지하철 잡지 가판대 유리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잡지기사들까지도 믿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무차별한 정보 입력을 강요한다. 이러한 세상 정보들은 우리의 의식 구조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자동 입력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이러한 정보 밑에서 모든 주관적 판단 기준과 감각력을 무효화시키는 소위 자아상실의 시대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오늘날 모든 상품 구매는 거의 유행이나 브랜드에 의한 수동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자신의 의향이나 주관은 사실상 진리 혹은 정답이라는 타인의 객관적 기준 혹은 물질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19세기 합리주의의 산물인 사진의 진술은 오늘날 법정에서 진술하는 증인의 말보다 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객관 타당한 지식놀이(J.-F. Lyotard) 속에서 모든 것은 실증되어야 믿게 되는 현실이 되었다.

 

반대로 어떠한 사실이 일단 검증되거나 명백히 논리화(대표적으로 법과 제도)되면 그것은 일종의 수학적 공리가 되면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이러한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민간설화 혹은 기운(氣)이나 직감 그리고 운명 등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많은 설화적 지식(J.-F. Lyotard)을 감각과 징후의 맥락 속에서 믿었다. 이때의 믿음은 현상에 대한 진실 혹은 본질의 추적에 관계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맹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맹신은 누군가 파놓은 “논리”라는 거대한 함정을 말한다.


  이 함정에는 과학적 사고를 중심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수많은 대상(ta noeta)들이 있는데, 각각의 대상은 언어로 표기할 수 있는 고유의 의미(진리 혹은 정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함정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대상들은 점진적으로 의미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그것들은 감각적 대상이 된다. 인식의 한계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함정의 영역을 말하는데 함정의 주변부를 완전히 벗어나면 인식 밖의 영역으로, 그 속의 대상들은 마치 달의 뒷면이나 칠흑 같이 어두운 곳에서 위치하는 그 무엇처럼 단지 대상이 발하는 일종의 우주파와 같은 미세한 감각적 진동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그 존재(existence)가 전달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본질의 징후(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세상은 사유를 말하는, 빛에 의해 밝혀진 대상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인식계는 오히려 어둠의 세계인 음영계 (ombres)를 배경으로 세워진 극히 부분적인 세계라 볼 수 있다.1) 이와 같이 빛의 세계를 만드는 배경으로서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담론을 인식론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존재론(ontolo-gie)이라고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의 현실 즉 존재론적인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 구조에서 설명된다. 즉 음의 세계는 양의 세계, 규명된 형상(forme) 혹은 이성(raison)의 영역 주변에서 언제나 배경(fond)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존재론적 철학에서 흔히 “자연”이라는 것은 이러한 양과 음의 이중구조 전체를 말하고 있다.


  현실의 이중구조는 또한 플라톤 동굴 우화(국가론 제 7권, 티마이오스 편)에서 동굴 안의 이중구조로 된 감각(현상)계로 설명되어진다. 아직도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탁월한 모델로 간주되는 이 우화는 비록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의 굴곡을 가졌지만 근본적으로 현실을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세계 즉 동굴 속에서 존재하는 불확실한 대상(억견 doxa)으로 비유하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다소 해석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감각세계를 앎의 단계에서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사유 대상의 세계(쉽게 말해 인식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지 이데아(Idea)에 대한 모사, 즉 신빙성을 말할 뿐이다. 단지 이 단계에서 존재하는 대상들은 동굴 밖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 동굴 내부 벽에 비쳐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가능한 대상들의 영역을 인식계라고 할 때, 인식계는 빛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포함된 대상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언제나 억견으로만 되어 있다. 왜냐면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죄인들은 동굴 밖의 눈부신 빛 때문에 자신의 이데아(참 모습)는 볼 수 없고 언제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최상 계급인 철학자의 역할을 그들에게 진정한 자신들의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이데아를 전통적으로 진리 혹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대상의 세계를 말한다.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동굴의 하부 혹은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비 인식 대상들은 단지 감각에 의해 추측되거나 감지될 뿐이며 언제나 어둠의 세계(ombres)에 있다. 사실상 이들은 동굴에 존재하는 대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에는 결코 출현하지 않으며 어떠한 뚜렷한 형상(forme)도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우리들의 의식에 하나의 징후로서 출현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빛과 그림자, 현실의 이중구조, 허위와 진실


