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파가 탔던 열차는 어디로 갔을까


 





글사진 현린


 

1 “다음 역은 그랜드 센트럴입니다.”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이 멍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어쩌다 이 통근열차를 타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니. 이럴 수는 없어. 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나는 이 통근열차를 타고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른 아침 출근길 열차 안에서 졸다 깨어나 멍한 눈으로 황망히 주변을 살피는 일이야 흔하다. 역을 지나쳤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고, 열차를 잘못 탔다면 다른 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물론 그저 다른 열차가 아니라 바른 열차로. 그런데 열차 한번 잘못 탔다고 유난을 떨던 이 남자, 몇 주 후 사망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원인은 대서양에서 요트 화재 및 폭발. 이런, 타고 싶은 게 열차가 아니라 요트였나 보다. 그런데 불까지 타버렸나 보다. ‘블루칩’이라는 요트와 함께 불타고 만 그는 38세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법률회사 신탁유산 파트에서 일해 왔다. 가장 한직이랄 수 있는 이 파트에서 그가 받는 연봉은 자그마치 31만 5천 달러. 과연 통근열차를 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기사의 마지막 세 단어가 눈에 뛴다. ‘뛰어난 아마추어 사진가.’ 이런, 아까운 사진들도 함께 탔겠다. 그는 어쩌다 통근열차를 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리고 또 어쩌다 블루칩과도 같았던 그의 인생에 불을 질렀을까?

더글라스 케네디(Douglas Kennedy)의 소설 ‘빅 픽처’(The Big Picture, 2003)의 주인공 벤의 엄청난 실수란, ‘빅 픽처’ 대신 ‘빅 머니’를 선택한 것이었다. 증권회사 중역이었던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성공이란 곧 ‘빅 머니’라고 아는 인간들과 함께 계급 사다리를 타기는 했다. 하지만 벤에게 성공이란 언제나 ‘빅 머니’가 아니라 ‘빅 픽처’였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브라우니를 선물 받은 여섯 살 적부터 카메라 뒤에 몸을 숨기고 뷰파인더라는 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좋았다. 어머니에게 라이카를 선물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엔, 로버트 카파 같은 사진가를 꿈꾸며 케이트와 함께 파리에도 갔었다. 처세에 뛰어난 케이트는 곧 사다리 하나를 올라탔다. 하지만 벤은 그러지 못했다.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게 없다.” 아버지로부터 한 푼도 받을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던 벤은, 결국 두 달 만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 후 카메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런저런 신문사와 잡지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늘 똑같았다.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아버지가 이번엔 회유책을 썼다. 돈이 곧 자유다. 로스쿨이나 MBA 코스를 밟는 데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는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 먼저 성공해서 돈을 벌어라. 그런 다음 그 돈으로 사진가의 자유를 맘껏 누려라. 벤은 시험에 들었다. 좋아, ‘빅 픽처’를 위해 필요한 ‘빅 머니’를 벌 때까지만.

원했던 사진에서와 달리, 원하지 않은 법률에서는 너무 쉽게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 인맥 덕에 취직도 쉽게 했다. 자신보다 법률지식에 더 밝은 25년 경력의 비서 에스텔이 다 해놓은 일을 자신의 졸업장과 자격증이라는 ‘빅 네임’으로 포장하는 것만으로 ‘빅 머니’도 벌었다. 그러나 사진가의 자유는 없었다. 버는 만큼 쓰기 마련, ‘빅 머니’를 위한 시간은 더 늘어났고, ‘빅 픽처’를 위한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빅 머니’로 얻은 자유는 ‘빅 픽처’를 맘껏 찍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기껏해야 ‘빅 카메라’를 맘껏 살 수 있는 자유였다. 열차 안에서 유난을 떨었던 그날 오후에도 3천 달러어치의 신형 카메라와 렌즈 하나를 더 구입했다. 보도사진용으로 완벽해 보이는 그 카메라는 반드시 필요하다 싶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빅 픽처’를 찍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러나 한때 같은 꿈을 꾸었던 케이트와 선배 변호사 잭의 현실은 벤의 이러한 자기기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위선적인 케이트는 CNN 종군기자가 되어 시체들이 나뒹구는 보스니아에서 대량학살 소식을 전하고 있고, 한때 화가를 꿈꾸었지만 평생 남의 유산을 관리하며 그림을 뒷전에 두었던 잭은 위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두 사람의 열차 모두 타인의 죽음을 연료로 해서 달리지만, 영악한 케이트의 그것과 달리 잭의 열차의 종착지는 쓰린 속을 위장약이나 술로 달래는 벤 자신의 죽음이기도 했다. 가엾은 벤, 그는 정말 열차를 잘못 탔던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아마추어 사진가’ 벤의 ‘빅 카메라’는 카파의 ‘빅 픽처’ 같은 것을 담고 있었을까? 한때 소설가가 꿈이었으나 이제는 남편의 ‘빅 머니’로 18세기 가구 수집으로 소일하는 아내 베스는 벤의 사진들을 두고 ‘비정상 인간 전시회’ 같다며 질색을 한다.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앞에서 구걸하는 양다리가 없는 애꾸눈의 걸인. 바워리 가 쓰레기통에서 반쯤 먹다 버린 빅맥을 꺼내는 부랑자. 과연 질색할 만하다. 사실 벤이 통근열차를 타게 된 것은 뉴욕에서 뉴잉글랜드의 중산층 거주지인 뉴크로이든으로 이사를 한 뒤부터다. 3년 전 만취한 한 걸인이 다가와 “한 푼 줍…”이라고 말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들 애덤의 머리 위에 토사물을 쏟아내는 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그 후 질색할 만한 ‘병균’들을 피해 ‘멋진 이웃’들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런데 ‘병균’들이 더럽고 위험해 가까이 할 수 없다며 교외로 이사까지 해버린 그가, 수천 달러짜리 카메라 뒤에 숨어서 그 ‘병균’들을 즐겨 찍었다? 벤에게 그들은 낯설고 기이한 그러나 더럽고 위험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니 그 걸인이 구토를 할 만도 했다. 사진가에게 구역질이 났던 것이다. 그의 사진은 행여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처럼 ‘빅 픽처’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때 그의 우상이었던 카파의 ‘빅 픽처’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카파야말로 벤이 멀리하고자 하는 바로 그 ‘병균’이었기 때문이다.



India, 2009

2 카파는 그의 ‘굿 픽처’로 인해 ‘빅 픽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굿 픽처’를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알렉스 커쇼(Alex Kershaw)가 쓴 ‘로버트 카파’(Blood and Champagne, 2002)를 보면, 훗날 ‘밥’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카파는 ‘병균’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신이 ‘병균’이었다. 1913년 10월 22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카파는 한량이나 부랑자에 가까운 아버지의 기질과 함께 지독한 가난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처음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박멸해야 마땅한 ‘병균’ 취급을 받았다. 1931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망명을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기회를 잡긴 하지만, 벤의 부모와 달리 찢어지게 가난했던 밥의 부모는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벤과 달리 밥은 대학 공부를 버텨내지도 못했다. 결국 개밥을 몰래 훔쳐 먹다 들켜 하숙비마저 떼어 먹고 달아난 밥은 이후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행스럽게도, 베를린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있던 고향 친구 에바 베슈뇌 덕에 밥은 데포트에서 일하게 되고 라이카를 다루는 법도 배운다. 그리고 1932년 11월27일, 코펜하겐에서 레온 트로츠키의 마지막 대중연설 취재를 맡으면서 비로소 사진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밥은 여전히 가난했고, 베를린에서 ‘병균’을 박멸하려는 파시즘은 절정에 달했다.

밥은 다시 파리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게르다 타로가 없었다면, 밥은 거리를 떠돌다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일에 바빠 사진을 못 찍는 벤과 달리 밥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했으나 일을 구할 수 없었고, 수천 달러짜리 금고에 보관된 벤의 라이카와 달리 밥의 라이카는 늘 전당포 신세를 져야 했다. 숙박비를 떼먹으며 싸구려 호텔들을 떠돌거나 노숙을 하고 센 강에서 낚시를 해서 연명하곤 했던 밥은 영락없는 부랑자였다. 그런데 유대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타로가 이렇듯 부랑자 기질과 가난에 허덕이던 밥을 로버트 카파라는 어엿한 사진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36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가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카파는 타로와 함께 즉시 전선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병균’ 같던 카파에게는 프랑코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인민전선과 국제여단 전사들의 이상이 다만 ‘그들’의 이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었고, 그래서 동지들과 함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든 카파는, 단순히 ‘좋은 사진’이 아니라 ‘옳은 사진’인 ‘굿 픽처’로써 싸우고자 했고, ‘굿 드림’을 가진 ‘굿 피플’이 싸우고 죽어가는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열차를 탔던 것이다.

하지만 밥은 카메라만이 아니라 총까지 차고 다녔던 타로를 내전 중에 잃고, 패전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굿 드림’과 ‘굿 피플’까지 잃는다. 1940년에는 그가 사진가로서 처음 취재했던 트로츠키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불타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밥은 남은 삶을 제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고, 곧 술과 피에 중독되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했고, 술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피가 튀는 전쟁이 필요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 전쟁이 이제는 유일한 진통제가 되고 만 것이다. 밥은 여전히 최전선에 뛰어들어 ‘빅 픽처’를 찍고 ‘빅 네임’을 얻지만, 그가 가까이 가려고 했던 ‘굿 드림’과 ‘굿 피플’과는 점점 멀어진다. 여자와 도박과 술을 위한 돈과 피가 필요했던 밥은, 심지어 타로의 이상을 ‘빨갱이’의 광기로 취급하던 ‘라이프’지에 실을 사진을 위해서, 1954년 프랑스 제국군이 베트남 인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침략전쟁에까지 종군한다. 그리고 5월25일, 다름 아닌 타로의 동지들이 설치했을 지뢰를 밟고서, 벤이나 케이트가 ‘빅 픽처’감으로 좋아할 만한 왼쪽 다리를 잃은 시체가 되어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다. 돌이켜보면, 스페인 내전의 패전과 함께 전 세계가 제국들 사이의 전쟁으로 불타기 시작했을 때, 타로와 함께 카파가 탔던 그 열차도 불타버렸다. 가엾은 밥, 그는 열차를 잃어버린 것이다. 

요컨대, 벤의 우상인 밥은 실제로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그의 ‘병균’이었다. 게다가 벤은 자신이 타지 못한 다른 열차를 꿈꾸지만, 밥이 탔던 열차는 그저 ‘다른 열차’가 아니라 ‘바른 열차’였다. 그것은 비록 더럽고 위험하지만 다르고 낯선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아니라,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세계의 변혁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위한 전쟁터로 가는 열차였다. 그리고 패전과 함께 ‘굿 드림’과 ‘굿 피플’을 잃고 살아남은 밥은 전쟁의 상처에 고통 받다가 결국엔 술값을 구하는 다리 잃은 ‘병균’이 되고 말았다. 반면 벤은 ‘병균’도 아니고, 지켜야 할 ‘굿 드림’도 ‘굿 피플’도 없으며, 그래서 잃어버리고 말고 할 왼쪽 다리도 없다. 벤이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는 케이트의 뉴스와 마찬가지로 벤의 사진에도, 그저 잔혹한 자극과 가엾은 희생자들만 있을 뿐 헌신할 만한 정치적 이상이나 동지는 없다. 벤에게 ‘우리’가 아닌 ‘그들’은 동지는커녕 이웃으로도 함께 살 수 없는 더럽고 위험한 ‘병균’일 뿐이다. 벤이 꿈꾸는 밥의 열차는, ‘빅 머니’를 가진 부모 아래서 자라며 얻은 ‘빅 네임’으로 죽은 자들이 남긴 ‘빅 머니’를 관리하며 ‘빅 머니’를 버는 그로서는 결코 탈 수 없는 열차였던 것이다. ‘빅 네임’으로 포장하는 것만으로 버는 ‘빅 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빅 머니’로 마련한 집에 갇혀 누리는 깨끗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렇게 자신의 ‘블루칩’을 태워버리지 않는 한.



