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20세기 현대 사진의 출발을 1950년대 사진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영상사진과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거리 사진의 출현으로 잡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건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진으로부터의 “이탈”을 들 수 있는데 흔히 전자의 이탈을 재현 대상의 내적 혁명이라고 할 때 후자의 이탈은 외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 중 보도사진의 사건-이미지가 아닌 시적 언어로서의 사진 이미지를 말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영상사진 계열은 그후 특히 1970년대 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나아가 후기 구조주의(기호- 구조주의)의 탁월한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①

사진을 하나의 코드나 의미 전달을 위한 언어로 간주한 전통적 개념과는 달리 프랭크 이후 새로운 사진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진을 표현적 언어로서 이해하였고 거기서 단순한 의미론적 해석이 아닌 사진을 완전한 하나의 “감각”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적인 재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프랭크를 따르는 거의 대부분의 젊은 사진가들은 더 이상 미국 전통사진을 지배해 온 인본주의나 대자연의 예찬과 같은 사건 중심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인 문제, 꿈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문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문제 그리고 거의 추상적인 문제를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미국 전통사진의 주류에서 볼 때 유럽적 경향으로 간주되었고 점진적으로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와서는 순수 사진 영역에서 지배적인 새로운 사진 경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듀안 마이클스, 레 크림스, 랄프 으젠 미트야드, 랄프 깁슨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전후 미국 작가들 중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현대주의자의 혈통을 갖는 작가는 예외적으로 로버트 프랭크와 그의 동업자이자 후배인 랄프 깁슨(Ralph Gibson)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스위스인 프랭크가 실존주의적인 유럽적 경향을 미국에 이식시켰다면 미국인 깁슨은 자신의 이태리 시리즈 사진을 통해 이태리적 경향을 미국이 아닌 오히려 유럽에 이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깁슨의 유럽적 혈통은 건축성과 초현실성에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 - 30년대 만 레이(Man Ray)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과 러시아 구성주의 사진과 앙드레 케르테즈(Andre Kertesz) 계열의 초현실주의 사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과 빌 브란트(Bill Brandt)의 강렬한 리듬과 볼륨, 공간의 질이 창조하는 초현실성 또한 거대한 풍경이 보여주는 큰 구도(Close up) 등이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빌 브란트는 “꽉 찬 물질은 빈 공간의 신비를 연결하고 바다의 수평선은 언제나 시적 인상을 준다”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의 “단편 미학”과 큰 구도의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사진가들의 모델이었던 프랭크의 강렬한 심적 동요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깁슨의 사진은 프랭크의 경우처럼 허무, 소외, 번뇌 등의 많은 정신적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성이나 관능과 같은 사진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전통적인 취향을 보였다. 결국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미국 사진의 맥과 새로운 유럽적 경향을 접맥하면서 특히 1970년대 이후 사진의 또 다른 경향을 세웠다.
 
랄프 깁슨은 1960년대  “사진 행위는 더 이상  어떻게 찍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에 있다”고 선언했다. 즉 사진적 의도는 찍혀진 대상(objet photographiee)이 아닌 찍혀진 주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대답은 “감각 안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1970년대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3부작 시리즈(Triologie)인 <몽유병자(The somnanbulist, 1970)>와 <바다 기행 (Days at Sea 1973)> 그리고 <데자 - 뷰(D eja - vu, 1975)>에서 그는 유럽적 경향인 건축적인 단순함과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년 후 다시 깁슨은 “주제는 단지 사고의 반사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사진은 시각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각의 질이다”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 말은 사진이 표명하는 것은 감각에 의한 비구체적인 추상 즉 “사진적 추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추상은 형태가 없는 무형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에 있어 추상의 표현은 색이나 선의 조합에 의한 그림의 추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의 신호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재현된 신호를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현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추상적 표현을 외적 형상(forme)으로부터 재현된 내재적 형상(figure)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형상을 인덱스라고 하고 내재적 형상은 그 인덱스의 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은 한 마디로 공통된 문화적 실행과 사는 방식 그리고 살아온 경험의 외적 인덱스라고 하고 그 지시대상은 단지 감각으로만 포착되는 시적 언어를 말한다.
 
