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대림미술관

 

 

 

 

 

 

아마도 요것이 그 즉석 사진기인가 봅니다

이쁜 아가씨들이 연방 찍히고 있더군요

저도 찍어보고 싶었으나 엄두가 ㅎ;;

 

 

 


 

 

 

 

 


 

 

 

앞으로 사진으로 돈도 벌어보고 싶은 저로선

와 ! 하고 감탄사만이..

 

 

 

 

 

 

다량의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있는

오노요코???

 

 

 

 


 

 

 

 

 


 

 

압도적으로 많았던 여성 관람객들

이유는 아시겠죠?^^

 

이유는 바로

 

 

 

 

 

요것!!

 

여성분들 눈에 확 들어오는

  저 이름 샤네네에에엘~

 

많은 여성들이

검지를 세워 저 귀걸이를 가리키며

남자친구에게 어쩌구 저쩌구..

남자친구는 아마 식은땀 나겠죠 ㅋ

 

 

 

 

 

 

진짜루 이 말들을 다 했을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샤악~스치고 갑니다

 

 

 


 

 



 



 



 



 



 

 


 

 

   정말 많은 사진들이...

살짝 맛만 보시구요

다른 좋은사진들 보시려면

  5천원만 투자하시면 된다구요^^

 

 

 

 


 

 

 

 


 

 

독특한 시선도 느낄수있습니다

 

아직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도 무지 많았고 연인들

패션센쓰만빵인 모델같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더군요

차근차근 볼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다녀본 전시회중에

전시장 크기에 비해 관람객수가 이렇게 많았던 적도

별로 없었던것 같네요

그것도 여성분들이 거의 90%를 차지하는 경우는 말이죠^^;

 

대림미술관 검색하시면

영화상영 시간표도 있으니

사진도 보시고 영화도 보시고

좋은 관람 되시길 바랄께요^^

 참고로 주중에 가시면 차근차근 볼수 있으실듯 합니다

 

 

 

 

위풍당당 칼 라거펠트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다카다 겐조와 함께 ‘두 사람의 K’로 불린다. 아버지는 스칸디나비아인이며 할아버지는 은행 상인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출생과 관련하여 라거펠트 본인은 1938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나, 그의 유년시절 기록에는 1933년 생으로 나타나있다.  
14세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였다. 1955년 발맹점, 1959년 장 파투점 등 오트쿠튀르에서 일을 한 뒤 1964년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하였다.
1964년부터 1983년까지 클로에의 주임 디자이너였으며, 그후 샤넬의 책임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후 다시 3년 동안 클로에에 관여한 후 1989년 마틴 싯봉에게 넘겨주었다. 1975년 라거펠트 향수 회사를 설립하였고, 1975년 그룹 모드 크리에이션(G.M.C:Group Mode Creation)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5년 미국 시장을 겨냥한 스포츠웨어 컬렉션을 전개하였으며 마리오 발렌티노와 찰스 주르당에 장갑과 구두 디자인을 제공, 촐레와 펜디의 디자인도 담당하였다.

그는 현대적인 감각의 이지적이고 섹시한 여성스러움을 추구하는데, 흐르는 듯한 율동을 표현한 아름다움으로 정평이 나 있다.
평범한 코디에서 벗어나 위트있는 새로운 코디법으로, 정돈된 클래식 스타일에서 약간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강조한 클래시즘을 표현한다.

1999년 현재 샤넬의 책임 디자이너로서 샤넬 라인에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디자인 감각을 혼합하여 샤넬의 정신을 살려나가고 있다.

그는 샤넬뿐만 아니라 촐레, 자신의 브랜드인 라거펠트, 펜디 등 여러 상표의 옷을 디자인하는데 이처럼 자신의 재능을 여러 업체에 제공하여 디자인 및 판매, 제조가 분리해서 발달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출처] 카를 라거펠트 | 네이버 백과사전

Posted by stormwatch :








가나아트 강좌 1주: 유형학적 사진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 진동선    http://howphoto.net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 루프>를 중심으로

 

1. 유형학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혹은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구성 요소들의 형과 타입의 집합이다. 그것은 또한 그룹핑으로서 식물학적, 도감적 종, 속, 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사이에는 차이를 드러내는 혹은 유사성을 드러내는 경계와 변별력이 있다. 유형학은 특별한 시리즈로서 타입(type)이고 모듈(module)다. 그러나 스타일(style)은 부차적인 것이다.

 

2. 유형학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유형학적 요소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를 구축하는(social construct) 것이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업, 건축, 의상, 장식, 초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 잠재된 이데올로기로서 유형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

 

3. 사진의 유형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진에서는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앗제, 잔더, 베허에서 보여지는 유형성은 기술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가령 베허부부가 1957년에 시작한 오늘의 유형학의 모습은 기술적 구조였다. 그래서 그들의 첫 번째 전시명이 였다.

 

4. 베허 스쿨의 유형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숨겨진 이데올로기(concealed ideology on industry's part)"를 찾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유형성은 드러난 어떤 꼴과 타입을 말하는데 있지 않았다. 역사, 문명, 문화, 사회의 숨겨진 정보, 숨겨진 기능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들이 바로 숨겨진 사회적 기능 혹은 역사적 구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유형학적 사진은 정보(information)로서 특징이 강했다.

 

5. 유형학적 요소는 도구인가? 장치인가?

 

두 가지를 아우른다고 본다. 도구로서 대형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시각적 장치로서 형태(shape), 크기(size), 장소(location), 물질(materials), 날자(date), 다이얼로그(dialog)를 들 수 있다. 도구는 유형적 구조를 기술하기 위한 기능적(function) 측면이며, 장치는 시각적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것이다.

 

6.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는 배허 스쿨에서 좀 특이한 작가이다. 1978-1981년까지 에센에서 먼저 오토 슈타이너트에서 사진을 배웠고, 그리고 나서 1981-1987년에 뒤셀도르프 베허 스쿨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토마스 루프나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과 다를 뿐 아니라 유형학적 요소들도 다르다. 구르스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이 있다.

2. 일상의 심미주의적(everyday aesthetics) 경향이 있다.

3. 자연, 소도시, 공장, 증권거래소, 관중 등 여러 가지 소재를 취하고 있다.

4. 자연과 기술, 인간과 기술의 <관계(relationship)>을 강조한다.

5. 강력한 추성성과 기하학적 요소, "all over" 회화적 양식을 선호한다.

6. 현대사회와 문화에서 특히 <소비사회(consumer world)>에 관심을 둔다.

7. 다른 베허 스쿨 작가들보다 사회적 리얼리티에 천착한 편이다.

 

7.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우선 먼저 지각(perception)과 소통(communic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에서 도시로 그리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적인 시점을 견지한다. 그래서 그의 유형학적 요소는 구체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반사(reflection)/굴절(refraction)을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하학적 수평과 수직적 요소들이 그의 사진에 많은 것, 시점(point of view), 앵글(angle)이 다양한 것도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의 사진이 최근 회화적 모습으로 더 나아가고 있는 것도 그의 시선과 형식이 이제 내용 구조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거의 미세구조(micro structure)를 찾아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진도 다른 베허 스쿨 작가처럼 전혀 인간의 웃음도, 감정도, 개성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현실을 그린 그림의 사진(a picture of a picture of reality)"을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8.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스트루스는 1976-80년까지 베허 밑에서 공부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보다는 먼저이다. 그러나 그도 베허에 앞서 같은 대학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에게서 페인팅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처음부터 회화적 요소들이 컸다. 그의 초기 포트레이트는 리히터의 <48 Portrait 1971-72>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허의 영향에 따라 곧 거리사진, 건축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앗제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는 퍼스펙티브를 강조했으며, 특히 빌딩들간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했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그의 대표작 "뮤지엄 사진(Museum Photographs)"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사와 인간, 건축과 사회, 공간과 공간, 장소와 장소 등 이중적인 역사적, 사회적 네트워크 및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말하는데 전력했다.