Mayday, 2005

3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발적 사고로 ‘블루칩’은 타고 만다. 유명사진가들과 친분이 있다고 떠들며 예술가 행세를 하고 다니지만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리 서머스라는 무명사진가가 화근이었다. 게리 역시 ‘병균’ 사진을 즐겨 찍지만, 부모의 유산이 없었다면 결코 이곳에 살 수 없었을, 그야말로 ‘멋진 이웃’에 침투한 ‘병균’이었고, 베스 역시 그를 싫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집을 자꾸 비우기 시작한 베스가 게리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허세를 부리긴 하지만 사진가가 되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나. 신형 카메라 덕에 베스와 게리의 불륜 현장을 찍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만 찍으면 될 것을, 게리의 목까지 찍은 것이 문제였다. 삼류 주제에 감히, 사진가가 수동적인 관객이어선 안 된다고 속을 긁고, 베스가 섹스를 끝내주게 잘 한다고 속을 뒤집더니, 급기야 넌 꿈을 이루지 못한 일개 사원일 뿐이라며 속에 불을 지른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는 깨진 술병이 들려 있었고, 이번엔 ‘병균’의 토사물 대신 ‘병균’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벤은 또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사로 해결할 수 없었다. 대신 게리의 시체를 ‘블루칩’과 함께 태워버리고, 자신은 게리가 타던 찌그러진 MG에 올라탔다. 변호사 벤이 아니라 사진가 게리로 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빅 머니’ 대신 쥐꼬리만한 게리의 유산으로 살아야 하지만, 여하튼 다른 열차를 타기는 했다. 그렇다면 다음 역은 ‘빅 픽처’? 그건, 직접 가서 보셔야겠다.<월간사진 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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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로서 사진


 





글사진 현린


 

0 흔히들 실제 사냥과 전쟁에 나설 일이 없어진 후에 쓸모없어진 총 대신 메고 다니는 것이 사진기라고들 한다. 요란하게 무장하고 나서지만,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고작 호랑이 사진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사진의 유치함과 비겁함을 비아냥대는 말들로 한마디로 “놀고 있다”는 소리다. 진지하게 사진에 임하는 사람에게, 더구나 놀이란 저열한 것이라 아는 사람에게, 이는 분명 모욕이니, 놀이라면 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을 사냥에 비유한다고 해서 또는 놀이라 놀린다 해서 놀라거나 눌릴 필요 없다. 개도 할 수 있는 것이 놀이라고 해서 놀이 자체가 저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도 놀지만 인간도 논다. 다만 인간은 인간답게 논다. 게다가 바야흐로 엔터테인먼트와 퍼니즘(Funnism)의 시대, 사냥의 또 다른 잔재라 알려진 쇼핑(Shopping)도 놀이와 재미라는 차원에서 재발견되고 재발굴되고 있는 마당에, 슈팅(Shooting)만 유독 유치한 놀이라고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가죽을 찢건 사진을 찍건, 중요한 것은 제대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 놀이로서 사진을 부정하기보다는 놀이로서 사진이란 무엇인지 묻고 제대로 즐기는 편이 낫다.

1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 따르면 인간이란 오직 놀이 속에서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상 노는 존재다. 개보다 우등한 인간은 개도 한다는 그 놀이를 통해 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스포츠와 학문, 예술 그리고 경제와 정치까지 아우르는 일체의 문화를 창조해 왔다. 심지어 사냥과 전쟁 또한 놀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사냥과 전쟁의 모조품이 놀이인 것은 아니다. 개처럼 네발로 바닥을 기고 뒹굴며 까르르 웃던 아이가 세련된 놀이를 즐기며 자람으로써 나중에는 쓰디쓴 전쟁의 패배에도 썩소일망정 웃을 줄 아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놀이가 단순히 과잉 에너지의 방출이나 긴장의 해소에 불과하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놀이가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 형식과 규칙이라는 틀을 따르는 질서 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 재미란 것 역시, 놀이에 필요한 탈을 쓰고 기꺼이 그 틀을 따르는 과정에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진지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개마저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였으나, 그 끝은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로 발전한다. 반면 새로운 놀이 질서를 창조하지도 않으면서 기존 놀이 질서를 파괴할 때, 놀이만이 아니라 문화까지 타락한다.

그런데 퍼니즘의 선지자인 호이징하가 보기에 인류 문화는 화려했던 로코코 양식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 타락해 왔다. 산업주의에 물든 일하는 인간들의 잿빛 의상, 상업주의와 실용주의에 물든 예술과 학문, 대중매체의 발전과 함께 달아오른 스포츠 그리고 신사도를 망각하고 개싸움이 되어버린 비열한 전쟁 등등. 사치와 장식의 귀족 문화가 사라진 후 찾아온 대중들의 편한 세상이 호이징하에게는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의 더러운 세상일 뿐이다. 험담과 기만 역시 놀이라고 하더니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라는 지극히 모던했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급기야 놀이에서 성스러움을 찾기까지 한다. 놀이의 자율적 형식을 강조하던 그가 고대의 단순한 놀이에서 근대의 복잡한 놀이로 접근하면서는 그 다양한 형식의 경합과 교합을 놀이의 진화로 인정하기보다 타락이라 개탄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놀이의 형식은 불변하는 닫힌 형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열린 형식이며, 그래서 놀이와 놀이가 경합하기도 하고 놀이와 놀이가 교합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한 탓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호이징하는 사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설령 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던들, 놀이다운 질서와 재미를 찾을 수 없다며 단순한 붓질을 놀이로 인정하길 주저했던 그가, 대량생산된 사진기의 단순한 셔터질을 놀이로 인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복고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경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문화를 타락시킨다며 사진을 비난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아무 터와 아무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아무거나 찍어대는, 그것도 잿빛 사진이 놀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퍼니즘에도 신약의 시대는 열렸으니,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 1967)에서 카이와(Roger Cailois)는 호이징하보다 더욱 엄격한 형식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놀이의 진화를 고려함으로써 놀이의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그래서 호이징하와는 반대로 설령 문화를 파괴할지라도 놀이는 놀이일 뿐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때문에 놀이로서 사진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한다면, 이제 더 엄격해서 더 관대한 카이와를 찾는 편이 낫겠다. 그 역시 사진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쿨하다.



나모, 2009

학교라고 하면 감시나 체벌 같은 불행한 추억만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릴 적 그들을 포함한 세계의 대다수 아이들에게 여전히 학교만한 놀이터가 없다. 학교가 아니라면 여지없이 거리로 나가 관광객들에게 사진엽서를 팔거나 구걸을 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레스토랑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로 운영되는 학교가 없었다면, 글이나 춤의 근사한 재미 따위를 이 아이들이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답게 놀지 못하고 인간답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2 카이와에 따르면 놀이는 일반적으로 아래 여섯 특성 중 다섯 가지를 갖는다. 첫째 강요 없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둘째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셋째 그 전개도 그 결과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넷째 비생산적 활동이다. 다섯째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규칙이 있다. 여섯째 현실에 비하면 명백히 비현실적, 허구적 활동이다. 모든 놀이는 다섯째와 여섯째 둘 중에선 하나만을 갖는다. 달리 말해 각각의 놀이는 승패를 가릴 수 있는 동시에 허구일 수는 없다. 이 기준에 따라 취합한 모든 놀이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권투나 육상경기처럼 기량의 탁월함을 다투는 아곤(Agon), 주사위 놀이나 도박처럼 운명을 시험하는 알레아(Alea), 회화나 연극처럼 모방 또는 모의하는 미미크리(Mimicry), 회전목마나 번지점프처럼 현기증을 즐기는 일링크스(Ilinx)가 그것이다. 일단 놀이로서 사진을 전제한다면, 카이와가 분류한 네 놀이 집단 중 사진이 속하는 놀이 집단이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네 가지 놀이 집합들끼리는 그 질서나 재미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 예컨대 아곤의 질서가 일링크스의 질서보다 낫다고 할 수 없고, 알레아의 재미가 미미크리의 재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질서의 극단인 루두스(Ludus)와 무질서의 극단인 파이디아(Paidia)를 양극으로 하는 축을 따라, 동일한 놀이 집합에 속하는 놀이들끼리는 그 질서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곤 중에서도 권투는 루두스에 가깝고 이른바 개싸움은 파이디아에 가깝다. 둘째 놀이는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다른 종류의 놀이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흑돌과 백돌을 가지고 노는 바둑은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오목으로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바둑판이 오목판이 되고, 바둑알은 오목알이 된다. 셋째 실제의 놀이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합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예컨대 카드놀이는 알레아와 아곤에 동시에 속하고, 관중이 지켜보는 대개의 스포츠는 아곤과 미미크리에 동시에 속한다. 요컨대 실제의 많은 놀이들은 잡종이고 앞으로 더욱 잡종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복잡다변한 놀이의 특성 때문에 실제에서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놀이를 찾기 힘들다. 그러니 사진도 여러 놀이 집합에 그것도 동시에 속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조준해서(Aim) 사격하고(Shoot) 포획한다(Take)는 사냥과 유사한 특성을 고려하면 사진은 분명 아곤에 속한다. 여기에 경쟁이 있다면, 그 상대는 촬영 중인 피사체이거나 동일한 피사체를 겨누는 다른 사진가들이다. 어느 경우건 게임의 승패는 탐색과 조준, 사격과 포획 과정에서 발휘하는 사진가의 기량에 달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승패를 기량이 아니라 운에 맡길 때 사진은 알레아에 속한다. 극단적인 경우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무엇이건 일단 낚은 후에 골라낸다. 기실, 노출 시간 동안엔 피사체는 물론이고 사진기도 사진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적어도 이 순간, 사진기는 바닥에 구르는 주사위와 같다. 한편, 회화의 재현술을 발전시킨 것이 사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진은 미미크리에 속한다. 너무 쉽고 너무 진짜 같아서 주저스럽다면, 더 적당한 예로 피사체를 만들어 찍는 이른바 연출사진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촬영 장비와 촬영 행위 자체를 볼거리로 만드는 경우도 미미크리에 속한다. 여기서 관심의 대상은 피사체가 아니라 관객이고 촬영장은 하나의 무대가 된다. 사진기라는 자동화된 상품을 매개로 슈팅과 쇼핑이 만나 하나의 놀이(Play), 하나의 연기(Play)가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일링크스인데,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촬영을 하면서 현기증 혹은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르는 광적인 경우가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 항목은 일단 비워둬야겠다.




Varanasi, 2008

세계란 신의 놀이, 환영(幻影)일 뿐이라고 설명하는 힌두이즘이야말로 퍼니즘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제 노는 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하여 빛의 도시 바라나시는 힌두이즘의 성지이자 퍼니즘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하는 포토퍼니스트(Photofunnist) 순례자라면 꼭 찍고 가야 하는 곳이 바라나시다. Welcome to the Photo Funny World!


