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는 그 자신은 상상의 것으로 들어나면서 우리로 하여금 디즈니랜드 바깥의 것들이

실재인것으로 믿도록한다 하지만 실상 로스엔젤레스나 그밖의 마국땅 어디든 이제는 더이상

실재가 아니라 일련의 초실재 혹은 모조품이 되어있다 이제 실재에대한 그릇된 재현이

문제가 아니라 실재가 더이상 실재가 아니게 된것을 감추는것이 문제가 된것이다

                                                  

                                                                                -장 보드리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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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

 

 

어떤 양식으로 어떤 의도에 의해 작업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물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는 지평을

옮기는것 역시 이런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하는 한 방법일수 있을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세상을 끝없는 거울로 이루어진 방으로

신디셔먼의 그것처럼 우리가 아는 모든것들이 이미지인 그런곳으로 받아들인다

진짜의 경험이 있다고 믿을수있는, 개별 예술가의 신성한 시각이 있다고,

천재와 독창성이 있다고,믿을수있는 근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것은 지상의 모든사상은

다 소모되었고 현재의 우리는 줄의 끝에 서있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이미 본것의 포로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불안케하고 혼란하게하며

급진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는데 이미지에 대한 무차별의 생산자라 할수있는

사진이야말로  이런 현상에 큰 부분을 기여했다는 사실 역시 쉽게 알수있다

 

                                             -앤디 그룬버그 [사진과모더니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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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뮤지엄 거닐며



미술작품 확대와 검색, 스마트폰 어플까지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실제 미술관을 걷는 효과를, 17기가 픽셀의 초고해상도 이미지는 확대하면 붓터치까지 보이는 정교함을 선사하는 구글아트프로젝트(www.googleartproject.com)가 화제다. IT기술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온라인 뮤지엄이 곳곳에서 시도되는 중이다. 구글아트프로젝트에 앞서 국내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는 지난해 4월부터 네이버 미술작품정보(http://arts.search.naver.com) 서비스를 시작했다.


 

방대한 양과 검색 ‘네이버’ vs 기가픽셀의 초고해상도 ‘구글’


 

네이버 미술작품정보는 고해상 이미지로 10만여점의 해외 명화와 미술작품 그리고 4천여점의 국내 미술작품을 검색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작가, 작품, 미술관, 사조, 테마별로 검색이 가능하며 검색된 작품은 확대 이미지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설과 연관 정보도 제공된다. 프랑스국립미술관연합에서 사용권을 확보한 10만여점의 해외 미술작품 중에는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2만여점이 포함됐다. 국내 미술작품은 작가 개인에게 사용권을 허락받거나 전시별로 주최사를 통해 확보한 이미지를 업데이트해 계속 양을 늘려 가는 중이다. 사진작품으로는 배병우, 이명호, 정연두의 작품 일부와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된 고 전몽각의 ‘윤미네집’, 오노데라 유키의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네이버의 이지숙 대리는 “서양 명화의 비중이 높지만 점차 국내 근현대 미술작품으로 확대할 예정이며, 작품 해설에서 미술 흐름을 알 수 있는 텍스트까지 제공 폭을 넓힐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미술관에 안 가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미술작품을 익숙하게 검색하고 접하게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네이버 미술작품정보가 10만점이 넘는 방대한 양과 검색 기능이 장점이라면 구글아트프로젝트는 초고해상도의 비주얼이 장점이다. 네이버가 2~3천 픽셀의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비해 구글은 무려 17기가 픽셀의 이미지로 미술작품을 보여준다. 이 정도 해상도는 미술작품 복원전문가들이 보는 정도의 정밀한 이미지이면서 평균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의 1,000배에 달하는 디테일을 뜻한다. 이처럼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위해 구글은 전문 카메라와 컴퓨터 시스템 그리고 움직이는 유닛을 동원해 한 작품당 수천장의 개별 이미지를 촬영한 후 하나로 이어붙였다. 구글아트프로젝트에서 제공되는 미술작품은 전세계 17개 주요 미술관의 486명 작가의 1천여점이다. 17개 미술관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컬렉션에서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지 주요 미술관을 망라하며 385개의 전시룸을 실제로 돌아다니듯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360도 뷰가 가능한 구글의 스트리트 뷰 기술이 접목되었다.    







구글아트프로젝트 화면과 확대한 이미지(위)와 네이버 미술작품정보 화면(아래)




 

실제 관람동기 유발로도 연결, 작가 프로모션의 한 방법


 