 

9.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아마도 <뮤지엄 사진>에 그것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다분히 이중적인 모습을 띈다.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는데, 가령 뮤지엄 사진에서 사람이 관찰되고, 그림이 관찰되는 이중의 <관찰>, 그림의 응시와 관람객의 응시가 드러나는 <응시>, 그림 속의 사람과 그림 앞의 사람의 <존재, 부재>,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로서 <역사적 시간성>,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통로로서 <소통> 등 그의 사진이 유형학적 요소는 문화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들이 예술과 뮤지엄, 그림과 관객, 사진과 그림 등 두 개의 모순되고 충돌되는 세계에서 보여지는 두 개의 유형적 타입과 꼴을 통해 나타나는데 예컨대 그것들은 그림 속의 옷과 관객의 옷에서, 그림 속의 현실과 전시장에서의 현실을 유형적으로 대비시킨다. 즉 페인팅 속의(in the painting) 공간과 페인팅 앞의(in front of the painting) 공간의 유형성을 찾는다.

 

10. 토마스 루프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토마스 루프는 1977년에 베허 스쿨에 들어갔다. 스트루스와 함께 작업을 했던 배허 스쿨의 적자이다. 그 역시 인물, 건축, 풍경 등 다양하게 작업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포트레이트>야말로 베허 스쿨의 유형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다. 그의 포트레이트는 198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에는 나이, 계층, 인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진의 깊이보다는 표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극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인물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진과 최근 밤 사진에서는 그 특징들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포트레이트 사진이 너무 뛰어났는지 최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에 비해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것 같다.

 

11. 토마스 루프의 유형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포트레이트 경우 잔더의 백과사전식 포트레이트를 확장한 개념이다. 그의 인물 사진도 메마르고, 감정이 없으며, 개성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배허스쿨의 유형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감성을 배제하는 방식이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건축 사진은 유형적 요소를 지키고 있으나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적인 모습, 구성적 요소에 천착하는 듯 보인다. 마치 배허 스쿨의 냄새를 지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매특허인 포트레이트 사진에서만큼은 유형성은 가히 교과서적이다.
















Posted by stormwatch :







사진사 150년-1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1989년 사진예술이 세상에 공표된지 꼭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에 창간호를 내게 된 ‘사진예술’ 에서는 창간특집으로 세계 사진사 150년을 요약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기획으로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를 준비한 본지에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사진사상 한 전기를 이룬 사건들과 그 뒷 이야기를 연재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특집에는 프랑스의 통신사 시그마에서 기사와 사진제공을 해 주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니엡스박물관 앞에 있는 니엡스동상
사진의 발명가인 니엡스의 초상(왼쪽)  사진을 공동발명한 루이스 다게르의 초상(오른쪽)
1839년 1월 7일 파리에서는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인 프랑스와 아라고에 의해 굉장한 뉴스가 발표되었다. 바로 사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세계는 사진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갖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프랑스 문화성이 개최하는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관심을 끈다. 이미 일반적으로 루이스 다게르에 의해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믿어온 터에 새삼스럽게 던져지는 이 물음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은 누구에 의해 발명되었는가? 프랑스 통신사인 시그마(SYGMA)가 제공하는 대답은 이러하다. 사진의 탄생을 알리는 뉴스가 발표된 1839년 8월 7일 역시 아라고에 의해 요셉니세포르 니엡스가 만들고 루이스 다게르가 개량한 발명품의 세부자료들이 발표되었다. 이와함께 프랑스 정부는 제작자로부터 그 발명품을 구입하고 즉시 전인류에게 그 발명품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는 사실 1839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에 이미 니엡스는 그의 동생 클라우드와 함께 사진술로 이루는 최초의 결과를 얻어냈다. 감광판에 새겨진 사진이 암실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불안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클라우드는 그의 연구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니엡스는 연구를 계속해 1816년 5월 28일에 기적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진을 만든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니엡스 가족이 살던 아름다운 고장인 Domaine De Gras에서 일어났다. 니엡스는 그의 암실 카메라를 창가에 놓아두었는데 몇시간 동안 햇빛이 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질산으로 만든 염화은 인화지에 그의 첫번째 이미지를 고정시켰는데 그 이미지가 최초의 네가티브였다.
그리고 6년 후인 1822년에 마침내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 첫 번째 포지티브였다. 화학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엡스는 어려운 분야를 탐구하였고 유태 아스팔트 물질을 이용, 그 연구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유태 아스팔트는 보통 라벤더유와 오일 속에 잘 녹지만 햇빛을 받은 후에는 녹지 않는다. 따라서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이 아스팔트를 고르게 칠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상 첫사진을 만들어냈고 여기에 ‘Set Table' 이란 제목을 붙였다.
1822년 니엡스가 아스팔트의 용해로 만든 사진 ‘A Set Table'
1816년 니엡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사진
한편 니엡스는 당시 같은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던 루이스 다게르와 오랫동안 서신교환을 하다가 그와 연계하여 공동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니엡스는 그의 발명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다게르와 공동연구를 했지만 다게르는 사업에 대한 직감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곧 그가 유일한 사진의 창시자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니엡스는 이미 사진술의 공식적인 탄생이 이루어지기 6년전에 죽었고 따라서 다게르의 이름만이 언급되어졌던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판매되는 최초의 사진기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바로 다게레오 타입(Daguerreo Type)이었다. 불운한 천재 니세포르 니엡스는 1765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이 진정한 천재는 생전에 그가 가치를 두고 연구했던 업적을 모두 잃어버렸을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그의 명예를 회복받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도 니엡스에게는 그의 명예를 위해 동상 하나 설립하는 것조차 거절했었다. 프랑스에는 다게르의 이름과 관련된 거리가 수없이 많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기에 차있지만 니엡스라는 이름은 쓸쓸하게 남아있다.
사실 니엡스는 사진술 이전에도 여러 가지를 발명해낸 발명가였다. 즉 나폴레옹의 적에 의한 봉쇄선으로 프랑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설탕이 부족하였었다, 그때 니엡스는 으깬 Zucchini로부터 설탕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사탕무우에서 뽑아낸 설탕을 더 선호했다. 또 정부가 말리 근해의 물을 끌어올리려 할 때 그는 그의 ‘내연식 엔진’을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모터가 대신 선택되었다. 법정에 그가 발명자로서의 우선권을 제출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발명한 엔진은 여러해 뒤에 자동차산업이 채택하여 사용한 연료분사장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나다르가 사용했던 기계들
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카메라 종류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걸작품인 사진술의 발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이스 다게르의 책략에 넘어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루이스 다게르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색가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 여자들 때문에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다게르는 은판 위에 수은이 가득든 숟가락을 놓아 둔 것을 잊고 자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깜짝 놀랐다. 여성이 현상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이 결과 사람들은 한 시간이 아니라 단지 20분만에 사진을 현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법이 보강되었기 때문에 다게르는 연약한 이시도르 니엡스(니엡스의 아들)에게 계약에 있어 그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니엡스가 사후에 당한 또한번의 패배였다. 파리 근교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진박물관을 설립한 Jean Fage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고 기술이고 예술인 사진을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가장 먼저 기록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한 몇몇 천재적인 인물중 한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중 하나인 혁명의 창시자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 옛적에 한 천재가 살았었다. 150년 그 이전에.
(사진 기사제공/ Sygma, 번역/강용석)

니엡스의 최초의 카메라. 물론 세계 최초의 사진 장비이다.
프랑스 사진박물관의 관장이며 큐레이터인 Jean Fage와 Andre' Fage. 1855년부터 1895년까지의 스튜디오 장비들(시계방향으로)

