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feller)를 위시한 대부호 3명의 자금출연으로 1929년에 문을 열었다. 초대관장은 독일의 전위적 예술운동과 형식주의 미학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 1902-81)였고, 그는 1943년까지 관장직을 맡으면서 “현대미술의 연구를 고무, 발전시키며, 현대미술을 산업과 실제생활에 적용시키며, 대중교육을 행하는” 예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뉴욕 현대미술관은 사진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기획을 했다. 그 첫 번째는 1937년에 기획된 사진 발명의 공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1940년 11월, 미술관 사상 세계 최초로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설립한 것이었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전시회, ‘사진 1839-1937’을 기획한 사람은 뷰먼트 뉴홀 (Beaumont Newhall)이었다. 뉴홀의 사진과 관련된 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폴 삭스(Paul J. Sachs)의 지도하에 1931년 미술사 석사를 취득한다. 삭스 교수는 또한 알프레드 바의 스승이었으며, 금융 대부호, 골드만 삭스(Goldm -an Sachs)의 아들로 미술관 운영에 개인과 기업의 후원제도의 도입과 이를 위한 기부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또한 관객들을 일종의 고객으로 상정하는 경영 시스템을 적극 교육한 미술사학자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뉴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잠시 일한 후, 다시 하바드로 돌아와 폴 삭스를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에 등록한다. 1926년 이후 사진작업과 사진역사에 입문한 그는 박사과정 중 당시로는 대단히 생경한 미술사의 대상인 사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 결과 1932년과 1935년 사이에 그는 사진 발명의 경위와 19세기의 미술과 사진과의 관계를 다룬 한 편의 에세이와 사진에 관한 세 편의 서평, 그리고 한 편의 전시회 리뷰를 쓰게 된다. 뉴홀은 경제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35년 스승이 상임이사로 있고, 알프레드 바가 관장으로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서로 취직한다. 그리하여 그는 1936년에 알프레드 바가 기획한 전시회, ‘큐비즘과 추상예술 (Cubism and Abstract Art)’의 전시도록에 들어갈 444권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조사, 작성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1927년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웰레슬리(Wellesley) 대학의 교수 시절부터 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근, 현대 미술사 교과과정을 개정하면서 사진과목을 포함시켰고, 1927년과 1928년의 유럽 여행 당시에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긴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를 방문했고, 쾰른에서 열린 국제 보도사진전, ‘프레사(Pressa)’를 참관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 관장직을 수락하면서 작성한 ‘취지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그는 이미 ‘사진부’의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바는 1936년 뉴홀에게 1937년에 있을 초대형 사진 전시회의 기획을 제안한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이 전시회는 ‘큐비즘과 추상예술’, ‘환상미술, 다다와 초현실주의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1936) 그리고 1938년에 있을 전시회,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28)’와 더불어 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획전이었다.
1839년에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에서 1937년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포괄하는 전시회, ‘사진 1839-1937’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29년 독일의 스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영화와 사진(Film und Foto)’이라는 전시회였다. 독일, 프랑스, 미국, 소련의 사진들을 망라한 이 국제사진전은 무엇보다도 사진만의 고유한 재현 특성에 전념한다고 여겨지는 사진, 다시 말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섬세한 디테일과 심도를 구현하는 사진이나 혹은 빛에 반응하는 사진의 특성에 의거하여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계발하는 사진, 그리고 순간포착을 활용하여 사진만의 고유한 시각을 발굴하는 사진들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다. 또한 이 전시회는 이른바 '예술사진'만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사진이 적용되고 활용되는 다양한 분야들을 망라하여, 사진이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재현매체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전시회의 기획 전반을 주도한 인물은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였고, 소련 사진의 경우는 엘 리시츠키, 프랑스의 작가선정은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가 주도했다. 미국 사진가의 선정은 스트레이트 사진의 기수, 에드워드 웨스톤과, 예술사진에서 광고와 초상사진까지 섭렵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담당했다.
‘영화와 사진’ 전시회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기획전에 미친 여파는 무엇보다도 뉴홀로 하여금 사진의 본질, 사진의 특질을 고려하면서 전시사진을 선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관의 사서는 ‘영화와 사진’ 전시회처럼 모더니즘 미학에 충실한 사진들을 전시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뉴홀은 스투트가르트의 사진전이 그랬듯이 전시사진을 ‘예술사진’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영화와 사진’처럼  천문학 사진, 엑스레이 사진, 광고사진, 보도사진들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사진 1839-1937’은 ‘영화와 사진’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사진전의 전시디자인을 돈독히 참조했다. 전시디자인을 담당한 스위스인 헤르베르트 마터 (Herbert Matter)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장 입구를 ‘영화와 사진’의 포스터 사진과 유사하게 사진가를 의외의 각도에서 대각선 구도로 포착한 대형사진으로 장식했다. 스투트가르트의 ‘영화와 사진’ 그리고 뉴욕의 ‘사진 1839-1937’의 직접적 연관성은 전자를 기획한 모홀리-나기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후자를 위한 명예 자문위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7년에 기획한 전시회가 사진의 역사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이 때 뉴홀이 집필한 전시도록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게 될 「사진의 역사, 1839년에서 현재까지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1949, 1964, 1982)의 초벌 원고가 되는 까닭이다. 전시도록은 90 페이지의 분량이었고, 시대 순서에 따라 90점의 사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작가, 제목, 프로세스를 명기하는 것이었다. 시대구분은 초기사진 (1839-1851), 근대사진(1851-1914), 현대사진 (1914- )으로 구분되는 바, 1851년은 콜로디온타입이 사진계에 도입된 해이며,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이다. 그러니까 뉴홀의 시대구분은 한편으로 사진기술공정의 중요한 변화를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상황의 격변을 고려했다. 사진역사의 시대구분을 사진의 기술적 여건의 변모에 연동시키는 전자의 경우는 뉴홀 이전의 ‘사진의 역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시대구분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인, 요셉 에더 (Josef Maria Eder,1855-1944)가 1905년에 저술한 「사진의 역사 Geschichte der Photographie」이다. 이것은 1932년, 2권의 책으로 개정 증보되고, 뉴홀이 기획하는 전시회 1년 전인 1936년에 영어로 번역된다. 이 영어본은 1945년, 1976년 재판을 거듭한다.