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테마 공유된 주관성과 감각의 뇌관
 
소위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자신의 순수한 주관적 메시지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편적 앎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된 객관 타당한 코드에 관계하거나 혹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순수한 감각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슬그머니 이미 공론화된 이슈나 의미화된 논리적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이 객관적이라는 것과 주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구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 타당성에 대한 논리적 사고로부터 온 일종의 착각이다. 엄밀히 말해 어떤 사실이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다, 혹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다 라는 것은 집단사회의 획일적인 사고로부터 강요된 편견적인 인식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나 혹은 타인이 생각하는 것을 어떤 특정한 기준이나 규정에 의해 일종의 흑백논리 방식으로 객관과 주관을 구별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형성된 보편적인 앎(지식)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를 쉽게 판단하고 있다.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도 흔히 이러한 원칙에 의해 작가는 스스로 논리적 이유를 세우면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객관적인가 혹은 주관적인가를 판단한다. 소위 예술적 표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자신의 순수한 주관적 메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편적 앎의 테두리 안에서 출발된 객관 타당한 코드에 관계하거나 혹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순수한 감각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슬그머니 이미 공론화된 이슈나 의미화된 논리적 옷을 입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작가는 자신의 지극히 주관적인 메시지가 일반적 경향을 갖는 대중과 완전히 유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보편 타당한 논리를 요구하는 대중과의 관계에서 관객의 최소한의 공론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작가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표현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적인 사고(인식론)를 가지는데, 사실상 많은 작가들은 그들의 창작적 출발점을 이러한 대중과의 공론을 위해 자신들의 경험이 아닌 외부로부터 형성된 앎의 체계에 의존하기도 한다. 특히 시각적 표현에 있어 단지 복사적 진술만을 허락하는 사진의 경우 이러한 두려움과 스스로의 강요는 더욱 더 분명하다. 이는 예술적 행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가 의식에 관계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객관이라는 개념은 대중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사실, 다시 말해 자신을 중심으로 볼 때 외부 즉 집단이 보편적으로 규정해 놓은 인식론적 사실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타인과 교감할 수 없는 비논리적이고 개인적인 사고의 총체를 주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객관과 주관은 관점에 따라 서로 상대적이고, 존재론적 측면에서 볼 때 “생성-진화(devenir-forme)”적인 관계에서 이해된다. 쉽게 말해 이러한 두 영역의 분명한 구별은 사실상 모호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병리학적인 콤플렉스나 혐오 혹은 지나친 편견 등의 극단적인 주관성과 학문적인 관점에서 통용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객관성의 구별은 분명 반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성은 이러한 구별에 필연적인 걸림돌이 된다. 객관과 주관에 대한 개념상의 모호성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한편으로 볼 때, 집단 사회에서 규정해 놓은 객관성은 사실상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 편견적인 객관성이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는 인디언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발견자가 아니라 침략자일 수 있듯이 또한 종교적 이슈를 같이 하는 교회공동체에서 그들의 정당한 행위와 공통된 사고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관적 사고로 볼 수 있듯이 한 집단 밖의 다른 집단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정당성과 객관성은 일종의 집단 이기주의의 묵인된 객관성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모두에게 감각적으로 인정되는 공통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소 보편적 측면을 갖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집단의 안정과 이익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확신(특히 집단의 감시와 통제)을 위해 그러한 사실들이 객관 타당한 의미로 인정되지 못하는 경우(불관용)1)들이 있는데 이는 그들의 논리적 측면에서 볼 때 주관적인 사고로 간주된다. 그럴 경우 그것은 말하자면 공통된 사견 즉 공유된 주관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볼 때, 객관과 주관에 대한 획일적 판단의 맹신은 그들의 개념에 대하여 불변하는 어떤 정태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소위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객관적 규정은 “무엇은 무엇인 것 같다” 혹은 “무엇은 무엇처럼 보인다”라는 주관적 감각(figure)에서 진화된 형상(form)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규정된 “무엇인 사실”을 절대적 객관으로 착각하고 있다.
 