1889년 Ducos De Hauron에 의해 쓰였던 Melanochromsocope(왼쪽사진)
1900년의 것으로 1/5000초에 작동하는 ‘Sigriste' (왼쪽)와 Star Streo cham 1022.(오른쪽 사진)
스그마통신이 제공한 앞에서의 글은 150년전 사진술발명 초기 니엡스와 다게르간의 미묘한 갈등에서 야기된 실상을 오늘날 이 시점에서 재검토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보려는 배려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당시 약화된 니엡스의 공적을 다시 높이려는 운동으로 간주할수 있다. 그래서 지난날 이미 발표된 사진사중에서 사진술 발명초기의 사실의 일부를 여기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려 한다. 다게르의 사진술에 대한 연구실험은 1831년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실마리를 잡는 단계로 발전했다. 즉 니엡스가 헤리오 그래피의 개량에 심혈을 쏟고 있을 때 다게르는 한발 앞서고 있었다. 다게르의 초창기 사진술에 대한 연구는 니엡스와 동일한 은을 바른 동판과 영상을 고정시키는 옥도를 사용한 실험이었다. 1831년에 그는 은맥기한 동판에 옥도의 증기를 쪼여서 만든 옥화은이 높은 감광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광이 되어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날 정도의 강한 감광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게르는 감광성을 높이는데 그 연구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옥화은판을 가지고 갖가지 연구를 시도해 보고 또한 노출을 여러 가지로 조정해 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요컨대 니엡스나 다게르는 ‘현상’이라는 개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광선을 쪼여서 그대로 화상을 나타나게 하는 연구에다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적이 일어났다. 다게르는 여느때와 같이 옥화은판을 검은상자속에 넣고 노광을 시켜봤지만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노광을 시킨 은판을 연마해서 한번 더 사용할 목적으로 그날은 그것을 그대로 화학약품을 보관 하는 장속에 넣어두었다. 몇일 후에 그판을 꺼내어보니 넣어 둘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옥화은판위에 선명한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다게르는 깜짝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지만 왜 화상이 나타났는가에 대한 원인은 몰랐다. 또 다게르는 노광을 시킨 옥화은판을 약품이 들어있는 장속에 넣고 수일후에 꺼내보니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분명히 장속의 약품에 의한 작용이라고 생각한 다게르는 매일같이 약품을 조사해 봤지만 같은 결과로 영상이 나타났다. 마지막 시험으로 수은이 든 병만을 남겨놓고 다른 약품은 모두 제거해 봐도 결과는 동일했다. 그리고 장속에서 수은이 든 병을 꺼내고 옥화은판을 넣어두었는데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게르는 영상을 나타나게 하는 에너지는 수은의 증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어 잠상이 현상에 의해 나타난다는 현대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잠상에서 현상처리에 의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프로세스의 발견은 니엡스가 고민하던 장시간노출의 결점을 해결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래 수시간이 걸렸던 노출은 20분 내지 30분정도로 단축되었으며 옥화은 대신에 추화은을 사용하므로 해서 노출은 1분에서 5분정도로 단축되었다. 또한 다게르는 이 프로세스가 최종적으로 영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염의 포화용액으로 영상을 보호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이것은 지금의 정착방법으로 다게르는 현상과 정착이라는 두가지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1925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라이카 N228 24×36mm형이다.(왼쪽) 마이크로 스파이카메라. 크기는 4.5×6mm(오른쪽)
니엡스가 역사상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낸 Dumaine De Gras의 자택. 문제의 2층 창문이 열려져 있다.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을 때 니세포르 니엡스는 벌써 4년전에 사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니세포르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시돌에게 인계되었기 때문에 10년간의 기한부계약은 파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게르는 아들 이시돌을 감언이설로 계약의 일부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진술의 발명은 디세포르와 다게르의 약속으로 두 사람의 공동연구의 성과이기 때문에 완성의 공로는 당연히 두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일방적으로 다게레오 타입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천문대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라고박사는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의의와 그 성능을 인정하고 1839년 1월7일 과학 학사원에서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아라고박사는 프랑스정부에게 사진술 발명의 권리를 매수하도록 권장했다.
1월 14일에는 다게르와 이시돌 니엡스의 두사람과 당시의 내무장관 듀카딜과의 사이에 가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15일에는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은 이 발명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댓가로 다게르는 종신연금 6천프랑, 니엡스의 아들에게는 동일하게 4천프랑이 지급되게 하고 두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망인이 각기 그 반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하는 내용의 법안이 기초되어 의회에 회부되었다. 이 법안은 프랑스 하원을 7월 3일 통과하고 7월30일에는 상원을 통과했다. 특히 아라고박사는 7월3일 하원에서의 강연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특질과 효용성을 역설했다. 사진의 장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정확한 기록성, 신속성 그리고 진실성이라는 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용성을 예건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출처 - 사진예술













Posted by stormwatch :













디즈니랜드는 그 자신은 상상의 것으로 들어나면서 우리로 하여금 디즈니랜드 바깥의 것들이

실재인것으로 믿도록한다 하지만 실상 로스엔젤레스나 그밖의 마국땅 어디든 이제는 더이상

실재가 아니라 일련의 초실재 혹은 모조품이 되어있다 이제 실재에대한 그릇된 재현이

문제가 아니라 실재가 더이상 실재가 아니게 된것을 감추는것이 문제가 된것이다

                                                  

                                                                                -장 보드리야르-











Posted by stormwatch :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

 

 

어떤 양식으로 어떤 의도에 의해 작업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물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는 지평을

옮기는것 역시 이런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하는 한 방법일수 있을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세상을 끝없는 거울로 이루어진 방으로

신디셔먼의 그것처럼 우리가 아는 모든것들이 이미지인 그런곳으로 받아들인다

진짜의 경험이 있다고 믿을수있는, 개별 예술가의 신성한 시각이 있다고,

천재와 독창성이 있다고,믿을수있는 근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것은 지상의 모든사상은

다 소모되었고 현재의 우리는 줄의 끝에 서있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이미 본것의 포로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불안케하고 혼란하게하며

급진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는데 이미지에 대한 무차별의 생산자라 할수있는

사진이야말로  이런 현상에 큰 부분을 기여했다는 사실 역시 쉽게 알수있다

 

                                             -앤디 그룬버그 [사진과모더니즘]중에서-














Posted by stormwatch :






낙타가 우물에 빠진 날


 







글사진 현린



0 어느 날 새끼 낙타가 어미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발은 왜 이렇게 뭉퉁해요?” “그야, 사막의 모래 위를 걷기 편하라고 그런 거지.” “그럼, 우리 등에 혹은 왜 있는 거죠?” “그건,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려면 양분을 저장할 곳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우리 눈썹은 왜 또 이렇게 길죠?” “그건, 사막의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고.” “그렇구나. 그런데 엄마, 우리 지금 동물원에서 뭐하는 거죠?” 그러게. ‘뒷모습’(Vues de dos, 1981)이라는 책에서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일종의 ‘아나토피즘’(anatopisme)이다. 특정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대상이 그 시간에 등장하는 것을 두고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e)이라 하듯, 특정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대상이 그 공간에 등장하는 것은 ‘아나토피즘’이라는 것.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들로서 수집되어 한 곳에 모인 그 대상들의 고향을 고려하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제국의 맥락에서 볼 때 동물원은 자본과 권력의 상징으로서, 박물관과 백화점, 갤러리와 쇼핑몰과 함께 제국주의 시대 제국의 수도라는 지극히 동일한 시공간에서 탄생한다. “아놔, 므슈!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고!” 쩝, 이 녀석의 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투르니에는 ‘황금 구슬’(La Goutte d''''or, 1985)이라는 소설을 썼나 보다. 모든 것은 사하라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되었으니, 그날은 낙타가 우물에 빠진 날이기도 했다.

1 오아시스 마을 타벨발라의 목동 이드리스는 그날 아침도 염소와 양떼를 몰고 나왔다. 곧 따분해졌고 뭔가 흥미 있는 것이 없을까 해서 반(半)유목 부족인 샴바족의 외눈 낙타지기 이브라힘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브라힘을 찾던 중에 사륜구동 랜드로버를 타고 온 검은색 안경을 쓴 금발머리 여자와 마주친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금발머리는 뽀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고, 카키색 반팔 블라우스의 목둘레는 깊게 파여 있었으며, 바지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짧았다. 그녀의 첫마디는, “어이 꼬마! 너무 움직이지 마. 널 찍을 거야.” 차 안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무례함을 지적했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로 이드리스와 양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댔다. 이드리스가 사진을 달라고 하자, 그녀는 파리에 도착하면 보내주겠다고 하고선 돌아갔다. “이제 내 사진도 생기겠군.” 소년은 타벨발라에서 제 사진을 소유한 두 번째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볼거리가 정말 많은 날인 모양. 랜드로버를 보내고 나서 찾아낸 이브라힘은 곧 낙타 한 마리가 새끼를 낳을 거라며 따라 오라 한다. 그러나 출산 중일 낙타가 있는 우물가로 갔더니, 갓 낳은 새끼는 보이는데 어미가 보이질 않는다. 새끼를 낳고서 목을 축이려다 20미터 깊이의 우물에 빠진 것. 설상가상 다리까지 부러졌다. 농경 부족민들의 낙타를 돌봐주고 그 젖 전부와 새끼의 절반을 챙기는 부족의 일원답게 이브라힘의 계산은 빨랐다. 그는 우물 바닥에서 주저 없이 낙타의 도살을 시작했고, 해체된 고기를 이드리스에게 건네며 우물 밖에 쌓도록 했다. 마침내 작업을 끝낸 이브라힘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우물 가로대 위로 올라섰을 때, 긴장과 피로와 한낮의 태양에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는 마치 사자처럼 부르짖으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지끈, 가로대가 부러졌다. 이브라힘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우지끈, 이번엔 우물 내벽을 지탱하던 가로대가 부러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진동했고, 우물은 이브라힘과 함께 완전히 매장되었다.

