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포토몽타주 (photomontage)와 더불어 처음으로 사진 매체와 조우했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다다이스트들은 기존의 사회이념, 전통적 예술형식을 전폭적으로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에 포토몽타주를 접합시켰다. 절단한 사진들로 작품의 전체를 혹은 작품의 일부분을 콜라주 방식으로 접합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포토몽타주는 1910년대 말, 그러니까 소련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럽이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 시점에서 도래했다. 다시 말해 포토몽타주는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허구성과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전쟁이라는 파괴적 양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사회건설의 모델로 비치는 역사적 순간에 태어났다. 시각예술작업과 문학작업에서 공히 행해진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 작업은 잡지, 신문, 포스터, 사전, 광고 카탈로그 등에서 부분적으로 떼어낸 이미지 혹은 텍스트들을 본래 문맥과는 상관없이 특정 공간에 임의적으로 결합, 조립 - 이것이 몽타주의 본래 뜻이다 - 하면서, 새로운 텍스트의 공간,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만드는 기법으로, 그것은 그 형식 자체 속에 이미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주의,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를 파산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었다. 그 파산, 파괴 위에서, 아직은 그 형태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혁명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의 몽타주 기법이었다. 간단히 말해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폭로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파편적 이미지, 절단된 텍스트로 내재화하고,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혁명을 통해 암중모색하는 혼돈의 양상을 내면화했다. 부르주아 문명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낸 자리에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할 모델로 떠오른 자리에서 포토몽타주 기법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포토몽타주는 분명 1910년대 초반 피카소 (Picasso), 브라크(Braque), 후앙 그리(Juan Gris)가 종이들을 붙이고 과슈나 유화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과 19세기 후반의 유럽이 카드엽서의 도안과 유머러스한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행한 시도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형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혼돈의 양상은 새로운 형태미, 새로운 미학질서를 탐구하는 큐비즘의 미학적 시도, 19세기의 장식적이고 유희적인 포토몽타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다이스트들의 사진을 활용한 충격적이고 거친 형상은 작업방식에 있어서는 큐비즘의 종이 붙이기와 19세기 포토몽타주와 거의 동일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반 조형적, 반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전통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베를린 다다에는 포토몽타주를 행하는 4명의 주역이 있었다. 한편으로 사진의 단편들의 조합을 통해 키리코(Chirico)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사진과 낱말들의 결합을 시도한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과  기계부속들 혹은 거리의 광경에 인간신체들을 결합한 한나 회(Hannah Hoch)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절대적 자유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를 신봉하여, 그들의 포토몽타주는 자의적인 무질서와 결코 확고히 고정시킬 수 없는 의미작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잡지의 표지 작업을 포토몽타주로 행하고, 그래픽적인 수채화에 사진의 단편들을 통합시킨 게오르그 그로츠 (George Grosz)와 그의 친구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1891-1968)가 있다. 이 둘은 1919년 독일 공산당이 창당되자마자 당원이 되었고, 사회비판과 혁명에 봉사하는 사회참여적 포토몽타주를 행했으므로 그들의 시각적 구성과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존 하트필드의 본명은 헬무트 헤르츠펠트 (Helmut Herzfeld)였지만 1916년 독일의 국수주의와 영국혐오증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별명은 ‘Monteurdada’, 즉 ‘다다의 조립공’이었는데, 이는 그가 다다를 대표하는 포토몽타주 작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트필드가 전통적 예술가의 고답적 이미지를 거부하기 위해 엔지니어, 조립공의 복장을 즐겨 입었던 까닭이었다.
  신랄하게 정치를 풍자하는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본격화된 것은 그의 형, 빌란트 (Wieland)가 설립한 출판사의 책표지와 공산당 기관지들을 디자인하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30년 『Arbeiter-Illustrierte Zeitung』, 즉 '노동자 화보잡지'의 정기기고자가 되면서 정치현실을,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포토몽타주는 절정에 도달했다.『AIZ』에 게재된 그의 250점에 달하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정치 선동적인 명료한 텍스트를 결합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인 사회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의 호전성을 공격하고 그의 포토몽타주를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는 것이었다. 1930년 그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홍보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신문들로 얼굴을 감싼 한 인물을 몽타주한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배추 머리를 가졌는데, 그 이파리를 읽어보았는가? 부르주아 신문들을 읽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귀가 먼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지겨운 허풍들!” 1932년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노동자들이 기관총에 쓰러지자, 그는 이렇게 포토몽타주한다. “국제연맹 건물 전면에 파시스트의 총검에 꿰뚫린 평화의 비둘기를 배치했고, 백십자기 대신 나치표장을 새겨 넣었다.” 위에서 인용한 포토몽타주는『AIZ』의 1934년 10월 4일자 특별호로 ‘반파시스트, 행동통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가 되어, 파시즘에 본때를 보여주자! 인민의 주먹들이 프랑스와 자르란트에서 보여주었던 것을 보여주자. 반파시스트 지지자들은 어디서나 단일 전선을 이룩하여야 한다.”라는 텍스트를 포토몽타주 곁에 삽입했다.
 
