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1908- )은 섬유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그는 예리한 비평과 강의로 유명한 앙드레 로트 (1885-1962)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줄곧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가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31년, 사진을 데생의 편리한 대체물로 여기면서였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라이카(Leica)를 사용한지 3일만에 그는 사진에 대한 구성감각을 깨우쳤다. 오만처럼 들리는 이 자랑은 그러나 큰 허세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전문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a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 지금도 여러 책에 수록된 1932년도에 생산된 사진들은 분명히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중년사내가 <셍-라자르 역 뒤에서> 포스터의 무희와 흡사한 동작으로 물이 고인 거리를 뛰어가는 사진은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찍은 ‘명작’이다.
그는 이후 신문사와 화보잡지사의 의뢰에 응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찍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진과 영화를 담당하는 육군하사로 근무하다가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두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세 번째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인생의 유위전변은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의 큐레이터, 뷰먼트 뉴홀의 오해를 부르게 된다. 뉴홀은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독일군의 포로였던 카르티에-브레쏭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의 ‘유작(遺作)’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의 주선으로 뷰먼트 뉴홀을 접촉하게 된 카르티에-브레쏭은 「하퍼스 바자 Harp-
er's Bazaar」가 의뢰한 작업을 행할 겸 뉴욕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1947년, 300점의 작품을 전시할 개인전을 준비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는 뷰먼트 뉴홀과 친분을 쌓았고, 뉴홀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작업 방식을 숙지하게 되었다. 뉴홀이 「Popular Photography」의 194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 당시 카르티에-브레쏭은 밝기 f.1.5의 콘탁스(Contax) 렌즈를 라이카 카메라에 장착해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싱글 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는 달리,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뷰 파인더 윈도우를 통해 피사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식 라이카는, 촬영 순간에 완벽한 사진을 기획하는 카르티에-브레쏭의 작업방식에 정확히 부합했다. 그야말로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에게,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에 어둠의 공백을 만드는 리플렉스 카메라는 적합하지 않았다.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결정적 순간’은 피사체의 표정, 작가의 의도, 주변상황이 사진 프레임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사진작가의 전 능력이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는 촬영 이후의 암실작업을 작가의 의도, 감성이 개입될 수 없는 상황, 피사체의 조건을 수정, 보완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찰, 감정이입, 상황판단은 ‘결정적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끝난다고 그는 단정했다.
이러한 그의 사진에 대한 견해는 그의 사진 스타일을 결정했다. ‘결정적 순간’을 도모하는 촬영의 순간을 신성화하는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생성되는 네거티브 이미지에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가 보기에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는 네거티브 이미지에서 무엇인가를 빼고 보탠다는 것은 ‘결정적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행위다. 따라서 네거티브 이미지를 절단하면서 재구성하는 트리밍(trimming)은 그의 사진 원칙에서 배제된다. 네거티브 이미지는 가감 없이 인화되어야 한다. 카르티에 - 브레쏭에 대한 뉴홀의 말의 들어보자.
“현대미술관에서 곧 있을 개인전 사진들의 거의 대부분은 네거티브 이미지 전체를 인화한 것이다. 인화 구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영역은 프레임의 맨 끝 가장자리까지이다.”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에 작가의 관점, 구성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렴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관찰할 수 없는 우발적 상황, 작가의 시야를 벗어나는 우연성은 피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의 눈으로 발견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본 현실의 포착이다. 간단히 말해, 사진의 주체는 작가이지, 결코 카메라가 아니다. 뉴홀의 카르티에-브레쏭에 대한 해설을 또 다시 인용하면, “그는 카메라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이 찾아낸 것을 기록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직접적인 플래시 광을 싫어한다. 피사체에 보조조명을 써야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그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백열 텅스텐 광을 선호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그의 구성에 들어오지 않는 우연은,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실패는 아닐지라도, ‘결정적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일종의 실수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카르티에-브레쏭은 194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미국의 스냅 사진작가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위지(Weegee)가 되었건, 리젯 모델 (Lisette Model)이 되었건, 더 나아가 윌리암 클라인(William Klein)이 되었건,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되었건 미국의 거리사진 작가들은 작가의 미학적 감성과 의지에 종속된 장면보다는, 카메라가 우발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현실의 양상을 애호했다. 촬영 당시 작가가 보지 못했던 세부양상, 혹은 노출의 과부족, 흔들림 현상에 의해 작가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이 폭로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그들은 절제된 구성, 기하학적 구도가 완성되는 최상의 시점을 포기하고, 사진의 우연성, 사진의 자동생성에 기대어 작업을 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카메라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영화 카메라처럼, “의식적인 인간행동 대신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을 포착하고 (...) 우리에게 무의식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열어 보인다. 마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충동의 경험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반면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현실의 무질서를 정리하고, 우발적 상황을 통제하고, 그것들에 미학적 의미작용을 부여하는 방책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조형감각, 예리한 세부관찰을 덧없이 변화하는 현실만큼 빠르게 수용하는 도구였다. 순간의 우연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우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그 예를 위에서 인용한 사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 사진을 특징짓는 것은 짝을 이룬 대칭구조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사진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은 쌍을 이루며 나타난다. 맨 위의 석조 난간은 대칭을 이루면서 반복되며, 그 아래 여인상주(女人像柱) 역시 쌍둥이처럼 서있다. 처마 밑 문짝도 색깔은 다르지만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도 동일한 걸음걸이, 엇비슷한 얼굴 그리고 복장을 반복하면서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왼쪽 가장자리의 대문은 열려진 부분과 다시 대칭을 이룬다.
사실 아테네의 한 오래된 건물이 간직하고 있는 대칭구조는 카르티에-브레쏭이 모색하는 ‘결정적 순간’일 수 없다. 아테네의 한 거리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는 용모가 흡사한 두 여인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칭을 이룬 가게문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거의 정면의 위치에서 사진작가가 포착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 순간’은 태어난다. 사진의 대상과 작가의 시선이 우연처럼 만나는 이 완벽한 순간에, 이 허름한 거리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대해, 삶에 대해 언술 언어로 명확히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의미들을 발설한다.
회칠이 벗겨지고 코니스(cornice)가 심하게 깨어진 건물은 과거의 영광과 부귀가 유적의 자취로만 남은 아테네를 의미한다. ‘영원한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문명은 여인상주가 머리에 이고 있는 코니스가 보여주듯이, 머지않아 허물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노쇠의 징후를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이 반복한다. 그녀들의 무거운 몸과 활력을 잃은 걸음걸이, 상복처럼 어두운 복장은 노쇠한 그리스를 또다시 표상한다.
이 사진의 의미작용은 그리스의 과거와 현실의 표상작용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아울러 보여준다.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는 여인상주는 시간의 파괴작용에 쇠진하여 저 늙은 여인들의 무거운 몸으로 추락한 듯 보인다. 영원 불변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그리스 문명이 세월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몰락했듯이, 결코 시들지 않을 듯한 젊음을 간직한 여인상주 역시 시간과 함께 퇴색한 것이다. 따라서 이 거리사진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한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연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에게서 이처럼  의미론적 혹은 형태론적 유사성 혹은 대립을 발견해내는 양상은 분명 카르티에-브레쏭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하는 사진은 카르티에-브레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헝가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 esz)는 카르티에-브레쏭에 앞서서 일상 현실의 순간들을 탁월한 조형감각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혹은 그에 뒤이어, 로베르 두와노(Robert Doisneau), 이지스(Izis), 빌리 로니스(Willy Ronis), 에두아르 부바 (Edouard Boubat)와 같은 유럽의 작가들은 일상의 거리에서 삶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컬한 삶의 순간들을 절묘한 사진감각으로 채집했다. 그런데 거리의 삶, 서민들의 일상에 시선을 집중하는 양상은 사진만의 경향이 결코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의 전반적인 유럽 문화는 거대하고 장중한 서사적 주제에서 벗어나, 비천하고 일상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웅대하고 영웅적인 소재를 멀리하고, 평범한 인간집단 속에 내재된 실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계의 한 양상이었다. 네오 리얼리스트 계열의 영화들, 진부한 현실을 일상의 언어로 정제한 작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의 시학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들과 더불어 일상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유럽 문화의 한 경향을 대변했다.
카르티에 - 브레쏭이 관심을 가진 것은 비근한 일상의 현실뿐이 아니었다. 그는 1947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Georges Rodger)와 더불어 각각 400불씩을 공동 출자하여 조합의 성격을 띤 사진통신사 매그넘(Magnum)을 창설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서사적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49년을 전후하여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패퇴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현장을 거의 1년에 걸쳐 취재했고, 1950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냉전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1954년에는 서방 최초로 소련에 입국한 사진가가 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의 융성과 사진의 예술적 지위 향상으로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군에 포함된 카르티에-브레쏭은 1970년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게 된다. <프랑스에서>라는 타이틀의 이 전시회는 1976년까지 프랑스 전국은 물론이고, 미국, 소련, 유고슬라비아, 호주, 일본 등을 순회하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사진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군에 기입된 그는 1974년 이후 돌연 사진작업을 그만 두고 데생에 전념한다. 그의 예술적 신비를 더하는 알 수 없는 결단이지만, 이런 저런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그의 “사진의 비밀은 바로 집중하는 데 있다”라고 공언한 것에 비추어, 나이와 함께 찾아온 ‘집중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빠른 순간에 확보하는 최상의 시점이 필수적이고 보면, 육체의 노쇠는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데생에 대한 그의 강박 관념적 애착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데생화가로서 존경받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한 터였다. 화가의 꿈을 접고 사진으로 전향한 청년 카르티에-브레쏭의 콤플렉스가 세기의 사진작가로 공인 받은 뒤에도 계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사진이 발명되자 19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많은 실패한 화가들이 사진을 그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고자 전향을 시도했었다.
여담으로 글을 맺기로 하자.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이 작년에 열린 한국 최초의 사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에 낙찰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진을 수집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그의 사진을 구입하기 전에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의 필름은 모두 파기했고, 종전 후에 찍은 필름은 모두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전에 찍은 사진의 프린트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진은 그가 또 다시 필름을 파기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인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의 경매가는 당연히 전자가 아마도 몇 배는, 심지어는 수십 배는 더 높을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쏭, <아테네, 그리스>, 1953, 작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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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거-파츠 (1897-1966)는 라즐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그러나 사진 경향에 있어서는 그의 대척점에서 1920년대 독일 사진계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 인물이다.
  헝가리 출신의 모홀리-나기가 뉴 비전(New Vision)의 선봉장이 된다면, 랭거-파츠는 신객관주의(Neue Sachlichkeit)라는 사진경향을 주도했다. 뉴 비전과 신객관주의는 사진매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의도하는 재현양상에 있어서 철저하게 대립했다. 바우하우스를 근거지로 한 모홀리-나기는 사진매체를 언제나 아마추어의 유희정신과 예술적 자유의 구현 수단으로 접근한 반면, 폴크방 아우리가 (Folkwang und Auriga) 출판사에서 자료사진을 담당했던 랭거-파츠는 철저한 사진전문인으로서, 완벽하게 사진기술을 마스터한 장인으로서 사진매체를 대했다. 헝가리 출신의 아티스트는 종전의 어떠한 회화작업도 창출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이미지를 빛의 감광성과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계발하는데 주력하였지만, 랭거-파츠는 식물과 건축 자료사진, 공업제품 사진의 조형적 탐구에 전념했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현실의 복제수단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제약 없는 이미지 실험의 영역으로 여긴 반면, 랭거-파츠는 기록의 순수성에 의거하여 형태미의 탐색에 몰두했다.