‘사악한 시선’의 저주가 벌써 시작된 것일까? 타벨발라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은 사진을 찍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사악한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드리스도 이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 초래한 위험 앞에 떨고 있었다. 사진기에 노출되자마자, 처음엔 낙타가, 다음엔 이브라힘이 우물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낙타 조각에 열심이고, 유목민 이브라힘을 동경하는 이드리스의 바깥세상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사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참석한 결혼식에서 보게 된 놀이꾼들의 공연은 이드리스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질렀다. 공연이 절정에 이를 무렵 빨간 너울을 두르고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고 등장한 흑인 여자 제트 조베이다. 이 검은 무희는 처음엔 자신에게 마련된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더니, 점차 주변의 모든 음악과 춤을 모아 자신 안에 응축시키려는 듯 서서히 원의 중심으로 다가가며 움직임의 폭을 줄였다. 마침내 그녀가 조각상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직 그녀의 배만이 장신구들을 흔들며 낭랑한 소리를 냈다. 장신구들 대부분은 하늘이나 땅, 사막의 동물이나 바다의 물고기를 본뜬 것이었는데, 가죽끈에 매달린 채 홀로 빙글빙글 도는 황금구슬만은 예외였다. 삼라만상을 품은 듯 간결한 완성미를 갖춘 그 구슬은 이미지 없는 세계의 발현체로서, 모든 음악과 춤을 응축시킨 순수기호이자 절대형상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드리스는 제트 조베이다를 다시 보기 위해 놀이꾼들의 천막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대신 모래 속에서 그녀의 황금구슬을 주워 목에 걸었다. 제트 조베이다와 함께 황금구슬은 자신의 사진을 찍은 금발머리 여자에 대한 해독제, ‘사악한 시선’에 맞서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기다리던 사진은 결국 오지 않았다. 파리에서 우편물 하나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봉투에서 나온 것은 이드리스가 아니라 이빨을 드러낸 당나귀 사진이었다. 이드리스는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사진을 받으러 파리로 가야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타서 돌아온 ‘오아시스의 영웅’이자, 이드리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기도 한, 무엇보다도 마을에 한 장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진의 주인공인 삼촌에 따르면, 이드리스는 반드시 사진을 찾아야 했다. 전쟁 중 어느 종군기자가 찍어서 인화해준 그 사진 속에는 삼촌을 포함해 세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그 사진을 받지 못한 나머지 두 사람은 다음 전투에서 전사했다. 따라서 삼촌에 따르면, 문제는 사진 찍히고 말고가 아니라 찍힌 사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다. “자기 사진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 하는 거야. 사진을 내돌리면 안 돼!” 이드리스는 북쪽으로 떠나야 했다. 사진만이 아니라, 일자리, 돈, 금발여자, 이 모두가 속한 세계, 타벨발라와는 정반대인 그 세계로 떠나야 했다.





Namo, 2009.



2 자신의 사진을 찾아 떠난 길에서 이드리스가 처음 사진을 발견한 곳은 베니 아베스의 사하라 박물관. 그곳에는 자신과 자신들 부족의 일상이 박제되어 유리상자 안에 갇힌 채 전시되고 있었다. 함께 전시된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름을 대라면 댈 수 있을 만큼 낯익은 사람들이었으니, 바깥세상에서 이드리스는 살아 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였다. 베샤르에서는 ‘사진예술가 무스타파’의 스튜디오에 잠깐 머무는데, 그에 따르면 사하라에 직접 가서 찍어오는 컬러사진은 아마추어들의 관광사진일 뿐, 자고로 프로의 예술사진이란, ‘페르시아 시장에서’ 같은 음악과 ‘이상화된 사하라’ 풍경화를 배경으로 ‘영감’을 받고 ‘정화’된 채 찍은 흑백사진이다. 항구도시 오링에서 여권을 만들기 위해 즉석사진부스에서 생애 두 번째로 찍은 사진에는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이 찍혀 있었다. 지중해를 건너 바르세유에 도착해서는 홍등가에서 또 다른 금발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를 만지기 위해 황금구슬이라는 비싼 화대를 치르고 확인한 것은 그 금발이 가짜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열차여행 후에 금발여자처럼 눈부시게 화려한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파리는 화대 없는 빈털터리에게는 결코 만질 수 없고 볼 수만 있는 도시, 그래서 손이 아니라 오직 눈을 위한 도시, 또 하나의 거대한 유리상자였다. 이드리스 손의 몫은 따로 있었다. 눈 혼자서는 눈 자체는커녕 볼거리도 만들 수 없는 법, 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값싼 노동자의 거친 손. 이드리스도 다른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파리 18구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그리고 “늘 저 자신의 배설물에 묻혀 질식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쓰레기를 빨리빨리 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파리에 널린 기름진 종이와 개똥을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하수시설을 청소하는 미화원이 되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백화점의 도시인 파리의 눈이 방금 사막에서 도착한 이 신선하게 살아있는 화석을 놓칠 리 없었다. 이드리스는 도로에서 비질을 하다가 주변에서 ‘하수구에서 건진 향기로운 붉은 장미’를 소재로 영화를 찍던 감독 눈에 띄어 즉석에서 미화원으로 캐스팅된다. 작업복을 사러 의류매장에 갔다가는 윈도우 디스플레이어의 눈에 띄어 말 그대로 몸 자체가 캐스팅되어, 소년의 마네킹만을 수집하는 어느 별난 사진가에 따르면 더 들여다 볼 내면 따위 없다는 마네킹의 원본이 된다. 이곳에서도 그는 찍히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돈을 받았다는 것. 그러던 중 마침내 금발여자를 찾았다. 한 카페에서 만화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 자신과 금발여자의 만남이 재현되고 있었다. 만화는 두 이방인이 이드리스를 떠난 후 나눈 얘기까지 들려주었다. “솔직히 말해봐. 당신은 쟤한테 사진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난 말이야, 당신이 내 사진을 숱하게 찍었지만 한 번도 사진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 그녀는 프로모델이었고, 그러니 자신의 사진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남자가 찍은 사진은 그녀를 위한 사진이 아니라 그 사진에 돈을 지불하는 고객들을 위한 것이므로. 굳이 사하라의 모래언덕이나 종려나무 숲까지 찾아갔던 것도, 프랑스인이나 아랍인이나 모두 이국정취 속 금발여자의 사진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좋아하겠지. 사진에 찍힌 금발머리 노예를 빼고는 말이야.” 그녀 역시 이드리스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아무데나 돌아다녀.” 그리고 이드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두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이드리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달아나자고 한다. 하지만 이드리스를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는 기겁을 한다. 결국 괴한으로 몰려 경찰에 체포된 이드리스는 또 찍혔다. 이번엔 범죄자 사진.

