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출판업자 알베르 스키라 (Albert Skira)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호화로운 잡지의 출판을 꿈꾸고 있었다. 호화롭다는 말은 잡지의 값비싼 장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잡지의 편집과 내용을 위해 참여한 예술계 인사들 역시 호화 인사여야 했다. 대중들의 혹은 문화계 속물들의 값싼 인기나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예술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그야말로 빛나는 인사들이 잡지의 편집에 기여해야 했다.
  스키라는 잡지이름을 정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바로 곁에 작업실이 있는 25세 연상의 피카소와 상의를 했다. 피카소는 기존 예술계를 일신하려는 스키라의 의도에 ‘깃털 비 (Plumeau)’라는 잡지명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제 비트락 (Roger Vitrac)이 나중에 제안한 ‘미노타우로스’가 덜 가볍다고 판단하고 스키라와 피카소는 이것을 잡지 이름으로 정한다.
  이 잡지의 편집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그룹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었다.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공산주의 혁명과 비합리적, 비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개발하려는 초현실주의 혁명 사이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1935년에 자살한 르네 크르벨 (Rene  Crevel)을 통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알게 된 스키라는 서구 문화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이들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잡지의 편집에 적극 끌어들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교황’ 혹은 ‘마법사’의 역할을 행한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시인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 운동에 세례를 받은 철학자 로제 카이우아 (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 (Michel Leiris) 등은 정기적으로 「미노타우로스」에 그들의 글들을 기고했고,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후앙 미로 (Juan Miro) ,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달리 (Dali), 쟈코메티 (Giacometti) 와 같은 예술가들도 글이나 그들의 작업을 수시로 게재했다. 그리고 브랏사이 (Brassai), 만 레이 (Man Ray), 라울 위박 (Raoul Ubac)은 잡지의 사진 도판을 담당한 사진가들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만 레이의 <미노타우로스>는 1935년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 7호의 안표지를 장식한다. 머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한 여자 혹은 남자의 상반신은 강력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속에 있다. 남녀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미노타우로스는 팔과 가슴의 애매한 근육구조와 풍성한 겨드랑이 털, 그리고 그림자 속에 잠겨버린 복부 때문에 남녀양성적 존재, 혹은 성의 특색이 없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러한 재현양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초현실주의적으로 개작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해괴망측한 탄생의 이야기를 갖는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재물로 바치기로 한 신탁 황소를 재물로 바치지 않는다. 포세이돈은 이에 대한 징벌로서 미노스의 아내, 파지파에가 이 황소를 겉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파지파에는 황소에 대한 욕정을 풀기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에게 실물과 똑같은 암소를 만들게 한 후, 그 뱃속에 들어가 사랑에 빠진 황소와 수간을 한다. 이 교접을 통해 미노타우로스는 태어나고, 분격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건축한 미궁에 이 반인 반수를 가둔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미노스는 해마다 혹은 9년마다 7명의 청년과 7명의 처녀를 넣어 주게 되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아리안의 실’이라는 이야기가 비롯된다.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안이 건네준 실뭉치의 실을 풀면서 깜깜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의 어둠을 빠져 나온다.
  그런데 파지파에와 황소의 엽기적 사랑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남는다.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반인 반수는 사람의 머리와 짐승의 몸체를 갖는 반면, 오직 미노타우로스만이 짐승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반인 반수들은 인간의 머리로 사고하고 짐승의 몸으로 행동하는 반면, 미궁의 괴물은 짐승의 머리로 사고하고 인간의 몸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노타우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황소에 대한 정욕에 미쳐버린 그의 어미처럼 그는 이성의 통제, 합리적 계산, 논리적 사고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이다. 그는 동물로서 욕망하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존재의 표상이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로제 비트락이 스키라에게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연계를 기대하며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미노타우로스’로 추천한 것은 따라서 우발적인 것도, 단순한 기지의 산물도 아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로트레아몽 (Lautre amont 1846-1870)의 『말도로르의 노래 Chants de Maldoror』에 나오는 환상적인 동물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인간의 야수성의 탐구는 초현실주의의 일반적 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 황소머리로 대체된 미노타우로스를 자신들의 예술적 활동의 표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구를 지배한 이성주의, 합리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머리가 사고하는 이성과 논리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욕망과 광기의 화신이었다.
 
  서구는 17세기와 더불어 철학, 심리학, 정신의학 등 제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를 조직하고 경영하는 기술에 있어서 오직 이성의 언어, 합리적 행동만을 존중하고, 광기의 행동과 무의식의 언어를 무시하고 탄압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광기는 철저하게 일반의 시선에서 격리되고 감금되었으며,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욕망은 추잡하고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이성의 합리주의와 논리적 사고로 해명될 수 없는 인간 활동의 영역, 사고체계는 미신으로, 거짓으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완성되자, 서양의 문화사, 서구의 사회사의 전개는 합리적 이성의 제국주의가 꿈, 욕망, 무의식, 광기의 세계를 억압하는 양상으로 철저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논리중심주의는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와 맞물려 있었다. 데카르트적 이성중심주의가 모든 비이성을 문화의 영역 밖으로 추방해 버리고, 반이성의 입을 봉쇄하는 권력으로 자리잡는 것과 병행하여, 합리주의적 사고, 논리적 추론을 신봉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를 점진적으로 확고히 해나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치적, 군사적 통치권으로 연결시키는 급진적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유럽의 지배는 역사적 기정 사실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심각한 위협은 언제나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은 많은 지식인, 젊은 예술가들에게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야기했고, 이성 중심적 서양문명의 한계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되 돌이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사회지배를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체를 부각시켰다. 여기에서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전통적 서구문명의 위기와 몰락의 가능성을 보았고, 인간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인습적 사고의 틀을 파괴하고자 했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에 기반을 둔 모든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을 거부하고, 인간의 삶을 새롭게 갱신할 사고, 예술, 제도를 암중모색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심판관’이라 불린 앙드레 브르통에게 있어서 인간의 새로운 삶을 보장해줄 메시아적 메시지의 보고(寶庫)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과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인 사상과 이상에 대하여 차원 높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트로츠키 (Trotski,1879-1940)가 쓴 『레닌』이었다. 프로이드는 부르주아의 사회가 규정한 인간관을 일거에 전복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논리와 이성이 억압한 성적 충동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결코 이성이 지배하는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부조리한 욕망의 존재이다. 프로이드가 확립하는 새로운 인간관에 자극 받아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가 규정한 ‘현실 원칙’에서 벗어나 ‘쾌락의 원칙’에 몰두하고자 꿈과 무의식의 세계, 충동의 세계를 탐색했다. 현실 원칙의 근간을 이루는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17세기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이전의 미신적, 마술적 세계관을 탐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원칙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이미지, 우연의 사고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심리적 상태를 선호했다. 프로이드가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행동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발명한 자유 연상을 허용하는 최면 상태, 반수상태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개발하고자 몰두했다. 전제주의적인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만이  ‘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초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드가 기성의 윤리와 규범,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논리, 이성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을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초현실’에 도달할 분명한 이론을 부여했다면, 트로츠키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를 타개할 이데올로기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비쳐졌다. ‘진정한 삶’을 위한 인간 사고의 변혁을 ‘초현실주의 혁명’이 담당한다면, 진정한 삶을 위한 세계의 변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 행할 것이라고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트로츠키의 실각으로 인한 소련의 전제주의적 노선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의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공산당의 입당과 탈당,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와 회의 등 1930년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혁명을 향한 노선은 지리멸렬해진다.
  만 레이, 브랏사이, 라울 위박, 작크 앙드레 부아파르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은 1920년대 이후 간행된 수많은 초현실주의 저작물, 정기 간행물에서 그들의 사진을 통해 초현실주의 텍스트를 도해하고 설명했다. 특히 만 레이 (1890-1976)는 1921년 파리에 도착하여 마르셀 뒤샹의 소개로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인물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초현실주의가 탐구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성적 충동의 세계를 작가들의 텍스트에 의거하여, 초현실주의 이론의 여파 속에서 여러 사진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시각화했다.
 
