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생명보다 셔터’ 비난에 자살? ‘발췌의 함정’

퓰리처상 받은 ‘소녀 노리는 독수리’
뉴스사진 윤리 따질 때 최우선 인용 사례
일방적 매도와 오류 법원판결문까지 등장

2005년 초에 이 글을 처음 썼습니다. 불우하게 삶을 마친 한 사진기자의 생과 사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1차적으로는 나 자신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이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더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져 울컥

그 무렵에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열에 여덟 내지 아홉은 출처가 어딘지 모르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무려 10년이 더 지난 사안인데도, 글보다 쉽사리 기억되고 주목되는 사진이란 속성 때문에 이야기의 전달력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흔하게 퍼져나가던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상 3개월 뒤인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비판이 일었다. 결국…목숨을 끊었다”가 결정적인 논리적 비약

후에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본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위의 이야기 자체엔 오류가 없었습니다. 다만 많은 생략에 의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들어있고 그에 따라 글을 읽고 재해석한 분들에게 큰 오류의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독사의 아가리같은 함정이 여기 숨어있습니다. 필요한 인과관계와 그 설명을 뺀 채 적당히 발췌해서 사실을 늘어놓으면 결국 사실을 호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본문에 앞서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 2월이었고 최초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3월 23일치 뉴욕타임즈였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1년이 더 지난 1994년 4월이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기아에 대해 그 전부터 취재해왔고 더 심한 사례도 목격했었던 기자였습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고민해온 문제이며 사진을 찍고 난 직후에도 인간적 슬픔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수상한 뒤 비난에 직면하자 더욱 힘들어했을 수 있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란 것이며 자살의 더 큰 계기로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수상결정이 된 이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비판이 일었다" 라는 문장 직후에 "결국 케빈 카터는 ….목숨을 끊었다" 라고 연결시킨 것이 결정적 오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 글을 읽으면 비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카터가 불려나와 매 맞아

어쨌든 2005년에 제가 글을 쓸 무렵엔 위의 내용이 여러가지 논란과 사례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뉴스사진의 윤리를 따질 때 가장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사진보도중 어느것이 더 우선인가?’ 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케빈 카터가 불려나와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논란을 지켜보면 꼭 등장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예술은 없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특히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필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딜레마겠죠. 아무개 선생님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을 때, 한참을 고민하다가, “찍고 구하러 가면 안되요?” 그랬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목적이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도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고민입니다. 아직 인간이 덜 된 거겠지요"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방송기자 에세이집에는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며 왜곡까지

저도 사진강의를 하는 사람이고 뉴스사진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땐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목숨에 우선하는 뉴스가치는 없다"

그렇지만 케빈 카터의 사례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곽윤섭의 사진 곳간' 을 여는 첫 글로서 케케묵은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그 후로 지금껏 스스로에게도 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 오류가 청산이 되지 못한 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2007년 10월 한 야당의 부대변인 성명서에서도 케빈 카터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면 한 방송기자의 에세이집에도 오류로 범벅이 된 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독수리를 쫓아버렸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  소녀는 죽지않고 구호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2005년 처음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가 되었던 것은 한 일간지의 법원 판결문 재인용에 등장한 케빈 카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존중의 태도 견지하지 못했다’ 포장

"인격권의 주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제3자에 대하여 폭넓은 보호를 요구할 지속적 기반을 확보 할 수 있다고 할 것인 점(단적인 예로 케빈 카터라는 작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굶주려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보도사진을 촬영하여 1994년 퓰리쳐상을 수상하였으나 1994년 7월 이 사진에 대한 비난과 이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판결문답게 어렵게 포장이 되었지만 케빈 카터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였다고 읽힙니다.

이를 근거로 그 일간지의 기자는 "사진보다 사람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고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네티즌들이 오류를 확대재생산해서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고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또한 정치인, 기자, 판사 등 사회 각층의 전문가들조차 저지르는 무책임한 재인용도 오류의 확대, 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자꾸 희미하게 변색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처음 글 썼을 때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 많이 늘어 다행

그래도 2007년 11월 현재 포털에서 검색해본 결과 2005년에 제가 처음 이글을 쓰려던 당시보단 사실에 근접하는 내용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어떤 분은 "구글에서 검색하니 쉽게 찾았다"고 했지만 꽤 조사를 많이 해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이 글을 올림으로 해서 조금이라도 사실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에 힘을 더 보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하부터 본문입니다. 예전의 글이 장황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일부 첨가하고 대폭 요약했습니다.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케빈 카터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한 사진기자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Bang Bang Club 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 살해 방화 현장 누비는 실력 빵빵한 ‘방방클럽’

Bang Bang Club은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해와 방화가 이어지는 전쟁터같은 현장에서 두려움없이 그리고 가끔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 때문에 남아공화국에서 일하던 다른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뒤에 다시 등장하는 마리노비치도 이 Bang Bang Club의 일원이며 1991년에 퓰리처상(스폿사진부문)을 수상한 바가 있다. 한 마디로 실력 빵빵한 사진가들의 모임인 셈이다.

뉴스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 사진기자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분쟁 시달리는 남아공 태생으로 아프리카 참상 찍으며 아픔 함께

케빈 카터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 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스 사진기자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한 지옥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도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비쩍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퓰리쳐상의 피쳐 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완성도 높은 순간 기다려 찍고 독수리 쫓아…울먹이며 "하느님~"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후 계속 침통해 했고 딸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리고 순식간에 아프리카 참상 상징 아이콘으로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동료 취재현장 사망에 충격…평소에도 보도사진가 딜레마 고민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뉴스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절망적…돈이 없다…살육과 시체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유서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독수리가 살아있는 사람 공격 않는다는 건 상식

이제 케빈 카터에 대한 변명을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위에 나열한 상황에서 논점은 크게 두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케빈 카터가 한 행동이 비난받아야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또 하나는 케빈 카터가 자살한 것이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는지의 여부입니다.

몇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일하던(취재하던) 사진기자들은 사람들을 만지지 말도록 지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염병을 옮길 위험이 있다" 는 이유였습니다. 이 명분만으로 케빈 카터가 마음이 편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기아와 전쟁의 참상 때문에 괴로워하던 휴머니티가 강한 뉴스사진가였습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뉴스사진가였고 그의 일에 충실했으며 그가 남긴 사진이 아프리카의 기아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전쟁 참상에 대한 회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 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며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뉴스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하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하진 못하실 것입니다.

케빈 카터가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그는 마음이 여렸고 어려운 직업 탓에 가정의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더 굳건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했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했던 모양인데 주변의 정황으로 봐서 꼭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 여렸고 가정환경 열악…비난이 카터 괴롭히는 데 일조 했을 것

"모든 분쟁지역 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자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뉴스사진 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뉴스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입니다. 말년의 케빈 카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급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사진에 대한 비난이 케빈 카터를 괴롭히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사려 깊지 못한 자들의 가벼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번 호도된 팩트를 제대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난 2005년에 실감했었습니다. 이 번엔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속에 글 올립니다.














Posted by stormwatch :






 

 
   일반적으로 20세기 현대 사진의 출발을 1950년대 사진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의 영상사진과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의 거리 사진의 출현으로 잡고 있다. 이러한 사진들의 공통된 특징은 사건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진으로부터의 “이탈”을 들 수 있는데 흔히 전자의 이탈을 재현 대상의 내적 혁명이라고 할 때 후자의 이탈은 외적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계열 중 보도사진의 사건-이미지가 아닌 시적 언어로서의 사진 이미지를 말하는 로버트 프랭크의 영상사진 계열은 그후 특히 1970년대 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나아가 후기 구조주의(기호- 구조주의)의 탁월한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①

사진을 하나의 코드나 의미 전달을 위한 언어로 간주한 전통적 개념과는 달리 프랭크 이후 새로운 사진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진을 표현적 언어로서 이해하였고 거기서 단순한 의미론적 해석이 아닌 사진을 완전한 하나의 “감각”으로 규정하는 존재론적인 재현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프랭크를 따르는 거의 대부분의 젊은 사진가들은 더 이상 미국 전통사진을 지배해 온 인본주의나 대자연의 예찬과 같은 사건 중심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적인 문제, 꿈이나 심리현상과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문제,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문제 그리고 거의 추상적인 문제를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미국 전통사진의 주류에서 볼 때 유럽적 경향으로 간주되었고 점진적으로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와서는 순수 사진 영역에서 지배적인 새로운 사진 경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듀안 마이클스, 레 크림스, 랄프 으젠 미트야드, 랄프 깁슨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적인 문맥에서 전후 미국 작가들 중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 현대주의자의 혈통을 갖는 작가는 예외적으로 로버트 프랭크와 그의 동업자이자 후배인 랄프 깁슨(Ralph Gibson)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스위스인 프랭크가 실존주의적인 유럽적 경향을 미국에 이식시켰다면 미국인 깁슨은 자신의 이태리 시리즈 사진을 통해 이태리적 경향을 미국이 아닌 오히려 유럽에 이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깁슨의 유럽적 혈통은 건축성과 초현실성에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20 - 30년대 만 레이(Man Ray)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과 러시아 구성주의 사진과 앙드레 케르테즈(Andre Kertesz) 계열의 초현실주의 사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에드워드 웨스톤(Edward Weston)과 빌 브란트(Bill Brandt)의 강렬한 리듬과 볼륨, 공간의 질이 창조하는 초현실성 또한 거대한 풍경이 보여주는 큰 구도(Close up) 등이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빌 브란트는 “꽉 찬 물질은 빈 공간의 신비를 연결하고 바다의 수평선은 언제나 시적 인상을 준다”라고 언급했는데 이러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깁슨 사진의 “단편 미학”과 큰 구도의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당시 거의 모든 사진가들의 모델이었던 프랭크의 강렬한 심적 동요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깁슨의 사진은 프랭크의 경우처럼 허무, 소외, 번뇌 등의 많은 정신적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성이나 관능과 같은 사진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전통적인 취향을 보였다. 결국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미국 사진의 맥과 새로운 유럽적 경향을 접맥하면서 특히 1970년대 이후 사진의 또 다른 경향을 세웠다.
 
랄프 깁슨은 1960년대  “사진 행위는 더 이상  어떻게 찍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찍느냐에 있다”고 선언했다. 즉 사진적 의도는 찍혀진 대상(objet photographiee)이 아닌 찍혀진 주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대답은 “감각 안에 있다”고 말한다. 특히 1970년대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3부작 시리즈(Triologie)인 <몽유병자(The somnanbulist, 1970)>와 <바다 기행 (Days at Sea 1973)> 그리고 <데자 - 뷰(D eja - vu, 1975)>에서 그는 유럽적 경향인 건축적인 단순함과 초현실주의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년 후 다시 깁슨은 “주제는 단지 사고의 반사일 뿐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사진은 시각적인 측면이 아니라 감각의 질이다”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 말은 사진이 표명하는 것은 감각에 의한 비구체적인 추상 즉 “사진적 추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추상은 형태가 없는 무형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에 있어 추상의 표현은 색이나 선의 조합에 의한 그림의 추상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어떤 상황의 신호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재현된 신호를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리고 좀 현학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이러한 형이상학에 대한 추상적 표현을 외적 형상(forme)으로부터 재현된 내재적 형상(figure)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외적 형상을 인덱스라고 하고 내재적 형상은 그 인덱스의 지시대상이 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은 한 마디로 공통된 문화적 실행과 사는 방식 그리고 살아온 경험의 외적 인덱스라고 하고 그 지시대상은 단지 감각으로만 포착되는 시적 언어를 말한다.
 