흔히 사진에서 “깁슨적이다”라고 말하는 사진의 독특한 특징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의 사진들은 다소 지나치게 요약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반-의미와 인덱스 그리고 열린 공간의 크게 세 가지 개념적인 특징을 가진다. 우선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전혀 다른 반 - 의미적인 사진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읽기에 있어 사진을 의미로 본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게 위장된 그러나 임의적으로 고착된 기능주의이고 전체적으로 의미의 부조리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모든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이(대체로 즉각적으로 왜곡 조작될 수 있는) 의미적 관계에 의해 서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구조주의)은 부조리적 사고이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왜냐하면 출현 자체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현되는 장면의 주제가 아니라 감성(affect)과 성(性)적 에너지인데 이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묶이지 않는다. 예컨대 모자 벽 신체와 같은 단편적인 장면(사진 1)에서 사실상 재현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제가 없다. 이러한 주제의 부재는 결국 반-다큐멘터리적인 의미의 박탈을 가지고 온다.
 
전형적인 순수사진인 깁슨 사진을 흔히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재현된 대상으로부터 의미 분석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 시인이 방출하는 음색을 음미하는 것과 같이 그 대상으로부터 환기되는 무엇을 포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진행 과정은 정확히 시를 읽은 것과 같은 반-의미적 읽기에 관계한다. 예컨대 우리는 잡지 기사와 시를 혼동하지 않는다 : 잡지 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언어가 지시하는 분명한 의미들의 조합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시를 읽을 때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적인 조합은 수정되어 근본적으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때 의미적인 조합은 단지 시적 메시지의 배경을 이룰 뿐이고 시가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생기는 여운과 같은 일종의 감각적 추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사진 역시 그 읽기에 있어 분명히 다르다. 이 두 종류의 사진 읽기는 비록 같은 물리적 진행 과정에서 시각적으로 읽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보는 방법(la maniere de voir)”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각적이든 의미적이든 무엇을 “보여준다”라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가를 말하고 반면 순수 사진가는 언제나 의미와 상징의 영역을 넘어 응시자로 하여금 무엇을 “환기시키기”를 원하는 사진가이다.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에서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을 충분히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수사진은 관객에게 대상으로부터 어떤 특정한 은유적인 것을 연상하도록 (거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인 환유적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감동은 사실상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환유적 확장 과정에서 삼인칭 “그(He)”는 응시자 각자의 경우를 말하는 일인칭 “나(I)”로 이동되고 또한 거기서 서로 서로 반죽되어 결국 우리들 공통된 감각인 “우리(We)”로 이동되는 의미적 변화가 있게 된다.②

랄프 깁슨의 사진 혹은 깁슨 스타일의 사진이 가지는 두 번째 개념적인 특징은 인덱스화(indexation)이다. 단편적인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큰 구도 등은 인지 가능한 보이는 세상의 단편으로부터 안 보이는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몸통 즉 형이상학적 실체를 지시하는 인덱스(index)이다. 여기서 인덱스는 언제나 외적 형상의 세계로부터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사진의 위대한 특징인 “인덱스적 이중 구조(시각과 환기 동시에)”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사진은 인덱스화 된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보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보라”라는 무언의 자동생성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사진에서 하늘로 가득 찬 틀로부터 나오는 팔, 돌려진 머리 뒤로 여전히 흘러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 등이 지시하는 것은 단지 무언의 어떤 출현을 증언하는 침묵인 셈이다. 결국 사진의 이중성은 마치 양복의 겉감과 안감과 같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의미적인 영역인 상부구조와 그것이 지시하는 비 인식의 존재이자 형이상학적 존재의 영역인 하부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분으로부터 무언의 몸통을 지시하는 것을 단편화 된 미학 즉 단편 미학(fragmentati
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프레임에 의해 잘려진 단편 즉 사진의 부분(프레임 내부)이 틀 밖의 동체를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단순한 사진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상황의 단편이 인지 불가능한 감각적인 몸통을 지시하는 미학을 말한다. 그것은 비 물질적이고 환기적이고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인 음색을 말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을 단적으로 말해 상부의 인지 대상이 하부의 존재론적 대상을 지시하는 인덱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얼굴은 그 동체를 대변한다”라는 “얼굴화 된 세상(Le monde visagefi /질 들뢰즈)”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예컨대 시적 음색이나 음악의 순수 혹은 형용할 수 없는 귀족성이나 세련미 등은 무형의 존재로 언제나 그 실체를 대변하는 인지 가능한 단편 즉 일종의 표현적 대용물을 돌출 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돌출은 마치 빙산의 하부에서 수면에 나온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인식 영역으로 돌출된 단편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에서 이해된다.
 