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 젤라틴 브로마이드로 이어지는 기술공정에 의한 사진의 역사는 여전히 시효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불어로 된 사진기술 진화의 역사는 조르쥬 포토니에 (Georges Potonni) 가 1925년에 쓴 「사진 발명의 역사 Histoire de la deouverte de la photographie」이며, 이것은 1935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사를 시대구분의 좌표로 삼는 일반 미술사의 한 경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의 전시회와 전시회 카탈로그가 드러낸 폐단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적 감정이 전시 작가의 선정 뿐 아니라 도록에 실리는 작가의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 사진전의 기획방식과 전시디자인에 큰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진가는 단지 15명만이 전시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독일 모더니즘 사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의 대표작가, 알버트 렝거-파츠와 아우구스트 잔더가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반면 미국인은 84명이 전시되고 52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영국인은 27명이 전시에 선정되고 17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프랑스인은 87명이 전시되고 27명이 도록에 수록된다. 전시작가와 작품과의 접촉의 편의성, 작품대여의 가능성,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국가에 따른 ‘편파적’ 선정의 불가피한 이유로 고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주의적 편파성은 그리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1949년에 출간되는「사진의 역사」초판의 인덱스에 나타난 독일인은 13명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사진기술의 진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사진 1839-1937’은 뉴욕 전시회가 끝난 후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진의 개괄적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보전된 사진대가들의 예술적 면모를 알렸다. 그리고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초대 관장이 1929년의 취지서에서 예고했듯이, 세계 최초로 ‘사진부’를 설립하여 사진을 현대 예술의 한 분과로 공식 승인했다. 복제예술의 수집과 전시를 담당했던 미술관의 ‘판화부(Print Department)’에서 분리된 사진은 이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예술매체로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사진부의 위원장은 프린스턴 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맥알핀(David McAlpin)이었다. 대학생시절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집했고, 1936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한 사진 갤러리, ‘미국인의 광장(An American Place)’에서 안젤 아담스(Ansel Adams)의 사진 8점을 구입했던 그는 독립적인 큐레이팅 기관으로서의 사진부의 목표와 전략을 총괄했다. 그리고 사진부의 초대 큐레이터는 당연히 ‘사진 1839-1937’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해낸 뷰먼트 뉴홀이었다. 부위원장은 f.64 그룹의 대표작가, 안젤 아담스(Ansel Adams)였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청교도적 발전 양상인 f.64 그룹의 대표자가 ‘사진부’의 위원장과 큐레이터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부위원장의 직책을 수행한 것은 결코 정실(情實)에 따른 임명이 아니었다. 사진이 미국의 현대 미술에 있어서 독자성, 자율성을 인정받는데 있어서 f. 64 그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전후로 미국사진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 혹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유럽 사진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한다. 사진의 특수성, 자율성을 구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소묘예술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1920년대 들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권위 있는 공공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의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특질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f. 64 그룹과 더불어 미국의 사진은 18세기 후반 서구 사회가 확립한 모더니즘 미학이 요구하는 예술의 두 조건, 즉 세속적 유용성과 경제적 이해추구의 산물이 아닌 고상한 정신성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그리고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자신의 특질을 구현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전자, 즉 정신성의 구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예술’, ‘예술 사진’을 위한 청교도적 엄격함을 계승함으로써 이루어지며, 후자, 즉 사진의 자율성은 사진 매체에만 적용되고, 오직 사진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사진 결과의 예시(previsualization) 규범인 동시에 완벽한 촬영과 완벽한 프린트를 허용하는 존 시스템이라는 사진적 재현체계를 통해 획득된다. 사진예술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의 완벽주의는 사진가-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사회에 인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존 시스템은 데생과 구도, 구성이라는 회화적 규범에 사진기예의 습득을 의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진적 규범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f.64 그룹과 더불어 모더니즘 미학의 두 요구조건을 만족시킨 미국의 예술사진은 모더니즘 미학을 수호하는 제도적 장치인 한 대형 미술관에 의해 현대 미술의 한 분야로서 공식 인정받으며, 그 대표자를 분과의 핵심 일원으로 자리잡게 했던 것이다.  
 1942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양시키고자,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기획 하에 ‘승리로 가는 길(Road to Victory)’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다. 센세이셔널한 전시디자인과 강력한 승전 메시지로 범사회적 호응을 얻어낸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45년 또 다시 애국주의적 사진전, ‘태평양에서의 힘(Power in the Pacific)’을 기획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사진의 사회적 호소력, 사진의 공공적 활용에 눈을 돌린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사진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관객동원을 하면서 여론의 주목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회화주의 사진가에서 상업사진가로 변신하여 커다란 부를 누린 스타이켄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으로 임명된다. 사진예술을 위한 규범적 기예, 존 시스템을 개발한 안젤 아담스와 사진의 역사에 정통한 뷰먼트 뉴홀은 이에 반발하여 현대미술관을 떠난다.  
1948년 뉴홀은 사진의 제국주의적 기업인 코닥사가 설립한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 사진 박물관(Inter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의 초대관장으로 자리 잡으며, 그 이듬해 「사진의 역사」의 초판본을 출간한다. 3천 부의 초판본이 완전히 팔리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1964년에 나오는 「사진의 역사」의 개정판 3천 부는 출판 몇 개월만에 매진된다. 이후 뉴홀의 저서는 재판의 재판을 거듭하여 어떠한 「사진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적 인기를 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사진역사가 곧 세계 사진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그러나 분명하게 진술하는 뉴홀의 「사진의 역사」가 세계의 사진가, 작가지망생, 사진에 문외한인 미술사가들에게 사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뷰먼트 뉴홀의 초상>,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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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91
 