온라인 뮤지엄은 이보다 앞서 기존 미술관에서부터 시도되었다. 홈페이지에서 유물이나 소장품을 입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며 실제 미술관의 관람 동기를 유발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가상일본미술관(http://web-japan.org/museum), 스미스소니언 라틴센터(http://latino.si.edu/education), 아랍에미리트역사가상박물관(www.uaeinteract.com/history/e_muse), 하버드미술관 온라인 전시(www.harvard.edu/museums) 등이 해외의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는 서울지역 17곳 미술관의 소장품을 3D 입체영상기술로 감상할 수 있는 웹사이트 ‘아트서울-뮤지엄닷컴’(artseoul-museum.com)이 개설돼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한국사립미술관협회(회장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가 기존과는 다른 개념의 온라인 뮤지엄을 준비 중이다. 올해 3기 임원진을 맞는 협회는 비주얼 기술과 작가 프로모션을 결합한 버추얼 미술관을 이르면 4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제2의 백남준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시작될 버추얼 미술관은 협회 산하 사립미술관이 추천한 작가 중 선정된 작가의 가상 전시관을 각 미술관 웹사이트에 개설해 국영문 아카이브와 평론 등을 지원하고, 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관계자들이 찾도록 홍보할 예정이다. 이를 위한 문광부 예산도 확보해놓은 상태로 올해에만 30여개를 오픈하고 내년과 내후년에는 각각 50개, 70개로 늘려갈 계획이다. 이명옥 협회 회장은 “다른 문화예술 장르에 비해 미술계에서 글로벌 아티스트가 못 나오는 이유는 작가 인큐베이팅 시스템의 문제와 작업은 좋지만 홍보력이 부족한 작가를 발굴하는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며 “IT 기술과 온라인의 이점을 활용해 국내의 우수한 작가를 관리 홍보하는 체계적인 플랫폼으로 버추얼 미술관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내비쳤다. 이밖에 협회는 스마트폰에서 전국의 사립미술관의 주요 정보를 지역별, 전시별로 제공하는 ‘미술관 찾기’(가제) 어플리케이션을 개발 중이다. 또 도슨트 설명 없이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글이나 음성으로 해설을 들을 수 있는 QR 코드도 더 많은 미술관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이제 손 안에서 미술작품과 미술정보를 감상하고 접하는 시대가 되었다. 굳이 비싼 돈을 들여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명화를 감상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교육의 통로도 넓어졌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온라인 미술 서비스에 관해 사비나미술관의 강재현 전시팀장은 “시각문화의 향유층을 넓히고 실제 작품을 보려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온라인 뮤지엄은 유익하며 더욱 확산되리라 본다”며 “관객의 요구를 반영한 흥미 유발 장치나 현장의 현대미술을 온라인으로 구현하는데 대한 한계 등이 극복할 점”이라고 말했다.<월간사진 201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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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1908- )은 섬유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그는 예리한 비평과 강의로 유명한 앙드레 로트 (1885-1962)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줄곧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가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31년, 사진을 데생의 편리한 대체물로 여기면서였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라이카(Leica)를 사용한지 3일만에 그는 사진에 대한 구성감각을 깨우쳤다. 오만처럼 들리는 이 자랑은 그러나 큰 허세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전문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a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 지금도 여러 책에 수록된 1932년도에 생산된 사진들은 분명히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중년사내가 <셍-라자르 역 뒤에서> 포스터의 무희와 흡사한 동작으로 물이 고인 거리를 뛰어가는 사진은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찍은 ‘명작’이다.
그는 이후 신문사와 화보잡지사의 의뢰에 응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찍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진과 영화를 담당하는 육군하사로 근무하다가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두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세 번째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인생의 유위전변은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의 큐레이터, 뷰먼트 뉴홀의 오해를 부르게 된다. 뉴홀은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독일군의 포로였던 카르티에-브레쏭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의 ‘유작(遺作)’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의 주선으로 뷰먼트 뉴홀을 접촉하게 된 카르티에-브레쏭은 「하퍼스 바자 Harp-
er's Bazaar」가 의뢰한 작업을 행할 겸 뉴욕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1947년, 300점의 작품을 전시할 개인전을 준비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는 뷰먼트 뉴홀과 친분을 쌓았고, 뉴홀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작업 방식을 숙지하게 되었다. 뉴홀이 「Popular Photography」의 194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 당시 카르티에-브레쏭은 밝기 f.1.5의 콘탁스(Contax) 렌즈를 라이카 카메라에 장착해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싱글 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는 달리,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뷰 파인더 윈도우를 통해 피사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식 라이카는, 촬영 순간에 완벽한 사진을 기획하는 카르티에-브레쏭의 작업방식에 정확히 부합했다. 그야말로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에게,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에 어둠의 공백을 만드는 리플렉스 카메라는 적합하지 않았다.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결정적 순간’은 피사체의 표정, 작가의 의도, 주변상황이 사진 프레임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사진작가의 전 능력이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는 촬영 이후의 암실작업을 작가의 의도, 감성이 개입될 수 없는 상황, 피사체의 조건을 수정, 보완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찰, 감정이입, 상황판단은 ‘결정적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끝난다고 그는 단정했다.
이러한 그의 사진에 대한 견해는 그의 사진 스타일을 결정했다. ‘결정적 순간’을 도모하는 촬영의 순간을 신성화하는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생성되는 네거티브 이미지에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가 보기에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는 네거티브 이미지에서 무엇인가를 빼고 보탠다는 것은 ‘결정적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행위다. 따라서 네거티브 이미지를 절단하면서 재구성하는 트리밍(trimming)은 그의 사진 원칙에서 배제된다. 네거티브 이미지는 가감 없이 인화되어야 한다. 카르티에 - 브레쏭에 대한 뉴홀의 말의 들어보자.
“현대미술관에서 곧 있을 개인전 사진들의 거의 대부분은 네거티브 이미지 전체를 인화한 것이다. 인화 구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영역은 프레임의 맨 끝 가장자리까지이다.”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에 작가의 관점, 구성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렴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관찰할 수 없는 우발적 상황, 작가의 시야를 벗어나는 우연성은 피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의 눈으로 발견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본 현실의 포착이다. 간단히 말해, 사진의 주체는 작가이지, 결코 카메라가 아니다. 뉴홀의 카르티에-브레쏭에 대한 해설을 또 다시 인용하면, “그는 카메라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이 찾아낸 것을 기록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직접적인 플래시 광을 싫어한다. 피사체에 보조조명을 써야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그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백열 텅스텐 광을 선호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그의 구성에 들어오지 않는 우연은,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실패는 아닐지라도, ‘결정적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일종의 실수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카르티에-브레쏭은 194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미국의 스냅 사진작가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위지(Weegee)가 되었건, 리젯 모델 (Lisette Model)이 되었건, 더 나아가 윌리암 클라인(William Klein)이 되었건,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되었건 미국의 거리사진 작가들은 작가의 미학적 감성과 의지에 종속된 장면보다는, 카메라가 우발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현실의 양상을 애호했다. 촬영 당시 작가가 보지 못했던 세부양상, 혹은 노출의 과부족, 흔들림 현상에 의해 작가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이 폭로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그들은 절제된 구성, 기하학적 구도가 완성되는 최상의 시점을 포기하고, 사진의 우연성, 사진의 자동생성에 기대어 작업을 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카메라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영화 카메라처럼, “의식적인 인간행동 대신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을 포착하고 (...) 우리에게 무의식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열어 보인다. 마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충동의 경험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반면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현실의 무질서를 정리하고, 우발적 상황을 통제하고, 그것들에 미학적 의미작용을 부여하는 방책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조형감각, 예리한 세부관찰을 덧없이 변화하는 현실만큼 빠르게 수용하는 도구였다. 순간의 우연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우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그 예를 위에서 인용한 사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 사진을 특징짓는 것은 짝을 이룬 대칭구조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사진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은 쌍을 이루며 나타난다. 맨 위의 석조 난간은 대칭을 이루면서 반복되며, 그 아래 여인상주(女人像柱) 역시 쌍둥이처럼 서있다. 처마 밑 문짝도 색깔은 다르지만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도 동일한 걸음걸이, 엇비슷한 얼굴 그리고 복장을 반복하면서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왼쪽 가장자리의 대문은 열려진 부분과 다시 대칭을 이룬다.
사실 아테네의 한 오래된 건물이 간직하고 있는 대칭구조는 카르티에-브레쏭이 모색하는 ‘결정적 순간’일 수 없다. 아테네의 한 거리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는 용모가 흡사한 두 여인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칭을 이룬 가게문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거의 정면의 위치에서 사진작가가 포착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 순간’은 태어난다. 사진의 대상과 작가의 시선이 우연처럼 만나는 이 완벽한 순간에, 이 허름한 거리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대해, 삶에 대해 언술 언어로 명확히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의미들을 발설한다.
회칠이 벗겨지고 코니스(cornice)가 심하게 깨어진 건물은 과거의 영광과 부귀가 유적의 자취로만 남은 아테네를 의미한다. ‘영원한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문명은 여인상주가 머리에 이고 있는 코니스가 보여주듯이, 머지않아 허물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노쇠의 징후를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이 반복한다. 그녀들의 무거운 몸과 활력을 잃은 걸음걸이, 상복처럼 어두운 복장은 노쇠한 그리스를 또다시 표상한다.
이 사진의 의미작용은 그리스의 과거와 현실의 표상작용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아울러 보여준다.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는 여인상주는 시간의 파괴작용에 쇠진하여 저 늙은 여인들의 무거운 몸으로 추락한 듯 보인다. 영원 불변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그리스 문명이 세월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몰락했듯이, 결코 시들지 않을 듯한 젊음을 간직한 여인상주 역시 시간과 함께 퇴색한 것이다. 따라서 이 거리사진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한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연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에게서 이처럼  의미론적 혹은 형태론적 유사성 혹은 대립을 발견해내는 양상은 분명 카르티에-브레쏭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하는 사진은 카르티에-브레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헝가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 esz)는 카르티에-브레쏭에 앞서서 일상 현실의 순간들을 탁월한 조형감각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혹은 그에 뒤이어, 로베르 두와노(Robert Doisneau), 이지스(Izis), 빌리 로니스(Willy Ronis), 에두아르 부바 (Edouard Boubat)와 같은 유럽의 작가들은 일상의 거리에서 삶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컬한 삶의 순간들을 절묘한 사진감각으로 채집했다. 그런데 거리의 삶, 서민들의 일상에 시선을 집중하는 양상은 사진만의 경향이 결코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의 전반적인 유럽 문화는 거대하고 장중한 서사적 주제에서 벗어나, 비천하고 일상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웅대하고 영웅적인 소재를 멀리하고, 평범한 인간집단 속에 내재된 실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계의 한 양상이었다. 네오 리얼리스트 계열의 영화들, 진부한 현실을 일상의 언어로 정제한 작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의 시학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들과 더불어 일상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유럽 문화의 한 경향을 대변했다.
카르티에 - 브레쏭이 관심을 가진 것은 비근한 일상의 현실뿐이 아니었다. 그는 1947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Georges Rodger)와 더불어 각각 400불씩을 공동 출자하여 조합의 성격을 띤 사진통신사 매그넘(Magnum)을 창설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서사적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49년을 전후하여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패퇴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현장을 거의 1년에 걸쳐 취재했고, 1950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냉전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1954년에는 서방 최초로 소련에 입국한 사진가가 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의 융성과 사진의 예술적 지위 향상으로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군에 포함된 카르티에-브레쏭은 1970년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게 된다. <프랑스에서>라는 타이틀의 이 전시회는 1976년까지 프랑스 전국은 물론이고, 미국, 소련, 유고슬라비아, 호주, 일본 등을 순회하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사진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군에 기입된 그는 1974년 이후 돌연 사진작업을 그만 두고 데생에 전념한다. 그의 예술적 신비를 더하는 알 수 없는 결단이지만, 이런 저런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그의 “사진의 비밀은 바로 집중하는 데 있다”라고 공언한 것에 비추어, 나이와 함께 찾아온 ‘집중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빠른 순간에 확보하는 최상의 시점이 필수적이고 보면, 육체의 노쇠는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데생에 대한 그의 강박 관념적 애착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데생화가로서 존경받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한 터였다. 화가의 꿈을 접고 사진으로 전향한 청년 카르티에-브레쏭의 콤플렉스가 세기의 사진작가로 공인 받은 뒤에도 계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사진이 발명되자 19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많은 실패한 화가들이 사진을 그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고자 전향을 시도했었다.