  랭거-파츠는 1927년, 사진잡지 「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창간호에 실린 에세이 <목적 Ziele>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기록하는 리얼리즘과 형태와 물질에 대한 객관적 재현을 사진의 임무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회화적’ 사진과 단호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회화적’ 사진은 단지 인상주의의 화풍과 소재를 사진적 재현의 모델로 삼은  ‘회화주의(pictorialism)’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적, 역사적, 문학적 주제를 미술아카데미가 존중하는 형식적 규범을 본받아 행한 구스타브 레일랜더, 헨리 피치 로빈슨의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사진에 고유한 도구들을 가지고 회화와 유사한 효과를 구하려 하는 것은 사진만이 갖는 방법, 재료, 테크닉의 특성과 사진만이 갖는 진실성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좋은 사진의 비밀, 사진이 조형예술 작품에 견주어 소유할 수 있는 예술적 특성은 사진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진은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도구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이 물질의 신비로운 힘을 재생하는 가능성에 대해 너무나 과소 평가한다. 나무와 돌, 금속의 구조는 사진만의 독특함 속에서 조형예술의 여하한 방법으로도 행할 수 없는 완벽함으로 재현된다. 우리는 사진 덕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높이와 깊이감을 표현하며, 극도로 빠른 움직임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 권위로 자리잡았다. 
  오직 사진만이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을 적절하게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다. '회화적' 스타일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특성, 다시 말해 형태의 기계적 재현을 일종의 결함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이것이 사진이 다른 모든 표현수단을 능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형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는 기술적으로 성공한 사진원판은 우리의 시각적 경험을 마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에게 맡기고, 사진도구로는 사진적 특성 덕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사진을 만들도록 노력합시다. 예술에서 어떠한 것도 빌려옴 없이. 
  사진의 특성은, 랭거-파츠에 따르면, 사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대상이 자연의 산물이건, 산업생산물이건, 건축물이건 그것을 변형, 왜곡시킴 없이 묘사하는 것이다. 주관성, 상상력, 예술적 의도에 의해 현실의 대상을 변형하지 않고, 사진도구의 ‘기계적’ 재현을 전폭적으로 수용할 때 사진만의 특성은 구현된다. 이때 사물의 ‘신비로운’ 형태는 완벽하게 전사되고, 사진의 흑백 계조도는 재현대상의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낸다.”
  분명 랭거-파츠의 위의 진술은 예술사진의 ‘회화적’ 경향에서 탈피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사진예술의 전반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1920년대에 새로운 예술사진을 도모한 사진가들은 회화주의를 포함한 '회화적' 사진을 사진의 독자성, 자율성을 사장(死藏)하는 경향으로 받아들였고, 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모색하여 회화에의 종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사진가들은 회화와 구별되는 가장 ‘사진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실험했다. 미국의 사진가들이 행한 이러한 사진경향에는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명칭이 부여됐고, 독일의 사진가들이 추구한 사진의 특질에 대한 탐구에는 신객관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두 사진경향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 재현양상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지만, ‘회화적’ 사진과 확연히 구별되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일란성 쌍둥이다. 즉, 스트레이트 사진과 신객관주의는 섬세한 세부묘사, 빛과 음영의 계조도에 따른 섬세한 재현, 육안의 능력을 뛰어넘는 깊은 심도감을 사진적 재현의 특질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상정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차점을 가정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주제는 현실세계의 역동성과 조화로움에 대한 조형적 탐구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도시의 거리, 자연의 세계, 인공물, 건축물, 신체의 세부 등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다룬 사진의 소재는 광범위하고 다양했지만, 세계의 형상은 조화로우며, 세계 속의 인간은 숨을 잘 쉬도록 만들어졌다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폴 스트랜드, 스티글리츠, 이모겐 커닝햄, 앤젤 아담스 등 대부분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독특한 개성으로 대상들에 접근했지만, 자연과 인공물의 조화로움, 역동적인 삶과 조형적인 신체의 재현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는 법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의 땅으로 받아들였고, 번영을 구가하는 신생대국의 삶을 사는 낙관적 면모를 직접적이고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기계문명이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과 환경이 불협화음의 관계 속에 있는 사진적 재현은 스트레이트 사진 저 멀리에 있다.
  반면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을 대변하는 랭거-파츠의 사진은 거역할 수 없는 기계문명으로의 이전을 부정적으로 수긍한다. 자연이 삶의 환경에서 쇠퇴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술문명의 지배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은 휘트먼적 예찬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자연을 압도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러 다가오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산업생산물, 인공구조물의 역동성은 냉엄하고 위압적이다. 랭거-파츠가 클로즈-업한 식물과 동물의 세부의 반복 양상은 도래한 기계문명에 길들여지고 동화된 자연을 암시한다. 꽃잎과 뱀 비늘의 조형적이고 유기체적인 반복은 자연스런 조화, 조화로운 자연의 이미지라기보다는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된 질서에 종속된 양상을 띤다. 자연의 대상물은 극단적 클로즈-업을 통해 조각나고 고립되어져,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활력을 잃은 채 박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도 1차 세계대전 (1914-1918)이 보여준 기술문명의 파괴적 양상에 대한 충격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기술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세계에 대한  정신분열적 인식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된  독일의 정치적 혼란, 실업과 같은 경제란을 내면화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회화적’ 사진을 거부하고 사진의 특성을 구현하면서,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작가의 주관성, 상상력, 감성을 최대한 지우면서 사물 자체의 ‘객관적’ 인식,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랭거-파츠의 작업은 1928년 출판된다. 랭거-파츠는 어떤 수사적 요소가 없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책제목으로 ‘사물 (Die Dinge)’을 생각했지만, 출판사 측은 『세계는 아름답다 Die Welt Ist Schon』라는 아주 낭만적인 책 제목을 선택한다. 근접촬영과 심도 깊은 이미지를 가장 주된 특징으로 삼는 100장의 이미지로 된 이 사진집은 엄청난 성공을 경험하면서 사진가에게  전례 없는 명성을 가져다준다. 이에 따라 그의 사진 기법을 추종하는 사진가들이 생겨났고, 그의 작품집을 칭송하는 여러 논평과 아울러 예외적이지만 강력한 비난이 뒤따랐다.
  당시 유명한 사진 연간지 「다스 도이치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도 창간호의 편집을 맡았던 한스 빈디쉬(Hans Windisch)는 1928/1929년 합본호에서 인용한 랭거-파츠의 사진을 ‘자연의 다큐먼트’로 정의하면서 이 규정에 부합하는 사진들을 이렇게 높이 샀다. “이번 호가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나마 증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 그것은 자연의 다큐먼트에는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따라서 예술적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다큐먼트에서 우리는 사진 행위의 본질을 보다 더 천착할 수 있으며, 또 예술적 창조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수천의 사진에서보다는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한다.”
  사진의 본질론을 상정하며, 랭거-파츠로 대표되는 ‘자연의 다큐먼트’ - 필자는 신 객관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를 예술사진의 정수로 간주하는 한스 빈디쉬의 논법은 분명 증명해야 할 것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논증선취의 폐단을 드러내는 한 예지만, 어떠한 재현적 특질을 사진의 ‘정수’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다큐먼트'라는 용어는 정확하고 심도 깊은 사진적 재현, 대상을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의지를 이미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큐먼트’는 랭거-파츠 부류의 사진적 특성을 정확히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각적 자료를 요구하는 특정 학문의 부산물, 어떤 실용적 사용의 시각적 도구라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자연’이라는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실체의 수식어를 첨부했다. ‘자연’은 실용적 목적, 학문적 용도로 사진 ‘다큐먼트’를 주문하고 생산한 주체일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은 사진작가의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실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자연의 다큐먼트’는 다큐먼트를 재현하는 형태적 양상으로 실현된 ‘예술’ 사진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한스 빈디쉬가 말하는 ‘자연의 다큐먼트’는 ‘사진 행위의 본질’- 육안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명도, 세부 묘사 등 -을 구현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하는 사진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의 사진이 “예술적 창조에 접근”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모홀리-나기의 뉴 비전보다도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나는” 예술사진이다.
  사진집『세계는 아름답다』의 출간은 당시 독일 사진예술계를 여러 상반된 견해들을 표출하게 만든 계기였다. 한스 빈디쉬처럼 ‘자연의 다큐먼트’를 ‘사진 행위의 본질’로 여기는 사람은 랭거-파츠의 사진집을 바우하우스 (Bauhaus)를 무대로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의 유희적 실험을 즐겼던 모홀리-나기를 공격하는 최상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 대표주자는 에른스트 칼라이(Ernst Kallai)로 그는 모홀리 나기가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학교의 기관지 「바우하우스」의 편집을 뒤이어 맡은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모홀리-나기의 포토그램은 “광화학적 술수의 미학으로 유희적 책략과  완전히 우발적이고 눈을 현혹시키는 성공을 ‘실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반면 “랭거의 사진들에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관찰의 윤리학은 판화작품이나 옛 그림에 현존하는 정신적 태도만큼이나 진지하고 고상하다. 그의 사진의 조형적 통일성, 아름다움은 제재에 내재하는 비전의 통찰과 극도로 숙련된 작업기술에서 태어난다.” 한 마디 더 인용한다면, “랭거의 사진 창작태도에는 아주 깊은 인간애와 드높은 사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랭거-파츠의 사진을 ‘사진 행위의 정수’로 파악하는 논객들은 전통적인 미학을 그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빈디쉬가 말하는 ‘감수성’ 그리고 칼라이가 원용하는 ‘정신적 태도, 조형적 통일성, 숙련된 작업기술, 인간애, 사상’ 등은 르네상스 이후 19세기말까지 서구의 이상주의 미학의 기본 개념인 까닭이다. 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미학 개념에 의거하여 1920년대 독일을 풍미한 새로운 두 사진경향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홀리 나기가 행한 포토그램은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숙련된 기예가 필요 없는 값없는 유희 행위로 여겨진 반면, 랭거-파츠의 신객관주의는 상당히 이상주의적 미학관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세계는 아름답다』를 해설하는 글에서 주의를 끄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질적인 사물들의 상응, 상호유사성을 랭거-파츠의 사진들에서 찾아냈다는 점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물질, 형상들이 사진의 클로즈-업을 통해 보면 서로 닮아있고, 상호 관련성을 맺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이러한 이미지의 독법은 이미지의 역사에서 랭거-파츠의 사진집이 최초로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두 평론가의 글을 인용해 보겠는데, 첫 번째는 후고 지커(Hogo Sieker)가 <알버트 랭거-파츠의 사진에 대하여> 쓴 글이며, 두 번째는 쿠르트 투콜스키(Kurt Tucholsky)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다.
  난초의 꽃잎들을 부감 촬영한 사진은 거의 동물의 목구멍만큼이나 끔직한 형상을 띠며 어떠한 수줍음도 없이 추잡한 성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눈 위에 놓여진 마른 풀은 일본 목판화의 우아한 형태를 갖는다. (...) 스스로 나선형으로 감긴 새싹으로 미로에서는 선사시대의 괴물이 동굴에서 뛰쳐나오는 듯하다.
  어린 수목은 영양의 몸과 동물의 발바닥을 닮았다.
  이렇게 상호 이질적인 형상과 물질이 클로즈-업 사진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칼 블로스펠트, 에드워드 웨스톤, 이모겐 커닝햄 등 1920년대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가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탐구한 사진 항목이다. 블로스펠트는 속새풀에서 고대의 원주를 보았으며, 웨스톤은 피망에서 남성의 근육질을, 양파의 단면에서 여성의 성기를 발견했다. 커닝햄은 꽃들의 클로즈-업을 통해 꽃과 남성성기의 유사성을, 여성성기와의 상응을 찾아냈다.
  『세계는 아름답다』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행해졌다. 프리츠 쿠르(Fritz Kuhr)의 <세계는 아름답기만 한가?>는 그 전형적인 예다. 그의 비판을 인용해 보자. “초점거리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은 흐릿하거나 거짓이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은 랭거-파츠에게 하루 날을 잡아 빈대 집이나 노동자의 집, 그보다는 농부의 집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도 우리의 중앙형무소나 ‘현대식’ 감옥을 그가 사진을 찍으면 아주 괜찮을 듯싶다. 당신은 교도소에 대해, 보호감호소에 대해, 집 없는 노동자 합숙소에 대해, 빈민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수적으로 본인은 참호와 반혁명 장교들의 지휘본부의 바리케이트, 진압용 곤봉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결국 랭거-파츠 식의 세계의 아름다움은 흔히 ‘지적 매음’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고 세계에 대한 미학적 탐구에 전념하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1934년의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로 이어진다.
  『세계는 아름답다』 - 이것은 랭거-파츠의 유명한 사진선집의 제목이다 -  속에서 우리는 신객관주의 사진술이 그 정점에 달해 있음을 보게된다. 이를테면 신객관주의 사진은 비참한 생활까지도 완벽할 정도의 유행적 방식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진의 신객관주의를 대변하는 랭거-파츠의『세계는 아름답다』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그 예술적 평가, 그리고 사진의 정치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에 대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1920년대 말의  ‘화제작’이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 (사진역사학  박사)