흔히 사진에서 “깁슨적이다”라고 말하는 사진의 독특한 특징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의 사진들은 다소 지나치게 요약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반-의미와 인덱스 그리고 열린 공간의 크게 세 가지 개념적인 특징을 가진다. 우선 그의 사진은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전혀 다른 반 - 의미적인 사진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 읽기에 있어 사진을 의미로 본다는 것 그것은 자유롭게 위장된 그러나 임의적으로 고착된 기능주의이고 전체적으로 의미의 부조리이다. 다시 말해 언어로 모든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것이(대체로 즉각적으로 왜곡 조작될 수 있는) 의미적 관계에 의해 서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구조주의)은 부조리적 사고이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다. 왜냐하면 출현 자체가 바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현되는 장면의 주제가 아니라 감성(affect)과 성(性)적 에너지인데 이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묶이지 않는다. 예컨대 모자 벽 신체와 같은 단편적인 장면(사진 1)에서 사실상 재현적이고 의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제가 없다. 이러한 주제의 부재는 결국 반-다큐멘터리적인 의미의 박탈을 가지고 온다.
 
전형적인 순수사진인 깁슨 사진을 흔히 “시적 시그널”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객이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재현된 대상으로부터 의미 분석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유 시인이 방출하는 음색을 음미하는 것과 같이 그 대상으로부터 환기되는 무엇을 포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 진행 과정은 정확히 시를 읽은 것과 같은 반-의미적 읽기에 관계한다. 예컨대 우리는 잡지 기사와 시를 혼동하지 않는다 : 잡지 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언어가 지시하는 분명한 의미들의 조합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시를 읽을 때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적인 조합은 수정되어 근본적으로 읽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때 의미적인 조합은 단지 시적 메시지의 배경을 이룰 뿐이고 시가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마치 연극이 끝난 뒤 생기는 여운과 같은 일종의 감각적 추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다큐멘터리 사진과 순수사진 역시 그 읽기에 있어 분명히 다르다. 이 두 종류의 사진 읽기는 비록 같은 물리적 진행 과정에서 시각적으로 읽는 방법은 동일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점은 “보는 방법(la maniere de voir)”이다.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시각적이든 의미적이든 무엇을 “보여준다”라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가를 말하고 반면 순수 사진가는 언제나 의미와 상징의 영역을 넘어 응시자로 하여금 무엇을 “환기시키기”를 원하는 사진가이다.
 
위대한 사진가의 작품에서 특별한 효과 없이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관객으로 하여금 무엇을 충분히 “환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순수사진은 관객에게 대상으로부터 어떤 특정한 은유적인 것을 연상하도록 (거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인 환유적 연상을 유도하고 있다(감동은 사실상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환유적 확장 과정에서 삼인칭 “그(He)”는 응시자 각자의 경우를 말하는 일인칭 “나(I)”로 이동되고 또한 거기서 서로 서로 반죽되어 결국 우리들 공통된 감각인 “우리(We)”로 이동되는 의미적 변화가 있게 된다.②

랄프 깁슨의 사진 혹은 깁슨 스타일의 사진이 가지는 두 번째 개념적인 특징은 인덱스화(indexation)이다. 단편적인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큰 구도 등은 인지 가능한 보이는 세상의 단편으로부터 안 보이는 감각의 세계에 존재하는 몸통 즉 형이상학적 실체를 지시하는 인덱스(index)이다. 여기서 인덱스는 언제나 외적 형상의 세계로부터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사진의 위대한 특징인 “인덱스적 이중 구조(시각과 환기 동시에)”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사진은 인덱스화 된 이미지로 “보이는 것을 보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을 보라”라는 무언의 자동생성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사진에서 하늘로 가득 찬 틀로부터 나오는 팔, 돌려진 머리 뒤로 여전히 흘러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 등이 지시하는 것은 단지 무언의 어떤 출현을 증언하는 침묵인 셈이다. 결국 사진의 이중성은 마치 양복의 겉감과 안감과 같이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의미적인 영역인 상부구조와 그것이 지시하는 비 인식의 존재이자 형이상학적 존재의 영역인 하부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부분으로부터 무언의 몸통을 지시하는 것을 단편화 된 미학 즉 단편 미학(fragmentati
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프레임에 의해 잘려진 단편 즉 사진의 부분(프레임 내부)이 틀 밖의 동체를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단순한 사진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가능한 상황의 단편이 인지 불가능한 감각적인 몸통을 지시하는 미학을 말한다. 그것은 비 물질적이고 환기적이고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형이상학적인 음색을 말한다.
 
그래서 깁슨의 사진을 단적으로 말해 상부의 인지 대상이 하부의 존재론적 대상을 지시하는 인덱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얼굴은 그 동체를 대변한다”라는 “얼굴화 된 세상(Le monde visagefi /질 들뢰즈)”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예컨대 시적 음색이나 음악의 순수 혹은 형용할 수 없는 귀족성이나 세련미 등은 무형의 존재로 언제나 그 실체를 대변하는 인지 가능한 단편 즉 일종의 표현적 대용물을 돌출 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돌출은 마치 빙산의 하부에서 수면에 나온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이다. 인식 영역으로 돌출된 단편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에서 이해된다.
 
한편으로 볼 때 깁슨의 사진에서 도장, 낙인, 상형문자, 웨이브 친 깃발, 이데오그램, 하늘의 구름 한 조각, 자물쇠 채워진 문, 포도주 병 등의 단편화된 많은 형태들은 모든 감정적 에너지와 다양한 신호를 방출시키는 출발점으로서 현실에 돌출된 표면적 형태(표면화된 형상)들이다. 이때 단편은 그 전체보다 더 완전하다. 예컨대 “깁슨은 미켈란젤로처럼 잘려진 조각이 완전한 조각보다 더 조각적이라고 생각했다”③  또 한편으로 볼 때 렌즈나 틀의 단순 구성에 의한 큰 구도 즉 클로즈업(Clouse up)은 결국 이미지에서 극히 안정적이고 분명한 진술 속에서 전혀 움직임이 없는 부동의 진술을 가진다.
 
 깁슨의 사진에서는 공통적으로 일상 생활의 스냅사진과 같이 흔들림이나 율동 혹은 흐림에 의한 암시적인 움직임(file)은 전혀 없다. 반면 이미지들은 분명한 명암 대비(큰 대각선 명암, 줄 무늬, 얼룩무늬, 직조 등)로 나타나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내용을 교묘히 감싸는 “표면적 조건”(Regis Durand)을 만든다. 사실상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에 거슬러 싸우는 사진의 전투와 죽음과 같은 정(靜)적인 유령을 격리시키는 움직임의 제스처에 익숙해 왔다. 응고된 엄숙함이 보장하는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오싹하게 한다” ④  이와 같이 극히 정적인 이미지의 출현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형이상학적 감정을 발산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감정 - 이미지(image-affections)”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이 말은 “(응고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임이 감각과 행위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으로만 존재하는 그러한 이미지” ⑤  를 말한다.
 
끝으로 깁슨의 사진들을 특징짓는 세 번째 요소는 특별한 공간 구성에 있다. 그의 사진은 우연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사진으로 마치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이 철저한 건축적인 사고로부터 형성된다. 그래서 사진들의 공간은 건축적인 찬란함과 조각적인 경향 그리고 그래픽적인 완벽한 형식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건축적인 장소로 이해된다(사진 2). 또한 사진의 지시된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진화된다.
 
거기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포토-스틸(photo-stills) 형식의 프레임 즉 큰 구도(Clouse up)에 의한 단편화는 대상을 단지 가깝게 보여지기 위한 강압적인 요소가 아니라 확대된 대상이 출현하자마자 모든 문맥과 서술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프레임 밖으로 방사하는 어떤 강렬한 힘을 발생시킨다. 이때 표면은 수수께끼가 되고 그 공간은 “아무 공간” 즉 “완벽히 이상한 공간, 가장 순수한 자리로 잡혀지는 감정적인 공간이 된다. (...) 이러한 공간은 이미지를 지시로부터 분리시키고 이미지를 연상의 다양한 조합들로 열어주고 또한 이미지를 출구에서 추상적인 단계로 지나게 한다” ⑥  이는 곧 열린 공간으로의 도약이다.
 
앞서 말한 특징들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는 깁슨의 에로틱한 사진들이다. 특히 깁슨의 후기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몇 몇 누드(에로틱) 사진들은 관능적 욕구를 보다 암시적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 예컨대 장면들은 에로틱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재현이 아닌 여자 신체의 단편들을 보여 주면서 관능적 욕구를 지시적으로 얼굴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서 재현상의 주제로 보여지는 허리끈, 붉은 손톱의 여자 손, 검은 스타킹 등의 단편적인 성적 물신들(사진 3, 4)은 단순한 자료적인 진술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얼굴화 된 “신체-얼굴들(corps-visages)”이다. 이는 비 물질적 감성과 성(性)적 에너지의 분출구임과 동시에 그러한 감정의 전율(누구나 공통된 성적 욕구)을 지시하는 사진적 자국(index)이다.

결론적으로 깁슨의 사진은 보이는 세계의 시각이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의 촉각이 된다. 대상과 관객 사이에서 볼 때 재현된 단편은 관객으로 확장되는 존재론적 이동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이동은 인식의 상부구조에서 비 인식의 하부구조로, 의미의 영역에서 탈-의미의 영역으로, 진술된 단편에서 내재된 몸통으로의 이동을 말한다. 깁슨의 사진은 결코 형식주의나 표현주의적인 재현이 아니라 단지 인덱스화 혹은 얼굴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상징이나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이고 징후적이고 또한 시적인 “생성-얼굴(devenir-visage)”이고 그때 사방으로 방출되는 감각의 음색은 “사진적 추(abstraiphotographiq
ue)”이다. ●
 
<주요 참고도서>
Courant Continu, Ralph Gibson, Marval, Paris, 1998.
L'Histoire de France, Paris Audiovisuel, Paris, 1991.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L'Oeil flottant : Un voyage vertical, Paris Musees audiovisuel, Paris, 1986.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주)
① 물론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적 모델로서 사진 담론은 실질적으로 퍼스(C. S. Peirce)이론과 바르트의 참조주의가 도입되는 1980년대 초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미국 구조주의 분석 중심의 담론에서 프랭크 사진의 분석은 존재론적 시각이 아니라 보다 의미론적인 내용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② 이미지의 장면을 떠나 사방으로 방사되어 퍼지는 연상의 확장 이것을 필립 뒤봐는 “푼크툼의 확장”이라고 말하는데 이때 기억의 확장은 관객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확산되는 환유적 확장이다. 역으로 은유적 확장은 분명한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광고나 의도된 대중 전파 매체의 일방적 전달(문화적 사회적 코드)에 관계한다(움베르토 에코).

③ 이러한 단편 미학은 흔히 미술의 미니멀주의와 비교된다. 조각에서 미니멀 작품은 다양한 관점에서 관객에 의해 선택된 공간 속으로 합병될 수 있고 또한 사진의 경우도 역시 사진 이미지가 관객이 선택한 주관적 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사진의 경우 창조적인 측면은 사실상 전혀 다른 데 있다. 깁슨의 사진에서 중요한 점은 미니멀 조각처럼 단순화 된 형태와 그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로부터 환기적이고 추상적인 형상(내재적 형상)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깁슨의 사진에서 단순한 볼륨은(기하학적 특징)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시적 언어는 단순한 형태로부터 연장된 공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④ Regis Durand, “un regard en reponse : le monde-visage de Ralph Gibso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Ralph Gibson, N  22, C.N.P., Paris, 1988, p. 24.

⑤ 표현적 움직임(Le mouvement d'expression)은 레지 뒤랑의 “얼굴 개념”(들뢰즈의 분석에서 차용)을 설명한다. 이 말은 질 들뢰즈의 운동-이미지(L'image - mouvement)와 같은 개념을 가지며 특히 들뢰즈는 이러한 이미지를 “탄착(impact)”이라고 한다. 그것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말하자면 부동의 진술) 남은 잔여 찌꺼기(혹은 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개념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탈코드, 무의미)이다”. Gilles Deleuze, Cinema I “L'image-movement”, Editiod du Minuit, Paris, 1983, p. 97, in Regis Durand, op. cit.