“아놔, 므슈! 왜 자꾸 인간들 얘기만 해? 대체 낙타 얘기는 언제 하냐고!” 아, 아직 대답이 안 되었나? 그렇다면 아주 쉬운 예 하나. 그러니깐, 이드리스를 처음 영화에 캐스팅한 감독은 광고야말로 영화예술의 극치라고 아는 CF감독이기도 했는데, ‘종려나무 숲’이라는 음료수가 주인공이고 사막이 배경인 광고에 이드리스를 낙타지기로 출연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이드리스와 함께 연기한 서커스단에서 헐값에 사온 늙은 숫낙타는 촬영이 끝난 후 쓸모없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브라힘처럼 계산에 빠른 ‘광고예술가’는 이드리스에게 낙타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아나토피즘의 절정이 펼쳐지니, 사막에서 올라 온 한 소년이 낙타를 몰고서 에펠탑 아래와 센 강변의 아스팔트 위를 걷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도살장에서 소와 양의 가죽을 벗기던 사람들은 낙타의 도살을 거부한다. 그래서 또 헤매다가 발견한 것이 동물원이었다. 마침 암낙타 한 마리가 다가왔고, 마치 두 낙타는 영화 포스터 속의 연인들처럼 서로를 애무했다. 그래서 이드리스는 도살장 대신 동물원에 늙은 숫낙타를 두고 왔다. 이봐, 어린 낙타. 혹시 아빠 나이가 많지 않아?

3 존 버거(John Berger)의 ‘본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 1980)에 실린 글들 중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와 ‘프랜시스 베이컨과 월트 디즈니’에 따르면, 동물들을 구경거리로서 동물원 우리에 가두면서, 인간들은 동시에 도시 자체를 동물원으로 만들고 자신들마저 구경거리로 만든다. 그 거대한 유리상자 안을 채운 다종다양한 ‘발견된 오브제’들과 섞여 있는 인간은, 새끼 낙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노예의 삶을 살던 낙타도, 낙타를 도살하던 사자도, 이제는 디즈니 만화처럼 반복해서 부활하고, 차라투스트라가 기대했던 아이는 초록색 거인과 당나귀 장난감을 손에 쥐고서 그들의 너스레에 까르르 넘어갈 뿐이다. 또는 기껏해야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원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불행한 원숭이”라고 냉소할 뿐이다. 이드리스는 달랐다. 비록 금발여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만이라도 ‘사악한 시선’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하여 늙은 이주노동자 선배를 통해 만난 아랍 서예가에게서 이미지를 듣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자동차들을 잠재울 지하 주차장 건설을 위한 굴착 공사를 하러 방돔 광장에 갔을 때, 이드리스는 보석가게에 진열된 황금구슬과 재회한다. 구슬은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었고, 이드리스는 망치를 들고 있었다. 공기해머의 몸체를 자신의 배에 밀착시키고, 도시의 검은 가죽 아래로 해머의 날을 박아 넣은 이드리스는 해머의 전원을 올렸다. 공기해머의 진동에 몸을 싣고 이드리스가 제트 조베이다처럼 춤을 추는 동안, 아스팔트와 함께 유리 역시 깨져 나갔다.<월간사진 2011년 1월호>



Varanasi, 2009
.














Posted by stormwatch :






포토저널리즘 강의 여섯번째


 


카메라 시점에 따른 효과
포토저널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메시지를 정확하게 혹은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카메라 앵글이라고 부르는 시점을 잘 활용해야 한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정면이냐 후면이냐, 아래냐 위냐 등의 위치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카메라 시점과 관련된 사항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앵글이라고 부르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으며, 촬영거리에 따라서도 그 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앵글을 가장 사진적으로 표현하면 프레이밍(framing)이라고 하는데, 이 프레이밍은 사진을 구성하는데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시각적으로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외시키는 마이너스의 과정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반대로 필요한 부분을 집어넣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필요한 부분 이외의 다른 부분을 빼내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호부터 다루게 될 프레이밍의 첫 시간으로 우선 카메라 시점에 따른 효과의 문제를 사례들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소개하는 모든 사진들은 미국 일간지에 게재되었던 사진으로 퀄리티(quality)에 있어서 대동소이하지만 비교를 통해 좀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일까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례 1. 정면 혹은 후면에서 촬영할 것인가?


 

취재대상은 지역 사회의 지도자들과 고위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 현장이다. 행사장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에 걸맞게 각 채널들을 따로 보여주는 수많은 텔레비전 세트들을 전시해 두었다. 이럴 때 우선 우리가 머리 속에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은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 현장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과 행사 장면을 동시에 촬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사진에서 키스 맥밀란(Keith McMillin) 기자는 각기 다른 채널들을 보여주고 있는 텔레비전 스크린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팬 포커스로 처리하기 어려운 실내 촬영 때문에 정면이 다소 흐릿하게 나오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독자들은 이 사진을 통해 이 행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사진은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오른쪽에 허용함으로써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수렴점에서 시선이 사진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단순히 텔레비전 세트들을 나열함으로써 행사장이라기보다는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주고 있다.
브렌트 심코스키(D. Brent Simcosky)가 촬영한 두 번째 사진은 텔레비전의 뒷 모습이 보이지만 많은 텔레비전 세트들이 각기 다른 명판을 붙이고 있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고, 다소 높은 위치에서 촬영해 전자제품 상점 같은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점은 케이블 시스템을 켜고 설명을 하고 있는 연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들을 보여준다.


 


 



 

두 사진 모두 포토저널리즘에서 말하는 전경, 미디엄샷, 클로즈업사진들 가운데 전경(overall) 사진에 해당된다. 케네스 코브르(Kenneth Kobre)가 ‘포토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에서 설명한 것처럼 전경 사진은 독자들이 사건이나 현장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촬영된 사진이다. 따라서 다소 높은 앵글에서 전체를 아우름으로써 행사에 참가한 인원수까지도 파악할 수 있도록 행사 규모도 사진에서 보여야 한다. 따라서 두 사진을 비교할 때 전경 사진으로는 두 번째 사진이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판단은 주관적일 수 있지만, 항상 포토저널리스트는 기본 룰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① 시각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케네스 코브르는 포토저널리스트는 현장에서 전경, 미디엄샷, 클로즈업의 세 가지 접근을 권장한다. 여기서 전경 사진은 현장감과 사건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제시하기 위해, 미디엄샷은 기사의 리드(lead) 문구처럼 그 장면 속에 기사가 말하려는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하나의 이미지에 중요한 요소들을 압축하여야 하고, 클로즈업은 감정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또한 다양한 시각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포토저널리스트는 아이레벨(eye-level)의 사진뿐만 아니라 하이앵글과 로우앵글을 다양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례 2. 왼쪽 혹은 오른쪽에서 촬영할 것인가?


 

다음의 사진들은 어린이 곰인형에 유해물질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검사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우선 로우 앵글로 촬영된 첫 번째 사진에서는 곰인형이 좀더 부각되었고, 곰인형과 검시관들이 좀더 가깝게 보이도록 원근감이 조절되었다. 배경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처리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오른쪽 검시관 뒤쪽으로 조명이 들어와서 얼굴의 일부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럴 경우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만약에 사진가가 왼쪽으로 카메라를 조금만 옮겼더라도 조명은 머리 뒤쪽으로 감추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촬영시 조금만 더 신중한 판단을 내리게 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좀더 높은 앵글에서 촬영해 왼쪽 사진과는 달리 검시용 모니터의 상단 부분이 사진 안에서 지배적으로 보인다. 일부분이 잘려 나간 얼굴들, 벽의 형태, 텔레비전 조명 등이 사진을 다소 산만하게 만든다. 이번에도 카메라 앵글을 조금만 오른쪽으로 조절하였더라면 일부분이 잘려 나간 얼굴들을 살려내고 조명을 프레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례 3. 정면 혹은 아래에서 촬영할 것인가?


 

두 장의 사진들은 모두 윌리엄 예이츠(William Yates)라는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첫 번째 사진은 버스가 사고로 인해 난간을 부수고 얼마나 많이 밖으로 빠져 나갔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사고가 난 지점이 얼마나 높고 위험한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예이츠는 고가도로 아래로 내려가서 두 번째 사진을 촬영했다.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지는 기사가 나간 1면에 첫 번째 사진을,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을 단독으로 내지에 크게 게재하였다. 물론 두 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같은 면에 사진 페어(photo pair)로 게재하였다면 훨씬 더 시각적으로 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현장에서 한두장의 사진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가능한 모든 카메라 시점을 찾아보고 촬영해야만 독자들에게 좀더 좋은 메시지를 사진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


 


 


 

 


 

사례 4. 후방 혹은 측면에서 촬영할 것인가?