알버트 랭거 - 파츠 Albert Renger-Patzch, <파구스 사의 인두>, 1927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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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뢴트겐 (Wilhelm Conrad R ontgen)은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1879년에 발명된 크루즈(Crookes) 음극선관을 실험하던 중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음극선관을 작동시킬 때, 형광물질이 칠해진 판 위에서 희미한 빛의 존재를 발견했고, 그의 손을 음극선관 앞에 세우자 판 위에는 그의 손뼈 마디들이 그림자 형태로 나타났다. 실험실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음극선관은 흑색 판지로 에워싸여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어떠한 가시광선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빛이 음극선관에서 나와 그의 손을 투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살은 투과하여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반면 뼈는 투과하지 못해 그림자를 투사한 것이었다.
  물체의 성질에 따라 투과의 정도가 다른 이 미지의 광선의 존재와 작용을 사진감광판에 기록하기 위해 뢴트겐은 우선 그의 연구실의 문을 찍었다. 문의 나무는 투명하게 나타났고, 금속 손잡이와 납연 페인트 자국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어서 그는 그의 아네 버타 (Bertha)의 반지 낀 손을 X 레이 사진으로 찍었다. 광선이 통과하지 못하는 손마디의 뼈와 반지는 사진감광판 위에 그림자로 자신을 기록했고, 광선이 통과하는 피부살은 투명하게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X 레이 사진은 그 발명이 공표되자 과학계와 의료계의 즉각적이고도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외계의 현실을 손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 정확히 기록한 다게레오타입의 경이로움이 평이한 일상적 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19세기의 끝에서, X 레이 사진은 다시 한번 사진의 마술적 경이로움을 촉발시켰다. X 레이 사진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닫힌 상자의 내부와 신체의 내부를 속속드리 꿰뚫어 보는 마법적 혜안을 구현한 것으로 국제적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광선이 꺼풀을 드리운 사물과 신체의 내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쾌거는 사진의 경이로운 위력을 세상에 다시 한번 알리는 것이었다.
   X 레이 사진의 국제적 수용은 신속했다. 프랑스의 경우, 신문 「르 마텡 Le Matin」과 「릴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은 1896년 1월 21일과 25일 양일에 거쳐 “새로운 빛”의 발견에 대한 보고서를 게재했다. 파리의 살페트리에 (Salpetri-ere) 병원의 사진부장인 알베르 롱드 (Albert Londe)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X 선에 대한 최초의 보고가 행해진지 3주만에, 그러니까 1896년 2월 10일, X 레이 사진 촬영요령에 대한 보고서를 꿩의 날개를 찍은 사진을 첨부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X 선의 의학적 사용과 연구를 위해 그의 사비를 들여 프랑스 최초로 살페트리에 병원의 사진부 부설로 X선 연구소를 설립했다. 곧이어 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그는 1898년, 「X선 촬영과 검사 개론, 그 기술과 의학적 적용 Trait -epratique de radiographie et de radioscopie. Techniques et applications medicales」을 출판했다.
   X 레이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의학사진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환자들의 관상학적 특징, 병리적 증세의 기록, 연속사진을 통한 신체동작의 생리학적 연구에만 소용되었던 의학사진은 이제 오히려 그것들보다도 X 레이 사진을 의학사진의 본령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육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이 보이지 않는 빛의 사진을 신체구조의 보다 정밀한 연구와 질병연구에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의학계는 사용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X 선의 충격과 그 여파는 의학과 물리학의 영역, 과학적 연구와 의학적 적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불투명한 물체의 속을 보여주는 이 ‘미지의 빛’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심령학, 영매학과 같은 의사(擬似)과학, 사이비과학의 기상천외한 연구를 북돋았다. X 레이와 더불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의 속을 찍게 되자, 심령학, 영매학에 실증가능한 증거물을 첨부하려는 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혼, 영기(靈氣)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피부와 살에 가려진 뼈와 장기를 X 레이로 손쉽게 보게 되자, 의사과학자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 영혼과 심령, 신비의 실체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사진적 기록은 일반 도상이 갖지 못하는 재현대상의 실재성을 증거하므로, 다시 말해 사진이 기록한 대상은 상상력이나 환상이 꾸며낸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로 존재함을, 존재했음을 실증하는 까닭에, 19세기 끝의 심령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심령의 세계, 신비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해설에 언제나 뒷걸음질치는 심령학, 신비학은 사진이라는 과학적 증거물을 학계에 제출하여 과학적 학문의 권리와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이폴리트 바라딕 (Hippolyte Baraduc)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살페트리에 병원의 수장, 샤르코(Charcot) 학파의 일원으로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병리학 연구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고, 부인과 의사였던  바라딕은 뢴트겐이 X 레이를 발견한 이듬해, 그러니까 1896년에 「인간 영혼의 움직임과 그 빛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유체의 도상학 L'ame humai-ne, ses mouvements, ses lumieres et l'iconogr-
aphie de l'invisible fluidique」을 출간했다. 물론 X 레이의 발견에 의거한 연구는 결코 아니었지만 -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연구는 뢴트겐의 발견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 보이지 않는 신체의 내부를 찍은 X 레이 발견에 힘입어, 그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신념을 굳건히 했음에 틀림없다. 뢴트겐의 쾌거 덕분에 널리 퍼진 과학계와 세간의 사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제것으로 삼아 그는 ‘인간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입증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이나, 신경질환을 앓는 여성, 종교인들의 영혼은 대단히 “민감하여 감광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어느 날 바라딕은 그의 아들을 사진찍었다. 아이는 그때 그의 작은 손에 방금 전에 죽은 꿩을 들고 있었다. 바라딕은 이 사진에서 어떤 미지의 빛이 바람에 휘날리는 돛의 모양으로 사진찍혀져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빛”이라 믿었고, 그는 이것을 발터 벤야민이 훗날 애호하게 될 신비주의적 미학개념과 동일한 용어인 아우라(aura)라 명명하였다. 아우라가 사진에 의해 처음으로 계시된 이 날 이후 바라딕은 아우라의 전모를 밝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진에 그 흔적을 남기는 형상에 의거하여 아우라를 분류하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의적인 어떤 작용, 신비한 영상, 후광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설명에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사진이라는 증거물을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치, 칸트, 뉴톤 등의 과학이론을 엉성하게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과학적 설득력을 부여하려 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어느 특정한 순간에 사진적 재현으로 볼 수 있는 “영혼의 빛”은 한마디로 사진 촬영의 오류, 현상과 인화의 그릇된 과정에서 비롯되었지만, 심령의 세계를 종교적 신념으로 믿는 자의 눈에는 그것은 “영혼의 움직임”, “삶의 베일”, “생명력”의 기록이었다. 한편으로 심령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과학주의에 홀린 자의 신념에 따르면, “오늘날 사진 원판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감춰진 힘을 잠시 보게 해준다. 그리하여 신비적인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통제에 놓이게 하며 그것을 실험 물리학의 영역인 자연계로 되돌아가게 한다.” 신비주의적 심령의 세계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성과 과학의 ‘통제’에 놓으려는 바라딕의 이러한 발언은 신비주의와 과학주의의 어설픈 결합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먹혀들었던 19세기 서구 학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진이라는 과학적 실증 수단과 당시 서구를 지배한 권위있는 과학용어와 개념을 어설프게 도입하면서 전근대적인 신비주의적 사고를 해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19세기 후반의 지적 풍토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사한 그러나 보다 더 신비주의와 관련된 또 다른 예가 있다. 그것은 이태리 북부 토리노 시의 과리니 (Guarini) 성당에 보존된 성해포(聖骸布)의 사진적 검증이다.
  토리노의 성해포는 십자가에 못 받혀 죽은 예수의 몸을 감싼 것으로 여겨지는 수의포로, 약간의 피 얼룩이 남아있는 커다란 사지포이다. 이것의 한쪽 면은 붉은 명주로 대어져 있고 은으로 된 성 유물함에 넣어져 과리니 성당의 돔형 지붕 아래에 있는 제단 속에 엄정히 보관되어 있다. 성당은 이 성 유물을 성당 밖에서 현시를 행하는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므로 순례자들은 보통 제단에 상감되어져 안에서 조명을 주는 실물크기의 네거티브 슬라이드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네거티브 상을 양화상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네거티브 상 그대로 전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화상의 경우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예수의 얼굴이 음화상태에서는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해포의 이 음화상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1898년 5월에 행해진 토리노 성당의 성해포의 공개는 수많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법조인이자 사진사인 세콘도 피아 (Secondo Pia)는 성해포의 사진 복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노출부족으로 적절한 사진원판을 얻지 못하던 그는 5월 28일과 29일 밤사이에 또 다시 네거티브를 현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 생겨남을 보았다. 예수의 얼굴이었다. 육안으로 성해포를 볼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예수의 얼굴이 사진의 네거티브 상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네거티브의 ‘계시’, 사진의 ‘현시’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몸 속을 뢴트겐의 X 레이 사진이 보여주었듯이, 그리고 일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바라딕은 사진으로 포착했다고 믿었듯이, 세콘도 피아는 피흘리며 죽어간 예수를 감쌌던 성해포에는 ‘하나님 아들’의 영이 배어있었고, 그 ‘영혼의 빛’이 보이지 않는 빛을 발하여 그가 찍은 네거티브에 예수의 얼굴이 감광되었다고 믿었다. 바라딕과 피아 모두는 인간의 영혼은 빛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해묵은 상상력을 빛에 감광반응을 보이는 사진적 재현을 통해 증명했다고 믿었다.
  토리노의 성해포의 ‘계시’는 지표 (index)의 기호학적 특성과 사진의 ‘현상’ 과정을 이중으로 담보하고 있었다. 우선 성해포에 흩어져 있는 얼룩 반점은 죽음으로 쓰러져간 예수의 흔적이다. 고통 속에 죽어간 ‘인간의 아들’의 육체가 사지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만든 비정형의 형상이다. 찰스 퍼스 (Charles Peirce)의 대상과 그 재현기호의 관계에 따른 분류를 인용한다면, 성해포의 얼룩들은 지표이다. 그것은 발자국이나, 지문처럼 물리적 접촉 (physical contact)에 의해 생겨난 기호이다. 지표는 발자국이나 지문 혹은 데드 마스크 (dead mask)처럼 재현대상과 유사성,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직접 접촉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지만, 성해포의 얼룩처럼 비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성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호의 한 범주로서의 지표, 인덱스는 재현 대상과 그 형상이 유사할 수도 혹은 상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재현대상과 형태의 유사성은 지표의 본질적 특성일 수 없다. 지표가 다른 기호범주들, 즉 상징 (symbol - 이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사회적 관습, 규약이 임의적으로 생산한 기호로 언술 언어는 그 대표적 예이다)과 도상 (icon - 이것은 재현대상과 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기호로 그림, 데셍, 지도 등이 대표적 예이다)과 구별되는 변별적 특성은 물리적 접촉이 그 생성의 기원에 있다는 점이다. 눈 위에 새겨진 토끼의 발자국은 토끼가 그곳을 지났다는 증표이며, 유리창에 지문이 새겨졌다면 누군가 그것을 만졌다는 증거이다. 데드 마스크는 죽은 자의 얼굴에 석고를 직접 접촉시키지 않고는 생성될 수 없는 지표이다. 성해포의 반점들은 피흘린 예수의 몸이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는 기호이다. 따라서 지표는 생성된 기호대상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때 거기에 재현대상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성해포의 반점은 ‘예수가 그때 이 수의포 위에서 피흘리며 죽었음’을 증거하는 지표이다. 그런데 사진적 재현 역시 기호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표이다. 재현대상과 완벽한 닮음, 유사성의 관계를 유지하는 인덱스이다. 사진에서 ‘물리적 접촉’에 관여하는 요소는 사물이 발산하는 반사광이다. 이 반사광을 통해 사진원판과 재현대상은 ‘물리적으로 접촉’한다. 반사광에 의한 ‘물리적 접촉’이 없다면 사진적 재현은 불가능하다. 지표로서의 사진은 재현대상이 감광판의 시계 속에 있었음을, 혹은 감광판에 직접 접촉했음을 증언한다.
  예수의 피흘리는 몸과 직접 접촉하여 생성된 성해포는 세곤도 피아의 ‘계시’와 더불어 일종의 잠상 (latent image)이 되었다. 성해포에 예수의 얼굴은 잠상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가 피아의 네거티브 현상액 속에서 현현한 셈이었다. 현상(現像)된 예수의 얼굴로 토리노의 성해포는 전대미문의 전시가치와 숭배가치를 동시에 획득했지만 사기라는 불경스런 비난도 끊임없이 뒤따랐다. 1931년 움베르토 (Umberto)왕의 결혼식을 계기로 이를 검증하는 일련의 사진촬영이 다시 행해졌고, 사진작업은 보다 정밀한 예수의 얼굴을 네거티브로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88년에 행해진 수의포의 연도 테스트는 그것이 중세에 만들어졌다고 판정했다. 현대과학은 성해포의 예수의 얼굴이 신의 현현을 보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영혼의 빛”을 보려는 바라딕의 심령주의적 시선의 욕망 곁에 피아의 종교적 신념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판정했던 것이다. 뢴트겐의 발견에서 가속화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신비주의적 욕망이 과학적 검증과 다시 한번 반목하는 판정이었다. ●
 