  만 레이의 작업 중에서 우선 특기할만한 작업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여섯 번째 노래의 한 구절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사랑스러운”
  그러니까 이 시는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이 전혀 논리적, 인과적 상호 연관성이 없이 서로 함께 마주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 1 선언>>에서 1918년에 발표된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의 글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가 애호하는 이미지를 분명히 했다.
  “이미지는 (...)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키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접근된 두 개의 현실의 관계가 보다 거리가 멀고 적절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며, 더 한층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즉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킬 때 초현실주의가 기대하는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띤” 이미지가 태어난다. 만 레이가 예술을 반이성, 비이성을 구체화하는 행위로 규정한 다다이즘의 주동자, 트리스탕 차라의 서문과 함께 1922년 출간한 포토그램 사진집, 『감미로운 평원 Les Champs d licieux』은 그러한 예의 전형으로 남는다.
  두 번째로 만 레이의 사진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일상성 속에 내재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남녀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사물들을 적절한 각도에서 잡아내어 불합리한 성적 충동이 꿈틀대는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성에 대한 억압된 충동이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세 번째는 기존의 윤리와 인본주의적 사고를 초현실주의의 이념에 비춰 비웃는 작업이다. 자살을 유머로써 예찬하기도 했고, 항문에 손을 얹은 여인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한 후 <기도>라는 제목을 붙여 종교적 경건주의를 냉소했다. 솔라리제이션을 통해 체액을 방사하는 듯한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 한 후 <사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선언하기도 했다.
  189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만 레이는 파리에 도착한 30세 이후,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유명 예술가들과 적극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성가를 최고도로 높인다. 1976년 그가 파리에서 죽은 후, 여러 미술사가들은 그의 작업이 초현실주의의 핵을 형성하는 작업임을 인식하게 된다. 해서 장인적 노고가 결여된 유희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그의 사진작업은 빠른 속도로 높은 컬렉션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가짜 눈물을 붙인 한 여인의 눈을 클로즈업한 <유리 눈물> (1930-33 경)은 1993년 19만 3천 불에 경매되었고, 1995년에는 26만 6천 5백 불에 경매되었는데, 최근에는 100만 불에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만 레이, <미노타우로스, Minotaure>, 잡지 「미노타우로스」, 1935, No. 7의 속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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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20세기 현대 사진의 출발을 1950년대 사진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영상사진과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거리 사진의 출현으로 잡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건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진으로부터의 “이탈”을 들 수 있는데 흔히 전자의 이탈을 재현 대상의 내적 혁명이라고 할 때 후자의 이탈은 외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 중 보도사진의 사건-이미지가 아닌 시적 언어로서의 사진 이미지를 말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영상사진 계열은 그후 특히 1970년대 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나아가 후기 구조주의(기호- 구조주의)의 탁월한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①

사진을 하나의 코드나 의미 전달을 위한 언어로 간주한 전통적 개념과는 달리 프랭크 이후 새로운 사진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진을 표현적 언어로서 이해하였고 거기서 단순한 의미론적 해석이 아닌 사진을 완전한 하나의 “감각”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적인 재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프랭크를 따르는 거의 대부분의 젊은 사진가들은 더 이상 미국 전통사진을 지배해 온 인본주의나 대자연의 예찬과 같은 사건 중심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인 문제, 꿈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문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문제 그리고 거의 추상적인 문제를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미국 전통사진의 주류에서 볼 때 유럽적 경향으로 간주되었고 점진적으로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와서는 순수 사진 영역에서 지배적인 새로운 사진 경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듀안 마이클스, 레 크림스, 랄프 으젠 미트야드, 랄프 깁슨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전후 미국 작가들 중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현대주의자의 혈통을 갖는 작가는 예외적으로 로버트 프랭크와 그의 동업자이자 후배인 랄프 깁슨(Ralph Gibson)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스위스인 프랭크가 실존주의적인 유럽적 경향을 미국에 이식시켰다면 미국인 깁슨은 자신의 이태리 시리즈 사진을 통해 이태리적 경향을 미국이 아닌 오히려 유럽에 이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깁슨의 유럽적 혈통은 건축성과 초현실성에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 - 30년대 만 레이(Man Ray)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과 러시아 구성주의 사진과 앙드레 케르테즈(Andre Kertesz) 계열의 초현실주의 사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과 빌 브란트(Bill Brandt)의 강렬한 리듬과 볼륨, 공간의 질이 창조하는 초현실성 또한 거대한 풍경이 보여주는 큰 구도(Close up) 등이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빌 브란트는 “꽉 찬 물질은 빈 공간의 신비를 연결하고 바다의 수평선은 언제나 시적 인상을 준다”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의 “단편 미학”과 큰 구도의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사진가들의 모델이었던 프랭크의 강렬한 심적 동요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깁슨의 사진은 프랭크의 경우처럼 허무, 소외, 번뇌 등의 많은 정신적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성이나 관능과 같은 사진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전통적인 취향을 보였다. 결국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미국 사진의 맥과 새로운 유럽적 경향을 접맥하면서 특히 1970년대 이후 사진의 또 다른 경향을 세웠다.
 
랄프 깁슨은 1960년대  “사진 행위는 더 이상  어떻게 찍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에 있다”고 선언했다. 즉 사진적 의도는 찍혀진 대상(objet photographiee)이 아닌 찍혀진 주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대답은 “감각 안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1970년대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3부작 시리즈(Triologie)인 <몽유병자(The somnanbulist, 1970)>와 <바다 기행 (Days at Sea 1973)> 그리고 <데자 - 뷰(D eja - vu, 1975)>에서 그는 유럽적 경향인 건축적인 단순함과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년 후 다시 깁슨은 “주제는 단지 사고의 반사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사진은 시각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각의 질이다”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 말은 사진이 표명하는 것은 감각에 의한 비구체적인 추상 즉 “사진적 추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추상은 형태가 없는 무형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에 있어 추상의 표현은 색이나 선의 조합에 의한 그림의 추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의 신호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재현된 신호를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현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추상적 표현을 외적 형상(forme)으로부터 재현된 내재적 형상(figure)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형상을 인덱스라고 하고 내재적 형상은 그 인덱스의 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은 한 마디로 공통된 문화적 실행과 사는 방식 그리고 살아온 경험의 외적 인덱스라고 하고 그 지시대상은 단지 감각으로만 포착되는 시적 언어를 말한다.
 