여담으로 글을 맺기로 하자.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이 작년에 열린 한국 최초의 사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에 낙찰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진을 수집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그의 사진을 구입하기 전에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의 필름은 모두 파기했고, 종전 후에 찍은 필름은 모두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전에 찍은 사진의 프린트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진은 그가 또 다시 필름을 파기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인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의 경매가는 당연히 전자가 아마도 몇 배는, 심지어는 수십 배는 더 높을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쏭, <아테네, 그리스>, 1953, 작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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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feller)를 위시한 대부호 3명의 자금출연으로 1929년에 문을 열었다. 초대관장은 독일의 전위적 예술운동과 형식주의 미학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 1902-81)였고, 그는 1943년까지 관장직을 맡으면서 “현대미술의 연구를 고무, 발전시키며, 현대미술을 산업과 실제생활에 적용시키며, 대중교육을 행하는” 예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뉴욕 현대미술관은 사진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기획을 했다. 그 첫 번째는 1937년에 기획된 사진 발명의 공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1940년 11월, 미술관 사상 세계 최초로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설립한 것이었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전시회, ‘사진 1839-1937’을 기획한 사람은 뷰먼트 뉴홀 (Beaumont Newhall)이었다. 뉴홀의 사진과 관련된 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폴 삭스(Paul J. Sachs)의 지도하에 1931년 미술사 석사를 취득한다. 삭스 교수는 또한 알프레드 바의 스승이었으며, 금융 대부호, 골드만 삭스(Goldm -an Sachs)의 아들로 미술관 운영에 개인과 기업의 후원제도의 도입과 이를 위한 기부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또한 관객들을 일종의 고객으로 상정하는 경영 시스템을 적극 교육한 미술사학자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뉴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잠시 일한 후, 다시 하바드로 돌아와 폴 삭스를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에 등록한다. 1926년 이후 사진작업과 사진역사에 입문한 그는 박사과정 중 당시로는 대단히 생경한 미술사의 대상인 사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 결과 1932년과 1935년 사이에 그는 사진 발명의 경위와 19세기의 미술과 사진과의 관계를 다룬 한 편의 에세이와 사진에 관한 세 편의 서평, 그리고 한 편의 전시회 리뷰를 쓰게 된다. 뉴홀은 경제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35년 스승이 상임이사로 있고, 알프레드 바가 관장으로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서로 취직한다. 그리하여 그는 1936년에 알프레드 바가 기획한 전시회, ‘큐비즘과 추상예술 (Cubism and Abstract Art)’의 전시도록에 들어갈 444권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조사, 작성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1927년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웰레슬리(Wellesley) 대학의 교수 시절부터 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근, 현대 미술사 교과과정을 개정하면서 사진과목을 포함시켰고, 1927년과 1928년의 유럽 여행 당시에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긴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를 방문했고, 쾰른에서 열린 국제 보도사진전, ‘프레사(Pressa)’를 참관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 관장직을 수락하면서 작성한 ‘취지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그는 이미 ‘사진부’의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바는 1936년 뉴홀에게 1937년에 있을 초대형 사진 전시회의 기획을 제안한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이 전시회는 ‘큐비즘과 추상예술’, ‘환상미술, 다다와 초현실주의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1936) 그리고 1938년에 있을 전시회,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28)’와 더불어 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획전이었다.
1839년에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에서 1937년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포괄하는 전시회, ‘사진 1839-1937’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29년 독일의 스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영화와 사진(Film und Foto)’이라는 전시회였다. 독일, 프랑스, 미국, 소련의 사진들을 망라한 이 국제사진전은 무엇보다도 사진만의 고유한 재현 특성에 전념한다고 여겨지는 사진, 다시 말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섬세한 디테일과 심도를 구현하는 사진이나 혹은 빛에 반응하는 사진의 특성에 의거하여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계발하는 사진, 그리고 순간포착을 활용하여 사진만의 고유한 시각을 발굴하는 사진들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다. 또한 이 전시회는 이른바 '예술사진'만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사진이 적용되고 활용되는 다양한 분야들을 망라하여, 사진이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재현매체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전시회의 기획 전반을 주도한 인물은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였고, 소련 사진의 경우는 엘 리시츠키, 프랑스의 작가선정은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가 주도했다. 미국 사진가의 선정은 스트레이트 사진의 기수, 에드워드 웨스톤과, 예술사진에서 광고와 초상사진까지 섭렵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담당했다.
‘영화와 사진’ 전시회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기획전에 미친 여파는 무엇보다도 뉴홀로 하여금 사진의 본질, 사진의 특질을 고려하면서 전시사진을 선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관의 사서는 ‘영화와 사진’ 전시회처럼 모더니즘 미학에 충실한 사진들을 전시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뉴홀은 스투트가르트의 사진전이 그랬듯이 전시사진을 ‘예술사진’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영화와 사진’처럼  천문학 사진, 엑스레이 사진, 광고사진, 보도사진들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사진 1839-1937’은 ‘영화와 사진’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사진전의 전시디자인을 돈독히 참조했다. 전시디자인을 담당한 스위스인 헤르베르트 마터 (Herbert Matter)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장 입구를 ‘영화와 사진’의 포스터 사진과 유사하게 사진가를 의외의 각도에서 대각선 구도로 포착한 대형사진으로 장식했다. 스투트가르트의 ‘영화와 사진’ 그리고 뉴욕의 ‘사진 1839-1937’의 직접적 연관성은 전자를 기획한 모홀리-나기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후자를 위한 명예 자문위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7년에 기획한 전시회가 사진의 역사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이 때 뉴홀이 집필한 전시도록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게 될 「사진의 역사, 1839년에서 현재까지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1949, 1964, 1982)의 초벌 원고가 되는 까닭이다. 전시도록은 90 페이지의 분량이었고, 시대 순서에 따라 90점의 사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작가, 제목, 프로세스를 명기하는 것이었다. 시대구분은 초기사진 (1839-1851), 근대사진(1851-1914), 현대사진 (1914- )으로 구분되는 바, 1851년은 콜로디온타입이 사진계에 도입된 해이며,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이다. 그러니까 뉴홀의 시대구분은 한편으로 사진기술공정의 중요한 변화를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상황의 격변을 고려했다. 사진역사의 시대구분을 사진의 기술적 여건의 변모에 연동시키는 전자의 경우는 뉴홀 이전의 ‘사진의 역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시대구분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인, 요셉 에더 (Josef Maria Eder,1855-1944)가 1905년에 저술한 「사진의 역사 Geschichte der Photographie」이다. 이것은 1932년, 2권의 책으로 개정 증보되고, 뉴홀이 기획하는 전시회 1년 전인 1936년에 영어로 번역된다. 이 영어본은 1945년, 1976년 재판을 거듭한다.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 젤라틴 브로마이드로 이어지는 기술공정에 의한 사진의 역사는 여전히 시효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불어로 된 사진기술 진화의 역사는 조르쥬 포토니에 (Georges Potonni) 가 1925년에 쓴 「사진 발명의 역사 Histoire de la deouverte de la photographie」이며, 이것은 1935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사를 시대구분의 좌표로 삼는 일반 미술사의 한 경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의 전시회와 전시회 카탈로그가 드러낸 폐단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적 감정이 전시 작가의 선정 뿐 아니라 도록에 실리는 작가의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 사진전의 기획방식과 전시디자인에 큰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진가는 단지 15명만이 전시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독일 모더니즘 사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의 대표작가, 알버트 렝거-파츠와 아우구스트 잔더가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반면 미국인은 84명이 전시되고 52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영국인은 27명이 전시에 선정되고 17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프랑스인은 87명이 전시되고 27명이 도록에 수록된다. 전시작가와 작품과의 접촉의 편의성, 작품대여의 가능성,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국가에 따른 ‘편파적’ 선정의 불가피한 이유로 고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주의적 편파성은 그리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1949년에 출간되는「사진의 역사」초판의 인덱스에 나타난 독일인은 13명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사진기술의 진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사진 1839-1937’은 뉴욕 전시회가 끝난 후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진의 개괄적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보전된 사진대가들의 예술적 면모를 알렸다. 그리고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초대 관장이 1929년의 취지서에서 예고했듯이, 세계 최초로 ‘사진부’를 설립하여 사진을 현대 예술의 한 분과로 공식 승인했다. 복제예술의 수집과 전시를 담당했던 미술관의 ‘판화부(Print Department)’에서 분리된 사진은 이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예술매체로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사진부의 위원장은 프린스턴 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맥알핀(David McAlpin)이었다. 대학생시절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집했고, 1936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한 사진 갤러리, ‘미국인의 광장(An American Place)’에서 안젤 아담스(Ansel Adams)의 사진 8점을 구입했던 그는 독립적인 큐레이팅 기관으로서의 사진부의 목표와 전략을 총괄했다. 그리고 사진부의 초대 큐레이터는 당연히 ‘사진 1839-1937’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해낸 뷰먼트 뉴홀이었다. 부위원장은 f.64 그룹의 대표작가, 안젤 아담스(Ansel Adams)였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청교도적 발전 양상인 f.64 그룹의 대표자가 ‘사진부’의 위원장과 큐레이터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부위원장의 직책을 수행한 것은 결코 정실(情實)에 따른 임명이 아니었다. 사진이 미국의 현대 미술에 있어서 독자성, 자율성을 인정받는데 있어서 f. 64 그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전후로 미국사진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 혹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유럽 사진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한다. 사진의 특수성, 자율성을 구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소묘예술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1920년대 들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권위 있는 공공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의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특질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f. 64 그룹과 더불어 미국의 사진은 18세기 후반 서구 사회가 확립한 모더니즘 미학이 요구하는 예술의 두 조건, 즉 세속적 유용성과 경제적 이해추구의 산물이 아닌 고상한 정신성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그리고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자신의 특질을 구현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전자, 즉 정신성의 구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예술’, ‘예술 사진’을 위한 청교도적 엄격함을 계승함으로써 이루어지며, 후자, 즉 사진의 자율성은 사진 매체에만 적용되고, 오직 사진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사진 결과의 예시(previsualization) 규범인 동시에 완벽한 촬영과 완벽한 프린트를 허용하는 존 시스템이라는 사진적 재현체계를 통해 획득된다. 사진예술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의 완벽주의는 사진가-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사회에 인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존 시스템은 데생과 구도, 구성이라는 회화적 규범에 사진기예의 습득을 의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진적 규범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f.64 그룹과 더불어 모더니즘 미학의 두 요구조건을 만족시킨 미국의 예술사진은 모더니즘 미학을 수호하는 제도적 장치인 한 대형 미술관에 의해 현대 미술의 한 분야로서 공식 인정받으며, 그 대표자를 분과의 핵심 일원으로 자리잡게 했던 것이다.  
 1942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양시키고자,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기획 하에 ‘승리로 가는 길(Road to Victory)’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다. 센세이셔널한 전시디자인과 강력한 승전 메시지로 범사회적 호응을 얻어낸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45년 또 다시 애국주의적 사진전, ‘태평양에서의 힘(Power in the Pacific)’을 기획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사진의 사회적 호소력, 사진의 공공적 활용에 눈을 돌린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사진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관객동원을 하면서 여론의 주목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회화주의 사진가에서 상업사진가로 변신하여 커다란 부를 누린 스타이켄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으로 임명된다. 사진예술을 위한 규범적 기예, 존 시스템을 개발한 안젤 아담스와 사진의 역사에 정통한 뷰먼트 뉴홀은 이에 반발하여 현대미술관을 떠난다.  
1948년 뉴홀은 사진의 제국주의적 기업인 코닥사가 설립한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 사진 박물관(Inter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의 초대관장으로 자리 잡으며, 그 이듬해 「사진의 역사」의 초판본을 출간한다. 3천 부의 초판본이 완전히 팔리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1964년에 나오는 「사진의 역사」의 개정판 3천 부는 출판 몇 개월만에 매진된다. 이후 뉴홀의 저서는 재판의 재판을 거듭하여 어떠한 「사진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적 인기를 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사진역사가 곧 세계 사진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그러나 분명하게 진술하는 뉴홀의 「사진의 역사」가 세계의 사진가, 작가지망생, 사진에 문외한인 미술사가들에게 사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뷰먼트 뉴홀의 초상>,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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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표현의 계보