최봉림 (사진역사,  홍익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캡션:빌헬름 뢴트겐, <뢴트겐 부인의 손, X 레이 사진>,1895년 12월 22일, Deutsches Museum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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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문화를 위해 싸운 지성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1.28~2004.12.28)


“사진은 무엇인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경우에서만 충격을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름을 할 때 판돈이 자꾸 올라가는 것처럼, 충격을 담은 사진이 자꾸 퍼져 나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전율을 느끼지 않게 된다.”(1977년 수잔손탁 저서 ‘사진론’ 중)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2003년 수잔손탁 저서 ‘타인의 고통’ 중)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비평가인 수잔손탁(Susan Sontag)이 지난해 12월 28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30여년간 암과 싸워왔으며, 이 과정에서 질병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기술한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1978년)을 펴내기도 했다.
수잔손탁은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와 독일의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사진에 관한 비평서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사진론’(On Photography)과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펴낸 저자이다. 또한 소설가이자 수필가, 영화제작자, 무대연출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문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회 제반의 문제에 명료한 해석을 제시해왔다. ‘On Photography’는 한국에 ‘사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에 소개되고, 90년대에는 롤랑 바르트의 글과 함께 ‘사진론’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출간돼, 사진 철학의 담론서로 읽혀져 있다. 88년 미국 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하기도 한 그녀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 중이던 김남주, 이산하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월간사진은 수잔손탁의 죽음을 전한 외신을 인용해, 그의 생전 활동과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수잔손탁은 1933년 1월28일 뉴욕에서 태어나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이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와 69년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 등 두권의 비평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은 ‘사진론’(On Photography)과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미국에서’(In America)를 비롯해 4권의 평론집과 6권의 소설 그리고 수종의 에세이, 영화 시나리오, 희곡 등 수많은 화제작을 집필했다. 그녀의 책은 현재 전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작가들이 사회 문제에 제 목소리 내지 않을 때 수잔손탁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남길 원했다. 수잔손탁의 현실참여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1966년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백인은 인류에 암적인 존재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처럼 베트남전의 허구와 미국의 은폐된 역사를 고발했다. 또 911테러 이후에는 부시행정부를 비판하고 미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는 되지 말자’는 뉴요커지 기고를 통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강하다는 건 누구도 의심 않는다.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며 일방주의를 맹비난했다. 또한 그녀는 이같은 말도 덧붙였다. “문화와 문명, 자유세계에 대한 비열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동맹 관계에 대한 세계의 분명한 자기 방어이다.”, “(도덕적인 일반적 가치의)용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테러를 가한)그들은 학살자일진 몰라도 겁쟁이는 아니다.” -AP통신


