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잡지「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 창간호에는 랭거-파츠의 에세이 <목적>과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에세이 <전례 없는 사진>이 동시에 실렸다. 18세기 중반에 출간된 레싱(Lessing)의 『라오콘(Laocoon)』이 설파한 장르의 독자성, 매체의 특수성의 구현이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내용이라면, 타 매체와 구분되는 사진의 독자성, 사진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을 주장하는 이 두 글은 사진의 모더니즘을 통보하는 글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특히 모홀리-나기의 글은 사진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1920년대 유럽을 풍미한 아방가르드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글로 보인다. 레싱의 모더니즘 미학을 자신의 사진적 실험을 정당화하는 묵시적 근거로 삼으면서, 사진을 현재와 다가올 시대의 주역 매체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글의 말미를 제외한 전 부분을 읽어보기로 하자.
  사진이 가야 할 길과 목표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모든 글들과 논의는 그릇된 자취를 좇아왔다. 되풀이해서 사진이 접근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지적된 문제는 미술과 사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현실을 기록하는 한 방법으로 분류되느냐, 과학적 탐구의 한 매체로 분류되느냐, 혹은 사라지는 사건들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여겨지느냐, 복제를 위한 기본 프로세스로 여겨지느냐 혹은 “예술”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증대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특성들 중 단 하나를 예로 든다면,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이다. 거기에는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사진의 주제는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연루시킨다. 오늘날 사진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로부터 비롯되는 종합적인 사진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정확한, 때로는 부정확한 사진 언어를 발전시킨 후에야 진정으로 재능 있는 사진가가 사진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리라!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우리는 허황된 과장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 달성되면 사진에 대해 모두가 훌륭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그러한 탐구는 대개는 분리된 방식이지만 이미 진행 중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이다.
  여전히 연구돼야 할 영역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진적 실천의 새로운 요소들에 맞춰 수립될 수 있다.

1.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
2.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해 정상적인 광경에 익숙한 관계를 바꾸거나 그것들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왜곡시키기. (오목, 볼록 거울 혹은 요술거울을 사용하는 촬영 등등은 제1 단계들이다.) 이러한 촬영은 기계적 상상력이라는 모순된 말을 야기한다.
3. 한 장의 원판 위에 대상을 완전히 커버하는 이미지 ( 스테레오 사진의 발전된 양상).
4.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 설계. 원근법의 단축효과의 회피.
5. 사진의 사용에 반원근법적이며 물체를 투과하는 X-레이 사진의 적용.
6. 감광면 위에 빛을 투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진들.
7. 색에도 진정으로 감광되는 사진
 
 이러한 모든 요소들과 최대한 상호관련을 맺으며 종합하는 작업만이 진정한 사진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사진의 발전은 여러 곳에서 이미 고도로 계발된 새로운 빛의 문화로부터 강력한 동력을 얻고 있다.
  금세기는 빛의 세기이다. 사진은 빛의 전환된 형태로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거의 추상적 형태로나마 빛을 촉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제1의 수단이다.
  영화는 더 멀리 간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영화에서 정점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경험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의 개발은 영화를 통해 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렇게 하여 스승이 학생에게서 교시를 받는 특별한 상호관계가 수립된다. 이 둘은 상호 공동 연구소이다. 사진은 영화를 위한 탐구영역으로서 기능하며,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진은 전례가 없는 이미지
 
인용한 글은 내용상 세 문단으로 나뉜다. 첫 문단은 사진적 재현의 특수성,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 문단은 ‘전례 없는 이미지’의 생산을 위한 여러 제안들을 열거하며, 셋째 문단은 사진이 ‘빛의 세기’의 제1의 기초를 이루는 재현 매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모더니즘은 분명 레싱의 미학론에서 자양분을 길러내고 있었다. 후자의 『라오콘』에 따르면, 시와 회화는 분명한 경계와 자기 영역을 지니고 있다. 시는 언어의 선조성(linearity) -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발화되는 언어의 특성을 말한다 -에 종속된 매체이므로 시간에 따른 행동과 상태의 변화 양상을 기술할 수 있다. 반면, 회화는 재현양상을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계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를 동시적으로 (simultaneously) 보여주는 평면예술인 까닭에, 재현 대상의 변모 양상을 시간에 의거하여 묘사할 수 없다. 회화는 특정 순간의 동작, 상태만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재현의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서구를 지배한 매너리즘 미학이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다시 말해 “회화는 말을 하지 않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슬로건은 매체의 특성, 순수성을 무시한 미학 강령이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따르면, 시는 회화처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야 하며, 회화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의 소재를 이야기서술(narration)의 원칙에 의거하여 묘사하여야 한다.
  레싱은 이러한 매너리즘 미학의 매체 특성의 혼용을 시와 회화의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시에 내재된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생산될 때만 가장 시적일 수 있으며, 회화는 회화에 본질적인 기호양상에 충실할  때 가장 회화적일 수 있다.
  모홀리-나기가 글의 시작을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라고 단언하고,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을 사진만이 갖는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진이 이전의 여하한 시각 재현매체와는 다른, 새로운 재현특성을 지닌 시각매체임을 고지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현이다. 레싱에 충실한 모홀리-나기의 모더니즘에 따르면,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즉 사진의 재현적 특징에 전념할 때,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사진적 본성에 충실할 때, 어떤 촉각적인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생, 회화, 조각과는 달리, 사진은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가시화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작업을 행할 때만이, 그의 말을 다시 빌면, 사진이 아닌,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될 때만이, 사진도 레싱의 모더니즘에 부합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첫 문단의 말미를 장식하는 흥분된 어조는 레싱의 모더니즘을 전도하는 자의 설교에 다름 아니다.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모홀리-나기는 이어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생산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는 사진적 ‘실험들’을 열거하는 바, 그것들은 1910년대 후반 이후 기존의 시각 재현양상, 재현 이데올로기를 거부, 전복하고, 새로운 시각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이 사진을 통해 성취한 성과들이다. 1번의 경우, 다시 말해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은 모홀리-나기의 청년기를 인도했던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가 부르주아적이고, 귀족적인  미술 아카데미즘이 선호한 원근법과 조화, 균형, 통일이라는 구성원칙을 전복하기 위해 개발한 파격적인 사진 구도들이다. 2번의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한 왜곡상은 1920년대 후반, 모홀리-나기와 마찬가지로 헝가리 출신이면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의 누드 시리즈에 의해 예술적 성과를 이룩한 사진적 재현양상이다. 3번은 분명 초광각 렌즈, 혹은 어안렌즈의 이미지의 양상이며, 4번과 5번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각 재현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원근법과 이것의 파생양상인 단축효과를 내재화한 일반 사진기의 암상자(camera obscura)를 파기하여, 사진을 통해 ‘전례 없는 이미지’를 얻으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6번은 1920년대 아방 가르드 사진의 표상인 포토그램이다. 이것은 원근법에 의거하여 외부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기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빛의 이미지이다. 감광판이나 감광지 위에 사물들을 직접 올려놓고 빛을 쏘이면 사물의 투명도에 따라 음과 양의 그림자를 남기는 포토그램은 1919년 경 화가인 크리스티앙 샤드(Christian Schad)와 1921년 경 만 레이(Man Ray)가 즐겨 행했던 빛의 이미지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포토그램’이란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샤드와 친했던 다다이즘의 수장인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샤드를 포토그램의 발명자로 여기고 ‘샤도그래피’라 불렀고, 만 레이는 스스로를 발명자로 자청, ‘레이요그램’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결코 그들의 발명이 아니었다. 1910년대 이미 여러 사진잡지들은 포토그램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사진을 발명한 탈보트 역시 많은 양의 식물 포토그램을 남겼다. 모홀리-나기가 포토그램을 선호한 것은 이것이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라고 그가 규정한 양태, 즉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을 포괄하는 까닭이었다.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매체는
사진과 영화
 
