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의 세상 혹은 현상계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동굴은 하나의 우주이고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하나의 풍선이라고 할 때 동굴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원소로 되어있는 풍선 속의 공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하나의 원소 뿐이다 : 인식의 영역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나 현상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관념적인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 B이고 B가 C이기 때문에 A는 C다”라는 수학적인 공리라든지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적으로 ... 을 의미한다”라는 보편적 사실, 혹은 보다 추상적으로 볼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러한 개념적 대상들은 논리와 일반 그리고 객관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언제나 의미와 이성의 범주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코드(진리, 상징, 슬로건 등 최소한 타자와 객관적으로 의미화된 개념 혹은 정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플라톤 동굴에서 빛에 의해 인식되는 양의 세계(인식계)를 말하는데, 이러한 범주 속에서 사진의 대상을 찾아 재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규명된 의미에 대한 일종의 진술이나 확인일 것이다. 예컨대 시골 농부의 순수한 표정에서 읽혀지는 농심,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동심, 인본주의, 자연보호, 생태계 혹은 생명력을 암시하는 대상들,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달력풍의 이미지들, 소외와 고독 그리고 자아상실과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진적 테마들은 사실상 오늘날 익히 알고 개념(code)적 현상에 대한 시각적 확인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테마들로 “앎”이라는 문화적인 지식에서 온 하나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엄밀히 말해 이러한 사진에는 언어와 같은 진술로서의 작품성(언어로서의 사진)은 있어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예술성(사진으로서 사진)은 사실상 부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공간을 이루는 또 다른 구성원소는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 인식 영역, 즉 음(蔭)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현상계에서 언제나 그 본질이나 진실이 수수께끼나 신비로 나타나면서 변화무쌍한 현상으로만 출현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징후로만 감지할 뿐이다. 마치 감기의 징후로 몸에서 열이 나듯이 여기서 본질은 객관적 의미를 갖지 않는 불확실한 “그 무엇”(감기와 같은 원인성)을 말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존재적 대상)이다. 예컨대 보험금을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건, 고층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여중학생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보이는 차갑고 괴물 같은 인상, 젊은이들의 엽기열풍,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서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애착감 등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순되고 황당한 경우나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건이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직감이나 갑작스런 충동 등은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징후적인 현상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언제나 논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고 어떤 공통된 특징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이고 미스테리한 지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대상이 언제까지나 음의 영역에서 수수께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능력의 확장에 따라 그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현재의 절대적 가치로 규명해 놓은 진리 역시 시간과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변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들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물 즉 현상을 본질로 보는 물질중심적 담론과는 달리, 단지 현상을 일종의 징후로 보고 그 원인이나 실체를 추적하는 본질규명학을 현상학(La phenomenologie)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예술론으로 볼 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언제나 징후로부터 그 본질을 재현하는 고독한 작업의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예술적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현상학적 추적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오늘날 이러한 추적의 중요한 예술적 매체로 간주되고 이때 사진을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하고, 또한 그 재현을 “음영의 재현(La representation des omb-res)”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음, 애수, 불안, 허무, 음색, 인상, 부조리 등 형이상학적 대상이며 그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추적은 사실상 현상학적인 방법을 동반하고 있다. 흔히 이러한 방법론은 장님과 코끼리의 이야기로 설명되는데, 음의 대상들은 빛(우리의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능력) 혹은 예술가의 의식을 대상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비유하고 또한 본질을 코끼리로 비유한다.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장님은 자신의 지팡이(즉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 궁극적으로 카메라의 역할)를 이용하는데, 지팡이가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실체의 부분적 사실들, 즉 징후로서 출현하는 현상들일 뿐이다. 방법적으로 볼 때, 이는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파악하는 일종의 추론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예컨대 장님이 감지하는 코끼리 다리는 굵은 고목나무로, 긴 코는 고무호스로, 꼬리는 굵은 밧줄로 이해될 것이며 또한 몸통은 거대한 고무풍선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모든 현상계의 징후들로부터 추리적 방법으로 파악된 사실은 적어도 코끼리와 유사한 감각적 실체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실체는 결코 언어나 어떤 객관적 의미로 규명할 수 없는 실체이고 단지 색, 선, 점 등 감각적 표현(회화의 경우)에 의해서만 암시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말한다. 