⑥  Gilles Deleuze, op. cit., p. 154-155.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Chiaroscuro 1974-97 시리즈 중
(사진 2) Quadrants 1975 시리즈 중
(사진 3) Infanta 1977-98 시리즈 중
(사진 4) L'Histoire de France 1972-98 시리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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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정보 매체의 엄청난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며 또한 소위 생중계라는 방식으로 사건과 거의 동시에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과 백 여 년 전 19세기 당시 어떤 사건에 대한 시각적 전달은 1839년 사진 발명 이후 사진이 전달 매체로서 지속적인 발전(사진 엽서, 신문 삽화의 자료로 활용되는 사진① , 과학적 자료집이나 도감 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보도사진에 비교해 볼 때 사실상 거의 실험 단계에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전달적 역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에서 일종의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한 유랑 풍속화가(peintre d'moeu-rs)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들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생생한 사건과 풍물을 그림으로 전해주는 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을 “거리의 풍속화가”라고 하며 또한 그들의 그림을 “풍속화(peinture d'moeurs)”라고 했다.
 
특징적으로 그들이 재현하는 대상은 단순한 풍경(대부분 픽토레스크)이나 풍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당시 사회의 여론이나 불만 혹은 억압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풍자화였는데 이는 한 마디로 단순한 시각적 전달이 아닌 사회적 진실을 위한 정신적 폭로인 셈이었다. 당시 보들레르는 그들이 “현재의 미를 들추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현재의 본질적인 질”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진실의 폭로자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②

  그러나 사진 발명 이후 점진적으로 보도사진과 기록 영화는 이러한 풍속화를 대신하게 되었고 풍속화가들 역시 거의 사라졌다. 20세기 전반기, 보다 엄밀히 말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까지 보도사진의 시각은 특이한 사건 혹은 결정적 순간과 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상주의적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언제나 범 우주적이고 객관적이고 사건 중심적이었는데 거기서 모든 형식은 사진 미학의 전통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었고 어떠한 주관적 풍자나 고발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의 절대 객관적 기록성을 앞세우고 있었다.
 
보도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

  그러나 처음으로 1950년대 윌리엄 클라인(로버트 프랭크 역시)이 던지는 “전통적 규범의 이탈”은 그때까지 정형화된 보도 사진의 개념을 전복하면서 보도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탈은 단지 틀이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측면에서 현실의 이면에 감추어진 내재적 진실의 폭로에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라인과 같은 소위 “거리의 사진가(The street photographer)”는 더 이상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전달적 의도가 아닌 우리들 사회와 문화 그리고 풍속의 진실한 전달자,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사라진 19세기 풍속화가들의 역할을 다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들 특히 그의 뉴욕(New York, 1955년)에서 보여진 사진들은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빗나간 사생아 혹은 터무니없는 상식 밖의 사진들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사진들은 매체의 전달적 목적에서 포착된 전통적 보도사진으로 읽혀졌기 때문인데 이는 사진을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이나 결과론(혹은 형상론)적 관점에서 본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진들은 정 반대로 지극히 주관적 사진 즉 자신의 눈에 비친 물질 문명 세계를 고발하는 일종의 “부조리 연극”으로 간주된다. 모든 해석과 이해를 사진이 보여주는 결과물에서 출발한다면 이미지들은 우선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동시에 당시 사회의 모든 활동적 양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종의 유형학적 사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을 있게 한 원인적인 측면 다시 말해 촬영 당시 작가가 가진 어떤 존재론적 본질이나 충동에 의한 자국 혹은 인덱스로 이해될 것이다. 그럴 경우 클라인 사진을 특징짓는 많은 신기한 것과 이상한 것 혹은 괴기스러운 것 등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암시하는 하나의 문화적 신호(signes de culture)로서 나타난다 : 신호는 그 본질인 동체를 예측하게 하는 지시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통 현실에서 볼 수 없는(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심지어 초감각적인 것들까지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사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클라인의 사진에서 주제임과 동시에 소재가 되며 이러한 사진을 “사인-사진(signe-photo)”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인은 자신의 감각을 통한 물질적 사인에 대한 일종의 암호 해독자인 셈이다. 거리의 갱들이 활보하는 뉴욕의 광란, 토쿄의 이데오그램, 소련의 군사 문화, 로마의 종교 문화 등 50년대 이후 후기 정보 사회의 물질(소비 사회)과 정신(문화와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무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단편들(사인들)로 추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은 결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혹은 편견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에서가 아닌 자신의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클라인의 뉴욕에서 보여진 거리 이미지들은 전통과 결별하는 새로운 독창성을 창조함과 동시에 당시 실존주의 계열의 부조리 연극과 현대 물질 문명을 비판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도시의 신화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제스처로 간주된다. 이미지는 그때 일종의 조롱적이고 풍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사물화 현상”에 대한 사진적 재현으로 간주되며 대부분의 사진은 “사물화 된 인간과 물질이 대치”되어 나타나는 병치 효과 다시 말해 들뢰즈의 용어로 “문화와 자연이 충돌하여 그 표면에 발생하는 사건(evenement)”에 관계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번민 고독 소외 통속 유행 속물 등을 암시하는 당시 1950년대의 문화적 신조어(의미의 생성)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들이기도 하다.
 
클라인은 팝아트의 선구자


  클라인의 사진들은 단순히 현대사진의 역사적이고 진화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사진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재현 의도(사물화 현상)는 단지 사진의 영역뿐만 아니라 1960년대 예술의 거대한 폭풍을 가지고 올 팝 아트의 전반적인 주제가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클라인의 사진은 팝 아트를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며 오늘날 역사적 관점에서 몇 몇 비평가들(1980년대 이후)은 클라인을 팝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물질 속으로 정신(인간)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허무”를 조형적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팝 아트의 본질적 의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클라인의 간판, 광고, 글씨, 이데오그램 등의 문화적 신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사물화를 재현하는 팝 아트의 전조로 간주된다.
 
클라인의 모든 사진들 특히 뉴욕의 사진들과 그의 단편 영화(예를 들면 “Broadway by night”)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뭔가 암시적인 은밀한 알파벳이 있다 :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도시에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네온사인, 현란한 광고 글씨 그리고 많은 소비 문화의 조짐들과 같은 클라인의 “거리의 언어들”은 팝아트의 출현보다 무려 5년③ 이나 앞서 나타난다. 도시를 소재로 잡은 뉴욕의 사진에서 클라인은 강렬하고 폭로적인 그리고 조롱적인 이데오-상업적(ideologico-commerciale) 선전을 강조하고 있다 : 특히 네온사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도시에 불고 있었던 열풍 같은 문화의 새로운 것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의 여자들, 밤의 감시자들, 은행과 영화, 간판 슬로건 뒤에 갇힌 계산원, 밀려오는 군중, 열광하는 관객들 등은 궁극적으로 소비 문화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 더미와 인간 소외 혹은 경찰 몽타주의 상품화 된 인간유형과 같은 인간의 사물화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거의 정확히 1960년대 유령 같은 먼로, 무한히 반복되는 돈이나 콜라, 자동차 사고 등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그림(일종의 사진-그림)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클라인을 당시 “어떠한 화가도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aucun peintre n'avait jamais fait ca)”을 처음으로 실행한 진정한 팝아트의 선구자④ 로 간주할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전통과의 단절 혹은 반-사진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개념적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기술적 측면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사진의 개념적 특징들은 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새로운 문화적 통념(코드)에 관계하고 있다. 클라인 자신이 “사진적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는 수 백 개의 사물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순간을 포착하는 황홀한 순간이다”라고 언급하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남”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사진 작업은 그때까지 촬영 방식을 지배한 “연극적인 비밀의 자물쇠 구멍(렌즈)”을 통한 순간 포착 즉 미리 계산된 조준사격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들의 다발, 다시 말해 무차별 난사식 사격을 통해 거의 직감적인 한 장의 장면을 선택(암실 안에서)하는 감각적 만남에 관계하였다.
 
 이러한 만남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증폭된 우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클라인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의 단면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코드로서 정확히 “객관적 우연”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클라인의 사진에는 언제나 엉뚱하고 이상한 무엇(푼크툼)이 출현하는데 이는 특징적으로 한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러한 만남들은 사진에서 무모하고, 통속적이고, 저속하고, 뻔뻔스럽고, 강렬하고, 거칠고 동시에 난잡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적절히 말해 자연과 문명의 교차 면에서 발생하는 예술적 형태로서의 무모성이나 무질서에 대한 사진적 추적으로 간주되다. 또한 인간은 거기서 일종의 물질의 장식품이나 부속물로 간주되고 도시 생활의 질식과 우글거림, 혼란, 뒤죽박죽, 와글와글한 군중들의 떼 등과 같은 것들은 현대 사회의 다량 유통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설적으로 흔히 자신이 역사적 증인으로서 직접 군중 속에 합류하면서 촬영하였는데 거기서 자신이 확인하려 한 것은 우리 모두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였다.
 
전통적 규범에서 이탈, 틀의 자유성 추구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사진들은 그때까지 통용된 전통적 규범을 더욱 더 분명히 이탈하고 있다.⑤ 우선 “틀의 자유성”을 추구하는 잘려지고 불안정한 화면 구성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왜곡을 야기 시킨다. 또한 가능한 화면을 꽉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35 mm 광각 렌즈의 사용과 대상을 겨냥하지 않고 바로 코앞에 바짝 붙여 촬영하는 근접촬영(close up)은 결과적으로 대상을 착각과 환상적 효과 속에서 괴물⑥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1). 영화의 시퀀스와 사진과의 접맥에서 나온 많은 사진적 표현들(순간 동작, 제스처, 찰나 등) 역시 이러한 강렬한 특징을 더 해주고 있다. 게다가 움직임의 자국을 남기는 오픈 플래쉬(open flash)의 활용은 살아있는 생명 혹은 생동감의 효과로서 이용하였는데 클라인은 이러한 효과를 특히 80년대 초 자신의 패션사진에 하나의 특수 효과로 이용하였다.
  클라인의 많은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별한 구성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는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시선들이 마치 물수제비 뜨기처럼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선의 다각화(사진 2)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비정함 그리고 불신과 멸시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여하간 화면 구성에서 흔히 촬영 당시 누군가 렌즈를 쳐다(훔쳐)보는 시선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하나의 평면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늘형식으로 병치시키는 공간 구성의 극대화(사진 3)이다. 이러한 구성은 우선적으로 광각 렌즈의 집단적 효과에 그 이유가 있지만 언제나 피사체의 분명한 공간성과 그 움직임을 강조하는 거의 1/125초의 노출 속도와 대략 15도 각도로 약간 굽어보는 낮은 앵글을 활용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에도 그 원인이 있다.⑦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인간 존재를 벽면에 부조된 기념물이나 건축적 장식물로 간주하려는 예술적 의도⑧  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는 비교적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사진에 비해 유달리 독특하고 이상하고 별난 것(푼크툼)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 이후 소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 하여 밝혀낸 독특함(sing -ularite)과 증거성(attestation) 그리고 지칭성(designation)으로 정의되는 사진의 특성에 관계하고 있다. 소위 사진-인덱스는 전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사진-관객의 주관적 관점(사진적인 것)을 가지며 그때 외시된 이미지는 단지 자국 혹은 징후일 뿐이다. 알다시피 바르트는 자신의 이론적 입지를 위한 배경 혹은 모델(탈-코드)로서 사진 이미지를 도입했는데 특별히 여기 보이는 유명한 두 장의 사진(밝은 방)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진 읽기의 실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사진 4)으로 우선 여기서 문제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할머니이다 : 할머니는 찍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중앙에 있는 할머니를 겨냥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여섯 인물들은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찍혀졌고 각각은 사진기 앞에서 조롱, 불안, 멸시  등 다양한 심리적 기질들을 보여 주고 관객들 역시 이러한 감동적인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바르트가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자료이다 : 예컨대 여기 1959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모자를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머리를 잘랐는지 등의 사실적 자료들이다. 한 마디로 사진 읽기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언급한 사실들에 관해 “내가 놀란 것은 사진가의 어떤 의도를 알려는 관심에 대한 그의 거절이다”라고 진술했다. 마치 사진을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로 간주하듯이 ...⑨