있는 그대로의 인물들을 찍은 사진 ...과장되지 않은 장면...그러난 무표정의 연출...
거대한 크기의 이 증명사진은 오히려 연출된 인물사진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묘한 감탄사를
자아낸다는 이유로 토마스 루프를 유명하게 했고 현재 엄청난 금액에 판매되고 있단다.
어제 미술관 가는 길에서 알게된 이 사진작가는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재기발한 연출과 촬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세계적인 사진작가란다. 
처음엔 몇몇 작품들을 보고 좀...황당하던데...
신기하지 큐레이터의 설명을 덧붙이니 그게...말이야...
다...달라보이더란 말이지...
암튼 무엇이든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과 접근이 돈을 부르는 시대다...
이 사람의 작품은 보통 1억이 넘는 고가란다...
몇몇작품들은 정작 자신이 직은 것도 아닌 차용을 통한 재정비임에도...
하긴 꾸미는 것도 재주고...
그게 오늘날의 예술계를 거듭나게 한다니까...
결국...현대 미술은 누가 잘 조작하고 이미지화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이지...
마르셀 뒤샹이나...데미언 허스트같은 이들처럼...
뒤샹이 처음 변기를 두고 [샘물]이라 명명하며 전시회에 작품이랍시고 내놓았을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당해했나...
그런데 결국 그것이 [다다이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형성하면서
새시대를 열었지...
알 수 없는 세상이야...아니지...너무 뻔...한 세상인가?
 