그러나 본질의 정확한 규명은 마치 여명의 지평선 밑에 숨겨진 영원히 뜨지 않는 태양처럼(메를로 퐁티의 “지평선적 시각계의 개념”)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때 본질은 지평선 위에 감지되는 수많은 여명의 신호들(“생성의 신호들” Les signes de genese)에 의해 암시될 뿐이다. 그때 본질의 재현은 현상계에서 본질의 부분적 징후를 반사하는 일종의 거울(작가의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사실상 그 시각적 재현은 단지 본질의 닮음꼴 혹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만 나타난다. 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불가능한 닮음”이나 폴 클레의 “시간의 그래픽적 재현”은 이러한 본질의 재현에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현상계에 출현하는 현상들은 단지 징후에 불과하며 예술가가 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바로 이러한 징후로서 나타나는 비논리적인 “현상의 외관”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현은 우리를 둘러 싼 수많은 신호들로부터 단지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논리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구체적인 진술이나 규명(구조주의)에 의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말은 달리 말해 “객관 타당한 코드 혹은 약속”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약속된 의미는 예컨대 장님들(작가들)이 지팡이로 느끼는 감각의 실체들이 코끼리와 비슷한 실체들 혹은 전혀 다른 실체들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하나의 공통분모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정확히 똑같은 붕어빵을 만들기 위해 만든 붕어 모양의 틀(형상 : forme/fo-rm)과 같이 논리적으로 객관 타당하다고 인식된 “앎(connaissance/knowledge)”을 말하고 있다. 인식론자들 쉽게 말해 의미론자들(특히 형상론자들)은 바로 이렇게 규명된 수많은 형상들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단지 틀에 의해 찍혀져 나온 붕어빵 같은 현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는 수많은 틀과 또 그 틀들에 의해 다변화된 모습(figure)들을 가진 무한한 현상들로 가득찼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의 똑같은 틀에 의해 찍혀 나왔다고 인식되는 많은 붕어빵들조차도 그 하나하나는 역시 각자 다른 모습을 갖는다. 이때 각자 다른 모양의 붕어빵들은 하나의 의미화된 틀, 즉 정형화된 붕어빵을 만들게 하는 배경(fond)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 혹은 위대한 사진작가가 재현하는 예술적 생산물은 결코 획일적인 붕어빵이 아닐 것이며, 진정한 비평가는 작가의 감각적 생산물을 하나의 틀(말하자면 의미의 틀)에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모든 대상은 언제나 생성에서 변전으로의 동태적 의미를 가질 뿐이며, 외관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언제나 변전의 과정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의 발견은 흔히 진리나 정태적 의미(code)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사유 한계를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이러한 발견은 징후의 포착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을 추적하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이 함축하는 의미(connotation)로부터 분석된 해설이나 혹은 그 의미의 틀로부터 포착된 사진적 재현은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대로 찍혀 나오는 붕어빵 논리에 가깝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미 의미화 되어 있는 현상이나 일반적 사실의 틀로부터 재현된 사진의 주제,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 생태계의 파괴나 퇴색된 인간미의 고발, 강인한 생명력과 대자연의 예찬등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암암리에 약속된 일종의 의미적 코드(판박이의 정의)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studium)를 재현한 사진은 근본적으로 감각이 아닌 우리들의 문화적 앎에서부터 출발된 사진적 재현이고, 비록 의미의 진술을 위해 형식상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작품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상 진정한 창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이미 코끼리와 같은 실체가 밝혀진 인지 대상 혹은 장님이 아닌 정상인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논리적 확인이나 보고서로 간주 될 수 있다. 사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재현 대상은 시각적인 이상함과 특이함인데 예컨대 우리는 사진에서 언제나 정상적인 모양새보다 정상적이지 않는 모양이나 조형적 형태, 혹은 엉뚱한 대상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같은 방법으로 생각해 볼 때, 의미의 벽을 넘는 첫 단계 역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다. 사실상 우리는 의미가 부여된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서도 정상보다도 비정상적인 논리에 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 진정한 사진가의 예술적 재현은 일반적인 의미-코드로 쉽게 설명되어지지 않으며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정상적인 논리의 뒷면에 있다. 이때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denotation)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 될 뿐이다. 사진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림과 같은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 진정한 예술사진은 의미 이전에 징후(결과적인 흔적)를 재현하면서 그 본질(본원적 원인이나 동기)을 추적하는데, 이때 본질은 이미 정형화된 의미가 아닌, 의미의 영역 밖의 의미를 갖는다. 카메라는 장님의 지팡이가 되며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다. 프랑스의 사진 비평가 질 모라(Gilles Mora)는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지팡이 사진(도판 1)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감각의 논리”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사진을 한마디로 “반 - 의미적” 사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이나 초월 혹은 과잉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객관적 의미가 아닌 비논리적인 주관적 의미(sans code, signifiance, punctum, obtus 등)에 보다 가깝다. 그와 같이 음영 세계의 대상들은 의미의 생성과 과잉을 동시에 가지면서 진정한 창조의 대상 ③ 이 된다. 그래서 단순히 의미론적 시각으로 읽는다면 깁슨의 사진들은 적어도 내용상으로 우리를 혼동시키는 하나의 암호나 수수께끼로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시(예술사진)를 잡지기사(다큐멘터리 사진)를 읽을 때처럼 단어 하나 하나가 진술하는 논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왜냐면 그의 사진은 공통적으로 더 이상 서술이나 상징과 같은 이미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무의미 즉 시적 언어인 “생성적 의미”만을 갖기 때문이다. 