한편으로 볼 때 깁슨의 사진에서 도장, 낙인, 상형문자, 웨이브 친 깃발, 이데오그램,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자물쇠 채워진 문, 포도주 병 등의 단편화된 많은 형태들은 모든 감정적 에너지와 다양한 신호를 방출시키는 출발점으로서 현실에 돌출된 표면적 형태(표면화된 형상)들이다. 이때 단편은 그 전체보다 더 완전하다. 예컨대 “깁슨은 미켈란젤로처럼 잘려진 조각이 완전한 조각보다 더 조각적이라고 생각했다”③  또 한편으로 볼 때 렌즈나 틀의 단순 구성에 의한 큰 구도 즉 클로즈업(Clouse up)은 결국 이미지에서 극히 안정적이고 분명한 진술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진술을 가진다.
 
 깁슨의 사진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상 생활의 스냅사진과 같이 흔들림이나 율동 혹은 흐림에 의한 암시적인 움직임(file)은 전혀 없다. 반면 이미지들은 분명한 명암 대비(큰 대각선 명암, 줄 무늬, 얼룩무늬, 직조 등)로 나타나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내용을 교묘히 감싸는 “표면적 조건”(Regis Durand)을 만든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에 거슬러 싸우는 사진의 전투와 죽음과 같은 정(靜)적인 유령을 격리시키는 움직임의 제스처에 익숙해 왔다. 응고된 엄숙함이 보장하는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오싹하게 한다” ④  이와 같이 극히 정적인 이미지의 출현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형이상학적 감정을 발산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감정 - 이미지(image-affections)”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 말은 “(응고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임이 감각과 행위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이미지” ⑤  를 말한다.
 
끝으로 깁슨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세 번째 요소는 특별한 공간 구성에 있다. 그의 사진은 우연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사진으로 마치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이 철저한 건축적인 사고로부터 형성된다. 그래서 사진들의 공간은 건축적인 찬란함과 조각적인 경향 그리고 그래픽적인 완벽한 형식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건축적인 장소로 이해된다(사진 2). 또한 사진의 지시된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진화된다.
 
거기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포토-스틸(photo-stills) 형식의 프레임 즉 큰 구도(Clouse up)에 의한 단편화는 대상을 단지 가깝게 보여지기 위한 강압적인 요소가 아니라 확대된 대상이 출현하자마자 모든 문맥과 서술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프레임 밖으로 방사하는 어떤 강렬한 힘을 발생시킨다. 이때 표면은 수수께끼가 되고 그 공간은 “아무 공간” 즉 “완벽히 이상한 공간, 가장 순수한 자리로 잡혀지는 감정적인 공간이 된다. (...) 이러한 공간은 이미지를 지시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미지를 연상의 다양한 조합들로 열어주고 또한 이미지를 출구에서 추상적인 단계로 지나게 한다” ⑥  이는 곧 열린 공간으로의 도약이다.
 
앞서 말한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는 깁슨의 에로틱한 사진들이다. 특히 깁슨의 후기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몇 몇 누드(에로틱) 사진들은 관능적 욕구를 보다 암시적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 예컨대 장면들은 에로틱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재현이 아닌 여자 신체의 단편들을 보여 주면서 관능적 욕구를 지시적으로 얼굴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서 재현상의 주제로 보여지는 허리끈, 붉은 손톱의 여자 손, 검은 스타킹 등의 단편적인 성적 물신들(사진 3, 4)은 단순한 자료적인 진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얼굴화 된 “신체-얼굴들(corps-visages)”이다. 이는 비 물질적 감성과 성(性)적 에너지의 분출구임과 동시에 그러한 감정의 전율(누구나 공통된 성적 욕구)을 지시하는 사진적 자국(index)이다.

결론적으로 깁슨의 사진은 보이는 세계의 시각이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의 촉각이 된다. 대상과 관객 사이에서 볼 때 재현된 단편은 관객으로 확장되는 존재론적 이동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동은 인식의 상부구조에서 비 인식의 하부구조로, 의미의 영역에서 탈-의미의 영역으로, 진술된 단편에서 내재된 몸통으로의 이동을 말한다. 깁슨의 사진은 결코 형식주의나 표현주의적인 재현이 아니라 단지 인덱스화 혹은 얼굴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상징이나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징후적이고 또한 시적인 “생성-얼굴(devenir-visage)”이고 그때 사방으로 방출되는 감각의 음색은 “사진적 추(abstraiphotographiq
ue)”이다. ●
 
<주요 참고도서>
Courant Continu, Ralph Gibson, Marval, Paris, 1998.
L'Histoire de France, Paris Audiovisuel, Paris, 1991.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L'Oeil flottant : Un voyage vertical, Paris Musees audiovisuel, Paris, 1986.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주)
① 물론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 모델로서 사진 담론은 실질적으로 퍼스(C. S. Peirce)이론과 바르트의 참조주의가 도입되는 1980년대 초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미국 구조주의 분석 중심의 담론에서 프랭크 사진의 분석은 존재론적 시각이 아니라 보다 의미론적인 내용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② 이미지의 장면을 떠나 사방으로 방사되어 퍼지는 연상의 확장 이것을 필립 뒤봐는 “푼크툼의 확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기억의 확장은 관객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확산되는 환유적 확장이다. 역으로 은유적 확장은 분명한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광고나 의도된 대중 전파 매체의 일방적 전달(문화적 사회적 코드)에 관계한다(움베르토 에코).