= 토마스 루프 =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46)는 현재 세계 사진시장을 이끌고 있는 주역 중의 한 사람.

기록사진이 아닌 아이디어 사진이 특징이다.

전시에 맞춰 최근 방한한 작가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 포착할 뿐이라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매체의 한계를 실험했다”며 “사진은 직접적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의 이미지,

조작된 2차적 현실”이라고 말했다.

 

 

1958년 독일 젤 암 하메바흐(Zell am Harmersbach) 태생인 토마스 루프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번(Bernd) 와 힐라 베커(Hilla Becher)의 지도하에 수학한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루프는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고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접근을 해왔다. 루프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할 뿐' 이라는 전제 하에 끊임 없이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여 이제껏 16시리즈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루프는 사진은 현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완벽한 사진을 알아볼 수 있지만 동시에 완벽한 사진은 없다는 것이다. 사진은 우리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이 아닌 이미지의 이미지, 즉 조작된 2차적 현실로서, 루프의 미학적 연구를 통해 열리는 다층적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이 사회정치나 미술사 등 특정 현안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도 연작 작업, 특히 누드나 인물사진과 같은 작업은 본질적으로 동시대인의 문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요번 아라리오 에서 전시될 작품들은 루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전체 16시리즈 중 9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루프가 이제까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르의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큰 이유는 그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기록사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입각한 다양한 실험정신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독일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의 ‘누드’ 연작 중 하나. 인터넷 누드 화면을 디지털 방식으로

합성한 사진들은 ‘사진은 조작된 현실’이라는

작가의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 아라리오갤러리

 

Porträts (초상사진)1981-
영상적 구도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에 입각해 인물사진 장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현대식 표현방식을 모색한 결과 상반신 촬영에 인물의 얼굴을 전면에 배치하는, 그 어떠한 심리적 분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사진은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한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각각의 인물을 석고상처럼 촬영하려는 것이었다. 미소나 웃음, 또는 카메라를 '유혹'하는 등의 감정표현은 일체 배제하기로 했다. 대상 인물은 자신 주위의 사람들 중 직관적으로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동료, 친구, 아카데미의 급우들, 뒤셀도르프 라팅게르 슈트라세의 유흥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촬영에 임하게 됐다.

 

06h 04m/-70° 1992 260 x 188 chromogenic color print

 

Sterne (별)1989-1992 제작
학창시절부터 루프는 사진과 천문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므로 검은 바탕에 하얀 점이 흩뿌려진 기본적인 구도의 추상화를 고려하는데 있어 하늘을 모티프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 장비로는 전문적인 천체사진을 결코 제작할 수 없음을 깨달은 루프는 유럽남부관측소(ESO) 자료실에서 구한 음화 원본 1212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반구의 밤하늘을 포착한 이 과학사진들은 칠레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슈미트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것이다.

Zeitungsfotos (신문 사진)1990-1991 제작
신문사진을 레프로 카메라로 칼라 재현 (negative 4 x 5 inch)
1981년에서 1991년 사이 토마스 루프는 독어 일간지 및 주간지에서 2500장 이상의 신문사진을 수집했다. 이 사진들이 지닌 엄숙한 형식은 예술적 이유가 아닌 편집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뉴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사진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였기 때문이다. 루프는 자신의 자료에서 추려낸 400개 이미지를 재현하고 두 칼럼에 걸쳐 2:1 비율로 인화하여 아무런 설명 글 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표현방식을 택한 이유는 '신문사진' 자체를 연구하는 동시에 이 사진들이 종래의 기능에서 분리되면 어떤 정보를 전달하게 되는지 모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Herzog & de Meuron (헤르조그와 드메론 건축사진)1991년 -
1990년 쟈크 헤르조그 (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메론 (Pierre de Meuron)은 1991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루프에게 자신들이 설계한 건물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루프는 라우펜의 리콜라 창고를 찍고자 했으나 장거리 여행을 원치 않았던 관계로 바젤에서 사진작가를 고용해 자신이 지시한대로 촬영하도록 했다. 바젤에서 송부된 여러 장의 사진을 컴퓨터로 조합 처리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루프는 그 후에도 과거에 사용한 기법을 토대로 헤르조그와 드메론이 설계한 건물을 여러 차례 촬영했으며 이들의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에베르스발데 대학 도서관 외벽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는데 루프의 <신문 사진> 시리즈에 포함된 사진을 사용했다.