 


세 번의 암을 이겨낸 후 수잔손탁은 93년 여름 전쟁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서 그녀는 전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앞서 베트남전쟁의 찬반양론이 날카롭게 맞서는 동안 그녀는 대담하게 하노이를 찾았고, 911 이후에는 테러범은 ‘겁쟁이는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같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을 받아왔다. 시카고대 데보라 넬슨 교수는 “나는 그녀가 가장 훌륭한 비평가로 기억되리라 확신한다”며 “그녀의 저서는 30년, 40년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깨우침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감각과 장르 묘사에 탁월한 힘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수잔손탁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똑같이 진지함과 통찰력을 갖고 연구했다. 넬슨교수는 “전문화 시대에 그녀는 최정점에 선 전문가였다. 그녀는 예술가, 비평가, 실천가, 정치적인 좌와 우 어디에도 속하길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녀는 떠났지만 인류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와 아방가르드예술을 보는 방법을 남겼다”고 전했다. -시카고 마룬


 


그녀의 가장 최근 저서인 ‘타인의 고통’은 전쟁과 재앙 이미지에 관한 장편 비평집으로 지난해 출판됐다. 또 지난해 쓰여진 단편 비평문인 ‘타인의 고문’은 아부그라비 수용소에 갇힌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에 관한 글이다. 수잔손탁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전후 비평주의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의의를 남겼다. 그녀는 예술연구에 감각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고, 내용 보다는 심미적인 형태를 옹호했고, 고급 저급 문화 사이의 경계를(대단히 파괴적으로) 흐물어 뜨렸다. 사려 깊고, 사색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그녀의 글쓰기는 들쑥날쑥한 경계와 필연적인 주제를 안고 있는 현대예술의 소외와 절망을 선험적으로 탐구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단토 교수는 “그녀는 우리 시대 인간 삶의 깊은 문제에 문학과 철학적인 지성으로 종사했다”며 “그녀는 냉정하거나 객관적인 비평가라기보다, 모두에게 의미를 갖는 이슈에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너무 엄숙한 지성인과 달리 수잔손탁은 직접적이고 시의적절한 그리고 도발적인 문장과 발언, 그리고 영상시대에 적합한 외모 등으로 대중적인 유명인이었다. -뉴욕타임즈


 