  『AIZ』는 1926년에 창간된 화보지로 부르주아 계층을 독자로 하는 잡지들과 편집형식은 물론이고 판매 부수에 있어서도 경쟁을 벌인 시사주간지였다. 이 잡지는 한 작가의 말을 빌면, “정신을 사로잡기 위한 최상의 무기”인 사진을 공격적으로 사용했다. 브레히트(Brecht)의 찬사에 따르면, 부르주아 보도사진가들의 객관성을 포장한 거짓들을 견제하는 “『AIZ』의 작업은 진리에 봉사하며 사태를 정확히 재정립하고자 하는 까닭에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잡지는 그것을 경이롭게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브레히트가 생각하는 시대의 ‘진실’은 반파시스트운동, 노동자의 계급투쟁 그리고 전통적 예술형식의 파격적 혁명이었던 까닭에, 그는 원근법, 균형, 조화, 통일이라는 기존의 전통미학원리를 파격적으로 분쇄하는 포토몽타주와 ‘노동자-사진가’의 사진을 선호하면서, 반나치, 반부르주아 운동에 앞장선 『AIZ』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AIZ』의 사진과 관련한 활동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포토몽타주의 전투적 사용 외에도 노동자들이 찍은 시사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현실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잡지에 게재되는 사진자료를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유통시키는 자본주의적 사진 통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AIZ』는 1926년 3월 독자들에게 대대적인 협조를 구한다. 부르주아적인 사진통신사들이 유통과정 속에서 의도적으로 눈감아버리거나 배제하는 사진들을 독자들 자신들이 잡지에 제공해줄 것을 호소한다. 『AIZ』가 요구한 노동자 사진의 종류를 인용하면, “1. 노동계의 혁명운동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2. 노동계의 사회적 상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3.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전체적 국면에서 정확히 재현하는 종류의 사진들, 4. 노동의 조건들과 장소들을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노동현장 사진들, 5. 현대 기술과 그것의 형태들, 산업구조물과 제조방식들을 도해하는 사진들”이었다. 이러한 협력요청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몇 달 후에는 ‘노동자-사진가’ 모임이 발족되고 공식 기관지, 『노동자-사진가 Arbeiter-Fotograf』까지 발행하게 된다. 
  이 월간지는 『AIZ』가 탄생시킨 새로운 형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기술적으로 이념적으로 교육시켜, 그들을 효율적이고 의욕적인 사진기자로 만들기 위한 잡지로 기능을 수행했다. 『노동자-사진가』의 필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진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매스 미디어들이 의식적으로 주입시킨 부르주아의 취향을 거부하고, ‘계급적 시각’을 습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계급적 관계와 착취의 징후들을 포착하여 가차없이 그것들을 비판하도록 학습시켰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러한 사진 실천은 기대한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이론가들이 비판한 부르주아의 취향을 상당수 답습했기 때문에 『AIZ』는 기존의 사진통신사의 사진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AIZ』가 계발한 아마추어 사진가 모임의 전략을 모방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임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자 잡지, 『노동자-사진가』는 폐간하게 되며, 존 하트필드는 『AIZ』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하여 1938년까지 반나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하트필드의 현실참여적 포토몽타주는 그 생산량에 있어서나 그 강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것이었지만, 분명 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포토몽타주의 독자적 발명을 주장한 소련의 클루트시스(Klutsis)와 로드첸코 (Rodtchenko)는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 『레프 Lef』를 통해 소련의 혁명정부가 직면해야 했던 이념홍보와 교육에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로 미술사가 분류하는 이들의 작업은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포토몽타주의 여러 가능성들을 실험하고 실천했다. 로드첸코는 1923년 출판되는 마이야코프스키(Maikovski)의 시집 『이곳에서』의 삽화를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했고, 엘 리시츠키(El Lissitscky)는 1928년 독일의 쾰른에서 열린 국제 사진전시회 ‘프레사(Pressa)’의 소련전시장을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대형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독일에서도 포토몽타주를 활용하는 여러 양상들이 나타났다. 도멜라 (Domela)는 그것을 광고에 활용했고, 모홀리-나기는 백색 평면에 사진들을 잘라 붙이고, 직선을 반복적으로 가미하여 포토몽타주의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그 기법을 이용해 부조리하고 기이한 이미지의 연상체계를 구현했다.
  나치의 집권과 더불어 프라하로 망명한 하트필드는 체코가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1938년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거기에서 1950년까지 린드세이 드루몬드(Lindsay Drummond) 출판사의 일을 하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1950년 이후에는 동베를린에 정착하여 무대장식과 전시 포스터의 제작을 행한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관련된 작업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는 자본주의와 파괴적 권력이 공모하여 인민을 탄압하는 양상이며, 둘째는 전쟁의 잔인함을 폭로하는 양상이다. 셋째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희망의 도식화이며, 넷째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다. 그는 절단된 사진 이미지들을 단순하고 엄격한 시각적 구성을 통해 짜깁기했고, 여기에 선동적인 메시지의 텍스트를 삽입시킴으로써 대중을 향한,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희귀한 예를 예술사에 남겼다. 그는 현실과 분리된 예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고답적 예술에 항거하면서, 아울러 과거의 판에 박힌 예술적 형식과 과감한 단절을 꾀한, 한 마디로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불어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전초병’이라는 뜻으로 그 쓰임새는 군사적 용도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삶의 전 영역이 정치적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자 예술도 이에 초연할 수가 없었다. 예술의 영역도 이 정치, 군사적 용어를 차용하여 특정 예술가군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치,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를 특정한 예술적 성향을 지향하는 예술가 부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예술가군은 예술의 발전을 사회의 진보와 관련시키는 성향을 표출하는 자들로 사회의 현실문제에 자신들의 예술로써 대응하고 응답하고자 했다. 인류의 개선적 발전을 예술의 기본토대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들은 당대의 정치, 사회 문제에 자기들의 의견을 작품,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따라서 19세기적 의미에서 예술분야의 아방가르드는 20세기가 뜻하는 바처럼 ‘현재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꾀하는 예술가군’이라는 의미와는 현격한 의미론적 차이를 보였다. 19세기의 아방가르드 개념으로 살펴볼 때 새로운 형식을 과격하게 추구한 큐비즘의 작가들이나, 마르셀 뒤샹은 아방가르드일 수 없다. 오히려 전통적 예술형식을 존중하면서, 인류의 진보, 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보다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예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갔던 쿠르베 (Courbet)가 19세기가 의미한 아방가르드 입장에 부합한다. 어쨌든 존 하트필드는 19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20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혹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나 그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그의 포토몽타주라는 파격적인 형태탐구 작업은 당시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는 또한 ‘사회의 진보, 인류의 삶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관점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수색대의 전초병, 즉 군사적 의미의 아방가르드처럼 나치와 부르주아의 개량 사회주의의 탄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선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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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최봉림


 