그의 포토그램에 관한 애착은 유별난 것이었다. 1929년에 발표된 <포토그램과 인접 기술>에 따르면, “빛의 직접적 형상화”인 포토그램은 “미래의 시각적 창조의 관건”이며, “빛을 물질적이고, 조잡하게 형상화하고, 빛을 간접적으로 물질화하는 옛 사진을 폐기한다”. 그는 ‘옛 사진’ 다시 말해, 사진기에 내재된 원근법에 의거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을 “현실모사에만 헌신하는 평이하고, 빈약한 사진”으로 규정했고, 포토그램을 “사진작업의 본질인 빛의 글쓰기, 빛의 데생의 구사”로 여겼다. 그리고 사진기의 매개 없이 빛을 직접적으로 투사하여 생겨나는 포토그램을 그가 ‘빛의 세기’라고 규정한 시대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이미지로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보기에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 매체는 사진과 영화였다. 빛을 고정시키며,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과 빛의 형상을 투사하여 빛의 움직임을 창출하는 영화는 1923년 모홀리-나기를 바우하우스에 초빙하고, 1928년 모홀리-나기와 함께 자신이 설립한 바우하우스를 떠난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말을 빌면,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통합’하는 전형적 매체였다. 그에게는 과거의 여하한 시각매체의 재현방법과 단절을 꾀하는 사진과 영화만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감수성, ‘빛의 시대’의 시각경험을 수용하는 매체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통적 현실모사의 기계적 재현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탐구하는 매체로 사용한다면, 테크놀로지에서 상상력을 길러내며, 기하학적 추상화에 몰두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도할 수 있다고 모홀리-나기는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생각하는 사진과 영화의 관계는 상호 보조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한다면, 사진은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를 점하고, 영화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하부구조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상부구조 역시 사진이라는 하부구조를 자극하고, “부추긴다”. 그러나 ‘빛의 문화’ 속에서 하부구조로서의 사진의 기능과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진이라는 ‘기초작업’이 없이는 “영화는 더 멀리” 갈 수 없다. 사실, 영화는 ‘빛의 문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진 없이는 ‘빛의 문화’는 있을 수 없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홀대하는 에르노 칼라이의 1927년 글, <회화와 사진>에 대한 답변에서 사진을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로 설정하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오늘날 사진은 모든 분야에서 열광적으로 추구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진에 어떠한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문맹이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가올 시대에는 사진은 읽기, 산수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기본과목이 될 것이다. 오늘날 사진애호가들이 갖는 모든 바람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앞으로는 누구나 배워야 하는 제2의 천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본질론은 사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사진의 정수(essence)일 수도 없으며, 또 그가 사진의 특수성, 독자성이라고 간주한 사항만이 사진의 특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그의 주장이 오늘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사진을 기계적 복제, 복사 수단으로 여기거나 혹은 사진이미지를 회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 당시 예술계의 일반인식을 불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데 있다. 당시 미학의 이론의 중심에 자리잡은 레싱의 매체와 장르의 독립성, 특수성에 관한 주장을 자기의 미학적 논지로 삼으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당시의 시각문화의 주체로 승격시키려는 모홀리-나기의 정열은 사진역사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라즐로 모홀리-나기, <포토그램>, 1925-192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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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거-파츠 (1897-1966)는 라즐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그러나 사진 경향에 있어서는 그의 대척점에서 1920년대 독일 사진계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 인물이다.
  헝가리 출신의 모홀리-나기가 뉴 비전(New Vision)의 선봉장이 된다면, 랭거-파츠는 신객관주의(Neue Sachlichkeit)라는 사진경향을 주도했다. 뉴 비전과 신객관주의는 사진매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의도하는 재현양상에 있어서 철저하게 대립했다. 바우하우스를 근거지로 한 모홀리-나기는 사진매체를 언제나 아마추어의 유희정신과 예술적 자유의 구현 수단으로 접근한 반면, 폴크방 아우리가 (Folkwang und Auriga) 출판사에서 자료사진을 담당했던 랭거-파츠는 철저한 사진전문인으로서, 완벽하게 사진기술을 마스터한 장인으로서 사진매체를 대했다. 헝가리 출신의 아티스트는 종전의 어떠한 회화작업도 창출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이미지를 빛의 감광성과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계발하는데 주력하였지만, 랭거-파츠는 식물과 건축 자료사진, 공업제품 사진의 조형적 탐구에 전념했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현실의 복제수단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제약 없는 이미지 실험의 영역으로 여긴 반면, 랭거-파츠는 기록의 순수성에 의거하여 형태미의 탐색에 몰두했다.
  랭거-파츠는 1927년, 사진잡지 「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창간호에 실린 에세이 <목적 Ziele>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기록하는 리얼리즘과 형태와 물질에 대한 객관적 재현을 사진의 임무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회화적’ 사진과 단호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회화적’ 사진은 단지 인상주의의 화풍과 소재를 사진적 재현의 모델로 삼은  ‘회화주의(pictorialism)’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적, 역사적, 문학적 주제를 미술아카데미가 존중하는 형식적 규범을 본받아 행한 구스타브 레일랜더, 헨리 피치 로빈슨의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사진에 고유한 도구들을 가지고 회화와 유사한 효과를 구하려 하는 것은 사진만이 갖는 방법, 재료, 테크닉의 특성과 사진만이 갖는 진실성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좋은 사진의 비밀, 사진이 조형예술 작품에 견주어 소유할 수 있는 예술적 특성은 사진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진은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도구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이 물질의 신비로운 힘을 재생하는 가능성에 대해 너무나 과소 평가한다. 나무와 돌, 금속의 구조는 사진만의 독특함 속에서 조형예술의 여하한 방법으로도 행할 수 없는 완벽함으로 재현된다. 우리는 사진 덕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높이와 깊이감을 표현하며, 극도로 빠른 움직임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 권위로 자리잡았다. 
  오직 사진만이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을 적절하게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다. '회화적' 스타일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특성, 다시 말해 형태의 기계적 재현을 일종의 결함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이것이 사진이 다른 모든 표현수단을 능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형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는 기술적으로 성공한 사진원판은 우리의 시각적 경험을 마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에게 맡기고, 사진도구로는 사진적 특성 덕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사진을 만들도록 노력합시다. 예술에서 어떠한 것도 빌려옴 없이. 
  사진의 특성은, 랭거-파츠에 따르면, 사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대상이 자연의 산물이건, 산업생산물이건, 건축물이건 그것을 변형, 왜곡시킴 없이 묘사하는 것이다. 주관성, 상상력, 예술적 의도에 의해 현실의 대상을 변형하지 않고, 사진도구의 ‘기계적’ 재현을 전폭적으로 수용할 때 사진만의 특성은 구현된다. 이때 사물의 ‘신비로운’ 형태는 완벽하게 전사되고, 사진의 흑백 계조도는 재현대상의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낸다.”
  분명 랭거-파츠의 위의 진술은 예술사진의 ‘회화적’ 경향에서 탈피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사진예술의 전반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1920년대에 새로운 예술사진을 도모한 사진가들은 회화주의를 포함한 '회화적' 사진을 사진의 독자성, 자율성을 사장(死藏)하는 경향으로 받아들였고, 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모색하여 회화에의 종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사진가들은 회화와 구별되는 가장 ‘사진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실험했다. 미국의 사진가들이 행한 이러한 사진경향에는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명칭이 부여됐고, 독일의 사진가들이 추구한 사진의 특질에 대한 탐구에는 신객관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두 사진경향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 재현양상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지만, ‘회화적’ 사진과 확연히 구별되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일란성 쌍둥이다. 즉, 스트레이트 사진과 신객관주의는 섬세한 세부묘사, 빛과 음영의 계조도에 따른 섬세한 재현, 육안의 능력을 뛰어넘는 깊은 심도감을 사진적 재현의 특질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상정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차점을 가정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주제는 현실세계의 역동성과 조화로움에 대한 조형적 탐구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도시의 거리, 자연의 세계, 인공물, 건축물, 신체의 세부 등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다룬 사진의 소재는 광범위하고 다양했지만, 세계의 형상은 조화로우며, 세계 속의 인간은 숨을 잘 쉬도록 만들어졌다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폴 스트랜드, 스티글리츠, 이모겐 커닝햄, 앤젤 아담스 등 대부분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독특한 개성으로 대상들에 접근했지만, 자연과 인공물의 조화로움, 역동적인 삶과 조형적인 신체의 재현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는 법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의 땅으로 받아들였고, 번영을 구가하는 신생대국의 삶을 사는 낙관적 면모를 직접적이고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기계문명이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과 환경이 불협화음의 관계 속에 있는 사진적 재현은 스트레이트 사진 저 멀리에 있다.
  반면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을 대변하는 랭거-파츠의 사진은 거역할 수 없는 기계문명으로의 이전을 부정적으로 수긍한다. 자연이 삶의 환경에서 쇠퇴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술문명의 지배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은 휘트먼적 예찬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자연을 압도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러 다가오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산업생산물, 인공구조물의 역동성은 냉엄하고 위압적이다. 랭거-파츠가 클로즈-업한 식물과 동물의 세부의 반복 양상은 도래한 기계문명에 길들여지고 동화된 자연을 암시한다. 꽃잎과 뱀 비늘의 조형적이고 유기체적인 반복은 자연스런 조화, 조화로운 자연의 이미지라기보다는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된 질서에 종속된 양상을 띤다. 자연의 대상물은 극단적 클로즈-업을 통해 조각나고 고립되어져,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활력을 잃은 채 박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도 1차 세계대전 (1914-1918)이 보여준 기술문명의 파괴적 양상에 대한 충격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기술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세계에 대한  정신분열적 인식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된  독일의 정치적 혼란, 실업과 같은 경제란을 내면화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회화적’ 사진을 거부하고 사진의 특성을 구현하면서,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작가의 주관성, 상상력, 감성을 최대한 지우면서 사물 자체의 ‘객관적’ 인식,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랭거-파츠의 작업은 1928년 출판된다. 랭거-파츠는 어떤 수사적 요소가 없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책제목으로 ‘사물 (Die Dinge)’을 생각했지만, 출판사 측은 『세계는 아름답다 Die Welt Ist Schon』라는 아주 낭만적인 책 제목을 선택한다. 근접촬영과 심도 깊은 이미지를 가장 주된 특징으로 삼는 100장의 이미지로 된 이 사진집은 엄청난 성공을 경험하면서 사진가에게  전례 없는 명성을 가져다준다. 이에 따라 그의 사진 기법을 추종하는 사진가들이 생겨났고, 그의 작품집을 칭송하는 여러 논평과 아울러 예외적이지만 강력한 비난이 뒤따랐다.
  당시 유명한 사진 연간지 「다스 도이치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도 창간호의 편집을 맡았던 한스 빈디쉬(Hans Windisch)는 1928/1929년 합본호에서 인용한 랭거-파츠의 사진을 ‘자연의 다큐먼트’로 정의하면서 이 규정에 부합하는 사진들을 이렇게 높이 샀다. “이번 호가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나마 증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 그것은 자연의 다큐먼트에는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따라서 예술적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다큐먼트에서 우리는 사진 행위의 본질을 보다 더 천착할 수 있으며, 또 예술적 창조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수천의 사진에서보다는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한다.”
  사진의 본질론을 상정하며, 랭거-파츠로 대표되는 ‘자연의 다큐먼트’ - 필자는 신 객관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를 예술사진의 정수로 간주하는 한스 빈디쉬의 논법은 분명 증명해야 할 것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논증선취의 폐단을 드러내는 한 예지만, 어떠한 재현적 특질을 사진의 ‘정수’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다큐먼트'라는 용어는 정확하고 심도 깊은 사진적 재현, 대상을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의지를 이미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큐먼트’는 랭거-파츠 부류의 사진적 특성을 정확히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각적 자료를 요구하는 특정 학문의 부산물, 어떤 실용적 사용의 시각적 도구라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자연’이라는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실체의 수식어를 첨부했다. ‘자연’은 실용적 목적, 학문적 용도로 사진 ‘다큐먼트’를 주문하고 생산한 주체일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은 사진작가의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실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자연의 다큐먼트’는 다큐먼트를 재현하는 형태적 양상으로 실현된 ‘예술’ 사진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한스 빈디쉬가 말하는 ‘자연의 다큐먼트’는 ‘사진 행위의 본질’- 육안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명도, 세부 묘사 등 -을 구현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하는 사진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의 사진이 “예술적 창조에 접근”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모홀리-나기의 뉴 비전보다도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나는” 예술사진이다.
  사진집『세계는 아름답다』의 출간은 당시 독일 사진예술계를 여러 상반된 견해들을 표출하게 만든 계기였다. 한스 빈디쉬처럼 ‘자연의 다큐먼트’를 ‘사진 행위의 본질’로 여기는 사람은 랭거-파츠의 사진집을 바우하우스 (Bauhaus)를 무대로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의 유희적 실험을 즐겼던 모홀리-나기를 공격하는 최상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 대표주자는 에른스트 칼라이(Ernst Kallai)로 그는 모홀리 나기가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학교의 기관지 「바우하우스」의 편집을 뒤이어 맡은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모홀리-나기의 포토그램은 “광화학적 술수의 미학으로 유희적 책략과  완전히 우발적이고 눈을 현혹시키는 성공을 ‘실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반면 “랭거의 사진들에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관찰의 윤리학은 판화작품이나 옛 그림에 현존하는 정신적 태도만큼이나 진지하고 고상하다. 그의 사진의 조형적 통일성, 아름다움은 제재에 내재하는 비전의 통찰과 극도로 숙련된 작업기술에서 태어난다.” 한 마디 더 인용한다면, “랭거의 사진 창작태도에는 아주 깊은 인간애와 드높은 사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랭거-파츠의 사진을 ‘사진 행위의 정수’로 파악하는 논객들은 전통적인 미학을 그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빈디쉬가 말하는 ‘감수성’ 그리고 칼라이가 원용하는 ‘정신적 태도, 조형적 통일성, 숙련된 작업기술, 인간애, 사상’ 등은 르네상스 이후 19세기말까지 서구의 이상주의 미학의 기본 개념인 까닭이다. 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미학 개념에 의거하여 1920년대 독일을 풍미한 새로운 두 사진경향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홀리 나기가 행한 포토그램은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숙련된 기예가 필요 없는 값없는 유희 행위로 여겨진 반면, 랭거-파츠의 신객관주의는 상당히 이상주의적 미학관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세계는 아름답다』를 해설하는 글에서 주의를 끄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질적인 사물들의 상응, 상호유사성을 랭거-파츠의 사진들에서 찾아냈다는 점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물질, 형상들이 사진의 클로즈-업을 통해 보면 서로 닮아있고, 상호 관련성을 맺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이러한 이미지의 독법은 이미지의 역사에서 랭거-파츠의 사진집이 최초로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두 평론가의 글을 인용해 보겠는데, 첫 번째는 후고 지커(Hogo Sieker)가 <알버트 랭거-파츠의 사진에 대하여> 쓴 글이며, 두 번째는 쿠르트 투콜스키(Kurt Tucholsky)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다.
  난초의 꽃잎들을 부감 촬영한 사진은 거의 동물의 목구멍만큼이나 끔직한 형상을 띠며 어떠한 수줍음도 없이 추잡한 성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눈 위에 놓여진 마른 풀은 일본 목판화의 우아한 형태를 갖는다. (...) 스스로 나선형으로 감긴 새싹으로 미로에서는 선사시대의 괴물이 동굴에서 뛰쳐나오는 듯하다.
  어린 수목은 영양의 몸과 동물의 발바닥을 닮았다.
  이렇게 상호 이질적인 형상과 물질이 클로즈-업 사진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칼 블로스펠트, 에드워드 웨스톤, 이모겐 커닝햄 등 1920년대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가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탐구한 사진 항목이다. 블로스펠트는 속새풀에서 고대의 원주를 보았으며, 웨스톤은 피망에서 남성의 근육질을, 양파의 단면에서 여성의 성기를 발견했다. 커닝햄은 꽃들의 클로즈-업을 통해 꽃과 남성성기의 유사성을, 여성성기와의 상응을 찾아냈다.
  『세계는 아름답다』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행해졌다. 프리츠 쿠르(Fritz Kuhr)의 <세계는 아름답기만 한가?>는 그 전형적인 예다. 그의 비판을 인용해 보자. “초점거리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은 흐릿하거나 거짓이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은 랭거-파츠에게 하루 날을 잡아 빈대 집이나 노동자의 집, 그보다는 농부의 집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도 우리의 중앙형무소나 ‘현대식’ 감옥을 그가 사진을 찍으면 아주 괜찮을 듯싶다. 당신은 교도소에 대해, 보호감호소에 대해, 집 없는 노동자 합숙소에 대해, 빈민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수적으로 본인은 참호와 반혁명 장교들의 지휘본부의 바리케이트, 진압용 곤봉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결국 랭거-파츠 식의 세계의 아름다움은 흔히 ‘지적 매음’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고 세계에 대한 미학적 탐구에 전념하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1934년의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로 이어진다.
  『세계는 아름답다』 - 이것은 랭거-파츠의 유명한 사진선집의 제목이다 -  속에서 우리는 신객관주의 사진술이 그 정점에 달해 있음을 보게된다. 이를테면 신객관주의 사진은 비참한 생활까지도 완벽할 정도의 유행적 방식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진의 신객관주의를 대변하는 랭거-파츠의『세계는 아름답다』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그 예술적 평가, 그리고 사진의 정치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에 대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1920년대 말의  ‘화제작’이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 (사진역사학  박사)

알버트 랭거 - 파츠 Albert Renger-Patzch, <파구스 사의 인두>, 1927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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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뢴트겐 (Wilhelm Conrad R ontgen)은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1879년에 발명된 크루즈(Crookes) 음극선관을 실험하던 중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음극선관을 작동시킬 때, 형광물질이 칠해진 판 위에서 희미한 빛의 존재를 발견했고, 그의 손을 음극선관 앞에 세우자 판 위에는 그의 손뼈 마디들이 그림자 형태로 나타났다. 실험실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음극선관은 흑색 판지로 에워싸여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어떠한 가시광선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빛이 음극선관에서 나와 그의 손을 투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살은 투과하여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반면 뼈는 투과하지 못해 그림자를 투사한 것이었다.
  물체의 성질에 따라 투과의 정도가 다른 이 미지의 광선의 존재와 작용을 사진감광판에 기록하기 위해 뢴트겐은 우선 그의 연구실의 문을 찍었다. 문의 나무는 투명하게 나타났고, 금속 손잡이와 납연 페인트 자국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어서 그는 그의 아네 버타 (Bertha)의 반지 낀 손을 X 레이 사진으로 찍었다. 광선이 통과하지 못하는 손마디의 뼈와 반지는 사진감광판 위에 그림자로 자신을 기록했고, 광선이 통과하는 피부살은 투명하게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X 레이 사진은 그 발명이 공표되자 과학계와 의료계의 즉각적이고도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외계의 현실을 손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 정확히 기록한 다게레오타입의 경이로움이 평이한 일상적 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19세기의 끝에서, X 레이 사진은 다시 한번 사진의 마술적 경이로움을 촉발시켰다. X 레이 사진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닫힌 상자의 내부와 신체의 내부를 속속드리 꿰뚫어 보는 마법적 혜안을 구현한 것으로 국제적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광선이 꺼풀을 드리운 사물과 신체의 내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쾌거는 사진의 경이로운 위력을 세상에 다시 한번 알리는 것이었다.
   X 레이 사진의 국제적 수용은 신속했다. 프랑스의 경우, 신문 「르 마텡 Le Matin」과 「릴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은 1896년 1월 21일과 25일 양일에 거쳐 “새로운 빛”의 발견에 대한 보고서를 게재했다. 파리의 살페트리에 (Salpetri-ere) 병원의 사진부장인 알베르 롱드 (Albert Londe)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X 선에 대한 최초의 보고가 행해진지 3주만에, 그러니까 1896년 2월 10일, X 레이 사진 촬영요령에 대한 보고서를 꿩의 날개를 찍은 사진을 첨부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X 선의 의학적 사용과 연구를 위해 그의 사비를 들여 프랑스 최초로 살페트리에 병원의 사진부 부설로 X선 연구소를 설립했다. 곧이어 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그는 1898년, 「X선 촬영과 검사 개론, 그 기술과 의학적 적용 Trait -epratique de radiographie et de radioscopie. Techniques et applications medicales」을 출판했다.
   X 레이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의학사진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환자들의 관상학적 특징, 병리적 증세의 기록, 연속사진을 통한 신체동작의 생리학적 연구에만 소용되었던 의학사진은 이제 오히려 그것들보다도 X 레이 사진을 의학사진의 본령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육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이 보이지 않는 빛의 사진을 신체구조의 보다 정밀한 연구와 질병연구에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의학계는 사용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X 선의 충격과 그 여파는 의학과 물리학의 영역, 과학적 연구와 의학적 적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불투명한 물체의 속을 보여주는 이 ‘미지의 빛’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심령학, 영매학과 같은 의사(擬似)과학, 사이비과학의 기상천외한 연구를 북돋았다. X 레이와 더불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의 속을 찍게 되자, 심령학, 영매학에 실증가능한 증거물을 첨부하려는 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혼, 영기(靈氣)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피부와 살에 가려진 뼈와 장기를 X 레이로 손쉽게 보게 되자, 의사과학자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 영혼과 심령, 신비의 실체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사진적 기록은 일반 도상이 갖지 못하는 재현대상의 실재성을 증거하므로, 다시 말해 사진이 기록한 대상은 상상력이나 환상이 꾸며낸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로 존재함을, 존재했음을 실증하는 까닭에, 19세기 끝의 심령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심령의 세계, 신비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해설에 언제나 뒷걸음질치는 심령학, 신비학은 사진이라는 과학적 증거물을 학계에 제출하여 과학적 학문의 권리와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이폴리트 바라딕 (Hippolyte Baraduc)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살페트리에 병원의 수장, 샤르코(Charcot) 학파의 일원으로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병리학 연구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고, 부인과 의사였던  바라딕은 뢴트겐이 X 레이를 발견한 이듬해, 그러니까 1896년에 「인간 영혼의 움직임과 그 빛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유체의 도상학 L'ame humai-ne, ses mouvements, ses lumieres et l'iconogr-
aphie de l'invisible fluidique」을 출간했다. 물론 X 레이의 발견에 의거한 연구는 결코 아니었지만 -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연구는 뢴트겐의 발견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 보이지 않는 신체의 내부를 찍은 X 레이 발견에 힘입어, 그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신념을 굳건히 했음에 틀림없다. 뢴트겐의 쾌거 덕분에 널리 퍼진 과학계와 세간의 사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제것으로 삼아 그는 ‘인간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입증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이나, 신경질환을 앓는 여성, 종교인들의 영혼은 대단히 “민감하여 감광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어느 날 바라딕은 그의 아들을 사진찍었다. 아이는 그때 그의 작은 손에 방금 전에 죽은 꿩을 들고 있었다. 바라딕은 이 사진에서 어떤 미지의 빛이 바람에 휘날리는 돛의 모양으로 사진찍혀져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빛”이라 믿었고, 그는 이것을 발터 벤야민이 훗날 애호하게 될 신비주의적 미학개념과 동일한 용어인 아우라(aura)라 명명하였다. 아우라가 사진에 의해 처음으로 계시된 이 날 이후 바라딕은 아우라의 전모를 밝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진에 그 흔적을 남기는 형상에 의거하여 아우라를 분류하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의적인 어떤 작용, 신비한 영상, 후광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설명에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사진이라는 증거물을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치, 칸트, 뉴톤 등의 과학이론을 엉성하게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과학적 설득력을 부여하려 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어느 특정한 순간에 사진적 재현으로 볼 수 있는 “영혼의 빛”은 한마디로 사진 촬영의 오류, 현상과 인화의 그릇된 과정에서 비롯되었지만, 심령의 세계를 종교적 신념으로 믿는 자의 눈에는 그것은 “영혼의 움직임”, “삶의 베일”, “생명력”의 기록이었다. 한편으로 심령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과학주의에 홀린 자의 신념에 따르면, “오늘날 사진 원판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감춰진 힘을 잠시 보게 해준다. 그리하여 신비적인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통제에 놓이게 하며 그것을 실험 물리학의 영역인 자연계로 되돌아가게 한다.” 신비주의적 심령의 세계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성과 과학의 ‘통제’에 놓으려는 바라딕의 이러한 발언은 신비주의와 과학주의의 어설픈 결합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먹혀들었던 19세기 서구 학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진이라는 과학적 실증 수단과 당시 서구를 지배한 권위있는 과학용어와 개념을 어설프게 도입하면서 전근대적인 신비주의적 사고를 해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19세기 후반의 지적 풍토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사한 그러나 보다 더 신비주의와 관련된 또 다른 예가 있다. 그것은 이태리 북부 토리노 시의 과리니 (Guarini) 성당에 보존된 성해포(聖骸布)의 사진적 검증이다.
  토리노의 성해포는 십자가에 못 받혀 죽은 예수의 몸을 감싼 것으로 여겨지는 수의포로, 약간의 피 얼룩이 남아있는 커다란 사지포이다. 이것의 한쪽 면은 붉은 명주로 대어져 있고 은으로 된 성 유물함에 넣어져 과리니 성당의 돔형 지붕 아래에 있는 제단 속에 엄정히 보관되어 있다. 성당은 이 성 유물을 성당 밖에서 현시를 행하는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므로 순례자들은 보통 제단에 상감되어져 안에서 조명을 주는 실물크기의 네거티브 슬라이드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네거티브 상을 양화상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네거티브 상 그대로 전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화상의 경우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예수의 얼굴이 음화상태에서는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해포의 이 음화상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1898년 5월에 행해진 토리노 성당의 성해포의 공개는 수많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법조인이자 사진사인 세콘도 피아 (Secondo Pia)는 성해포의 사진 복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노출부족으로 적절한 사진원판을 얻지 못하던 그는 5월 28일과 29일 밤사이에 또 다시 네거티브를 현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 생겨남을 보았다. 예수의 얼굴이었다. 육안으로 성해포를 볼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예수의 얼굴이 사진의 네거티브 상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네거티브의 ‘계시’, 사진의 ‘현시’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몸 속을 뢴트겐의 X 레이 사진이 보여주었듯이, 그리고 일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바라딕은 사진으로 포착했다고 믿었듯이, 세콘도 피아는 피흘리며 죽어간 예수를 감쌌던 성해포에는 ‘하나님 아들’의 영이 배어있었고, 그 ‘영혼의 빛’이 보이지 않는 빛을 발하여 그가 찍은 네거티브에 예수의 얼굴이 감광되었다고 믿었다. 바라딕과 피아 모두는 인간의 영혼은 빛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해묵은 상상력을 빛에 감광반응을 보이는 사진적 재현을 통해 증명했다고 믿었다.
  토리노의 성해포의 ‘계시’는 지표 (index)의 기호학적 특성과 사진의 ‘현상’ 과정을 이중으로 담보하고 있었다. 우선 성해포에 흩어져 있는 얼룩 반점은 죽음으로 쓰러져간 예수의 흔적이다. 고통 속에 죽어간 ‘인간의 아들’의 육체가 사지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만든 비정형의 형상이다. 찰스 퍼스 (Charles Peirce)의 대상과 그 재현기호의 관계에 따른 분류를 인용한다면, 성해포의 얼룩들은 지표이다. 그것은 발자국이나, 지문처럼 물리적 접촉 (physical contact)에 의해 생겨난 기호이다. 지표는 발자국이나 지문 혹은 데드 마스크 (dead mask)처럼 재현대상과 유사성,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직접 접촉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지만, 성해포의 얼룩처럼 비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성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호의 한 범주로서의 지표, 인덱스는 재현 대상과 그 형상이 유사할 수도 혹은 상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재현대상과 형태의 유사성은 지표의 본질적 특성일 수 없다. 지표가 다른 기호범주들, 즉 상징 (symbol - 이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사회적 관습, 규약이 임의적으로 생산한 기호로 언술 언어는 그 대표적 예이다)과 도상 (icon - 이것은 재현대상과 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기호로 그림, 데셍, 지도 등이 대표적 예이다)과 구별되는 변별적 특성은 물리적 접촉이 그 생성의 기원에 있다는 점이다. 눈 위에 새겨진 토끼의 발자국은 토끼가 그곳을 지났다는 증표이며, 유리창에 지문이 새겨졌다면 누군가 그것을 만졌다는 증거이다. 데드 마스크는 죽은 자의 얼굴에 석고를 직접 접촉시키지 않고는 생성될 수 없는 지표이다. 성해포의 반점들은 피흘린 예수의 몸이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는 기호이다. 따라서 지표는 생성된 기호대상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때 거기에 재현대상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성해포의 반점은 ‘예수가 그때 이 수의포 위에서 피흘리며 죽었음’을 증거하는 지표이다. 그런데 사진적 재현 역시 기호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표이다. 재현대상과 완벽한 닮음, 유사성의 관계를 유지하는 인덱스이다. 사진에서 ‘물리적 접촉’에 관여하는 요소는 사물이 발산하는 반사광이다. 이 반사광을 통해 사진원판과 재현대상은 ‘물리적으로 접촉’한다. 반사광에 의한 ‘물리적 접촉’이 없다면 사진적 재현은 불가능하다. 지표로서의 사진은 재현대상이 감광판의 시계 속에 있었음을, 혹은 감광판에 직접 접촉했음을 증언한다.
  예수의 피흘리는 몸과 직접 접촉하여 생성된 성해포는 세곤도 피아의 ‘계시’와 더불어 일종의 잠상 (latent image)이 되었다. 성해포에 예수의 얼굴은 잠상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가 피아의 네거티브 현상액 속에서 현현한 셈이었다. 현상(現像)된 예수의 얼굴로 토리노의 성해포는 전대미문의 전시가치와 숭배가치를 동시에 획득했지만 사기라는 불경스런 비난도 끊임없이 뒤따랐다. 1931년 움베르토 (Umberto)왕의 결혼식을 계기로 이를 검증하는 일련의 사진촬영이 다시 행해졌고, 사진작업은 보다 정밀한 예수의 얼굴을 네거티브로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88년에 행해진 수의포의 연도 테스트는 그것이 중세에 만들어졌다고 판정했다. 현대과학은 성해포의 예수의 얼굴이 신의 현현을 보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영혼의 빛”을 보려는 바라딕의 심령주의적 시선의 욕망 곁에 피아의 종교적 신념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판정했던 것이다. 뢴트겐의 발견에서 가속화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신비주의적 욕망이 과학적 검증과 다시 한번 반목하는 판정이었다. ●
 