  또 한 장의 사진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이라는 제목의 사진(사진 5)이다. 클라인은 거리에서 우연히 이 가족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기분 좋게 가족은 그들 스스로 알아서 (포즈를 위해) 그룹을 만들었다. 아이의 권총을 가진 엄마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아이의 눈은 자신의 엄마 쪽으로 돌려 웃었고 자신의 손은 엄마의 손으로 가져갔다. 큰 누나는 렌즈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한방의 사진 .... 거기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윌리엄 클라인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의 젊은 아이들을 찍었다. 그것은 감동적이다 ...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계속 보게 되는 것은 이 개구쟁이의 썩은 이빨들이다”⑩ 결국 바르트가 몰두한 것은 문화적으로 약속된 주제 즉 촬영자의 의도(스투디움) ⑪가  아니라 푼크툼(punctum)이었다. ●
 
주요 참고 도서
William Klein, New York, , Edition du Seuil, Paris, 1956.
William Klein, texte de Christian Caujolle, coll. Photo Poche, C.N.P., Paris, 1985.
Close up, Thames & Hudson, London, Paris, New York, 1989.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Michel Nuridsany, “William Klein : la cam ra visible”, Art Press, n 69, avril 1983, p. 4-7.
 
(주)
① 신문 삽화로서 사진의 도입은 19세기 말 사진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도사진으로서의 역할은 사실상 20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사진 제작에 있어 많은 사진적 기술이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단지 삽화를 위한 자료로서 오랫동안 신문 삽화로 이용된 석판화를 대신하지 못했다.

② 참조,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③ 물론 영국의 초기 팝 아트 운동은 콜라주를 중심으로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또한 로첸버그의 콤바인 페인팅과 존스의 그림 역시 50년대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팝아트의 시작(1958-1968)은 워홀와 로젠퀴이스트 등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광고 이미지의 출현 즉 1960년대를 기다려야 한다.

④ 엄밀히 말해 윌리엄 클라인 이전 1949년 레이몬드 하인즈 (Raymond Hains)는 광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사진적 작품으로 만든 첫 사진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전한 사진이 아닌 일종의 꼴라주 방식을 하고 있다 : 사진과 영화의 형식을 도입하여 만든 게시광고물로 일종의 레디-메이드이다. 여하간 클라인과 하인즈는 서로서로 팝의 선구자들로 간주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광고와 글씨의 사진적 조합에 있었다.

⑤ 여기서 비평가들은 실질적으로 전문적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던 클라인의 사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당시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대상을 왜곡시키는 상식 이하의 촬영 기법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의 기술적 무지에서 왔다고 한다. 사실상 클라인은 파리 체류시 자신의 회전 광고 사진 확대 기술을 위해 처음으로 사진을 이용했는데 당시 그는 화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작가가 생존하는 오늘날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⑥ 몇몇 비평가는 이러한 왜곡된 형상들을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망투(Mantoue)의 테(Te) 성에 줄 로맨(J. Romain)이 조각한 괴물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⑦ 참고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⑧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나의 사진들은 어떤 고전주의를 들추어낸다. 아마 사진들이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Piero della Francesca를 참조하였는데 사진에 있어 나의 항구적인 의도들 중 하나는 1/125 초의 속도로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난 의도적으로 기념비와 벽화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자신의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프레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의 “인본주의”에 관계한다. 레제의 그림은 도시 사회의 저속성과 현대 산업 사회와 물질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면서 인간의 사물화를 추상 기하학적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⑨ 참고,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p. 30.

⑩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gique, Cahier du Cinema / Gallimard / Seuil, 1980, p. 7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군중 속에서, 뉴욕가 5번지, 1955년
(사진 3)롤링스톤 공연, 파리, 1982년
(사진 2)추수 감사절 행렬, 뉴욕, 1959년
(사진 4)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
(사진 5)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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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사진의 출발을 흔히 1950년대로 간주한다. 이러한 구분의 가장 큰 이유는 전후 대중 전파 매체(특히 텔레비전)와 정보산업의 발달로 사진이 소위 상황 미학(보도 사진)이라는 객관적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전달 매체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표현 매체로의 개념적  이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 1950년대는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그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거의 모든 자연적 개념들(예술까지도)이 급진적으로 인공화(예를 들어 새로운 학문으로서 수용되는 많은 과학적 공리들) 되는 때이기도 했다.
 
특히 후기 정보산업의 개화기인 1950-1975 기간은 1930년에서 1950년 사이의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기를 거쳐, 19세기 후반기의 산업 혁명의 기술적 발전과 같이 또 한번 엄청난 과학적 도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혁명은 지난 세기의 산업혁명과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전파 매체의 급속한 발달에 의해 엄청나게 팽창된 대중 지향성과 물질 문명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그 맹신을 들 수 있다.
 
사실상 1948년의 정보 이론과 인공 두뇌학의 발달, 1952년 유전자의 이중 나사구조 DNA의 발견과 단백질의 기본이 되는 아미노산의 획득, 1964년 빅뱅의 개념 그리고 1969년 아폴로의 달 착륙 등 지속적인 과학의 경이로운 발전은 이성과 과학에 대한 신빙성을 더욱 더 높였고, 이로 인하여 우리를 둘러 싼 모든 물리적 사실뿐만 아니라 정신적 현상까지도 우리는 사실상 공리(수학, 논리)개념을 통해서만 그 설득력과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 인간은 자연의 신비와 기상까지도 지배하고, 장치 인간에 유용한 모든 것은 19세기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하나로 통제된 이성(인간의 의도)에 의해 가능하다는 확신을 더욱 더 분명히 가졌다.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인공의 불균형 속에서 어떤 “중간 현실” ① 이라는 조화 속에서 현대 문명과 철학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또 다른 숙제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차 대전 이후의 예술은 크게 대중과 물질(오브제, 키츠) 즉 지나치게 팽창된 인공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팝 아트(Pop Art)와 누보 레알리즘(Nouveau Realisme)을 들 수 있는데, 그것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후기 산업 시대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문화에 대한 반-인공주의였다 : 앤디 와홀(Andy Warhol)의 유령 같은 마릴런 먼로 얼굴이나 소비 사회의 풍요로움 그 이면에 숨겨진 허상 ② 을 폭로하는 많은 일상 오브제의 예술적 활용 즉 키츠 미학은 정확히 당시 물질 사회의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반-인공주의였다.
 
이와 같이 전후 예술적 영역에서 작가들이 던지는 공통된 메시지는 인공에 침식된 자연에 대한 예술적 의문과 그 장막에 출현하는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영역에서 1950년대 이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하는 현대사진의 특징 또한 반 - 인공주의와 시뮬라크르의 폭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작가들이 재현하는 예술적 방식은 물론 각자 달리 나타난다. 의심할 바 없이 어빙 펜(Irving Penn)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선두주자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사진은 전달의 매체가 아니라 표현적 도구

1917년 미국의 플레인필드(Plainfield)에서 태어난 어빙 펜은 1934년 필라델피아 산업예술학교에 들어가 예술가(특히 화가)로서의 기질을 쌓는다. 그후 그는 그의 예술적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선생과 제자 관계)인 하퍼스 바자르(Haper's Bazaar)의 알렉스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 1898-1971)를 만난다.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군복무를 마친 그는 1941년 사크스(Saks)라는 잡지에서 일하면서 에반스와 앗제 스타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결정적인 만남인 알렉산드 리베르만(Alexander Liberman)을 만나는데 당시 뉴욕 보그잡지 예술 부장인 리베르만은 1943년 펜을 보그(Vogue)잡지의 조수로 고용하여 그에게 잡지 커버를 맡긴다. 젊은 사진가는 패션 액세서리로 된 양식화된 정물을 실현하는데 그 형태와 구성은 엄격하고 단순하고 그리고 당시 아방가르드 사진에서 또한 패션 잡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탁월한 질을 보여준다. ③ 

1947년부터 그는 전쟁 전의 “상황” 미학(보도사진)과 단절을 가지면서 아주 간결한 스타일로 유명 예술가와 문학가들의 얼굴을 촬영한다. 원래 화가 지망생으로서 다양한 미술과 조형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이미 사진은 더 이상 전달 매체가 아니라 현실의 이면을 암시하는 표현적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펜이 자신의 개인적인 스타일을 확고히 한 결정적인 시기는 자신이 파리에 머무는 1949년에서 1950년 동안이었다.
 
 거기서 그는 초상, 누드, 패션, 정물 등 다양한 양식을 두루 거치며, 이미 특징적으로 배경과 형태 사이에 강한 콘트라스트와 간결하고 청명한 실루엣 그리고 대조적인 구성(특히 누드에서 어두운 톤을 배경으로 배치된 아주 하얗고 창백한 모델)을 분명히 했다. 또한 컬러의 특징에서 펜은 아주 밝은 색채와 공간을 가지는 패션이나 누드에 모든 문화적인 미적 개념(세련됨과 우아함)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어빙 펜의 사진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가 단지 이와 같은 우아함과 세련미의 극치에만 있을까 ? 물론 어빙 펜의 사진은 외관적으로 우선 거의 완벽에 가까운 고전미의 예찬이나 거의 완전한 상업 광고사진으로서 절대적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양식들은 모든 가치를 물질에 두는 상업에 의해 예술을 부패하게 하고 또한 이미 1850년대 보들레르가 그토록 경계했던 타락한 예술 그 자체가 아닌가 ?
 
사진의 진정한 예술적 메시지는 이러한 외적인 양식(형식) 이면에 은닉된 내재적 존재의 출현 즉 시뮬라크르의 누설에 있다. 프로이드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기억-화면(은페/위장 기억)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누설 ④ 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요소들의 병치와 대립에서 온다. 다시 말해 외면적으로 완벽히 위장된 세련미와 동시에 전통적 그림의 예술적 제스처와의 의도적인 병치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이미 앤디 와홀이 거의 산업용 벽지가 된 또는 사실상 상업용 광고지가 된 자신의 “인공적” 그림(현대 대량 소비 산업의 은유)에 의도적으로 보상효과를 주기 위한 “그림화 작업(picturalisation)”과 유사하며, 또한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의 유명인의 초상사진에서 보여주는 “가식과 진실의 폭로” 즉 인간의 사회적 마스크와 생물학적 진실 사이의 딜레마와 같은 이중 구조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어빙 펜은 자신의 패션사진과 광고사진의 많은 경험을 통해 오늘날 대량 소비 사회가 요구하는 대중적인 미는 오랫동안 예술의 자연미가 아닌 인공의 미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술 역시 이미 상업화된 인공 예술임을 간파했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이안 아버스나 리차드 아베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패션은 여자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패션은 전통과 관습에 의해 체계화 된 미, 나르시즘, 변심, 교태의 개념들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흔히 남자들에 의해 생각되는 패션 오브제로서 여자는 자연적 미의 상징이 아니라 인공적이고 모조적인 미의 상징이다 : 펜에게 여자는 그의 정열을 실현하게 하고 그의 스타일을 무한히 다양하게 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된다. 또한 여자는 남자(그리고 여자) 관찰자의 이상화 된 시각을 보들레르 이후 단지 “이성과 계산”의 결과만을 낳는 귀족적이고 이상적인 미에 관계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귀족적인 것은 이성과 계산(예견)의 결과이다 (...). 그래서 패션은 자연적인 삶이 거기서 상스럽고 세속적이고 추잡한 것을 축적하는 모든 것을 넘어 인간 두뇌에 떠다니는 이상의 취향의 증세”⑤  로 간주된다.
 