 

도 시

 

 도시의 경관을 찍었던 사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찍었던 사진의 두가지 흐름

 

 에드워드 스타이켄, The Flatiron, 1906

 


  1987년 초여름, 시카고의 사진가들이 술렁거린 일이 있었다. 수집가이자 조직책인 잭 제페가 발기인이 되어 시카고 미술관, 자연박물관, 역사자료관, 공립도서관, 현대사진미술관 등 사진관계기관이 협찬하여 변해가는 시카고를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기획서와 작품의 포트폴리오 제출에 모인 작가는 170명, 그중에서 대표적인 40대를 중심으로 33명의 사진가가 선출되었고 1년 정도의 제작기간이 걸렸다.

  데이빗 트라비스, 케네스 백허드, 데니스 미러 클라크 등의 큐레이터와 <세계사진사>의 필자인 로젠블럼 부부가 초대되어 편집된 것이 <변모하는 시카고 Changing Chicago>라는 사진집이고, 1989년에 앞에서 언급한 다섯 군데의 장소에서 사진전이 동시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도시를 촬영하는 이런 다큐멘터리는 옛날부터 많았다.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시의 경관을 찍은 것이다.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곳이 새로운 시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했던 샤를 마르필의 시도는 으젠느 앗제에 의해 절정에 도달했다. 19세기 말부터 대략 30년정도 파리를 배회하며 촬영했던 앗제의 파리는 기록이라고 하는 행위를 철저히 함으로써, 기록이라는 그 목적 자체를 초월해 버렸던 사진이다.

  앗제의 사진에 찍힌 것은 옛 파리의 외관 뿐만이 아니라, 그곳이 사진 아우라(Aura)이다. 앗제의 사진은 배우에 뜻을 두었지만 좌절했던 그의 ‘극장’이었고, 막이 오르기 전의 정적과 무대라고 하는 제단(祭壇)에서 펼쳐진 신화의 여운이 감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사진을 ‘신화’의 영역에까지 올려놓았다.

  ‘상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자발적 융합이며, 예술작품을 창조한다고 하는 의식작용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위치의 시적 차원과 초현실에의 도달’을 지향하는 초현실주의자가 앗제의 작품에 심취하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으젠느 앗제

 

앗제의 시선을 이어받아 도시의 경관을 찍은 사진가들

  앗제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작가를 손꼽으려면 한이 없다. 그러나 굳이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역시 앗제를 발견해 낸 장본인인 베르니스 애보트일 것이다. 만 레이의 조수를 하고 있던 에보트는 앗제의 작품을 세계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변모하는 뉴욕>으로 이름지은 뉴욕의 도시풍경을 찍은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을 답습하였다. 변해가는 뉴욕의 외관을 통해서 도시의 고동을 강하게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베르니스 애보트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가들

  앞에서 말했듯이 도시를 촬영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사진가들은 우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주목하고 그곳에서의 사진의 역할을 생각했다. 사진을 사회개량의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뉴욕의 빈민가의 상황을 호소했던 제이콥 A.리스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미성년 노동자나 이민상황을 찍은 루이스 W.하인의 사진은 사회의 시스템마저 변화시킬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다.