3 투박한 스케치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사진의 면면이 놀이하는 인간의 면면만큼이나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놀이가 다종다양한 만큼 그 많은 놀이들을 모두 사진으로 일일이 담아내며 놀기에도 바빠 보이고, 그 놀이들과 교합하여 새로운 사진 놀이를 만들 가능성도 무궁무진해 보인다. 놀이는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아무 곳 아무 때나 아무나 아무거나 찍고 놀 수 있다는 것이 놀이로서 사진의 장점 아닌가. 어느 곳에서건 사진기를 꺼내 드는 순간, 아니 사진적 태도를 갖는 순간, 이미 이 놀이는 시작된다. 더구나 포니(Pony)를 생산하며 뒤늦게 포디즘(Fordism)인지 포니즘(Ponism)인지의 시대에 합류했던 이 나라도, 이제는 퍼니즘(Funnism)의 시대를 열고 사방에서 쇼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니 가히 아니 찍고는 아니 놀지는 못하는 것이리라. 세계 자체가 사진을 위한 터이고 때인 듯 보이니, 유토피아(Utopia)는 모르겠으나 포토퍼니즘(Photofunnism)의 궁극, 포토피아(Photopia)는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전부(全部)는 곧 전무(全無)이기도 하니, 불행하게도 실제로는 찍을 터와 때라고 공인된 곳에서 조장된 것만 찍고 논다. 그러니 포토피아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 우리가 노는 이곳은 사방에서 쇼를 하는 놀이동산, ‘포토 퍼니 월드’(Photo Funny World)일 뿐이다. 채우지 못하고 비워둔 마지막 항목 일링크스는 아마도 이런 사진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놀이동산을 가득 채운 달콤한 현기와 향긋한 광기.<월간사진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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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생명보다 셔터’ 비난에 자살? ‘발췌의 함정’

퓰리처상 받은 ‘소녀 노리는 독수리’
뉴스사진 윤리 따질 때 최우선 인용 사례
일방적 매도와 오류 법원판결문까지 등장

2005년 초에 이 글을 처음 썼습니다. 불우하게 삶을 마친 한 사진기자의 생과 사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1차적으로는 나 자신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이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더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져 울컥

그 무렵에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열에 여덟 내지 아홉은 출처가 어딘지 모르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무려 10년이 더 지난 사안인데도, 글보다 쉽사리 기억되고 주목되는 사진이란 속성 때문에 이야기의 전달력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흔하게 퍼져나가던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상 3개월 뒤인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비판이 일었다. 결국…목숨을 끊었다”가 결정적인 논리적 비약

후에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본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위의 이야기 자체엔 오류가 없었습니다. 다만 많은 생략에 의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들어있고 그에 따라 글을 읽고 재해석한 분들에게 큰 오류의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독사의 아가리같은 함정이 여기 숨어있습니다. 필요한 인과관계와 그 설명을 뺀 채 적당히 발췌해서 사실을 늘어놓으면 결국 사실을 호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본문에 앞서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 2월이었고 최초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3월 23일치 뉴욕타임즈였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1년이 더 지난 1994년 4월이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기아에 대해 그 전부터 취재해왔고 더 심한 사례도 목격했었던 기자였습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고민해온 문제이며 사진을 찍고 난 직후에도 인간적 슬픔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수상한 뒤 비난에 직면하자 더욱 힘들어했을 수 있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란 것이며 자살의 더 큰 계기로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수상결정이 된 이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비판이 일었다" 라는 문장 직후에 "결국 케빈 카터는 ….목숨을 끊었다" 라고 연결시킨 것이 결정적 오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 글을 읽으면 비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카터가 불려나와 매 맞아

어쨌든 2005년에 제가 글을 쓸 무렵엔 위의 내용이 여러가지 논란과 사례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뉴스사진의 윤리를 따질 때 가장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사진보도중 어느것이 더 우선인가?’ 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케빈 카터가 불려나와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논란을 지켜보면 꼭 등장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예술은 없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특히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필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딜레마겠죠. 아무개 선생님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을 때, 한참을 고민하다가, “찍고 구하러 가면 안되요?” 그랬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목적이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도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고민입니다. 아직 인간이 덜 된 거겠지요"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방송기자 에세이집에는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며 왜곡까지

저도 사진강의를 하는 사람이고 뉴스사진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땐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목숨에 우선하는 뉴스가치는 없다"

그렇지만 케빈 카터의 사례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곽윤섭의 사진 곳간' 을 여는 첫 글로서 케케묵은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그 후로 지금껏 스스로에게도 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 오류가 청산이 되지 못한 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2007년 10월 한 야당의 부대변인 성명서에서도 케빈 카터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면 한 방송기자의 에세이집에도 오류로 범벅이 된 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독수리를 쫓아버렸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  소녀는 죽지않고 구호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2005년 처음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가 되었던 것은 한 일간지의 법원 판결문 재인용에 등장한 케빈 카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존중의 태도 견지하지 못했다’ 포장

"인격권의 주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제3자에 대하여 폭넓은 보호를 요구할 지속적 기반을 확보 할 수 있다고 할 것인 점(단적인 예로 케빈 카터라는 작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굶주려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보도사진을 촬영하여 1994년 퓰리쳐상을 수상하였으나 1994년 7월 이 사진에 대한 비난과 이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판결문답게 어렵게 포장이 되었지만 케빈 카터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였다고 읽힙니다.

이를 근거로 그 일간지의 기자는 "사진보다 사람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고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네티즌들이 오류를 확대재생산해서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고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또한 정치인, 기자, 판사 등 사회 각층의 전문가들조차 저지르는 무책임한 재인용도 오류의 확대, 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자꾸 희미하게 변색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처음 글 썼을 때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 많이 늘어 다행

그래도 2007년 11월 현재 포털에서 검색해본 결과 2005년에 제가 처음 이글을 쓰려던 당시보단 사실에 근접하는 내용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어떤 분은 "구글에서 검색하니 쉽게 찾았다"고 했지만 꽤 조사를 많이 해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이 글을 올림으로 해서 조금이라도 사실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에 힘을 더 보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하부터 본문입니다. 예전의 글이 장황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일부 첨가하고 대폭 요약했습니다.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케빈 카터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한 사진기자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Bang Bang Club 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 살해 방화 현장 누비는 실력 빵빵한 ‘방방클럽’

Bang Bang Club은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해와 방화가 이어지는 전쟁터같은 현장에서 두려움없이 그리고 가끔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 때문에 남아공화국에서 일하던 다른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뒤에 다시 등장하는 마리노비치도 이 Bang Bang Club의 일원이며 1991년에 퓰리처상(스폿사진부문)을 수상한 바가 있다. 한 마디로 실력 빵빵한 사진가들의 모임인 셈이다.

뉴스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 사진기자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분쟁 시달리는 남아공 태생으로 아프리카 참상 찍으며 아픔 함께

케빈 카터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 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스 사진기자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한 지옥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도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비쩍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퓰리쳐상의 피쳐 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완성도 높은 순간 기다려 찍고 독수리 쫓아…울먹이며 "하느님~"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후 계속 침통해 했고 딸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리고 순식간에 아프리카 참상 상징 아이콘으로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동료 취재현장 사망에 충격…평소에도 보도사진가 딜레마 고민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뉴스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절망적…돈이 없다…살육과 시체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유서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독수리가 살아있는 사람 공격 않는다는 건 상식

이제 케빈 카터에 대한 변명을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위에 나열한 상황에서 논점은 크게 두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케빈 카터가 한 행동이 비난받아야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또 하나는 케빈 카터가 자살한 것이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는지의 여부입니다.

몇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일하던(취재하던) 사진기자들은 사람들을 만지지 말도록 지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염병을 옮길 위험이 있다" 는 이유였습니다. 이 명분만으로 케빈 카터가 마음이 편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기아와 전쟁의 참상 때문에 괴로워하던 휴머니티가 강한 뉴스사진가였습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뉴스사진가였고 그의 일에 충실했으며 그가 남긴 사진이 아프리카의 기아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전쟁 참상에 대한 회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 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며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뉴스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하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하진 못하실 것입니다.

케빈 카터가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그는 마음이 여렸고 어려운 직업 탓에 가정의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더 굳건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했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했던 모양인데 주변의 정황으로 봐서 꼭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 여렸고 가정환경 열악…비난이 카터 괴롭히는 데 일조 했을 것

"모든 분쟁지역 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자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뉴스사진 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뉴스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입니다. 말년의 케빈 카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급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사진에 대한 비난이 케빈 카터를 괴롭히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사려 깊지 못한 자들의 가벼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번 호도된 팩트를 제대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난 2005년에 실감했었습니다. 이 번엔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속에 글 올립니다.














Posted by stormwatch :

밝은방, 향수

2011. 9. 29. 20:22 from 레크레이션





 

필름의 향: AURA No˚ 5


 





글사진 현린



1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영화보다 사진을 사랑했다. 영화 역시 수많은 낱장의 사진들로 이뤄진 것이지만, 그가 보기에 영화의 스크린(screen)과 스토리(story)는 사진의 ‘정수’(精髓, essence)를 가리고 흐리기 때문이다. 사실 스크린은 그 위에 투사된 영상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스크린 아래를 가린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가리개이기도 하다.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spectacle)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크린 아래의 현실은 무시하게 된다. 우리의 시각은 스크린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크린 위에 투사된 본래 낱장의 사진들은 초당 무려 24장씩, 심지어 30장씩의 빠른 속도로 점멸하며 흐른다. 우리의 시각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스크린 위에 머물다 사라지는 낱장의 사진들을 포착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사진들의 잔상(殘像)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이 스토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내장된 코드들을 해독(解讀)함을 의미한다. 해독의 대가였던 바르트에게 이는 코드에 길들여짐을 의미했고, 이는 스크린과 스토리에 가려지고 흐려진 사진 고유의 정수를 놓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영화보다는 스틸(still) 사진을 좋아한다고 밝혔고, 급기야 ‘밝은 방’(La Chambre Claire, 1980)에서는 길들여진 ‘좋은 사진’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미친 사진’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물론, 사진 역시 코드화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길들여진 그것에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한 것이 사진인 까닭에, 우리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은, 그래서 코드화되지 않은 그 무엇을 사진에서 만날 수 있다. 바르트는 그것에 푼크툼(punctum)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처음 그가 주목한 것은 사진 속 공간에서 자신만이 주목하고 찾아내는 세부(detail)였다. 하지만 이러한 푼크툼은 너무나 특수해서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반면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그가 발견한 또 다른 푼크툼은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 부족함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가 본 적 있을 리 만무한 다섯 살 소녀 시절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가 돌연 깨달은 것은, 사진 속에서는 그녀가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곧 부재하리라는 사실, 즉 그녀의 죽음이었다. 모든 사진은 비록 과거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건, 도피하고 망각하려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부의 확인으로서의 공간적 푼크툼과 구별되는, 죽음의 확인으로서의 시간적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이 필멸의 진리가 선승(禪僧)들이 가리키는 달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엄연히 자신만의 스토리인 이 경험은 스토리라 하지 않고 대신 ‘사토리’(satori) 즉 선승들이 말하는 돌연한 깨달음이라 불렀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의 이러한 특성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보다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서 더 잘 드러난다. 사진은 바늘구멍을 통과해 어두운 상자 한쪽에 맺힌 단일한 영상이 아니라, 불투명한 프리즘을 통과한 후 거울에 반사된 상과 종이 위에 그려나가는 상이 동시에 맺히는 이중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그 불투명한 프리즘 덕에 더욱 모호하고, 두 영상이 겹쳐진 덕에 더욱 애매한 ‘부드러운’ 영상은 과연 유령다웠으니, 급기야 바르트는 사진이라는 매체(medium)를 유령과 접신하는 영매(medium)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스크린이건 종이건 그 가면을 찢고 나오는 그녀만의 ‘분위기’(stimmung) 곧, 그녀의 ‘영혼’을 그는 사진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진의 정수는 어느새 그녀의 정수가 되고, 사진이 가리킨다고 그가 믿었던 달(Luna)은, 그가 그토록 자부하듯, 사랑과 연민으로 정신을 잃은 광기(lunacy)가 된다. 요컨대, 바르트는 스토리의 영화와 스투디움의 ‘좋은 사진’과 달리 코드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토리와 푼크툼의 ‘미친 사진’에서, 사진의 정수와 그녀의 정수를 찾는다. 선승들이 말하는 사토리란 것이 실제로는 영혼이나 정수 따위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르트의 사토리는 사이비임이 분명한데, 여하튼 한 장의 정지된 사진 위에서 펼쳐진 어머니에 대한 그의 스토리는 이런 식으로 끝을 맺는다. 미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영사기는 꺼지고 한 장의 사진, 그 스크린은 곧 어둠에 묻힌다. 하지만 어두운 방에 바르트가 남기고 간 광기는 여전히 남는다. 달이 저물지 않은 탓이 아니라 달이 저물고도 남는 그 향 탓이다.



Varanasi, 2008

향을 피우는 종교의식은 상징적인 정화나 성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향이라는 지극히 실제적인 질료로 후각적 공간을 건축하는 과정이다. 그 성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축적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까닭에 더욱 성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이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외지인이 해독하지 못할 뿐. 시각과 언어와 거리가 먼 후각 역시 엄연히 코드화되어 있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후각적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독의 결과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특정 코드를 야만시하거나 또는 신비화하는 것이다.