Plakate (포스터)1996년 - 디지털 처리 몽타쥬
1996년에 발생한 일련의 정치 사건은 정치예술에 대한 루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존 하트펠드(John Heartfeld)의 작품과 20년대와 30년대 사이의 러시아 프로파간다 포스터에 영감을 받아 기존의 시각적 자료를 토대로 한 <포스터> 시리즈를 발전시켰다. 루프는 의도적으로 1996년에는 이미 쇠퇴한 콜라쥬 기법을 모방함과 동시에 현대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켜 이번 시리즈의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했다.

nudes (누드 사진)1999년 -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 디지털 방식으로 수정한 포르노 사진들
1998년경 누드사진 작업에 착수한 루프는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에서 생성되는 화소(pixel) 기반의 추상사진을 소재로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누드사진을 조사하던 중 포르노 분야를 접하게 된 루프는 인터넷상의 이 사진들이 해상도가 낮아(72dpi) 픽셀구조가 자신이 실험해오던 것과 유사함을 발견했다. 루프는 인터넷 사진에도 같은 기술을 적용하여 픽셀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처리했다. 희미함과 흐릿함을 유도하는 기술을 적용하고 간혹 색상을 수정하거나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했다. 루프는 연작을 통해 오늘날 인터넷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제공해주는 각종 성적 환상 및 행위를 다루고자 했다.

l.m.v.d.r. 1999년 -
1998년 줄리안 헤이넨(Julian Heynen)은 토마스 루프에게 크레펠드의 쿤스트 미술관에서 개최할 루드위그 미스 반 데 로(Ludwig Mies van der Rohe) 건축사진전을 위해 그가 설계한 1927-1930 사이의 빌라를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진전은 미스 반 데 로에가 예전에 살았던 집이자 지금은 현대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Haus Lange와 Haus Esters의 보수공사 후 재개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프는 Haus Tugendhat, Haus Lange, Haus Esters, Barcelona Pavilion 건물들 그 자체와 이 건물들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어 헤르조그와 드메론 시리즈에서처럼 모든 기법을 총동원해 이 두 건물을 촬영했다. 크레펠트에서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예정인 1938년까지의 미스 반 데 로 건축 회고전을 준비하던 테렌스 라일리(Terence Riley)는 루프에게 현존하는 미스 반 데 로의 나머지 건물들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직접 촬영할 수 없었으므로 기존의 영상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Substrate (근원) 2001년 -

 

substrat 11-I 2003 284 x 186 chromogenic color print


루프는 <nudes> 연작에 사용할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상의 가상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적 수단으로 전송되는 시각적 자극만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진과 정보가 서로 중첩되는 인터넷상의 사진 홍수 속에서 더 이상 시각 정보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루프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이런 시각적 공허함을 관통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 일본만화를 원자료로 삼아 여러 개의 층으로 중첩하고 합성시켜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만들어냈다.

m.d.p.n. 2002~2003

 m.d.p.n. 28 2003 130 x 166 chromogenic color print

 

m.d.p.n. 33 2003 130 x 190 chromogenic color print
 
유명 건축가인 루이기 꼬센자(Luigi Cosenza)가 1929년 나폴리에 설계한 어시장을 촬영하는 m.d.p.n.에서 루프는 미스 반 데 로에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기법을 적용했다. 디지털 방식을 적용하여 나폴리 어시장을 오늘날의 모습과 원래 모습, 그리고 원시적인 도시적 맥락에서 보여주는 합성적 이미지를 창조하여 과거와 현재를 상호교차시키는 세련된 연작을 탄생시켰다. m.d.p.n. 역시 l.m.v.d.r.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진과 자료사진을 조합하는 연작으로 제작하였으며 이 사진들을 동일한 기법으로 처리하여 고전적 건축물에 새롭고 독자적인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예전에 받아 놓은건데 출처가 생각이 안나네요;;;
 
 
 
 
 
 
 
 
 
Posted by stormwatch :





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최봉림


 

 

I. 들어가면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라는 용어는 현대 미학과 예술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키워드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의와 평가는 필자들에 따라 너무나 굴곡과 편차가 심하다.  발음 속에 내재된 필자들의 억양, 그리고 의도에는 아방가르드의 외연마저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 그 진화의 양상에는 공통된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 임의적 정의, 미학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가 일쑤다. 필자의 미학적 취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거나, 혹은 ‘소외된 데카당스’ 예술로 비난한다. 그러나 논리적 수미일관성, 실증적 자료, 필자의 예술관의 피력을 동반한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단 하나만의 객관적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미학과 비평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행하는 필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범주 규정이 특정 운동, 인물을 일시적으로 거명한다 할지라도 이 어사의 미학적 기원과는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들이 정의하는 아방가르드의 경계, 안과 밖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특정 문예사조들, 특정 문예그룹들, 혹은 특정 문예운동들과는 달리,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처럼 그 전성기를 일정 시기로 국한할 수 있는 시대적 미학개념이라기 보다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도래할 초시대적 개념이면서, 산업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낭만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생겨난 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관점에 따라 낭만주의, 심지어는 자연주의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포섭할 수 광의적 미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정의와 적용이 임의적일 경우, 그것은 미학과 비평의 역사를 오도하거나, 근대와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혼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 문맥, 그 어의의 역사적 변이를 고려치 않고, 단지 그것을 자신의 비평적 판단, 미학적 분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아방가르드’는 임의적 비평, 이분법적 분류를 위한 프로쿠루테스의 침대로 사용될 수 있다.