흔히 사진에서 “깁슨적이다”라고 말하는 사진의 독특한 특징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의 사진들은 다소 지나치게 요약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반-의미와 인덱스 그리고 열린 공간의 크게 세 가지 개념적인 특징을 가진다. 우선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전혀 다른 반 - 의미적인 사진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읽기에 있어 사진을 의미로 본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게 위장된 그러나 임의적으로 고착된 기능주의이고 전체적으로 의미의 부조리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모든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이(대체로 즉각적으로 왜곡 조작될 수 있는) 의미적 관계에 의해 서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구조주의)은 부조리적 사고이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왜냐하면 출현 자체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현되는 장면의 주제가 아니라 감성(affect)과 성(性)적 에너지인데 이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묶이지 않는다. 예컨대 모자 벽 신체와 같은 단편적인 장면(사진 1)에서 사실상 재현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제가 없다. 이러한 주제의 부재는 결국 반-다큐멘터리적인 의미의 박탈을 가지고 온다.
 
전형적인 순수사진인 깁슨 사진을 흔히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재현된 대상으로부터 의미 분석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 시인이 방출하는 음색을 음미하는 것과 같이 그 대상으로부터 환기되는 무엇을 포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진행 과정은 정확히 시를 읽은 것과 같은 반-의미적 읽기에 관계한다. 예컨대 우리는 잡지 기사와 시를 혼동하지 않는다 : 잡지 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언어가 지시하는 분명한 의미들의 조합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시를 읽을 때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적인 조합은 수정되어 근본적으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때 의미적인 조합은 단지 시적 메시지의 배경을 이룰 뿐이고 시가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생기는 여운과 같은 일종의 감각적 추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사진 역시 그 읽기에 있어 분명히 다르다. 이 두 종류의 사진 읽기는 비록 같은 물리적 진행 과정에서 시각적으로 읽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보는 방법(la maniere de voir)”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각적이든 의미적이든 무엇을 “보여준다”라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가를 말하고 반면 순수 사진가는 언제나 의미와 상징의 영역을 넘어 응시자로 하여금 무엇을 “환기시키기”를 원하는 사진가이다.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에서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을 충분히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수사진은 관객에게 대상으로부터 어떤 특정한 은유적인 것을 연상하도록 (거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인 환유적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감동은 사실상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환유적 확장 과정에서 삼인칭 “그(He)”는 응시자 각자의 경우를 말하는 일인칭 “나(I)”로 이동되고 또한 거기서 서로 서로 반죽되어 결국 우리들 공통된 감각인 “우리(We)”로 이동되는 의미적 변화가 있게 된다.②

랄프 깁슨의 사진 혹은 깁슨 스타일의 사진이 가지는 두 번째 개념적인 특징은 인덱스화(indexation)이다. 단편적인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큰 구도 등은 인지 가능한 보이는 세상의 단편으로부터 안 보이는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몸통 즉 형이상학적 실체를 지시하는 인덱스(index)이다. 여기서 인덱스는 언제나 외적 형상의 세계로부터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사진의 위대한 특징인 “인덱스적 이중 구조(시각과 환기 동시에)”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사진은 인덱스화 된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보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보라”라는 무언의 자동생성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사진에서 하늘로 가득 찬 틀로부터 나오는 팔, 돌려진 머리 뒤로 여전히 흘러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 등이 지시하는 것은 단지 무언의 어떤 출현을 증언하는 침묵인 셈이다. 결국 사진의 이중성은 마치 양복의 겉감과 안감과 같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의미적인 영역인 상부구조와 그것이 지시하는 비 인식의 존재이자 형이상학적 존재의 영역인 하부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분으로부터 무언의 몸통을 지시하는 것을 단편화 된 미학 즉 단편 미학(fragmentati
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프레임에 의해 잘려진 단편 즉 사진의 부분(프레임 내부)이 틀 밖의 동체를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단순한 사진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상황의 단편이 인지 불가능한 감각적인 몸통을 지시하는 미학을 말한다. 그것은 비 물질적이고 환기적이고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인 음색을 말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을 단적으로 말해 상부의 인지 대상이 하부의 존재론적 대상을 지시하는 인덱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얼굴은 그 동체를 대변한다”라는 “얼굴화 된 세상(Le monde visagefi /질 들뢰즈)”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예컨대 시적 음색이나 음악의 순수 혹은 형용할 수 없는 귀족성이나 세련미 등은 무형의 존재로 언제나 그 실체를 대변하는 인지 가능한 단편 즉 일종의 표현적 대용물을 돌출 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돌출은 마치 빙산의 하부에서 수면에 나온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인식 영역으로 돌출된 단편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에서 이해된다.
 
한편으로 볼 때 깁슨의 사진에서 도장, 낙인, 상형문자, 웨이브 친 깃발, 이데오그램,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자물쇠 채워진 문, 포도주 병 등의 단편화된 많은 형태들은 모든 감정적 에너지와 다양한 신호를 방출시키는 출발점으로서 현실에 돌출된 표면적 형태(표면화된 형상)들이다. 이때 단편은 그 전체보다 더 완전하다. 예컨대 “깁슨은 미켈란젤로처럼 잘려진 조각이 완전한 조각보다 더 조각적이라고 생각했다”③  또 한편으로 볼 때 렌즈나 틀의 단순 구성에 의한 큰 구도 즉 클로즈업(Clouse up)은 결국 이미지에서 극히 안정적이고 분명한 진술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진술을 가진다.
 
 깁슨의 사진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상 생활의 스냅사진과 같이 흔들림이나 율동 혹은 흐림에 의한 암시적인 움직임(file)은 전혀 없다. 반면 이미지들은 분명한 명암 대비(큰 대각선 명암, 줄 무늬, 얼룩무늬, 직조 등)로 나타나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내용을 교묘히 감싸는 “표면적 조건”(Regis Durand)을 만든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에 거슬러 싸우는 사진의 전투와 죽음과 같은 정(靜)적인 유령을 격리시키는 움직임의 제스처에 익숙해 왔다. 응고된 엄숙함이 보장하는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오싹하게 한다” ④  이와 같이 극히 정적인 이미지의 출현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형이상학적 감정을 발산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감정 - 이미지(image-affections)”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 말은 “(응고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임이 감각과 행위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이미지” ⑤  를 말한다.
 
끝으로 깁슨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세 번째 요소는 특별한 공간 구성에 있다. 그의 사진은 우연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사진으로 마치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이 철저한 건축적인 사고로부터 형성된다. 그래서 사진들의 공간은 건축적인 찬란함과 조각적인 경향 그리고 그래픽적인 완벽한 형식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건축적인 장소로 이해된다(사진 2). 또한 사진의 지시된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진화된다.
 