이때 생성이라는 것은 의미로의 진화과정에서 시원적인 출발점, 혹은 싹을 말하는 것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들의 의식으로부터 망각된 대상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카메라로 재현하는 것은 단지 지팡이로부터 전해오는 감각의 재현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 영역 밖에서 비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코끼리라는 본질적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와 같이 사진의 진정한 창조는 더 이상 확실한 의미의 진술이 아닌 불확실한 감각의 재현, 즉 “망각된 존재의 추적”(Martin Heid-egger)에 있다. ● 주) ① 이러한 비유는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L'oeil et l'esprit)”과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Le visible et l'invisible)”에서 차용된 개념적 설명이다. 궁극적으로 안 보이는 세계는 음의 세계를 말하며 본질의 실재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시각계에서 보이는(인식되는) 대상들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외관들만 가지며 그 본질들은 외관에 항상 은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 가지들에 의해 나무의 동체가 추리되듯이 본질의 추적은 우리들의 감각계(특히 시각계)에서 출현하는 색, 점, 선과 같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적 재현은 이때 대상의 본질을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나무 가지 혹은 거울(index)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②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함축적인 의미(connotation)를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의 징후(index)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진을 언어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은 사진이 내포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징후로서의 사실주의가 나타나는데 이는 사진을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징후 혹은 자국으로 보는 견해이기도 하다 (차후의 테마, 사진 인덱스론 참조). ③ 여기서 창조의 의미는 의식에 내재된 존재적인 실체의 발견을 말하며, 다시 출현하게 한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재현(representation)”은 이러한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말한다. 그래서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곧 이미 존재하는 (음의)실체에 대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샌프란시스코” 시리즈, 1960 - 63. |
'사진예술'에 해당되는 글 33건
- 2011.08.30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2
- 2011.08.26 로버트 프랭크 :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
- 2011.08.26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1
![]() ![]() ![]() ![]() 창작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특히 시각예술에서 생산된 작품은 일종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부구조로서 출현하는 지표(인덱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부구조로서 부재하는 그 원인성(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출현한 지표는 그 배경(fond)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고 물리적 원인 관계로 이해되는 이들 두 관계에서 본질(최초의 동기)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지표(시각적 출현)에 앞선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린 유명한 검은 초상은 모델의 검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모델을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을 자신의 감각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또한 폴 클레의 그래픽적 색 나열 역시 현실의 대상이 아닌 음악의 순수함으로부터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검은 얼굴과 색 그래픽은 시간적으로 작가가 과거 상황이나 대상과의 경험에서 포착된 감각의 음색(impression/timbre) 혹은 생성(genese)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이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음색(철학적으로 내재적 형상)들은 단지 작가의 직감(intuition)에 의해서만 포착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탈-코드/시뮬라크르)들이다. 그와 같이 작품은 이러한 존재의 신호들을 색과 선, 면 등의 조형적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조형적 언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 더 정확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경우 그 재현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 특성상 사진은 대상에 대한 그 어떠한 인위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조형적 번역(연출사진)을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사진에서 본질은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만약 클레가 카메라를 이용했다면 그가 바이올린 음에서 감지한 음색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파스텔과 같은 색과 선의 조형적 번역이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의 상황적 재현에만 가능하지 않는가 ? 그럴 경우 클레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음색을 암시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악보 피아노 공간 등 그 음색을 유발시킨 오브제나 상황을 찍을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음색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이면에 부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그때 시각적인 출현은 이러한 부재를 은닉한 인덱스로서 음색 혹은 분위기를 위한 재현 이미지 이외 그 어떠한 언어학적 의미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진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재현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방출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을 은닉한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 특히 거의 현존하는 신화로 간주되는 그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현대 영상사진의 결정적 조건을 짓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당시 객관적 사실성과 사건 중심의 보도사진의 흐름에서 프랭크 