  19세기의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미지를 가정에까지 끌어들인 것은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나 책에서 사진의 홍수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현대에서 보면 감상주의(Sentimentalism)나 낭만주의(Romanticism)로 보여질 수 있는 이런 사진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이러한 접근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기관이나 포토리그(Photo League)*②등의 많은 사진가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질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능가한 것은 역시 FSA 프로젝트*③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회적 이상이 존재하고, ‘현실의 거울’로서의 사진의 기능을 역시 믿게 만들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상징되었던 사회적 모순의 표출시대를 체험했던 사진가는 자신의 카메라의 정의를 우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사체로서 선택된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도시 속의 복잡하게 얽혀진 미로와 같은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상 의식하면서 다가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60년대 사진가들은 19세기의 사회를 개선코자 한 사진가들과 주제를 같이 하면서도, 정의를 내세워 자신의 사진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오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뉴욕의 동부 할렘에 있는 히스패닉 거주지의 사람들이나 지하철의 승객을 촬영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도, 중서부의 모터 사이클족이나 텍사스의 수형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대니 라이언(Danny Lyon)도 깊이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냉철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 그 작품에서는 억지로 강조된 듯한 가치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도시의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찍었다는 점에서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하나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변모하는 시카고>의 사진집을 보고 놀란 것은 인간관계에 관심을 둔 사진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사체와 자신과의 거리와 관계를 항상 생각하면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눈을 향하고 있다. 도시라고 하는 곳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도, 모순도, 문제도, 환희도 그리고 그것을 나타낸 사진의 시각적 뒤섞임도, 좋든 나브든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안되는 절실함과 바로 정면에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을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이 오래된 것만으로 단번에 옛것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속단이다.

 

 대니 라이언                                                          브루스 데이비슨

 


*②1936년부터 1951년에 걸쳐서 뉴욕에서 활동을 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집단으로 당대의 가장 정치적인 참여 집단이었다. 사진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세계에 대한 참된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이 사진연맹의 창설 목적이었듯이 그들은 외부 세계를 심오하고 냉정하게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응용하였다. 비록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출발하였지만 - 사진연맹의 원래 명칭은 ‘영화와 사진연맹’(Film and Photo League)으로, 1930년에 좌익성을 띤 국제노동자구원협의회의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 1936년에 영화제작자들과 결별하면서 사진연맹으로 개칭하였다. - 뛰어난 많은 사진가들의 작업과 작품집을 통해서 사회적 다큐멘터리(Social Documentary)의 접근방법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아론 시스킨드를 중심으로 할렘을 탐색하는 집단적인 계획을 세워 실업과 빈곤에 처한 도시 노동자들을 낭만적이리만치 동정적인 시각으로 촬영하였다.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루이스 W.하인, 시드 그로스만, 솔 립손, 헬렌 레빗, 아론 시스킨드 등을 들 수 있다.

*③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농업안정국)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사회전체의 복지를 목표로 시행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공황에 처한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局)의 명칭.

대공황 속에서 날씨의 불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농민들 중에서 중소의 자영농민은 소유지를 매각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5년 이들을 강제적으로 정부 소유의 농장으로 이주시킬 목적으로, 농업안정국의 전신인 재이주 행정국(Resetlement Administration)이 창설되었고, 설립책임자로서 콜롬비아대학의 경제학자인 터그웰(Rexford Guy Tugwell)이 선임되었다. 터그웰은 설립 당시의 보수적인 의회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즉, 농민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일반사회에 알릴 필요성에 따라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사람으로서 콜롬비아 대학의 동료교수인 스트라이커(Roy Stryker)를 초빙하였다. 스트라이커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적절한 수단인 사진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자료부문의 스텝으로서 우수한 사진가들을 모집하였고, 이들 사진을 민중을 설득하는데 사용하였다.


김남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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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91
 
있는 그대로의 인물들을 찍은 사진 ...과장되지 않은 장면...그러난 무표정의 연출...
거대한 크기의 이 증명사진은 오히려 연출된 인물사진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묘한 감탄사를
자아낸다는 이유로 토마스 루프를 유명하게 했고 현재 엄청난 금액에 판매되고 있단다.
어제 미술관 가는 길에서 알게된 이 사진작가는
기존의 통념을 뛰어넘는 재기발한 연출과 촬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세계적인 사진작가란다. 
처음엔 몇몇 작품들을 보고 좀...황당하던데...
신기하지 큐레이터의 설명을 덧붙이니 그게...말이야...
다...달라보이더란 말이지...
암튼 무엇이든 일반적이지 않은 시각과 접근이 돈을 부르는 시대다...
이 사람의 작품은 보통 1억이 넘는 고가란다...
몇몇작품들은 정작 자신이 직은 것도 아닌 차용을 통한 재정비임에도...
하긴 꾸미는 것도 재주고...
그게 오늘날의 예술계를 거듭나게 한다니까...
결국...현대 미술은 누가 잘 조작하고 이미지화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말이지...
마르셀 뒤샹이나...데미언 허스트같은 이들처럼...
뒤샹이 처음 변기를 두고 [샘물]이라 명명하며 전시회에 작품이랍시고 내놓았을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황당해했나...
그런데 결국 그것이 [다다이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를 형성하면서
새시대를 열었지...
알 수 없는 세상이야...아니지...너무 뻔...한 세상인가?
 

= 토마스 루프 =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46)는 현재 세계 사진시장을 이끌고 있는 주역 중의 한 사람.

기록사진이 아닌 아이디어 사진이 특징이다.

전시에 맞춰 최근 방한한 작가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 포착할 뿐이라는 전제 아래

끊임없이 매체의 한계를 실험했다”며 “사진은 직접적 해석이 아니라 이미지의 이미지,

조작된 2차적 현실”이라고 말했다.

 

 

1958년 독일 젤 암 하메바흐(Zell am Harmersbach) 태생인 토마스 루프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번(Bernd) 와 힐라 베커(Hilla Becher)의 지도하에 수학한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다. 뒤셀도르프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루프는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고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접근을 해왔다. 루프는 '사진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할 뿐' 이라는 전제 하에 끊임 없이 매체의 한계를 시험하여 이제껏 16시리즈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루프는 사진은 현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완벽한 사진을 알아볼 수 있지만 동시에 완벽한 사진은 없다는 것이다. 사진은 우리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해석이 아닌 이미지의 이미지, 즉 조작된 2차적 현실로서, 루프의 미학적 연구를 통해 열리는 다층적 현실을 보여준다. 사진이 사회정치나 미술사 등 특정 현안에 대해 직접적인 논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도 연작 작업, 특히 누드나 인물사진과 같은 작업은 본질적으로 동시대인의 문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요번 아라리오 에서 전시될 작품들은 루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전체 16시리즈 중 9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루프가 이제까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장르의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큰 이유는 그가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기록사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입각한 다양한 실험정신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독일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의 ‘누드’ 연작 중 하나. 인터넷 누드 화면을 디지털 방식으로

합성한 사진들은 ‘사진은 조작된 현실’이라는

작가의 철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사진제공 아라리오갤러리

 

Porträts (초상사진)1981-
영상적 구도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에 입각해 인물사진 장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현대식 표현방식을 모색한 결과 상반신 촬영에 인물의 얼굴을 전면에 배치하는, 그 어떠한 심리적 분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사진은 단지 사물의 표면만을 포착한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각각의 인물을 석고상처럼 촬영하려는 것이었다. 미소나 웃음, 또는 카메라를 '유혹'하는 등의 감정표현은 일체 배제하기로 했다. 대상 인물은 자신 주위의 사람들 중 직관적으로 선택하였는데 그 결과 동료, 친구, 아카데미의 급우들, 뒤셀도르프 라팅게르 슈트라세의 유흥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이 촬영에 임하게 됐다.

 

06h 04m/-70° 1992 260 x 188 chromogenic color print

 

Sterne (별)1989-1992 제작
학창시절부터 루프는 사진과 천문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므로 검은 바탕에 하얀 점이 흩뿌려진 기본적인 구도의 추상화를 고려하는데 있어 하늘을 모티프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 장비로는 전문적인 천체사진을 결코 제작할 수 없음을 깨달은 루프는 유럽남부관측소(ESO) 자료실에서 구한 음화 원본 1212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반구의 밤하늘을 포착한 이 과학사진들은 칠레 안데스 산맥 인근에서 슈미트 천체망원경으로 촬영한 것이다.

Zeitungsfotos (신문 사진)1990-1991 제작
신문사진을 레프로 카메라로 칼라 재현 (negative 4 x 5 inch)
1981년에서 1991년 사이 토마스 루프는 독어 일간지 및 주간지에서 2500장 이상의 신문사진을 수집했다. 이 사진들이 지닌 엄숙한 형식은 예술적 이유가 아닌 편집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뉴스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사진들의 유일한 존재이유였기 때문이다. 루프는 자신의 자료에서 추려낸 400개 이미지를 재현하고 두 칼럼에 걸쳐 2:1 비율로 인화하여 아무런 설명 글 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표현방식을 택한 이유는 '신문사진' 자체를 연구하는 동시에 이 사진들이 종래의 기능에서 분리되면 어떤 정보를 전달하게 되는지 모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Herzog & de Meuron (헤르조그와 드메론 건축사진)1991년 -
1990년 쟈크 헤르조그 (Jacques Herzog)와 피에르 드메론 (Pierre de Meuron)은 1991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루프에게 자신들이 설계한 건물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루프는 라우펜의 리콜라 창고를 찍고자 했으나 장거리 여행을 원치 않았던 관계로 바젤에서 사진작가를 고용해 자신이 지시한대로 촬영하도록 했다. 바젤에서 송부된 여러 장의 사진을 컴퓨터로 조합 처리해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루프는 그 후에도 과거에 사용한 기법을 토대로 헤르조그와 드메론이 설계한 건물을 여러 차례 촬영했으며 이들의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 중 하나는 에베르스발데 대학 도서관 외벽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는데 루프의 <신문 사진> 시리즈에 포함된 사진을 사용했다.