결국 작가는 오브제에 영원의 인상(L'impression d' ternite)을 수여하면서 의도적으로 사진 이미지에 연극적이고 인공적인 강렬한 불빛 아래 소비 사회가 요구하는 아주 세련됨과 우아함 즉 미리 연출된 인공미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사진이 실리는 고급 잡지의 호화로운 지면은 대중 광고들이 상연하는 일종의 부조리 연극을 말하고 있고, 나아가 결국 오늘날 소비 사회를 암시하는 플라톤의 동굴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결코 사진을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 포즈, 자세 그리고 제스처 이 모두는 세심하게 계산되고 의도적으로 연출된다. 예를 들어 1950년 모델 잔  패체트(Jean Patchett)를 재현한 보그지 표지는 펜의 진행에 있어 완벽한 삽화를 보여준다. 여기서 재현된 여자는 펜 특유의 고전적 미와 정련된 형태들 그리고 완벽한 양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공미의 극단적인 재현과 동시에 이와는 정반대의 예술적 요소들(말하자면 자연미)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킨다 : 어느 인공 스튜디오의 흰 직물 앞에서 익명의 페루의 인디언 (1948), 누벨 기네의 인디언 (1970), 모르코의 인디언(1971), 시가 담배꽁초(1972), 길에서 발견된 물건들(1975), 비참한 정물들, 강철이나 유골 블록(1980) 등과 같이 현실로부터 단절된 사물들의 하루살이 특징과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 그리고 그것들의 단순한 형태 등은 인공미에 의해 위장되고 사치스런 물건으로 구성된 컬러 정물의 요란한 치장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의도적인 연출은 세속적인 현실을 승화시키는 일종의 묵시론적인 가장행렬을 보는 듯하다. 그때 이미지는 마치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그 이유는 우선 재현된 이미지들은 흑백의 아주 부드러운 톤을 가지면서 세기초부터 포기되었던 그리고 펜이 다시 가치를 올려놓은 백금 - 팔라듐(le platine - palladium) 인화 기술 ⑥ 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예술적 규범에 역행한 사진이미지

사진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통 예술의 재현은 오늘날 특히 광고와 대중 매체로 대변되는 물질 사회의 요구 즉 예술의 상업화에 분명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작가의 정물 시리즈이다. 거기서 사진은 허무(Vanites) 와 해골(Memento Mori)과 같은 다양한 상징들을 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예술(Art)의 대문자 A(순수 전통예술)를 강조하면서 예술의 영역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활용은 예를 들어 해골, 말라빠진 꽃, 부서지고 망가진 오브제들 ⑦ 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시간의 빠른 소실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같이 바로크와 르네상스 그림 세계를 복사한 도상(초상, 성상)적 체제는 적어도 사진이 보여주는 미적 체제와는 다른 측면을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그림의 원작을 말하는 그리고 모더니즘의 대표적 특징인 재현의 희귀함과 유일성이다. 한 번 이상으로 이러한 것들(희귀성과 유일성)을 얻기 위하여 펜이 적용한 예술적 전략은 그것으로부터 사실상 그림의 양식으로부터 사진적 흉내 즉 모작을 생산하는 것(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이러한 작전을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아주 큰 음화로부터 밀착 인화를 하면서 마치 사진이 그림이 된 듯한 풍부한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 종이와 음화 사이에 놓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밀착과 무한히 세밀하고 고운 백금 인화는 감각적으로 (그림의) 희귀성을 주고 궁극적으로 작품에 유일성의 어떤 아우라를 부여한다. 또한 확대를 이용하지 않는 밀착인화에 필요한 보다 큰 대형 음화를 얻기 위하여, 펜은 사진기의 특별한 타입 ⑧ 을 활용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그림과 데생의 유일한 이미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작품의 아우라와 유일성을 보다 분명히 나타나게 했다.

그는 해골, 담배꽁초 혹은 다른 찌꺼기들과 같은 이미 덧없이 분해된 오브제들(사진 3. 4)을 그의 단순하고 엄격한 미학에 복종시킨다. 그는 또한 일상의 찌꺼기 정물들을 구성하면서 그리고 17세기 네덜란드 정물들(사진 1. 2)을 흉내내면서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지배하는 현대판 “허무(vanit )”를 창조하려 했다. 수 십 년 동안의 패션 사진 활동을 통해 그가 반사적으로 직감했던 것은 허무와 죽음으로 가는 점진적 소멸 등과 같은 규명할 수 없는 그러나 유령과 같이 떠도는 시뮬라크르들이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체험들은 결국 유리 안의 마네킹, 시내거리 간판과 같은 무기력한 것, 시든 꽃의 꼬꾸라진 돌출부, 부패한 과일, 일상의 찌꺼기와 폐물들, 해골 등의 오브제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게 했다.

의도적으로 연출된 어빙 펜의 사진 이미지들은 당시 완전히 시대의 예술적 규범에 역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미지들은 새로움 그 자체였고 또한 시뮬라크르의 재현을 위해 폭로적 효과를 만들었다. 당시 대량 생산과 소비 사회의 급격한 양적 팽창(대중 광고) 속에서, 이성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인공미의 질적 팽창(패션) 속에서, 예술세계가 시선의 한계 자체의 묘사로서 상업 사진 쪽으로 돌린 바로 그 시기에, 펜은 의심할 바 없이 상업 사진의 세계를 피하기 위하여 예술 쪽으로 방향(반 - 인공주의)을 돌렸다. 많은 다른 위대한 사진가들처럼 어빙 펜 역시 이러한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펜의 사진은 우아함과 세련미, 양식과 형식의 극단적 인공미로 위장된 요란한 연극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면에서 여기 저기 출현하는 시뮬라크르 체제를 폭로하는 그리고 “예술적 작품”이라는 라벨을 단 부조리 연극이다. 그것은 또한 (전략적인) 예술적 퇴행 ⑨ 을 말하는 것이다.
 
주)
① 중간 현실(une realite  mediane)은 1958년 프랑스 작가 시몽동(Simondon)의『기술적 오브제들의 존재 방식으로부터(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에서 보여주는 개념으로, 현대 문화의 철학을 지탱하는 1962년 그의 유명한 작품 『새로운 시대(Nouvelle Age)』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참고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p.136.

② 이는 철학적으로 말해, 물질 이상주의 주위를 떠도는 시대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 이해된다.
 
③ 펜은 보그 잡지 역사상 처음으로 커버사진에 정물을 실현시켰다(보그지의 표지면은 컬러 정물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의 모든 창작의 특징을 이룰 것이고, 또한 바로 이 잡지의 틀 안에서 그는 당시 컬러 사진의 거장이 되었고 곧 몇 몇 유명한 테마 시리즈들이 만든다.

④ 참조, Rosalind Klauss, "Note sur la photographie et simulacre", Le Photographique, Pour une Theotie des Ecarts, Edition Macula, Paris, 1990, pp. 208-222.

⑤ Texte Annemarie H rlimann, Irving Penn, cat. Musee d'art et d'histoire, Fribourg, Edition Benteli, Fribourg, 1994, p.10.

⑥ 펜은 특징적으로 풍부한 톤과 어두운 부분과 회색조의 예민한 그라데이션의 이유로 잘 알려진 백금-팔라듐(Le platine-palladium) 기법을 활용하였는데, 이 기법은 픽토리얼리즘 이후부터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으로 인하여 이미 폐지된 방식이었다.

⑦ 여기서 어빙 펜이 재현한 오브제의 개념은 무시간 속에 놓여진 지속으로서의 오브제가 아니라, 생성-형성 과정 속에 있는 진행적인 무엇을 말하고 있다 : “과정(process)”이라는 말은, 중세부터 “실체/물질 substance”과 “사고 accident”, “대상 objectum = objet”과 “주제 subjectum = sujet”에서와 같이, 되고 있는 흐름(유통 /courant)이었다. 라틴어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브제의 개념은 라틴어에서 “objicere” (길을 가로질러 던지다)로 알려졌지만, “objectum(가로질러 거기 앞에 던져진 무엇)”으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12세기부터 이러한 개념은 중세 라틴어로 objectum, 프랑스어로 objet, 영어로 obtect, 독일어로 Gegenstand, 네덜란드어로 voorwerp, 러시아어로 predmiet의 형태로 알려지면서 유럽을 휩쓸었다. 부르조아적 철학 용어로 대상과 주제(objet/sujet)로 짝을 이루게 된 이 개념은 혁명적이었다. 대상들(les objets)은 시스템의 유일한 책임자들인 “과정(processus)”의 국부적이고 이동하는(과도기적인) 생산물 이상 아니었다. 그와 같이 자동차는 자동차의 과정(processus Automobile)에 있고, 여자는 여자의 과정(processus Femme)에 있다. 참고, Henri van Lier, op, cit.

⑧ 이러한 타입의 사진기는 소위 “연회용 사진기 (chambre de banquet)”라고 하는데 주름과 거대한 사진판 덕분으로 그에게 촬영순간(대상을) 확대해주는 옛날 사진기이다. 그룹들, 축구팀들 혹은 자선단체의 조직을 촬영하기 위해 고안된 이러한 사진기 덕분에, 펜의 이미지들은 대부분의 사진기의 넓이와 높이의 비률과는 아주 다른 비율을 가지면서 길게 늘어진 큰 직사각형의 사진판을 가질 수 있었다.

⑨ 신디 셔먼의 작품이 예술적 카테고리들을 해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의도적으로 연출한 상황에서 돌출하는 시뮬라크르를 따라간다고 할 때, 이와는 반대로 역전된 상황, 다시 말해 예술적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 시뮬라크르의 문제를 감추고 거의 피할 수 없는 예술적 퇴행을(le retour du refoule) 실행하는 작가들 중 하나는 어빙 펜이다. 참고, Rosalind Klauss, op. cit., p.219.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2) 뼈와 풍경, 1980
(사진 3) 담배꽁초, 시리즈 123번, 1972
(사진 4) 쓰레기 장갑, 1975
(사진 1) 해골과 정물,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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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phenomene)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식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하여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흔히 앎(“보이는 세계”)이라고 하고 철학 용어로 외재적 형상(Forme)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와 반대로 어떤 현상의 분명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러한 비 구체적인 무엇을 말한다. 흔히 이것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안 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존재론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alite  immanente)① 이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우선 전자의 경우는 산 하늘 강 집 사자 코끼리 등과 같은 자연적 형태는 물론이고 사랑, 평화, 동정, 소외, 부조리, 도덕적 고발, 삶과 생명의 예찬, 인본주의 등과 같이 관념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읽혀지는 보편적 앎(코드나 일반적인 상식)을 지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언제나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는 객관적인 인식 대상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인식 대상들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 영역밖에 존재하는 그러나 이미 그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후자의 경우이다.
 