거기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포토-스틸(photo-stills) 형식의 프레임 즉 큰 구도(Clouse up)에 의한 단편화는 대상을 단지 가깝게 보여지기 위한 강압적인 요소가 아니라 확대된 대상이 출현하자마자 모든 문맥과 서술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프레임 밖으로 방사하는 어떤 강렬한 힘을 발생시킨다. 이때 표면은 수수께끼가 되고 그 공간은 “아무 공간” 즉 “완벽히 이상한 공간, 가장 순수한 자리로 잡혀지는 감정적인 공간이 된다. (...) 이러한 공간은 이미지를 지시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미지를 연상의 다양한 조합들로 열어주고 또한 이미지를 출구에서 추상적인 단계로 지나게 한다” ⑥  이는 곧 열린 공간으로의 도약이다.
 
앞서 말한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는 깁슨의 에로틱한 사진들이다. 특히 깁슨의 후기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몇 몇 누드(에로틱) 사진들은 관능적 욕구를 보다 암시적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 예컨대 장면들은 에로틱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재현이 아닌 여자 신체의 단편들을 보여 주면서 관능적 욕구를 지시적으로 얼굴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서 재현상의 주제로 보여지는 허리끈, 붉은 손톱의 여자 손, 검은 스타킹 등의 단편적인 성적 물신들(사진 3, 4)은 단순한 자료적인 진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얼굴화 된 “신체-얼굴들(corps-visages)”이다. 이는 비 물질적 감성과 성(性)적 에너지의 분출구임과 동시에 그러한 감정의 전율(누구나 공통된 성적 욕구)을 지시하는 사진적 자국(index)이다.

결론적으로 깁슨의 사진은 보이는 세계의 시각이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의 촉각이 된다. 대상과 관객 사이에서 볼 때 재현된 단편은 관객으로 확장되는 존재론적 이동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동은 인식의 상부구조에서 비 인식의 하부구조로, 의미의 영역에서 탈-의미의 영역으로, 진술된 단편에서 내재된 몸통으로의 이동을 말한다. 깁슨의 사진은 결코 형식주의나 표현주의적인 재현이 아니라 단지 인덱스화 혹은 얼굴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상징이나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징후적이고 또한 시적인 “생성-얼굴(devenir-visage)”이고 그때 사방으로 방출되는 감각의 음색은 “사진적 추(abstraiphotographiq
ue)”이다. ●
 
<주요 참고도서>
Courant Continu, Ralph Gibson, Marval, Paris, 1998.
L'Histoire de France, Paris Audiovisuel, Paris, 1991.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L'Oeil flottant : Un voyage vertical, Paris Musees audiovisuel, Paris, 1986.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주)
① 물론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 모델로서 사진 담론은 실질적으로 퍼스(C. S. Peirce)이론과 바르트의 참조주의가 도입되는 1980년대 초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미국 구조주의 분석 중심의 담론에서 프랭크 사진의 분석은 존재론적 시각이 아니라 보다 의미론적인 내용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② 이미지의 장면을 떠나 사방으로 방사되어 퍼지는 연상의 확장 이것을 필립 뒤봐는 “푼크툼의 확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기억의 확장은 관객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확산되는 환유적 확장이다. 역으로 은유적 확장은 분명한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광고나 의도된 대중 전파 매체의 일방적 전달(문화적 사회적 코드)에 관계한다(움베르토 에코).

③ 이러한 단편 미학은 흔히 미술의 미니멀주의와 비교된다. 조각에서 미니멀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관객에 의해 선택된 공간 속으로 합병될 수 있고 또한 사진의 경우도 역시 사진 이미지가 관객이 선택한 주관적 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창조적인 측면은 사실상 전혀 다른 데 있다. 깁슨의 사진에서 중요한 점은 미니멀 조각처럼 단순화 된 형태와 그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로부터 환기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내재적 형상)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깁슨의 사진에서 단순한 볼륨은(기하학적 특징)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적 언어는 단순한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④ Regis Durand, “un regard en reponse : le monde-visage de Ralph Gibso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p. 24.

⑤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은 레지 뒤랑의 “얼굴 개념”(들뢰즈의 분석에서 차용)을 설명한다. 이 말은 질 들뢰즈의 운동-이미지(L'image - mouvement)와 같은 개념을 가지며 특히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를 “탄착(impact)”이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말하자면 부동의 진술) 남은 잔여 찌꺼기(혹은 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개념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탈코드, 무의미)이다”.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p. 97, in Regis Durand, op. cit.

⑥  Gilles Deleuze, op. cit., p. 154-155.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Chiaroscuro 1974-97 시리즈 중
(사진 2) Quadrants 1975 시리즈 중
(사진 3) Infanta 1977-98 시리즈 중
(사진 4) L'Histoire de France 1972-98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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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진의 출발인 1950년대 영상사진 ①의 개화로부터 1970년대 사진의 새로운 경향(존재론적) ②  그리고 그후 포스트모더니즘의 힘찬 사진의 도약은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 미국 사진의 승리를 단언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국 사진을 지배한 전통적인 형식주의(특히 매체 사진)와 인간 내적 탐구를 우선으로 하는 유럽의 실존주의 경향과의 적절한 접맥의 결과였다 : 예컨대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랄프 으젠 미트야드(Ralph Eugene Meatyard), 랄프 깁슨(Ralph Gibson) 등과 같은 작가의 사진들은 엄밀히 말해 미국 사진의 전통보다 오히려 유럽의 실존주의나 초현실주의 경향에 더 가까웠다. 반면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또는 안셀 아담스(Ansel Adams)와 같은 사진가들은 전통적인 미국의 순수 사진계열 특히 대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를 재현하는 풍경사진을 선호했다. 그와 같이 1970년대 미국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의 순수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표현적 메시지를 은닉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유럽의 사진가들은 미국의 경우처럼 매체사진의 순수성을 그들의 전통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술적 매체로서 표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사진 매체의 순수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매체에 인위적인 조형성을 부여하면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을 우선으로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진을 더 이상 객관적 사건의 전달 매체가 아닌 붓이나 잉크와 같이 개인적인 표현을 위한 표현 도구로 간주하면서 또 다른 조형적인 활용을 시도했다. 사진의 영역에서 이러한 새로운 지형을 개척한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하나는 이탈리아인 마리오 자코멜리(Mario Giacomelli)였다.
 