 

I. 들어가면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라는 용어는 현대 미학과 예술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키워드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의와 평가는 필자들에 따라 너무나 굴곡과 편차가 심하다.  발음 속에 내재된 필자들의 억양, 그리고 의도에는 아방가르드의 외연마저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 그 진화의 양상에는 공통된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 임의적 정의, 미학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가 일쑤다. 필자의 미학적 취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거나, 혹은 ‘소외된 데카당스’ 예술로 비난한다. 그러나 논리적 수미일관성, 실증적 자료, 필자의 예술관의 피력을 동반한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단 하나만의 객관적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미학과 비평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행하는 필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범주 규정이 특정 운동, 인물을 일시적으로 거명한다 할지라도 이 어사의 미학적 기원과는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들이 정의하는 아방가르드의 경계, 안과 밖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특정 문예사조들, 특정 문예그룹들, 혹은 특정 문예운동들과는 달리,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처럼 그 전성기를 일정 시기로 국한할 수 있는 시대적 미학개념이라기 보다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도래할 초시대적 개념이면서, 산업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낭만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생겨난 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관점에 따라 낭만주의, 심지어는 자연주의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포섭할 수 광의적 미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정의와 적용이 임의적일 경우, 그것은 미학과 비평의 역사를 오도하거나, 근대와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혼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 문맥, 그 어의의 역사적 변이를 고려치 않고, 단지 그것을 자신의 비평적 판단, 미학적 분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아방가르드’는 임의적 비평, 이분법적 분류를 위한 프로쿠루테스의 침대로 사용될 수 있다.