II. 상반된 아방가르드 : 모더니티 혹은 키치
아방가르드라는 어사의 의미작용을 설득력 있게 조작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의 예술적 상황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분할, 비평하는 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자신의 미학적 주장을 아방가르드라는 광의적 용어에 투사하면서 현대 예술의 주요 양상들을 지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들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초시대적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근, 현대예술에 포괄적 접근을 허용하는 용어로 기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예술의 주요 양상은 ‘아방가르드’로 정의되며, 아방가르드는 근, 현대예술의 긍정적 상황과 부정적 양상을 가르는 경계 개념이 된다. 그 경계선 이편에는 아방가르드를 통해 현대 예술의 새로운 긍정을 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있고, 저편에는 그것을 통해 현대 미술의 불모성을 보는 장 클레르 Jean Clair (1940- )가 있다. 20세기 중반부 미국 미술비평을 주도한 전자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우리가 현재 소유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주1)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리 피카소 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비평가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근대성의 우스꽝스런 희화일 뿐이다.”주2)그들은 한편으로 예리하게 설정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통해 20세기 미술 전반을 조망하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의 정의, 그 비평적 사용을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미학적 개념의 이해에 적지 않은 혼선을 야기한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중요한 에세이는 「Partisan Review」의 1939년 가을 호에 실린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 그리고 동일 잡지의 1940년 7-8월 호에 실린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이다. 이 둘의 글에서 미국의 평론가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을 개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두 특성을 설파한다. 그 첫째는 예술을 사회로부터 분리, 격리시켜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활동영역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각 예술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순수시 pure poetry, 추상 abstract 혹은 비구상 nonobjective 미술을 ‘아방가르드’로 옹호하기 위한 그린버그의 알리바이다.
그린버그는 최초의 아방가르드를, 예술사의 정설에 따라, 낭만주의에 침윤된 보헤미아 그룹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래한 대중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부르주아의 범속성, 그들의 진보에 대한 맹신 그리고 이상을 모르는 실리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예술로의 도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꿨다.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과 절연된 순수한 예술, 사회적 잔재가 배제된 절대적 예술을 추구했다. “공중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아방가르드 시인 혹은 예술가는 예술을 엄격히 규정하고,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논외가 되는 그런 절대의 표현으로 고양시키면서 그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주제 혹은 내용은 역병처럼 기피의 대상이 된다.”주3)
그린버그가 말하는 아방가르드의 ‘주제 혹은 내용의 기피’는 부르주아 사회의 범속적 일상의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까닭에, 예술은 세속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정신활동의 영역이 된다. 현실의 재현을 기피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미학과 아카데믹한 예술형식의 부정을 동반한다. 현실의 재현을 지향하는 ‘모방 imitation’ 이론은 물론이고, 미술의 경우, 문학적 ‘주제 혹은 내용’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문학성을 모방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ut pictura poesis’주4) 역시 거부의 대상이 된다. 범속한 사회 현실과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추구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현실의 사실주의적 모방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현실보다 우월한 실체적 현실의 모방과도 단절한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는, 실체적 본질 God조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모방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과 문학의 창조 규율들과 창조 과정의 절차들 그 자체를 결국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추상 abstract’ 예술의 탄생한다.”주5)             
그린버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질적 저하는 문학성을 재현의 모델로 삼은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기인한다. 회화의 본질, 순수성을 저버리고 문학을 전범으로 삼아, 이야기 historia의 재현을 모색한데서 비롯된다. 아카데미 회화라 통칭되는 이 조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이라는 문학적 담론에 의거한 이야기 서술 narration에 전념했고, 선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제도화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삼차원적 효과를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려는 기예들에 몰두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문학과 조각과 같은 여타 매체의 재현효과를 모델로 삼은 아카데미 회화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라는 예술들의 혼용 confusions of arts 경향의 전형적 희생양이다. 따라서 회화 장르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현실 환영주의 효과 illusionist effects에 사로잡혀, 회화 매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저버린 해묵은 아카데미즘을 극복한 일군의 화가들이 된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의 총체적 정의는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매체의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여타의 예술 매체들의 방법, 수단, 절차와의 단호한 단절을 꾀하는 예술가 집단이다. 아방가르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작업하는 특정 매체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그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물성 materiality, 작업 과정들에 전념하면서, 타 매체들의 특성에 영향 받고, 타 매체들의 속성들이 개입되는 것을 청교도적으로 금기시한다. “(...) 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들 활동 영역의 순수성과 영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성과를 성취했으며, 그것은 전 문화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다.”주6)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로, 브랑쿠지, 클레, 마티스, 그리고 세잔느조차 그들의 영감은 그들이 작업한 매체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의 예술이 주는 흥미로운 감동은 거의 전부, 공간의 발명과 배열, 평면, 형상, 컬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순수한 우려와 이러한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데 있는 듯하다.”주7)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는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특성과 순수성의 탐구를 보다 강조하는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1766년에 출간된 레싱 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들』의 현대적 후속편에 해당한다. 레싱의 글은 18세기 후반, 한편으로는 그 당시를 지배한 ‘시는 회화의 말하는 방식이며, 회화는 말없는 시의 양상’이라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예술 상호간의 화합, 예술 매체간의 상호 혼용을 선구적으로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예술 매체의 차이,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매체들에 고유한 질서와 규율 속에서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그린버그의 글은 모더니티의 태동을 위한 레싱의 주장을 ‘아방가르드’의 전투적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다 새로운’ 모더니티를 위한 주장이다.
당연히 조형미술에 종사하는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레싱의 주장을 본받아, “문학성과 주제를 강력히 배제하며” “여러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확립하려 시도”한다.주8) 그리고 각 매체에 고유한 특성, 순수한 본질을 따른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회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승복하는 역사다. 회화 매체의 저항은 주로 사실주의적 원근법 공간 (재현)을 위해 회화의 (지지체인) 평면에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 to hole through’ 노력들에 대한 회화면의 저항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승복을 행하면서 회화는 (외계 현실의) 모방과 아울러 ‘문학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실주의적 모방과 상관관계를 맺는 회화와 조각의 혼용을 제거한다. (한편 조각은 돌, 금속, 나무 등과 같은 재료들을 그 특성과는 무관한 형상들로 만들려는 예술가의 노력에 그 재료들이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한다.) 회화는 명암 대조법과 음영 부조법을 포기한다. 붓질 brush strokes은 대부분 붓질 그 자체를 위해 분명히 드러난다.”주9)
이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를 간략히 정의 내려도 될 듯싶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 자족성 속에서 각 예술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작가 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형예술의 경우, 매체의 순수성 속에서 추상, 비구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 아방가르드들이, 그의 가치판단을 인용한다면, 예술 생산에 있어서 ‘현재의 최상 present supremac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키치는 간단명료하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모방 이론에 침윤된 아카데미 회화,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보듬으며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을 저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상업 예술이다. 그것들 모두는 모더니즘, 그린버그 용어로 애기한다면,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로 옆에, 저편에 있으면서 아방가르드와 대립한다.
반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가 키치로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 상동물 structural homologue이다. 그 구조적 등가성은 무엇보다도 예술 완성의 시간성에 있다. 둘 모두는 우선 현재를 부정하면서, 예술 완성의 시간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와 형태의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의 도식, 동일한 목적론적 비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신고전주의 미학을 주재했던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드라마 축을, 아방가르드는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체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방가르드의 전범들을 보유한다 (...) 그런데 찬란한 미래가 완성될 전범들의 수탁자가 되리라는 이 사고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착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사회주의적 종말론은 기독교가 영원한 구원을 설정했던 지점에, 인류의 미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반 자체를 설정했던 것이다.” 주10)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공산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조적 동일성은 완성의 시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식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도 등가적이다. 차이점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공식 미술로 삼는 서구의 경우, 그 지배구조가 현대 미술관들의 프로그램 전략 혹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과 같은 대규모 미술행사들을 통해 예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 공산당의 강령을 통해 명시적으로 작용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공식 미술을 각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각 사회가 요구하고 수용하는 기대지평에 순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규범들의 대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화가들이 서구의 화가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적 층위에서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애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의 회화나 소련의 회화나 공공연하게 혹은 음험하게 제시한 전범에 눈에 보이지 않게 혹은 눈에 띄게 순응한다는 것이다. 회화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회화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복종해야만 한다.” 주11)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으로 등가적인 아방가르드는, 잘 클레르에게 있어서, “인간 드라마가 배척되고, 현실이 쫓겨나고, 너무나 손쉽고 편안하며, 아울러 그 다양한 표명들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미술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주12)  더욱이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미술계의 지적 조야함, 비평의 악취미, 수많은 기관장들의 교양과 취향의 결핍”에 기대는 “일찍 꺼져버리는 즐거운 예술의 거품”주13) 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린버그가 키치라 명명한 현대의 저급한 미술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비평가에게 있어서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저급하고 공식화된 모상들을 simulacra 원재료로 사용하여 진정한 예술에 무감각한 자들의 몰취미를 부추기고 가꾸면서, 그것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주14)  결국, 그린버그가 현대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켰던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장 클레르와 더불어 등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모더니티, 아방가르드/키치라는 도식을 사용했다면, 장 클레르는 아방가르드=그린버그의 키치라는 등식을 사용한 셈이 되었다.