 또한 징후의 형태로 현실에 직접 출현하는 존재적인 그 무엇(figure 내재적 형상 혹은 안 보이는 세계의 실존)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하나의 감각적 실체로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주관적 사고의 비 구체화된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성은 아직 형상으로 공인되지 않았지만 이미 객관성의 가능태(態)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지금 현재 태양은 불변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화 과정에서 변전하는 모습이다 : 태양은 그 생성 단계인 우주의 빅뱅에 의해 탄생한 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 젊은 항성으로 존재하지만 그 진화 과정에서 최후의 항성인 백색 왜성을 거쳐 결국 소멸의 단계를 가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싼 많은 시물라크르의 지표들(fiure의 주관적 출현) 역시 생성의 단계에서 막 출발되어 각기 다른 형상들(객관)로 진화하는 과도기적인 존재들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각자 개인의 주관적 감각 속에서 출현하는 지표들은 진화적인 관점에서 사실상 잠정적인 객관인 셈이다. 작가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 감지된 많은 주관적인 감각들은 간혹 전혀 문화적 코드가 다른 것을 배경으로 하는 특별한 경우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거의 똑 같은 일상 생활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감각들은 이미 공유되고 인정된 주관성들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관객과 교차되는 경험에 관계하고 그때 사진은 우리 모두의 경험적인 혹은 상황적인 전달체로서 그 메시지는 대중의 객관성 그 바로 밑 문턱에 있는 셈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의 출현은 이미 알고 있듯이 절대적인 과거 사실을 말하는 시각적인 출현(analogon 외시)과 그 출현이 함축하는 의미적인 출현(signification 내시 혹은 공시)의 서로 다른 두 요소의 조합체로 나타난다. 그리고 후자의 출현은 다시 코드화된 앎을 배경으로 하는 의미 체계와 사진이 외시하는 것으로부터 직접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탈 코드의 무의미 체계로 나누어진다. 결국 사진은 퍼스의 신호체계와 같이 절대적 복사를 말하는 도상(icon)과 의미 체계를 우선으로 하는 상징(symbol) 그리고 원인성에 의한 지표(index 징후)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사진은 대상과의 절대적 닮음 이외에도 상징과 징후의 또 다른 메시지들을 가지는데 특히 징후로서의 물리적 자국을 말하는 지표 혹은 인덱스는 그림이 가질 수 없는 사진만이 가지는 특별한 재현 체계(자동 생성 혹은 사진적인 것)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마치 삼중으로 된 샌드위치처럼 단지 관점의 변화에 따른 사진의 이해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사진 그 자체의 분류 기준은 아니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볼 때 작가의 입장에서 어떤 대상 혹은 어떤 현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고 할 때 세 가지의 유형상의 경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첫 째의 경우는 자료, 보고, 탐구, 등의 목적을 위한 대상이나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복사적 진술(도상)을 말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그림의 재현 대상(초상이나 역사그림)이 아닌 오늘날 거의 사진에 의해 독점된 재현 방식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의미와 함축의 시각적 재현(상징)으로 그 재현의 출발점이 비록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여하간 객관적으로 인정된 문화적 사회적 코드와 앎에 관계하는 경우이다.
 
흔히 이러한 경우에 사진은 하나의 언어로서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전달적 기능을 수행하며 그때 작가의 의도는 특정한 하나의 집단 소위 대중의 객관적 인식과 이데올로기 달리 말해 예술적 언어가 아니더라도 일반적 이론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외재화된 형상)에 관계한다. 예컨대 사진의 주제로서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소외를 암시하는 물질사회의 병폐들(자아상실, 저항, 차별 등)은 오늘날(21세기) 더 이상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이미 명분과 이슈 혹은 타당성을 말하는 이론적인 객관성으로 함축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주제들이 새로운 예술적 유행을 형성하면서 도덕적으로 정의로운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 그것들은 하나의 의미를 규정하는 사실적 보고나 추상적 언어에 대한 시각적인 번역으로 간주된다.
 