Plakate (포스터)1996년 - 디지털 처리 몽타쥬
1996년에 발생한 일련의 정치 사건은 정치예술에 대한 루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존 하트펠드(John Heartfeld)의 작품과 20년대와 30년대 사이의 러시아 프로파간다 포스터에 영감을 받아 기존의 시각적 자료를 토대로 한 <포스터> 시리즈를 발전시켰다. 루프는 의도적으로 1996년에는 이미 쇠퇴한 콜라쥬 기법을 모방함과 동시에 현대 컴퓨터 기술을 접목시켜 이번 시리즈의 이미지들을 생성하고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했다.

nudes (누드 사진)1999년 -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 디지털 방식으로 수정한 포르노 사진들
1998년경 누드사진 작업에 착수한 루프는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에서 생성되는 화소(pixel) 기반의 추상사진을 소재로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누드사진을 조사하던 중 포르노 분야를 접하게 된 루프는 인터넷상의 이 사진들이 해상도가 낮아(72dpi) 픽셀구조가 자신이 실험해오던 것과 유사함을 발견했다. 루프는 인터넷 사진에도 같은 기술을 적용하여 픽셀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처리했다. 희미함과 흐릿함을 유도하는 기술을 적용하고 간혹 색상을 수정하거나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했다. 루프는 연작을 통해 오늘날 인터넷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제공해주는 각종 성적 환상 및 행위를 다루고자 했다.

l.m.v.d.r. 1999년 -
1998년 줄리안 헤이넨(Julian Heynen)은 토마스 루프에게 크레펠드의 쿤스트 미술관에서 개최할 루드위그 미스 반 데 로(Ludwig Mies van der Rohe) 건축사진전을 위해 그가 설계한 1927-1930 사이의 빌라를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진전은 미스 반 데 로에가 예전에 살았던 집이자 지금은 현대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Haus Lange와 Haus Esters의 보수공사 후 재개장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루프는 Haus Tugendhat, Haus Lange, Haus Esters, Barcelona Pavilion 건물들 그 자체와 이 건물들을 찍은 유명한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내어 헤르조그와 드메론 시리즈에서처럼 모든 기법을 총동원해 이 두 건물을 촬영했다. 크레펠트에서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 예정인 1938년까지의 미스 반 데 로 건축 회고전을 준비하던 테렌스 라일리(Terence Riley)는 루프에게 현존하는 미스 반 데 로의 나머지 건물들도 촬영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직접 촬영할 수 없었으므로 기존의 영상자료를 디지털 방식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Substrate (근원) 2001년 -

 

substrat 11-I 2003 284 x 186 chromogenic color print


루프는 <nudes> 연작에 사용할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상의 가상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적 수단으로 전송되는 시각적 자극만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진과 정보가 서로 중첩되는 인터넷상의 사진 홍수 속에서 더 이상 시각 정보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루프는 디지털 기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이런 시각적 공허함을 관통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 일본만화를 원자료로 삼아 여러 개의 층으로 중첩하고 합성시켜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찾아볼 수 없는 사진을 만들어냈다.

m.d.p.n. 2002~2003

 m.d.p.n. 28 2003 130 x 166 chromogenic color print

 

m.d.p.n. 33 2003 130 x 190 chromogenic color print
 
유명 건축가인 루이기 꼬센자(Luigi Cosenza)가 1929년 나폴리에 설계한 어시장을 촬영하는 m.d.p.n.에서 루프는 미스 반 데 로에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기법을 적용했다. 디지털 방식을 적용하여 나폴리 어시장을 오늘날의 모습과 원래 모습, 그리고 원시적인 도시적 맥락에서 보여주는 합성적 이미지를 창조하여 과거와 현재를 상호교차시키는 세련된 연작을 탄생시켰다. m.d.p.n. 역시 l.m.v.d.r.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진과 자료사진을 조합하는 연작으로 제작하였으며 이 사진들을 동일한 기법으로 처리하여 고전적 건축물에 새롭고 독자적인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예전에 받아 놓은건데 출처가 생각이 안나네요;;;
 
 
 
 
 
 
 
 
 
Posted by stormwatch :





독일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포토몽타주 (photomontage)와 더불어 처음으로 사진 매체와 조우했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다다이스트들은 기존의 사회이념, 전통적 예술형식을 전폭적으로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에 포토몽타주를 접합시켰다. 절단한 사진들로 작품의 전체를 혹은 작품의 일부분을 콜라주 방식으로 접합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포토몽타주는 1910년대 말, 그러니까 소련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럽이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 시점에서 도래했다. 다시 말해 포토몽타주는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허구성과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전쟁이라는 파괴적 양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사회건설의 모델로 비치는 역사적 순간에 태어났다. 시각예술작업과 문학작업에서 공히 행해진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 작업은 잡지, 신문, 포스터, 사전, 광고 카탈로그 등에서 부분적으로 떼어낸 이미지 혹은 텍스트들을 본래 문맥과는 상관없이 특정 공간에 임의적으로 결합, 조립 - 이것이 몽타주의 본래 뜻이다 - 하면서, 새로운 텍스트의 공간,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만드는 기법으로, 그것은 그 형식 자체 속에 이미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주의,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를 파산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었다. 그 파산, 파괴 위에서, 아직은 그 형태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혁명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의 몽타주 기법이었다. 간단히 말해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폭로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파편적 이미지, 절단된 텍스트로 내재화하고,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혁명을 통해 암중모색하는 혼돈의 양상을 내면화했다. 부르주아 문명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낸 자리에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할 모델로 떠오른 자리에서 포토몽타주 기법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포토몽타주는 분명 1910년대 초반 피카소 (Picasso), 브라크(Braque), 후앙 그리(Juan Gris)가 종이들을 붙이고 과슈나 유화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과 19세기 후반의 유럽이 카드엽서의 도안과 유머러스한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행한 시도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형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혼돈의 양상은 새로운 형태미, 새로운 미학질서를 탐구하는 큐비즘의 미학적 시도, 19세기의 장식적이고 유희적인 포토몽타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다이스트들의 사진을 활용한 충격적이고 거친 형상은 작업방식에 있어서는 큐비즘의 종이 붙이기와 19세기 포토몽타주와 거의 동일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반 조형적, 반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전통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베를린 다다에는 포토몽타주를 행하는 4명의 주역이 있었다. 한편으로 사진의 단편들의 조합을 통해 키리코(Chirico)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사진과 낱말들의 결합을 시도한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과  기계부속들 혹은 거리의 광경에 인간신체들을 결합한 한나 회(Hannah Hoch)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절대적 자유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를 신봉하여, 그들의 포토몽타주는 자의적인 무질서와 결코 확고히 고정시킬 수 없는 의미작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잡지의 표지 작업을 포토몽타주로 행하고, 그래픽적인 수채화에 사진의 단편들을 통합시킨 게오르그 그로츠 (George Grosz)와 그의 친구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1891-1968)가 있다. 이 둘은 1919년 독일 공산당이 창당되자마자 당원이 되었고, 사회비판과 혁명에 봉사하는 사회참여적 포토몽타주를 행했으므로 그들의 시각적 구성과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존 하트필드의 본명은 헬무트 헤르츠펠트 (Helmut Herzfeld)였지만 1916년 독일의 국수주의와 영국혐오증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별명은 ‘Monteurdada’, 즉 ‘다다의 조립공’이었는데, 이는 그가 다다를 대표하는 포토몽타주 작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트필드가 전통적 예술가의 고답적 이미지를 거부하기 위해 엔지니어, 조립공의 복장을 즐겨 입었던 까닭이었다.
  신랄하게 정치를 풍자하는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본격화된 것은 그의 형, 빌란트 (Wieland)가 설립한 출판사의 책표지와 공산당 기관지들을 디자인하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30년 『Arbeiter-Illustrierte Zeitung』, 즉 '노동자 화보잡지'의 정기기고자가 되면서 정치현실을,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포토몽타주는 절정에 도달했다.『AIZ』에 게재된 그의 250점에 달하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정치 선동적인 명료한 텍스트를 결합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인 사회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의 호전성을 공격하고 그의 포토몽타주를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는 것이었다. 1930년 그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홍보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신문들로 얼굴을 감싼 한 인물을 몽타주한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배추 머리를 가졌는데, 그 이파리를 읽어보았는가? 부르주아 신문들을 읽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귀가 먼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지겨운 허풍들!” 1932년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노동자들이 기관총에 쓰러지자, 그는 이렇게 포토몽타주한다. “국제연맹 건물 전면에 파시스트의 총검에 꿰뚫린 평화의 비둘기를 배치했고, 백십자기 대신 나치표장을 새겨 넣었다.” 위에서 인용한 포토몽타주는『AIZ』의 1934년 10월 4일자 특별호로 ‘반파시스트, 행동통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가 되어, 파시즘에 본때를 보여주자! 인민의 주먹들이 프랑스와 자르란트에서 보여주었던 것을 보여주자. 반파시스트 지지자들은 어디서나 단일 전선을 이룩하여야 한다.”라는 텍스트를 포토몽타주 곁에 삽입했다.
 