 비록 유럽 사진작가 대부분이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사진의 큰 영향력에 가려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마리오 자코멜리는 이미 1960년대부터 거의 유럽을 대표하는 서정 음유시인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특징적으로 그의 사진적 테마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대지와 생명과 같이 자신을 둘러 싼 진솔하고 담백한 일상생활의 서정들이며 그 이면에 인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존재론적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

마리오 자코멜리는 1925년 8월 1일 이탈리아 중동부에 있는 마르케주 세니갈라(Senigallia)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줄곧 그 곳 리비에라(Riviera)③ 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의 나이 9살 되던 1934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 아이들의 생계를 댈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양로원 세탁소에서 고된 노동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일하는 양로원에 자주 갔고, 일찍부터 그 곳 노인들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 생명의 시작만큼이나 삶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죽음은 어둠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3살 되던 해 그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경험이 되는 인쇄소에서 일하였는데, 거기서 (기술자가 아닌) 소년 직공으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차원적인 자음과 모음의 식자글씨와 이상한 형상들에 유혹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인쇄소의 주주로서 인쇄 일을 시작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삶과 생명에 대한 시적 영감이었다. 그후 그는 은밀하게 시를 적기 시작하였고 점진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삶에 있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 번도 사진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그는 8포즈 대신 10 포즈를 가능하게 하는 필름 6 x 9 사이즈를 개조하였고 그의 집 돌 세탁장 구석을 개조하여 암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행위를 독립된 예술 장르의 창작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진을 그림이나 데생으로 간주하여 최종적인 인화 과정에서도 자신의 표현에 적합한 흑백 종이를 선택하여 사진들을 현상했다. 왜냐 하면 그에게 있어 창조의 원초적인 힘은 자신이 체험한 시적 영감에 있었고 사진은 이러한 영감과 직감을 위한 시적 언어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코멜리는 그의 사진 인생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고 또한 자신의 예술적 기질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데, 그 인물은 고향 세니갈리아의 변호사임과 동시에 “라뷔솔라(La Bussola)”라는 아마추어 사진모임의 회장인 귀세프 카발리(Guiseppe Cavalli)였다. 카발리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구상 미술의 박식함은 젊은 자코멜리를 강하게 유혹했고 그의 영향으로 표현상의 추상적 형태와 조형성 그리고 현대미술 특히 추상 표현주의의 강렬한 매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진 행위로 연결되었다. ④  물론 카발리의 요청으로 그는 라뷔솔라 그룹에 들어가지만 곧 그는 아주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견해 차이로 즉각적으로 탈퇴한다. 그는 그때부터 결정적으로 아마추어 문화로부터 거리를 가지면서 깊은 고독 속에서 끈질긴 개인적 탐구를 계속한다.
 
마리오 자코멜리의 사진들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적 본성에 대한 서정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정은 당시 전후의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가 만든 작가의 깊고 원초적인 심리학적 충동과 자신의 특수한 성장 배경으로부터 형성된다 : 어린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개인적인 고통, 전쟁으로 황폐된 재건 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분쟁으로 야기된 나라의 집단적 위기의식, 외래 문화와 전통과의 혼동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작가로 하여금 거의 반사적으로 인간의 내적 본성에 대한 탐구와 인간적 연대 욕구를 발산하게 했다. 게다가 50년대 이태리 지방은 급속히 산업화되고 문명화된 도시와는 달리 아직도 내부적으로 많은 전통 종교와 우상 숭배적인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코멜리는 50년대 당시 이태리를 지배한 전통적 매체사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일상의 서정을 농축시킨 삶의 흔적들과 특히 인간의 땀과 노동을 용해시키는 땅의 껍질과 주름(항공사진)을 통해 사랑과 일, 젊음과 늙음, 생명과 죽음 등의 보다 본질적인 주제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거기서 이미지들은 더 이상 현실의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닌 일종의 시적 언어로서 추상적인 형태를 가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러한 이미지들은 크게 두 가지 철학적 배경을 가진다.
우선 작가가 초기 사진부터 줄곧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자연과 문화의 조화”이다.
 
그것은 마치 음유시인이 읊는 가락과 같이 작가의 경험적인 체험과 내면적인 직감이 빚어내는 감정의 음색, 쉽게 말해 삶의 진실과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거기서 사진들은 언제나 감각 이전의 내재된 초월성 ⑤  즉 형태들의 생산 이전 단계로 거슬러 존재하는 내재적 생성 또는 구조화된 추상 이미지로 나타난다. 여기서 구조화(structuralisation)란 무엇을 말하는가 ? “그것은 이태리적인 영감을 말하는데, 그 의미는 현대 이태리어 “struttura”에서 아직 남아있는 라틴어 어원인 “structura”에서 암시되는데, 이 말은 뼈나 돌과 같이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여하간 모든 건설에 공통적인 무엇을 말하는 특수한 단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일종의 구성적인 근본이고, 모든 특별한 실현 그 이전에 일반적인 원칙 다시 말해 자연과 문화에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일종의 선험적(transcendantal)인 디자인이다 - 그러나 이것은 “초월적(transcendant)”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주 “내재적(immanant)”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예를 들어 독일 특히 헝가리의 바우하우스 디자인은 인공물 속으로 게다가 디지털 속으로 자연을 빨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이것(선험적 디자인)은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즉 문화 혹은 인공물이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 예 자연의 형태에 조화를 이루는 우리 나라의 초가집 경우) 것이다.” ⑥  

그래서 구조화라는 말은 구체적인 형태나 의미로 구성된 수많은 문화들이 사실상 형태가 없는 동일한 골격으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화의 관점에서 자연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단지 자연의 표면일 뿐이고 구조를 말하는 배경에서 형태로 돌출된 구성(construction)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와 자연의 조화임과 동시에 형태 없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구조화된 추상이다. 가령 산허리를 가로지르고 산을 관통하여 만든 거대한 동맥의 고속도로, 지도를 바꾸는 엄청난 간척공사, 방대한 인간 조직과 그 집단 활동 등은 문화에 자연을 흡수하면서 언제나 구체적인 문화를 구성한다. 그때 자연과 문화는 별개의 것이 된다. 그러나 대지의 품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땀과 노동은 자연에 흡수되어 구조(본질화)화 된 문화가 된다. 거기서 우리는 문화와 자연의 조화를 볼 것이며 형태와 의미 이전의 본질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연에 대한 시적 영감과 직감은 문화를 자연 속에서 이해하는 구조화(조직화)된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그때 시적 영감의 이미지는 단지 추상적인 형태만을 가질 것이다. 마리오 자코멜리는 자신의 풍경 사진들에 대해 “그것은 추상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본질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소위 “메타”라고 언급할 수 있는 정상적인 형태로부터 이탈된 그의 사진들(리터칭 된)이 단순히 시각적으로 변형된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시적 영감에서 구조화된 본질적인 풍경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코멜리 사진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내적인 개념은 삶과 죽음 그리고 대지의 순환을 말하는 “생성-형성(devenir-forme)의 시적 재현”이다. 그는 “모든 역사는 세계가 진행하고 있는 역사(진화)를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틀 내부에서 이해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들이 암시하는 어떤 순환적인 리듬과 반복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제식화로 나타나는데, 이는 대지로부터 탄생하여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동양의 윤회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대지와 생명,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등과 같이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지는 사진의 테마들은 마치 웅장한 서사시에 적용되는 후렴구처럼 언제나 반복과 리듬을 가진다.