 

이번 사진은 차량이 호수에 빠져 소방대원들이 구출하는 현장이다. 이 경우 측면에서 구조 장면을 전체적으로 보여줄 것인지, 혹은 구조대원들과 호수의 전경을 모두 보여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첫 번째 사진은 측면에서 촬영해 사다리를 탄 소방대원이 차에 체인을 연결하는 장면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후변에서 촬영된 사진은 구조대원들의 모습과 호수 전체가 사진 속에 잘 드러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사건 현장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측면에서의 접근이 훨씬 더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배경의 영향
사진의 배경은 사진 전체의 메시지를 도와줄 수도 있지만, 때론 해칠 수도 있다. 전체 환경이 중요한 경우에 배경은 사진 속에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이 복잡하거나 눈에 거슬릴 경우에는 메시지를 모호하게, 최악의 경우에는 해칠 수도 있다. 따라서 프레이밍할 때 사진가가 판단해야 할 가장 첫 번째 문제는 배경이 메시지를 이야기하는데 필요한지의 여부를 간파하는 것이다. 그런 후 프레임 안에 포함시킬 것인지, 배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례 1. 배경이 모호한지 아니면 정보 전달적인지?


 

두 사진 모두 약 42미터에 달하는 트럭을 자신의 오토바이로 점프를 시도하는 이블 크니블(Evel Knievel)을 촬영한 것이다. 첫 번째 사진은 정면에서, 두 번째 사진은 사선에서 촬영했다. 두 장의 사진은 각기 캡션에서 “이블이 11대의 맥 트럭을 넘어간다”, “이블이 11대의 맥 트럭 위로 지나간다”라고 표현했다. 사실 이 묘기는 트럭 위가 아닌 옆으로 묘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캡션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캡션보다 사진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어떤 사진이 관객, 트럭, 오토바이, 활공대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례 2. 배경이 깨끗한지 혹은 혼란스러운지?


 

두 장의 사진 모두 반핵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를 촬영한 것이다. 이 두 장의 사진을 보면 모두 피켓과 다음 세대를 위한 관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두번째 사진은 로우 앵글을 사용해 단순한 하늘을 배경으로 시위대의 모습을 선명하게 촬영하였고, 첫번째 사진은 뒤에 있는 복잡한 나무 배경과 전경의 시위대가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 로우 앵글로 찍은 사진은 역광의 해를 관으로 잘 가렸고, 이 경우 필-인 플래쉬를 사용하면 더욱 효과적인 사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이밍의 결정


 


사례 1. 정지된 장면을 선택할 것인지, 혹은 액션을 가미할 것인지?


 

그림11그림12 고속도로에 비상착륙을 시도한 비행기가 지나가던 자동차와 충돌하고 가드 레일을 들이박았다. 첫 번째 사진은 강제 착륙의 정적인 기록이지만, 두 번째 사진은 액션이 가미되어 좀더 흥미로움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의 구성이 좀 더 강렬하고, 배경 정리도 훨씬 깔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압도적 전경과 설명적 배경’이라는 전경과 배경의 관계 설정도 뛰어나다. 이 경우 우리가 고속도로 사고에서 많이 보듯 사고 비행기를 구경하느라 길게 늘어선 1차선 도로가 정체를 일으키고 있다는 정보 또한 메시지 전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사례 2. 직광 혹은 역광?


 

사진은 프랭크 니메어(Frank Niemeir)라는 사진가가 세계 최초의 태양 에너지 비행기가 14분간 비행했던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첫 사진은 태양 에너지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 태양을 포함해 촬영하였는데 흑백필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 태양을 표현하기 위해 암실에서 지나치게 많은 버닝(burning) 작업을 한 것이 표시가 날 정도로 인위적으로 보인다. 원래 컬러로 촬영된 두 번째 사진은 태양 에너지를 모으는 집광판, 동력을 보여주는 프로펠러 등 세부 비행기의 모습이 잘 드러났다. 이 두 장의 사진은 모두 각각의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예술적인 표현에서 앞서고, 두 번째 사진은 정보 전달력이 뛰어나다. 물론 선택은 사진가 자신에 달려 있지만, 포토저널리즘 사진이라면 정보 전달에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다.


 


 

 


 




 


포토저널리즘의 선택 사례
미국 빈곤층 취재한 마이클 윌리엄스

마이클 윌리엄슨(Michael Williamson)은 미국의 제2 대공황기라고 불리던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중서부 지방의 대형 공장들이 폐쇄되면서 발생하였던 중산층의 몰락을 기록했던 사진가이다. 그는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여행’이라는 작품집으로 이 작업을 정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사회적 충돌과 불평등에 관한 많은 증후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접근에서 매우 독특한 점은 그가 단순히 공장 폐쇄로 인해 몰락한 중산층을 기록하였다기 보다는 이러한 사람들이 발생한 이후에 사회적으로 나타났던 증후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과 같은 중산층이 몰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있던 또 다른 중산층이 보여주었던 사회적 냉대를 보여주었다. 즉 로스앤젤레스는 사람들이 자동차에서 숙식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을 통과시켰고, 이들이 음식물 찌꺼기를 먹지 못하도록 방역 작업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사진 속에는 이러한 사회적 냉대 속에서도 다리 밑에서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동부로 가는 기차를 훔쳐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기록하였다.
마이클 윌리엄슨은 샌프란시스코의 한 신문사 사진기자였다. 초기에 그는 이 사건을 단순히 몇 차례 보도하는 것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2년이라는 기간을 들여 심층적으로 취재하였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IMF 외환위기로 인해 수많은 중산층의 몰락했으며, 이러한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 기반 전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사회적 중대 위기를 가져 왔다. 그러나 당시 사진적 기록이 마이클 윌리엄슨과 같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강조한 것처럼 사진적 기록은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주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먼나라의 위기보다는 우리의 위기가 포토저널리스트가 추구해야 하는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부부(Oroville, California)


 


다리 밑의 노숙자


 


 

Journey to Nowhere의 표지


 




 

글/김성민(경주대 미디어아트학부 교수, 월간사진 2006년 6월호)


 

글쓴이 김성민은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수학했고, 사진 통신사 Black Star에서 포토저널리즘 및 에디토리얼 편집인으로 일했다. 뉴욕 Pratt Institute 대학원 사진 석사,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언론학 박사, 현재는 경주대학교 미디어아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Posted by stormwatch :








2) 지나친 크롭핑은


 

사진이 가진 정보를 제거한다.



글/김성민(경주대 조형예술학부 사진영상학과 교수)


 

<월간사진 2007년 2월호>
 

사진을 크롭핑하기 전에 사진가나 편집인은 사진 속의 어떤 요소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메시지를 빠르게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지를 분석해야 한다. 그 다음에 불필요하거나, 메시지를 약화시킬 수 있는 산만한 요소들을 크롭핑해야 한다. 지나치게 타이트하게 크롭핑할 경우의 문제점은 크롭핑한 부분들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메시지에 필요한 추가 정보를 제거하는 것은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타이트하게 크롭핑하려는 욕심에서 중요한 상황이나 요소가 간과될 수  있다. 메시지 상에서 ‘어디’라는 장소가 중요하다면 과도한 크롭핑은 틀림없는 실수가 되기 쉽다.
사진 5의 버스 위로 보이는 피카소의 동물처럼 생긴 조각상은 버스에 써진 ‘여행하는 동물원(Traveling zoo)''이라는 단어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사진 6처럼 잘라내버린 경우 사진가가 의도했던 바가 사라지게 되고, 이 장소는 단순히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곳으로 전락해 버린다. 