  『AIZ』는 1926년에 창간된 화보지로 부르주아 계층을 독자로 하는 잡지들과 편집형식은 물론이고 판매 부수에 있어서도 경쟁을 벌인 시사주간지였다. 이 잡지는 한 작가의 말을 빌면, “정신을 사로잡기 위한 최상의 무기”인 사진을 공격적으로 사용했다. 브레히트(Brecht)의 찬사에 따르면, 부르주아 보도사진가들의 객관성을 포장한 거짓들을 견제하는 “『AIZ』의 작업은 진리에 봉사하며 사태를 정확히 재정립하고자 하는 까닭에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잡지는 그것을 경이롭게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브레히트가 생각하는 시대의 ‘진실’은 반파시스트운동, 노동자의 계급투쟁 그리고 전통적 예술형식의 파격적 혁명이었던 까닭에, 그는 원근법, 균형, 조화, 통일이라는 기존의 전통미학원리를 파격적으로 분쇄하는 포토몽타주와 ‘노동자-사진가’의 사진을 선호하면서, 반나치, 반부르주아 운동에 앞장선 『AIZ』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AIZ』의 사진과 관련한 활동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포토몽타주의 전투적 사용 외에도 노동자들이 찍은 시사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현실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잡지에 게재되는 사진자료를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유통시키는 자본주의적 사진 통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AIZ』는 1926년 3월 독자들에게 대대적인 협조를 구한다. 부르주아적인 사진통신사들이 유통과정 속에서 의도적으로 눈감아버리거나 배제하는 사진들을 독자들 자신들이 잡지에 제공해줄 것을 호소한다. 『AIZ』가 요구한 노동자 사진의 종류를 인용하면, “1. 노동계의 혁명운동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2. 노동계의 사회적 상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3.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전체적 국면에서 정확히 재현하는 종류의 사진들, 4. 노동의 조건들과 장소들을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노동현장 사진들, 5. 현대 기술과 그것의 형태들, 산업구조물과 제조방식들을 도해하는 사진들”이었다. 이러한 협력요청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몇 달 후에는 ‘노동자-사진가’ 모임이 발족되고 공식 기관지, 『노동자-사진가 Arbeiter-Fotograf』까지 발행하게 된다. 
  이 월간지는 『AIZ』가 탄생시킨 새로운 형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기술적으로 이념적으로 교육시켜, 그들을 효율적이고 의욕적인 사진기자로 만들기 위한 잡지로 기능을 수행했다. 『노동자-사진가』의 필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진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매스 미디어들이 의식적으로 주입시킨 부르주아의 취향을 거부하고, ‘계급적 시각’을 습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계급적 관계와 착취의 징후들을 포착하여 가차없이 그것들을 비판하도록 학습시켰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러한 사진 실천은 기대한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이론가들이 비판한 부르주아의 취향을 상당수 답습했기 때문에 『AIZ』는 기존의 사진통신사의 사진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AIZ』가 계발한 아마추어 사진가 모임의 전략을 모방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임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자 잡지, 『노동자-사진가』는 폐간하게 되며, 존 하트필드는 『AIZ』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하여 1938년까지 반나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하트필드의 현실참여적 포토몽타주는 그 생산량에 있어서나 그 강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것이었지만, 분명 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포토몽타주의 독자적 발명을 주장한 소련의 클루트시스(Klutsis)와 로드첸코 (Rodtchenko)는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 『레프 Lef』를 통해 소련의 혁명정부가 직면해야 했던 이념홍보와 교육에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로 미술사가 분류하는 이들의 작업은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포토몽타주의 여러 가능성들을 실험하고 실천했다. 로드첸코는 1923년 출판되는 마이야코프스키(Maikovski)의 시집 『이곳에서』의 삽화를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했고, 엘 리시츠키(El Lissitscky)는 1928년 독일의 쾰른에서 열린 국제 사진전시회 ‘프레사(Pressa)’의 소련전시장을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대형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독일에서도 포토몽타주를 활용하는 여러 양상들이 나타났다. 도멜라 (Domela)는 그것을 광고에 활용했고, 모홀리-나기는 백색 평면에 사진들을 잘라 붙이고, 직선을 반복적으로 가미하여 포토몽타주의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그 기법을 이용해 부조리하고 기이한 이미지의 연상체계를 구현했다.
  나치의 집권과 더불어 프라하로 망명한 하트필드는 체코가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1938년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거기에서 1950년까지 린드세이 드루몬드(Lindsay Drummond) 출판사의 일을 하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1950년 이후에는 동베를린에 정착하여 무대장식과 전시 포스터의 제작을 행한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관련된 작업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는 자본주의와 파괴적 권력이 공모하여 인민을 탄압하는 양상이며, 둘째는 전쟁의 잔인함을 폭로하는 양상이다. 셋째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희망의 도식화이며, 넷째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다. 그는 절단된 사진 이미지들을 단순하고 엄격한 시각적 구성을 통해 짜깁기했고, 여기에 선동적인 메시지의 텍스트를 삽입시킴으로써 대중을 향한,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희귀한 예를 예술사에 남겼다. 그는 현실과 분리된 예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고답적 예술에 항거하면서, 아울러 과거의 판에 박힌 예술적 형식과 과감한 단절을 꾀한, 한 마디로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불어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전초병’이라는 뜻으로 그 쓰임새는 군사적 용도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삶의 전 영역이 정치적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자 예술도 이에 초연할 수가 없었다. 예술의 영역도 이 정치, 군사적 용어를 차용하여 특정 예술가군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치,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를 특정한 예술적 성향을 지향하는 예술가 부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예술가군은 예술의 발전을 사회의 진보와 관련시키는 성향을 표출하는 자들로 사회의 현실문제에 자신들의 예술로써 대응하고 응답하고자 했다. 인류의 개선적 발전을 예술의 기본토대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들은 당대의 정치, 사회 문제에 자기들의 의견을 작품,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따라서 19세기적 의미에서 예술분야의 아방가르드는 20세기가 뜻하는 바처럼 ‘현재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꾀하는 예술가군’이라는 의미와는 현격한 의미론적 차이를 보였다. 19세기의 아방가르드 개념으로 살펴볼 때 새로운 형식을 과격하게 추구한 큐비즘의 작가들이나, 마르셀 뒤샹은 아방가르드일 수 없다. 오히려 전통적 예술형식을 존중하면서, 인류의 진보, 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보다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예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갔던 쿠르베 (Courbet)가 19세기가 의미한 아방가르드 입장에 부합한다. 어쨌든 존 하트필드는 19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20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혹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나 그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그의 포토몽타주라는 파격적인 형태탐구 작업은 당시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는 또한 ‘사회의 진보, 인류의 삶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관점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수색대의 전초병, 즉 군사적 의미의 아방가르드처럼 나치와 부르주아의 개량 사회주의의 탄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선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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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잡지「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 창간호에는 랭거-파츠의 에세이 <목적>과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에세이 <전례 없는 사진>이 동시에 실렸다. 18세기 중반에 출간된 레싱(Lessing)의 『라오콘(Laocoon)』이 설파한 장르의 독자성, 매체의 특수성의 구현이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내용이라면, 타 매체와 구분되는 사진의 독자성, 사진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을 주장하는 이 두 글은 사진의 모더니즘을 통보하는 글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특히 모홀리-나기의 글은 사진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1920년대 유럽을 풍미한 아방가르드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글로 보인다. 레싱의 모더니즘 미학을 자신의 사진적 실험을 정당화하는 묵시적 근거로 삼으면서, 사진을 현재와 다가올 시대의 주역 매체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글의 말미를 제외한 전 부분을 읽어보기로 하자.
  사진이 가야 할 길과 목표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모든 글들과 논의는 그릇된 자취를 좇아왔다. 되풀이해서 사진이 접근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지적된 문제는 미술과 사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현실을 기록하는 한 방법으로 분류되느냐, 과학적 탐구의 한 매체로 분류되느냐, 혹은 사라지는 사건들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여겨지느냐, 복제를 위한 기본 프로세스로 여겨지느냐 혹은 “예술”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증대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특성들 중 단 하나를 예로 든다면,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이다. 거기에는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사진의 주제는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연루시킨다. 오늘날 사진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로부터 비롯되는 종합적인 사진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정확한, 때로는 부정확한 사진 언어를 발전시킨 후에야 진정으로 재능 있는 사진가가 사진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리라!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우리는 허황된 과장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 달성되면 사진에 대해 모두가 훌륭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그러한 탐구는 대개는 분리된 방식이지만 이미 진행 중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이다.
  여전히 연구돼야 할 영역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진적 실천의 새로운 요소들에 맞춰 수립될 수 있다.

1.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
2.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해 정상적인 광경에 익숙한 관계를 바꾸거나 그것들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왜곡시키기. (오목, 볼록 거울 혹은 요술거울을 사용하는 촬영 등등은 제1 단계들이다.) 이러한 촬영은 기계적 상상력이라는 모순된 말을 야기한다.
3. 한 장의 원판 위에 대상을 완전히 커버하는 이미지 ( 스테레오 사진의 발전된 양상).
4.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 설계. 원근법의 단축효과의 회피.
5. 사진의 사용에 반원근법적이며 물체를 투과하는 X-레이 사진의 적용.
6. 감광면 위에 빛을 투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진들.
7. 색에도 진정으로 감광되는 사진
 
 이러한 모든 요소들과 최대한 상호관련을 맺으며 종합하는 작업만이 진정한 사진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사진의 발전은 여러 곳에서 이미 고도로 계발된 새로운 빛의 문화로부터 강력한 동력을 얻고 있다.
  금세기는 빛의 세기이다. 사진은 빛의 전환된 형태로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거의 추상적 형태로나마 빛을 촉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제1의 수단이다.
  영화는 더 멀리 간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영화에서 정점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경험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의 개발은 영화를 통해 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렇게 하여 스승이 학생에게서 교시를 받는 특별한 상호관계가 수립된다. 이 둘은 상호 공동 연구소이다. 사진은 영화를 위한 탐구영역으로서 기능하며,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진은 전례가 없는 이미지
 
인용한 글은 내용상 세 문단으로 나뉜다. 첫 문단은 사진적 재현의 특수성,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 문단은 ‘전례 없는 이미지’의 생산을 위한 여러 제안들을 열거하며, 셋째 문단은 사진이 ‘빛의 세기’의 제1의 기초를 이루는 재현 매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모더니즘은 분명 레싱의 미학론에서 자양분을 길러내고 있었다. 후자의 『라오콘』에 따르면, 시와 회화는 분명한 경계와 자기 영역을 지니고 있다. 시는 언어의 선조성(linearity) -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발화되는 언어의 특성을 말한다 -에 종속된 매체이므로 시간에 따른 행동과 상태의 변화 양상을 기술할 수 있다. 반면, 회화는 재현양상을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계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를 동시적으로 (simultaneously) 보여주는 평면예술인 까닭에, 재현 대상의 변모 양상을 시간에 의거하여 묘사할 수 없다. 회화는 특정 순간의 동작, 상태만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재현의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서구를 지배한 매너리즘 미학이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다시 말해 “회화는 말을 하지 않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슬로건은 매체의 특성, 순수성을 무시한 미학 강령이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따르면, 시는 회화처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야 하며, 회화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의 소재를 이야기서술(narration)의 원칙에 의거하여 묘사하여야 한다.
  레싱은 이러한 매너리즘 미학의 매체 특성의 혼용을 시와 회화의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시에 내재된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생산될 때만 가장 시적일 수 있으며, 회화는 회화에 본질적인 기호양상에 충실할  때 가장 회화적일 수 있다.
  모홀리-나기가 글의 시작을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라고 단언하고,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을 사진만이 갖는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진이 이전의 여하한 시각 재현매체와는 다른, 새로운 재현특성을 지닌 시각매체임을 고지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현이다. 레싱에 충실한 모홀리-나기의 모더니즘에 따르면,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즉 사진의 재현적 특징에 전념할 때,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사진적 본성에 충실할 때, 어떤 촉각적인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생, 회화, 조각과는 달리, 사진은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가시화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작업을 행할 때만이, 그의 말을 다시 빌면, 사진이 아닌,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될 때만이, 사진도 레싱의 모더니즘에 부합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첫 문단의 말미를 장식하는 흥분된 어조는 레싱의 모더니즘을 전도하는 자의 설교에 다름 아니다.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모홀리-나기는 이어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생산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는 사진적 ‘실험들’을 열거하는 바, 그것들은 1910년대 후반 이후 기존의 시각 재현양상, 재현 이데올로기를 거부, 전복하고, 새로운 시각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이 사진을 통해 성취한 성과들이다. 1번의 경우, 다시 말해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은 모홀리-나기의 청년기를 인도했던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가 부르주아적이고, 귀족적인  미술 아카데미즘이 선호한 원근법과 조화, 균형, 통일이라는 구성원칙을 전복하기 위해 개발한 파격적인 사진 구도들이다. 2번의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한 왜곡상은 1920년대 후반, 모홀리-나기와 마찬가지로 헝가리 출신이면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의 누드 시리즈에 의해 예술적 성과를 이룩한 사진적 재현양상이다. 3번은 분명 초광각 렌즈, 혹은 어안렌즈의 이미지의 양상이며, 4번과 5번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각 재현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원근법과 이것의 파생양상인 단축효과를 내재화한 일반 사진기의 암상자(camera obscura)를 파기하여, 사진을 통해 ‘전례 없는 이미지’를 얻으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6번은 1920년대 아방 가르드 사진의 표상인 포토그램이다. 이것은 원근법에 의거하여 외부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기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빛의 이미지이다. 감광판이나 감광지 위에 사물들을 직접 올려놓고 빛을 쏘이면 사물의 투명도에 따라 음과 양의 그림자를 남기는 포토그램은 1919년 경 화가인 크리스티앙 샤드(Christian Schad)와 1921년 경 만 레이(Man Ray)가 즐겨 행했던 빛의 이미지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포토그램’이란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샤드와 친했던 다다이즘의 수장인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샤드를 포토그램의 발명자로 여기고 ‘샤도그래피’라 불렀고, 만 레이는 스스로를 발명자로 자청, ‘레이요그램’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결코 그들의 발명이 아니었다. 1910년대 이미 여러 사진잡지들은 포토그램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사진을 발명한 탈보트 역시 많은 양의 식물 포토그램을 남겼다. 모홀리-나기가 포토그램을 선호한 것은 이것이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라고 그가 규정한 양태, 즉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을 포괄하는 까닭이었다.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매체는
사진과 영화
 