 언제나 위대한 문학가나 시인들을 유혹한 것은 특별한 영적 신비 의식(초월성)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 은닉된(내재성) 삶과 죽음의 순환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코멜리를 유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실이었다. 그를 유명하게 한 양로원(사진 1), 어린 신학생들(사진 2), 스카노(사진 3) 등과 같은 매혹적인 사진 시리즈들은 어떤 신비론적이고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아주 강한 흑백 콘트라스트와 거친 입자 그리고 무차별한 인공 빛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통적으로 우리 일상의 어떤 존재론적인 내재성을 지시하고 있다. 특히 삶의 종착역인 “양로원의 삶”을 들추어내는 묵시론적인 이미지들은 무기력하게 던져진 고통과 죽음의 상처 그리고 이러한 자국들 뒤에서 미리 사후의 세계를 예견하듯이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연속적인 시간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 존재와 대지와의 관계는 언제나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 그것은 자연, 들판의 일, 축제, 어느 젊은 커플의 열렬한 포옹, 웃음, 노래, 미소,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춤이다. 삶의 원초적인 제스처와 유머로 가득 찬 대지의 역사들은 우상숭배의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관능으로부터 시적인 모든 상상에 적절한 환기적이고 서정적인 긴장을 진동시킨다.” ⑦ 엄마 손길과 같은 천성적 대지, 풀밭 위 젊은이들의 열애, 식사와 노동, 마르케의 땅, 거기로부터 나온 시(詩)적 영감이 바로 사진이고 그때 사진가는 음유시인이 된다.

대지와 생명을 노래한 1950-60년대 자코멜리의 풍경 사진 시리즈(사진 4)는 최고의 모상 즉 대지에 공헌된 한 편의 서사시로 간주된다. 비행기(큰 소리를 내는 모터 달린 조립형 경비행기)에서 포착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밭고랑의 운각으로 나누는 분절과 앵글 속에서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 소위 의미 없는 “무 - 기표(insignifiant)”의 존재를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풍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지형의 모사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구조화) 조화의 풍경을 말한다.
 
다시 말해 풍경들은 모든 원근법적이고 피토레스크적인 규범들을 비우면서 땅, 밭고랑, 나무 그리고 땀(노고)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종속이상 더 이상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풍경의 본질적이고 거시적인 재구성을 보여준다. 결국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한 번도 경작 안 된 황무지를 보여주는 단순한 지형적 탐색이 아니라 거기에 남긴 밭고랑, 구획, 들판의 자국들 즉  인간의 노동(문화)이다.
 
자코멜리 사진이 가지는 구성상의 특징들(탈-형식주의, 항공사진, 거친 입자, 강한 콘트라스트, 리터칭, 영화화된 장면 등)은 궁극적으로 표현적인 조형성을 우선으로 하는 탈 - 형식주의(anti - formalisme)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순수사진들이 전통적으로 표명하는 형식주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거의 직감적인 음 - 양(clair-obscur) 이미지, 구상 예술의 전통적 양식과 형식주의로부터 이탈, 구성상의 자유로운 흐름 등 특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적인 측면을 암시하는 극단적인 콘트라스트와 의도적으로 필름과 인화지에 직접 실행하는 모델라주(modelage /리터칭)는 작가의 표현주의적 의도를 잘 말해줌과 동시에 형태들(formes)의 생산 이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화된 추상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그가 사진을 통해 재현하려는 이미지는 구조(골격)화 된 이미지였다. 이를 위해 우선 기복이 심한 이태리 풍경에서 의도적으로 선들을 굵게 하기도 하고 자세한 부분을 지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와 지움은 “어떤 형이상학적 의문을 놓는 것이다.
 
즉 배경(fond)이 무엇이고 형태(forme)가 무엇인가 ? 자연(nature)이 무엇이고 문화(culture)가 무엇인가 ? (...) 1963년 스카노의 거리에서 검은 외투의 부인들과 어린 소년의 등장인물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구조화(textural 짜여진)된 추상에 의해 내재되어 있다” ⑧  구조화된 추상 이미지, 그것은 작가의 시적 영감과 직감에 대한 사진적 재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현실을 떠난 초월적(au-del )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심연(ombres)에 존재하는 내재적(en-de a)인 감성의 음색이다. ●

주요 참고 서적
Ennerry Taramelli, Mario Giacomelli, Contrejour 1992/Nathan 1998, Paris, 1998.
Enzo Carli, Giacomelli, cat., Charta, Milano, 1995.
L'echappe europenn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Mario Giacomelli, cat., Centre Regional de la Photographie Nord-Pas-de-calais, Douchy, 1987.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① 여러 번 언급되는 말이지만 영상사진의 “영상”은 외래어인 이미지(image)를 번역하여 만든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 의미는 코드화(양식화) 할 수 없는 혹은 그 이전의 존재론적 대상을 내포하는 그러한 사진을 말한다. 이는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진 그 자체로서의 언어를 가지는 사진을 말한다. 필립 뒤봐는 이러한 사진을 포괄적으로 말해 현실의 변형(상징, 코드, 의미, 관습, 약속, 문화 등)이 아닌 “지표로서의 사진(La trace du reel)”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사진적 장치(dispositif)”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대략 1970년대 후반부터 점진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논리와 의미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영상이라는 순수한 어원적인 단어(텍스트가 없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인해 영상사진을 흔히 텍스트 없이 서술화 된 사진 이미지(스토리 사진 ?)로 오해한다. 결국 "영상"이라는 뜻을 앞서 말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기표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존재의 자국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② 프랭크 이후 1970년대 아버스나 아베돈과 같은 거의 대부분의 현대 사진가들이 실행한 억압되고 망각된 존재들(음영, 시뮬라크르, 탈-구조 등)에 대한 사진적 탐색을 말한다. 이때 사진들은 코드가 아니라 영상 언어들이다.
 
③ 그는 몇 번의 외국 여행과 전시 그리고 외국의 단기 체류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기는 하였지만 거의 줄곧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거기에 살고있다.
 
④ 그러나 리터칭과 덧칠 같은 조형성을 허락하는 이러한 사진 행위는 오늘날 1980년대 이후 연출사진이나 구성사진과 같은 조형사진 계열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의 조형성은 단지 표현을 위한 사진적 방식 또는 강조로 간주되며 그의 사진은 조형사진이 아니라 순수 서정 사진으로 이해된다.
 
⑤ 철학에서 “초월”이라는 용어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스콜라 철학에서 초월은 보통 사고의 범주 이상의 것으로 초감각적인 것 즉 “지적 직관”을 말한다. 두 번째로 칸트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초월 용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에서 이해된다. 먼저 “초월적 (transcendant)”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 지식 외부에 있다는 의미로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초(영혼불멸, 신)로 간주한다.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경험 불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지 않다. 반면 “선험적 (transcendantal)”이라는 것은 “초월적”과 같은 어원이지만 이것은 인간 지식의 성립 기초로 이해된다.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경험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immanent) / 내재성(immanence)”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의 “내재성”은 신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범신론 관점에서 본 것이다. 끝으로 실존주의 철학에서 유신론적 관점에서 초월의 용어는 키에르케고르 신이나 야스프스의 포괄자가 보는 성스러운 초월을 말하며, 무신론적 관점에서 볼 때 특히 하이데그 사르트르 철학에서 실존이 그 존재방식으로서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어 가는 것을 “초월한다”라고 한다(참조, 철학 용어 사전, 동녘).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초월은 인식론적으로 경험 가능한 범위에서 칸트의 선험적 초월인 “내재성(immanent)”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떤 존재가 실재 밖의 비현실적인 상부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실재한다는 설명을 위해 칸트의 “내재적”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사실상 이 말은 우리의 경험과 인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심연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이고 비인식적인 무엇을 지칭한다. 이러한 심연의 영역이 원래의 “초현실주의” 개념인 것이다. 고로 초현실주의의 대상들은 단지 내부적 혹은 보이지 않는 현실일 뿐이고, 작가가 감지하는 영감이나 직감 또는 대상과의 교감에서 포착되는 감성의 음색은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현실에 분명히 실재하는 내적 대상인 것이다.
 