최봉림 (사진역사,  홍익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캡션:빌헬름 뢴트겐, <뢴트겐 부인의 손, X 레이 사진>,1895년 12월 22일, Deutsches Museum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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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 강좌 1주: 유형학적 사진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 진동선    http://howphoto.net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 루프>를 중심으로

 

1. 유형학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혹은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구성 요소들의 형과 타입의 집합이다. 그것은 또한 그룹핑으로서 식물학적, 도감적 종, 속, 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사이에는 차이를 드러내는 혹은 유사성을 드러내는 경계와 변별력이 있다. 유형학은 특별한 시리즈로서 타입(type)이고 모듈(module)다. 그러나 스타일(style)은 부차적인 것이다.

 

2. 유형학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유형학적 요소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를 구축하는(social construct) 것이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업, 건축, 의상, 장식, 초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 잠재된 이데올로기로서 유형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

 

3. 사진의 유형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진에서는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앗제, 잔더, 베허에서 보여지는 유형성은 기술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가령 베허부부가 1957년에 시작한 오늘의 유형학의 모습은 기술적 구조였다. 그래서 그들의 첫 번째 전시명이 였다.

 

4. 베허 스쿨의 유형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숨겨진 이데올로기(concealed ideology on industry's part)"를 찾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유형성은 드러난 어떤 꼴과 타입을 말하는데 있지 않았다. 역사, 문명, 문화, 사회의 숨겨진 정보, 숨겨진 기능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들이 바로 숨겨진 사회적 기능 혹은 역사적 구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유형학적 사진은 정보(information)로서 특징이 강했다.

 

5. 유형학적 요소는 도구인가? 장치인가?

 

두 가지를 아우른다고 본다. 도구로서 대형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시각적 장치로서 형태(shape), 크기(size), 장소(location), 물질(materials), 날자(date), 다이얼로그(dialog)를 들 수 있다. 도구는 유형적 구조를 기술하기 위한 기능적(function) 측면이며, 장치는 시각적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것이다.

 

6.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는 배허 스쿨에서 좀 특이한 작가이다. 1978-1981년까지 에센에서 먼저 오토 슈타이너트에서 사진을 배웠고, 그리고 나서 1981-1987년에 뒤셀도르프 베허 스쿨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토마스 루프나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과 다를 뿐 아니라 유형학적 요소들도 다르다. 구르스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이 있다.

2. 일상의 심미주의적(everyday aesthetics) 경향이 있다.

3. 자연, 소도시, 공장, 증권거래소, 관중 등 여러 가지 소재를 취하고 있다.

4. 자연과 기술, 인간과 기술의 <관계(relationship)>을 강조한다.

5. 강력한 추성성과 기하학적 요소, "all over" 회화적 양식을 선호한다.

6. 현대사회와 문화에서 특히 <소비사회(consumer world)>에 관심을 둔다.

7. 다른 베허 스쿨 작가들보다 사회적 리얼리티에 천착한 편이다.

 

7.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우선 먼저 지각(perception)과 소통(communic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에서 도시로 그리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적인 시점을 견지한다. 그래서 그의 유형학적 요소는 구체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반사(reflection)/굴절(refraction)을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하학적 수평과 수직적 요소들이 그의 사진에 많은 것, 시점(point of view), 앵글(angle)이 다양한 것도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의 사진이 최근 회화적 모습으로 더 나아가고 있는 것도 그의 시선과 형식이 이제 내용 구조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거의 미세구조(micro structure)를 찾아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진도 다른 베허 스쿨 작가처럼 전혀 인간의 웃음도, 감정도, 개성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현실을 그린 그림의 사진(a picture of a picture of reality)"을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8.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스트루스는 1976-80년까지 베허 밑에서 공부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보다는 먼저이다. 그러나 그도 베허에 앞서 같은 대학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에게서 페인팅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처음부터 회화적 요소들이 컸다. 그의 초기 포트레이트는 리히터의 <48 Portrait 1971-72>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허의 영향에 따라 곧 거리사진, 건축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앗제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는 퍼스펙티브를 강조했으며, 특히 빌딩들간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했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그의 대표작 "뮤지엄 사진(Museum Photographs)"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사와 인간, 건축과 사회, 공간과 공간, 장소와 장소 등 이중적인 역사적, 사회적 네트워크 및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말하는데 전력했다.

 

9.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아마도 <뮤지엄 사진>에 그것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다분히 이중적인 모습을 띈다.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는데, 가령 뮤지엄 사진에서 사람이 관찰되고, 그림이 관찰되는 이중의 <관찰>, 그림의 응시와 관람객의 응시가 드러나는 <응시>, 그림 속의 사람과 그림 앞의 사람의 <존재, 부재>,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로서 <역사적 시간성>,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통로로서 <소통> 등 그의 사진이 유형학적 요소는 문화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들이 예술과 뮤지엄, 그림과 관객, 사진과 그림 등 두 개의 모순되고 충돌되는 세계에서 보여지는 두 개의 유형적 타입과 꼴을 통해 나타나는데 예컨대 그것들은 그림 속의 옷과 관객의 옷에서, 그림 속의 현실과 전시장에서의 현실을 유형적으로 대비시킨다. 즉 페인팅 속의(in the painting) 공간과 페인팅 앞의(in front of the painting) 공간의 유형성을 찾는다.

 

10. 토마스 루프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토마스 루프는 1977년에 베허 스쿨에 들어갔다. 스트루스와 함께 작업을 했던 배허 스쿨의 적자이다. 그 역시 인물, 건축, 풍경 등 다양하게 작업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포트레이트>야말로 베허 스쿨의 유형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다. 그의 포트레이트는 198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에는 나이, 계층, 인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진의 깊이보다는 표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극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인물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진과 최근 밤 사진에서는 그 특징들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포트레이트 사진이 너무 뛰어났는지 최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에 비해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것 같다.

 

11. 토마스 루프의 유형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포트레이트 경우 잔더의 백과사전식 포트레이트를 확장한 개념이다. 그의 인물 사진도 메마르고, 감정이 없으며, 개성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배허스쿨의 유형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감성을 배제하는 방식이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건축 사진은 유형적 요소를 지키고 있으나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적인 모습, 구성적 요소에 천착하는 듯 보인다. 마치 배허 스쿨의 냄새를 지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매특허인 포트레이트 사진에서만큼은 유형성은 가히 교과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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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베르티옹, <인체측정사진>, 1885년경, 파리경시청.
 