II. 상반된 아방가르드 : 모더니티 혹은 키치
아방가르드라는 어사의 의미작용을 설득력 있게 조작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의 예술적 상황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분할, 비평하는 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자신의 미학적 주장을 아방가르드라는 광의적 용어에 투사하면서 현대 예술의 주요 양상들을 지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들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초시대적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근, 현대예술에 포괄적 접근을 허용하는 용어로 기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예술의 주요 양상은 ‘아방가르드’로 정의되며, 아방가르드는 근, 현대예술의 긍정적 상황과 부정적 양상을 가르는 경계 개념이 된다. 그 경계선 이편에는 아방가르드를 통해 현대 예술의 새로운 긍정을 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있고, 저편에는 그것을 통해 현대 미술의 불모성을 보는 장 클레르 Jean Clair (1940- )가 있다. 20세기 중반부 미국 미술비평을 주도한 전자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우리가 현재 소유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주1)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리 피카소 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비평가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근대성의 우스꽝스런 희화일 뿐이다.”주2)그들은 한편으로 예리하게 설정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통해 20세기 미술 전반을 조망하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의 정의, 그 비평적 사용을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미학적 개념의 이해에 적지 않은 혼선을 야기한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중요한 에세이는 「Partisan Review」의 1939년 가을 호에 실린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 그리고 동일 잡지의 1940년 7-8월 호에 실린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이다. 이 둘의 글에서 미국의 평론가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을 개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두 특성을 설파한다. 그 첫째는 예술을 사회로부터 분리, 격리시켜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활동영역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각 예술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순수시 pure poetry, 추상 abstract 혹은 비구상 nonobjective 미술을 ‘아방가르드’로 옹호하기 위한 그린버그의 알리바이다.
그린버그는 최초의 아방가르드를, 예술사의 정설에 따라, 낭만주의에 침윤된 보헤미아 그룹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래한 대중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부르주아의 범속성, 그들의 진보에 대한 맹신 그리고 이상을 모르는 실리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예술로의 도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꿨다.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과 절연된 순수한 예술, 사회적 잔재가 배제된 절대적 예술을 추구했다. “공중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아방가르드 시인 혹은 예술가는 예술을 엄격히 규정하고,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논외가 되는 그런 절대의 표현으로 고양시키면서 그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주제 혹은 내용은 역병처럼 기피의 대상이 된다.”주3)
그린버그가 말하는 아방가르드의 ‘주제 혹은 내용의 기피’는 부르주아 사회의 범속적 일상의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까닭에, 예술은 세속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정신활동의 영역이 된다. 현실의 재현을 기피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미학과 아카데믹한 예술형식의 부정을 동반한다. 현실의 재현을 지향하는 ‘모방 imitation’ 이론은 물론이고, 미술의 경우, 문학적 ‘주제 혹은 내용’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문학성을 모방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ut pictura poesis’주4) 역시 거부의 대상이 된다. 범속한 사회 현실과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추구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현실의 사실주의적 모방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현실보다 우월한 실체적 현실의 모방과도 단절한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는, 실체적 본질 God조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모방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과 문학의 창조 규율들과 창조 과정의 절차들 그 자체를 결국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추상 abstract’ 예술의 탄생한다.”주5)             
그린버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질적 저하는 문학성을 재현의 모델로 삼은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기인한다. 회화의 본질, 순수성을 저버리고 문학을 전범으로 삼아, 이야기 historia의 재현을 모색한데서 비롯된다. 아카데미 회화라 통칭되는 이 조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이라는 문학적 담론에 의거한 이야기 서술 narration에 전념했고, 선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제도화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삼차원적 효과를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려는 기예들에 몰두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문학과 조각과 같은 여타 매체의 재현효과를 모델로 삼은 아카데미 회화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라는 예술들의 혼용 confusions of arts 경향의 전형적 희생양이다. 따라서 회화 장르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현실 환영주의 효과 illusionist effects에 사로잡혀, 회화 매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저버린 해묵은 아카데미즘을 극복한 일군의 화가들이 된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의 총체적 정의는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매체의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여타의 예술 매체들의 방법, 수단, 절차와의 단호한 단절을 꾀하는 예술가 집단이다. 아방가르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작업하는 특정 매체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그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물성 materiality, 작업 과정들에 전념하면서, 타 매체들의 특성에 영향 받고, 타 매체들의 속성들이 개입되는 것을 청교도적으로 금기시한다. “(...) 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들 활동 영역의 순수성과 영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성과를 성취했으며, 그것은 전 문화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다.”주6)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로, 브랑쿠지, 클레, 마티스, 그리고 세잔느조차 그들의 영감은 그들이 작업한 매체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의 예술이 주는 흥미로운 감동은 거의 전부, 공간의 발명과 배열, 평면, 형상, 컬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순수한 우려와 이러한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데 있는 듯하다.”주7)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는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특성과 순수성의 탐구를 보다 강조하는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1766년에 출간된 레싱 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들』의 현대적 후속편에 해당한다. 레싱의 글은 18세기 후반, 한편으로는 그 당시를 지배한 ‘시는 회화의 말하는 방식이며, 회화는 말없는 시의 양상’이라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예술 상호간의 화합, 예술 매체간의 상호 혼용을 선구적으로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예술 매체의 차이,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매체들에 고유한 질서와 규율 속에서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그린버그의 글은 모더니티의 태동을 위한 레싱의 주장을 ‘아방가르드’의 전투적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다 새로운’ 모더니티를 위한 주장이다.
당연히 조형미술에 종사하는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레싱의 주장을 본받아, “문학성과 주제를 강력히 배제하며” “여러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확립하려 시도”한다.주8) 그리고 각 매체에 고유한 특성, 순수한 본질을 따른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회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승복하는 역사다. 회화 매체의 저항은 주로 사실주의적 원근법 공간 (재현)을 위해 회화의 (지지체인) 평면에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 to hole through’ 노력들에 대한 회화면의 저항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승복을 행하면서 회화는 (외계 현실의) 모방과 아울러 ‘문학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실주의적 모방과 상관관계를 맺는 회화와 조각의 혼용을 제거한다. (한편 조각은 돌, 금속, 나무 등과 같은 재료들을 그 특성과는 무관한 형상들로 만들려는 예술가의 노력에 그 재료들이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한다.) 회화는 명암 대조법과 음영 부조법을 포기한다. 붓질 brush strokes은 대부분 붓질 그 자체를 위해 분명히 드러난다.”주9)
이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를 간략히 정의 내려도 될 듯싶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 자족성 속에서 각 예술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작가 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형예술의 경우, 매체의 순수성 속에서 추상, 비구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 아방가르드들이, 그의 가치판단을 인용한다면, 예술 생산에 있어서 ‘현재의 최상 present supremac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키치는 간단명료하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모방 이론에 침윤된 아카데미 회화,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보듬으며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을 저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상업 예술이다. 그것들 모두는 모더니즘, 그린버그 용어로 애기한다면,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로 옆에, 저편에 있으면서 아방가르드와 대립한다.
반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가 키치로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 상동물 structural homologue이다. 그 구조적 등가성은 무엇보다도 예술 완성의 시간성에 있다. 둘 모두는 우선 현재를 부정하면서, 예술 완성의 시간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와 형태의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의 도식, 동일한 목적론적 비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신고전주의 미학을 주재했던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드라마 축을, 아방가르드는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체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방가르드의 전범들을 보유한다 (...) 그런데 찬란한 미래가 완성될 전범들의 수탁자가 되리라는 이 사고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착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사회주의적 종말론은 기독교가 영원한 구원을 설정했던 지점에, 인류의 미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반 자체를 설정했던 것이다.” 주10)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공산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조적 동일성은 완성의 시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식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도 등가적이다. 차이점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공식 미술로 삼는 서구의 경우, 그 지배구조가 현대 미술관들의 프로그램 전략 혹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과 같은 대규모 미술행사들을 통해 예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 공산당의 강령을 통해 명시적으로 작용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공식 미술을 각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각 사회가 요구하고 수용하는 기대지평에 순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규범들의 대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화가들이 서구의 화가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적 층위에서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애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의 회화나 소련의 회화나 공공연하게 혹은 음험하게 제시한 전범에 눈에 보이지 않게 혹은 눈에 띄게 순응한다는 것이다. 회화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회화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복종해야만 한다.” 주11)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으로 등가적인 아방가르드는, 잘 클레르에게 있어서, “인간 드라마가 배척되고, 현실이 쫓겨나고, 너무나 손쉽고 편안하며, 아울러 그 다양한 표명들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미술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주12)  더욱이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미술계의 지적 조야함, 비평의 악취미, 수많은 기관장들의 교양과 취향의 결핍”에 기대는 “일찍 꺼져버리는 즐거운 예술의 거품”주13) 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린버그가 키치라 명명한 현대의 저급한 미술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비평가에게 있어서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저급하고 공식화된 모상들을 simulacra 원재료로 사용하여 진정한 예술에 무감각한 자들의 몰취미를 부추기고 가꾸면서, 그것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주14)  결국, 그린버그가 현대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켰던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장 클레르와 더불어 등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모더니티, 아방가르드/키치라는 도식을 사용했다면, 장 클레르는 아방가르드=그린버그의 키치라는 등식을 사용한 셈이 되었다.