다섯 살에 부친이 중국에서 죽었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잔손탁은 2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녀는 연극과 영화를 연출했으며, 미국의 세계 침략을 맹렬히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병과 싸워야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자랐으며,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보는 것처럼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수잔손탁은 26세에 뉴욕으로 돌아와 60년대 문화비평 특히 도발적인 에세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96년까지 보스니아 내전이 극점에 달할 때 사라예보에 머물며 국제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1960년대에는 목소리 높여 베트남전쟁을 반대한 편에 섰으며, 미군의 폭격이 절정에 달하던 68년 5월 하노이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같은 해 쿠바를 방문해 쿠바의 인권문제에도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1950년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줄곧 혼자 지내왔으며, 작가로 알려진 아들 데이비드만이 유일한 혈육이다.
-AFP통신


(월간사진 2005년 2월호 게재)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이미지를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에 적용해본다면 이 주장은 그럴 듯하지 않다. 사진이 지닌 이중적 힘, 즉 기록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각예술 작품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서로 상충된다는 주장이 있다. 고통을 묘사해 놓은 사진이 아름다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은 원래 그대로의 피사체에 가야 할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매체 자체에 관심을 쏟게 만들어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진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이런 사진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한편으론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 얼마나 장엄한 장관인가’라고 외치는 것이다.(타인의 고통 중)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이 재현된 예술품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 격렬한 것이다. 이런 욕망 안에서 고통의 재현물은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못한다.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성질의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순간을 쪼개내어 그것을 정착시킴으로써 모든 사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사진은 허구화한 연재이며 부재의 증거이다.(사진론 중)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 중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 한때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의 유럽 수도들에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은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얇게 져며낸 조각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공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도와준다. 휴가 중이거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사진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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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테마 스투디움과 푼크툼
 
 거의 대부분의 사진에서 재현된 대상은 그것이 함축하거나 상징하는 의미 즉 문화적인 코드를 가질 수 있다. 가령 시골 초가집과 토담이 보이는 배경에 엉뚱하게도 현대식 양식으로 지은 주유소의 원색적인 건물을 병치시킨 사진이라든지 혹은 황량한 아스팔트 틈 사이로 돋아난 이름 모를 잡초를 보여주는 사진 등은 언제나 우리들의 문화적 코드에서 읽혀진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어느 시골 간이역에 짐 보따리와 지팡이를 쥐고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보여주는 흑백 사진,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 본 듯한 향수어린 시골 풍경사진, 웃지도 울지도 않는 평범한 아줌마의 어설프고 어색한 사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재현된 대상 뒤에서 다소 분명한 함축적 의미(신구 문명의 교차, 생명력, 소외된 계층 등)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을 보는 순간 응시자의 앎과 지식이라는 의식 속에서 즉각적으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누구나 공감하는 객관 타당한 의미 속에서 이해되는 문화적 코드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찍혀진 대상이나 상황 혹은 그 분위기가 문화적으로 약속된 의미 속에서 이해되는 개념적인 것을 총체적으로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하는데 그때 우리가 사진에서 느끼는 것은 거의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평범한 감정을 들추어낸다. 이 용어는 언어학적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뜻하는 내시(connotation)라는 말보다 더 포괄적인 용어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스투디움은 근본적으로 응시자의 주관적 관점이 아닌 외부로부터 길들여진 문화적 앎을 지칭하기 때문이다.1)

  그러나 사진에는 이러한 문화적인 코드와는 관계없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응시자의 주관적 시각에 의해 감지되는 푼크툼(punctum)이다. 이 용어는 스투디움에 대비되는 총체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위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80년 그의 책 “밝은 방”에서 명명한 지극히 개념적인 말이다. 스투디움 개념이 보여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 사이에서 언제나 일 대 일의 대응 관계의 분명한 객관적 의미를 가질 때, 푼크툼은 흔히 우리가 인식의 실체로 인정하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구체적인 현상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는 대상과 그 지시 대상 사이에서 언제나 일 대 다수의 불특정하고 불확실한 개념을 말하고 있다. 굳이 푼크툼을 정의하자면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찍혀진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의미(뜻)한다”라는 객관적 영역 밖에서 뭔가 분명히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의미의 과잉 혹은 결핍”을 말한다. 이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푼크툼은 의미를 갖지 않는 무(無)개념이 아닌 탈-의미 혹은 탈-코드(sans code),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화적 코드로부터 이탈한 다른 종류의 주관적 의미(가능태로서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도달치 못하는 영역 속에서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어떤 이상한 현상이나 대상 혹은 예견치 않았던 사실에 대한 의문을 말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논리로 볼 때 언제나 의식의 혼동과 무질서를 동반한다. 철학적으로 이러한 개념은 형상이탈(deconstruction)에 관계하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선구자들의 진보적 예술 행위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오늘날 흔히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표현 대상도 사실상 이성과 의미 그리고 문화적인 앎으로부터 이탈된 형이상학적 대상인 것이다.2)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사진에 있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경우이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좋은 사진의 대상은 언제나 푼크툼의 재현만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논제에 대한 분명한 해명은 사실상 모호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푼크툼은 의미적인 관점(인식론 혹은 형상론)에서 볼 때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개념 다시 말해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푼크툼의 개념은 어떤 특정한 형상을 갖지 않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존재론적 관점에서만 이해되는 개념이다. 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위해 우선 역사적으로 사진에 대한 관점의 변화, 즉 인식론적 규명에서 존재론3)적 시각으로의 의미적인 변화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을 보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4) 우선 사진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닮음 혹은 복사로 보는 견해 즉 현실의 거울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진을 보는 것은 단순히 현실의 객관적 유사성에 국한되어  결국 사진은 근본적으로 현실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당시 사진에 관한 많은 담론들은 단순히 사진의 모방력에 관계하고 있다 : 사진적 재현을 부정적 측면으로 이해한 보들레르(C. Baudelaire)는 기계적으로 완벽한 사진적 모방은 예술가의 천재성과 탁월한 재능과 절대적으로 대립되며 사진을 언제까지나 예술의 종으로 간주했다. 그와 같이 몇몇 픽토리얼리즘에 관계되는 철학적 담론을 제외하고는 19세기 사진에 대한 대부분의 사진적 견해는 예술로서의 표현적 사진이 아닌 단순한 현실의 복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사진을 더 이상 단순한 현실의 모사로만 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진을 현실의 모사(mimesie)가 아닌 그 이면에 숨겨진 “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을 보는 관점이고, 또 한편으로는 사진을 언어가 아닌 단순한 사진 고유의 현상 즉 “현실의 자국”으로 보는 경우5)이다. “모든 사진 영상은 현실의 변형적 번역 즉 문화적이고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코드로 분석된다”라고 언급하듯이 사진을 현실의 변형으로 볼 때 사진적 행위를 상징적 문화적 그리고 이념적인 “코드화(codificaion)”에 둘 수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있다 : 외재적 코드화와 내재적 코드화. 사진을 외적으로 코드화 된 장치로 보는 관점은 오랫동안 언어학적인 분석 방법을 우선적으로 하는 구조주의(structuralisme)에 관계하는데 사진의 분석에서 언제나 관객에게 언어나 코드와 같이 일종의 암호풀이와 같은 분석(이미지-상징 혹은 이미지-코드)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 특히 “기호-구조주의자”들에 의해 이론화된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찍혀진 대상이 이미 작가와 관객이 암암리에 약속된 공통된 의미 혹은 코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보여진 그 대상으로부터 분석적 이해와 번역적 해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한 의미론적 관점과 논리적인 체계에서 이해되는 전형적인 사진의 이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문화적 인류학적 혹은 과학적인 참조에 의해 객관 타당한 의미 속에서 잡혀진 사진을 “외적인 코드화”로 볼 수 있는데 많은 보도사진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은 반드시 번역을 위한 어떠한 비평이 필요하며 언제나 사진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진술된 텍스트를 대하듯이 우리의 앎과 지식(스투디움)을 중심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때 재현된 이미지와 코드와의 언어학적 연결은 결국 비평의 기능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한 상징이나 코드를 초월하여 어떤 경험적인 사실이 아닌 감각적인 측면에서 존재론적 “내부적 진실”을 폭로하는 사진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진들은 언제나 객관적 의미와 익숙된 문화적 코드를 초월하여 단지 사인들(signes)로만 출현한다. 이때 사진을 “내적으로 코드화 된 장치” 혹은 코드 그 자체를 넘어 “내재화된 존재의 사진적 출현(음영 ombres)”이라고 한다. 이러한 출현은 대부분의 경우 사진기의 객관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비밀스런 본질(essence)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외적 현실(코드와 의미)을 초월한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비평은 최근 수 십 년간 가장 중요한 사진의 관점이며, 또한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탈-언어(코드)적인 관점으로 1970년대 후반 많은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변화를 가지고 온 존재론적인 시각(후기 구조주의)이기도 하다 : 대표적으로 영상사진과 조형사진(포스트모더니즘).