1882년 알퐁스 베르티옹(Alphonse Ber-tillon,1853 - 1914)은 파리 경시청에 범죄자 신원확인부 (le Service d'identite  judiciaire)를 창설하고 사진을 활용한 인체측정술을 도입했다. 이제 모든 용의자는 그들의 신체를 샅샅이 측정하고 조사하는 신상파악에 관련된 일련의 작업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발, 전박과 중지의 길이, 머리둘레가 측정되었고, 몸의 상처자국, 문신 등이 기록되었다. 코의 형태적 특징, 눈과 머리칼의 색깔도 이견이 뒤따랐지만 상세히 기록되었고, 특히 세월에 따른 변화에 가장 둔감하다고 파악된 귀에 대한 묘사는 각별한 주의가 뒤따랐다. 이러한 시각적 묘사를 완결 짓는 것은 일정한 거리에서 동일한 조명과 동일한 포즈의 조건 속에서 실물의 7분의 1의 크기로 촬영된 정면과 측면의 증명사진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범죄자 신상기록 카드에서 활용되는 정면과 측면에서 찍은 코드화된 증명사진을 병치시키는 방법은 알퐁스 베르티옹의 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1855년에서 1870년까지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의 사진사로 활동한 필립 포토 (Philippe Potteau)가 파리에 거주하는 외국 원주민과 1862년 알제리 여행시 토착인의 인종학적 연구를 위한 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고안한 방식이었다. 그는 장식적 배경을 제거한 후, 상정할 수 있는 모델의 무표정의 상태에서 “언제나 동일한 거리에서 정면과 측면 순으로 자세를 취하게” 한 후, 동일한 결과물을 양산하는 일련생산 방식으로 그들의 상반신을 기록했다. 사진기는 중성적 배경 앞에서 균일한 산광을 받으며 무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는 동양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을 정면과 측면에서 고정시켰던 것이다. 어떠한 변화도 용인하지 않는 이 규격화된 촬영방식은 바야흐로 식민지 경영에 소용될 ‘미개인’, ‘야만인’의 인종학적 특성의 비교와 검토, 분류를 위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면사진과 측면사진의 병치가 인종학 연구를 위한  필립 포토의 독창적 발명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병치한 예는 인간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을 연구하기 위해 이미 1854년 경, 신경생리학자인 뒤센느 드 불로뉴 (Duchenne de Boulogne)의 지도 하에 펠릭스 나다르의 동생, 아드리엥 투르나숑이 「인간 신경생리학의 기제 Me canisme de la physionomie humaine」라는 저술을 위한 자료 초상작업을 행한 바 있었다. 이들 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배경 앞에서 균일한 채광을 사용해 한 볼품없는 ‘구두수선공’의 얼굴에 드러나는 이런저런 감정표정에 따른 안면근육의 유형을 정면과 측면의 얼굴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감정표정의 신경생리학’의 양태를 드러내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일정한 거리에서 동일한 채광 조건 속에서 정면 사진을 보조하는 선에서 측면 사진을 간헐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뒤센느 드 불로뉴와 아드리엥은 정면과 측면의 병치를 필립 포토처럼 체계적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필립 포토에 앞서 약호화된 정면과 측면의 증명사진을 시도했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사실, 누가 최초로 어떤 형식을 발명했고, 그 형식의 기원이 누구에게서 발원한다고 주장하는 실증주의적 연구의 대부분은 그 탄생에 관련된 복잡다단한 역사적 조건을 묵과하는 폐단을 갖는다. 어떤 재현 형식 혹은 어떤 발명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비롯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거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관점, 혹은 친족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거나 혹은 과장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편견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조차, 그 ‘최초’의 귀속은 또 다른 역사의 ‘발견’에 의해 갱신되고, 수정되는 것이 역사의 일반적 양상이다. 사실, 정면과 측면의 인물사진을 병치시키는 예는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40년대 인종학적 연구자료에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필립 포토, 혹은 뒤센느 드 불로뉴를 정면과 측면 초상을 병치하는 방법의 기원으로 상정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형식를 가능하게 한 시대의 재현체계, 학문체계를 규명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기록하여 ‘열등’ 인종의 형태학적 특성을 규명하고, 각 감정의 표현에 고유한 안면근육의 변화양태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18세기의 박물학 (natural history)을 지배했던 분류학 (taxonomy)의 여파인 유형학(typology)이다. 식물과 동물의 학문적 분류에 소용되었던 분류학은 19세기의 학문적 사고체계를 지배한 유형학으로 발전하여 19세기의 서구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제 현실을 도식과 도표적 형태로 간편 명료하게 분류하여 통제, 지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인간과 자연의 제반 연구대상들은 각 부분의 특징적인 유형에 따라 비교, 검토되었다. 분류를 위해 선택된 부분이 동질적인 형태적 혹은 기능적 특성을 발현할 경우 동일 그룹에 묶이고, 차이를 보일 경우 다른 그룹에 할당되었다. 인종학의 경우, 피부색의 동일성과 차이는 분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판별단위를 이루었고, 피부색이 하얀 유태인을 다른 백인종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변별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얼굴부위를 선택한 후, 일반 백인종과 비교했다. 감정 표현의 분류학의 경우, 눈썹 근육의 수축 여부, 이마 주름살의 전개 방향 등이 각 감정의 유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판별단위였다.
  19세기 유형학의 범위는 너무나 폭넓은 것이어서 초상을 활용한 예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초반의 정신병리학은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편집광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형태론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 (Th. Gericault, 1791-1824)에게 1822년경 그들의 초상을 의뢰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유형학은 19세기 후반의 지도학문으로 자리잡는 생물학과 결부되어 편집광적 양상을 띠었다. 19세기 후반의 유형학은 ‘선천적 범죄자’, ‘선천적 정신병자’, 그리고 유태인의 전형적 유형을 사진초상을 활용해 정립하려 시도했다. 인간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포착하여 이 양자를 병치하는 형식은 따라서 어떤 부류의 전형, 유형(type)을 보다 인지하기 쉽도록 도해하려는 한 시대의 유형학적 사고의 결과물이지, 한 개인의 독창적 발명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 사법부가 범죄자의 신원확인을 위해 사진의 활용에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1832년 범죄자의 몸에 낙인을 찍는 야만적 법령이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자기의 신분을 끊임없이 숨기고 위장하는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에 1839년 발명이 공표된 사진을 간헐적으로 응용하고자 했다. 1850년대 경에는 알퐁스 베르티옹에 의해 1880년대에 완벽을 기하게 되는 신원확인 방법의 초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실행은 회의적인 경찰 수뇌부에 의해 계속 미루어졌다. 경찰 사법부가 사진초상의 효용을 결정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1870년 보-불 전쟁의 패배와 그로 인한 사회혼란의 귀결인 1871년의 파리 코뮌 (Paris Commune)이라는 좌익 혁명 정권의 출현과 함께였다. 파리 서쪽, 베르사이유에 자리잡은 제3공화국의 의회와 정부는 좌파 세력이 장악한 파리를 무력으로 탈환해야 했다. 파리는 피로 물들었고 혁명정부는 72일만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파리 코뮌의 주동자 색출을 위한 증빙자료는 무엇보다도 혁명의 흥분 속에서 가담자들이 뽐내며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파리를 점령한 베르사이유의 경찰 사법부는 파리 코뮌을 이끈 정치, 군 지도자들을 색출하는데 수없이 찍혀진 이 기념사진을 이용하였다. 소설가, 플로베르 (G. Flaubert)와 함께 이집트 유적지를 탐사했던 사진가이자 작가이며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인 막심 뒤 캉 (Maxime du Camp)은 「파리의 발작」(1878-1880)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판화상이나 문구상들의 진열창은 코뮌의 위원, 시 대표자, 군 지도자, 한마디로 말해 반란군의 수령들이 종종 아주 우스꽝스런 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로 뒤덮였다. 그들은 뽐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말단 배우들처럼 그들은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출세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했다. 그것은 아주 심한 경거망동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전부 파리에만 있지 않았다. 많은 사진이 베르사이유로 넘어갔고 후에는 몸을 숨긴 많은 죄인과 불운한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소용되었다. 아마도 스스로 자신들을 그렇게 공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
  경찰로서는 이러한 경험은 전혀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시기에 경시청에는 사진실이 설치되었고, 이곳은 죄인들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신원파악을 가능하게 했다.” 베르사이유 경시청의 사진사는 으젠느 아페르 (Eugene Appert)였고, 그는 검거된 수백명의 파리 코뮌 가담자들의 초상을 찍었다.
  1880년, 파리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 조치령이 내려질 때까지, 프랑스 경찰의 주요 일거리의 하나는 코뮌 가담자들의 추적검거와 추방자들의 입국 금지였다. 이를 위해서 경찰서에는 아페르가 찍은 초상사진들이 비치되었고, 감시 목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진에는 모든 가담자들에 대한 신원정보가 수기로 표기되어 있었다. 1874년부터 파리 경시청은 공식적으로 사진부의 창설을 인준했고, 혐의자와 범죄자들의 초상은 알파벳 순서와 죄질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었다. 1888년, 파리 경시청 사진부의 수장이 되는 베르티옹은 정면, 측면사진을 병치시키고 이에 눈, 코, 귀, 머리 등에 대한 묘사를 글로 기입하는 ‘말로 된 초상 (portrait pa-rle)’을 첨부하는 베르티옹 신원확인법 (bertillon -nage)을 체계화했다. 1892년, 그의 신원확인법은 무정부주의자 라바숄 (Ravachol)의 검거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그와 동시에 검거자가 이전에 코에니그스텐이라는 이름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베르티옹 신원확인법의 정확도와 신뢰도에 대한 인정은 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베르티옹은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되어 용의자의 필적 감식에 관여하면서 그의 명성은 오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는 군사정보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넘겨준 혐의를 받고 있었고, 베르티옹은 필적감식을 통해 드레퓌스가 범인이라고 판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판정은 반유태주의의 ‘의도적’ 오류였음이 1899년 드러나게 되자 그의 명성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베르티옹 신원확인법은 신체측정과 ‘말로 된 초상’을 작성하는 복잡다단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차이를 변별하는데 있어서 찰스 다윈의 조카인 인류학자 프란시스 갈톤 (Francis Galton)이 1892년에 쓴 「지문 Finger Prints」이라는 저술이 증거하는 ‘지문채취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서서히 입증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영국 정부는 “사소한 소홀함이나 실행하는 데에 있어 조금이라도 틀리게 하면 관찰의 정확성이 감소되고 계속된 측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인체측정 묘사의 신원확인적 가치가 거의 전무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는” 베르티옹의 신원확인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1902년에는 베르티옹조차 지문 감식 방법만으로 도둑 쉐페르 사건을 해결한다. 프랑스에서는 베르티옹의 인간적 영향력 하에서 그의 신원확인법이 계속되지만, 1918년, 의학, 약물학, 탄도학, 생물학, 화학 등을 통합하는 과학 수사연구소가 발족되고 지문 채취와 감별이 일반화됨에 따라 베르티옹의 방법은 정면과 측면 사진의 병치법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폐지된다.
  인간의 상징적 표상인 얼굴을 어떠한 우회 없이 냉정하게 재현하는 19세기 다큐멘터리 초상의 억압적 성격이 그 절정에 이르는 베르티옹의 정면, 측면 증명 사진은 전통적인 초상의 기능과 극단적 단절을 꾀한다. 그것은 인종학적, 의학적 다큐멘터리 초상과 더불어, 어떤 실제 개인을 재현하는 수 천년 초상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현상을 수립한다. 인종학적 자료 초상사진에서 그 재현 형식을 빌어온 경찰 자료로서의 이 초상은 전통적 초상이 간직한 영생과 사후 구원에의 염원과 같은 종교적 문맥은 물론이고 한 개인의 형상, 삶을 기념하고 보전하려는 의도마저 배제된 초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 멸시와 비난을 초래하는 이 감시와 처벌의 초상은 한 인물을 이상화하고 유미화시키는 전통적 초상의 기능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은 이러한 다큐멘터리 초상을 세계의 중심, 즉 서유럽에서  배제되고 정복된 인종들 -유태인, 식민지인- 이나, 부르주아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규범에서 벗어난 유형의 인간들 -정신병자, 범죄자 - 을 엄정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20세기와 더불어, 정확히 거명하면, 아우구스트 잔더 (August Sander)와 더불어, 19세기 다큐멘터리 초상의 객관적 엄격함은 재현 인물과 그의 시대의 가식 없는 실체에 도달하려는 사진작가들의 형식적 접근방식으로 차용되었다. 사진에 고유한 객관적 현실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19세기 후반의 다큐멘터리 초상이 확립한 형식코드를 잔더 이후 온전히 참조하기 시작한 작가들은 그러나 그 접근 형식을 주변부의 인물, 비정상적이고 소외된 인물에 적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상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계층에게도 감시와 처벌은 아닐지라도 엄격한 시각적 비교와 검토를 위해 19세기가 발명한 다큐멘터리 초상의 형식을 냉정하게 적용했다. 「미 서부에서 (In the Ameri -can West)」의 리차드 아베든(Richard Avedon), 토마스 루프 (Thomas Ruff)의 대형 증명사진 작업은 그 대표적 위업이다. 반면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소외되고 주변적이고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기록에 집착했다는 점에서 19세기가 발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초상의 유형학적 작업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
 
최봉림 (사진역사,  홍익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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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최봉림


 

 

I. 들어가면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라는 용어는 현대 미학과 예술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키워드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의와 평가는 필자들에 따라 너무나 굴곡과 편차가 심하다.  발음 속에 내재된 필자들의 억양, 그리고 의도에는 아방가르드의 외연마저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 그 진화의 양상에는 공통된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 임의적 정의, 미학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가 일쑤다. 필자의 미학적 취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거나, 혹은 ‘소외된 데카당스’ 예술로 비난한다. 그러나 논리적 수미일관성, 실증적 자료, 필자의 예술관의 피력을 동반한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단 하나만의 객관적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미학과 비평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행하는 필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범주 규정이 특정 운동, 인물을 일시적으로 거명한다 할지라도 이 어사의 미학적 기원과는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들이 정의하는 아방가르드의 경계, 안과 밖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특정 문예사조들, 특정 문예그룹들, 혹은 특정 문예운동들과는 달리,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처럼 그 전성기를 일정 시기로 국한할 수 있는 시대적 미학개념이라기 보다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도래할 초시대적 개념이면서, 산업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낭만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생겨난 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관점에 따라 낭만주의, 심지어는 자연주의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포섭할 수 광의적 미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정의와 적용이 임의적일 경우, 그것은 미학과 비평의 역사를 오도하거나, 근대와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혼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 문맥, 그 어의의 역사적 변이를 고려치 않고, 단지 그것을 자신의 비평적 판단, 미학적 분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아방가르드’는 임의적 비평, 이분법적 분류를 위한 프로쿠루테스의 침대로 사용될 수 있다.

II. 상반된 아방가르드 : 모더니티 혹은 키치
아방가르드라는 어사의 의미작용을 설득력 있게 조작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의 예술적 상황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분할, 비평하는 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자신의 미학적 주장을 아방가르드라는 광의적 용어에 투사하면서 현대 예술의 주요 양상들을 지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들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초시대적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근, 현대예술에 포괄적 접근을 허용하는 용어로 기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예술의 주요 양상은 ‘아방가르드’로 정의되며, 아방가르드는 근, 현대예술의 긍정적 상황과 부정적 양상을 가르는 경계 개념이 된다. 그 경계선 이편에는 아방가르드를 통해 현대 예술의 새로운 긍정을 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있고, 저편에는 그것을 통해 현대 미술의 불모성을 보는 장 클레르 Jean Clair (1940- )가 있다. 20세기 중반부 미국 미술비평을 주도한 전자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우리가 현재 소유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주1)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리 피카소 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비평가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근대성의 우스꽝스런 희화일 뿐이다.”주2)그들은 한편으로 예리하게 설정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통해 20세기 미술 전반을 조망하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의 정의, 그 비평적 사용을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미학적 개념의 이해에 적지 않은 혼선을 야기한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중요한 에세이는 「Partisan Review」의 1939년 가을 호에 실린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 그리고 동일 잡지의 1940년 7-8월 호에 실린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이다. 이 둘의 글에서 미국의 평론가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을 개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두 특성을 설파한다. 그 첫째는 예술을 사회로부터 분리, 격리시켜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활동영역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각 예술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순수시 pure poetry, 추상 abstract 혹은 비구상 nonobjective 미술을 ‘아방가르드’로 옹호하기 위한 그린버그의 알리바이다.
그린버그는 최초의 아방가르드를, 예술사의 정설에 따라, 낭만주의에 침윤된 보헤미아 그룹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래한 대중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부르주아의 범속성, 그들의 진보에 대한 맹신 그리고 이상을 모르는 실리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예술로의 도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꿨다.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과 절연된 순수한 예술, 사회적 잔재가 배제된 절대적 예술을 추구했다. “공중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아방가르드 시인 혹은 예술가는 예술을 엄격히 규정하고,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논외가 되는 그런 절대의 표현으로 고양시키면서 그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주제 혹은 내용은 역병처럼 기피의 대상이 된다.”주3)
그린버그가 말하는 아방가르드의 ‘주제 혹은 내용의 기피’는 부르주아 사회의 범속적 일상의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까닭에, 예술은 세속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정신활동의 영역이 된다. 현실의 재현을 기피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미학과 아카데믹한 예술형식의 부정을 동반한다. 현실의 재현을 지향하는 ‘모방 imitation’ 이론은 물론이고, 미술의 경우, 문학적 ‘주제 혹은 내용’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문학성을 모방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ut pictura poesis’주4) 역시 거부의 대상이 된다. 범속한 사회 현실과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추구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현실의 사실주의적 모방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현실보다 우월한 실체적 현실의 모방과도 단절한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는, 실체적 본질 God조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모방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과 문학의 창조 규율들과 창조 과정의 절차들 그 자체를 결국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추상 abstract’ 예술의 탄생한다.”주5)             
그린버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질적 저하는 문학성을 재현의 모델로 삼은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기인한다. 회화의 본질, 순수성을 저버리고 문학을 전범으로 삼아, 이야기 historia의 재현을 모색한데서 비롯된다. 아카데미 회화라 통칭되는 이 조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이라는 문학적 담론에 의거한 이야기 서술 narration에 전념했고, 선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제도화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삼차원적 효과를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려는 기예들에 몰두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문학과 조각과 같은 여타 매체의 재현효과를 모델로 삼은 아카데미 회화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라는 예술들의 혼용 confusions of arts 경향의 전형적 희생양이다. 따라서 회화 장르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현실 환영주의 효과 illusionist effects에 사로잡혀, 회화 매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저버린 해묵은 아카데미즘을 극복한 일군의 화가들이 된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의 총체적 정의는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매체의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여타의 예술 매체들의 방법, 수단, 절차와의 단호한 단절을 꾀하는 예술가 집단이다. 아방가르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작업하는 특정 매체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그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물성 materiality, 작업 과정들에 전념하면서, 타 매체들의 특성에 영향 받고, 타 매체들의 속성들이 개입되는 것을 청교도적으로 금기시한다. “(...) 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들 활동 영역의 순수성과 영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성과를 성취했으며, 그것은 전 문화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다.”주6)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로, 브랑쿠지, 클레, 마티스, 그리고 세잔느조차 그들의 영감은 그들이 작업한 매체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의 예술이 주는 흥미로운 감동은 거의 전부, 공간의 발명과 배열, 평면, 형상, 컬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순수한 우려와 이러한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데 있는 듯하다.”주7)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는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특성과 순수성의 탐구를 보다 강조하는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1766년에 출간된 레싱 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들』의 현대적 후속편에 해당한다. 레싱의 글은 18세기 후반, 한편으로는 그 당시를 지배한 ‘시는 회화의 말하는 방식이며, 회화는 말없는 시의 양상’이라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예술 상호간의 화합, 예술 매체간의 상호 혼용을 선구적으로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예술 매체의 차이,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매체들에 고유한 질서와 규율 속에서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그린버그의 글은 모더니티의 태동을 위한 레싱의 주장을 ‘아방가르드’의 전투적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다 새로운’ 모더니티를 위한 주장이다.
당연히 조형미술에 종사하는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레싱의 주장을 본받아, “문학성과 주제를 강력히 배제하며” “여러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확립하려 시도”한다.주8) 그리고 각 매체에 고유한 특성, 순수한 본질을 따른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회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승복하는 역사다. 회화 매체의 저항은 주로 사실주의적 원근법 공간 (재현)을 위해 회화의 (지지체인) 평면에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 to hole through’ 노력들에 대한 회화면의 저항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승복을 행하면서 회화는 (외계 현실의) 모방과 아울러 ‘문학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실주의적 모방과 상관관계를 맺는 회화와 조각의 혼용을 제거한다. (한편 조각은 돌, 금속, 나무 등과 같은 재료들을 그 특성과는 무관한 형상들로 만들려는 예술가의 노력에 그 재료들이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한다.) 회화는 명암 대조법과 음영 부조법을 포기한다. 붓질 brush strokes은 대부분 붓질 그 자체를 위해 분명히 드러난다.”주9)
이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를 간략히 정의 내려도 될 듯싶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 자족성 속에서 각 예술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작가 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형예술의 경우, 매체의 순수성 속에서 추상, 비구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 아방가르드들이, 그의 가치판단을 인용한다면, 예술 생산에 있어서 ‘현재의 최상 present supremac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키치는 간단명료하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모방 이론에 침윤된 아카데미 회화,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보듬으며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을 저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상업 예술이다. 그것들 모두는 모더니즘, 그린버그 용어로 애기한다면,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로 옆에, 저편에 있으면서 아방가르드와 대립한다.
반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가 키치로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 상동물 structural homologue이다. 그 구조적 등가성은 무엇보다도 예술 완성의 시간성에 있다. 둘 모두는 우선 현재를 부정하면서, 예술 완성의 시간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와 형태의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의 도식, 동일한 목적론적 비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신고전주의 미학을 주재했던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드라마 축을, 아방가르드는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체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방가르드의 전범들을 보유한다 (...) 그런데 찬란한 미래가 완성될 전범들의 수탁자가 되리라는 이 사고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착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사회주의적 종말론은 기독교가 영원한 구원을 설정했던 지점에, 인류의 미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반 자체를 설정했던 것이다.” 주10)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공산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조적 동일성은 완성의 시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식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도 등가적이다. 차이점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공식 미술로 삼는 서구의 경우, 그 지배구조가 현대 미술관들의 프로그램 전략 혹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과 같은 대규모 미술행사들을 통해 예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 공산당의 강령을 통해 명시적으로 작용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공식 미술을 각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각 사회가 요구하고 수용하는 기대지평에 순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규범들의 대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화가들이 서구의 화가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적 층위에서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애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의 회화나 소련의 회화나 공공연하게 혹은 음험하게 제시한 전범에 눈에 보이지 않게 혹은 눈에 띄게 순응한다는 것이다. 회화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회화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복종해야만 한다.” 주11)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으로 등가적인 아방가르드는, 잘 클레르에게 있어서, “인간 드라마가 배척되고, 현실이 쫓겨나고, 너무나 손쉽고 편안하며, 아울러 그 다양한 표명들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미술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주12)  더욱이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미술계의 지적 조야함, 비평의 악취미, 수많은 기관장들의 교양과 취향의 결핍”에 기대는 “일찍 꺼져버리는 즐거운 예술의 거품”주13) 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린버그가 키치라 명명한 현대의 저급한 미술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비평가에게 있어서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저급하고 공식화된 모상들을 simulacra 원재료로 사용하여 진정한 예술에 무감각한 자들의 몰취미를 부추기고 가꾸면서, 그것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주14)  결국, 그린버그가 현대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켰던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장 클레르와 더불어 등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모더니티, 아방가르드/키치라는 도식을 사용했다면, 장 클레르는 아방가르드=그린버그의 키치라는 등식을 사용한 셈이 되었다.