III.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의 의미론
어떻게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예술의 모더니티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것은 서구 현대 미술의 부정적 조류, 경향으로 통칭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용어는 그린버그에게 있어서는 쿠르베에서 피카소, 한스 아르프 Hans Arp까지 감쌀 수 있으며, 장 클레르에게 있어서는 말레비치, 마리네티, 몬드리안에서 앤디 워홀, 이브 클렝 Yves Klein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날 예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에 결부된 급진적이며 체제 부정적이라는 정치적 무게를 털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정치 성향, 미학적 취향에 따라 아방가르드는 ‘선험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역사적 출현과 그 용례의 역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그 개념과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미학적 해석, 비평적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미술사학자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출현은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백작이 1815년에 출간한 선집,『문학과 철학 그리고 산업에 대한 견해 Opinions littéraires, philosophiques et industrielles』에서 부터이다. 산업에 의한 사회의 부흥 그리고 인간애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정에 불탄 이 사회주의자는 예술가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부대 avant-garde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긍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공리주의적 이상 사회의 도래를 위한 ‘성직자적 임무’, ‘계몽자’의 역할을 촉구했다.주15) 이러한 논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푸리에주의자인 가브리엘 데지레 라베르당 Gabriel-Désiré Laverdant의 1845년의 책,『예술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De la mission de l`art et du rôle des artistes』에서 되풀이된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가장 높은 비상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표명한다. 예술은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다. 따라서 예술이 그 고유한 임무를 선창자에 걸맞게 완수하고, 예술가는 진정으로 전위부대 avant-garde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의 운명은 어떠한지를 알아야만 한다 (...) 행복의 찬가와 함께, 슬프고 절망적인 시가와 함께 (...)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을 거친 붓으로 폭로해야 한다.”주16)
바로 여기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범주에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개념이 태동한다. 아방가르드 의미론의 기원에 위치하는 까닭에,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명백히 드러난다. 아방가르드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인 전위부대처럼 앞장서서 길을 트는 예술가 집단이다. 미래에 도래할 이상적 사회에 열광하고, 인류의 진보를 계시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는 전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계시하는 ‘성직자적 임무’와 인류의 운명을 선도하려는 ‘계몽가’의 의지로 무장한 예술가 진영을 고려하는 역사적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엽,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전반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심지어는 전통적 풍습, 윤리, 의식구조까지 송두리째 변혁하려 했던 두 예술운동을 알고 있다. 새로운 ‘이상적 도시’, 파시즘을 위해 광적인 선동자 역할을 담당한 이태리의 미래주의 Futurism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엔지니어의 기능을 담당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는 결코 성직자나 계몽 철학자의 면모는 아니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소환한 아방가르드와 그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 ‘계몽가’로 주창한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주17)  회화 장르에만 국한한다면, 그들은 이상적 미래 사회에 걸 맞는 디오라마 Diorama와 파노라마 Panorama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극사실적 회화로 완벽한 현실의 환영감을 주는 새로운 무대미술 장치인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그들이 보기에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이미지였다. 1831년 5월 12일자「Le Globe」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기술적 technique 관점에서 우리는 회화에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디오라마는 아직은 무척 불완전하다. 그것은 아주 최신의 발명이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예술가들은 바로 이렇게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주18)
 새로이 도래할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발명을 촉구하는 이 발언은 아방가르드를 새로운 매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고 탐색하는 예술가들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언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전혀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새로움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커다란 무대화를 보는 색다름이었고, 후자의 새로움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높이와 길이 100m에서 120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벽화의 새로움, 그리고 그 무대화를 위에서 아래로 관람하는 특이함이었다. 반면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의 화풍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비판한 신고전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주19)  재현의 주제 혹은 소재도 거의 전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이 애호한 역사화, 종교화의 범주에서 길어온 것이었고,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내러티브에 집착했다. 아카데미 회화를 강력한 스펙터클과 오락을 환호하는 대중사회에 걸맞게 매머드로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주창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환호한 ‘새로운 회화 예술’의 전범인 디오라마가 언제, 어떻게 ‘기술적 관점에서’ 완성되는지를 알고 있다.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창시자인 작크 다게르 Jacques Daguerre는 1836년 사진이라는 광화학적 기록의 발명을 통해 ‘완전한’ 현실의 재현을 이룩하며,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비춰지는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착시효과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Lumière 형제의 활동‘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완전한’ 무대화로 완성된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주창자들에게 ‘새로운 회화 예술’로 비쳤던 디오라마,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완성인 사진과 활동사진의 재현 모두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원칙인 선 원근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실 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1839년에 그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이나 정지한 낱장의 사진을 움직이는 연속사진으로 발전시킨 활동사진의 현실의 모사는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한 선 원근법의 편리한 재현도구로 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오라마, 사진, 활동사진 모두는 재현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이자 재현의 원칙인 선 원근법, 현실 환영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회화의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천거한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갱신된 아카데미 회화, 혹은 대중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점증하는 강도로 확인되는 산만한 오락”주20) 의 원칙에 부응하는 상업적 아카데미즘에 지나지 않았다.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은 젊게 치장한 복고주의, 상업적 아카데미즘을 아방가르드 회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1860년대 중반에 작성한 그의 단상 초고집인『내 마음을 벌거벗고 Mon cœur mis à nu』에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아방가르드를 조롱으로 비난했다.

“군사적 메타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편애에 대하여. 이 모든 메타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투적인 문학
돌파 지점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다.
(...)
군사적 메타포들을 더 첨가하면,
투쟁 시인들.
아방가르드 문학인들.
이러한 군사적 메타포를 사용하는 습관은 전투적인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다시 말해 순응적인, 하인으로 태어난, 오직 사회집단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리킨다.”주21)