  그러나 여기서 재현되는 내재적인 형상 혹은 초월적인 코드를 비록 그 대상이 우리의 앎과 인식을 초월한 의미의 이탈(음영계)이라고 할지라도 그 대상을 일반적으로 푼크툼(punctum)이라고 하지 않고 탈-의미 혹은 시니피앵스(signifiance)라고 한다. 왜냐면 푼크툼은 작가와 사진의 관계에서가 아닌 장면과 그 장면을 응시하는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 엄밀히 말해 관객의 의식이 사진에 투영되어 자아의 정신적 반응을 일으키는 지극히 주관적인 사진적 현상(아우라의 정의)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푼크툼의 용어는 사진을 문화적 코드로 보는 관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현실의 자국” 즉 사진을 사진적인 것 혹은 인덱스로 보는 관점(사진을 보는 세 번 째 관점)에서 언급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존재론적 개념은 사실상 개념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의미의 영역을 벗어난 내재적 형상 혹은 작가가 감지한 은밀한 감각의 음색과 같은 문맥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작가와 재현된 사진의 함축적 관계에서가 아닌 기계적 생산물인 있는 그대로의 사진적 사실주의의 절대적인 외시와 관객과의 지극히 주관적 관계에서 이해된다.6) 그래서 푼크툼의 출현(말하자면)은 작가의 예술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극히 평범한 광고 사진의 한 귀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리고 아주 낯선 장면 혹은 수수께끼 같은 익명의 대상이나 상황 등에서도 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상들의 공통점은 사진적 형태로 나타나는 “이상함”, “특이한 것”, “부분적인 것” 그리고 “불확실한 것”이다. 이때 감각의 주체는 응시자이고 언제나 장면으로부터 응시자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음색을 갖게 한다. 그것은 사진이 내포하는 함축적인 의미(스투디움)가 아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상식 밖의 무엇이다. 이것이 장면을 떠나 응시자의 감각을 관통하는 화살(pointe)과 같은 감정의 동요자 즉 푼크툼이다.7) 그때 출현하는 음색(impression)의 이미지는 이성의 가장자리에서 부유(浮游)하는 달무리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바르트는 일인칭 서술 형식으로 기록한 그의 책 “밝은 방”에서 바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감각의 설명을 의미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이상하고 특이한 대상들(구두끈, 썩은 이빨, 베레모, 긴 손톱, 큰 구두 등)에 빌리고 있고, 또한 그는 푼크툼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스투디움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문화적인 기능에서 충분히 친숙한 의미의 확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논리적인 감각은 사실상 이미 1930년대 발터 벤야민이 발견한 “아우라(aura)”의 누설과 그후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이 언급한 사진의 존재론적인 특성(자동 생성) 그리고 바르트의 제 3의 의미 즉 옵튜스(obtus)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이는 곧 영상 이미지에 은닉된 탈-코드에 대한 최종적인 진술임과 동시에 사진-인덱스론(photo-index)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
 
<주>
1) 바르트는 우리가 사진에 관심을 갖거나 그 사진들을 정치적인 증거물로 보거나 역사적인 좋은 증거물로 그것들을 음미하는 것은 바로 스투디움에 의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형상들과 제스처들 그리고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은 문화적<이러한 내시(connotation)는 스투디움 안에서 출현된다>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과거에 보지 못한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공동체 사회에서 그 현상의 원인과 결과가 비교적 분명하게 논리적으로 밝혀진 현상이나 대상 역시 스투디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2)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개념은 형상론(인식론)자들이 70년대 말부터 수용된 후기 구조주의의 이론(생성 존재론)을 배경으로 일종의 탈-의미 혹은 아직 의미의 옷을 입지 않는 모습(figure) 즉 시물라크르에 의미의 옷을 입힌 예술적 표현에 관계하고 있다.

3) 여기서 존재론은 모든 대상을 형상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형상적 존재론이 아니라 생성-진화 혹은 생성-변전(devenir-forme)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의 한 단계로서 이해하는 생성 존재론을 말한다. 예술적 실행에 있어 전통적 모더니즘의 논리적 시행에서 탈-의미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행위로의 이동은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에 의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4) 참조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um, Paris, 1990.

5) 대략 후기 구조주의의 출발 시기로 간주되는 1970년대 말부터 이론화되는 생성 존재론적 관점으로 사진을 단지 빛의 낙인 혹은 징후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으로 이해한다.

6) 왜냐하면 사진적 사실주의는 본원적으로 재현된 대상에 절대적인 신빙성(앙드레 바쟁의 자동 생성)을 주기 때문이다.

7) “뾰족한 도구에 의한 이러한 상처, 이러한 찌름, 이러한 표시를 지칭하기 위한 단어는 라틴어에 존재한다 : 이러한 단어는 단어가 또한 구두점의 개념(idea)으로 보내지고 내가 말하는 사진들이 사실상 이러한 예민한 점들로부터 점이 찍히고 가끔씩 얼룩이 지는 것보다 훨씬 나에게 와 닿는다 : 정확히 말해 이러한 상처들과 표시들은 점들이다. 그래서 스투디움을 교란시키는 이러한 두 번 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면 푼크툼, 그것 역시 찔린 자국, 작은 구멍, 작은 자국, 베인 작은 상처 그리고 또한 즉각적인 한방이다. 사진의 푼크툼, 그것은 그 자체에서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죽이고 나의 심금을 울리는) 우연이다.”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Gallimard, pp. 48-49.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Minigang, Amsterdam Avenue, New York,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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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테마 사진과 아우라 현상
 
 
 
 
사진 용어에는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용어는 사진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론(음의 세계)적 용어이다. 이때 용어의 개념은 앎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의 신비에 가까운 감정의 음색(tonalite)으로 의미의 영역밖에 존재(플라톤 동굴의 어둠)하는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응시자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느날 오래된 사진첩을 뒤지다가 발견한 돌아가신 어머님의 사진을 보았을 때 웃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이라든지, 시골 대청 마루 위에 걸려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유령같이 모여 있는 어느 가족, 연도가 1951년이라고 적힌 낡은 사진에서 웃고 있는 익명의 군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 가로등만 훤히 켜진 아무도 없는 대도시의 야경 사진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오싹한 공포감, 혹은 지하철 광고 사진에 흐리게 잡힌 어느 소녀의 옆모습이 주는 어떤 아쉬운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러한 감정들은 모두 보여진 대상으로부터 “나” 즉 “경험적인 연상”과 관계한다. 특히 찍혀진 인물의 운명(과거 속의 미래)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이러한 사진적 현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틴어 어원을 갖는 아우라는 그 사전적 정의를 참조해 보면 종교적 후광, 무리(halo) 등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감싸는 정신적인 분위기로, 사진의 어떤 객관적 의미보다는 주관적인 가치를, 또한 물질적이라기보다 신비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한다. 이는 또한 “미적이고 의미적인 방식에서 절단된 낡은 타원이 가끔씩 쬐는 수증기 같은 원에 비유하고 또 그것은 일종의 가벼운 원(기체)이다. 그 속에서 훈영(후광)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마치 토스칸과 옴브리(이탈리아)의 옛 거장들이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수행하고 있는 성인들 얼굴 주위에 그려 넣는 금관과 같은 것이다.”1)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라를 상기할 때 우선 모델의 “성스러운 것” 혹은 “이미지의 유일성”과 연관시켜 흔히 이미지 그 자체에서 또 다른 의미나 구체적인 사실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초상은 아우라의 마지막 피난소이고 그 아우라가 인간의 얼굴 위에 최후의 불똥을 던진다”라고 1930년대 당시 재생 이미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하여 탈 신성화와 세속화(아우라의 상실)를 주장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아우라는 일종의 사진 이미지 그 자체에 실질적으로 이미 함축되어 있는(전혀 응시자와 관계없이) “신성한 이미지” 혹은 그러한 실체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객관적 논리만을 수용하는 양의 세계(모더니즘)에서 볼 때 “아우라”는 흔히 복제된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작품의 개성이나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칭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단지 지나치게 구조화된 기호-논리에 의한 비유적인 수사학에 불과하다. 아우라는 결코 실체론적 대상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현상이 언어의 역사와 사진 물리학 혹은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설명된다 하여도 사실상 아우라의 정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단지 의미의 과잉을 말하는 푼크툼의 비논리적 영역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은 대량 복제로 인하여 이미지 그 자체에서 분실된 “오리진”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미 함축되고 의미화된 대상에 대한 응시자의 무반응 혹은 무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아우라의 현상을 다소 비현실적인 형태로 사진이 은닉한 또 다른 고유한 이미지로 생각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오랫동안 우리가 의미적인 분석에 너무 익숙해 왔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사진에서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진의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응시자의 주관적 기억 연상에 관계할 뿐이다. 역으로 창작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아우라의 음색(대표적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된 사진 이미지(사진적인 것)는 다시 한번 더 언급하지만 대상에 이미 본원적으로 내포된 장면의 재현(미술의 경우)이 아니라 사실상 작가도 모르는 전혀 불확실한 감각적인 재현(사진의 징후)일 뿐이다.
 