③ 이러한 단편 미학은 흔히 미술의 미니멀주의와 비교된다. 조각에서 미니멀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관객에 의해 선택된 공간 속으로 합병될 수 있고 또한 사진의 경우도 역시 사진 이미지가 관객이 선택한 주관적 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창조적인 측면은 사실상 전혀 다른 데 있다. 깁슨의 사진에서 중요한 점은 미니멀 조각처럼 단순화 된 형태와 그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로부터 환기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내재적 형상)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깁슨의 사진에서 단순한 볼륨은(기하학적 특징)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적 언어는 단순한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④ Regis Durand, “un regard en reponse : le monde-visage de Ralph Gibso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p. 24.

⑤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은 레지 뒤랑의 “얼굴 개념”(들뢰즈의 분석에서 차용)을 설명한다. 이 말은 질 들뢰즈의 운동-이미지(L'image - mouvement)와 같은 개념을 가지며 특히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를 “탄착(impact)”이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말하자면 부동의 진술) 남은 잔여 찌꺼기(혹은 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개념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탈코드, 무의미)이다”.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p. 97, in Regis Durand, op. cit.

⑥  Gilles Deleuze, op. cit., p. 154-155.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Chiaroscuro 1974-97 시리즈 중
(사진 2) Quadrants 1975 시리즈 중
(사진 3) Infanta 1977-98 시리즈 중
(사진 4) L'Histoire de France 1972-98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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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테마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은 의미적으로 텅 빈 사진이다.
 
인간의 기억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진 정신적 현상은 없다. 아무리 생리학이나 의학이 발달해도 우리의 기억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적 사고는 보편적 진리의 타당성을 위해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고 특히 19세기말부터 합리론과 경험론 특히 실증주의의 명분 아래 더욱 가속화되어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고 있다.

  분명한 논리를 앞세우는 과학적 사고는 물질 중심의 많은 철학적 유파들과 20세기초 구조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사변적 배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정신적 현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과학적인 철학(형이상학)도 당시 과학 지상주의(양의 세계) 시대에 또 다른 큰 줄기(음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의식의 발견과 심리학의 지속적인 발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그 차체를 실증하는 물리적 혹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니체와 베르그송의 반-과학주의 사고 그리고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철학에 있어 사실상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예로 인간의 “기억”이라는 정신적 현상을 볼 때 기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리학적인 관점으로 기억 현상은 의학과 그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더 이상 신비한 신체의 생리 현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기억 현상은 소뇌와 대뇌의 유기적 관계에서 어떤 분비물의 작용으로 우리가 기억하거나 혹은 망각이나 치매현상을 일으킨다고 설명된다. 이는 흔히 일반적으로 과학적 사고에 의한 기억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기억은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창고에서 어떤 외부조건에 의해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돌출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정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의식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치 육안으로 보이는 빙각의 일산이 침수된 빙하의 거대한 하단을 이끌고 있듯이 우리의 정신은 단지 의식에 표출된 기억이나 인식 현상을 말하는 상부구조(혹은 양의 세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배경(fond)이 되는 흔히 심리학에서 무의식(혹은 철학적으로 비인식)이라는 거대한 하부구조(음의 세계)와 함께 이중으로 된 구조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델을 설정하는데 그 중에서 사진의 잠상을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시각적으로 출현한 사진을 의식이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흔히 “사진을 기억의 은유”로 규정(Philippe Dubois)하기도 한다.

  그와 같이 표출된 기억은 거대한 하부구조 안에서 그 원인적인 것(현상학에서 본질)과 관계를 가지고 또한 연속적으로 서로 상관관계(대부분의 경우 원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이러한 연쇄적인 반응을 연상1)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하는 기억(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은 언제나 그 의식의 원인성을 갖는 무의식(비인식)의 세계와 관계하며 이때 상부에 나타난 기억들은 일종의 징후로 간주된다.2) 그러나 과학적 인식은 단지 표출된 징후로부터 보편 타당한 하나의 가설이나 원칙을 세워 혹은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그 징후의 본원적인 실체를 논리적 혹은 의미적으로 밝히는 것(이와 같이 가설적으로 밝혀진 본질을 “형상 form”이라고 한다)을 우선으로 하는 사고이다.
 