 

 


 


5


 


 

6 


 


그렇지만 타이트한 크롭핑이 때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진 8은 학교에 처음 가게 된 아이의 원본 사진(사진 7)을 좀더 감정적으로 충만한 사진으로 만들 수 있었다. 메시지를 강조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들이 사진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7


 


 

8


 


3) 편집에 맞춘 억지 크롭핑 - 최악의 선택


 


사진을 다루는데 있어 가장 심각한 오류는 사진 편집인이 사진을 단순히 공간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 헤드라인들끼리의 충돌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
* 좁은 공간에 억지로 사진을 끼워 넣는 경우
* 공간을 채우기 위해 사진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경우


 

페이지 레이아웃을 잡기 전에 편집인은 사진들의 형태와 크기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 이후에 페이지에 들어갈 요소들을 결정해야 한다. 레이아웃에서 사진의 자리를 잡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지만, 사진의 형태와 크기는 유지되어야 한다.
사진 9의 경우를 보면 여덞 단의 컬럼 신문 지면의 한 단에 사진을 집어넣기 위해 사진을 심하게 크롭핑한 것을 볼 수 있다. 크롭핑이 지나치게 이루어져 실제로 이 하키 선수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읽기는 매우 어렵다.


 


 

9


 


4) 앵글 크롭핑 - 공간 맞추는 용도로는 곤란


 


앵글 크롭핑은 기울어진 수직선이나 수평선을 바로 잡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앵글 크롭핑을 잘 활용하면 수평과 수직의 양쪽면이 기울어진 것을 바로 잡아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앵글 크롭핑이 현실 상황을 왜곡하고, 단순히 공간을 절약할 목적으로 사진의 형태를 바로 잡는데 사용된다면 적절치 못하다. 촬영시 구성을 제대로 못해 만들어진 사진 속의 쓸모없는 공간을 제거하기 위해 앵글 크롭핑을 하게 되면 오히려 사진을 원래 상태보다 기울어진 형태로 만들 수도 있다. 앵글 크롭핑의 오용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은 사진 메시지를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사진이 신뢰도를 잃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진다. 사진 10은 앵글 크롭핑을 사용해 촬영할 때 포함되었던 침대의 흰 부분을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병원 침대가 심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만들었다.


 

 


 


 

10


 

 


 

5) 진실을 왜곡하는 크롭핑


 

원본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을 크롭핑해 본래 있던 관계들을 바꾸게 되면 사진의 의미는 왜곡된다. 가장 좋은 사례는 1954년에 미국의 조셉 맥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이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스티븐스(Robert Stevens)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사진을 의도적으로 크롭핑한 경우이다. 원본 사진은 비행기 앞에 서 있는 일련의 사람들을 보여준다. 사진 왼쪽의 두 사람을 크롭핑해 마치 오른쪽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Posted by stormwatch :






명확함과 메시지 강화를 위한 크롭핑


 

글/김성민(경주대 조형예술학부 사진영상학과 교수)


 

<월간사진 2007년 2월호>


 

 


 

크롭핑은 왜 필요한가?


 


크롭핑에 관해서는 대체로 두가지의 관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주장은 최종 사진 프린트는 네거티브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 크롭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확대기의 네거티브 캐리어를 깎아서 풀-프레임으로 인화된 것을 강조한다. 또한 크롭핑은 촬영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불필요한 부분들을 사진에서 제거해야 한다며 크롭핑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크롭핑이 사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촬영했을 때의 프레임 느낌’ 그대로를 살리거나, 절대로 사진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풀 프레임’ 신화를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필자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다. 사진의 일부분만을 살리고 다른 부분을 대부분 걷어내야 한다면 차라리 재촬영하는 것이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분, 일초를 다투는 현장에서는 이러한 ‘호기’는 ‘사치’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다. 이벤트의 경우 이미 이벤트가 끝나 버렸기 때문에 재촬영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당장 게재해야 한다는 문제 때문이라도 재촬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크롭핑을 하는데 있어서 엄격한 규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규정에 따르다보면 작가나 기자의 개성이나 비전을 전달하는 사진보다는 ‘공식화된’ 사진이 되기 쉽다. 크롭핑을 하는 이유에 관해 암실 전문가인 팀 루드만(Tim Rudman)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우들로 설명하고 있다.


 

* 사진의 포맷 변경
* 사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혹은 선택된 사진 요소들의 강조 - 여기서 말하는 사진 요소는 상대적인 크기, 밀도, 무게감, 불필요한 검은색이나 백색 혹은 회색 영역 등을 말한다.
* 원하지 않는 부분들을 제외시킴 - 오브제나 적절치 못한 광선이나 어두운 부분
* 잘못된 카메라 앵글의 수정
* 이미지를 좀더 다이내믹하게 보일 수 있도록 회전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
* 사진 메시지를 변경시키기 위한 목적.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때로 위험할 수 있다.
* 좀더 친근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경우
* 구성적인 면을 향상시킬 목적
* 왜곡의 수정


 

원본인 사진 1은 앞의 그림자와 건물을 함께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크롭핑을 한 사진 2는 후방에 있는 작은 공간 속에 있는 세 개의 창틀을 좀더 부각시키고, 기하학적인 형태만을 남겨 사진의 추상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이렇듯 사진의 크롭핑은 사진의 형태를 강조하거나, 메시지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1


 


 

2


 

 


 

포토저널리즘에서의 크롭핑


 


크롭핑은 사진에서 ‘관심의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부터 시선을 빼앗는 부분을 잘라내어 사진의 메시지를 강화할 수 있다. 또한 크롭핑이 부주의하게 행해졌을 경우 사진이 가지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저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이뤄지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사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보를 유지하면서 메시지를 강화할 수 있느냐 하는 측면에서 행해져야 한다.
뉴스 사진을 촬영할 경우 포토저널리스트들은 풀 프레임으로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프레이밍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카메라 앵글과 거리 혹은 배경이 완벽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단 최대한 정보를 유지하면서 촬영하고, 나중에 크롭핑을 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편집실이나 개별 기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트북에서 포토저널리스트들은 사진에서 제거할 수 없었던 불필요한 부분들을 크롭핑함으로써 자신이 촬영한 사진의 시각적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 자신의 사진을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로 편집실로 넘겨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포토저널리스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가 될 수 있는 명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사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측면을 간과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출판이 될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진이라면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고유한 형태를 가지기 마련이다. 포토저널리스트와 사진 편집인은 모두 사진이 가장 효과적으로 그 메시지를 드러낼 수 있는 형태, 크기, 비율 등에 관해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진이 제대로 크롭핑이 되면, 크롭핑된 내부의 모든 요소들은 사진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어야 한다. 이 말은 크롭핑은 사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소들만을 남겨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메시지를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진의 기본 형태를 변형해서는 안된다.
지면에서 사진이 본문과 공간 문제를 발생시킬 경우, 사진은 흔히 부차적인 요소로 치부되곤 한다. 사진이 본문보다 축소하거나, 잘라내기 쉽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에서 사진들은 본문을 채우고 남은 공간을 메우는 유동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지기 쉽다. 저널리즘에서 사진을 함부로 다루는 가장 심각한 경우는 사진의 형태나 크기를 고려하기 전에 미리 레이아웃을 잡아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레이아웃은 단순히 사진을 이미 할당된 공간에 배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흔히 내용상의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뉴스 가치가 있고, 독자들에게 꼭 알려야 할 소중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진이 단순히 하나의 공간을 채우는 역할로 치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편집실에 들어온 사진을 신중하게 고려해 공간을 배정할 때 비로소 독자들은 자신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소중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 메시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를 제거한다.


 

본문과 레이아웃만을 고려한 부분별한 크롭핑, 혹은 중요한 부분만을 강조하겠다는 의도에서 이뤄진 과다한 크롭핑은 사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저하시켜 사진 본래의 메시지를 희석시킬 수 있다. 최선의 크롭핑은 사진을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들과 관심의 중심 이외의 잉여 부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촬영할 때 줌 렌즈 혹은 망원렌즈를 사용해 장면을 좀더 부각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하다면 배경에 있는 창문이나 조명은 크롭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밝은 공간을 먼저 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사진에서 주제가 아닌 부분이 흰색이거나 밝은 색일 경우도 사진 메시지는 크게 약화될 수 있다. 또한 표정, 제스처, 혹은 의상 등으로 주제가 되는 인물과 사진 속에서 시각적으로 경쟁하는 주변 인물들도 크롭핑의 주요 대상이 된다.