이후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그의 주관적 이미지를 하나의 모델로 추종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인”의 출간은 적어도 외관적으로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① 게다가 프랭크의 사진은 최근(특히 80년대 이후 유럽)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진 인덱스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이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와 사진 혹은 사진과 사회와의 객관적 관계나 역할에서 코드-의미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분석(현실의 변형)에서 볼 때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한 코드 분석을 넘어 두 가지 주관적 관점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 하나는 사진을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음색의 재현(영상사진)으로 보는 관점과 또 하나는 사진을 모두에게 공유된 현실의 주관적 경험 혹은 공통된 내적 인상으로 이해되는 관객의 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다 함축적인 방법으로 프랭크의 몇 몇 사진들을 모델로 하여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가 “미국인”을 만든 때는 1955-56년이다. 당시 50년대 전반은 공화국의 회귀, 냉전,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상 생활 정상화와 안정과 균형 그리고 경제 발전을 목표로 정치 사회적 관계가 적절히 유지되던 시대였다. 여하간 50년대 미국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확장과 미래의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로 모든 중요한 사항은 공통된 아이디어와 함께 명분과 이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 의식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된 상태로 있었던 분쟁의 에너지는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지속적인 경제적 추진력으로 전이되었고 경제는 또 그렇게 실패 없이 발전했다. 프랭크의 의도는 정확히 당시 긍정적인 대중 의식에 거역하는 반-이미지 즉 지나치게 코드화 되고 상징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였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그가 재현한 반-이미지들은 흔히 소외와 빈곤 허무 등과 같은 반 물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들이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규명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프랭크의 “미국인” 사진집은 결정적으로 전통적 사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반 - 사진” 즉 탈선(형상 이탈)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대중의 눈에 비평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반-사진적인 이탈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은밀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유럽적 시각에 관계하는 것으로 미국에 이민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주관적 재현은 장 콕도가 그의 사진을 “반사하는 거울”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대상이나 상황에서 포착한 “순수 직감”으로부터 재현된 사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영화 혹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3인칭 역사가 아닌 단지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1인칭 자화상이었다. ② 이는 곧 일반적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적인 독백으로의 전환 즉 재현에 있어 주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주제의 변화와 조형적 형태와 구성에서 전통적 규범의 이탈(불규칙, 대칭, 절단, 동요, 흐림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들은 사실상 현대 사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간주되는데 가장 좋은 예로 미국 남부의 이국적 풍경을 보여주는 프랭크의 사진(사진 2)과 이와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1930년대 워크 에반스의 사진(사진 3)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두 사진은 당시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차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재현 방식에서도 거의 같은 정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사진 모두 삶의 방식으로 간주된 차를 소재로 미국의 자연적이고 “내부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에반스가 재현한 객관적 보고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 초가집과 주유소가 병치된 시골 풍경과 같이 단지 자연과 인공의 병치에서 발생하는 대상의 엉뚱하고 야릇한 인상을 재현한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반스의 차는 부의 상징인 사회적 지표로 나타나고 프랭크의 차는 일종의 인간과 물질 사이의 부조화에서 암시되는 괴물 즉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전자는 “사물 위에서(sur) 의미의 재현”인 반면 후자는 “사물에 반하는(contre) 섬광 혹은 인상의 재현”이다(Henri Van Lier).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프랭크의 사진이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인 지극히 주관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에반스의 사진과 같이 삶의 방식이나 사회학적인 보고서로서 일종의 사회적 비난으로 믿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의 사진이 다시 1930년대 F.S.A의 사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프랭크의 사진은 사물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반사된 음색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은 그림의 경우와는 반대로 마치 심벌즈의 한방처럼 찍는 순간 동시에 이러한 사진적 음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자동생성). 이는 곧 퍼스의 유형학적 의미로 인덱스화 된 것(indexation)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que)”이다. 오늘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유형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중요한 하나의 이론적인 모델로서 재조명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음색의 재현에 있고 또한 필립 뒤봐가 “사진과 함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사진적 결론 역시 이미지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프랭크 자신의 순수 직감 즉 생성에 관계하고 있다. 사진적 음색은 의미나 상징을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 지표를 말하는 환유로 간주된다. 