 예컨대 꿈이나 환상, 예수의 형상(신의 산재성), 음악의 인상, 작가의 예술적 직감 등은 가장 전형적인 내재적 형상들이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갑자기 돌출하는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나 충동, 굳이 예를 든다면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 온 배우자나 가족에게 느끼는 갑작스런 혐오감, 첫사랑의 이미지 혹은 첫인상에 느끼는 강렬한 애정, 변질된 성적 욕구, 엄마 품을 떠난 아이가 느끼는 엄청난 공포와 같은 아주 익숙한 곳에서 아주 낯선 이상함, 어떤 자극에 의해 불현듯 솟아오르는 레미니센스와 멜랑콜리 그리고 그 순간의 도취나 자살 충동 등도 역시 상황(특히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들이다. 이것들은 특징적으로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 되고 추상화 된 형태를 가지면서 잠정적이고 예언적인 또한 예견치 않은 무엇(라틴어 : numen)을 말한다”.②  또한 이것들은 주관적이고 비 구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상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무형의 존재들 다시 말해 흔히 우리가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인식 영역에서 이성과 논리로 규명 불가능한 것들(시뮬라크르 / 음영)로 대부분의 경우 단지 어떤 사건(ev enement)이나 상황에 대한 비 구체적인 원인으로만 감지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러한 무형의 존재들은 오랫동안 위대한 예술가의 근본적인 재현 대상이 되어 왔고 특히 오늘날 현대 미술의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일상과 시뮬라크르)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흔히 창작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제스처로 간주되는 추상과 표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③ 그러나 일종의 시각적 번역으로 간주되는 그림과는 달리 과거 사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재현만을 허락하는 사진의 경우 특히 사진의 기록성과 그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보도사진에서 앞서 언급한 내재적 형상들은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진은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는데 있어 그 어떤 전달 매체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진적 사실주의④의 개념적 활용은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담화로 나타났고 또한 사진은 소위 시뮬라크르(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도용, 혼혈, 잡종 그리고 저항과 자아상실 등)의 재현에 있어 필수적인 예술적 표현 도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거의 대부분 상황 속에서 은닉되고 암시되기 때문인데 이때 사진은 상황 설정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정상적인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내재적 형상은 일반적으로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절대적 사실주의(analogon)로부터 즉각적인 감각 즉 아우라, 탈코드, 푼크툼 등의 형태로 발산된다. 특히 앗제나 빌 브란트와 같은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많은 작가들의 사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나 인상은 이러한 초감각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관객이 가지는 즉각적인 인상은 사진의 단편적 상황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형상은 단편적 상황이 아닌 특히 시퀀스 방식과 같은 사진의 연속적 상황에서도 암시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70년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바로 이러한 연속적 상황 설정을 위해 동원된 일종의 논리적 배경들이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진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일상 생활에 은밀히 감추어진 감각적 메시지들이었다. 이때 관객이 가지는 감정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반사되는 의미적인 무엇이 아니라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 상황이 끝난 후 은밀히 남는 잔여 감정과 같은 것이다. 미셀 푸코(M. Foucault)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 대한 자신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여운을 “사고-감정(pensee-emotion)”⑤이라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일상 생활에서 비논리적으로 잠재된 존재(안 보이는 세계)의 누설을 위해 마이클스는 대부분의 사진 구성에서 시퀀스(sequence) 방식을 도입하여 의도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논리적 상황을 설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관객 스스로의 사고-순환을 위해 도입된 시퀀스 방식은 마치 홍당무로 당나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리는 경우와 같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대상들로 단지 사건이나 상황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재적 형상의 추적에 관하여 마이클스는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 “사진은 단지 암시적 출현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생의 고민 번뇌 욕망 등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함축한다”⑥ 이 말은 결국 진정한 사진의 재현 대상은 보이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때 사진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설정(픽션)을 통해 안 보이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 과정을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작가의 의도와 서술적 상황 설정 그리고 관객의 이미지 읽기. 우선 작가가 표현하려는 예술적 의도나 메시지는 일상 생활의 은밀한 주제들이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앎의 영역에서 객관적 의미와 명분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경험(내적 관찰)을 통해 포착된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외부 대상이나 장면의 재현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면(l'aspect de soi-meme)에 대한 시각화로 간주된다”.⑦  이와 같이 포착된 감각적 음색에 대한 사진적 재현을 위해 작가는 “사진을 경험적 전달체로 이용한다”.⑧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설정에 한계를 가지는 전통적 방식(한 장의 단편적 상황)을 탈피하여 시퀀스 방식을 통한 서술적 상황을 전개시킨다. 이때의 상황은 작가의 주관적 상황 묘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공유된 주관성”에 관계한다. 미셀 푸코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진들의 경험은 나를 유혹한다. (...) 사진들이 마이클스의 경험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상) 그의 경우인지 나의 경우인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⑨ 라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마지막 단계의 관객의 입장에서 본 사진은 “유일한 의미와 유일한 도덕 혹은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관점이나 경험에 따라 번역되는 사건이나 상황의 연속으로 이해된다”.⑩ 
 
위와 같이 작가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포착된 내재적 형상은 관객 스스로의 경험적 연상에 의해 전달된다. 그때 관객의 사고-순환을 유도하는 상황 설정은 단지 응시자 각자의 경우로 환원시키는 수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역할을 위해 마이클스는 방법적으로 영화적 시퀀스를 도입하고 또한 분명한 상황 설정을 위해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한다. 이런 경우 사진은 더 이상 장면 묘사의 시각적 전달체가 아니라 상황 전달을 위한 일종의 설치 역할을 한다. 원래 사진은 전통적으로 생생한 현실을 재생하는 자료적 혹은 복사적 기능을 가지며 반대로 그림은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비 현실을 암시하는 “재현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마이클스는 사진의 기능을 그림의 기능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작가는 사진적 매체가 가지는 재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 속에서 사진의 전통적 관습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진의 연속 장면들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 시퀀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세기부터 몇몇 사진가들은 연속적인 재현 방식을 도입하였다 : 단순한 서술이나 알레고리를 위한 피터 로빈슨(P. Robinson)의 합성 사진들, 동작과 움직임의 재현을 위한 뮈브리츠의 연속 사진들이나 20세기 초 미래주의자들의 사진들 혹은 다양한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잡힌 입체파 양식의 사진들, 이러한 사진들은 비록 영화적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하간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연속 사진들이었다. 이때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시간의 지속성과 공간의 형태 변화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시퀀스가 의도하는 것은 이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서술 구성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장면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퀀스 방식을 동원하여 관객이 “서술적 논리”를 야기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거기서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함정을 파면서 상황적 울타리 뒤편에 은닉된 무엇(생성)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기억은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러한 기억의 동공을 보완하려는 심리적 현상 즉 “논리적 기억”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마이클스가 만든 장면들을 보는 관객은 “자신의 논리적 기억을 동원해서 자신의 어떤 이야기를 꾸미고 싶어한다”.⑪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서술 구성은 관객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서술 공간으로 열려져 있는데 이는 연속적 사건의 점진적 전개를 가지는 영화의 지속성과 분명히 구별된다.
 
듀안 마이클스 사진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하는 행위이다. 이미 60년대 말부터 마이클스는 자신의 사진에 단어나 문맥을 기입하여 더욱 더 이미지의 서술적 측면을 풍부히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의 도입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 장의 사진으로 작가의 사고를 표현하는데 불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거의 신성 불가침으로 간주된 전통적 사진의 순수 이미지에 일종의 신성 모독이 되었다. 그러나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의 조합은 70년대 이후 특히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예술적 전략(이미지-텍스트)이 되었다. 원래 사진의 텍스트 첨가는 특히 광고 사진에서 사진이 내포하는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connotation)를 축소하여 사진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텍스트 첨가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적 항해를 유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때 도입된 텍스트는 비록 작가의 주관적 관점에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 자신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 상황적인 사고-순환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은 자신(작가)의 경우를 다른 사람(관객)의 경우로 바꾸는 “주객 전도의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작가와 관객의 “교차된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⑫
 
결국 마이클스의 사진 활용은 외적 대상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의 재현에 있다. 방법적으로 시퀀스를 이용한 서술적 상황 전개와 의도적인 연출사진 그리고 미지의 비 현실적 세계로의 열린 공간 구성(사진 1) 등은 당시 그 누구도 가지지 않았던 탁월한 작가의 상상력을 말해준다.⑬ 특히 작가가 만드는 시퀀스의 소재들은 신비, 환영, 기적, 불가사의, 공포, 동성애⑭ 종교, 천국, 예수 등과 같이 거의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형이상학적 대상들(초현실적이고 신비적이고 환상적인)이다. 거기에 작가는 자신이 카톨릭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 사회와 집단 사회의 지배 도구로서 이용된 종교적 억압과 폭력을 조롱적 방식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사진 2 시퀀스). 오늘날  합리주의와 과학적 논리 그리고 그 절대적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멀리 추방된 수많은 존재들, 그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언제부터인가 집단 통제를 위해 원천적으로 말살된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망각들이다. ●
 
<주요 참고 도서>
*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 Duane Michals, Texte de Renaud Camus, Photo Poche, C.N.P., Paris, 1988.
* Mi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 Changements, Photographies et textes de Duane Michals, Edition Herscher, Paris, 1981.
* Vrais Reves, Editions du Chene, Paris, 1977.
 
주)
① Henri Van Lier, Histoire de la photographie, cahier du cinema, Paris, 1990, p. 여기서 "내재적(內在的 immanente)"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형상(forme)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외재적(外在的)"이라는 의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 밑에 잠재된 비구체적인 상태를 말한다.

② Ibid.

③ 니콜라 스타엘, 폴 클레,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뒤뷔페, 프란시스 베이컨, 앤디 와홀 또한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전통적 코드의 이탈과 전복을 말하는 비정형의 “형상 이탈”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내재된 형상의 시각적 재현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대상의 재현은 더 이상 사실주의가 아닌 개념이나 표현에 관계한다.

④ 단지 인화지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물질로서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천 유리 모니터 프로젝트 등 모든 물질 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이전의 비 물질적인 사진을 말하는데 손으로 그려진 사실주의와 반대로 렌즈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실주의를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 / Le realisme photographique)라고 할 수 있다.

⑤ 관객의 논리적 사고 순환 후 발생하는 돌발적인 감정을 말한다. Texte de Ml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⑥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⑦ Ibid.

⑧ Ibid.

⑨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⑩ Marco Livingstone, op., cit.

⑪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⑫ Marco Livingstone, op., cit.

