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테마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 우리들의 세상 혹은 현상계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동굴은 하나의 우주이고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하나의 풍선이라고 할 때 동굴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원소로 되어있는 풍선 속의 공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하나의 원소 뿐이다 : 인식의 영역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나 현상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관념적인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 B이고 B가 C이기 때문에 A는 C다”라는 수학적인 공리라든지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적으로 ... 을 의미한다”라는 보편적 사실, 혹은 보다 추상적으로 볼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러한 개념적 대상들은 논리와 일반 그리고 객관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언제나 의미와 이성의 범주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코드(진리, 상징, 슬로건 등 최소한 타자와 객관적으로 의미화된 개념 혹은 정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플라톤 동굴에서 빛에 의해 인식되는 양의 세계(인식계)를 말하는데, 이러한 범주 속에서 사진의 대상을 찾아 재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규명된 의미에 대한 일종의 진술이나 확인일 것이다. 예컨대 시골 농부의 순수한 표정에서 읽혀지는 농심,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동심, 인본주의, 자연보호, 생태계 혹은 생명력을 암시하는 대상들,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달력풍의 이미지들, 소외와 고독 그리고 자아상실과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진적 테마들은 사실상 오늘날 익히 알고 개념(code)적 현상에 대한 시각적 확인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테마들로 “앎”이라는 문화적인 지식에서 온 하나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엄밀히 말해 이러한 사진에는 언어와 같은 진술로서의 작품성(언어로서의 사진)은 있어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예술성(사진으로서 사진)은 사실상 부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공간을 이루는 또 다른 구성원소는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 인식 영역, 즉 음(蔭)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현상계에서 언제나 그 본질이나 진실이 수수께끼나 신비로 나타나면서 변화무쌍한 현상으로만 출현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징후로만 감지할 뿐이다. 마치 감기의 징후로 몸에서 열이 나듯이 여기서 본질은 객관적 의미를 갖지 않는 불확실한 “그 무엇”(감기와 같은 원인성)을 말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존재적 대상)이다. 예컨대 보험금을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건, 고층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여중학생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보이는 차갑고 괴물 같은 인상, 젊은이들의 엽기열풍,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서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애착감 등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순되고 황당한 경우나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건이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직감이나 갑작스런 충동 등은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징후적인 현상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언제나 논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고 어떤 공통된 특징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이고 미스테리한 지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대상이 언제까지나 음의 영역에서 수수께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능력의 확장에 따라 그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현재의 절대적 가치로 규명해 놓은 진리 역시 시간과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변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들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물 즉 현상을 본질로 보는 물질중심적 담론과는 달리, 단지 현상을 일종의 징후로 보고 그 원인이나 실체를 추적하는 본질규명학을 현상학(La phenomenologie)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예술론으로 볼 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언제나 징후로부터 그 본질을 재현하는 고독한 작업의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예술적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현상학적 추적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오늘날 이러한 추적의 중요한 예술적 매체로 간주되고 이때 사진을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하고, 또한 그 재현을 “음영의 재현(La representation des omb-res)”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음, 애수, 불안, 허무, 음색, 인상, 부조리 등 형이상학적 대상이며 그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추적은 사실상 현상학적인 방법을 동반하고 있다. 흔히 이러한 방법론은 장님과 코끼리의 이야기로 설명되는데, 음의 대상들은 빛(우리의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능력) 혹은 예술가의 의식을 대상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비유하고 또한 본질을 코끼리로 비유한다.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장님은 자신의 지팡이(즉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 궁극적으로 카메라의 역할)를 이용하는데, 지팡이가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실체의 부분적 사실들, 즉 징후로서 출현하는 현상들일 뿐이다. 방법적으로 볼 때, 이는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파악하는 일종의 추론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예컨대 장님이 감지하는 코끼리 다리는 굵은 고목나무로, 긴 코는 고무호스로, 꼬리는 굵은 밧줄로 이해될 것이며 또한 몸통은 거대한 고무풍선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모든 현상계의 징후들로부터 추리적 방법으로 파악된 사실은 적어도 코끼리와 유사한 감각적 실체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실체는 결코 언어나 어떤 객관적 의미로 규명할 수 없는 실체이고 단지 색, 선, 점 등 감각적 표현(회화의 경우)에 의해서만 암시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말한다. 그러나 본질의 정확한 규명은 마치 여명의 지평선 밑에 숨겨진 영원히 뜨지 않는 태양처럼(메를로 퐁티의 “지평선적 시각계의 개념”)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때 본질은 지평선 위에 감지되는 수많은 여명의 신호들(“생성의 신호들” Les signes de genese)에 의해 암시될 뿐이다. 그때 본질의 재현은 현상계에서 본질의 부분적 징후를 반사하는 일종의 거울(작가의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사실상 그 시각적 재현은 단지 본질의 닮음꼴 혹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만 나타난다. 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불가능한 닮음”이나 폴 클레의 “시간의 그래픽적 재현”은 이러한 본질의 재현에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현상계에 출현하는 현상들은 단지 징후에 불과하며 예술가가 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바로 이러한 징후로서 나타나는 비논리적인 “현상의 외관”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현은 우리를 둘러 싼 수많은 신호들로부터 단지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논리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구체적인 진술이나 규명(구조주의)에 의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말은 달리 말해 “객관 타당한 코드 혹은 약속”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약속된 의미는 예컨대 장님들(작가들)이 지팡이로 느끼는 감각의 실체들이 코끼리와 비슷한 실체들 혹은 전혀 다른 실체들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하나의 공통분모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정확히 똑같은 붕어빵을 만들기 위해 만든 붕어 모양의 틀(형상 : forme/fo-rm)과 같이 논리적으로 객관 타당하다고 인식된 “앎(connaissance/knowledge)”을 말하고 있다. 