III.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의 의미론
어떻게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예술의 모더니티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것은 서구 현대 미술의 부정적 조류, 경향으로 통칭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용어는 그린버그에게 있어서는 쿠르베에서 피카소, 한스 아르프 Hans Arp까지 감쌀 수 있으며, 장 클레르에게 있어서는 말레비치, 마리네티, 몬드리안에서 앤디 워홀, 이브 클렝 Yves Klein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날 예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에 결부된 급진적이며 체제 부정적이라는 정치적 무게를 털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정치 성향, 미학적 취향에 따라 아방가르드는 ‘선험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역사적 출현과 그 용례의 역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그 개념과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미학적 해석, 비평적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미술사학자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출현은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백작이 1815년에 출간한 선집,『문학과 철학 그리고 산업에 대한 견해 Opinions littéraires, philosophiques et industrielles』에서 부터이다. 산업에 의한 사회의 부흥 그리고 인간애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정에 불탄 이 사회주의자는 예술가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부대 avant-garde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긍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공리주의적 이상 사회의 도래를 위한 ‘성직자적 임무’, ‘계몽자’의 역할을 촉구했다.주15) 이러한 논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푸리에주의자인 가브리엘 데지레 라베르당 Gabriel-Désiré Laverdant의 1845년의 책,『예술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De la mission de l`art et du rôle des artistes』에서 되풀이된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가장 높은 비상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표명한다. 예술은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다. 따라서 예술이 그 고유한 임무를 선창자에 걸맞게 완수하고, 예술가는 진정으로 전위부대 avant-garde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의 운명은 어떠한지를 알아야만 한다 (...) 행복의 찬가와 함께, 슬프고 절망적인 시가와 함께 (...)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을 거친 붓으로 폭로해야 한다.”주16)
바로 여기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범주에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개념이 태동한다. 아방가르드 의미론의 기원에 위치하는 까닭에,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명백히 드러난다. 아방가르드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인 전위부대처럼 앞장서서 길을 트는 예술가 집단이다. 미래에 도래할 이상적 사회에 열광하고, 인류의 진보를 계시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는 전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계시하는 ‘성직자적 임무’와 인류의 운명을 선도하려는 ‘계몽가’의 의지로 무장한 예술가 진영을 고려하는 역사적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엽,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전반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심지어는 전통적 풍습, 윤리, 의식구조까지 송두리째 변혁하려 했던 두 예술운동을 알고 있다. 새로운 ‘이상적 도시’, 파시즘을 위해 광적인 선동자 역할을 담당한 이태리의 미래주의 Futurism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엔지니어의 기능을 담당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는 결코 성직자나 계몽 철학자의 면모는 아니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소환한 아방가르드와 그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 ‘계몽가’로 주창한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주17)  회화 장르에만 국한한다면, 그들은 이상적 미래 사회에 걸 맞는 디오라마 Diorama와 파노라마 Panorama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극사실적 회화로 완벽한 현실의 환영감을 주는 새로운 무대미술 장치인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그들이 보기에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이미지였다. 1831년 5월 12일자「Le Globe」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기술적 technique 관점에서 우리는 회화에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디오라마는 아직은 무척 불완전하다. 그것은 아주 최신의 발명이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예술가들은 바로 이렇게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주18)
 새로이 도래할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발명을 촉구하는 이 발언은 아방가르드를 새로운 매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고 탐색하는 예술가들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언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전혀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새로움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커다란 무대화를 보는 색다름이었고, 후자의 새로움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높이와 길이 100m에서 120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벽화의 새로움, 그리고 그 무대화를 위에서 아래로 관람하는 특이함이었다. 반면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의 화풍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비판한 신고전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주19)  재현의 주제 혹은 소재도 거의 전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이 애호한 역사화, 종교화의 범주에서 길어온 것이었고,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내러티브에 집착했다. 아카데미 회화를 강력한 스펙터클과 오락을 환호하는 대중사회에 걸맞게 매머드로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주창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환호한 ‘새로운 회화 예술’의 전범인 디오라마가 언제, 어떻게 ‘기술적 관점에서’ 완성되는지를 알고 있다.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창시자인 작크 다게르 Jacques Daguerre는 1836년 사진이라는 광화학적 기록의 발명을 통해 ‘완전한’ 현실의 재현을 이룩하며,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비춰지는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착시효과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Lumière 형제의 활동‘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완전한’ 무대화로 완성된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주창자들에게 ‘새로운 회화 예술’로 비쳤던 디오라마,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완성인 사진과 활동사진의 재현 모두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원칙인 선 원근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실 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1839년에 그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이나 정지한 낱장의 사진을 움직이는 연속사진으로 발전시킨 활동사진의 현실의 모사는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한 선 원근법의 편리한 재현도구로 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오라마, 사진, 활동사진 모두는 재현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이자 재현의 원칙인 선 원근법, 현실 환영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회화의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천거한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갱신된 아카데미 회화, 혹은 대중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점증하는 강도로 확인되는 산만한 오락”주20) 의 원칙에 부응하는 상업적 아카데미즘에 지나지 않았다.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은 젊게 치장한 복고주의, 상업적 아카데미즘을 아방가르드 회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1860년대 중반에 작성한 그의 단상 초고집인『내 마음을 벌거벗고 Mon cœur mis à nu』에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아방가르드를 조롱으로 비난했다.