그래서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 가능한 대상(의미의 틀을 갖는 형상)으로부터 제외된 현실의 많은 징후들(의미의 영역 밖의 비인식의 대상들)은 그들 역시 가설적인 형상들을 가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예외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학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플라톤 동굴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대상들로 단지 무의식의 세계(혹은 하부세계)에서 잠정적인 존재로만 남게된다(생성 존재론). 가령 어떤 현상이 비록 누구에게나 감지되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보편 타당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은 단지 징후로만 출현할 뿐이다.

  구조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방법론은 상부구조에 출현한 대상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논리와 의미의 타당성을 그 근거로 대상을 분석하는 방식 즉 코드화 된 징후들의 체계적인 분석에 기본을 둔다고 할 때 후기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의미와 코드의 옷을 입지 않은 많은 징후들의 비논리적인 대상(시물라크르 figure)으로부터 하부구조의 그 원인적인 생성을 추적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물질 중심의 편협적인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된 정신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의 이동(대표적으로 예술의 포스트 모더니즘)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70년대 말부터 구조주의자들은 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분석적 방법론(대표적으로 기표 signifiant와 기의 signifie 의 소쉬르 기호학)의 한계로부터 또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였는데 우선 그들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19세기 말 미국의 철학자이자 기호 논리학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신호체계(논리적 실용론)에서 징후로만 존재하는 현실의 많은 대상들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의 출발점이면서 또한 그 이론적인 모델이 되었다. 특히 퍼스의 인덱스 개념은 후기 구조주의 개념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쉬르의 기호체계에서 현실에 출현하는 기호는 두 가지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는 달리, 퍼스는 현실의 신호체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퍼스는 자신의 책 “신호 체계의 서술 Logic as semiotic ; the theory of Signes (1895-1902)”에서 그 첫 기호 유형으로 아이콘(icon 도상)을 들면서 아이콘은 마치 교통표지판의 신호나 화장실의 성별 구별을 위한 그림처럼 “대상이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특징을 근거로 하여 단순히 아이콘이 외시하는 대상으로 보내는 신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신호로 상징(symbol)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징이 외시하는 대상에 보내는 신호로 이러한 대상은 참조에 의한 상징적 번역을 결정하게 하는 어떤 법칙 혹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연상을 근거로 한다.” 예컨대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평화를 뜻하는 비둘기 혹은 특히 현시 광고에서 보여지는 많은 의미적인 제스처나 대상들은 바로 이러한 신호체계에 속한다. 그와 같이 상징은 가장 보편적인 우리들의 지적인 앎과 이성 즉 문화적인 코드(사진에서 스투디움)에 관계한다.

  퍼스는 이러한 아이콘과 상징이 다소 분명한 그 지시대상들을 가지는 것과는 반대로 단지 불특정한 지시대상을 지시하는 또 다른 신호체계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징후 혹은 인덱스(index)로 발자국이나 연기 등과 같이 “지시대상과 실질적인 연결 혹은 물리적 연상에 의한 원인적 관계를 가지는 신호를 말한다.” 징후 즉 인덱스의 특수성은 앞서 말한 두 신호체계에서 보여지는 지시대상과의 유사성 혹은 상징성(의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인성”에 있고 언제나 일 대 다수의 지시대상을 갖고 있다.