사실 19세기의 프랑스가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군사용어를 미학적 용어로 전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혁명이 야기한 전반적인 삶의 정치화의 귀결이다.”주22) 프랑스 혁명이후 계속 되풀이된 정변 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예술을 연계시키는 사고를 대변했다. 보들레르가 아방가르드를 조롱한 것은 바로 사회의 진보에 예술이 ‘하인’으로 종속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예술을 숭고한 정신활동으로 신봉하고, 예술을 통한 유한한 삶의 구원을 믿었던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에 봉사하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부인하는 태도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혐오하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처럼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언제나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고, 현실 환영주의적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그리고 다게레오타입에 열광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아방가르드는 당시를 지배한 상투적 사고체계에 저항하는 ‘전투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정신’이었다. 보들레르의 조롱 섞인 글이 보여주듯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는 그 용어가 회자되는 만큼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약한 영향력과 예술적 성과 때문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개념의 명료성을 상실한 채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다의적 어휘로 변색되었다.
소명을 부여 받은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에서 아무런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린버그가 상찬한 아방가르드, 즉 ‘모더니티’의 태동에 기여하지 못한데 있는 듯하다. 모더니티에 참여하기는커녕,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찾은 예가 보여주듯이, 갱신된 복고주의에 머문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주의의 전성기가 19세기 초반부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여전히 시효를 상실하지 않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회화 예술’의 ‘열린 방향’을 모더니티에서 탐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의 모더니티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2제정과 더불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받은 아방가르드가 회화에 본질적인 형식의 제 문제, 회화의 순수한 물리적 조건에 침잠한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IV. 나가면서 혹은 제언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고립된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며, 이들은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혁명적인 작업들로 그것을 ‘실험하고’, 이 작업들을 아카데미즘, 전통, 질서에 충실한 반대자들의 비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자들이다. 그 대표자들은 제 형식들을 바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천명하고, 현 예술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사상과 원칙을 폐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의 비전’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를 들면, 관습,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작업방식들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예술을 비웃는다.”주23)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모순되게도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이 전파했던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이 환멸로 바뀌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향도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을 일정 부분 수렴하지만,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남용, 일탈하는 미학적 해석, 비평적 평가들이 쇄도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윤색되었고, 마르크시즘은 그것을 데카당한 서구예술로 간주했다. 미술상 역시 이 용어를 남용하면서 장사 속을 챙겼고, 큐레이터, 작가들도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홍보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성직자의 임무’로서 표명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디오라마와 같은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개념은 상당 부분 부식되었다.
언어의 의미작용은 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형되고, 추가되고, 탈락되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평의 용어가, 살아 있는 미학적 개념이 이데올로기, 미학적 취향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비평의 효율성, 논쟁의 성과, 의사소통의 실질성에 부득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효율적 비평, 성과 있는 논쟁, 실질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 언어의 탄생에 관계된 역사적 문맥, 본원적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무절제한 전략적, 편의적 사용에 의해 어사의 내포 connotation는 무한정 확대되는 반면, 그 외연 denotation은 계속 줄어들어 의사전달에 장애를 초래하는 현상은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사태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라는 어휘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장 클레르가 상정한 아방가르드의 완성의 시간도식은, 그의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의 역사적 의미작용을 포괄하는 혜안이다. 이 탁월한 안목을 변화된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하자.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완성을 더 이상 현재에서 과거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기를 주장하면서, 현재 예술의 진중한 판단을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넘겨버린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상주의를 ‘밑바닥에서’ 다시 세우려했을 때 사회학에서 행했던 바와 동일한 재건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예술의 완성이 현재의 앞에 있건 혹은 역으로 뒤에 있건, 그것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남는다. 아방가르드는 황금시대를 과거에서 상상하지 않고, 미래로 투사했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매몰되는 정신이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몽롱해진 정신이기를 원했다. 진보의 사고는 잃어버린 낙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이론은 방향이 바뀐 노스탤지어일 뿐이었다.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예술의 완성을 투사했던 것이다.” 주24)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이 사라지는 미래, ‘불완전한 디오라마’가 완성되는 미래 등,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장 클레르의 지적처럼 아방가르드의 범주는 사회적, 미학적 완성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미학적 시도의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가 옹호한 아방가르드, 즉 매체의 문제에 전념한 ‘순수한’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들 예술의 완성을 미래에서 구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장 클레르가 아방가르드로 규정한 몬드리안, 이브 클렝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에서 살펴본 의미론의 핵심 사안을 이루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현실참여 engagement를 행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디오라마를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로 간주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의 경솔하고 깊이 없는 미학 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야만성, 모든 오물을’ 전통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폭로하여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만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의미론에 충실한 예들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행 아방가르드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나 상충되어, 현실적 용례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탐구한 작가와 예술집단만을, 그러니까 마리 

네티 Marinetti의 미래주의나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의 러시아 구성주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혹은 한스 학케 Hans Haacke, 앨런 세큘러 Allan Sekula  등등만을 아방가르드의 개념, 범주로 축소해 고려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본원적 의미론에 부합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비평, 보다 생산적인 미학적 논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작가 군들로만 아방가르드의 개념과 범주를 축소, 제한한다 해도, 아방가르드 연구의 볼륨은 만만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회자되지만 혹은 너무 회자되어 아방가르드와 유사한 의미의 혼란에 빠진 미학과 비평의 용어 하나를 거명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1)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I,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11.

2) Jean Clair,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p. 71.

3) Clement Greenberg, art. cit., p. 8.

4) ‘시는 회화와 같고, 회화는 시와 유사하다’는 말로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연유하며, 문학 담론에 의거한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특성을 지칭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역사적 전개와 이론에 대해서는 W. Lee Rensselaer,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을 참조할 것.

5) Ibid.

6)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John O`Brian (ed.), op. cit., p. 32.

7)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9.

8) <<Towards a Newer Laocoon>>, art. cit., p. 23.

9) Ibid., p. 34. 괄호안의 어사는 필자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며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의 의미는 선 원근법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외계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

10) Jean Clair, op. cit., p. 77.

11) Ibid., p. 91.

12)  Ibid., p. 87.

13)  Ibid., pp. 79-80.

14) Cf.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12.

15) Cf. André Chastel,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p. 79.

16)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p. 9에서 재인용.

17) 생시몽은 아방가르드에 화가, 조각가 상징의 창조자 즉 문학인을 포함시켰다. 

18) Nicos Hadjincolau,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p. 52에서 재인용.

19)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결코 두 학파를 절충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학파, 즉 고전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파, 즉 낭만주의적 경향은 완전한 예술로서 삶의 진정한 기호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1831년 5월 2일자「Le Globe」, ibid에서 재인용. 

20)  Walter Benjamin,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p. 169.

21)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pp. 634-635.

22)  Francis Haskell,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 107.

23) Etienne Souriau,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p. 209.