2 장-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는 영화도 사진도 아닌 향수를 사랑했다. 그래서 어두운 방은 이제, 역시 어머니 때문에 미쳐버린 그르누이의 몫이다. 패트릭 쥐스킨트(Patrick S?skind)의 ‘향수’(Das Parfum, 1985)에서 어머니의 정수는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그녀의 향기에 있다. 바르트의 말대로 만약 사진이 그녀의 정수를 담고 있다면, 이 역시 사진에 남겨진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사진에 남겨진 그 향기 때문이다. 빠르건 느리건 그 많은 사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만큼 진하게 그녀의 향기가 밴다. 그러니 그르누이로서는 영화와 사진을 차별할 필요가 없다. 영화가 상영되건 사진이 펼쳐지건 무관하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름거릴 것이다. 눈을 감은 그에게 스크린은 배경도 가리개도 될 수 없다. 사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점멸하며 흐를 때 바르트가 사진의 정수들을 잃는다면, 사진들이 쏟아질수록 그르누이는 그 정수들에 오히려 더 흠뻑 젖어든다. 다만, 그의 후선(嗅線)은 영상이 쏟아지던 스크린이 아니라 영상을 쏟아내던 영사기를 향할 것이다.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식어가는 저 필름릴이야말로 유일한 달이다. 정수는 스크린이 아니라 영사기 안에서 데워진 필름에서 발향(發香)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태어난 1738년 7월의 파리에는 영화는커녕 사진도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어머니의 사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사랑하고 말고 할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후각적 사진이랄 수 있는 향수에 더욱 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르누이는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8백 년 동안 시체가 썩어가던 묘지 위에 세워진 장터에서도 악취를 내뿜는 생선더미 아래에 마치 배설이라도 하듯 그를 낳은 어머니는, 앞선 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다섯째 아이 역시 죽게 내버려둘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울음 때문에 죄가 발각되어 그녀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는 살아남았다. 억척스럽게 태어난 그는 이후의 삶도 억척스럽게 이어간다. 여느 아이들처럼 달콤한 향은커녕 냄새 자체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돈벌이에 유용함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탓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재능이자 행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후각적 감각과 쾌락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다섯 살 무렵에 그가 하던 일은 악취를 참아내며 가죽을 손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불꽃놀이에 넋을 잃고 있던 어느 축제일, 그의 삶에도 마침내 구원의 빛이 아니, 구원의 향이 나게 되니, 그것은 그의 천재적인 후각적 감각이 찾아냈으나 그의 기형적인 도덕적 무감각이 무참히 꺾어버린, 이제 막 꽃을 피우던 여체의 신비로운 향이었다. 그는 그 향의 재생에 나머지 삶을 바치기로 하고, 마침 대량생산의 길에 들어선 향수업계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를 복제하며 입문해 도제생활을 시작하고 나중엔 향수의 도시 그라스로 유학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데 고산 동굴에서의 수년간의 칩거가 보여주듯, 그의 여행의 목적지는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그가 재생하려는 향이란 그 자궁의 향에 다름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정수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면, 그르누이는 코로 확인하고자 했던 셈이다.

문제는, 바르트와 달리 그르누이는 자신이 찾는 것이 어머니의 정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직접 찍는다는 점이다. 사진과 달리 향수는 단지 빛을 매개로 한 대상의 흔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상의 일부다. 상대의 정수를 얻기 위해서는 셔터를 끊는 대신 둔중한 몽둥이로 상대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숨을 끊어야 한다. 그런 후에, 형태에서는 스크린과 닮았지만 기능에서는 필름과 쏙 빼닮은, 유지(油脂)를 바른 하얀 천으로 사체를 덮어 싸서 향을 추출(distillation)한다. 그런데 향수를 위한 이 스크린 또는 빈 필름을 감아 들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는 그르누이는 자신이 찍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정수 대신 애꿎은 여인들의 정수리만 내려찍고 다닌다. 결국 그는 어디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름 ‘그르누이’(grenouille, 개구리)가 의미하듯 아누라(Anura, 양서류)처럼 경계에서 갈팡질팡한다. 지고지순한 향에 몰입하기 위해 올라간 고산에서는 타자의 악취보다도 더 무서운 자신의 무취에 경악하고, 자신만의 향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려온 도시에서는 자신이 제조한 아로마(Aroma)에 발정하여 바지를 내리고 치마를 걷어 올리는 그들의 무지를 경멸한다. 무취 때문에 있어도 없는 듯했던 존재가 이제는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듯하다는 신비한 존재, 바람과 숨의 여신인 아우라(Aura)의 화신이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후각적 몽타주의 효과일 뿐임을 그 자신만은 아는 까닭이다. 결국 악취의 고향인 파리의 묘지로 돌아온 그는, 아이의 그것보다 달콤한 그 향을 바른 자신의 몸을 굶주린 자들을 위한 양식으로 내놓는다.



Marakesh, 2005

모로코 무두공장의 풍경을 영상으로만 볼 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재미있는 선과 면의 구성과 울긋불긋한 색채가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현지의 공장 담을 넘어섰을 때, 그 얄팍한 시각적 환상을 찢고 들어온 양피의 역한 냄새라는 후각적 현실은 호흡을 줄일 것을 강제할 정도였다. 바로 저 가죽 냄새를 없애는 과정에서 근대 향수산업이 발전했는데, 그 냄새는 결코 양피만의 것이 아니라 인피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과연 인피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란 것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물론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비누와 향수가 팔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런 아우라란 오히려 비누와 향수 광고사진의 작품이 아닐까.


3 태내에서의 감각과 기억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어머니의 향기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어머니의 정수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바르트가 찾았던 것은 오히려 그르누이만이 찍어낼 수 있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하는 카메라 루시다가 실제로는 두 개의 영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영상과 어머니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그가 말하는 시각적 푼크툼이란 실제로는 지극히 후각적 스투디움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각과 후각을 구별하지 못했기에 그 역시 자신이 찾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분위기나 유령이란 어머니의 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기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든다. 그르누이의 향수도 재생이 아니라 재현이었을 뿐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죽의 자취거나 체취일 뿐 결코 가죽을 찢거나 투과하는 정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바르트는 죽은 자의 사진에 산 자의 삶까지 묻고 애도했고, 그르누이는 죽은 자의 향수를 위해 산 자의 삶까지 꺾고 우울해 하지 않았던가.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향수와 그르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던 양수, 그 둘을 모두 닮은 달의 향이라도 뿌린다면 모를까, 삶의 정수가 아닌 죽음의 정수에 눈과 코를 들이댄 이상 그 애도와 우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듯하다. 그러니 눈과 귀로 다만 고정하고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와 함께 몸으로 살아내는 삶의 정수에 고개를 돌리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곳의 향기는 어떠냐고? 글쎄, 이름은 들어 보셨을라나? AURA No˚ 5라고.<월간사진 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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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뮤지엄 거닐며



미술작품 확대와 검색, 스마트폰 어플까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실제 미술관을 걷는 효과를, 17기가 픽셀의 초고해상도 이미지는 확대하면 붓터치까지 보이는 정교함을 선사하는 구글아트프로젝트(www.googleartproject.com)가 화제다. IT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온라인 뮤지엄이 곳곳에서 시도되는 중이다. 구글아트프로젝트에 앞서 국내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는 지난해 4월부터 네이버 미술작품정보(http://arts.search.naver.com) 서비스를 시작했다.


 

방대한 양과 검색 ‘네이버’ vs 기가픽셀의 초고해상도 ‘구글’


 

네이버 미술작품정보는 고해상 이미지로 10만여점의 해외 명화와 미술작품 그리고 4천여점의 국내 미술작품을 검색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작가, 작품, 미술관, 사조, 테마별로 검색이 가능하며 검색된 작품은 확대 이미지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설과 연관 정보도 제공된다. 프랑스국립미술관연합에서 사용권을 확보한 10만여점의 해외 미술작품 중에는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2만여점이 포함됐다. 국내 미술작품은 작가 개인에게 사용권을 허락받거나 전시별로 주최사를 통해 확보한 이미지를 업데이트해 계속 양을 늘려 가는 중이다. 사진작품으로는 배병우, 이명호, 정연두의 작품 일부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된 고 전몽각의 ‘윤미네집’, 오노데라 유키의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네이버의 이지숙 대리는 “서양 명화의 비중이 높지만 점차 국내 근현대 미술작품으로 확대할 예정이며, 작품 해설에서 미술 흐름을 알 수 있는 텍스트까지 제공 폭을 넓힐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미술관에 안 가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미술작품을 익숙하게 검색하고 접하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미술작품정보가 10만점이 넘는 방대한 양과 검색 기능이 장점이라면 구글아트프로젝트는 초고해상도의 비주얼이 장점이다. 네이버가 2~3천 픽셀의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비해 구글은 무려 17기가 픽셀의 이미지로 미술작품을 보여준다. 이 정도 해상도는 미술작품 복원전문가들이 보는 정도의 정밀한 이미지이면서 평균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의 1,000배에 달하는 디테일을 뜻한다. 이처럼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위해 구글은 전문 카메라와 컴퓨터 시스템 그리고 움직이는 유닛을 동원해 한 작품당 수천장의 개별 이미지를 촬영한 후 하나로 이어붙였다. 구글아트프로젝트에서 제공되는 미술작품은 전세계 17개 주요 미술관의 486명 작가의 1천여점이다. 17개 미술관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컬렉션에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지 주요 미술관을 망라하며 385개의 전시룸을 실제로 돌아다니듯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360도 뷰가 가능한 구글의 스트리트 뷰 기술이 접목되었다.    







구글아트프로젝트 화면과 확대한 이미지(위)와 네이버 미술작품정보 화면(아래)




 

실제 관람동기 유발로도 연결, 작가 프로모션의 한 방법


 