III.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의 의미론
어떻게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예술의 모더니티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것은 서구 현대 미술의 부정적 조류, 경향으로 통칭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용어는 그린버그에게 있어서는 쿠르베에서 피카소, 한스 아르프 Hans Arp까지 감쌀 수 있으며, 장 클레르에게 있어서는 말레비치, 마리네티, 몬드리안에서 앤디 워홀, 이브 클렝 Yves Klein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날 예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에 결부된 급진적이며 체제 부정적이라는 정치적 무게를 털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정치 성향, 미학적 취향에 따라 아방가르드는 ‘선험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역사적 출현과 그 용례의 역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그 개념과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미학적 해석, 비평적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미술사학자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출현은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백작이 1815년에 출간한 선집,『문학과 철학 그리고 산업에 대한 견해 Opinions littéraires, philosophiques et industrielles』에서 부터이다. 산업에 의한 사회의 부흥 그리고 인간애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정에 불탄 이 사회주의자는 예술가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부대 avant-garde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긍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공리주의적 이상 사회의 도래를 위한 ‘성직자적 임무’, ‘계몽자’의 역할을 촉구했다.주15) 이러한 논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푸리에주의자인 가브리엘 데지레 라베르당 Gabriel-Désiré Laverdant의 1845년의 책,『예술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De la mission de l`art et du rôle des artistes』에서 되풀이된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가장 높은 비상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표명한다. 예술은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다. 따라서 예술이 그 고유한 임무를 선창자에 걸맞게 완수하고, 예술가는 진정으로 전위부대 avant-garde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의 운명은 어떠한지를 알아야만 한다 (...) 행복의 찬가와 함께, 슬프고 절망적인 시가와 함께 (...)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을 거친 붓으로 폭로해야 한다.”주16)
바로 여기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범주에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개념이 태동한다. 아방가르드 의미론의 기원에 위치하는 까닭에,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명백히 드러난다. 아방가르드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인 전위부대처럼 앞장서서 길을 트는 예술가 집단이다. 미래에 도래할 이상적 사회에 열광하고, 인류의 진보를 계시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는 전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계시하는 ‘성직자적 임무’와 인류의 운명을 선도하려는 ‘계몽가’의 의지로 무장한 예술가 진영을 고려하는 역사적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엽,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전반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심지어는 전통적 풍습, 윤리, 의식구조까지 송두리째 변혁하려 했던 두 예술운동을 알고 있다. 새로운 ‘이상적 도시’, 파시즘을 위해 광적인 선동자 역할을 담당한 이태리의 미래주의 Futurism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엔지니어의 기능을 담당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는 결코 성직자나 계몽 철학자의 면모는 아니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소환한 아방가르드와 그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 ‘계몽가’로 주창한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주17)  회화 장르에만 국한한다면, 그들은 이상적 미래 사회에 걸 맞는 디오라마 Diorama와 파노라마 Panorama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극사실적 회화로 완벽한 현실의 환영감을 주는 새로운 무대미술 장치인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그들이 보기에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이미지였다. 1831년 5월 12일자「Le Globe」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기술적 technique 관점에서 우리는 회화에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디오라마는 아직은 무척 불완전하다. 그것은 아주 최신의 발명이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예술가들은 바로 이렇게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주18)
 새로이 도래할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발명을 촉구하는 이 발언은 아방가르드를 새로운 매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고 탐색하는 예술가들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언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전혀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새로움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커다란 무대화를 보는 색다름이었고, 후자의 새로움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높이와 길이 100m에서 120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벽화의 새로움, 그리고 그 무대화를 위에서 아래로 관람하는 특이함이었다. 반면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의 화풍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비판한 신고전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주19)  재현의 주제 혹은 소재도 거의 전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이 애호한 역사화, 종교화의 범주에서 길어온 것이었고,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내러티브에 집착했다. 아카데미 회화를 강력한 스펙터클과 오락을 환호하는 대중사회에 걸맞게 매머드로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주창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환호한 ‘새로운 회화 예술’의 전범인 디오라마가 언제, 어떻게 ‘기술적 관점에서’ 완성되는지를 알고 있다.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창시자인 작크 다게르 Jacques Daguerre는 1836년 사진이라는 광화학적 기록의 발명을 통해 ‘완전한’ 현실의 재현을 이룩하며,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비춰지는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착시효과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Lumière 형제의 활동‘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완전한’ 무대화로 완성된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주창자들에게 ‘새로운 회화 예술’로 비쳤던 디오라마,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완성인 사진과 활동사진의 재현 모두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원칙인 선 원근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실 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1839년에 그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이나 정지한 낱장의 사진을 움직이는 연속사진으로 발전시킨 활동사진의 현실의 모사는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한 선 원근법의 편리한 재현도구로 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오라마, 사진, 활동사진 모두는 재현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이자 재현의 원칙인 선 원근법, 현실 환영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회화의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천거한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갱신된 아카데미 회화, 혹은 대중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점증하는 강도로 확인되는 산만한 오락”주20) 의 원칙에 부응하는 상업적 아카데미즘에 지나지 않았다.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은 젊게 치장한 복고주의, 상업적 아카데미즘을 아방가르드 회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1860년대 중반에 작성한 그의 단상 초고집인『내 마음을 벌거벗고 Mon cœur mis à nu』에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아방가르드를 조롱으로 비난했다.

“군사적 메타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편애에 대하여. 이 모든 메타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투적인 문학
돌파 지점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다.
(...)
군사적 메타포들을 더 첨가하면,
투쟁 시인들.
아방가르드 문학인들.
이러한 군사적 메타포를 사용하는 습관은 전투적인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다시 말해 순응적인, 하인으로 태어난, 오직 사회집단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리킨다.”주21)

사실 19세기의 프랑스가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군사용어를 미학적 용어로 전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혁명이 야기한 전반적인 삶의 정치화의 귀결이다.”주22) 프랑스 혁명이후 계속 되풀이된 정변 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예술을 연계시키는 사고를 대변했다. 보들레르가 아방가르드를 조롱한 것은 바로 사회의 진보에 예술이 ‘하인’으로 종속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예술을 숭고한 정신활동으로 신봉하고, 예술을 통한 유한한 삶의 구원을 믿었던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에 봉사하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부인하는 태도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혐오하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처럼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언제나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고, 현실 환영주의적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그리고 다게레오타입에 열광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아방가르드는 당시를 지배한 상투적 사고체계에 저항하는 ‘전투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정신’이었다. 보들레르의 조롱 섞인 글이 보여주듯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는 그 용어가 회자되는 만큼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약한 영향력과 예술적 성과 때문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개념의 명료성을 상실한 채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다의적 어휘로 변색되었다.
소명을 부여 받은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에서 아무런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린버그가 상찬한 아방가르드, 즉 ‘모더니티’의 태동에 기여하지 못한데 있는 듯하다. 모더니티에 참여하기는커녕,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찾은 예가 보여주듯이, 갱신된 복고주의에 머문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주의의 전성기가 19세기 초반부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여전히 시효를 상실하지 않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회화 예술’의 ‘열린 방향’을 모더니티에서 탐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의 모더니티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2제정과 더불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받은 아방가르드가 회화에 본질적인 형식의 제 문제, 회화의 순수한 물리적 조건에 침잠한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IV. 나가면서 혹은 제언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고립된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며, 이들은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혁명적인 작업들로 그것을 ‘실험하고’, 이 작업들을 아카데미즘, 전통, 질서에 충실한 반대자들의 비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자들이다. 그 대표자들은 제 형식들을 바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천명하고, 현 예술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사상과 원칙을 폐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의 비전’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를 들면, 관습,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작업방식들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예술을 비웃는다.”주23)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모순되게도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이 전파했던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이 환멸로 바뀌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향도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을 일정 부분 수렴하지만,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남용, 일탈하는 미학적 해석, 비평적 평가들이 쇄도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윤색되었고, 마르크시즘은 그것을 데카당한 서구예술로 간주했다. 미술상 역시 이 용어를 남용하면서 장사 속을 챙겼고, 큐레이터, 작가들도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홍보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성직자의 임무’로서 표명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디오라마와 같은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개념은 상당 부분 부식되었다.
언어의 의미작용은 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형되고, 추가되고, 탈락되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평의 용어가, 살아 있는 미학적 개념이 이데올로기, 미학적 취향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비평의 효율성, 논쟁의 성과, 의사소통의 실질성에 부득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효율적 비평, 성과 있는 논쟁, 실질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 언어의 탄생에 관계된 역사적 문맥, 본원적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무절제한 전략적, 편의적 사용에 의해 어사의 내포 connotation는 무한정 확대되는 반면, 그 외연 denotation은 계속 줄어들어 의사전달에 장애를 초래하는 현상은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사태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라는 어휘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장 클레르가 상정한 아방가르드의 완성의 시간도식은, 그의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의 역사적 의미작용을 포괄하는 혜안이다. 이 탁월한 안목을 변화된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하자.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완성을 더 이상 현재에서 과거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기를 주장하면서, 현재 예술의 진중한 판단을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넘겨버린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상주의를 ‘밑바닥에서’ 다시 세우려했을 때 사회학에서 행했던 바와 동일한 재건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예술의 완성이 현재의 앞에 있건 혹은 역으로 뒤에 있건, 그것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남는다. 아방가르드는 황금시대를 과거에서 상상하지 않고, 미래로 투사했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매몰되는 정신이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몽롱해진 정신이기를 원했다. 진보의 사고는 잃어버린 낙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이론은 방향이 바뀐 노스탤지어일 뿐이었다.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예술의 완성을 투사했던 것이다.” 주24)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이 사라지는 미래, ‘불완전한 디오라마’가 완성되는 미래 등,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장 클레르의 지적처럼 아방가르드의 범주는 사회적, 미학적 완성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미학적 시도의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가 옹호한 아방가르드, 즉 매체의 문제에 전념한 ‘순수한’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들 예술의 완성을 미래에서 구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장 클레르가 아방가르드로 규정한 몬드리안, 이브 클렝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에서 살펴본 의미론의 핵심 사안을 이루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현실참여 engagement를 행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디오라마를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로 간주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의 경솔하고 깊이 없는 미학 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야만성, 모든 오물을’ 전통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폭로하여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만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의미론에 충실한 예들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행 아방가르드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나 상충되어, 현실적 용례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탐구한 작가와 예술집단만을, 그러니까 마리 

네티 Marinetti의 미래주의나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의 러시아 구성주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혹은 한스 학케 Hans Haacke, 앨런 세큘러 Allan Sekula  등등만을 아방가르드의 개념, 범주로 축소해 고려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본원적 의미론에 부합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비평, 보다 생산적인 미학적 논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작가 군들로만 아방가르드의 개념과 범주를 축소, 제한한다 해도, 아방가르드 연구의 볼륨은 만만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회자되지만 혹은 너무 회자되어 아방가르드와 유사한 의미의 혼란에 빠진 미학과 비평의 용어 하나를 거명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1)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I,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11.

2) Jean Clair,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p. 71.

3) Clement Greenberg, art. cit., p. 8.

4) ‘시는 회화와 같고, 회화는 시와 유사하다’는 말로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연유하며, 문학 담론에 의거한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특성을 지칭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역사적 전개와 이론에 대해서는 W. Lee Rensselaer,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을 참조할 것.

5) Ibid.

6)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John O`Brian (ed.), op. cit., p. 32.

7)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9.

8) <<Towards a Newer Laocoon>>, art. cit., p. 23.

9) Ibid., p. 34. 괄호안의 어사는 필자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며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의 의미는 선 원근법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외계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

10) Jean Clair, op. cit., p. 77.

11) Ibid., p. 91.

12)  Ibid., p. 87.

13)  Ibid., pp. 79-80.

14) Cf.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12.

15) Cf. André Chastel,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p. 79.

16)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p. 9에서 재인용.

17) 생시몽은 아방가르드에 화가, 조각가 상징의 창조자 즉 문학인을 포함시켰다. 

18) Nicos Hadjincolau,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p. 52에서 재인용.

19)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결코 두 학파를 절충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학파, 즉 고전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파, 즉 낭만주의적 경향은 완전한 예술로서 삶의 진정한 기호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1831년 5월 2일자「Le Globe」, ibid에서 재인용. 

20)  Walter Benjamin,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p. 169.

21)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pp. 634-635.

22)  Francis Haskell,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 107.