왜냐면 사진기는 번역적인 도구가 아닌 내면으로 향한 일종의 더듬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작가가 감지한 아우라를 흔히 자신만이 감지하는, 극히 주관적인 감각적인 “느낌(sens)” 또는 “기분(humeur)”3), 쉽게 말해 “직감(intuition)”이라 할 수 있다.

  아우라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을 해보면 철학적으로 실체론과 존재론의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론들은 인식(陽  pist mologie)과 비인식(ontologie / 음영 蔭映 ombres) 혹은 실체와 존재의 철학적인 대립 속에서 서로 공존하여 왔다. 실체론적으로 본 아우라는 보다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아우라는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대상이 흐리고 불확실한 실체 혹은 그러한 효과가 만들어 내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근본적으로 사진의 흐린 효과(레미니센스의 은유)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 라틴어에서 아우라는 그 첫 의미로 가벼운 입김, 안개, 바람 그리고 공기와 대기까지 지칭한다. 또한 생리학적 용어로 어떤 신체, 어떤 실체의 방출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만질 수 없는 유동 즉 입김은 신체와 실체에 의해 생산된다. 사진에서 아우라의 물리적 실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효과에 빚지고 한다.

  한편으로 아우라는 사진의 부드러운 중간 톤을 말하는 메조-틴토(mezzo-tinto)로부터 야기된다. 원래 이것은 연속판인 동판(부식)에서 색조의 “연속(continuit )”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의 절대적인 연속적 색의 변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중간 색조는 시각적으로 아주 부드러운 효과(거의 환상적)를 준다. 이러한 효과는 전통적 그림의 대기 원근 효과, 즉 “스푸마토(sfumato)”처럼 그림의 중요한 “환기적 효과”와 동일시되었는데, 한때 19세기의 많은 사진들(특히 초상사진들)에 있어 이러한 심리적인 효과(비현실적인 초상)를 위해 메조-틴토를 의도적으로 선호했다. 게다가 제작 과정의 긴 노출시간과 기술적 문제로 당시에는 이것을 하나의 효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딱 한 장만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다게레오타입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중간 톤은 모델을 유령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재현하였다.5)
 
그때 그 극단적인 부드러움 속에서 언제나 인물을 감싸는 무엇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아우라로 보았다. 사실상 1930년대 벤야민의 텍스트에 예로서 언급된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동판 위에서의 메조-틴토처럼 극도로 부드러운 흐린 안개 효과에 관계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아우라는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사진에 직접 출현한다. 아우라 현상은 사진적인 실험에서 정확히 물리적 현상으로 실재하는데 그것은 무리(halo)이다. 무리(달, 해의 무리와 같은)는 예를 들어 창에 의해 아주 강하게 비친 실내를 촬영할 때 또 카메라를 창으로 향하게 하여 촬영할 때 특별히 생기는 빛의 방사로 나타난다 : 그때 인화 작업에서 창가들은 마치 빛에 의해 먹혀진 것과 같이 흐려지고 불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일종의 후광(aureole)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된다. 물론 근본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오랫동안 유리판으로 작업한 19세기 많은 사진가들이 애착을 가진 것은 밀착 인화에서 유리판의 부드러운 입자(연속적인 중간 톤)로 인하여 사진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현실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극도로 선명한 입자(pique)도 아니고 더욱이 칼로타입에서 종이의 거친 입자가 주는 흐린 효과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광학적으로 빛이 표면의 감광층을 지나 유리판을 통과할 때 유리판의 두께로 인하여 생기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인화에서 시각적으로 가벼운 무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표적으로 으젠 앗제의 많은 유리판 사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벤야민의 존재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진 그 자체에서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기입하는 사인처럼 자신의 독창적인 사진적 효과로 간주되었다. 특히 논리와 의미를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아우라는 어떤 작품의 존재적인 유일성을 보장해 주는 필요조건 즉 독창성(authenticite)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모더니즘은 그처럼 아우라의 실체론적 개념에 의미적인 옷을 입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우라는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 즉 빛의 굴절이나 경계면의 흐린 효과 혹은 빛 바랜 세피아 색으로부터 야기되는 물리-심리적 효과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20세기에 들어 와서 렌즈와 음화의 급속한 질적 향상은 사실상 아우라에 대한 관심을 실체론적인 분석(인식론)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 정신 현상으로 이동시켰다. 왜냐하면 아우라 현상은 단지 흐린 효과에서만 유발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선명한 사진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유동적이고 주관적이고 또한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처럼 대상과 응시자의 쌍방적인 정신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처음으로 초월적인 사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무리(halo) 혹은 그림에서 성인의 후광으로 이미 알려진 “아우라”라는 용어를 차용한 발터 벤야민은 사실상 아우라 현상을 앞서 언급한 실체론적 방법으로 밝히지 않는다 : 벤야민은 힐과 아담슨, 으젠 앗제, 오귀스트 잔더 등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사진을 사진 그 자체에서 발하는 비현실적 출현을 직접 기술하고 있다.
 
 그는 사진에 출현하는 현재적인 이미지와 그 출현 속에 지나간 과거의 여운(reste) 혹은 향수(nostalgie)가 발한다고 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과거 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예리한 감정,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이것은 그림이나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고 유일하게 사진에서만 출현하는데 응시자의 내부에서 은밀하고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리를 만든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6) 벤야민은 모든 것이 괴상하고 모조적으로 나타나는 카프카(Franz Kafka)의 젊은 사진(옛날 사진들)에서 또한 뉴 해븐(New Haven) 항구의 어부들을 보여주는 힐과 아담슨(Hill and Adamson)의 사진에서 아우라의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아주 정확한 사진기술은 손으로 그려진 어떠한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어떤 마술적인 것을 누설하고 있다.
 
사진사의 노련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색한 모델의 포즈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슬그머니 사진과 유사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 스스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튀는 일종의 불똥을 찾게 된다. (...)”7) 여기서 말하는 불똥은 어떤 이상함, 회고적인 시각, 멜랑꼴리 등과 같은 응시자의 경험과 체험에 관련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음색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 그 자체에서 응시자로 전염된 존재론적인 출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라에 대한 벤자민의 존재론적 발견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사진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의 실체론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그후 이러한 존재론적인 재발견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자동 생성(La genese automatique)”을 거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참조주의까지 무려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아우라는 신비적이고 회고적이고 또한 역사적인 문맥으로 축소되면서 더 이상 실체론적인 의문을 달지 않을 확실한 어떤 사진적 공리가 된다 : 푼크툼. ●
 
1) Alain Buisine, Eugene Atget ou la melancolie en photographie, Edition Jacqueline Chambon, Paris, 1994, p. 118.

2) 아우라는 원래 사진의 대상과 응시자의 관계에서 주관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용어의 진화에 따라 모든 예술작품에 함축된 “오리진” 혹은 “독창성”과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실체론적 관점에서 아우라는 대상을 흐리게 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회고적인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일종의 환기적 효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3) 이러한 용어들는 “나”라는 이성의 범주 즉 주관적 관념론(칸트)의 범위를 벗어나 거의 신비론과 유신론에 가까운 번역 불가능한 존재론적 용어들이다. 유사한 용어로는 강렬한 인상, 도취, 황홀, 절정, 기질, 음색, 멜랑콜리 (독/stimmung, gemut, 불/tonalite , impression, temperament ...)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추적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창작의 원동력이다. 참조. Alain Bonfand, Paul Klee, L'oeil en trop, Edition de la diff erence, Paris, 1988. 그때 아우라는 사진적 매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이론적 용어(1930년대)이다.

4)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이다. 결코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은 기억”이다(Philippe Dubois)라는 명제에서 흐린 사진을 기억의 쇠약 혹은 망각으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우리들의 “논리적 기억(la m emoire logique)” 때문이다. 참고, 앙리 베르그송의 “무시간적 기억 회상”(La matiere et la memoire).

5) 유령과 같은 이러한 초상은 손으로 직접 그려진 사실주의 초상화(예로 현대미술에서 게랄트 리히터의 “48명의 유명 초상”)를 상기시킨다.
  
6) 사진이 그림과 달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발견으로 약 15년 후 앙드레 바쟁이 언급하는 “자동생성(일종의 무의식적 연상)”과 같은 문맥을 가진다.

7) W. Benjamin, “La petit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Poesie et revolution, Danoel, paris, 1971.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으젠 앗제, 브로카 길 41번지,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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