온라인 뮤지엄은 이보다 앞서 기존 미술관에서부터 시도되었다. 홈페이지에서 유물이나 소장품을 입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며 실제 미술관의 관람 동기를 유발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가상일본미술관(http://web-japan.org/museum), 스미스소니언 라틴센터(http://latino.si.edu/education), 아랍에미리트역사가상박물관(www.uaeinteract.com/history/e_muse), 하버드미술관 온라인 전시(www.harvard.edu/museums) 등이 해외의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는 서울지역 17곳 미술관의 소장품을 3D 입체영상기술로 감상할 수 있는 웹사이트 ‘아트서울-뮤지엄닷컴’(artseoul-museum.com)이 개설돼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한국사립미술관협회(회장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가 기존과는 다른 개념의 온라인 뮤지엄을 준비 중이다. 올해 3기 임원진을 맞는 협회는 비주얼 기술과 작가 프로모션을 결합한 버추얼 미술관을 이르면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제2의 백남준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될 버추얼 미술관은 협회 산하 사립미술관이 추천한 작가 중 선정된 작가의 가상 전시관을 각 미술관 웹사이트에 개설해 국영문 아카이브와 평론 등을 지원하고, 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관계자들이 찾도록 홍보할 예정이다. 이를 위한 문광부 예산도 확보해놓은 상태로 올해에만 30여개를 오픈하고 내년과 내후년에는 각각 50개, 70개로 늘려갈 계획이다. 이명옥 협회 회장은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 비해 미술계에서 글로벌 아티스트가 못 나오는 이유는 작가 인큐베이팅 시스템의 문제와 작업은 좋지만 홍보력이 부족한 작가를 발굴하는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며 “IT 기술과 온라인의 이점을 활용해 국내의 우수한 작가를 관리 홍보하는 체계적인 플랫폼으로 버추얼 미술관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내비쳤다. 이밖에 협회는 스마트폰에서 전국의 사립미술관의 주요 정보를 지역별, 전시별로 제공하는 ‘미술관 찾기’(가제) 어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이다. 또 도슨트 설명 없이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글이나 음성으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QR 코드도 더 많은 미술관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제 손 안에서 미술작품과 미술정보를 감상하고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명화를 감상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교육의 통로도 넓어졌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온라인 미술 서비스에 관해 사비나미술관의 강재현 전시팀장은 “시각문화의 향유층을 넓히고 실제 작품을 보려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온라인 뮤지엄은 유익하며 더욱 확산되리라 본다”며 “관객의 요구를 반영한 흥미 유발 장치나 현장의 현대미술을 온라인으로 구현하는데 대한 한계 등이 극복할 점”이라고 말했다.<월간사진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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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1908- )은 섬유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그는 예리한 비평과 강의로 유명한 앙드레 로트 (1885-1962)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줄곧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가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31년, 사진을 데생의 편리한 대체물로 여기면서였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라이카(Leica)를 사용한지 3일만에 그는 사진에 대한 구성감각을 깨우쳤다. 오만처럼 들리는 이 자랑은 그러나 큰 허세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전문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a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 지금도 여러 책에 수록된 1932년도에 생산된 사진들은 분명히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중년사내가 <셍-라자르 역 뒤에서> 포스터의 무희와 흡사한 동작으로 물이 고인 거리를 뛰어가는 사진은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찍은 ‘명작’이다.
그는 이후 신문사와 화보잡지사의 의뢰에 응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찍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진과 영화를 담당하는 육군하사로 근무하다가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두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세 번째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인생의 유위전변은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의 큐레이터, 뷰먼트 뉴홀의 오해를 부르게 된다. 뉴홀은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독일군의 포로였던 카르티에-브레쏭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의 ‘유작(遺作)’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의 주선으로 뷰먼트 뉴홀을 접촉하게 된 카르티에-브레쏭은 「하퍼스 바자 Harp-
er's Bazaar」가 의뢰한 작업을 행할 겸 뉴욕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1947년, 300점의 작품을 전시할 개인전을 준비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는 뷰먼트 뉴홀과 친분을 쌓았고, 뉴홀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작업 방식을 숙지하게 되었다. 뉴홀이 「Popular Photography」의 194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 당시 카르티에-브레쏭은 밝기 f.1.5의 콘탁스(Contax) 렌즈를 라이카 카메라에 장착해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싱글 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는 달리,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뷰 파인더 윈도우를 통해 피사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식 라이카는, 촬영 순간에 완벽한 사진을 기획하는 카르티에-브레쏭의 작업방식에 정확히 부합했다. 그야말로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에게,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에 어둠의 공백을 만드는 리플렉스 카메라는 적합하지 않았다.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결정적 순간’은 피사체의 표정, 작가의 의도, 주변상황이 사진 프레임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사진작가의 전 능력이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는 촬영 이후의 암실작업을 작가의 의도, 감성이 개입될 수 없는 상황, 피사체의 조건을 수정, 보완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찰, 감정이입, 상황판단은 ‘결정적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끝난다고 그는 단정했다.
이러한 그의 사진에 대한 견해는 그의 사진 스타일을 결정했다. ‘결정적 순간’을 도모하는 촬영의 순간을 신성화하는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생성되는 네거티브 이미지에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가 보기에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는 네거티브 이미지에서 무엇인가를 빼고 보탠다는 것은 ‘결정적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행위다. 따라서 네거티브 이미지를 절단하면서 재구성하는 트리밍(trimming)은 그의 사진 원칙에서 배제된다. 네거티브 이미지는 가감 없이 인화되어야 한다. 카르티에 - 브레쏭에 대한 뉴홀의 말의 들어보자.
“현대미술관에서 곧 있을 개인전 사진들의 거의 대부분은 네거티브 이미지 전체를 인화한 것이다. 인화 구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영역은 프레임의 맨 끝 가장자리까지이다.”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에 작가의 관점, 구성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렴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관찰할 수 없는 우발적 상황, 작가의 시야를 벗어나는 우연성은 피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의 눈으로 발견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본 현실의 포착이다. 간단히 말해, 사진의 주체는 작가이지, 결코 카메라가 아니다. 뉴홀의 카르티에-브레쏭에 대한 해설을 또 다시 인용하면, “그는 카메라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이 찾아낸 것을 기록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직접적인 플래시 광을 싫어한다. 피사체에 보조조명을 써야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그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백열 텅스텐 광을 선호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그의 구성에 들어오지 않는 우연은,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실패는 아닐지라도, ‘결정적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일종의 실수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카르티에-브레쏭은 194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미국의 스냅 사진작가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위지(Weegee)가 되었건, 리젯 모델 (Lisette Model)이 되었건, 더 나아가 윌리암 클라인(William Klein)이 되었건,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되었건 미국의 거리사진 작가들은 작가의 미학적 감성과 의지에 종속된 장면보다는, 카메라가 우발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현실의 양상을 애호했다. 촬영 당시 작가가 보지 못했던 세부양상, 혹은 노출의 과부족, 흔들림 현상에 의해 작가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이 폭로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그들은 절제된 구성, 기하학적 구도가 완성되는 최상의 시점을 포기하고, 사진의 우연성, 사진의 자동생성에 기대어 작업을 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카메라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영화 카메라처럼, “의식적인 인간행동 대신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을 포착하고 (...) 우리에게 무의식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열어 보인다. 마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충동의 경험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반면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현실의 무질서를 정리하고, 우발적 상황을 통제하고, 그것들에 미학적 의미작용을 부여하는 방책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조형감각, 예리한 세부관찰을 덧없이 변화하는 현실만큼 빠르게 수용하는 도구였다. 순간의 우연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우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그 예를 위에서 인용한 사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 사진을 특징짓는 것은 짝을 이룬 대칭구조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사진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은 쌍을 이루며 나타난다. 맨 위의 석조 난간은 대칭을 이루면서 반복되며, 그 아래 여인상주(女人像柱) 역시 쌍둥이처럼 서있다. 처마 밑 문짝도 색깔은 다르지만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도 동일한 걸음걸이, 엇비슷한 얼굴 그리고 복장을 반복하면서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왼쪽 가장자리의 대문은 열려진 부분과 다시 대칭을 이룬다.
사실 아테네의 한 오래된 건물이 간직하고 있는 대칭구조는 카르티에-브레쏭이 모색하는 ‘결정적 순간’일 수 없다. 아테네의 한 거리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는 용모가 흡사한 두 여인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칭을 이룬 가게문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거의 정면의 위치에서 사진작가가 포착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 순간’은 태어난다. 사진의 대상과 작가의 시선이 우연처럼 만나는 이 완벽한 순간에, 이 허름한 거리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대해, 삶에 대해 언술 언어로 명확히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의미들을 발설한다.
회칠이 벗겨지고 코니스(cornice)가 심하게 깨어진 건물은 과거의 영광과 부귀가 유적의 자취로만 남은 아테네를 의미한다. ‘영원한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문명은 여인상주가 머리에 이고 있는 코니스가 보여주듯이, 머지않아 허물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노쇠의 징후를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이 반복한다. 그녀들의 무거운 몸과 활력을 잃은 걸음걸이, 상복처럼 어두운 복장은 노쇠한 그리스를 또다시 표상한다.
이 사진의 의미작용은 그리스의 과거와 현실의 표상작용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아울러 보여준다.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는 여인상주는 시간의 파괴작용에 쇠진하여 저 늙은 여인들의 무거운 몸으로 추락한 듯 보인다. 영원 불변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그리스 문명이 세월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몰락했듯이, 결코 시들지 않을 듯한 젊음을 간직한 여인상주 역시 시간과 함께 퇴색한 것이다. 따라서 이 거리사진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한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연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에게서 이처럼  의미론적 혹은 형태론적 유사성 혹은 대립을 발견해내는 양상은 분명 카르티에-브레쏭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하는 사진은 카르티에-브레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헝가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 esz)는 카르티에-브레쏭에 앞서서 일상 현실의 순간들을 탁월한 조형감각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혹은 그에 뒤이어, 로베르 두와노(Robert Doisneau), 이지스(Izis), 빌리 로니스(Willy Ronis), 에두아르 부바 (Edouard Boubat)와 같은 유럽의 작가들은 일상의 거리에서 삶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컬한 삶의 순간들을 절묘한 사진감각으로 채집했다. 그런데 거리의 삶, 서민들의 일상에 시선을 집중하는 양상은 사진만의 경향이 결코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의 전반적인 유럽 문화는 거대하고 장중한 서사적 주제에서 벗어나, 비천하고 일상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웅대하고 영웅적인 소재를 멀리하고, 평범한 인간집단 속에 내재된 실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계의 한 양상이었다. 네오 리얼리스트 계열의 영화들, 진부한 현실을 일상의 언어로 정제한 작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의 시학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들과 더불어 일상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유럽 문화의 한 경향을 대변했다.
카르티에 - 브레쏭이 관심을 가진 것은 비근한 일상의 현실뿐이 아니었다. 그는 1947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Georges Rodger)와 더불어 각각 400불씩을 공동 출자하여 조합의 성격을 띤 사진통신사 매그넘(Magnum)을 창설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서사적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49년을 전후하여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패퇴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현장을 거의 1년에 걸쳐 취재했고, 1950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냉전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1954년에는 서방 최초로 소련에 입국한 사진가가 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의 융성과 사진의 예술적 지위 향상으로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군에 포함된 카르티에-브레쏭은 1970년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게 된다. <프랑스에서>라는 타이틀의 이 전시회는 1976년까지 프랑스 전국은 물론이고, 미국, 소련, 유고슬라비아, 호주, 일본 등을 순회하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사진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군에 기입된 그는 1974년 이후 돌연 사진작업을 그만 두고 데생에 전념한다. 그의 예술적 신비를 더하는 알 수 없는 결단이지만, 이런 저런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그의 “사진의 비밀은 바로 집중하는 데 있다”라고 공언한 것에 비추어, 나이와 함께 찾아온 ‘집중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빠른 순간에 확보하는 최상의 시점이 필수적이고 보면, 육체의 노쇠는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데생에 대한 그의 강박 관념적 애착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데생화가로서 존경받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한 터였다. 화가의 꿈을 접고 사진으로 전향한 청년 카르티에-브레쏭의 콤플렉스가 세기의 사진작가로 공인 받은 뒤에도 계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사진이 발명되자 19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많은 실패한 화가들이 사진을 그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고자 전향을 시도했었다.
여담으로 글을 맺기로 하자.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이 작년에 열린 한국 최초의 사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에 낙찰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진을 수집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그의 사진을 구입하기 전에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의 필름은 모두 파기했고, 종전 후에 찍은 필름은 모두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전에 찍은 사진의 프린트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진은 그가 또 다시 필름을 파기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인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의 경매가는 당연히 전자가 아마도 몇 배는, 심지어는 수십 배는 더 높을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쏭, <아테네, 그리스>, 1953, 작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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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feller)를 위시한 대부호 3명의 자금출연으로 1929년에 문을 열었다. 초대관장은 독일의 전위적 예술운동과 형식주의 미학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 1902-81)였고, 그는 1943년까지 관장직을 맡으면서 “현대미술의 연구를 고무, 발전시키며, 현대미술을 산업과 실제생활에 적용시키며, 대중교육을 행하는” 예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뉴욕 현대미술관은 사진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기획을 했다. 그 첫 번째는 1937년에 기획된 사진 발명의 공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1940년 11월, 미술관 사상 세계 최초로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설립한 것이었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전시회, ‘사진 1839-1937’을 기획한 사람은 뷰먼트 뉴홀 (Beaumont Newhall)이었다. 뉴홀의 사진과 관련된 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폴 삭스(Paul J. Sachs)의 지도하에 1931년 미술사 석사를 취득한다. 삭스 교수는 또한 알프레드 바의 스승이었으며, 금융 대부호, 골드만 삭스(Goldm -an Sachs)의 아들로 미술관 운영에 개인과 기업의 후원제도의 도입과 이를 위한 기부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또한 관객들을 일종의 고객으로 상정하는 경영 시스템을 적극 교육한 미술사학자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뉴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잠시 일한 후, 다시 하바드로 돌아와 폴 삭스를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에 등록한다. 1926년 이후 사진작업과 사진역사에 입문한 그는 박사과정 중 당시로는 대단히 생경한 미술사의 대상인 사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 결과 1932년과 1935년 사이에 그는 사진 발명의 경위와 19세기의 미술과 사진과의 관계를 다룬 한 편의 에세이와 사진에 관한 세 편의 서평, 그리고 한 편의 전시회 리뷰를 쓰게 된다. 뉴홀은 경제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35년 스승이 상임이사로 있고, 알프레드 바가 관장으로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서로 취직한다. 그리하여 그는 1936년에 알프레드 바가 기획한 전시회, ‘큐비즘과 추상예술 (Cubism and Abstract Art)’의 전시도록에 들어갈 444권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조사, 작성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1927년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웰레슬리(Wellesley) 대학의 교수 시절부터 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근, 현대 미술사 교과과정을 개정하면서 사진과목을 포함시켰고, 1927년과 1928년의 유럽 여행 당시에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긴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를 방문했고, 쾰른에서 열린 국제 보도사진전, ‘프레사(Pressa)’를 참관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 관장직을 수락하면서 작성한 ‘취지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그는 이미 ‘사진부’의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바는 1936년 뉴홀에게 1937년에 있을 초대형 사진 전시회의 기획을 제안한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이 전시회는 ‘큐비즘과 추상예술’, ‘환상미술, 다다와 초현실주의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1936) 그리고 1938년에 있을 전시회,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28)’와 더불어 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획전이었다.
1839년에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에서 1937년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포괄하는 전시회, ‘사진 1839-1937’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29년 독일의 스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영화와 사진(Film und Foto)’이라는 전시회였다. 독일, 프랑스, 미국, 소련의 사진들을 망라한 이 국제사진전은 무엇보다도 사진만의 고유한 재현 특성에 전념한다고 여겨지는 사진, 다시 말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섬세한 디테일과 심도를 구현하는 사진이나 혹은 빛에 반응하는 사진의 특성에 의거하여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계발하는 사진, 그리고 순간포착을 활용하여 사진만의 고유한 시각을 발굴하는 사진들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다. 또한 이 전시회는 이른바 '예술사진'만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사진이 적용되고 활용되는 다양한 분야들을 망라하여, 사진이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재현매체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전시회의 기획 전반을 주도한 인물은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였고, 소련 사진의 경우는 엘 리시츠키, 프랑스의 작가선정은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가 주도했다. 미국 사진가의 선정은 스트레이트 사진의 기수, 에드워드 웨스톤과, 예술사진에서 광고와 초상사진까지 섭렵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담당했다.
‘영화와 사진’ 전시회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기획전에 미친 여파는 무엇보다도 뉴홀로 하여금 사진의 본질, 사진의 특질을 고려하면서 전시사진을 선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관의 사서는 ‘영화와 사진’ 전시회처럼 모더니즘 미학에 충실한 사진들을 전시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뉴홀은 스투트가르트의 사진전이 그랬듯이 전시사진을 ‘예술사진’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영화와 사진’처럼  천문학 사진, 엑스레이 사진, 광고사진, 보도사진들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사진 1839-1937’은 ‘영화와 사진’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사진전의 전시디자인을 돈독히 참조했다. 전시디자인을 담당한 스위스인 헤르베르트 마터 (Herbert Matter)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장 입구를 ‘영화와 사진’의 포스터 사진과 유사하게 사진가를 의외의 각도에서 대각선 구도로 포착한 대형사진으로 장식했다. 스투트가르트의 ‘영화와 사진’ 그리고 뉴욕의 ‘사진 1839-1937’의 직접적 연관성은 전자를 기획한 모홀리-나기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후자를 위한 명예 자문위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7년에 기획한 전시회가 사진의 역사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이 때 뉴홀이 집필한 전시도록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게 될 「사진의 역사, 1839년에서 현재까지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1949, 1964, 1982)의 초벌 원고가 되는 까닭이다. 전시도록은 90 페이지의 분량이었고, 시대 순서에 따라 90점의 사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작가, 제목, 프로세스를 명기하는 것이었다. 시대구분은 초기사진 (1839-1851), 근대사진(1851-1914), 현대사진 (1914- )으로 구분되는 바, 1851년은 콜로디온타입이 사진계에 도입된 해이며,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이다. 그러니까 뉴홀의 시대구분은 한편으로 사진기술공정의 중요한 변화를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상황의 격변을 고려했다. 사진역사의 시대구분을 사진의 기술적 여건의 변모에 연동시키는 전자의 경우는 뉴홀 이전의 ‘사진의 역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시대구분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인, 요셉 에더 (Josef Maria Eder,1855-1944)가 1905년에 저술한 「사진의 역사 Geschichte der Photographie」이다. 이것은 1932년, 2권의 책으로 개정 증보되고, 뉴홀이 기획하는 전시회 1년 전인 1936년에 영어로 번역된다. 이 영어본은 1945년, 1976년 재판을 거듭한다.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 젤라틴 브로마이드로 이어지는 기술공정에 의한 사진의 역사는 여전히 시효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불어로 된 사진기술 진화의 역사는 조르쥬 포토니에 (Georges Potonni) 가 1925년에 쓴 「사진 발명의 역사 Histoire de la deouverte de la photographie」이며, 이것은 1935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사를 시대구분의 좌표로 삼는 일반 미술사의 한 경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의 전시회와 전시회 카탈로그가 드러낸 폐단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적 감정이 전시 작가의 선정 뿐 아니라 도록에 실리는 작가의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 사진전의 기획방식과 전시디자인에 큰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진가는 단지 15명만이 전시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독일 모더니즘 사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의 대표작가, 알버트 렝거-파츠와 아우구스트 잔더가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반면 미국인은 84명이 전시되고 52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영국인은 27명이 전시에 선정되고 17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프랑스인은 87명이 전시되고 27명이 도록에 수록된다. 전시작가와 작품과의 접촉의 편의성, 작품대여의 가능성,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국가에 따른 ‘편파적’ 선정의 불가피한 이유로 고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주의적 편파성은 그리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1949년에 출간되는「사진의 역사」초판의 인덱스에 나타난 독일인은 13명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사진기술의 진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사진 1839-1937’은 뉴욕 전시회가 끝난 후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진의 개괄적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보전된 사진대가들의 예술적 면모를 알렸다. 그리고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초대 관장이 1929년의 취지서에서 예고했듯이, 세계 최초로 ‘사진부’를 설립하여 사진을 현대 예술의 한 분과로 공식 승인했다. 복제예술의 수집과 전시를 담당했던 미술관의 ‘판화부(Print Department)’에서 분리된 사진은 이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예술매체로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사진부의 위원장은 프린스턴 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맥알핀(David McAlpin)이었다. 대학생시절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집했고, 1936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한 사진 갤러리, ‘미국인의 광장(An American Place)’에서 안젤 아담스(Ansel Adams)의 사진 8점을 구입했던 그는 독립적인 큐레이팅 기관으로서의 사진부의 목표와 전략을 총괄했다. 그리고 사진부의 초대 큐레이터는 당연히 ‘사진 1839-1937’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해낸 뷰먼트 뉴홀이었다. 부위원장은 f.64 그룹의 대표작가, 안젤 아담스(Ansel Adams)였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청교도적 발전 양상인 f.64 그룹의 대표자가 ‘사진부’의 위원장과 큐레이터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부위원장의 직책을 수행한 것은 결코 정실(情實)에 따른 임명이 아니었다. 사진이 미국의 현대 미술에 있어서 독자성, 자율성을 인정받는데 있어서 f. 64 그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전후로 미국사진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 혹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유럽 사진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한다. 사진의 특수성, 자율성을 구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소묘예술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1920년대 들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권위 있는 공공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의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특질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f. 64 그룹과 더불어 미국의 사진은 18세기 후반 서구 사회가 확립한 모더니즘 미학이 요구하는 예술의 두 조건, 즉 세속적 유용성과 경제적 이해추구의 산물이 아닌 고상한 정신성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그리고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자신의 특질을 구현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전자, 즉 정신성의 구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예술’, ‘예술 사진’을 위한 청교도적 엄격함을 계승함으로써 이루어지며, 후자, 즉 사진의 자율성은 사진 매체에만 적용되고, 오직 사진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사진 결과의 예시(previsualization) 규범인 동시에 완벽한 촬영과 완벽한 프린트를 허용하는 존 시스템이라는 사진적 재현체계를 통해 획득된다. 사진예술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의 완벽주의는 사진가-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사회에 인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존 시스템은 데생과 구도, 구성이라는 회화적 규범에 사진기예의 습득을 의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진적 규범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f.64 그룹과 더불어 모더니즘 미학의 두 요구조건을 만족시킨 미국의 예술사진은 모더니즘 미학을 수호하는 제도적 장치인 한 대형 미술관에 의해 현대 미술의 한 분야로서 공식 인정받으며, 그 대표자를 분과의 핵심 일원으로 자리잡게 했던 것이다.  
 1942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양시키고자,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기획 하에 ‘승리로 가는 길(Road to Victory)’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다. 센세이셔널한 전시디자인과 강력한 승전 메시지로 범사회적 호응을 얻어낸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45년 또 다시 애국주의적 사진전, ‘태평양에서의 힘(Power in the Pacific)’을 기획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사진의 사회적 호소력, 사진의 공공적 활용에 눈을 돌린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사진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관객동원을 하면서 여론의 주목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회화주의 사진가에서 상업사진가로 변신하여 커다란 부를 누린 스타이켄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으로 임명된다. 사진예술을 위한 규범적 기예, 존 시스템을 개발한 안젤 아담스와 사진의 역사에 정통한 뷰먼트 뉴홀은 이에 반발하여 현대미술관을 떠난다.  
1948년 뉴홀은 사진의 제국주의적 기업인 코닥사가 설립한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 사진 박물관(Inter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의 초대관장으로 자리 잡으며, 그 이듬해 「사진의 역사」의 초판본을 출간한다. 3천 부의 초판본이 완전히 팔리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1964년에 나오는 「사진의 역사」의 개정판 3천 부는 출판 몇 개월만에 매진된다. 이후 뉴홀의 저서는 재판의 재판을 거듭하여 어떠한 「사진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적 인기를 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사진역사가 곧 세계 사진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그러나 분명하게 진술하는 뉴홀의 「사진의 역사」가 세계의 사진가, 작가지망생, 사진에 문외한인 미술사가들에게 사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뷰먼트 뉴홀의 초상>,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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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표현의 계보