  19세기 말 퍼스는 이러한 인덱스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언급하였는데 프로이드가 사진(양화)을 무의식으로부터 상부구조에 표출된 의식(기억)이라고 비유하는 것과는 달리 빛과 그림자로 찍혀진 사진은 발자국이나 연기와 같이 하나의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퍼스의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진을 언급했고 그의 징후론은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객관 타당한 의미의 부재와 대상의 불확실성의 이유로 사실상 기호학적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약 70년 후인 1970년대 말 당시 비평가들 특히 기호- 구조주의자들(후기 구조주의로의 이동)은 퍼스가 언급한 인덱스의 개념을 다시 인용하면서 사진을 더 이상 필연적 유사성에 의한 이미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 사진 영상(특히 스냅사진)은 “절대적 닮음이라는 이유에서 단순한 아이콘이나 보편적인 상징이 아닌 개인적인 대상과 기억이나 의미와의 물리적 접촉에 의한 상황적 원인성을 갖는 하나의 신호”라고 규정하고 또한 “이러한 닮음은 자연에 한 점 한 점 관련되도록 물리적으로 강요된 상황 속에서 생산된 사진에 의거하고 있다”3). 그와 같이 “사진은 어떤 상황들 이상 생각할 수 없다”4)라고 설명된다. 쉽게 말해 사진에서 재현된 대상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발자국과 같은 자국으로 이러한 발자국이 있게 한 원인성 즉 그러한 상황만을 말하고 있다. 보여진 발자국은 사실상 어떤 특정한 대상(발자국의 주인 즉 의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의 경험과 주관적인 경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발자국(사진)의 의미는 사실상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을 의미가 아닌 징후(index)로 간주하는 개념은 오랫동안 사진을 의미와 코드의 분석적 대상으로 간주해 온 당시 기호- 구조주의 학자들5)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곧 후기 구조주의의 결정적인 이론적 형성에 중요한 축을 세우게 했다.6) 또한 모더니즘의 탈당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론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인덱스 개념 즉 로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가 70년대 말부터 집요하게 추적한 “사진적인 것”의 개념이었다.

  사진을 인덱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침수된 빙하(하부구조)를 끌고 있는 빙각의 일산(상부구조)을 말하는 것으로 하부에 존재하는 본질(작가의 본원적인 의도)과의 유사관계가 아닌 원인관계에서 출현한 징후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찍혀진 모래 위의 발자국에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강압적으로 부여하는 분석적인 구조주의자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벤야민의 아우라 발견 이후 처음으로 사진에서 이러한 탈-의미의 개념을 언급한 이는 앙드레 바젱(Andre  Bazin)인데 그는 그의 “자동생성(la genese automa-tique)”에서 그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 “처음으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는 엄격한 규범에 따르는 인간의 창조적인 중재 없이 자동으로 형성된다. (...) 모든 예술이 인간의 출현 위에서 세워지지만 유일하게 사진은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한다.
 
사진은 우리에게 마치 꽃이나 눈의 결정처럼 “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꽃과 눈의 아름다움은 식물이나 자연현상의 오리지널들과 분리할 수 없다.(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7) 여기서 찍혀진 꽃이나 눈은 아름다움이라는 하부구조의 본질을 재현하기 위해 단지 징후로서 선별된 대상일 뿐이지 사실상 일반적인 꽃이나 눈에 관한 상징이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림의 경우와 같이 작가가 감지한 본원적인 음색을 재현하고자 할 때 의도적인 자신의 번역이 가능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진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선별한다. 그런데 그 대상은 원인적인 관계에서 단지 징후를 말하는 일종의 신호탄이나 유도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멀리 산 넘어 피어나는 연기와 같은 것으로 그 연기(사진)의 객관적 의미를 규명하기에는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완전한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황의 원인성”인데 분명한 것은 그 원인이 하부구조를 말하는 산 넘어 존재한다는 사실(사진의 신빙성으로부터)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응시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관련된 의식(연상의 경향)을 가지게 된다 : 예컨대 농부는 산불을 생각할 것이고 군인은 전쟁을 생각할 것이다. 이때 연기에 비유되는 사진은 이러한 연상을 갖도록 하는 일종의 연상 유도체(conduct-eur)역할을 하며 그때 사진을 “생성”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라고 한다. 결국 사진적인 것(index)의 지시대상은 하부구조에 은닉된 본원적인 음색(작가의 창작적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8)
  창작의 관점에서 사진작가들이 재현하려는 것은 앞의 여러 테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편 타당한 의미나 언어로서 표현 가능한 상황들이 아니라 의미의 옷을 입지 않은 내재적 상황이나 음색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사진적 재현은 대부분의 경우 징후로만 가능하며 그때 징후로서 상부에 표출된 대상들은 하부구조의 동체(본질)를 암시할 수 있는 그 동체의 “상황적인 단편들”인 경우가 많다. 그때 이러한 징후들을 마치 얼굴사진으로 그 사람을 대변하듯이 “얼굴화 된(visagefiee) 형상들”9)이라고 한다. 가장 좋은 예로 포도주를 찍은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사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포도주는 어떤 문화적인 코드로서 축제나 파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연기나 발자국처럼 각자 포도주와 연관된 기억의 환기에 관계하는 인덱스 즉 얼굴화 된 본체의 단편(혹은 푼크툼)이다. 사진은 그때 텅 빈 의미 공간(반-의미적인 사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순간 응시자는 보여진 포도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억의 연상적 확장(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을 경험할 것이다. 텅 빈 공간은 곧 바로 응시자의 의식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동생성의 순간이고 타인의 경우가 자신의 경우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거기서 사진의 위대한 힘을 확인할 것이다. 왜냐면 마치 자극된 뇌관에 의해 내향성 폭발이 일어나듯이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감정의 연쇄적 돌출은 곧 감동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은 의미적으로 텅 빈 사진이다. ●
 
<주>
1) 연상에는 현재에서 과거로 하강하는 수직 연상과 그 수직 연상 이후 과거의 거대한 기억 창고에서 일어나는 수평 연상이 있는데 그때의 연상은 시간적인 전후가 없는 무시간적인 연상이다(Henri Bergson의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의 무시간성).