  이와 같이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1980년대초 현대미술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보여준 설치 작품 “그림자 연극(Le theatre d’ombres)”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이중구조를 개념적 문맥에서 보여주는 가장 좋은 경우로 간주되고 동시에 자신의 사진 설치 작품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8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벤스터(Ven-ster) 화랑에서 전시된 그의 “그림자 연극”은 사방이 막힌 어두운 공간(카메라 암실의 은유)에 설치되는데 작품은 일종의 세상 만평과 같은 풍자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작가는 방의 중앙에 환등기를 설치하고 그 앞에 철사와 종이로 조잡스럽게 인간모양이나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형상들을 만들어 관객에게 환등기 빛에 의해 한쪽 벽에 투영되는 많은 그림자를 보게 한다. 게다가 환등기 옆에 선풍기를 동원해 왜곡된 그림자들을 더욱 더 불안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인도네시아 그림자 연극을 흉내내 설치한 이 작품은 플라톤 동굴 우화의 은유로, 궁극적으로 작품이 시사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한편으로 볼 때, 벽에 투영된 그림자들은 동굴 속 죄인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 즉 오늘날 우리들이 인식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이런 대상들은 진실이 아닌 왜곡된 환상이나 허상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비평가 디디에 스멩(Didier Semin)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허위와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풍자로 오늘날 정보 홍수(특히 대중 매체의 뉴스)에 의해 야기되는 우리들의 변별력과 판단력의 상실, 다시 말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대상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말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볼 때, 더 이상 “이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누설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리즈 제목인 “어둠의 교훈(Les lecons des tenebres)”이 암시하듯이 또 다른 존재의 세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내포하는 초점 흐린 초상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음의 세계에 대한 사진적 번역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빛과 어둠의 이중세계(시각이 아닌 개념)를 이해하기 위하여, 가령 우리가 우리들의 현실인 플라톤의 동굴에 직접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또 이때 확실한 증거를 위하여 동굴의 모든 개념적인 대상들을 담을 수 있는 특수 카메라를 동반한다고도 가정해보자. 우선 동굴입구에서 빛(인식 혹은 앎의 비유)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까지의 영역 즉 양의 세계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형상(forme)이라는 분명한 그들의 정체를 보이는데 공통적으로 객관적 논리(logos)와 이성(raison)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데카르트의 cogito). 특히 동굴입구로 나올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욱 두드러져 입구에서 수학과 과학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만나게 된다. 이 영역에서 볼 때,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경험과 결과 그리고 물질적 가치에 있고 그러한 판단에 의해 각각의 현상에 “정태적인 의미” 즉 학문을 이루는 진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자연현상까지)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단지 생성 변전 과정에서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또한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다(니체의 생기 존재론). 예를 들어 수학적 공리나 과학적 법칙 혹은 사회 현상의 많은 논리들을 동굴 입구에서 만날 때 좀 더 멀리서는 기호나 통계 또는 해석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관념적인 담론(구조주의)들을 만날 수 있다. 크게 보아 물질 중심의 담론들이 바로 이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을 촬영한다면 사진들은 과학적 분석이라는 일종의 보고서나 혹은 상호간의 약속된 코드나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술이 될 것이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연을 만난다. 이 영역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사실상 대부분의 우주를 구성하지만 마치 달의 뒷면처럼 단지 우리들의 직감이나 추측과 같은 순수 감각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감지되는 대상들이다. 암흑 속에 있는 대상들은 공통적으로 동태적이고 비논리적인 특징을 가지며 마치 만물이 변전을 위해 이제 막 생성(genese)한 무엇처럼 대상들은 어떠한 특정한 의미나 객관적 코드와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갖지 않는다.2) 혹은 단지 생성을 위한 시원적인 질료(matiere)3)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원천적인 대상들을 우리가 가지고 들어간 카메라로 촬영한다면 사진은 우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특정한 시적 의미 혹은 푼크툼(punctu-m)이나 아우라(aura)와 같은 탈코드(sans code)의 형태로 나타난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야기되는 황당한 사건이나 엉뚱한 현상 혹은 비록 평범하고 의미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예견치 못하는 인상(impression)이나 묘한 음색(tonalite)에 대한 실체나 본질을 보여 줄 것이다. 빛의 세계에 나타난 대상이 언제나 언어와 의미를 동반하는 진술체계(구조주의)에서 이해된다고 한다면,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신호(signe)체계에서 단지 징후(특히 퍼스 Peirce의 기호론)로서만 출현한다. 대상을 존재론적 혹은 질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달리 말해 현상적 사물보다 내면적 실재를 우선으로 하는 담론(니체철학, 실존철학 또는 후기 구조주의적 담론 등)들이 여기에 관계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대상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질료에서 형상으로 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러한 두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특징을 가지고 우리의 거대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마치 발굴된 몇몇 로마의 유적과 묻혀있는 폼페이의 엄청난 익명의 유적들, 눈으로 볼 수 있는 숲의 외형과 그 밑의 수많은 음지식물들, 빙산의 일각과 침수된 거대한 빙산의 하부처럼... 그러나 두 세계의 경계는 극히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의 조화에서 진정한 사진의 대상은 어둠에 있다. ●

 

<주>

1) 여기서 빛의 세계, 즉 인식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나 사건 등의 모든 관념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2) 질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 개념 참조


3) 이때 작가들이 감지하는 어떤 무엇(질료)을 재현한 작품(figure)은 단지 시각적인 결과물 혹은 징후(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형적이고 동태적인 징후를 객관적인 형상(forme)으로 설명하는 것은 언어와 의미만을 앞세운 인식론적 사고에 관계한다. 이와같이 인식의 영역을 넘어 시원적인 질료로부터 현상(작품)들을 설명하는 담론을 일반 형이상학과 비교하여 “질료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해부터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사진예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중앙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이경률 박사가 열가지 테마로 열어보는 또 다른 반쪽 세상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6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사진평론가 진동선 선생의 ‘사진비평’이 63회로 끝을 맺음에 따라 이경률 박사가 독자들의 ‘사진이론’ 공부를 돕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론공부는 어렵고 딱딱하기 마련이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사진이야기를 해나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글·이경률
(파리 1대학 미술사 박사)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그림자 연극”, 벤스터 화랑, 네덜란드 로테르담,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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