 

도 시

 

 도시의 경관을 찍었던 사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찍었던 사진의 두가지 흐름

 

 에드워드 스타이켄, The Flatiron, 1906

 


  1987년 초여름, 시카고의 사진가들이 술렁거린 일이 있었다. 수집가이자 조직책인 잭 제페가 발기인이 되어 시카고 미술관, 자연박물관, 역사자료관, 공립도서관, 현대사진미술관 등 사진관계기관이 협찬하여 변해가는 시카고를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기획서와 작품의 포트폴리오 제출에 모인 작가는 170명, 그중에서 대표적인 40대를 중심으로 33명의 사진가가 선출되었고 1년 정도의 제작기간이 걸렸다.

  데이빗 트라비스, 케네스 백허드, 데니스 미러 클라크 등의 큐레이터와 <세계사진사>의 필자인 로젠블럼 부부가 초대되어 편집된 것이 <변모하는 시카고 Changing Chicago>라는 사진집이고, 1989년에 앞에서 언급한 다섯 군데의 장소에서 사진전이 동시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도시를 촬영하는 이런 다큐멘터리는 옛날부터 많았다.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시의 경관을 찍은 것이다.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곳이 새로운 시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했던 샤를 마르필의 시도는 으젠느 앗제에 의해 절정에 도달했다. 19세기 말부터 대략 30년정도 파리를 배회하며 촬영했던 앗제의 파리는 기록이라고 하는 행위를 철저히 함으로써, 기록이라는 그 목적 자체를 초월해 버렸던 사진이다.

  앗제의 사진에 찍힌 것은 옛 파리의 외관 뿐만이 아니라, 그곳이 사진 아우라(Aura)이다. 앗제의 사진은 배우에 뜻을 두었지만 좌절했던 그의 ‘극장’이었고, 막이 오르기 전의 정적과 무대라고 하는 제단(祭壇)에서 펼쳐진 신화의 여운이 감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사진을 ‘신화’의 영역에까지 올려놓았다.

  ‘상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자발적 융합이며, 예술작품을 창조한다고 하는 의식작용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위치의 시적 차원과 초현실에의 도달’을 지향하는 초현실주의자가 앗제의 작품에 심취하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으젠느 앗제

 

앗제의 시선을 이어받아 도시의 경관을 찍은 사진가들

  앗제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작가를 손꼽으려면 한이 없다. 그러나 굳이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역시 앗제를 발견해 낸 장본인인 베르니스 애보트일 것이다. 만 레이의 조수를 하고 있던 에보트는 앗제의 작품을 세계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변모하는 뉴욕>으로 이름지은 뉴욕의 도시풍경을 찍은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을 답습하였다. 변해가는 뉴욕의 외관을 통해서 도시의 고동을 강하게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베르니스 애보트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가들

  앞에서 말했듯이 도시를 촬영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사진가들은 우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주목하고 그곳에서의 사진의 역할을 생각했다. 사진을 사회개량의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뉴욕의 빈민가의 상황을 호소했던 제이콥 A.리스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미성년 노동자나 이민상황을 찍은 루이스 W.하인의 사진은 사회의 시스템마저 변화시킬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다.