⑥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p. 162.
 
⑦ Ennerry Taramelli, Mario Giacomelli, Contrejour 1992/Nathan 1998, Paris, 1998, p. 18.
 
⑧ Henri Van Lier, op. cit., p. 16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양로원 시리즈 중 1955-1968
(사진 2) 어린 신학생들 시리즈 중, 1961-1963
(사진 3) 스카노 시리즈 중 1957-1959
(사진 4) 풍경 시리즈 중 1955-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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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phenomene)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식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하여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흔히 앎(“보이는 세계”)이라고 하고 철학 용어로 외재적 형상(Forme)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와 반대로 어떤 현상의 분명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러한 비 구체적인 무엇을 말한다. 흔히 이것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안 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존재론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alite  immanente)① 이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우선 전자의 경우는 산 하늘 강 집 사자 코끼리 등과 같은 자연적 형태는 물론이고 사랑, 평화, 동정, 소외, 부조리, 도덕적 고발, 삶과 생명의 예찬, 인본주의 등과 같이 관념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읽혀지는 보편적 앎(코드나 일반적인 상식)을 지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언제나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는 객관적인 인식 대상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인식 대상들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 영역밖에 존재하는 그러나 이미 그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후자의 경우이다.
 
 예컨대 꿈이나 환상, 예수의 형상(신의 산재성), 음악의 인상, 작가의 예술적 직감 등은 가장 전형적인 내재적 형상들이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갑자기 돌출하는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나 충동, 굳이 예를 든다면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 온 배우자나 가족에게 느끼는 갑작스런 혐오감, 첫사랑의 이미지 혹은 첫인상에 느끼는 강렬한 애정, 변질된 성적 욕구, 엄마 품을 떠난 아이가 느끼는 엄청난 공포와 같은 아주 익숙한 곳에서 아주 낯선 이상함, 어떤 자극에 의해 불현듯 솟아오르는 레미니센스와 멜랑콜리 그리고 그 순간의 도취나 자살 충동 등도 역시 상황(특히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들이다. 이것들은 특징적으로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 되고 추상화 된 형태를 가지면서 잠정적이고 예언적인 또한 예견치 않은 무엇(라틴어 : numen)을 말한다”.②  또한 이것들은 주관적이고 비 구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상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무형의 존재들 다시 말해 흔히 우리가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인식 영역에서 이성과 논리로 규명 불가능한 것들(시뮬라크르 / 음영)로 대부분의 경우 단지 어떤 사건(ev enement)이나 상황에 대한 비 구체적인 원인으로만 감지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러한 무형의 존재들은 오랫동안 위대한 예술가의 근본적인 재현 대상이 되어 왔고 특히 오늘날 현대 미술의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일상과 시뮬라크르)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흔히 창작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제스처로 간주되는 추상과 표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③ 그러나 일종의 시각적 번역으로 간주되는 그림과는 달리 과거 사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재현만을 허락하는 사진의 경우 특히 사진의 기록성과 그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보도사진에서 앞서 언급한 내재적 형상들은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진은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는데 있어 그 어떤 전달 매체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진적 사실주의④의 개념적 활용은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담화로 나타났고 또한 사진은 소위 시뮬라크르(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도용, 혼혈, 잡종 그리고 저항과 자아상실 등)의 재현에 있어 필수적인 예술적 표현 도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거의 대부분 상황 속에서 은닉되고 암시되기 때문인데 이때 사진은 상황 설정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정상적인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내재적 형상은 일반적으로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절대적 사실주의(analogon)로부터 즉각적인 감각 즉 아우라, 탈코드, 푼크툼 등의 형태로 발산된다. 특히 앗제나 빌 브란트와 같은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많은 작가들의 사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나 인상은 이러한 초감각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관객이 가지는 즉각적인 인상은 사진의 단편적 상황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형상은 단편적 상황이 아닌 특히 시퀀스 방식과 같은 사진의 연속적 상황에서도 암시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70년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바로 이러한 연속적 상황 설정을 위해 동원된 일종의 논리적 배경들이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진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일상 생활에 은밀히 감추어진 감각적 메시지들이었다. 이때 관객이 가지는 감정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반사되는 의미적인 무엇이 아니라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 상황이 끝난 후 은밀히 남는 잔여 감정과 같은 것이다. 미셀 푸코(M. Foucault)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 대한 자신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여운을 “사고-감정(pensee-emotion)”⑤이라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일상 생활에서 비논리적으로 잠재된 존재(안 보이는 세계)의 누설을 위해 마이클스는 대부분의 사진 구성에서 시퀀스(sequence) 방식을 도입하여 의도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논리적 상황을 설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관객 스스로의 사고-순환을 위해 도입된 시퀀스 방식은 마치 홍당무로 당나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리는 경우와 같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대상들로 단지 사건이나 상황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재적 형상의 추적에 관하여 마이클스는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 “사진은 단지 암시적 출현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생의 고민 번뇌 욕망 등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함축한다”⑥ 이 말은 결국 진정한 사진의 재현 대상은 보이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때 사진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설정(픽션)을 통해 안 보이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 과정을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작가의 의도와 서술적 상황 설정 그리고 관객의 이미지 읽기. 우선 작가가 표현하려는 예술적 의도나 메시지는 일상 생활의 은밀한 주제들이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앎의 영역에서 객관적 의미와 명분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경험(내적 관찰)을 통해 포착된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외부 대상이나 장면의 재현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면(l'aspect de soi-meme)에 대한 시각화로 간주된다”.⑦  이와 같이 포착된 감각적 음색에 대한 사진적 재현을 위해 작가는 “사진을 경험적 전달체로 이용한다”.⑧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설정에 한계를 가지는 전통적 방식(한 장의 단편적 상황)을 탈피하여 시퀀스 방식을 통한 서술적 상황을 전개시킨다. 이때의 상황은 작가의 주관적 상황 묘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공유된 주관성”에 관계한다. 미셀 푸코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진들의 경험은 나를 유혹한다. (...) 사진들이 마이클스의 경험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상) 그의 경우인지 나의 경우인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⑨ 라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마지막 단계의 관객의 입장에서 본 사진은 “유일한 의미와 유일한 도덕 혹은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관점이나 경험에 따라 번역되는 사건이나 상황의 연속으로 이해된다”.⑩ 
 