24) Jean Clair, op. cit., p. 35.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Benjamin (Walter),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Chastel (André),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Clair (Jean),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Ibid.
Hadjincolau (Nicos),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Haskell (Francis),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oggioli (Renato),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Rensselaer (W. Lee),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

Souriau (Etienne),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출처:『미술평단』, 제90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8, pp.18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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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첸코(Alexandre Rodtchenko, 1891-1956)는 전방위 예술가였다. 화가, 조각가, 사진가였으며, 문자, 포스터, 가구, 실내 디자이너인 동시에 연극무대의 장식가였다. 그의 전 예술활동은 이른바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를 선도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를 이끈 또 다른 선도자들인 엘 리시츠키(El Lissitsky)와 한스 아프(Hans Arp)의 정의에 따르면,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세계를 테크닉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며 (...) 구성주의는 수학과 예술, 예술대상과 기술 발명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을 확정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예술과 테크닉의 긴밀한 협동”을 추구한 시각예술 운동이었다.
  기술공학적 요소를 예술작업에 도입하는 로드첸코의 작업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공학 설계의 기본도구인 자와 콤파스를 사용한 기하학적 비구상 작품을 생산하면서, 말레비치(Malevitch)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순수 기하학적 추상 미술에 합류했다. 회화의 공간에 테크닉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현실의 재현이라는 리얼리즘 원칙의 완벽한 포기, 간단 명료한 선과 도형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귀결되었다. 특히 로드첸코는 선에 구성의 중요성을 부여했는데, 그에 따르면, “선은 구성하고 (construct) 창조하는 데 있어서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형태, 색, 모양새에 의존함 없이 선만으로 공간구성을 실현한 회화인 <선들로 이루어진 구성>을 제작하고, 이러한 양상을 조각 분야에도 적용하여, 1920년을 전후로 선에 매달린 구조물들을 제작한다. 받침대가 없는 그 단순 명료한 기하학적 형상들은 전통적 조각의 질량감을 거부하고,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모빌의 양상을 보여준다.
  러시아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로드첸코의 전통 파괴적 회화, 조각 작업을 부추긴 것은 무엇보다도 1차 세계대전 (1914-1918)으로 표명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과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미술의 형식적 제 양상들을 전복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으로 새롭게 탄생한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들이 보기에 타도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만이 아니었다. 그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생성된 미술형식, 이념도 마땅히 파기해야 할 대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생산하고 소비한 회화와 조각의 생산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은 원근법과 이에 의거한 현실 환영주의였다. 원근법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현실 공간을 사물의 거리와 크기에 따라, 수학에 의거하여 현실의 환영을 재현하는 원칙으로 근대 미술 생산의 핵심사안이었다. 원근법은 근대 회화와 조각이 보여주는 현실 환영주의, 즉 회화와 조각이라는 재현을 바라보면서, 실제 현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원칙을 생산한 원인인 동시에, 또 재현에 실제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시도의 결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현실 환영적 재현을 위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인 동시에 조각과 회화의 현실 환영주의를 본격화시킨 결정적 요소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근대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귀족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점진적 혹은 급진적 잠식의 역사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서구사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의 확립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그 이후의 서구의 역사를 부르주아 계층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근대의 주요한 문화 생산과 소비의 역사 역시 계급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귀족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완벽한 지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문화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것은 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발생한 다다이즘, 러시아 구성주의와 같은 급진적인 전위 예술운동이었다.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 생산의 주도권은 아닐지라도, 그것의 소비는 일반 대중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예술의 제 형식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일반 대중에 접근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구성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예술생산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제 원칙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양상을 띠었다. 다시 말해 고답적인 예술의 생산을 위해 준수하는 미학적 제 규범, 부르주아 예술을 구성하는 제 형식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시각 예술의 경우,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장 중요한 생산 원리로 삼았던 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르네상스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원근법과 이에 의거한 현실 환영주의였고, 짜르의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에 참여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이 원근법과 현실 환영주의를 타락한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현실재현 규범으로 파악하고, 이것을 새로운 재현의 영역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그들은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의 취향에 부합하는 내용을 배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환영주의와 관련을 맺는 원근법까지도 송두리째 거부했던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일 뿐이었다. 대신 그들은, 로드첸코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타트린(Tatline)의 슬로건을 빌면, “삶 속의 예술”을 목표했다. 사회적 공리성, 현실적 실용성을 천박한 것으로 간주하고 오직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서구의 근대 미술을 거부하고, ‘삶을 위한 예술’, 사회주의 건설에 봉사하는 예술을 지향했다. 로드첸코가 문자, 포스터, 가구, 실내 디자인 그리고 연극무대 디자인을 행한 것은 바로 ‘삶 속의 예술’을 실천하는 양상이었다. 흔히 실용미술, 응용미술이라 불리는 이러한 디자인 작업은 서구의 근대 미술의 위계질서 속에서는 실용성, 현실적 유용성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하위장르를 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상한 미의 이상, 미의 순수성을 포기한 채,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천박한 기예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이 정치, 경제의 제반 질서를 전복시켰듯이, 러시아 구성주의자들도 혁명의 여파 속에서 전통적 미술의 위계질서를 뒤집고자 했다.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가 기계적 예술, 천박한 기예로 여겼던 것을 그들 예술생산의 주요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미술 생산제도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기를 원했다.