  19세기의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미지를 가정에까지 끌어들인 것은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나 책에서 사진의 홍수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현대에서 보면 감상주의(Sentimentalism)나 낭만주의(Romanticism)로 보여질 수 있는 이런 사진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이러한 접근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기관이나 포토리그(Photo League)*②등의 많은 사진가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질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능가한 것은 역시 FSA 프로젝트*③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회적 이상이 존재하고, ‘현실의 거울’로서의 사진의 기능을 역시 믿게 만들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상징되었던 사회적 모순의 표출시대를 체험했던 사진가는 자신의 카메라의 정의를 우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사체로서 선택된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도시 속의 복잡하게 얽혀진 미로와 같은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상 의식하면서 다가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60년대 사진가들은 19세기의 사회를 개선코자 한 사진가들과 주제를 같이 하면서도, 정의를 내세워 자신의 사진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오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뉴욕의 동부 할렘에 있는 히스패닉 거주지의 사람들이나 지하철의 승객을 촬영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도, 중서부의 모터 사이클족이나 텍사스의 수형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대니 라이언(Danny Lyon)도 깊이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냉철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 그 작품에서는 억지로 강조된 듯한 가치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도시의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찍었다는 점에서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하나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변모하는 시카고>의 사진집을 보고 놀란 것은 인간관계에 관심을 둔 사진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사체와 자신과의 거리와 관계를 항상 생각하면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눈을 향하고 있다. 도시라고 하는 곳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도, 모순도, 문제도, 환희도 그리고 그것을 나타낸 사진의 시각적 뒤섞임도, 좋든 나브든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안되는 절실함과 바로 정면에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을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이 오래된 것만으로 단번에 옛것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속단이다.

 

 대니 라이언                                                          브루스 데이비슨

 


*②1936년부터 1951년에 걸쳐서 뉴욕에서 활동을 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집단으로 당대의 가장 정치적인 참여 집단이었다. 사진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세계에 대한 참된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이 사진연맹의 창설 목적이었듯이 그들은 외부 세계를 심오하고 냉정하게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응용하였다. 비록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출발하였지만 - 사진연맹의 원래 명칭은 ‘영화와 사진연맹’(Film and Photo League)으로, 1930년에 좌익성을 띤 국제노동자구원협의회의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 1936년에 영화제작자들과 결별하면서 사진연맹으로 개칭하였다. - 뛰어난 많은 사진가들의 작업과 작품집을 통해서 사회적 다큐멘터리(Social Documentary)의 접근방법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아론 시스킨드를 중심으로 할렘을 탐색하는 집단적인 계획을 세워 실업과 빈곤에 처한 도시 노동자들을 낭만적이리만치 동정적인 시각으로 촬영하였다.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루이스 W.하인, 시드 그로스만, 솔 립손, 헬렌 레빗, 아론 시스킨드 등을 들 수 있다.

*③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농업안정국)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사회전체의 복지를 목표로 시행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공황에 처한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局)의 명칭.

대공황 속에서 날씨의 불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농민들 중에서 중소의 자영농민은 소유지를 매각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5년 이들을 강제적으로 정부 소유의 농장으로 이주시킬 목적으로, 농업안정국의 전신인 재이주 행정국(Resetlement Administration)이 창설되었고, 설립책임자로서 콜롬비아대학의 경제학자인 터그웰(Rexford Guy Tugwell)이 선임되었다. 터그웰은 설립 당시의 보수적인 의회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즉, 농민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일반사회에 알릴 필요성에 따라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사람으로서 콜롬비아 대학의 동료교수인 스트라이커(Roy Stryker)를 초빙하였다. 스트라이커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적절한 수단인 사진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자료부문의 스텝으로서 우수한 사진가들을 모집하였고, 이들 사진을 민중을 설득하는데 사용하였다.


김남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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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91
 
있는 그대로의 인물들을 찍은 사진 ...과장되지 않은 장면...그러난 무표정의 연출...
거대한 크기의 이 증명사진은 오히려 연출된 인물사진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묘한 감탄사를
자아낸다는 이유로 토마스 루프를 유명하게 했고 현재 엄청난 금액에 판매되고 있단다.
어제 미술관 가는 길에서 알게된 이 사진작가는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재기발한 연출과 촬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세계적인 사진작가란다. 
처음엔 몇몇 작품들을 보고 좀...황당하던데...
신기하지 큐레이터의 설명을 덧붙이니 그게...말이야...
다...달라보이더란 말이지...
암튼 무엇이든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과 접근이 돈을 부르는 시대다...
이 사람의 작품은 보통 1억이 넘는 고가란다...
몇몇작품들은 정작 자신이 직은 것도 아닌 차용을 통한 재정비임에도...
하긴 꾸미는 것도 재주고...
그게 오늘날의 예술계를 거듭나게 한다니까...
결국...현대 미술은 누가 잘 조작하고 이미지화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이지...
마르셀 뒤샹이나...데미언 허스트같은 이들처럼...
뒤샹이 처음 변기를 두고 [샘물]이라 명명하며 전시회에 작품이랍시고 내놓았을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당해했나...
그런데 결국 그것이 [다다이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형성하면서
새시대를 열었지...
알 수 없는 세상이야...아니지...너무 뻔...한 세상인가?
 

= 토마스 루프 =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46)는 현재 세계 사진시장을 이끌고 있는 주역 중의 한 사람.

기록사진이 아닌 아이디어 사진이 특징이다.

전시에 맞춰 최근 방한한 작가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 포착할 뿐이라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매체의 한계를 실험했다”며 “사진은 직접적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의 이미지,

조작된 2차적 현실”이라고 말했다.

 

 

1958년 독일 젤 암 하메바흐(Zell am Harmersbach) 태생인 토마스 루프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번(Bernd) 와 힐라 베커(Hilla Becher)의 지도하에 수학한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루프는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고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접근을 해왔다. 루프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할 뿐' 이라는 전제 하에 끊임 없이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여 이제껏 16시리즈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루프는 사진은 현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완벽한 사진을 알아볼 수 있지만 동시에 완벽한 사진은 없다는 것이다. 사진은 우리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이 아닌 이미지의 이미지, 즉 조작된 2차적 현실로서, 루프의 미학적 연구를 통해 열리는 다층적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이 사회정치나 미술사 등 특정 현안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도 연작 작업, 특히 누드나 인물사진과 같은 작업은 본질적으로 동시대인의 문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요번 아라리오 에서 전시될 작품들은 루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전체 16시리즈 중 9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루프가 이제까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르의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큰 이유는 그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기록사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입각한 다양한 실험정신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독일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의 ‘누드’ 연작 중 하나. 인터넷 누드 화면을 디지털 방식으로

합성한 사진들은 ‘사진은 조작된 현실’이라는

작가의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 아라리오갤러리

 

Porträts (초상사진)1981-
영상적 구도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에 입각해 인물사진 장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현대식 표현방식을 모색한 결과 상반신 촬영에 인물의 얼굴을 전면에 배치하는, 그 어떠한 심리적 분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사진은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한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각각의 인물을 석고상처럼 촬영하려는 것이었다. 미소나 웃음, 또는 카메라를 '유혹'하는 등의 감정표현은 일체 배제하기로 했다. 대상 인물은 자신 주위의 사람들 중 직관적으로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동료, 친구, 아카데미의 급우들, 뒤셀도르프 라팅게르 슈트라세의 유흥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촬영에 임하게 됐다.

 

06h 04m/-70° 1992 260 x 188 chromogenic color print

 

Sterne (별)1989-1992 제작
학창시절부터 루프는 사진과 천문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므로 검은 바탕에 하얀 점이 흩뿌려진 기본적인 구도의 추상화를 고려하는데 있어 하늘을 모티프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 장비로는 전문적인 천체사진을 결코 제작할 수 없음을 깨달은 루프는 유럽남부관측소(ESO) 자료실에서 구한 음화 원본 1212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반구의 밤하늘을 포착한 이 과학사진들은 칠레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슈미트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것이다.

Zeitungsfotos (신문 사진)1990-1991 제작
신문사진을 레프로 카메라로 칼라 재현 (negative 4 x 5 inch)
1981년에서 1991년 사이 토마스 루프는 독어 일간지 및 주간지에서 2500장 이상의 신문사진을 수집했다. 이 사진들이 지닌 엄숙한 형식은 예술적 이유가 아닌 편집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뉴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사진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였기 때문이다. 루프는 자신의 자료에서 추려낸 400개 이미지를 재현하고 두 칼럼에 걸쳐 2:1 비율로 인화하여 아무런 설명 글 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표현방식을 택한 이유는 '신문사진' 자체를 연구하는 동시에 이 사진들이 종래의 기능에서 분리되면 어떤 정보를 전달하게 되는지 모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Herzog & de Meuron (헤르조그와 드메론 건축사진)1991년 -
1990년 쟈크 헤르조그 (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메론 (Pierre de Meuron)은 1991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루프에게 자신들이 설계한 건물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루프는 라우펜의 리콜라 창고를 찍고자 했으나 장거리 여행을 원치 않았던 관계로 바젤에서 사진작가를 고용해 자신이 지시한대로 촬영하도록 했다. 바젤에서 송부된 여러 장의 사진을 컴퓨터로 조합 처리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루프는 그 후에도 과거에 사용한 기법을 토대로 헤르조그와 드메론이 설계한 건물을 여러 차례 촬영했으며 이들의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에베르스발데 대학 도서관 외벽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는데 루프의 <신문 사진> 시리즈에 포함된 사진을 사용했다.

Plakate (포스터)1996년 - 디지털 처리 몽타쥬
1996년에 발생한 일련의 정치 사건은 정치예술에 대한 루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존 하트펠드(John Heartfeld)의 작품과 20년대와 30년대 사이의 러시아 프로파간다 포스터에 영감을 받아 기존의 시각적 자료를 토대로 한 <포스터> 시리즈를 발전시켰다. 루프는 의도적으로 1996년에는 이미 쇠퇴한 콜라쥬 기법을 모방함과 동시에 현대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켜 이번 시리즈의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했다.

nudes (누드 사진)1999년 -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 디지털 방식으로 수정한 포르노 사진들
1998년경 누드사진 작업에 착수한 루프는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에서 생성되는 화소(pixel) 기반의 추상사진을 소재로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누드사진을 조사하던 중 포르노 분야를 접하게 된 루프는 인터넷상의 이 사진들이 해상도가 낮아(72dpi) 픽셀구조가 자신이 실험해오던 것과 유사함을 발견했다. 루프는 인터넷 사진에도 같은 기술을 적용하여 픽셀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처리했다. 희미함과 흐릿함을 유도하는 기술을 적용하고 간혹 색상을 수정하거나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했다. 루프는 연작을 통해 오늘날 인터넷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제공해주는 각종 성적 환상 및 행위를 다루고자 했다.

l.m.v.d.r. 1999년 -
1998년 줄리안 헤이넨(Julian Heynen)은 토마스 루프에게 크레펠드의 쿤스트 미술관에서 개최할 루드위그 미스 반 데 로(Ludwig Mies van der Rohe) 건축사진전을 위해 그가 설계한 1927-1930 사이의 빌라를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진전은 미스 반 데 로에가 예전에 살았던 집이자 지금은 현대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Haus Lange와 Haus Esters의 보수공사 후 재개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프는 Haus Tugendhat, Haus Lange, Haus Esters, Barcelona Pavilion 건물들 그 자체와 이 건물들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어 헤르조그와 드메론 시리즈에서처럼 모든 기법을 총동원해 이 두 건물을 촬영했다. 크레펠트에서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예정인 1938년까지의 미스 반 데 로 건축 회고전을 준비하던 테렌스 라일리(Terence Riley)는 루프에게 현존하는 미스 반 데 로의 나머지 건물들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직접 촬영할 수 없었으므로 기존의 영상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Substrate (근원) 2001년 -

 

substrat 11-I 2003 284 x 186 chromogenic color print


루프는 <nudes> 연작에 사용할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상의 가상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적 수단으로 전송되는 시각적 자극만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진과 정보가 서로 중첩되는 인터넷상의 사진 홍수 속에서 더 이상 시각 정보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루프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이런 시각적 공허함을 관통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 일본만화를 원자료로 삼아 여러 개의 층으로 중첩하고 합성시켜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만들어냈다.