그의 포토그램에 관한 애착은 유별난 것이었다. 1929년에 발표된 <포토그램과 인접 기술>에 따르면, “빛의 직접적 형상화”인 포토그램은 “미래의 시각적 창조의 관건”이며, “빛을 물질적이고, 조잡하게 형상화하고, 빛을 간접적으로 물질화하는 옛 사진을 폐기한다”. 그는 ‘옛 사진’ 다시 말해, 사진기에 내재된 원근법에 의거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을 “현실모사에만 헌신하는 평이하고, 빈약한 사진”으로 규정했고, 포토그램을 “사진작업의 본질인 빛의 글쓰기, 빛의 데생의 구사”로 여겼다. 그리고 사진기의 매개 없이 빛을 직접적으로 투사하여 생겨나는 포토그램을 그가 ‘빛의 세기’라고 규정한 시대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이미지로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보기에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 매체는 사진과 영화였다. 빛을 고정시키며,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과 빛의 형상을 투사하여 빛의 움직임을 창출하는 영화는 1923년 모홀리-나기를 바우하우스에 초빙하고, 1928년 모홀리-나기와 함께 자신이 설립한 바우하우스를 떠난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말을 빌면,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통합’하는 전형적 매체였다. 그에게는 과거의 여하한 시각매체의 재현방법과 단절을 꾀하는 사진과 영화만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감수성, ‘빛의 시대’의 시각경험을 수용하는 매체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통적 현실모사의 기계적 재현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탐구하는 매체로 사용한다면, 테크놀로지에서 상상력을 길러내며, 기하학적 추상화에 몰두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도할 수 있다고 모홀리-나기는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생각하는 사진과 영화의 관계는 상호 보조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한다면, 사진은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를 점하고, 영화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하부구조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상부구조 역시 사진이라는 하부구조를 자극하고, “부추긴다”. 그러나 ‘빛의 문화’ 속에서 하부구조로서의 사진의 기능과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진이라는 ‘기초작업’이 없이는 “영화는 더 멀리” 갈 수 없다. 사실, 영화는 ‘빛의 문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진 없이는 ‘빛의 문화’는 있을 수 없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홀대하는 에르노 칼라이의 1927년 글, <회화와 사진>에 대한 답변에서 사진을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로 설정하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오늘날 사진은 모든 분야에서 열광적으로 추구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진에 어떠한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문맹이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가올 시대에는 사진은 읽기, 산수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기본과목이 될 것이다. 오늘날 사진애호가들이 갖는 모든 바람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앞으로는 누구나 배워야 하는 제2의 천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본질론은 사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사진의 정수(essence)일 수도 없으며, 또 그가 사진의 특수성, 독자성이라고 간주한 사항만이 사진의 특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그의 주장이 오늘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사진을 기계적 복제, 복사 수단으로 여기거나 혹은 사진이미지를 회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 당시 예술계의 일반인식을 불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데 있다. 당시 미학의 이론의 중심에 자리잡은 레싱의 매체와 장르의 독립성, 특수성에 관한 주장을 자기의 미학적 논지로 삼으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당시의 시각문화의 주체로 승격시키려는 모홀리-나기의 정열은 사진역사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라즐로 모홀리-나기, <포토그램>, 1925-192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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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거-파츠 (1897-1966)는 라즐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그러나 사진 경향에 있어서는 그의 대척점에서 1920년대 독일 사진계의 흐름을 주도한 주요 인물이다.
  헝가리 출신의 모홀리-나기가 뉴 비전(New Vision)의 선봉장이 된다면, 랭거-파츠는 신객관주의(Neue Sachlichkeit)라는 사진경향을 주도했다. 뉴 비전과 신객관주의는 사진매체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의도하는 재현양상에 있어서 철저하게 대립했다. 바우하우스를 근거지로 한 모홀리-나기는 사진매체를 언제나 아마추어의 유희정신과 예술적 자유의 구현 수단으로 접근한 반면, 폴크방 아우리가 (Folkwang und Auriga) 출판사에서 자료사진을 담당했던 랭거-파츠는 철저한 사진전문인으로서, 완벽하게 사진기술을 마스터한 장인으로서 사진매체를 대했다. 헝가리 출신의 아티스트는 종전의 어떠한 회화작업도 창출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이미지를 빛의 감광성과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계발하는데 주력하였지만, 랭거-파츠는 식물과 건축 자료사진, 공업제품 사진의 조형적 탐구에 전념했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현실의 복제수단으로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제약 없는 이미지 실험의 영역으로 여긴 반면, 랭거-파츠는 기록의 순수성에 의거하여 형태미의 탐색에 몰두했다.
  랭거-파츠는 1927년, 사진잡지 「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창간호에 실린 에세이 <목적 Ziele>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엄정하게 기록하는 리얼리즘과 형태와 물질에 대한 객관적 재현을 사진의 임무로 삼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회화적’ 사진과 단호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회화적’ 사진은 단지 인상주의의 화풍과 소재를 사진적 재현의 모델로 삼은  ‘회화주의(pictorialism)’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적, 역사적, 문학적 주제를 미술아카데미가 존중하는 형식적 규범을 본받아 행한 구스타브 레일랜더, 헨리 피치 로빈슨의 ‘조합인화(combination printing)’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사진에 고유한 도구들을 가지고 회화와 유사한 효과를 구하려 하는 것은 사진만이 갖는 방법, 재료, 테크닉의 특성과 사진만이 갖는 진실성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좋은 사진의 비밀, 사진이 조형예술 작품에 견주어 소유할 수 있는 예술적 특성은 사진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진은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도구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사진이 물질의 신비로운 힘을 재생하는 가능성에 대해 너무나 과소 평가한다. 나무와 돌, 금속의 구조는 사진만의 독특함 속에서 조형예술의 여하한 방법으로도 행할 수 없는 완벽함으로 재현된다. 우리는 사진 덕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높이와 깊이감을 표현하며, 극도로 빠른 움직임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 권위로 자리잡았다. 
  오직 사진만이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을 적절하게 이미지로 번역할 수 있다. '회화적' 스타일에 집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진의 이러한 특성, 다시 말해 형태의 기계적 재현을 일종의 결함으로 치부하지만, 실은 이것이 사진이 다른 모든 표현수단을 능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형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내는 기술적으로 성공한 사진원판은 우리의 시각적 경험을 마술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술은 예술가에게 맡기고, 사진도구로는 사진적 특성 덕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사진을 만들도록 노력합시다. 예술에서 어떠한 것도 빌려옴 없이. 
  사진의 특성은, 랭거-파츠에 따르면, 사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대상이 자연의 산물이건, 산업생산물이건, 건축물이건 그것을 변형, 왜곡시킴 없이 묘사하는 것이다. 주관성, 상상력, 예술적 의도에 의해 현실의 대상을 변형하지 않고, 사진도구의 ‘기계적’ 재현을 전폭적으로 수용할 때 사진만의 특성은 구현된다. 이때 사물의 ‘신비로운’ 형태는 완벽하게 전사되고, 사진의 흑백 계조도는 재현대상의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부위까지 아주 섬세하게 드러낸다.”
  분명 랭거-파츠의 위의 진술은 예술사진의 ‘회화적’ 경향에서 탈피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사진예술의 전반적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1920년대에 새로운 예술사진을 도모한 사진가들은 회화주의를 포함한 '회화적' 사진을 사진의 독자성, 자율성을 사장(死藏)하는 경향으로 받아들였고, 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모색하여 회화에의 종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사진가들은 회화와 구별되는 가장 ‘사진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실험했다. 미국의 사진가들이 행한 이러한 사진경향에는 스트레이트 사진이란 명칭이 부여됐고, 독일의 사진가들이 추구한 사진의 특질에 대한 탐구에는 신객관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두 사진경향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해 재현양상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가져왔지만, ‘회화적’ 사진과 확연히 구별되면서, 사진만이 갖는 특성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일란성 쌍둥이다. 즉, 스트레이트 사진과 신객관주의는 섬세한 세부묘사, 빛과 음영의 계조도에 따른 섬세한 재현, 육안의 능력을 뛰어넘는 깊은 심도감을 사진적 재현의 특질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상정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차점을 가정하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주제는 현실세계의 역동성과 조화로움에 대한 조형적 탐구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도시의 거리, 자연의 세계, 인공물, 건축물, 신체의 세부 등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다룬 사진의 소재는 광범위하고 다양했지만, 세계의 형상은 조화로우며, 세계 속의 인간은 숨을 잘 쉬도록 만들어졌다는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폴 스트랜드, 스티글리츠, 이모겐 커닝햄, 앤젤 아담스 등 대부분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독특한 개성으로 대상들에 접근했지만, 자연과 인공물의 조화로움, 역동적인 삶과 조형적인 신체의 재현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는 법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세계를 무한한 가능성의 땅으로 받아들였고, 번영을 구가하는 신생대국의 삶을 사는 낙관적 면모를 직접적이고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기계문명이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과 환경이 불협화음의 관계 속에 있는 사진적 재현은 스트레이트 사진 저 멀리에 있다.
  반면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을 대변하는 랭거-파츠의 사진은 거역할 수 없는 기계문명으로의 이전을 부정적으로 수긍한다. 자연이 삶의 환경에서 쇠퇴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술문명의 지배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현대 기술의 엄격한 선형 구조, 공중을 가로지르는 기중기와 다리의 철골조, 천 마력을 지닌 기계의 역동성”은 휘트먼적 예찬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자연을 압도하고, 인간의 삶을 지배하러 다가오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산업생산물, 인공구조물의 역동성은 냉엄하고 위압적이다. 랭거-파츠가 클로즈-업한 식물과 동물의 세부의 반복 양상은 도래한 기계문명에 길들여지고 동화된 자연을 암시한다. 꽃잎과 뱀 비늘의 조형적이고 유기체적인 반복은 자연스런 조화, 조화로운 자연의 이미지라기보다는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된 질서에 종속된 양상을 띤다. 자연의 대상물은 극단적 클로즈-업을 통해 조각나고 고립되어져,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활력을 잃은 채 박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도 1차 세계대전 (1914-1918)이 보여준 기술문명의 파괴적 양상에 대한 충격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 과학기술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세계에 대한  정신분열적 인식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된  독일의 정치적 혼란, 실업과 같은 경제란을 내면화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회화적’ 사진을 거부하고 사진의 특성을 구현하면서, “자연, 식물, 동물, 건축과 조각 작품,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생산품에서 우리가 경험한 인상을” 작가의 주관성, 상상력, 감성을 최대한 지우면서 사물 자체의 ‘객관적’ 인식,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랭거-파츠의 작업은 1928년 출판된다. 랭거-파츠는 어떤 수사적 요소가 없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책제목으로 ‘사물 (Die Dinge)’을 생각했지만, 출판사 측은 『세계는 아름답다 Die Welt Ist Schon』라는 아주 낭만적인 책 제목을 선택한다. 근접촬영과 심도 깊은 이미지를 가장 주된 특징으로 삼는 100장의 이미지로 된 이 사진집은 엄청난 성공을 경험하면서 사진가에게  전례 없는 명성을 가져다준다. 이에 따라 그의 사진 기법을 추종하는 사진가들이 생겨났고, 그의 작품집을 칭송하는 여러 논평과 아울러 예외적이지만 강력한 비난이 뒤따랐다.
  당시 유명한 사진 연간지 「다스 도이치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도 창간호의 편집을 맡았던 한스 빈디쉬(Hans Windisch)는 1928/1929년 합본호에서 인용한 랭거-파츠의 사진을 ‘자연의 다큐먼트’로 정의하면서 이 규정에 부합하는 사진들을 이렇게 높이 샀다. “이번 호가 분명하게 혹은 암시적으로나마 증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 그것은 자연의 다큐먼트에는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따라서 예술적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다큐먼트에서 우리는 사진 행위의 본질을 보다 더 천착할 수 있으며, 또 예술적 창조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수천의 사진에서보다는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한다.”
  사진의 본질론을 상정하며, 랭거-파츠로 대표되는 ‘자연의 다큐먼트’ - 필자는 신 객관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에 반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를 예술사진의 정수로 간주하는 한스 빈디쉬의 논법은 분명 증명해야 할 것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논증선취의 폐단을 드러내는 한 예지만, 어떠한 재현적 특질을 사진의 ‘정수’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다큐먼트'라는 용어는 정확하고 심도 깊은 사진적 재현, 대상을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는 의지를 이미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큐먼트’는 랭거-파츠 부류의 사진적 특성을 정확히 지시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각적 자료를 요구하는 특정 학문의 부산물, 어떤 실용적 사용의 시각적 도구라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자연’이라는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실체의 수식어를 첨부했다. ‘자연’은 실용적 목적, 학문적 용도로 사진 ‘다큐먼트’를 주문하고 생산한 주체일 수 없다. 오히려 ‘자연’은 사진작가의 ‘형태에 대한 개인적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실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자연의 다큐먼트’는 다큐먼트를 재현하는 형태적 양상으로 실현된 ‘예술’ 사진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한스 빈디쉬가 말하는 ‘자연의 다큐먼트’는 ‘사진 행위의 본질’- 육안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명도, 세부 묘사 등 -을 구현하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하는 사진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의 사진이 “예술적 창조에 접근”하며, “교묘한 술수로 끝나는” 모홀리-나기의 뉴 비전보다도 “사진 행위의 본질이 더욱 순수하고 정직하게 나타나는” 예술사진이다.
  사진집『세계는 아름답다』의 출간은 당시 독일 사진예술계를 여러 상반된 견해들을 표출하게 만든 계기였다. 한스 빈디쉬처럼 ‘자연의 다큐먼트’를 ‘사진 행위의 본질’로 여기는 사람은 랭거-파츠의 사진집을 바우하우스 (Bauhaus)를 무대로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의 유희적 실험을 즐겼던 모홀리-나기를 공격하는 최상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 대표주자는 에른스트 칼라이(Ernst Kallai)로 그는 모홀리 나기가 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학교의 기관지 「바우하우스」의 편집을 뒤이어 맡은 인물이다. 그가 보기에 모홀리-나기의 포토그램은 “광화학적 술수의 미학으로 유희적 책략과  완전히 우발적이고 눈을 현혹시키는 성공을 ‘실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반면 “랭거의 사진들에서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관찰의 윤리학은 판화작품이나 옛 그림에 현존하는 정신적 태도만큼이나 진지하고 고상하다. 그의 사진의 조형적 통일성, 아름다움은 제재에 내재하는 비전의 통찰과 극도로 숙련된 작업기술에서 태어난다.” 한 마디 더 인용한다면, “랭거의 사진 창작태도에는 아주 깊은 인간애와 드높은 사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랭거-파츠의 사진을 ‘사진 행위의 정수’로 파악하는 논객들은 전통적인 미학을 그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빈디쉬가 말하는 ‘감수성’ 그리고 칼라이가 원용하는 ‘정신적 태도, 조형적 통일성, 숙련된 작업기술, 인간애, 사상’ 등은 르네상스 이후 19세기말까지 서구의 이상주의 미학의 기본 개념인 까닭이다. 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미학 개념에 의거하여 1920년대 독일을 풍미한 새로운 두 사진경향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모홀리 나기가 행한 포토그램은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숙련된 기예가 필요 없는 값없는 유희 행위로 여겨진 반면, 랭거-파츠의 신객관주의는 상당히 이상주의적 미학관념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세계는 아름답다』를 해설하는 글에서 주의를 끄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질적인 사물들의 상응, 상호유사성을 랭거-파츠의 사진들에서 찾아냈다는 점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물질, 형상들이 사진의 클로즈-업을 통해 보면 서로 닮아있고, 상호 관련성을 맺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이러한 이미지의 독법은 이미지의 역사에서 랭거-파츠의 사진집이 최초로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두 평론가의 글을 인용해 보겠는데, 첫 번째는 후고 지커(Hogo Sieker)가 <알버트 랭거-파츠의 사진에 대하여> 쓴 글이며, 두 번째는 쿠르트 투콜스키(Kurt Tucholsky)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다.
  난초의 꽃잎들을 부감 촬영한 사진은 거의 동물의 목구멍만큼이나 끔직한 형상을 띠며 어떠한 수줍음도 없이 추잡한 성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눈 위에 놓여진 마른 풀은 일본 목판화의 우아한 형태를 갖는다. (...) 스스로 나선형으로 감긴 새싹으로 미로에서는 선사시대의 괴물이 동굴에서 뛰쳐나오는 듯하다.
  어린 수목은 영양의 몸과 동물의 발바닥을 닮았다.
  이렇게 상호 이질적인 형상과 물질이 클로즈-업 사진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교류하는 양상은 칼 블로스펠트, 에드워드 웨스톤, 이모겐 커닝햄 등 1920년대 독일의 신객관주의 사진가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가들이 아주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탐구한 사진 항목이다. 블로스펠트는 속새풀에서 고대의 원주를 보았으며, 웨스톤은 피망에서 남성의 근육질을, 양파의 단면에서 여성의 성기를 발견했다. 커닝햄은 꽃들의 클로즈-업을 통해 꽃과 남성성기의 유사성을, 여성성기와의 상응을 찾아냈다.
  『세계는 아름답다』에 대한 비판은 주로 정치적인 관점에서 행해졌다. 프리츠 쿠르(Fritz Kuhr)의 <세계는 아름답기만 한가?>는 그 전형적인 예다. 그의 비판을 인용해 보자. “초점거리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은 흐릿하거나 거짓이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은 랭거-파츠에게 하루 날을 잡아 빈대 집이나 노동자의 집, 그보다는 농부의 집을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도 우리의 중앙형무소나 ‘현대식’ 감옥을 그가 사진을 찍으면 아주 괜찮을 듯싶다. 당신은 교도소에 대해, 보호감호소에 대해, 집 없는 노동자 합숙소에 대해, 빈민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수적으로 본인은 참호와 반혁명 장교들의 지휘본부의 바리케이트, 진압용 곤봉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결국 랭거-파츠 식의 세계의 아름다움은 흔히 ‘지적 매음’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고 세계에 대한 미학적 탐구에 전념하는 예술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1934년의 발터 벤야민의 글, <생산자로서의 작가>로 이어진다.
  『세계는 아름답다』 - 이것은 랭거-파츠의 유명한 사진선집의 제목이다 -  속에서 우리는 신객관주의 사진술이 그 정점에 달해 있음을 보게된다. 이를테면 신객관주의 사진은 비참한 생활까지도 완벽할 정도의 유행적 방식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를 즐거움의 대상으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진의 신객관주의를 대변하는 랭거-파츠의『세계는 아름답다』는 사진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그 예술적 평가, 그리고 사진의 정치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에 대해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1920년대 말의  ‘화제작’이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 (사진역사학  박사)

알버트 랭거 - 파츠 Albert Renger-Patzch, <파구스 사의 인두>, 1927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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