  사진 매체에 로드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1923년부터 다른 사람의 사진들로 몽타주와 콜라주 기법으로 포스터와 마이아코프스키(Maiakovski)의 시집과 같은 삽화 디자인 그리고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인 「레프 Lef」의 표지 디자인을 시작하면서였다. 1921년 이미 “예술 타도, 테크닉 만세”를 부르짖으며, 예술 생산에 있어서 기술공학의 중요성을 과장적으로 강조했던 로드첸코는 사진에서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보았다. 게다가 사진은 그 직접적 가독성(可讀性)으로 말미암아 홍보와 프로파간다와 같은 사회적 유용성에 특히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곧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사진들로 몽타주, 콜라주 작업을 행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라이카로 직접 찍은 사진들로 몽타주, 콜라주를 행했다. 1924년에는 조폐공사의 노동자들의 작업과 화폐 작업공정에 관한 사진 르포르타주를 실행했다.
  로드첸코의 사진작업은 초상, 도시의 정경, 건축물, 농업과 산업 활동에 관한 르포르타주, 군 생활에 대한 보도사진, 서커스와 스포츠 사진 등 사진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지만, 결코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사진을 공리적 실용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던 그는 전적으로 출판을 위해서만 사진을 생산했다. 즉 책의 삽화, 책 커버 디자인 혹은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하는 포스터에 사용하거나 「건설중인 소련」과 같은 잡지의 보도용으로 이용하였다.
  로드첸코의 사진은 분명한 형식적 특성을 갖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귀족적이고 부르주아 미술의 전통적 구도, 구성방식을 전적으로 부정했다. 원근법을 해체하는 대각선 구도, 극단적인 부감과 앙각 촬영 그리고 과감한 클로즈 업과 비대칭적 구도는 그가 애호한 사진 형식이었다. 
  1934년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은 로드첸코의 사진 스타일을 해제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우선 사진가는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앙각으로 바라보면서 대각선 구도의 좌측 상단부에 위치시킨다. 지평선과 어떠한 소실점도 상정하기 곤란한 이와 같은 구성은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현실을 보고 있다는 환영감을 심어주는 원근법을 해체한다. 다시 말해  2차원의 화면에 3차원의 깊이감을 부여하는 소실점이 부재하는 까닭에, 사진 이미지는 3차원의 공간감보다는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원근법에 의한 시각적 재현이 부르주아가 태동한 르네상스의 발명인 동시에,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근대 미술이 철두철미하게 신봉한 재현원칙이라면, 로드첸코의 원근법의 부인은 볼셰비키 혁명이 부정한 부르주아 사회의 재현원칙을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채광 간막이 벽이 만들어내는 좌측 중심부의 대각선 그림자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각형 무늬는 반 자연주의적(anti-naturalistic)이며, 반 원근법적인(anti-perspective) 모자이크 구조를 상기시킨다. 모자이크 기법이 현실 환영적 재현을 원칙으로 삼은 서구 근대사회의 이전, 다시 말해 중세 시대의 재현양상인 동시에 서구와 대립되는 동방의 재현형식이라면, 로드첸코가 선호한 포토몽타주, 콜라주 혹은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의 중심 없는 이산적(離散的) 구조는 반 르네상스적이며, 탈 서구적이다. 그것은 가상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근대 이후의 서구의 시각적 재현을 일탈, 거부하는 재현구조이다.
  사실, 로드첸코가 라이카로 실험한 극단적 부감촬영과 앙각촬영 역시 원근법에 의거한 귀족적, 부르주아적 재현형식을 거부하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선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겨냥하고, 아래에서 위로 치켜올려 찍는 촬영은 현실대상을 압착시키고 낯설게 만들면서, 자연주의적, 현실 환영주의적 재현을 무화시킨다. 이 두 기법은 대각선 구도와 함께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시점을 거부하면서,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창출해낸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관점에 의한 신생 러시아 인민 공화국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잠재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유도해낸다. 노동자, 청소년은 앙각 촬영에 의해 극적으로 고양된다. 사회주의 이념은 그들을 숭상한다는 점을 파격적인 앙각 촬영이라는 형식의 힘을 빌어 선포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도심 풍경, 노동 현장, 운동 장면을 과격한 대각선 구도로 로드첸코가 포착하는 것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역동성을 드러내려는 의도의 형식적 양상이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는 인민들의 에너지를 구성이라는 형식적 요소 속에 내재화시키려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로드첸코의 극적인 대각선 구도, 극단적인 앙각과 부감 촬영과 같은 기법은 정적이고, 균형 잡힌 회화적 구성(composition)을 거부한다. 그것들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본래 어의에 부합하는 건설, 구축, 구조(construction)와 같은 역동성을 본질로 삼는다. 그런데 로드첸코의 이러한 역동주의는 무엇보다도 라이카라는 사진기의 기동성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나 다루기 편리한 라이카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로드첸코가 보여준 그 파격적 역동성과 기동성은 획득될 수 없었다. <라이카를 멘 젊은 여자>와 같은 일상의 시각을 파기하는 구성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라이츠 카메라(Leitz Camera)의 합성어인 Leica는 오스카 바르낙(Oscar Barnack)에 의해 1910년대 초반부터 개발에 들어가, 1925년 최초로 시판된다. 커튼 방식의 셔터막,  뷰 파인더를 통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거리계를 갖춘 라이카는 금속 매거진 속에 감겨져 있는 24 x 36 mm 영화필름을 사용했다. 40 컷을 연속 촬영할 수 있는 조작이 간편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이 카메라는 첫 해에는 약 1.000대가 팔리고, 1929년에는 약 15.000대가 판매된다. 1933년에는 1.000분의 1초의 셔터 스피드에 도달하여, 거의 모든 장면의 순간 촬영을 허용한다. 필름감도 ASA 4에서 50에 이르는 값싸고 좋은 화질을 보장하는 필름의 개발을 가속화시킨 라이카는 포토저널리스트는 물론이고, 최상의 시점(vantage point)을 천재적으로 개발한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tz), 카르티에 브레송(Cartier Bresson)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매체였다.
  라이카를 통해 파격적인 화면구성, 역동적인 러시아의 사회상을 구축했던 로드첸코의 사진작업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소련 예술계에서 점진적으로 소외된다. 서구의 전통적 재현형식인 원근법과 현실 환영주의를 파기한 그의 아방가르드적 성향은 탄압적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스탈린의 정책에 맞물려 “프로레탈리아 계급에 이질적인 취향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예술생산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1933년에서 1941년까지 잡지 「건설중인 소련」에 소련사회를 홍보하는 사진작업을 10회에 걸쳐 담당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부르주아적 서구 사회가 확립한 보수적 재현 형식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상투적으로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산당의 강령으로 자리잡자, 그의 혁신적 형태탐구의 작업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예술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는 예술의 제 형식까지도 혁명적으로 일신하려 했던 진보주의적 예술운동이 보수 회귀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의해 배척되는 실증적 예의 하나를 로드첸코의 작업은 예술사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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