거의 대부분의 프랭크 사진들은 재현된 어떤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라는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조짐을 보인다”라는 상황적 인상만 누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멕시코 286번 국도(US 286 New Mexico)”사진이나, “뉴욕가 34번지”(사진 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나타나는 도로와 선은 의미적 관점으로 볼 때 사실상 수수께끼이다. 이것들은 단지 응시자에게 황량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무엇을 상기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부재의 인덱스일 뿐이다. 또한 작가인 프랭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사진은 그가 도로를 달리다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잡은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감 ③ 에 따라 단지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사진적 행위의 “잔여물”로서 남게 된 이미지, 달리 말해 물질적 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부재이외 사실상 의미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사진, 말하자면 프랭크 사진 유형은 의미나 논리 밖에서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나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기억의 연상에 의해 환원된다. 이때 기억적 확장은 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처럼 지극히 주관적 확장을 한다. 출현과 부재가 섞여 만들어진 “분위기 혹은 인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인상이나 과장된 인상이 아닌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공통된 우리들의 단순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또한 자신의 집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험”(Henri van Lier)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기억적인 이중인화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예컨대 A라는 해변은 B라는 교회 위에 겹쳐 있고, 그 교회는 C라는 얼굴 위에 겹쳐 있고 또 그 얼굴은 ... 이러한 주관적 확장은 또한 동일한 대상 위에서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는 연상의 개인적 “경향”과 같은 맥락(인덱스의 확장)을 가진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을 자르는 결정적 순간이나 유일한 사건을 만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의 부동의 진술과 부재의 출현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재현하는 프랭크 사진에서 보여지는 탁월한 미학이다. 로버트 프랭크는 그 자신이 반 - 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 쉽게 말해 그가 미국을 주파하면서 느낀 단순한 인상들이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작크 크루악이 “주 - 박스가 장례식 관보다도 더 슬픈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듯이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사진 1)는 비어 있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직감은 바로 이러한 끝없는 신호들을 잉태한다. 또한 그 신호들의 지시대상들은 의미와 논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 (주) ①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을 “내적 형상의 재현”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진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앗제와 브레송의 사진을 잇는 두 분수령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영상사진은 거의 완전한 정신적 재현으로 현대 사진의 결정적인 방향을 세운다. ②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사실상 프랭크의 전 사진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 - 소설”인 동시에 “사진가의 생생한 체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서술화된 “스토리 사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독백으로 간주되는 “미국인”은 물론이며 영화 플로라이드 흑백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취향은 분명하다. 특히 1978년 흑백 폴로라이드 사진에서 두 장의 자신의 모습을 붙여 만든 “Selfportrait, at 55, It is like me”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랭크의 많은 사진에서 “그것은 나와 같다(It's like me)”라고 기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전혀 나르시즘과 관계가 없다. ③ 단순한 개인적 심경으로 들뢰즈의 용어로 하나의 사건(evenement) 혹은 표면 효과(les effets de surface)로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Les Americains, texte de Jack Kerouac, Delpire, Paris, 1958, reimp., 1985. Robert Frank, texte de Rudy Wurlitzer, Delpire, Paris, 1976. Robert Frank, la photographie, enfi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n 11/12, Paris, 1984. Michel Frizot, "Robert Frank, ailleurs et maintenant", Cliches n 25, 1986 pp. 48-53.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파리 1949년 (사진 4) 뉴욕가 34번지, 1949년 (사진 2) 로버트 프랭크, 캘리포니아 롱비치, 1955-1956년 (사진 3) 워크 에반스, 농장, 1931년 |
첫번째 테마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말할 때 언제나 반쪽 세상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가 방아 찧는 달의 앞면만 보고 ‘저게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달의 뒷면은 인공위성을 동원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앞면에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은 단지 상상과 추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세상에는 가시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달의 뒷면과 같이 은닉된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반대로 어떠한 사실이 일단 검증되거나 명백히 논리화(대표적으로 법과 제도)되면 그것은 일종의 수학적 공리가 되면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이러한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민간설화 혹은 기운(氣)이나 직감 그리고 운명 등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많은 설화적 지식(J.-F. Lyotard)을 감각과 징후의 맥락 속에서 믿었다. 이때의 믿음은 현상에 대한 진실 혹은 본질의 추적에 관계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맹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맹신은 누군가 파놓은 “논리”라는 거대한 함정을 말한다.