⑬ 비록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지나치게 담백하고 솔직한 감성으로 재현되고 가끔씩 어설픈 표현들을 가진다고 비난받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은 오늘날 현대 미술(개념 미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차갑고 냉정하고 무기력한 측면과는 반대로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을 던지면서 대중과의 강렬한 교감을 주고 있다. 70년대 개념 사진의 선두주자로 간주되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은 거의 모든 재현 예술에서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현대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연속(시리즈)이나 이미지와 문맥의 조합(이미지-텍스트)은 이러한 시퀀스 사진의 영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⑭ 동성애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의도는 종교에 의해 추방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이성만 선택되고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카톨릭 종교와 집단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데 있다. 역시 동성연애자였던 미셀 푸코(1984년 에이즈로 사망)는 자신의 책 ‘성의 역사’에서 “과거에 남색은 일시적 이탈이었으나 이제 동성애는 하나의 인간 유형이다”라고 폭로하고 있다. 원래 동성애는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한 유형이었는데 집단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해 오랫동안 억압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농경 사회에서 인구 증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중요시하는 계급 사회에서 종교와 관습은 일부 일처제를 강압적으로 법제화하였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동성애는 추방되고 억압되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빛을 발하는 남자, 1969 년
(사진 2) 시퀀스, 뉴욕에 나타난 그리스도 텔레비전에서 종교 위선자가 된 그리스도
무허가 낙태 수술실에서 죽은 젊은 여자를 보고 슬퍼하는 그리스도
동성연애자를 보호하는 그리스도
브루클린가에 사는 우크라이나 출신 할머니와 함께 개 먹이 통조림을 먹는 그리스도
강간당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뒷골목 어느 미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두 번째 강생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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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혹은 육교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초라하고 측은한 모습들 특히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불구를 강조하며 구걸하는 소위 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반 폭력적인 행위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에 관해 우선 부정적이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 혹은 부속적인 걸림돌로 간주되며 결국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부등호의 원칙이 성립하는데 오랫동안 이러한 원칙에서 소위 가진자의 “동정”이라는 우월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라 함은 예컨대 구걸하는 맹인에게 동전을 적선한다든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과 같은 선의적인 제스처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소외된 자에 대한 의도적인 배려는 사실상 집단과 전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편견과 불평등의 신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행위는 거의 상징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강압적인 원칙에 복종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에는 두 가지 교묘한 지배 논리가 있다 : 하나는 “평등”이라는 집단 우선적인 개념이고 또 하나는 “정상”이라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원래 평등과 정상은 관용(똘레랑스 tolerance)① 이 아닌 불관용(앵똘레랑스 intolerance) 즉 특정한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마스크이고 계몽의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사고(합리와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국가 지배 개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그 대상이 훈련된 우리의 인식으로 의식할 수 있든 없든 여하간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서로 절대 가치의 우위를 측정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존재로 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원래 존재는 “그대로의 출현”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등을 빙자한 “민주”와 보편 타당성을 원칙으로 하는 “정상” 다시 말해 어떠한 불순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성 혹은 통일성이 강요하는 절대적 흑백 논리는 오직 집단을 위한 이성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는 사변적 폭력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물질 사회 속에서 특히 유일하게 자본주의만 부화된 한국의 물질만능의 현실에서는 오직 민주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콜롬부스는 침략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부스는 언제나 발견자 혹은 정복자(또한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가 되듯이 자신과 다른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만 인정하는 흑백 논리의 세상 그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에 대한 맹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진보는 소수를 위한 개념적 포용이지 다수를 위한 논리적 반전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자. 종교적 전도라는 명목으로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멀쩡한 외모를 가진 어느 독실한 교인의 침튀기는 설교, 오직 기존 정권의 전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야당 인사의 정치적 폭력, 북한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노동 파업과 그 연대 투쟁, 이러한 명분과 주장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식에서 마치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같이 비정상적 존재의 돌출로 간주되며 또한 사실상 거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은 단지 정상이 의도적으로 구획해 놓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진자 혹은 기득권자의 지배논리로 이해되는 동정이 아니라 또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변적 “공존”이다. 이러한 공존은 정상과 비정상, 강자와 약자, 혹은 다수와 소수의 존재론적인 일치(관용 혹은 포용)를 말하고 있다 : 예컨대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듯이 정치에서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적이 되며 좌파의 관점에서 우파 역시 적이 된다. 또한 심지어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온건파나 중도파의 노선은 오히려 억압되고 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인데 후설은 “우리는 언제나 중성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의 상황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누설하는 은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존” 혹은 “관용”에 있다. 그녀의 많은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외시하는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은 이러한 사변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서 선별되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 그녀의 사진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표로서의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사진이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면서 또 다른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정이나 인본주의적 명분을 앞세우는 계몽적 사진은 더욱 더 아니다. 더욱이 우울증이나 강박관념과 같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성향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나 불행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녀에게 모델로서 장애인은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누락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출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지 의도적으로 또한 노골적으로 이러한 “존재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아버스의 사진들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출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예 : 사진 2). 이성에 의해 규정된 “정상”의 세계(보이는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안 보이는 세계)를 병치하면서 소위 괴물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신체 불구자, 거인과 난쟁이, 정신박약, 동성연애자, 성전환자 등 마치 생물학적 도감을 보듯이 공통적으로 뭔가 엉뚱한 괴물로 나타난다. 정면으로 출현한 이들은 장애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마치 누군가(조물주) 만들어 놓은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존재로 규정된다(사진 1, 3, 4). 이를 위해 그녀의 촬영방식(거의 50mm 표준 렌즈 / 초기에는 소형 카메라, 60년부터 6 x 6 필름을 사용)은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단순한 방식을 하고 있고 또한 그 구성에서도 대칭성과 정면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방법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시에 대조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그녀가 포착한 것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음의 존재들(ombres)이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이고 산발적(소수)이고 또한 징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주 밖의 괴물, 기형, 히피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 즉 프리크(freaks)들로만 나타난다. 원래 어원학적으로  프릭크는 알려지지 않은, 불명의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을 지칭하고 그들은 본원적으로 ‘이상한 혹은 엉뚱한 것(oddity)’ 즉 부등의, 부조화의, 기수의, 짝이 맞지 않는, 비스듬한, 삐딱한, 만사가 신통치 않은 불완전한, 부족한 등 공통적으로 어떤 비정상(imparite)에 관계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조물주의 동등한 작품으로 원래 정상적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획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어 ‘비정상’으로 치부된 것들이다.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 가령 모두가 왼손잡이인 집단에서 오른손잡이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기형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또한 키 작은 난쟁이 집단에서 키 큰 사람 역시 기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에서 이성의 결혼은 물론 금지될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은 단지 한 집단이 선별적으로 규정한 편견에 의한 것이다.”② 그래서 아버스의 인물들은 단순한 장애인의 유형학적 진술이 아니라 소외된 존재의 누설로 간주된다. 역설적 방법으로 매조키즘(피학대 음란증)적인 비관주의적 시각에서 세상의 ‘추함’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것은 일종의 불행의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별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활용한 과도한 플래쉬는 모델을 더욱 더 경직스럽고 인위적이고 순진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낮보다 밤에 오히려 더 많은 기형(oddity)를 생산한다는 유태인의 사고에서 온 논리이기도 하다.

  1971년 여름 그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신경안정제인 바르비투스산제를 먹고 동맥을 끊고 자살하기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보이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산보 중인 사람들을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별한 시각은 사회학적 관점 이전에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아버스의 사진은 정상적인 우리들의 이성의 눈(코드)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응시자의 눈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시각의 개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형인, 늙은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비정상인은 사실상 정상인과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집단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보편적 기준에서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로서 나타난 그들의 출현은 열등한 종족의 괴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추어진 우리의 ‘이중적인 얼굴’임(Norbert Bernard)과 동시에 오랫동안 망각된 존재의 진실 즉 우리 모두의 ‘증세와 기념비’(Henri Van Lier)가 된다.”③
 
  근본적으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집단 사회(특히 물질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패션사진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빈부차이나 물질 만능사회에 대한 체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을 대표로 하는 집단사회가 통일된 지향성을 위해 규정해 놓은 미(넓은 의미에서)적 가치에 대한 편파적 기준이다 : 오랫동안 우리는 이성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불행, 비극, 추함 혹은 소외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인간조건의 이상적인 조화와 긍정적인 시각에 익숙하여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우상이나 모델을 위한 강압적인 규범으로 사실상 반쪽 세상의 불관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행의 신호로 간주되는 비 정상인을 모델로 하여 그녀가 생물학적 관상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추함과 불행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억압된 존재의 폭로로 볼 수 있다.”④ 그것들은 이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시뮬라크르임과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
 
<주요 참고 도서>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김희숙 정보라 옮김, 똘레랑스, 길, 2000. (참고 : 임지현 평, 동아일보)
Doon Arbus, Diane Arbus, Aperture, New York, 1972.
Regis Durand, La part de l'ombre, Essais sur l'experience photographique, La Diffrence, Paris, 1990.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La photographie comme destruction, Universite de Provence, Arles, 1993.
Diane Arbus Sans Titre, Aperture/Edition de La Martiniere, New York/Paris, 1995.
Diane Arbus, Photoraphe de presse, Aperture/Herscher, New York/Paris, 1984.
 
주)
①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경률,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비평, 2001년 가을호, 타임스페이스, 서울.

② 같은 책.

③ 같은 책.

④ 다시 말해 그들의 흑백논리에서 이러한 소외된 존재들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물질과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양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대상들을 정상이라 규정하고 역으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의 비정상적인 대상들을 괴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편견적 사고를 불관용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용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을 인정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공존 즉 존재의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전자의 시각을 통일된 하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존재의 획일성”에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discontinuite)”이라고 하며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세계를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한다는 의미에서 “연속(continuit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르주 바타이유)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도 한다(마르틴 하이데그). (집단사회가 강요한 미적 추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추의 예찬”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복개(couvering)”작업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호텔 방에서 타올을 덮은 멕시코인, 1970
(사진 2) 뉴욕 브루클린 젊은 가족의 일요일 나들이, 1966
(사진 3) 뉴욕 100번지 거실의 러시아 난쟁이들, 1963
(사진 4) 뉴욕 20번지 집에서 파마를 한 젊은이,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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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특히 시각예술에서 생산된 작품은 일종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부구조로서 출현하는 지표(인덱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부구조로서 부재하는 그 원인성(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출현한 지표는 그 배경(fond)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고 물리적 원인 관계로 이해되는 이들 두 관계에서 본질(최초의 동기)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지표(시각적 출현)에 앞선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린 유명한 검은 초상은 모델의 검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모델을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을 자신의 감각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또한 폴 클레의 그래픽적 색 나열 역시 현실의 대상이 아닌 음악의 순수함으로부터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검은 얼굴과 색 그래픽은 시간적으로 작가가 과거 상황이나 대상과의 경험에서 포착된 감각의 음색(impression/timbre) 혹은 생성(genese)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이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음색(철학적으로 내재적 형상)들은 단지 작가의 직감(intuition)에 의해서만 포착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탈-코드/시뮬라크르)들이다. 그와 같이 작품은 이러한 존재의 신호들을 색과 선, 면 등의 조형적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조형적 언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 더 정확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경우 그 재현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 특성상 사진은 대상에 대한 그 어떠한 인위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조형적 번역(연출사진)을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사진에서 본질은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만약 클레가 카메라를 이용했다면 그가 바이올린 음에서 감지한 음색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파스텔과 같은 색과 선의 조형적 번역이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의 상황적 재현에만 가능하지 않는가 ?
 
그럴 경우 클레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음색을 암시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악보 피아노 공간 등 그 음색을 유발시킨 오브제나 상황을 찍을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음색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이면에 부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그때 시각적인 출현은 이러한 부재를 은닉한 인덱스로서 음색 혹은 분위기를 위한 재현 이미지 이외 그 어떠한 언어학적 의미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진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재현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방출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을 은닉한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 특히 거의 현존하는 신화로 간주되는 그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현대 영상사진의 결정적 조건을 짓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당시 객관적 사실성과 사건 중심의 보도사진의 흐름에서 프랭크 이후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그의 주관적 이미지를 하나의 모델로 추종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인”의 출간은 적어도 외관적으로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① 게다가 프랭크의 사진은 최근(특히 80년대 이후 유럽)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진 인덱스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이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와 사진 혹은 사진과 사회와의 객관적 관계나 역할에서 코드-의미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분석(현실의 변형)에서 볼 때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한 코드 분석을 넘어 두 가지 주관적 관점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 하나는 사진을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음색의 재현(영상사진)으로 보는 관점과 또 하나는 사진을 모두에게 공유된 현실의 주관적 경험 혹은 공통된 내적 인상으로 이해되는 관객의 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다 함축적인 방법으로 프랭크의 몇 몇 사진들을 모델로 하여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가 “미국인”을 만든 때는 1955-56년이다. 당시 50년대 전반은 공화국의 회귀, 냉전,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상 생활 정상화와 안정과 균형 그리고 경제 발전을 목표로 정치 사회적 관계가 적절히 유지되던 시대였다. 여하간 50년대 미국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확장과 미래의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로 모든 중요한 사항은 공통된 아이디어와 함께 명분과 이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 의식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된 상태로 있었던 분쟁의 에너지는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지속적인 경제적 추진력으로 전이되었고 경제는 또 그렇게 실패 없이 발전했다. 프랭크의 의도는 정확히 당시 긍정적인 대중 의식에 거역하는 반-이미지 즉 지나치게 코드화 되고 상징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였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그가 재현한 반-이미지들은 흔히 소외와 빈곤 허무 등과 같은 반 물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들이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규명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프랭크의 “미국인” 사진집은 결정적으로 전통적 사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반 - 사진” 즉 탈선(형상 이탈)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대중의 눈에 비평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반-사진적인 이탈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은밀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유럽적 시각에 관계하는 것으로 미국에 이민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주관적 재현은 장 콕도가 그의 사진을 “반사하는 거울”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대상이나 상황에서 포착한 “순수 직감”으로부터 재현된 사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영화 혹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3인칭 역사가 아닌 단지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1인칭 자화상이었다. ②  이는 곧 일반적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적인 독백으로의 전환 즉 재현에 있어 주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주제의 변화와 조형적 형태와 구성에서 전통적 규범의 이탈(불규칙, 대칭, 절단, 동요, 흐림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들은 사실상 현대 사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간주되는데 가장 좋은 예로 미국 남부의 이국적 풍경을 보여주는 프랭크의 사진(사진 2)과 이와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1930년대 워크 에반스의 사진(사진 3)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두 사진은 당시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차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재현 방식에서도 거의 같은 정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사진 모두 삶의 방식으로 간주된 차를 소재로 미국의 자연적이고 “내부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에반스가 재현한 객관적 보고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 초가집과 주유소가 병치된 시골 풍경과 같이 단지 자연과 인공의 병치에서 발생하는 대상의 엉뚱하고 야릇한 인상을 재현한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반스의 차는 부의 상징인 사회적 지표로 나타나고 프랭크의 차는 일종의 인간과 물질 사이의 부조화에서 암시되는 괴물 즉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전자는 “사물 위에서(sur) 의미의 재현”인 반면 후자는 “사물에 반하는(contre) 섬광 혹은 인상의 재현”이다(Henri Van Lier).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프랭크의 사진이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인 지극히 주관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에반스의 사진과 같이 삶의 방식이나 사회학적인 보고서로서 일종의 사회적 비난으로 믿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의 사진이 다시 1930년대 F.S.A의 사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프랭크의 사진은 사물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반사된 음색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은 그림의 경우와는 반대로 마치 심벌즈의 한방처럼 찍는 순간 동시에 이러한 사진적 음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자동생성). 이는 곧 퍼스의 유형학적 의미로 인덱스화 된 것(indexation)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que)”이다. 오늘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유형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중요한 하나의 이론적인 모델로서 재조명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음색의 재현에 있고 또한 필립 뒤봐가 “사진과 함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사진적 결론 역시 이미지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프랭크 자신의 순수 직감 즉 생성에 관계하고 있다.