m.d.p.n. 2002~2003

 m.d.p.n. 28 2003 130 x 166 chromogenic color print

 

m.d.p.n. 33 2003 130 x 190 chromogenic color print
 
유명 건축가인 루이기 꼬센자(Luigi Cosenza)가 1929년 나폴리에 설계한 어시장을 촬영하는 m.d.p.n.에서 루프는 미스 반 데 로에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기법을 적용했다. 디지털 방식을 적용하여 나폴리 어시장을 오늘날의 모습과 원래 모습, 그리고 원시적인 도시적 맥락에서 보여주는 합성적 이미지를 창조하여 과거와 현재를 상호교차시키는 세련된 연작을 탄생시켰다. m.d.p.n. 역시 l.m.v.d.r.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진과 자료사진을 조합하는 연작으로 제작하였으며 이 사진들을 동일한 기법으로 처리하여 고전적 건축물에 새롭고 독자적인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예전에 받아 놓은건데 출처가 생각이 안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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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포토몽타주 (photomontage)와 더불어 처음으로 사진 매체와 조우했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다다이스트들은 기존의 사회이념, 전통적 예술형식을 전폭적으로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에 포토몽타주를 접합시켰다. 절단한 사진들로 작품의 전체를 혹은 작품의 일부분을 콜라주 방식으로 접합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포토몽타주는 1910년대 말, 그러니까 소련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럽이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 시점에서 도래했다. 다시 말해 포토몽타주는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허구성과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전쟁이라는 파괴적 양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사회건설의 모델로 비치는 역사적 순간에 태어났다. 시각예술작업과 문학작업에서 공히 행해진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 작업은 잡지, 신문, 포스터, 사전, 광고 카탈로그 등에서 부분적으로 떼어낸 이미지 혹은 텍스트들을 본래 문맥과는 상관없이 특정 공간에 임의적으로 결합, 조립 - 이것이 몽타주의 본래 뜻이다 - 하면서, 새로운 텍스트의 공간,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만드는 기법으로, 그것은 그 형식 자체 속에 이미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주의,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를 파산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었다. 그 파산, 파괴 위에서, 아직은 그 형태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혁명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의 몽타주 기법이었다. 간단히 말해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폭로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파편적 이미지, 절단된 텍스트로 내재화하고,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혁명을 통해 암중모색하는 혼돈의 양상을 내면화했다. 부르주아 문명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낸 자리에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할 모델로 떠오른 자리에서 포토몽타주 기법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포토몽타주는 분명 1910년대 초반 피카소 (Picasso), 브라크(Braque), 후앙 그리(Juan Gris)가 종이들을 붙이고 과슈나 유화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과 19세기 후반의 유럽이 카드엽서의 도안과 유머러스한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행한 시도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형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혼돈의 양상은 새로운 형태미, 새로운 미학질서를 탐구하는 큐비즘의 미학적 시도, 19세기의 장식적이고 유희적인 포토몽타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다이스트들의 사진을 활용한 충격적이고 거친 형상은 작업방식에 있어서는 큐비즘의 종이 붙이기와 19세기 포토몽타주와 거의 동일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반 조형적, 반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전통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베를린 다다에는 포토몽타주를 행하는 4명의 주역이 있었다. 한편으로 사진의 단편들의 조합을 통해 키리코(Chirico)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사진과 낱말들의 결합을 시도한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과  기계부속들 혹은 거리의 광경에 인간신체들을 결합한 한나 회(Hannah Hoch)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절대적 자유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를 신봉하여, 그들의 포토몽타주는 자의적인 무질서와 결코 확고히 고정시킬 수 없는 의미작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잡지의 표지 작업을 포토몽타주로 행하고, 그래픽적인 수채화에 사진의 단편들을 통합시킨 게오르그 그로츠 (George Grosz)와 그의 친구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1891-1968)가 있다. 이 둘은 1919년 독일 공산당이 창당되자마자 당원이 되었고, 사회비판과 혁명에 봉사하는 사회참여적 포토몽타주를 행했으므로 그들의 시각적 구성과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존 하트필드의 본명은 헬무트 헤르츠펠트 (Helmut Herzfeld)였지만 1916년 독일의 국수주의와 영국혐오증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별명은 ‘Monteurdada’, 즉 ‘다다의 조립공’이었는데, 이는 그가 다다를 대표하는 포토몽타주 작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트필드가 전통적 예술가의 고답적 이미지를 거부하기 위해 엔지니어, 조립공의 복장을 즐겨 입었던 까닭이었다.
  신랄하게 정치를 풍자하는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본격화된 것은 그의 형, 빌란트 (Wieland)가 설립한 출판사의 책표지와 공산당 기관지들을 디자인하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30년 『Arbeiter-Illustrierte Zeitung』, 즉 '노동자 화보잡지'의 정기기고자가 되면서 정치현실을,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포토몽타주는 절정에 도달했다.『AIZ』에 게재된 그의 250점에 달하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정치 선동적인 명료한 텍스트를 결합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인 사회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의 호전성을 공격하고 그의 포토몽타주를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는 것이었다. 1930년 그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홍보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신문들로 얼굴을 감싼 한 인물을 몽타주한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배추 머리를 가졌는데, 그 이파리를 읽어보았는가? 부르주아 신문들을 읽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귀가 먼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지겨운 허풍들!” 1932년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노동자들이 기관총에 쓰러지자, 그는 이렇게 포토몽타주한다. “국제연맹 건물 전면에 파시스트의 총검에 꿰뚫린 평화의 비둘기를 배치했고, 백십자기 대신 나치표장을 새겨 넣었다.” 위에서 인용한 포토몽타주는『AIZ』의 1934년 10월 4일자 특별호로 ‘반파시스트, 행동통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가 되어, 파시즘에 본때를 보여주자! 인민의 주먹들이 프랑스와 자르란트에서 보여주었던 것을 보여주자. 반파시스트 지지자들은 어디서나 단일 전선을 이룩하여야 한다.”라는 텍스트를 포토몽타주 곁에 삽입했다.
 
  『AIZ』는 1926년에 창간된 화보지로 부르주아 계층을 독자로 하는 잡지들과 편집형식은 물론이고 판매 부수에 있어서도 경쟁을 벌인 시사주간지였다. 이 잡지는 한 작가의 말을 빌면, “정신을 사로잡기 위한 최상의 무기”인 사진을 공격적으로 사용했다. 브레히트(Brecht)의 찬사에 따르면, 부르주아 보도사진가들의 객관성을 포장한 거짓들을 견제하는 “『AIZ』의 작업은 진리에 봉사하며 사태를 정확히 재정립하고자 하는 까닭에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잡지는 그것을 경이롭게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브레히트가 생각하는 시대의 ‘진실’은 반파시스트운동, 노동자의 계급투쟁 그리고 전통적 예술형식의 파격적 혁명이었던 까닭에, 그는 원근법, 균형, 조화, 통일이라는 기존의 전통미학원리를 파격적으로 분쇄하는 포토몽타주와 ‘노동자-사진가’의 사진을 선호하면서, 반나치, 반부르주아 운동에 앞장선 『AIZ』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AIZ』의 사진과 관련한 활동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포토몽타주의 전투적 사용 외에도 노동자들이 찍은 시사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현실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잡지에 게재되는 사진자료를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유통시키는 자본주의적 사진 통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AIZ』는 1926년 3월 독자들에게 대대적인 협조를 구한다. 부르주아적인 사진통신사들이 유통과정 속에서 의도적으로 눈감아버리거나 배제하는 사진들을 독자들 자신들이 잡지에 제공해줄 것을 호소한다. 『AIZ』가 요구한 노동자 사진의 종류를 인용하면, “1. 노동계의 혁명운동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2. 노동계의 사회적 상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3.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전체적 국면에서 정확히 재현하는 종류의 사진들, 4. 노동의 조건들과 장소들을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노동현장 사진들, 5. 현대 기술과 그것의 형태들, 산업구조물과 제조방식들을 도해하는 사진들”이었다. 이러한 협력요청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몇 달 후에는 ‘노동자-사진가’ 모임이 발족되고 공식 기관지, 『노동자-사진가 Arbeiter-Fotograf』까지 발행하게 된다. 
  이 월간지는 『AIZ』가 탄생시킨 새로운 형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기술적으로 이념적으로 교육시켜, 그들을 효율적이고 의욕적인 사진기자로 만들기 위한 잡지로 기능을 수행했다. 『노동자-사진가』의 필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진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매스 미디어들이 의식적으로 주입시킨 부르주아의 취향을 거부하고, ‘계급적 시각’을 습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계급적 관계와 착취의 징후들을 포착하여 가차없이 그것들을 비판하도록 학습시켰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러한 사진 실천은 기대한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이론가들이 비판한 부르주아의 취향을 상당수 답습했기 때문에 『AIZ』는 기존의 사진통신사의 사진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AIZ』가 계발한 아마추어 사진가 모임의 전략을 모방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임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자 잡지, 『노동자-사진가』는 폐간하게 되며, 존 하트필드는 『AIZ』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하여 1938년까지 반나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하트필드의 현실참여적 포토몽타주는 그 생산량에 있어서나 그 강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것이었지만, 분명 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포토몽타주의 독자적 발명을 주장한 소련의 클루트시스(Klutsis)와 로드첸코 (Rodtchenko)는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 『레프 Lef』를 통해 소련의 혁명정부가 직면해야 했던 이념홍보와 교육에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로 미술사가 분류하는 이들의 작업은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포토몽타주의 여러 가능성들을 실험하고 실천했다. 로드첸코는 1923년 출판되는 마이야코프스키(Maikovski)의 시집 『이곳에서』의 삽화를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했고, 엘 리시츠키(El Lissitscky)는 1928년 독일의 쾰른에서 열린 국제 사진전시회 ‘프레사(Pressa)’의 소련전시장을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대형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독일에서도 포토몽타주를 활용하는 여러 양상들이 나타났다. 도멜라 (Domela)는 그것을 광고에 활용했고, 모홀리-나기는 백색 평면에 사진들을 잘라 붙이고, 직선을 반복적으로 가미하여 포토몽타주의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그 기법을 이용해 부조리하고 기이한 이미지의 연상체계를 구현했다.
  나치의 집권과 더불어 프라하로 망명한 하트필드는 체코가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1938년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거기에서 1950년까지 린드세이 드루몬드(Lindsay Drummond) 출판사의 일을 하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1950년 이후에는 동베를린에 정착하여 무대장식과 전시 포스터의 제작을 행한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관련된 작업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는 자본주의와 파괴적 권력이 공모하여 인민을 탄압하는 양상이며, 둘째는 전쟁의 잔인함을 폭로하는 양상이다. 셋째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희망의 도식화이며, 넷째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다. 그는 절단된 사진 이미지들을 단순하고 엄격한 시각적 구성을 통해 짜깁기했고, 여기에 선동적인 메시지의 텍스트를 삽입시킴으로써 대중을 향한,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희귀한 예를 예술사에 남겼다. 그는 현실과 분리된 예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고답적 예술에 항거하면서, 아울러 과거의 판에 박힌 예술적 형식과 과감한 단절을 꾀한, 한 마디로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불어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전초병’이라는 뜻으로 그 쓰임새는 군사적 용도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삶의 전 영역이 정치적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자 예술도 이에 초연할 수가 없었다. 예술의 영역도 이 정치, 군사적 용어를 차용하여 특정 예술가군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치,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를 특정한 예술적 성향을 지향하는 예술가 부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예술가군은 예술의 발전을 사회의 진보와 관련시키는 성향을 표출하는 자들로 사회의 현실문제에 자신들의 예술로써 대응하고 응답하고자 했다. 인류의 개선적 발전을 예술의 기본토대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들은 당대의 정치, 사회 문제에 자기들의 의견을 작품,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따라서 19세기적 의미에서 예술분야의 아방가르드는 20세기가 뜻하는 바처럼 ‘현재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꾀하는 예술가군’이라는 의미와는 현격한 의미론적 차이를 보였다. 19세기의 아방가르드 개념으로 살펴볼 때 새로운 형식을 과격하게 추구한 큐비즘의 작가들이나, 마르셀 뒤샹은 아방가르드일 수 없다. 오히려 전통적 예술형식을 존중하면서, 인류의 진보, 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보다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예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갔던 쿠르베 (Courbet)가 19세기가 의미한 아방가르드 입장에 부합한다. 어쨌든 존 하트필드는 19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20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혹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나 그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그의 포토몽타주라는 파격적인 형태탐구 작업은 당시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는 또한 ‘사회의 진보, 인류의 삶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관점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수색대의 전초병, 즉 군사적 의미의 아방가르드처럼 나치와 부르주아의 개량 사회주의의 탄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선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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