우리의 세상은 사유를 말하는, 빛에 의해 밝혀진 대상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인식계는 오히려 어둠의 세계인 음영계 (ombres)를 배경으로 세워진 극히 부분적인 세계라 볼 수 있다.1) 이와 같이 빛의 세계를 만드는 배경으로서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담론을 인식론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존재론(ontolo-gie)이라고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의 현실 즉 존재론적인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 구조에서 설명된다. 즉 음의 세계는 양의 세계, 규명된 형상(forme) 혹은 이성(raison)의 영역 주변에서 언제나 배경(fond)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존재론적 철학에서 흔히 “자연”이라는 것은 이러한 양과 음의 이중구조 전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지 이데아(Idea)에 대한 모사, 즉 신빙성을 말할 뿐이다. 단지 이 단계에서 존재하는 대상들은 동굴 밖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 동굴 내부 벽에 비쳐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가능한 대상들의 영역을 인식계라고 할 때, 인식계는 빛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포함된 대상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언제나 억견으로만 되어 있다. 왜냐면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죄인들은 동굴 밖의 눈부신 빛 때문에 자신의 이데아(참 모습)는 볼 수 없고 언제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최상 계급인 철학자의 역할을 그들에게 진정한 자신들의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이데아를 전통적으로 진리 혹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대상의 세계를 말한다.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동굴의 하부 혹은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비 인식 대상들은 단지 감각에 의해 추측되거나 감지될 뿐이며 언제나 어둠의 세계(ombres)에 있다. 사실상 이들은 동굴에 존재하는 대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에는 결코 출현하지 않으며 어떠한 뚜렷한 형상(forme)도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우리들의 의식에 하나의 징후로서 출현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자연현상까지)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단지 생성 변전 과정에서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또한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다(니체의 생기 존재론). 예를 들어 수학적 공리나 과학적 법칙 혹은 사회 현상의 많은 논리들을 동굴 입구에서 만날 때 좀 더 멀리서는 기호나 통계 또는 해석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관념적인 담론(구조주의)들을 만날 수 있다. 크게 보아 물질 중심의 담론들이 바로 이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을 촬영한다면 사진들은 과학적 분석이라는 일종의 보고서나 혹은 상호간의 약속된 코드나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술이 될 것이다.
이러한 원천적인 대상들을 우리가 가지고 들어간 카메라로 촬영한다면 사진은 우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특정한 시적 의미 혹은 푼크툼(punctu-m)이나 아우라(aura)와 같은 탈코드(sans code)의 형태로 나타난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야기되는 황당한 사건이나 엉뚱한 현상 혹은 비록 평범하고 의미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예견치 못하는 인상(impression)이나 묘한 음색(tonalite)에 대한 실체나 본질을 보여 줄 것이다. 빛의 세계에 나타난 대상이 언제나 언어와 의미를 동반하는 진술체계(구조주의)에서 이해된다고 한다면,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신호(signe)체계에서 단지 징후(특히 퍼스 Peirce의 기호론)로서만 출현한다. 대상을 존재론적 혹은 질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달리 말해 현상적 사물보다 내면적 실재를 우선으로 하는 담론(니체철학, 실존철학 또는 후기 구조주의적 담론 등)들이 여기에 관계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대상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질료에서 형상으로 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주> 1) 여기서 빛의 세계, 즉 인식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나 사건 등의 모든 관념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새해부터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사진예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중앙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이경률 박사가 열가지 테마로 열어보는 또 다른 반쪽 세상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6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사진평론가 진동선 선생의 ‘사진비평’이 63회로 끝을 맺음에 따라 이경률 박사가 독자들의 ‘사진이론’ 공부를 돕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론공부는 어렵고 딱딱하기 마련이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사진이야기를 해나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글·이경률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그림자 연극”, 벤스터 화랑, 네덜란드 로테르담,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