23) Etienne Souriau,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p. 209.

24) Jean Clair, op. cit., p. 35.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Benjamin (Walter),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Chastel (André),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Clair (Jean),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Ibid.
Hadjincolau (Nicos),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Haskell (Francis),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oggioli (Renato),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Rensselaer (W. Lee),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

Souriau (Etienne),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출처:『미술평단』, 제90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8, pp.18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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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크툼? 그것은 바르트의 사진 읽기에서 분리된 두가지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닌가? 두가지 요소?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말이다. “스투디움은 나른한 욕망, 잡다한 흥미, 분별없는 취향 따위의 지극히 넓은 영역이다...스투디움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진가의 의도와 마주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의도와 조화를 이루고, 찬성하든가 혹은 반대하든가 하는 행위인데, 그러나 언제나 내 자신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따져보는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란(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계약이기 때문이다.”(“조”. 32-33쪽)

그러면 푼크툼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르트는 푼크툼이 스투디움을 파괴하기 위해 또는 그것과 박자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nctum. 라틴어로 點을 뜻하는 말-역주)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홈이며 또한 주사위 놀이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상처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늘 단일한 공간에서, 때로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참으로 드물게) 하나의 ‘하찮은 것’이 바로 (나를 찌르는) 푼크툼이다...그것이 선명한 윤곽을 갖건 혹은 그렇지 않건간에 하나의 추가(supplément)라는 것이다. 푼크툼은 내가 사진에 덧붙이는, 그러나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조”. 32, 46, 58쪽)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의 사례로 이영준이 안동 하회마을의 돌담길을 찍은 주명덕의 『경북 안동』(1968)에서 “사진 앞 아래쪽에서 왼쪽 위로 난 자전거 바퀴 자국”을 들 수 있겠다(근데 이영준의 목소리는 케르테츠A. Kertesz의 『바이얼리스트의 발라드』(1921)를 읽은 바르트의 목소리를 닮았다. 물론 그 사진에 나타나는 도로의 결은 바르트가 읽었던 단지 수많은 (인간의) 발길로만 다져진 도로로 국한되기보다, 이영준이 주명덕의 『경북 안동』을 보면서 말했던 자전거 바퀴 자국 그리고 마치나 자동차 바퀴 자국도 겹쳐져 있다). 이영준은 “자신의 신체를 그 사진의 공간 속에 이입”시켜 그 자전거 바퀴 자국을 “권 대감은 버석거리는 포도자락을 휘날리며 ‘이런 고얀지고’하며 돌담의 저쪽으로 사라졌다는 식으로” 해석한다.(“이”. 109쪽)

그 이영준의 해석마저도 바르트의 목소리와 닮았다: “흙투성이 도로에 파여진 결들은 나에게 중부 유럽에 와 있다는 것을 확신을 준다. 이 사진을 보면(여기에서, 사진은 참으로 자신을 넘어선다. 그것이 이 예술의 유일한 표지가 아닐까? 마치 靈媒처럼 자신을 無化시키고 이미 하나의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 예전에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여행할 때 지나갔던 작은 마을들을 나의 온 육체로 알아보는 것이다.”(“조”. 48, 51쪽)

바르트가 케르테츠의 사진 속에 자신의 온 육체를 이입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이영준은 자신의 신체를 주명덕의 사진 속에 이입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말하자면 이영준이 사진의 공간에 권 대감을 등장시켜 자전거 바퀴 자국을 인간의 의미를 위한 해석으로 차용하듯이, 바르트 또한 자신의 주관적인 기억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이다. 그들은 사진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고자 한다. 『바이얼리스트의 발라드』나 『경북 안동』은 하찮은 것들과 동거하면서 “언제나 하나의 모습을 갖도록 강요”(“조”. 19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꼴(形)로 열려져 있다.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푼크툼은 무엇일까?

 

이영준은 주명덕 사진의 짙은 어두운 톤을 푼크툼으로 간주한다. 주명덕은 숲이나 꽃들 혹은 풀들을 찍지만, 그 각각의 풍경은 어둠 속에 �혀있다. 그러나 노출이 숲이나 꽃들 혹은 풀들이라고 말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이 가시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출은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어느 곳에 시선을 둘지 망설인다. 당신은 여러 곳에 시선을 흩뿌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에는 중심(원근법)적 시점이 부재한다. 그것은 당신의 시선을 사방팔방으로 산재케 하는 펼쳐진 풍경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신정아의 시선은 엇갈리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고 평행을 이루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유혹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순수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당신에게 유령처럼 나타나 당신의 머리를 공백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령은 꼴(形)/뜻(象)이라는 대립 구조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유령은 그런 대립 구조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령의 놀이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다.” 유령의 놀이?  

 

“...단순한 풍경사진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자연은 피사체에 불과할 뿐, 작가들이 바라보는 것은 자연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에 잡힌 자연 풍광들을 통해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취를 보게된다. 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 평면을 보게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예술가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예술가의 눈길에 의해 강간되고 길들여진 야생의 자연,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의 처연함, 이 모든 것의 인식이 주는 독특한 미적 체험이 이 전시회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패러독스이다.”(『모노크롬-자연과 영혼-에 부쳐』김혜경. 출저: monochrom : natura & soul. Gallery Artbeam. 1997. 쪽수 기입 부재)

풍경 사진은 풍경이 아니다. 이 너무 명확한 말은 사진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사진의 풍경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실재의 풍경이 사진화 되었을 때, 그 사진은 이미 자연의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풍경-사진은 그 자연의 풍경을 회복할 수 없단 말인가? 노출은 지나가면서 김종태의 진술을 빌려 실경산수화가 진경산수화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김종태는 정선의 산수화를 실경산수화 안에 진경의 의미가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정선의 산수화는 실경 속에 진경의 의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허다한 평론가와 미술사학가들이 정선의 그림을 평가할 때 실경과 진경을 혼돈하여 설명하였다. 정선의 그림이 특출한 것은 사실이고 감탄할 만한 요소가 가득차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왜 그의 화풍이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구도가 어떻고 표현이 어떻고 왼편의 윤택한 산이 있고 수직으로 된 암산이 있고 오른편이 어떻고 하는 소리는 겸재의 그림을 오욕되게 할 뿐이다. 겸재의 근본적인 회화사상은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심오한 진경의 의미를 깨달은 데에 있다.”(“김”. 186쪽)

하지만 정선의 그림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가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을 깊이 이해한 화가라는 진술만으로 그의 그림이 진경이라고 단정내릴수는 없지 않은가? 김종태는 정선의 진경산수에 대한 적절한 논의로 최완수의 진술을 인용한다: “인왕산 특유의 잘 생긴 백색 암벽들이 마치 음화인 양 겸재의 대담 장쾌한 묵찰법(墨擦法)에 의해 검은 바위로 표현되어 있는데 묵백의 상반된 색채 감각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백색 화강암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감을 그대로 인지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나무의 표현도 둥치 거친 붓으로 속도 있게 처리함으로써 일체의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제하였는데 그것이 가지는 우람하고 장대한 기품이 우리 주변에서 보는 수묵의 특징을 너무도 잘 반영해 준다. 특히 이곳에서 보이는 버드나무․소나무․전나무․느티나무 등 노거수의 거친 표현은 바로 그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재현해 낸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것이 모두 겸재가 60평생을 사생으로 일관하면서 터득해 낸 진경의 묘리다.”(“김”. 187쪽)

그런데 노출에게 그 최완수의 진술은 도교의 철학적인 이념이 들어 있는 자연의 풍경화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실경을 토대로 하여 작가의 예술적 재량과 재질에 의하여 산수화를 이룬 실경산수화로 들릴 뿐이다. 그러면 김종태 자신이 진술한 정선의 그림에 관한 해석을 들어보자: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의 「금강전도」는 “구도면에 있어서 전면을 꽉 채우는 구도법을 택하였으며, 또 주봉을 정하지 않고 여러 군봉(群峯)을 실경대로 그리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그 필법이 예리하고 빠르며 수림이 별로 없고 대부분 암산의 표현이 양광(陽光)으로 표현되어 실경 그대로의 운치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더구나 골짜기와 좌편의 수림은 겸재 초기의 숙련된 필법인 미불점법(點法)으로 처리하여 겸재 특유의 의경을 표현하였다.”(“김”. 앞의 쪽수)

정선의 「금강전도」에 관한 김종태의 해석 또한 최완수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실경을 토대로 하여 작가의 예술적 재량과 재질에 의하여 산수화를 이룬 실경산수화로 들린다. 그들의 진술은 구도가 어떻고 표현이 어떻고 왼편의 윤택한 산이 있고 수직으로 된 암산이 있고 오른편이 어떻고 하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아니다. 김종태는 정선의 그림에 자연의 신비사상과 도가의 유명(幽冥)사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언급했다:

정선의 “작품 속에서는 표현의 강약이 살아 있는데 이것은 일찌기 노자가 말한 우주 생성의 원리인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 원리를 이용하여 청나라 초기의 화가 석도는 1획론을 창안하였는데 정선의 그림 속에는 강약이 맞는 리듬이 있으며, 하나를 강하게 그리고 그 밑에 약한 미불점법이 뒤따른 것으로 보아 석도의 1획론을 잘 이해한 것 같다.”(“김”. 188쪽)

아니, 정선의 그림에 표현된 강약이 어떻게 석도의 일획론과 관계하며 더욱이 노자의 우주 생성 원리와 관계한단 말인가? 주명덕의 풍경시리즈는 어두운 톤으로 가득한 숲이나 나무들 그리고 꽃들이나 풀들 등의 풍경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김혜경은 노출에게 그것을 단순한 풍경사진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물론 당신은 한 점의 사진작품을 보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고자 할 것이다. 그 의미는 김혜경이 말했듯이 작가 주명덕이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마치 그 점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을 달리 생각해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의 욕망의 흔적(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인 인간적 자취)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읽(보)고 싶은대로만 읽(보)고자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출이 앞에서 말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에 주명덕 자신의 주관적인 옛 향수가 지독하리만치 제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노출의 진술 또한 노출이 읽(보)고 싶은대로만 읽(보)고자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출은 노출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노출이 본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그가 가능한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있는 그대로와 표현에는 피치못할 간극이 있다. 왜냐하면 풍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표현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출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는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즉 이미 의미로 오염된 시각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에는 절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절제는 다름아닌 주체의 의미에 대한 절제이다. 노출은 그것을 주명덕이 찍은 장소로 언급했다. 말하자면 주명덕은 흔히 아름다운 혹은 특별한 풍경을 찍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노출이 손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불특정한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노출의 시각에 덜 길들여진 것이라고 노출은 생각한다(특정한 장소,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장소는 우리의 의미들로 대리되어 버리기까지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노출은 그 사례로 사람들이 흔히 주명덕의 풍경사진을 보고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나 그 풍경사진에 말이 사라졌다는 이영준의 진술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출이 몇 평론가의 글을 인용했듯이, 그들은 그 주명덕의 풍경사진을 그들의 시각으로 길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은 김혜경이 말한 패러독스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문제는 그것을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출이 김종태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정선의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로 부르는가 하면 때로는 실경산수화로 부르기도 한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뜻하(지 않)는가? 혹시 그것은 김종태가 말했듯이 정선의 실경 속에 진경이 표현되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진동선이 구분했던 진경/실경이라는 대립구조는 형이상학적 담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진동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풍경(실경)은 김혜경에게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취, 즉 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 평면으로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예술가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예술가의 눈길에 의해 강간된다고 김혜경은 냉정하게 단정내린다. 하지만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진의 풍경을 폭로(révélation)한다는 점에서 자연을 강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 김혜경은 사진의 요술적인 힘을 함정이 아니라 운명으로 착각한 것 같다. 때문에 그녀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관람자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관람자의 눈길에 의해 강간될 수도 있다는 점을 스스로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주명덕이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일듯 말듯 흐려 놓는다고 신정아는 중얼거린다. 이영준은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나타나는 검은 톤이 그 자체로 무엇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말을 피하는 그만의 방식으로 간주한다. 그는 그것을 지우기에 비유한다. 그러나 당신이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숲이나 꽃이나 풀 등이 완전히 지워진 검정-모노크롬(black-monochrome)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흑․백-사진(monochrome)이지만 다양한 묵(墨)의 색처럼 폴리크롬(polychrome)이다. 이영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사라진다. 그와같은 묘한 분위기를 이영준은 마치 지우려는 힘과 지워지지 않으려는 힘이 맞서고 있는 대치 상태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아니다. 그것은 서로 맞대하여 버티는 것(對峙) 혹은 서로 마주 놓음(對置)이라는 대립적인 관계라기보다 오히려 변화를 뜻한다.

그러면 그것은 하이데거(M. Heidegger)가 존재문제(Seinfrage)를 탈-구축(De-struction)하기 위해 존재(Sein)라는 문자에 삭제표시를 한 것처럼 풍경(존재)에 삭제표시를 한 것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이전의 개념이 변화했기 때문에 혹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지운 것이지만,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삭제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삭제한 것이라고 말이다(따라서 그것은 이영준이 말한 “사라짐의 저항”이라기보다 차라리 사라짐의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것은 지금 스스로 현전하는 것이라고 단정내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러면 그것은 지금 현전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교부된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그것은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를 유보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그것은 나타남-사라짐(Erscheinen-Verschwinden)이라는 존재론적 차이에 사라지는(zu verschwinden)을 덧붙인, 즉 나타남-사라짐의 사라지는(Erscheinen-Verschwinden zu verschwinden)이 아닌가?(혹시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드러나는 어두운 톤이 다름아닌 존재와 부재 사이에 삽입시킨 사라지는의 기능을 떠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데리다는 존재론적 차이를 유보시키는 것일까? 유영미(you young me)는 『책보다 표지가 더 좋다』에서 그 이유를 관념적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관념적 위험? 그/녀는 그 문구의 옆에 괄호를 위치시키고, 그 괄호 안에 거세의 동어반복(Topologie der Kastration)이라고 삽입했다. 그러면 존재론적 차이의 유보는 거세의 동어반복에 처할 위험에서 이탈하는 것이란 말인가?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사진미학을 구분하는 잣대로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스투디움(studium)'이란,

대상에 대한 호의와 맥락적 관심은 있으나 특별한 강렬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감정을 의미한다.

즉 '외부 여진 문화적 앎?'을 전제로 한 가장 일반적인 사진감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라틴어로 '점'을 의미하는 '푼크툼(punctum)'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함을 의미한다.