그럴 경우 이러한 주제들은 집단 사회에서 묵인된 보편 타당한 객관성 즉 이미 외재화된 형상임과 동시에 진부와 평범의 진화 단계로 발전하는 진행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명분과 이슈(예컨대 정체성, 페미니즘, 동성애, 주체상실 등 80년대 이후 새로운 예술적 주제들)로부터 재현된 사진은 비록 작가의 경험에 의한 재현이라고 할지라도 창작의 본원적인 의미와는 달리 대중의 객관적 인식에 대한 반복과 확인적 작업(새로운 의미의 승인과 확인)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진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진들이 표현적 측면에서 예술적 가치를 상실한 무의미한 사진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주제가 아직 의미의 옷을 입지 않은 생성(내재적 형상)의 형태로서 진정한 창작의 대상으로서 간주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작가의 의도는 엄밀히 말해 공유된 주관성이 아닌 이미 혹은 새롭게 묵인된 객관성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대상을 재현하는 세 번째의 경우는 앞서 말한 일반적인 객관성 즉 외재화된 형상이 아닌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잠정적인 의미의 가능태를 추적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산 위에 피어나는 연기나 모래 위에 낙인된 발자국과 같은 징후(index)의 포착 즉 “생성의 재현”으로 인식의 영역 주변에서 부유하는 음의 존재(음영 ombres)에 대한 추적2)을 말한다. 이러한 생성 혹은 내재적 형상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일반적으로 현상학적인 방법으로만 추적 가능할 뿐인데 그때 카메라는 감각의 지팡이 역할을 하며 또한 찍혀진 대상은 그 생성의 흔적이나 자국 이외 어떠한 객관적 의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곧 묵인된 객관성이 아닌 인정된 주관성을 말한다. “사진은 단지 암시적 출현을 그 목적으로 하고 모든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생의 고뇌, 번민, 욕망 등의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을 함축한다”라고 뒤안 마이클스(Duane Michals)가 사진을 새로 정의하듯이(사진1) 의미의 생성으로서 내재적 형상(figure / forme immanente)이라는 것은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되고 추상화된 형태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잠정적이고, 예언적이고, 주관적이고, 정신적이고 상상적인 무형의 형상”3)을 말한다. 그림의 경우 이러한 무형의 형상들은 작가 자신의 직감과 감각에 의해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의 경우는 대상의 복사적 진술에 의한 징후 즉 생성의 누설(자동생성)로만 허락될 뿐이다. 사진은 “의미 이전에 인덱스”4)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객관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누설5)을 말한다.

  그래서 작가들의 진정한 사진적 재현 대상은 외부로부터 형성된 자신의 앎과 지적 체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한 내적 관찰로부터 포착된 감각(생성의 징후) 즉 지극히 주관적 인상이다. 달리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의 외관이나 장면의 재현이 아닌 자신의 측면(aspects de soim me)에 대한 시각화”6)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성은 흔히 공통된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보편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징후와 관계한다. 이러한 내재적 형상을 누설하기 위해 작가는 한 장의 사진에 가장 즉각적인 징후 말하자면 폭탄의 뇌관을 장치하는데 이러한 감각의 뇌관을 흔히 푼크툼, 아우라, 탈 코드, 시니피앵스라고 언급하고 있다.
 
혹은 뒤안 마이클스 사진의 경우처럼 여러 장의 사진을 이용하는 시퀀스적 영화 방식을 동원하여 마치 연극이 끝난 뒤 관객이 가지는 감각의 여운과 같이 관객의 사고 순환 후 생기는 잔여 감정 즉 “사고-감정(pensee-emotion)”7)을 유발시키는 감각적 뇌관을 장치하기도 한다. 결국 이와 같이 장치된 사진은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교차된 경험”8)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그때 사진은 관객에게 “유일한 이미지, 유일한 도덕 혹은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고유의 관점이나 경험에 따라 번역되는 상황의 연속으로 이해된다”9). 그것은 집단사회에서 획일적인 의미로 묵인된 객관성이 아니라 공유된 감각의 주관성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사진은 명분과 이슈로 무장된 열 장의 사진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 심연에서 잊혀진 애수와 회한을 깨우는 단 한 장의 주관적 사진이다. ●
 
<주>
1) 헨드릭 빌렘 반 룬/김희숙 정보라 옮김, 톨레랑스 책 참조

2) 창작의 의미는 결국 절대자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미지의 검은 배경에서 작가 고유의 감각에 의해 은닉된 존재를 발굴하는 것이다.

3) Henri Van Lier, Histoir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83.

4) Philippe Dubois, L'act photographique, Natan, Paris, 1990.

5) 흔히 사진을 인덱스로 간주한다는 것은 결국 창작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인 무엇을 재현한다는 것으로 이는 논리와 명분의 객관성을 중요시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없다. 20세기 후반 퍼스 이론은 사진이론에  새로운 관점(지표)을 형성하도록 한 중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소위 "형이상학의 재발견"이라는 후기 구조주의 이론을 위한 하나의 설명적인 모델일 뿐이다. 그래서 사진 인덱스에서 사실상 인덱스 그 자체의 논리적인 이론(대부분의 인식론자들의 관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논리와 의미를 초월하는 형이상학적인 현상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중요하다.

6) Macro Livin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1998, Paris.

7) Michel Foucault, "Pensee-Emotion", Duane Michals, Paris Adiovisuel, Paris, 1982, p. 6, 유사한 용어로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여섯 번째 테마 주9 참조)

8) 같은 책

9) Macro Livinstone,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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