 

 


 


 

3


 

사진 3에서 배경에 있는 3개의 창틀은 시각적으로 매우 거슬리는 요소이다. 만약에 촬영자가 좀더 높은 위치에서 촬영했다면, 이런 요소들은 충분히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의 점선처럼 크롭핑할 경우에는 오른쪽에 있는 인물의 머리 윗부분을 손해보는 셈이지만, 그대로 두는 것보다는 시각적으로 훨씬 더 안정적이다. 사진 4에 등장하는 두 명의 골퍼들의 몸짓과 표정은 아주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아웃포커스 된 깃대는 이러한 점들을 반감시키고 있다. 점선과 같이 크롭핑을 해 다시 확대한다면 사진 메시지는 훨씬 더 쉽게 읽혀질 수 있고, 사진 구성도 향상될 수 있다.


 


 











Posted by stormwatch :

해외다큐-NewYork

2011. 10. 5. 20:40 from 레크레이션








공허와 열정이 공존하는 도시 


 



 


 하늘이 높아지고 쾌청한 바람이 불 때면 대책 없이 방치해 두었던 향수병처럼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상쾌한 공기 냄새만으로도 그리워지는 그것은, 푸르름과 웅장한 경치를 자랑하는 절경도 아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시원한 바닷가도 아니다. 높은 빌딩숲의 대명사이자 맨하탄을 품고 세계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뉴욕이 바로 그것이다. 너무 아름다워 영화 속 배경으로 많이 등장하는 뉴욕의 가을과 겨울은 아직 경험도 못 해봤지만 내 머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뉴욕의 이른 봄, 공기 냄새는 그것만으로도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곤 한다. 뉴욕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일 정도로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9.11사태 이후 더욱 더 주목 받게 되었지만 까다로운 미국 비자의 발급과 입국 심사로 인하여 뉴욕행 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뉴욕은 뉴욕이다


뉴욕행 일정이 잡히고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공부하며 여행 준비를 했으나 막상 뉴욕에 도착하고 나니 거대한 도시의 에너지와 엄청난 공간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빌딩들이 숲을 이루는 큰 도시였지만 공기는 맑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한 거리에 뉴욕에서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우선 업 타운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미드타운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브로드웨이라는 거리의 이름은 쇼비지니스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나 뉴욕의 북쪽인 할렘지역에서부터 세계무역센터가 있었던 남쪽의 로어맨하탄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리의 이름이다. 브로드웨이의 도로 중앙에 있는 화단에는 꽃과 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있고 화단 아래 지하에는 지하철이 다닌다. 거리와 교차되는 곳마다 설치된 벤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커피나 샌드위치를 즐기며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고, 허공에 줄로만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신호등이 불안하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한산한 거리를 낡은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스냅 촬영을 해 가며 거리 풍경을 즐겼다. 유명 명소만을 바삐 몰려다니며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딱딱하게 움직여야 하는 스타일의 여행을 싫어해서인지 내 의지로 갈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었다. 이국적인 거리 풍경 하나하나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큰 빌딩 숲이 전부인지 알았던 도시의 내면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피상적인 이미지는 조금씩 깨어지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다양한 문화의 공존은 뉴욕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주었다. 다운타운의 어느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겉보기에도 도시와는 잘 섞이지 못할 것같이 순박해 보이는 커플은 한 눈에 보아도 미국의 소도시에서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경이로워하는 모습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온 나 만큼이나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는 것이 표정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만큼 뉴욕은 특별했다. 두 번째 뉴욕에 다녀와서야 느낀 것이지만 뉴욕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뉴욕은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속의 도시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 민족들이 재창조해 만들어낸 복합적 문화를 지닌 코스모폴리탄 도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뉴욕은 어떤 한 나라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국제적 독립 도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4달러에 팔려진 섬


뉴욕은 브루클린, 퀸스, 스테이튼섬, 브롱크스 그리고 맨하탄 등 크게 다섯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뉴욕은 주요 관광지와 빌딩들이 모여있는 맨하탄이다. 뉴욕은 1602년 인도무역을 위한 항로 개척하고 있던 네델란드인 헨리 허드슨에 의해 발견되었고, 1626년 당시 네델란드의 총독인 피터 미누이트는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옷감 등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맨하탄섬을 사드렸다. 이 역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던 장소가 로어맨하탄에 있는 배터리파크이다. 1664년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맨하탄은 영국에게 넘어갔으며 당시 국왕 찰스2세의 동생 요크공의 영주 식민지가 되면서 ‘뉴욕’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그뒤 100여년이 더 지난 뒤인 1781년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787년 미합중국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취임했던 당시의 수도가 뉴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번영과 대공황을 거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된 뉴욕은 미국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이며, 세계의 수도라 불리고 있다.


 


도심 속 오아시스


두 번째 방문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길거리 곳곳의 낯익은 풍경이 반갑기만 했다. 뉴욕은 도시계획이 잘 돼 있다.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도로인 에비뉴와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인 스트릿이 바둑판처럼 교차하고 있어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쉽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마다 에비뉴라는 이름과 몇 번째 거리인지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잘 정리되어 있어 표지판만 보며 걷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치장된 도시의 겉모습 보다는 도시 안쪽의 평범한 길거리의 풍부한 표정들과 뉴요커들의 평범한 생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 업타운 쪽의 거리를 몇 번씩 반복해 걸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곳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맨하탄은 남북으로 길게 생긴 섬이다. 동쪽으로 이스트강과 서쪽으로 허드슨강, 북쪽은 할렘강 남쪽은 대서양이다. 지도 없이 처음 맨하탄을 걷게 되더라도 반드이 만나게 되는 엄청난 규모의 공원이 있다. 바로 유명한 센트럴 파크이다. 황폐한 쓰레기처리장이었던 그곳을 남북 4킬로미터, 동서 1킬로미터 규모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들이 녹음을 이루고, 곳곳에 호수와 연못들이 있어 도심 속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는 자유롭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연인들과 가족들로 넘쳐났고 산책로에는 조깅하는 사람이나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뤄 여유로움과 자유가 한층 더 느껴졌다. 가끔 운이 좋을 때면 소년들의 야구게임을 볼 수 있는 등 다양한 종류의 인종들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곳이나 인적이 뜸한 곳은 조심해야 한다. 하루는 공원 안에서 휴식을 취하다 굵은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공원을 빠져나와 비를 피했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뉴스에선 그 날 오후 센트럴파크에서 있었던 강간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뉴욕은 가시를 지닌 장미처럼 향기로운 매력 속에 돌발적인 위험을 내포한 도시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영원한 이방인 뉴요커


시간은 어느덧 한 달이 흘러 뉴욕생활에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나게 되는 관광객들이 재미있어질 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똑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 얼마전까지 나 자신도 저런 표정으로 돌아다녔을 생각을 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관광객과 뉴요커들이 구분이 되고 거리의 풍경들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때, 뉴욕을 사진에 담고자 했었던 처음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엇을 찍어야 할지 점점 고민만 깊어가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보이는 맨하탄의 빌딩들은 멋있지만 그것 자체가 더 이상의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그때 즈음 도시 자체가 호흡처럼 내뿜는 느낌들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뉴요커, 먼 곳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 다시 돌아가기엔 어쩌면 너무 멀리 떠나온 사람들에 의해 재건설된 인공적인 고향. 그들이 하루하루 일상을 묻고 꿈을 꾸고 혹은 꿈을 접고 살아가는,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에너지들이 넘쳐나는 다민족 공동체의 작은 별나라 뉴욕. 그곳은 내겐 경이로웠지만 생각해 보면 이유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화려한 네온사인들도 하늘을 찌를 듯한 스카이라인 때문도 아닌, 크고 화려한 도시가 내뿜는 알 수 없는 공허감과 함께 공존하던 열정 때문은 아닐까? 뜨거움과 차가움, 삶의 열정과 삶의 공허, 자유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도시. 꿈이 잠들지 못 하는 도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내뿜는 호흡들이 그들과 그들의 별을 잊고 쳇바퀴처럼 일상에 젖어 살아가는 나를 가끔씩 뒤흔드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사진 이창석 (월간사진 2005년 10월호 게재)














Posted by stormwat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