즉 사진의 세부적인 구성요소 등을 통해 감상자나 뇌리 속으로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 바로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푼크툼은 보편적이고 분석적인 맥락 이전에 감상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 잠재의식 따위와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이다. 따라서 푼크툼을 관통하는 미학적 특성은 논리성이라기보다는 우연성이다.
롤랑 브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투디움은 대상을 코드화시킴으로서 사회와 화해시킨다.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이 하찮은 세부가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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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출판업자 알베르 스키라 (Albert Skira)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호화로운 잡지의 출판을 꿈꾸고 있었다. 호화롭다는 말은 잡지의 값비싼 장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잡지의 편집과 내용을 위해 참여한 예술계 인사들 역시 호화 인사여야 했다. 대중들의 혹은 문화계 속물들의 값싼 인기나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예술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그야말로 빛나는 인사들이 잡지의 편집에 기여해야 했다.
  스키라는 잡지이름을 정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바로 곁에 작업실이 있는 25세 연상의 피카소와 상의를 했다. 피카소는 기존 예술계를 일신하려는 스키라의 의도에 ‘깃털 비 (Plumeau)’라는 잡지명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제 비트락 (Roger Vitrac)이 나중에 제안한 ‘미노타우로스’가 덜 가볍다고 판단하고 스키라와 피카소는 이것을 잡지 이름으로 정한다.
  이 잡지의 편집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그룹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었다.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공산주의 혁명과 비합리적, 비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개발하려는 초현실주의 혁명 사이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1935년에 자살한 르네 크르벨 (Rene  Crevel)을 통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알게 된 스키라는 서구 문화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이들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잡지의 편집에 적극 끌어들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교황’ 혹은 ‘마법사’의 역할을 행한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시인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 운동에 세례를 받은 철학자 로제 카이우아 (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 (Michel Leiris) 등은 정기적으로 「미노타우로스」에 그들의 글들을 기고했고,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후앙 미로 (Juan Miro) ,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달리 (Dali), 쟈코메티 (Giacometti) 와 같은 예술가들도 글이나 그들의 작업을 수시로 게재했다. 그리고 브랏사이 (Brassai), 만 레이 (Man Ray), 라울 위박 (Raoul Ubac)은 잡지의 사진 도판을 담당한 사진가들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만 레이의 <미노타우로스>는 1935년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 7호의 안표지를 장식한다. 머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한 여자 혹은 남자의 상반신은 강력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속에 있다. 남녀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미노타우로스는 팔과 가슴의 애매한 근육구조와 풍성한 겨드랑이 털, 그리고 그림자 속에 잠겨버린 복부 때문에 남녀양성적 존재, 혹은 성의 특색이 없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러한 재현양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초현실주의적으로 개작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해괴망측한 탄생의 이야기를 갖는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재물로 바치기로 한 신탁 황소를 재물로 바치지 않는다. 포세이돈은 이에 대한 징벌로서 미노스의 아내, 파지파에가 이 황소를 겉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파지파에는 황소에 대한 욕정을 풀기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에게 실물과 똑같은 암소를 만들게 한 후, 그 뱃속에 들어가 사랑에 빠진 황소와 수간을 한다. 이 교접을 통해 미노타우로스는 태어나고, 분격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건축한 미궁에 이 반인 반수를 가둔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미노스는 해마다 혹은 9년마다 7명의 청년과 7명의 처녀를 넣어 주게 되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아리안의 실’이라는 이야기가 비롯된다.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안이 건네준 실뭉치의 실을 풀면서 깜깜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의 어둠을 빠져 나온다.
  그런데 파지파에와 황소의 엽기적 사랑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남는다.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반인 반수는 사람의 머리와 짐승의 몸체를 갖는 반면, 오직 미노타우로스만이 짐승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반인 반수들은 인간의 머리로 사고하고 짐승의 몸으로 행동하는 반면, 미궁의 괴물은 짐승의 머리로 사고하고 인간의 몸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노타우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황소에 대한 정욕에 미쳐버린 그의 어미처럼 그는 이성의 통제, 합리적 계산, 논리적 사고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이다. 그는 동물로서 욕망하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존재의 표상이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로제 비트락이 스키라에게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연계를 기대하며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미노타우로스’로 추천한 것은 따라서 우발적인 것도, 단순한 기지의 산물도 아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로트레아몽 (Lautre amont 1846-1870)의 『말도로르의 노래 Chants de Maldoror』에 나오는 환상적인 동물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인간의 야수성의 탐구는 초현실주의의 일반적 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 황소머리로 대체된 미노타우로스를 자신들의 예술적 활동의 표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구를 지배한 이성주의, 합리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머리가 사고하는 이성과 논리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욕망과 광기의 화신이었다.
 
  서구는 17세기와 더불어 철학, 심리학, 정신의학 등 제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를 조직하고 경영하는 기술에 있어서 오직 이성의 언어, 합리적 행동만을 존중하고, 광기의 행동과 무의식의 언어를 무시하고 탄압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광기는 철저하게 일반의 시선에서 격리되고 감금되었으며,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욕망은 추잡하고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이성의 합리주의와 논리적 사고로 해명될 수 없는 인간 활동의 영역, 사고체계는 미신으로, 거짓으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완성되자, 서양의 문화사, 서구의 사회사의 전개는 합리적 이성의 제국주의가 꿈, 욕망, 무의식, 광기의 세계를 억압하는 양상으로 철저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논리중심주의는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와 맞물려 있었다. 데카르트적 이성중심주의가 모든 비이성을 문화의 영역 밖으로 추방해 버리고, 반이성의 입을 봉쇄하는 권력으로 자리잡는 것과 병행하여, 합리주의적 사고, 논리적 추론을 신봉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를 점진적으로 확고히 해나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치적, 군사적 통치권으로 연결시키는 급진적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유럽의 지배는 역사적 기정 사실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심각한 위협은 언제나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은 많은 지식인, 젊은 예술가들에게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야기했고, 이성 중심적 서양문명의 한계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되 돌이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사회지배를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체를 부각시켰다. 여기에서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전통적 서구문명의 위기와 몰락의 가능성을 보았고, 인간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인습적 사고의 틀을 파괴하고자 했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에 기반을 둔 모든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을 거부하고, 인간의 삶을 새롭게 갱신할 사고, 예술, 제도를 암중모색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심판관’이라 불린 앙드레 브르통에게 있어서 인간의 새로운 삶을 보장해줄 메시아적 메시지의 보고(寶庫)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과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인 사상과 이상에 대하여 차원 높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트로츠키 (Trotski,1879-1940)가 쓴 『레닌』이었다. 프로이드는 부르주아의 사회가 규정한 인간관을 일거에 전복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논리와 이성이 억압한 성적 충동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결코 이성이 지배하는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부조리한 욕망의 존재이다. 프로이드가 확립하는 새로운 인간관에 자극 받아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가 규정한 ‘현실 원칙’에서 벗어나 ‘쾌락의 원칙’에 몰두하고자 꿈과 무의식의 세계, 충동의 세계를 탐색했다. 현실 원칙의 근간을 이루는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17세기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이전의 미신적, 마술적 세계관을 탐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원칙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이미지, 우연의 사고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심리적 상태를 선호했다. 프로이드가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행동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발명한 자유 연상을 허용하는 최면 상태, 반수상태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개발하고자 몰두했다. 전제주의적인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만이  ‘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초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드가 기성의 윤리와 규범,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논리, 이성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을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초현실’에 도달할 분명한 이론을 부여했다면, 트로츠키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를 타개할 이데올로기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비쳐졌다. ‘진정한 삶’을 위한 인간 사고의 변혁을 ‘초현실주의 혁명’이 담당한다면, 진정한 삶을 위한 세계의 변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 행할 것이라고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트로츠키의 실각으로 인한 소련의 전제주의적 노선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의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공산당의 입당과 탈당,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와 회의 등 1930년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혁명을 향한 노선은 지리멸렬해진다.
  만 레이, 브랏사이, 라울 위박, 작크 앙드레 부아파르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은 1920년대 이후 간행된 수많은 초현실주의 저작물, 정기 간행물에서 그들의 사진을 통해 초현실주의 텍스트를 도해하고 설명했다. 특히 만 레이 (1890-1976)는 1921년 파리에 도착하여 마르셀 뒤샹의 소개로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인물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초현실주의가 탐구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성적 충동의 세계를 작가들의 텍스트에 의거하여, 초현실주의 이론의 여파 속에서 여러 사진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시각화했다.
 
  만 레이의 작업 중에서 우선 특기할만한 작업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여섯 번째 노래의 한 구절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사랑스러운”
  그러니까 이 시는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이 전혀 논리적, 인과적 상호 연관성이 없이 서로 함께 마주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 1 선언>>에서 1918년에 발표된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의 글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가 애호하는 이미지를 분명히 했다.
  “이미지는 (...)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키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접근된 두 개의 현실의 관계가 보다 거리가 멀고 적절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며, 더 한층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즉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킬 때 초현실주의가 기대하는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띤” 이미지가 태어난다. 만 레이가 예술을 반이성, 비이성을 구체화하는 행위로 규정한 다다이즘의 주동자, 트리스탕 차라의 서문과 함께 1922년 출간한 포토그램 사진집, 『감미로운 평원 Les Champs d licieux』은 그러한 예의 전형으로 남는다.
  두 번째로 만 레이의 사진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일상성 속에 내재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남녀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사물들을 적절한 각도에서 잡아내어 불합리한 성적 충동이 꿈틀대는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성에 대한 억압된 충동이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세 번째는 기존의 윤리와 인본주의적 사고를 초현실주의의 이념에 비춰 비웃는 작업이다. 자살을 유머로써 예찬하기도 했고, 항문에 손을 얹은 여인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한 후 <기도>라는 제목을 붙여 종교적 경건주의를 냉소했다. 솔라리제이션을 통해 체액을 방사하는 듯한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 한 후 <사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선언하기도 했다.
  189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만 레이는 파리에 도착한 30세 이후,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유명 예술가들과 적극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성가를 최고도로 높인다. 1976년 그가 파리에서 죽은 후, 여러 미술사가들은 그의 작업이 초현실주의의 핵을 형성하는 작업임을 인식하게 된다. 해서 장인적 노고가 결여된 유희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그의 사진작업은 빠른 속도로 높은 컬렉션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가짜 눈물을 붙인 한 여인의 눈을 클로즈업한 <유리 눈물> (1930-33 경)은 1993년 19만 3천 불에 경매되었고, 1995년에는 26만 6천 5백 불에 경매되었는데, 최근에는 100만 불에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만 레이, <미노타우로스, Minotaure>, 잡지 「미노타우로스」, 1935, No. 7의 속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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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테마 사진적 재현과 형상이탈 
  
  앞서 언급된 아홉 가지 테마 내용들은 사진적 재현에 관하여 대체로 객체에서 주체로, 코드에서 탈코드로, 혹은 논리 중심에서 감각 중심으로의 사변적 이동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공통된 맥락은 한 마디로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의미적 규명으로부터 “탈퇴”를 말하는데, 이는 모더니즘의 “형상이탈(deconstruction de Forme)”1)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종의 “계열적(패러다임) 이탈”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20세기 후반 소위 후기구조주의라는 사변적인 운동에 있어 가장 분명한 개념적 변화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한 “이성”에 대한 일종의 탈-구조주의적인 혹은 탈-계몽적인 사변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을 보는 관점 즉 철학을 크게 양과 음의 두 양대 산맥으로 나누어 볼 때(물론 이러한 구별은 엄밀히 말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사회와 집단사회를 지배해 온 인식론(양의 세계)과 정신과 개체를 우선으로 하고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대상까지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존재론(음의 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후기구조주의는 약간의 담론적인 모순이 있지만 구조주의의 개념적인 지주로서 간주되는 인식론적 사고로부터 이탈 즉 존재론적 사고로의 이동에 관계된다. 흔히 말하는 개혁이나 혁신은 과거에 규정된 의미의 탈당 쉽게 말해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모더니티)을 말하는데 이는 르네상스 이후 계몽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유효한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또 그러한 형상이탈의 연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이탈”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진보적 이탈의 연속 즉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사변적(존재론적) 경향을 후기구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똑 같은 모더니즘 이탈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이성의 영역 밖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의미와 형상의 옷을 요구하는 인식론적 혹은 형상론적 관점(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에서 볼 때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탈을 탈-모더니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엄밀히 말해 인식론적 용어이며, 동시에 가장 최근에 양식과 의미의 옷을 수여 받은 새로운 모더니즘 개념인 셈이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의미로 하나의 예술적 양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정신)은 거시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관계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몇 세기 전부터 (과학적 사고의 맹신으로 인하여) 단지 망각되고 소외된 존재의 재발견 혹은 그러한 인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록 과학적 인식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존재론(형이상학)을 오랫동안 철학의 큰 줄기로 간주하는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사변적 급변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반(anti)-구조주의 즉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변적 이동은 과학적 논리를 기초로 한 인식론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종의 극복으로 이해되며 존재론적 관점(특히 유럽의 프랑스 철학)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상들은 사실상 그간 오랫동안 인식론에서 무시되었던 비 인식적, 말하자면 비 상식적 대상들(음영들 ombres)이다. 그래서 의미와 논리에 익숙한 규명론자(말하자면 인식론자)들은 이러한 음의 실체를 “포스트”라는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혀 흔히 또 다른 양식의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유럽의 존재론자들은 소위 포스트모던한 대상들을 단지 의미의 생성-변전(devenir-forme)에서 한 단계의 존재로 이해할 뿐이지 엄밀히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대상(실존 existence)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변적 대상을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을 상상으로의 복귀 혹은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 말할 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인식론적 관점)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코드의 존재적 재발견은 흔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상”으로 이해되고 그 명칭도 당연히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념적 이해와 설명은 모더니즘과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데 흔히 오랫동안 물질사회에서 소외된 (생성 혹은 질료)존재론적 개념으로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예술(창조)적 맥락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또한 당연히 존재론적 설명을 우선으로 하고 이론적으로 과학적 지식이 아닌 설화적 지식을 그 배경(장 프랑수아 료타르,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 1984)으로 하고 있다. 보다 더 정확한 사변적 이해를 위하여 우선 모든 대상을 논리와 의미 즉 과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의 철학적 개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티(modernity / modernite)라고 하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중세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 에서 유래하며 과거와는 다른 신식 혹은 새로움이라는 의미로 5-6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용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도입하였는데 한편으로 그 용어의 절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modernism)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는 르네상스 이후 정확히 말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과학의 진보 등 일련의 근대적 사건과 특히 18세기 계몽시대의 이성(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가치관에 관련한다. 그래서 “모던”은 연대적으로 흔히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적 구분으로서 “근대(modern)”를 지칭하고 또한 개념적으로도 크게 계몽시대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사실상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물질 중심의 사변적인 큰 패러다임을 말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볼 때 상대적인 용어로 도입된 경우인데 그 개념적인 측면에서 “모더니티”는 각 시기마다 그 시대의 전통(규명된 형상)과는 다른 뭔가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치 “신구 논쟁”처럼 언제나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한다. 즉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상대적인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 이때의 용어는 “현대”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전통적인 형상(Form)에 도전하고 혁신을 이루어 내려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형상이탈” 혹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진보나 혁명”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모더니즘 관점에서 19세기의 현대성과 20세기의 현대성은 분명히 따로 있으며 오랫동안 구조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각각의 새로운 정신들, 다시 말해 일련의 “형상이탈”들을 시간적으로 일종의 계단식 발전을 거처 궁극적으로 총체적 역사발전을 이루게 하는 사변적인 진보들로 간주하였고 또한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모더니즘의 역사성은 그처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마치 고대는 새로운 탄생의 토대가 되고 새로움은 언제나 또 다른 새로움을 위한 출발이 되듯이 언제나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이는 곧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본질 즉 끝없는 새로움을 향한 발전적 역사성을 말한다. 그래서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이나 기술적 발전에 있으며 여기서 진보라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양식 혹은 공리(모더니즘의 역사성)를 말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이러한 진보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형상이탈들은 20세기를 접어들면서 일어나는데 예컨대 인상주의로부터 입체파, 다다, 구성주의, 표현주의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더욱이 아방-가르드의 표명은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로 간주된다. 이러한 진보적 사고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컴퓨터의 지속적인 기술 발전과 같이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와 혁신 그리고 의미의 새로움에 관계한다.2) 그러나 형이상학에 대한 지나친 멸시와 지나친 물질 숭배 사상으로 인한 인간주체의 상실과 삶의 질적 문제에서 이러한 사고는 50년대 이후 분명한 사변적인 착각으로 나타난다 : 이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3),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인간이 무한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과학적 사고(대표적으로 자연을 인간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시킨 산업혁명) 그리고 평등을 빙자한 자유 지상주의와 획일성, 진보의 필연성과 무한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4)과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진보 사상과 자연지배 사상이 결합된 오늘날 모더니즘 정신 즉 과학적 사고의 배경을 이룬다. 결국 인간의 유한한 측면(나약함)을 제거하여 인간을 의도적으로 절대화한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화는 결국 20세기 후반 실패한 모험으로 끝나는데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와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알다시피 1950년대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천명한 그의 모더니즘 공리5)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은 중세의 “신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을 “인간(이성) 절대주의”로 대치하여 당시 새로운 사변적 패러다임을 세웠는데 이는 오늘날 물질에서 정신으로 지향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로 이성과 물질을 향한 전통적 형상에 대한 계열적 이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특징은 흔히 현실의 재현성(repr esentativite), 의미를 갖는 목적성(signification), 새로움을 말하는 독창성(originalite), 작가의 주관성(subjectivite)을 들 수 있고  모더니즘적 작품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특징에 의해 인정된 모든 “상징적 미적인 작품”을 말하기도 한다. 사진의 영역에서 예를 든다면 20세기 사진을 외형적으로 하나의 코드화된 메시지 혹은 함축적인 상징(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 뒤봐)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의미와 과학적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스투디움(studi-um)은 이러한 논리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특히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사진을 읽는 일종의 암호(코드)로 간주되었다. 또한 지금까지의 사진의 역사에서 역사의 나열은 단순한 논리적 사고에서 마치 퍼즐과 같은 짜집기 형식으로 인위적인 의미 부여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의 새로움은 우선 시간의 역사성과 의미 창출 특히 예술에 있어 매체 고유의 형식에 있으며 이러한 논리 속에서 모더니즘은 끝없이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에 모든 발전의 토대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탈은 모더니즘의 형상이탈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이탈이다. 쉽게 말해 형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재현성, 의미성 그리고 독창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총체적인 규칙과 과학적 지식들의 근거를 이루는 보편적 의미와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탈은 오랫동안 우리의 논리적 의식(상식)에서 소외되고 망각된 존재들(음영) 이를테면 무의미, 탈-코드, 동성애, 직감, 특히 사진에 있어 푼크툼(punctum)과 같은 비인식적이고 비상식적인 것들의 추적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러한 형상이탈은 르네상스 이후 모든 역사적 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계몽주의적 계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극복, 비판, 진보, 개혁, 혁명)이라는 의미로서의 “포스트”(예를 들자면 후기인상주의 혹은 후기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그 자체로부터 정 반대 방향을 갖는 큰 형상이탈의 의미로서 포스트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급하자면 “탈 모더니즘적 현상들에 관한 사상적 포착”을 말한다. 또한 “인간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적 구속성을 수용) 속에서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인 혹은 개체와 집단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유한성의 철학”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인간 유한성의 수용은 그간 소외되었던 많은 형이상학적인 것들, 즉 이성과 인식이 도달치 못하는 음영(ombres)에 대한 학문적 이해와 추적으로 간주된다.