인식론자들 쉽게 말해 의미론자들(특히 형상론자들)은 바로 이렇게 규명된 수많은 형상들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단지 틀에 의해 찍혀져 나온 붕어빵 같은 현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는 수많은 틀과 또 그 틀들에 의해 다변화된 모습(figure)들을 가진 무한한 현상들로 가득찼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의 똑같은 틀에 의해 찍혀 나왔다고 인식되는 많은 붕어빵들조차도 그 하나하나는 역시 각자 다른 모습을 갖는다. 이때 각자 다른 모양의 붕어빵들은 하나의 의미화된 틀, 즉 정형화된 붕어빵을 만들게 하는 배경(fond)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 혹은 위대한 사진작가가 재현하는 예술적 생산물은 결코 획일적인 붕어빵이 아닐 것이며, 진정한 비평가는 작가의 감각적 생산물을 하나의 틀(말하자면 의미의 틀)에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모든 대상은 언제나 생성에서 변전으로의 동태적 의미를 가질 뿐이며, 외관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언제나 변전의 과정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의 발견은 흔히 진리나 정태적 의미(code)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사유 한계를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이러한 발견은 징후의 포착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을 추적하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이 함축하는 의미(connotation)로부터 분석된 해설이나 혹은 그 의미의 틀로부터 포착된 사진적 재현은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대로 찍혀 나오는 붕어빵 논리에 가깝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미 의미화 되어 있는 현상이나 일반적 사실의 틀로부터 재현된 사진의 주제,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 생태계의 파괴나 퇴색된 인간미의 고발, 강인한 생명력과 대자연의 예찬등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암암리에 약속된 일종의 의미적 코드(판박이의 정의)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studium)를 재현한 사진은 근본적으로 감각이 아닌 우리들의 문화적 앎에서부터 출발된 사진적 재현이고, 비록 의미의 진술을 위해 형식상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작품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상 진정한 창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이미 코끼리와 같은 실체가 밝혀진 인지 대상 혹은 장님이 아닌 정상인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논리적 확인이나 보고서로 간주 될 수 있다. 사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재현 대상은 시각적인 이상함과 특이함인데 예컨대 우리는 사진에서 언제나 정상적인 모양새보다 정상적이지 않는 모양이나 조형적 형태, 혹은 엉뚱한 대상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같은 방법으로 생각해 볼 때, 의미의 벽을 넘는 첫 단계 역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다. 사실상 우리는 의미가 부여된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서도 정상보다도 비정상적인 논리에 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 진정한 사진가의 예술적 재현은 일반적인 의미-코드로 쉽게 설명되어지지 않으며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정상적인 논리의 뒷면에 있다. 이때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denotation)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 될 뿐이다. 사진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림과 같은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 진정한 예술사진은 의미 이전에 징후(결과적인 흔적)를 재현하면서 그 본질(본원적 원인이나 동기)을 추적하는데, 이때 본질은 이미 정형화된 의미가 아닌, 의미의 영역 밖의 의미를 갖는다. 카메라는 장님의 지팡이가 되며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다. 프랑스의 사진 비평가 질 모라(Gilles Mora)는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지팡이 사진(도판 1)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감각의 논리”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사진을 한마디로 “반 - 의미적” 사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이나 초월 혹은 과잉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객관적 의미가 아닌 비논리적인 주관적 의미(sans code, signifiance, punctum, obtus 등)에 보다 가깝다. 그와 같이 음영 세계의 대상들은 의미의 생성과 과잉을 동시에 가지면서 진정한 창조의 대상 ③ 이 된다. 그래서 단순히 의미론적 시각으로 읽는다면 깁슨의 사진들은 적어도 내용상으로 우리를 혼동시키는 하나의 암호나 수수께끼로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시(예술사진)를 잡지기사(다큐멘터리 사진)를 읽을 때처럼 단어 하나 하나가 진술하는 논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왜냐면 그의 사진은 공통적으로 더 이상 서술이나 상징과 같은 이미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무의미 즉 시적 언어인 “생성적 의미”만을 갖기 때문이다. 이때 생성이라는 것은 의미로의 진화과정에서 시원적인 출발점, 혹은 싹을 말하는 것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들의 의식으로부터 망각된 대상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카메라로 재현하는 것은 단지 지팡이로부터 전해오는 감각의 재현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 영역 밖에서 비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코끼리라는 본질적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와 같이 사진의 진정한 창조는 더 이상 확실한 의미의 진술이 아닌 불확실한 감각의 재현, 즉 “망각된 존재의 추적”(Martin Heid-egger)에 있다. ● 주) ① 이러한 비유는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L'oeil et l'esprit)”과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Le visible et l'invisible)”에서 차용된 개념적 설명이다. 궁극적으로 안 보이는 세계는 음의 세계를 말하며 본질의 실재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시각계에서 보이는(인식되는) 대상들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외관들만 가지며 그 본질들은 외관에 항상 은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 가지들에 의해 나무의 동체가 추리되듯이 본질의 추적은 우리들의 감각계(특히 시각계)에서 출현하는 색, 점, 선과 같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적 재현은 이때 대상의 본질을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나무 가지 혹은 거울(index)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②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함축적인 의미(connotation)를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의 징후(index)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진을 언어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은 사진이 내포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징후로서의 사실주의가 나타나는데 이는 사진을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징후 혹은 자국으로 보는 견해이기도 하다 (차후의 테마, 사진 인덱스론 참조). ③ 여기서 창조의 의미는 의식에 내재된 존재적인 실체의 발견을 말하며, 다시 출현하게 한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재현(representation)”은 이러한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말한다. 그래서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곧 이미 존재하는 (음의)실체에 대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샌프란시스코” 시리즈, 1960 - 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