2) 기억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의식에 표출되는데 그 중 시각적인 자극이 가장 중요하다.

3) 퍼스 신호체계에 관한 위의 몇몇 인용구는 C.S. Peirce, Ecrits sur le signe, Paris, Seuil, L’ordre philosophique, 1978, cite par Philippe Dubois, L’act photographique, Natan, Paris, 1990, pp.58 - 63에 관계한다.

4) Philippe Dubois, 앞의 책

5) 당시 기호 구조주의자(semio-structuralisme)는 크게 전통적 기호학자 분석가(메츠, 에코, 바르트, 렝드켄 등)들과 이데올로기 비평가들로 나누어지는데 후자는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 첫 부류는 감각 심리학에서 본 이론가들로 1965년 프랑스 구조주의 이전의 구조주의자들이고, 둘째 부류는 아른하임 바젱, 다미슈, 보드리, 부르디으 등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갖는 구조주의자들이다. 마지막 부류는 사진의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구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된다.

6) Philippe Dubois, 앞의 책.

7) Andre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1945) in Qu’est-ce que le cinema?, Tome I, Ed. du Cerf, Paris, 1975, pp.11-19. 그러나 바쟁은 퍼스의 인덱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50년대 당시 퍼스의 이론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고려해 보면 자신의 자동생성 개념은 기호학적 추론이 아닌 사진의 존재론적 개념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된다.

8) “생성”은 원점, 제로 상태, 출발점으로서 시작을 말한다. 본원적 음색의 사진적 재현이 자국으로서 사진이고 다시 말해 출현된 사진은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생성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그 지시대상으로 한다. 좀  더 확장적으로 말해 거의 모든 예술의 시공간적 출현은 이와 같은 사진의 인덱스의 원리에서 하나의 징후(사진적인 것)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개념의 변화(물질이 아닌 정신적 관점)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9) 얼굴화 된 것은 곧 인덱스화 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표현적 움직임(Le movement d’expression!)”라고 하는 존재론적 감정들을 끌고 있다(들뢰즈의 용어, “단편미학”에 관계한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를 또한 “탄착 impacts”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부동의 진술) 남는 잔여 찌꺼기(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푼크툼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 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무의미, 탈코드)을 말한다. Gilles Deleuse, Cinema, L’image-movement, Minuit, 1983

글 .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프랑스 역사”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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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깁슨, 혹은 ‘결정적’ 세부의 미학
최봉림


 


랄프 깁슨은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 세부를 ‘결정’하는 것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Cartier Bresson의 ‘결정적 순간’처럼 작가의 대상에 대한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 등이다. 그런데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대부분 파격적이다. 대상을 과감하게 절단하거나,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다가선다. 그 결과 파편적 형상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연시킨다. 작가가 부여한 제목을 보고, 주어진 이미지의 형상과 문맥을 해독한 후에 랄프 깁슨의 카메라 앵글,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추측한 후, 이미지의 상황을 유추해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는 작가의 사진적 정황, 피사체의 환경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인지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피사체의 전모와 작가의 카메라 워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대개 랄프 깁슨의 B급 사진일 뿐이다. 그의 걸작들은 거의 대부분, 피사체의 정체성과 사진적 상황을 파악하려는 욕구를 혼돈에 빠뜨린다. 해답 없는 의문, 불확실한 대답을 연장시키면서 논리적 이성을 기능 장애에 이르게 한다. 그의 탁월한 이미지들은 피사체의 의미와 이미지의 상황을 이해 불능은 아닐지라도, 불확실의 상태로 만드는 파편의 이미지이며, 확실한 의미를 지향하는 이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트라우마 trauma의 이미지인 것이다.