  그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정신은 현대 계몽주의자가 전제하는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현재 무한한 가능성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에 대한 우리의 거만한 태도를 다시 인간의 유한한 공간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의도로도 이해된다 : 오늘날 이성 절대주의의 물질사회에서 생태학적 위기, 인간성 상실, 자아상실, 주체와 주제의 증발 등은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논리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증거임과 동시에 파멸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화된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무한한 새로움의 환상과 절대적 맹신을 축출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도를 갖는다. 그러한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 상태(etre/esprit)”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계급적 개념을 탈피하고 그 정신적인 측면에서 “문화적 자유성(La liberte de la culture)”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일종의 형이상학의 회귀 혹은 망각된 존재(음영)의 정신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적은 어떤 새로운 의미 즉 양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근본적으로 무의미와 탈-코드에 대한 사변적인 추구임과 동시에 규명할 수 없는 존재의 발견과 제스처에 관계(오늘날 프랑스 철학의 가장 중심된 담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기구조주의자들(특히 생성 존재론자들)은 이러한 사변적 경향을 아주 더물게 포스트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라고 언급하고 또한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적어도 유럽에서 좁은 의미로 단지 오늘날 물질사회에서 나타난 미국식 표현적 예술 양식(대표적으로 제프 쿤, 신디 셔먼, 낸 골딘 등)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들 의식에 오랫동안 익숙한 모더니즘적 혹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마치 또 하나의 모더니즘의 형상(물질적 형식이나 유행으로서 “후기”-모더니즘 ?)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그러한 획일적 유행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이해를 무의미와 비 인식으로 대변되는 존재론적 음영의 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사회와 집단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아직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모더니즘적 “의미적 수용”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 예술적 장르에서 선구자들이 표현적 대상으로 개척한 탈-모더니즘의 특징들 예컨대 자아상실, 주체의 증발, 도용, 모작, 혼용, 잡종 등과 같은 이슈들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물질사회의 한계와 모순으로부터 출현하는데 이것들은 일종의 자본주의의 병폐와 배설물에 대한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예술적 메시지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추적은 사실상 애초에 의미화 되지 않은 무의미 혹은 탈-코드의 “음영”이였는데 이때의 탈-코드적 추적은 모더니즘에 대한 정신적 이탈로 간주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신적 행위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상태라는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수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말(그러나 점진적으로 60년대 초부터) 예술의 전반적인 영역에 적용된 예술적 공통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1980년대를 돌면서 모더니즘에 익숙한 눈으로 볼 때 외형상으로 마치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것처럼 혼란과 혼동 그리고 다변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엄격한 현대성(모더니즘)과 결별하면서 형식의 자유(다양성)와 절충주의(혼용과 잡종) 그리고 환상주의(연출)적인 특징을 갖는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고갈되어 그 위기가 도래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적 표현 양식이나 형태 속에 보다 넓은 모더니즘의 재 번역과 전통적 요소와 절충을 행한다”(사전적 정의들, 라루스 사전).  이러한 재 번역과 절충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의미의 형상으로 말하는데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에 대한 모더니즘적 번역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 없는 명분과 논리 없는 대상은 없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이러한 탈-코드들이 일단 음지에서 양지로 들어오면 다시 말해 일단 객관적으로 의미의 옷을 입고 나면 그때부터 탈-코드는 즉각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형상(형식)이 되어 평범과 진부를 향한 하나의 양식(bon sens)혹은 패러다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론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는 단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형식으로만 보일 뿐이고 언제나 그것을 양식적 관점에서 모더니즘의 형상이탈로만 간주할 것이다.
 
그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미적 측면에서 그리고 조형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모더니즘의 최신 유행이나 양식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표현양식과 기법이 아닌 자아상실, 동성애, 여성해방과 같은 최근에 유행하는 예술적 명분이나 슬로건 위에 첨단 기법이나 구성상의 획기적인 기술로 제작된 사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적 행위는 사진을 음악으로 간주할 때 최신 대중가요 따라 부르기와 뭐가 다른가 ?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본 존재론적 테마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내용상의 의도는 사진적 행위에 있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분명한 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혹은 정의라고 하는 진술도 사실상 “설득”이 아닌가 ? 다시 말해 이러한 것을 이렇게 찍어야 한다, 그러한 분류의 대상은 사진의 재현 대상이 아니다, 혹은 반드시 이러한 논리와 형태로 찍어야 한다라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설득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명성은 흔히 즉각적으로 혹은 이미 또 다른 논리와 의미의 규칙(형상이탈 이후)을 만들기 때문인데 이는 양의 세계에서 끝없는 인식의 확장 즉 의미의 새로움과 규칙의 연속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재현의 대상을 그와 같이 분명하고 정언적인 형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개념에서 전위적인 새로운 규명에 관계하거나 혹은 특정한 대책이나 대안 없이 제시하는 비구체적인 진보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언제나 시간적인 전후를 가지는데 가령 어느 시점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앞과 뒤는 신구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서로 역사적인 상관 관계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분명한 역사성과 논리성을 갖고 또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양식(유행, 스타일, 방식 등)”을 동반하지 않는가 ?

  결국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분명한 사변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 전자의 경우는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물질적인 실체이고 후자는 후기구조주의 혹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사변적인 이해인 것이다. 예컨대 존재론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마치 숲 속에서 숲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우리들의 테마들이 묻는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에 대한 답을 굳이 밝히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의미와 논리의 눈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어두운 동공(ombres)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
1) 여기서 말하는 “이탈”은 우선 어원적으로 파괴 혹은 분해(deconstruction)라는 전복적인 용어에서 번역상 의역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현재의 형상(가치관, 규명된 것, 인식, 유행 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형상 위에서 보다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형상을 위한 사고의 이탈(소위 모더니티 즉 현대성)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은 흔히 말해 새로운 유행이나 패러다임 혹은 모든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데 모더니즘 계열에서 공통적으로 역사성과 미래지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인상파 그림들의 공통점은 전통 미술과는 달리 당시의 근대화된 사회의 특성(변화와 유동성, 도시의 삶에 있어 인상적인 것)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살롱 아카데미의 역사화 같은 전통적 주제와 규범을 거부하고 순수한 색채와 자유로운 회화적 표현을 우선으로 하면서 그 소재들은 농촌이나 들의 풍경보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에 관계한다. 마네의 경우 자연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하는 터전으로서 자연이었다(자연주의 사실주의 역시 상상이 아닌 인간 생활과 사실에 관한 주제를 화폭에 담는다). 물체의 경중이나 색조의 조절로 물체를 조절했고 변화무쌍한 반사광을 표현하여 고정된 외관이 아닌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근대의 삶을 표현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러한 정신은 20세기 전반기 아방가르드들의 새로움을 위한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결국 1950년대 소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공리를 보게된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의 형상이탈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아닌 탈-모더니즘의 새로운 계열적 이탈(포스트모더니즘)이 된다.

3) 인간이 직접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의식은 곧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 전환(종교개혁과 종의 기원)”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의 확립은 인간 내면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인식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히 주어지지만 스스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 결국 계몽사상은 인간에게 인간 이성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야기 시킨다.

4) 현대의 계몽주의는 좋아지기 위해서 변해야 한다는 또는 사회가 변하면 좋아진다는 무조건적인 믿음. 무엇 때문에 사회와 인간이 변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기술 물질 만능시대에 기술 개혁과 새로움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을 추구하는 진보들은 사실상 현 계몽주의(이성, 물질, 과학지상, 집단 획일주의자) 체제를 정당화하는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다.

5) 하나의 원칙 즉 “각각의 예술에서 유일한 고유의 영역은 그 매체의 천성(특수성)이 유일한 것을 갖는 모든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또한 하나의 방법 즉 “각 예술은 다른 예술에서 빌려진 효과와 방법들을 제거함으로써 순수정화(purification) 된다”라고 미국의 비평가 그린버그가 천명한 예술적 공리를 말한다. 결국 이러한 순수정화는 예술 창작에 있어 차후 엄격한 분석을 가지고 왔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그림, 조각, 사진 등 각 예술의 어떤 근본적인 존재(essence)를 믿었는데 이는 결국 각 매체의 고유의 양식과 스타일이라는 분명한 형상의 발전(모더니즘의 형상이탈)으로 간주했다.
 
 
글·이경률
(사진이론 박사)

이번호로 이경률 박사의 연재가 끝나고 새해부터 이경률박사의 새 기획물로 독자 여러분과 만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도판 :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그림자 (동판, 초)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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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문화를 위해 싸운 지성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1.28~2004.12.28)


“사진은 무엇인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경우에서만 충격을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름을 할 때 판돈이 자꾸 올라가는 것처럼, 충격을 담은 사진이 자꾸 퍼져 나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전율을 느끼지 않게 된다.”(1977년 수잔손탁 저서 ‘사진론’ 중)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2003년 수잔손탁 저서 ‘타인의 고통’ 중)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비평가인 수잔손탁(Susan Sontag)이 지난해 12월 28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30여년간 암과 싸워왔으며, 이 과정에서 질병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기술한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1978년)을 펴내기도 했다.
수잔손탁은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와 독일의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사진에 관한 비평서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사진론’(On Photography)과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펴낸 저자이다. 또한 소설가이자 수필가, 영화제작자, 무대연출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문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회 제반의 문제에 명료한 해석을 제시해왔다. ‘On Photography’는 한국에 ‘사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에 소개되고, 90년대에는 롤랑 바르트의 글과 함께 ‘사진론’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출간돼, 사진 철학의 담론서로 읽혀져 있다. 88년 미국 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하기도 한 그녀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 중이던 김남주, 이산하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월간사진은 수잔손탁의 죽음을 전한 외신을 인용해, 그의 생전 활동과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수잔손탁은 1933년 1월28일 뉴욕에서 태어나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이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와 69년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 등 두권의 비평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은 ‘사진론’(On Photography)과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미국에서’(In America)를 비롯해 4권의 평론집과 6권의 소설 그리고 수종의 에세이, 영화 시나리오, 희곡 등 수많은 화제작을 집필했다. 그녀의 책은 현재 전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작가들이 사회 문제에 제 목소리 내지 않을 때 수잔손탁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남길 원했다. 수잔손탁의 현실참여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1966년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백인은 인류에 암적인 존재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처럼 베트남전의 허구와 미국의 은폐된 역사를 고발했다. 또 911테러 이후에는 부시행정부를 비판하고 미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는 되지 말자’는 뉴요커지 기고를 통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강하다는 건 누구도 의심 않는다.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며 일방주의를 맹비난했다. 또한 그녀는 이같은 말도 덧붙였다. “문화와 문명, 자유세계에 대한 비열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동맹 관계에 대한 세계의 분명한 자기 방어이다.”, “(도덕적인 일반적 가치의)용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테러를 가한)그들은 학살자일진 몰라도 겁쟁이는 아니다.” -AP통신


 


세 번의 암을 이겨낸 후 수잔손탁은 93년 여름 전쟁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서 그녀는 전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앞서 베트남전쟁의 찬반양론이 날카롭게 맞서는 동안 그녀는 대담하게 하노이를 찾았고, 911 이후에는 테러범은 ‘겁쟁이는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같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을 받아왔다. 시카고대 데보라 넬슨 교수는 “나는 그녀가 가장 훌륭한 비평가로 기억되리라 확신한다”며 “그녀의 저서는 30년, 40년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깨우침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감각과 장르 묘사에 탁월한 힘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수잔손탁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똑같이 진지함과 통찰력을 갖고 연구했다. 넬슨교수는 “전문화 시대에 그녀는 최정점에 선 전문가였다. 그녀는 예술가, 비평가, 실천가, 정치적인 좌와 우 어디에도 속하길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녀는 떠났지만 인류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와 아방가르드예술을 보는 방법을 남겼다”고 전했다. -시카고 마룬


 


그녀의 가장 최근 저서인 ‘타인의 고통’은 전쟁과 재앙 이미지에 관한 장편 비평집으로 지난해 출판됐다. 또 지난해 쓰여진 단편 비평문인 ‘타인의 고문’은 아부그라비 수용소에 갇힌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에 관한 글이다. 수잔손탁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전후 비평주의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의의를 남겼다. 그녀는 예술연구에 감각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고, 내용 보다는 심미적인 형태를 옹호했고, 고급 저급 문화 사이의 경계를(대단히 파괴적으로) 흐물어 뜨렸다. 사려 깊고, 사색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그녀의 글쓰기는 들쑥날쑥한 경계와 필연적인 주제를 안고 있는 현대예술의 소외와 절망을 선험적으로 탐구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단토 교수는 “그녀는 우리 시대 인간 삶의 깊은 문제에 문학과 철학적인 지성으로 종사했다”며 “그녀는 냉정하거나 객관적인 비평가라기보다, 모두에게 의미를 갖는 이슈에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너무 엄숙한 지성인과 달리 수잔손탁은 직접적이고 시의적절한 그리고 도발적인 문장과 발언, 그리고 영상시대에 적합한 외모 등으로 대중적인 유명인이었다. -뉴욕타임즈


 


다섯 살에 부친이 중국에서 죽었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잔손탁은 2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녀는 연극과 영화를 연출했으며, 미국의 세계 침략을 맹렬히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병과 싸워야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자랐으며,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보는 것처럼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수잔손탁은 26세에 뉴욕으로 돌아와 60년대 문화비평 특히 도발적인 에세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96년까지 보스니아 내전이 극점에 달할 때 사라예보에 머물며 국제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1960년대에는 목소리 높여 베트남전쟁을 반대한 편에 섰으며, 미군의 폭격이 절정에 달하던 68년 5월 하노이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같은 해 쿠바를 방문해 쿠바의 인권문제에도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1950년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줄곧 혼자 지내왔으며, 작가로 알려진 아들 데이비드만이 유일한 혈육이다.
-AFP통신


(월간사진 2005년 2월호 게재)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이미지를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에 적용해본다면 이 주장은 그럴 듯하지 않다. 사진이 지닌 이중적 힘, 즉 기록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각예술 작품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서로 상충된다는 주장이 있다. 고통을 묘사해 놓은 사진이 아름다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은 원래 그대로의 피사체에 가야 할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매체 자체에 관심을 쏟게 만들어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진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이런 사진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한편으론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 얼마나 장엄한 장관인가’라고 외치는 것이다.(타인의 고통 중)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이 재현된 예술품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 격렬한 것이다. 이런 욕망 안에서 고통의 재현물은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못한다.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성질의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순간을 쪼개내어 그것을 정착시킴으로써 모든 사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사진은 허구화한 연재이며 부재의 증거이다.(사진론 중)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 중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 한때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의 유럽 수도들에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은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얇게 져며낸 조각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공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도와준다. 휴가 중이거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사진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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