  사진적 음색은 의미나 상징을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 지표를 말하는 환유로 간주된다. 거의 대부분의 프랭크 사진들은 재현된 어떤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라는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조짐을 보인다”라는 상황적 인상만 누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멕시코 286번 국도(US 286 New Mexico)”사진이나, “뉴욕가 34번지”(사진 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나타나는 도로와 선은 의미적 관점으로 볼 때 사실상 수수께끼이다. 이것들은 단지 응시자에게 황량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무엇을 상기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부재의 인덱스일 뿐이다. 또한 작가인 프랭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사진은 그가 도로를 달리다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잡은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감 ③ 에 따라 단지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사진적 행위의 “잔여물”로서 남게 된 이미지, 달리 말해 물질적 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부재이외 사실상 의미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사진, 말하자면 프랭크 사진 유형은 의미나 논리 밖에서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나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기억의 연상에 의해 환원된다. 이때 기억적 확장은 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처럼 지극히 주관적 확장을 한다. 출현과 부재가 섞여 만들어진 “분위기 혹은 인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인상이나 과장된 인상이 아닌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공통된 우리들의 단순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또한 자신의 집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험”(Henri van Lier)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기억적인 이중인화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예컨대 A라는 해변은 B라는 교회 위에 겹쳐 있고, 그 교회는 C라는 얼굴 위에 겹쳐 있고 또 그 얼굴은 ... 이러한 주관적 확장은 또한 동일한 대상 위에서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는 연상의 개인적 “경향”과 같은 맥락(인덱스의 확장)을 가진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을 자르는 결정적 순간이나 유일한 사건을 만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의 부동의 진술과 부재의 출현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재현하는 프랭크 사진에서 보여지는 탁월한 미학이다.

  로버트 프랭크는 그 자신이 반 - 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 쉽게 말해 그가 미국을 주파하면서 느낀 단순한 인상들이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작크 크루악이 “주 - 박스가 장례식 관보다도 더 슬픈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듯이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사진 1)는 비어 있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직감은 바로 이러한 끝없는 신호들을 잉태한다. 또한 그 신호들의 지시대상들은 의미와 논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
 
(주)
①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을 “내적 형상의 재현”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진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앗제와 브레송의 사진을 잇는 두 분수령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영상사진은 거의 완전한 정신적 재현으로 현대 사진의 결정적인 방향을 세운다.

②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사실상 프랭크의 전 사진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 - 소설”인 동시에 “사진가의 생생한 체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서술화된 “스토리 사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독백으로 간주되는 “미국인”은 물론이며 영화 플로라이드 흑백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취향은 분명하다. 특히 1978년 흑백 폴로라이드 사진에서 두 장의 자신의 모습을 붙여 만든 “Selfportrait, at 55, It is like me”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랭크의 많은 사진에서 “그것은 나와 같다(It's like me)”라고 기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전혀 나르시즘과 관계가 없다.

③ 단순한 개인적 심경으로 들뢰즈의 용어로 하나의 사건(evenement) 혹은 표면 효과(les effets de surface)로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Les Americains, texte de Jack Kerouac, Delpire, Paris, 1958, reimp., 1985.
Robert Frank, texte de Rudy Wurlitzer, Delpire, Paris, 1976.
Robert Frank, la photographie, enfi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n  11/12, Paris, 1984.
Michel Frizot, "Robert Frank, ailleurs et maintenant", Cliches n  25, 1986 pp. 48-53.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파리 1949년
(사진 4) 뉴욕가 34번지, 1949년
(사진 2) 로버트 프랭크, 캘리포니아 롱비치, 1955-1956년
(사진 3) 워크 에반스, 농장,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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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깁슨, 혹은 ‘결정적’ 세부의 미학
최봉림


 


랄프 깁슨은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 세부를 ‘결정’하는 것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Cartier Bresson의 ‘결정적 순간’처럼 작가의 대상에 대한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 등이다. 그런데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대부분 파격적이다. 대상을 과감하게 절단하거나,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다가선다. 그 결과 파편적 형상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연시킨다. 작가가 부여한 제목을 보고, 주어진 이미지의 형상과 문맥을 해독한 후에 랄프 깁슨의 카메라 앵글,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추측한 후, 이미지의 상황을 유추해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는 작가의 사진적 정황, 피사체의 환경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인지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피사체의 전모와 작가의 카메라 워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대개 랄프 깁슨의 B급 사진일 뿐이다. 그의 걸작들은 거의 대부분, 피사체의 정체성과 사진적 상황을 파악하려는 욕구를 혼돈에 빠뜨린다. 해답 없는 의문, 불확실한 대답을 연장시키면서 논리적 이성을 기능 장애에 이르게 한다. 그의 탁월한 이미지들은 피사체의 의미와 이미지의 상황을 이해 불능은 아닐지라도, 불확실의 상태로 만드는 파편의 이미지이며, 확실한 의미를 지향하는 이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트라우마 trauma의 이미지인 것이다.

의미의 불확실성, 우리의 인식능력에 불안감을 안겨주는 랄프 깁슨의 극단적인 클로즈업,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는 그러나 결코 일탈의 자유, 무질서한 프레이밍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결정적 세부는 즉흥적 감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주의적 규범, 현실을 엄정하게 바라보는 기하학적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일탈적인 구도, 예외적인 구성을 사진의 목표로 삼지만, 그의 프레이밍은 기하학적 균형, 엄격한 공간구획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우연에 내맡긴 일탈적 구도, 사물의 우발적 포착은 결코 랄프 깁슨을 규정하는 어사가 될 수 없다.

그의 사진은 초현실주의적 몽환을 기도할 때조차, 혹은 육감적인 여체일 경우조차 냉정함, 엄격함,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랄프 깁슨은 모순 어법을 수용한다. 그의 사진예술은 ‘냉정한’ 일탈, ‘엄격한’ 파격이며, ‘정제된’ 꿈의 세계, ‘절제된’ 에로티시즘이다. 미니멀리즘 Minimalism의 간결함으로 몽환의 세계를 포착하며, 고전주의적 균형감각으로 비근한 일상을 구획하며, 기하학적 추상으로 여체를 재단한다. 작가가 1969년에 설립한 출판사, 러스트럼 Lustrum에서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그의 흑백 사진 삼부작, 즉「몽유병자 The Somnambulist」(1970), 「데자뷰 Deja-vu」(1973), 그리고「바다에서 보낸 나날 Days at Sea」(1974)은 랄프 깁슨의 극단적인 클 로즈업,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가 고전주의적 절도, 미니멀리즘의 간결함, 기하학적 추상의 엄격함과 기이한 짝을 이룬 예술사진의 희귀한 성공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불완전한 일상의 조각, 인체의 극단적인 파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엄정한 조화, 단단한 균형, 절제된 통일성을 구현한다. 
남성공유하는 페티시즘 fetishism, 보다 정확히 말하면, 랄프 깁슨의 페티시즘의 감각들을 보여주는「왕녀 Infanta」(1995) 시리즈는 강력한 성적 욕망의 시선조차 그의 엄정한 사진미학으로 통제하려는 극단적 시도로 보여진다. 여성 인체의 세부를 거의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환원시키면서, 그의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스타킹, 손톱, 허벅지, 입술을 미학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그의 욕망을 기하학적 추상의 미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욕망을 자극하는 세부의 강도가 작가의 미학적 통제력을 넘어설 때면, 여인의 육체는 무정형적인 유체 amorphous fluid의 모습을 띤다. 작가가 여체 탐구에서 흔히 모델의 머리를 제거하는 것도 그의 리비도의 강도와 깊은 관련을 맺는 듯하다. 이성과 지성을 상징하는 얼굴을 절단하고, 욕망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신체기관인 머리를 어둠 속에 가둬버린 것은 그의 페티시즘에 구속 없이 몰입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일 것이다.
사실 어둠과 그림자는 랄프 깁슨에게 있어서 그의 강력하고도 간결한 사진적 구성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왜냐하면 “프레임이 압박할 때까지, 북의 가죽처럼 탄탄해질 때까지” 불필요한 현실을 빼버리는 작가에게 있어서, 즉 현실의 최소한으로 사진을 구성하려는 작가에게 있어서, 어둠과 그림자는 “원치 않는 현실의 많은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보기에 그림자는 불필요한 현실을 뺄 뿐만 아니라, 형상을 창조한다. “그림자는 단지 빛의 변형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림자는 형태를 두드러지게 하며, 형상이 된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그림자와 어둠은 그의 사진예술에서 빛보다 오히려 중요하다. 따라서「명암대조 Chiaroscuro」(1990)는 그의 전 사진작품을 관류하는 특징이다. 깊은 그림자는 작가의 비근한 일상의 사물을 의미심장한 대상으로 탈바꿈시키며, 어둠은 그의 일상적 현실을 초현실주의적 몽환의 세계로, 그리고 여성의 평범한 육체를 강력한 페티시즘의 대상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랄프 깁슨에게 있어서 사진은 빛의 예술이 아니라, 어둠의 예술인 셈이다.

어둠과 깊은 그림자에 대한 집착,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피사체를 그 정체성이 애매모호할 때까지, 그러나 기하학적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압박하는 그의 경향은 그의 칼라작업에서도 계속된다. 랄프 깁슨은 칼라사진에서도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세부의 구획은, 흑백사진처럼 작가의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에 의존한다. 강렬한 흑백의 대립이 화려한 색상의 대비로 바뀌었을 뿐,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일상의 현실을 낯선 새로움으로 바꾸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칼라사진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의 흑백사진 삼부작에서 보여줬던 사진적 특성들은 칼라사진에서도 그렇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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