의미의 불확실성, 우리의 인식능력에 불안감을 안겨주는 랄프 깁슨의 극단적인 클로즈업,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는 그러나 결코 일탈의 자유, 무질서한 프레이밍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결정적 세부는 즉흥적 감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주의적 규범, 현실을 엄정하게 바라보는 기하학적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일탈적인 구도, 예외적인 구성을 사진의 목표로 삼지만, 그의 프레이밍은 기하학적 균형, 엄격한 공간구획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우연에 내맡긴 일탈적 구도, 사물의 우발적 포착은 결코 랄프 깁슨을 규정하는 어사가 될 수 없다.

그의 사진은 초현실주의적 몽환을 기도할 때조차, 혹은 육감적인 여체일 경우조차 냉정함, 엄격함,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랄프 깁슨은 모순 어법을 수용한다. 그의 사진예술은 ‘냉정한’ 일탈, ‘엄격한’ 파격이며, ‘정제된’ 꿈의 세계, ‘절제된’ 에로티시즘이다. 미니멀리즘 Minimalism의 간결함으로 몽환의 세계를 포착하며, 고전주의적 균형감각으로 비근한 일상을 구획하며, 기하학적 추상으로 여체를 재단한다. 작가가 1969년에 설립한 출판사, 러스트럼 Lustrum에서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그의 흑백 사진 삼부작, 즉「몽유병자 The Somnambulist」(1970), 「데자뷰 Deja-vu」(1973), 그리고「바다에서 보낸 나날 Days at Sea」(1974)은 랄프 깁슨의 극단적인 클 로즈업,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가 고전주의적 절도, 미니멀리즘의 간결함, 기하학적 추상의 엄격함과 기이한 짝을 이룬 예술사진의 희귀한 성공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불완전한 일상의 조각, 인체의 극단적인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엄정한 조화, 단단한 균형, 절제된 통일성을 구현한다. 
남성공유하는 페티시즘 fetishism, 보다 정확히 말하면, 랄프 깁슨의 페티시즘의 감각들을 보여주는「왕녀 Infanta」(1995) 시리즈는 강력한 성적 욕망의 시선조차 그의 엄정한 사진미학으로 통제하려는 극단적 시도로 보여진다. 여성 인체의 세부를 거의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환원시키면서, 그의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스타킹, 손톱, 허벅지, 입술을 미학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그의 욕망을 기하학적 추상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욕망을 자극하는 세부의 강도가 작가의 미학적 통제력을 넘어설 때면, 여인의 육체는 무정형적인 유체 amorphous fluid의 모습을 띤다. 작가가 여체 탐구에서 흔히 모델의 머리를 제거하는 것도 그의 리비도의 강도와 깊은 관련을 맺는 듯하다. 이성과 지성을 상징하는 얼굴을 절단하고, 욕망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신체기관인 머리를 어둠 속에 가둬버린 것은 그의 페티시즘에 구속 없이 몰입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일 것이다.
사실 어둠과 그림자는 랄프 깁슨에게 있어서 그의 강력하고도 간결한 사진적 구성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왜냐하면 “프레임이 압박할 때까지, 북의 가죽처럼 탄탄해질 때까지” 불필요한 현실을 빼버리는 작가에게 있어서, 즉 현실의 최소한으로 사진을 구성하려는 작가에게 있어서, 어둠과 그림자는 “원치 않는 현실의 많은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보기에 그림자는 불필요한 현실을 뺄 뿐만 아니라, 형상을 창조한다. “그림자는 단지 빛의 변형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자는 형태를 두드러지게 하며, 형상이 된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그림자와 어둠은 그의 사진예술에서 빛보다 오히려 중요하다. 따라서「명암대조 Chiaroscuro」(1990)는 그의 전 사진작품을 관류하는 특징이다. 깊은 그림자는 작가의 비근한 일상의 사물을 의미심장한 대상으로 탈바꿈시키며, 어둠은 그의 일상적 현실을 초현실주의적 몽환의 세계로, 그리고 여성의 평범한 육체를 강력한 페티시즘의 대상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랄프 깁슨에게 있어서 사진은 빛의 예술이 아니라, 어둠의 예술인 셈이다.

어둠과 깊은 그림자에 대한 집착,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피사체를 그 정체성이 애매모호할 때까지, 그러나 기하학적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압박하는 그의 경향은 그의 칼라작업에서도 계속된다. 랄프 깁슨은 칼라사진에서도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세부의 구획은, 흑백사진처럼 작가의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에 의존한다. 강렬한 흑백의 대립이 화려한 색상의 대비로 바뀌었을 뿐,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일상의 현실을 낯선 새로움으로 바꾸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칼라사진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의 흑백사진 삼부작에서 보여줬던 사진적 특성들은 칼라사진에서도 그렇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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