“군사적 메타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편애에 대하여. 이 모든 메타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투적인 문학
돌파 지점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다.
(...)
군사적 메타포들을 더 첨가하면,
투쟁 시인들.
아방가르드 문학인들.
이러한 군사적 메타포를 사용하는 습관은 전투적인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다시 말해 순응적인, 하인으로 태어난, 오직 사회집단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리킨다.”주21)

사실 19세기의 프랑스가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군사용어를 미학적 용어로 전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혁명이 야기한 전반적인 삶의 정치화의 귀결이다.”주22) 프랑스 혁명이후 계속 되풀이된 정변 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예술을 연계시키는 사고를 대변했다. 보들레르가 아방가르드를 조롱한 것은 바로 사회의 진보에 예술이 ‘하인’으로 종속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예술을 숭고한 정신활동으로 신봉하고, 예술을 통한 유한한 삶의 구원을 믿었던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에 봉사하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부인하는 태도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혐오하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처럼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언제나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고, 현실 환영주의적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그리고 다게레오타입에 열광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아방가르드는 당시를 지배한 상투적 사고체계에 저항하는 ‘전투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정신’이었다. 보들레르의 조롱 섞인 글이 보여주듯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는 그 용어가 회자되는 만큼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약한 영향력과 예술적 성과 때문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개념의 명료성을 상실한 채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다의적 어휘로 변색되었다.
소명을 부여 받은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에서 아무런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린버그가 상찬한 아방가르드, 즉 ‘모더니티’의 태동에 기여하지 못한데 있는 듯하다. 모더니티에 참여하기는커녕,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찾은 예가 보여주듯이, 갱신된 복고주의에 머문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주의의 전성기가 19세기 초반부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여전히 시효를 상실하지 않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회화 예술’의 ‘열린 방향’을 모더니티에서 탐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의 모더니티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2제정과 더불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받은 아방가르드가 회화에 본질적인 형식의 제 문제, 회화의 순수한 물리적 조건에 침잠한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IV. 나가면서 혹은 제언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고립된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며, 이들은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혁명적인 작업들로 그것을 ‘실험하고’, 이 작업들을 아카데미즘, 전통, 질서에 충실한 반대자들의 비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자들이다. 그 대표자들은 제 형식들을 바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천명하고, 현 예술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사상과 원칙을 폐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의 비전’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를 들면, 관습,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작업방식들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예술을 비웃는다.”주23)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모순되게도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이 전파했던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이 환멸로 바뀌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향도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을 일정 부분 수렴하지만,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남용, 일탈하는 미학적 해석, 비평적 평가들이 쇄도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윤색되었고, 마르크시즘은 그것을 데카당한 서구예술로 간주했다. 미술상 역시 이 용어를 남용하면서 장사 속을 챙겼고, 큐레이터, 작가들도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홍보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성직자의 임무’로서 표명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디오라마와 같은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개념은 상당 부분 부식되었다.
언어의 의미작용은 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형되고, 추가되고, 탈락되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평의 용어가, 살아 있는 미학적 개념이 이데올로기, 미학적 취향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비평의 효율성, 논쟁의 성과, 의사소통의 실질성에 부득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효율적 비평, 성과 있는 논쟁, 실질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 언어의 탄생에 관계된 역사적 문맥, 본원적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무절제한 전략적, 편의적 사용에 의해 어사의 내포 connotation는 무한정 확대되는 반면, 그 외연 denotation은 계속 줄어들어 의사전달에 장애를 초래하는 현상은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사태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라는 어휘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장 클레르가 상정한 아방가르드의 완성의 시간도식은, 그의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의 역사적 의미작용을 포괄하는 혜안이다. 이 탁월한 안목을 변화된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하자.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완성을 더 이상 현재에서 과거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기를 주장하면서, 현재 예술의 진중한 판단을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넘겨버린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상주의를 ‘밑바닥에서’ 다시 세우려했을 때 사회학에서 행했던 바와 동일한 재건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예술의 완성이 현재의 앞에 있건 혹은 역으로 뒤에 있건, 그것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남는다. 아방가르드는 황금시대를 과거에서 상상하지 않고, 미래로 투사했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매몰되는 정신이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몽롱해진 정신이기를 원했다. 진보의 사고는 잃어버린 낙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이론은 방향이 바뀐 노스탤지어일 뿐이었다.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예술의 완성을 투사했던 것이다.” 주24)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이 사라지는 미래, ‘불완전한 디오라마’가 완성되는 미래 등,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장 클레르의 지적처럼 아방가르드의 범주는 사회적, 미학적 완성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미학적 시도의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가 옹호한 아방가르드, 즉 매체의 문제에 전념한 ‘순수한’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들 예술의 완성을 미래에서 구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장 클레르가 아방가르드로 규정한 몬드리안, 이브 클렝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에서 살펴본 의미론의 핵심 사안을 이루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현실참여 engagement를 행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디오라마를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로 간주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의 경솔하고 깊이 없는 미학 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야만성, 모든 오물을’ 전통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폭로하여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만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의미론에 충실한 예들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행 아방가르드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나 상충되어, 현실적 용례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탐구한 작가와 예술집단만을, 그러니까 마리 

네티 Marinetti의 미래주의나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의 러시아 구성주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혹은 한스 학케 Hans Haacke, 앨런 세큘러 Allan Sekula  등등만을 아방가르드의 개념, 범주로 축소해 고려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본원적 의미론에 부합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비평, 보다 생산적인 미학적 논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작가 군들로만 아방가르드의 개념과 범주를 축소, 제한한다 해도, 아방가르드 연구의 볼륨은 만만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회자되지만 혹은 너무 회자되어 아방가르드와 유사한 의미의 혼란에 빠진 미학과 비평의 용어 하나를 거명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1)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I,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11.

2) Jean Clair,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p. 71.

3) Clement Greenberg, art. cit., p. 8.

4) ‘시는 회화와 같고, 회화는 시와 유사하다’는 말로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연유하며, 문학 담론에 의거한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특성을 지칭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역사적 전개와 이론에 대해서는 W. Lee Rensselaer,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을 참조할 것.

5) Ibid.

6)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John O`Brian (ed.), op. cit., p. 32.

7)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9.

8) <<Towards a Newer Laocoon>>, art. cit., p. 23.

9) Ibid., p. 34. 괄호안의 어사는 필자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며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의 의미는 선 원근법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외계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

10) Jean Clair, op. cit., p. 77.

11) Ibid., p. 91.

12)  Ibid., p. 87.

13)  Ibid., pp. 79-80.

14) Cf.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12.

15) Cf. André Chastel,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p. 79.

16)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p. 9에서 재인용.

17) 생시몽은 아방가르드에 화가, 조각가 상징의 창조자 즉 문학인을 포함시켰다. 

18) Nicos Hadjincolau,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p. 52에서 재인용.

19)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결코 두 학파를 절충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학파, 즉 고전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파, 즉 낭만주의적 경향은 완전한 예술로서 삶의 진정한 기호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1831년 5월 2일자「Le Globe」, ibid에서 재인용. 

20)  Walter Benjamin,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p. 169.

21)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pp. 634-635.

22)  Francis Haskell,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 107.

23) Etienne Souriau,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p. 209.

24) Jean Clair, op. cit., p. 35.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Benjamin (Walter),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Chastel (André),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Clair (Jean),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Ibid.
Hadjincolau (Nicos),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Haskell (Francis),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oggioli (Renato),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Rensselaer (W. Lee),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

Souriau (Etienne),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출처:『미술평단』, 제90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8, pp.18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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