위와 같이 작가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포착된 내재적 형상은 관객 스스로의 경험적 연상에 의해 전달된다. 그때 관객의 사고-순환을 유도하는 상황 설정은 단지 응시자 각자의 경우로 환원시키는 수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역할을 위해 마이클스는 방법적으로 영화적 시퀀스를 도입하고 또한 분명한 상황 설정을 위해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한다. 이런 경우 사진은 더 이상 장면 묘사의 시각적 전달체가 아니라 상황 전달을 위한 일종의 설치 역할을 한다. 원래 사진은 전통적으로 생생한 현실을 재생하는 자료적 혹은 복사적 기능을 가지며 반대로 그림은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비 현실을 암시하는 “재현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마이클스는 사진의 기능을 그림의 기능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작가는 사진적 매체가 가지는 재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 속에서 사진의 전통적 관습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진의 연속 장면들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 시퀀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세기부터 몇몇 사진가들은 연속적인 재현 방식을 도입하였다 : 단순한 서술이나 알레고리를 위한 피터 로빈슨(P. Robinson)의 합성 사진들, 동작과 움직임의 재현을 위한 뮈브리츠의 연속 사진들이나 20세기 초 미래주의자들의 사진들 혹은 다양한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잡힌 입체파 양식의 사진들, 이러한 사진들은 비록 영화적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하간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연속 사진들이었다. 이때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시간의 지속성과 공간의 형태 변화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시퀀스가 의도하는 것은 이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서술 구성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장면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퀀스 방식을 동원하여 관객이 “서술적 논리”를 야기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거기서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함정을 파면서 상황적 울타리 뒤편에 은닉된 무엇(생성)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기억은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러한 기억의 동공을 보완하려는 심리적 현상 즉 “논리적 기억”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마이클스가 만든 장면들을 보는 관객은 “자신의 논리적 기억을 동원해서 자신의 어떤 이야기를 꾸미고 싶어한다”.⑪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서술 구성은 관객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서술 공간으로 열려져 있는데 이는 연속적 사건의 점진적 전개를 가지는 영화의 지속성과 분명히 구별된다.
 
듀안 마이클스 사진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하는 행위이다. 이미 60년대 말부터 마이클스는 자신의 사진에 단어나 문맥을 기입하여 더욱 더 이미지의 서술적 측면을 풍부히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의 도입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 장의 사진으로 작가의 사고를 표현하는데 불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거의 신성 불가침으로 간주된 전통적 사진의 순수 이미지에 일종의 신성 모독이 되었다. 그러나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의 조합은 70년대 이후 특히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예술적 전략(이미지-텍스트)이 되었다. 원래 사진의 텍스트 첨가는 특히 광고 사진에서 사진이 내포하는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connotation)를 축소하여 사진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텍스트 첨가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적 항해를 유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때 도입된 텍스트는 비록 작가의 주관적 관점에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 자신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 상황적인 사고-순환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은 자신(작가)의 경우를 다른 사람(관객)의 경우로 바꾸는 “주객 전도의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작가와 관객의 “교차된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⑫
 
결국 마이클스의 사진 활용은 외적 대상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의 재현에 있다. 방법적으로 시퀀스를 이용한 서술적 상황 전개와 의도적인 연출사진 그리고 미지의 비 현실적 세계로의 열린 공간 구성(사진 1) 등은 당시 그 누구도 가지지 않았던 탁월한 작가의 상상력을 말해준다.⑬ 특히 작가가 만드는 시퀀스의 소재들은 신비, 환영, 기적, 불가사의, 공포, 동성애⑭ 종교, 천국, 예수 등과 같이 거의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형이상학적 대상들(초현실적이고 신비적이고 환상적인)이다. 거기에 작가는 자신이 카톨릭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 사회와 집단 사회의 지배 도구로서 이용된 종교적 억압과 폭력을 조롱적 방식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사진 2 시퀀스). 오늘날  합리주의와 과학적 논리 그리고 그 절대적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멀리 추방된 수많은 존재들, 그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언제부터인가 집단 통제를 위해 원천적으로 말살된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망각들이다. ●
 
<주요 참고 도서>
*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 Duane Michals, Texte de Renaud Camus, Photo Poche, C.N.P., Paris, 1988.
* Mi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 Changements, Photographies et textes de Duane Michals, Edition Herscher, Paris, 1981.
* Vrais Reves, Editions du Chene, Paris, 1977.
 
주)
① Henri Van Lier, Histoire de la photographie, cahier du cinema, Paris, 1990, p. 여기서 "내재적(內在的 immanente)"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형상(forme)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외재적(外在的)"이라는 의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 밑에 잠재된 비구체적인 상태를 말한다.

② Ibid.

③ 니콜라 스타엘, 폴 클레,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뒤뷔페, 프란시스 베이컨, 앤디 와홀 또한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전통적 코드의 이탈과 전복을 말하는 비정형의 “형상 이탈”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내재된 형상의 시각적 재현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대상의 재현은 더 이상 사실주의가 아닌 개념이나 표현에 관계한다.

④ 단지 인화지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물질로서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천 유리 모니터 프로젝트 등 모든 물질 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이전의 비 물질적인 사진을 말하는데 손으로 그려진 사실주의와 반대로 렌즈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실주의를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 / Le realisme photographique)라고 할 수 있다.

⑤ 관객의 논리적 사고 순환 후 발생하는 돌발적인 감정을 말한다. Texte de Ml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⑥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⑦ Ibid.

⑧ Ibid.

⑨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⑩ Marco Livingstone, op., cit.

⑪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⑫ Marco Livingstone, op., cit.

⑬ 비록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지나치게 담백하고 솔직한 감성으로 재현되고 가끔씩 어설픈 표현들을 가진다고 비난받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은 오늘날 현대 미술(개념 미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차갑고 냉정하고 무기력한 측면과는 반대로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을 던지면서 대중과의 강렬한 교감을 주고 있다. 70년대 개념 사진의 선두주자로 간주되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은 거의 모든 재현 예술에서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현대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연속(시리즈)이나 이미지와 문맥의 조합(이미지-텍스트)은 이러한 시퀀스 사진의 영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⑭ 동성애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의도는 종교에 의해 추방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이성만 선택되고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카톨릭 종교와 집단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데 있다. 역시 동성연애자였던 미셀 푸코(1984년 에이즈로 사망)는 자신의 책 ‘성의 역사’에서 “과거에 남색은 일시적 이탈이었으나 이제 동성애는 하나의 인간 유형이다”라고 폭로하고 있다. 원래 동성애는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한 유형이었는데 집단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해 오랫동안 억압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농경 사회에서 인구 증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중요시하는 계급 사회에서 종교와 관습은 일부 일처제를 강압적으로 법제화하였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동성애는 추방되고 억압되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빛을 발하는 남자, 1969 년
(사진 2) 시퀀스, 뉴욕에 나타난 그리스도 텔레비전에서 종교 위선자가 된 그리스도
무허가 낙태 수술실에서 죽은 젊은 여자를 보고 슬퍼하는 그리스도
동성연애자를 보호하는 그리스도
브루클린가에 사는 우크라이나 출신 할머니와 함께 개 먹이 통조림을 먹는 그리스도
강간당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뒷골목 어느 미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두 번째 강생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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