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혹은 육교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초라하고 측은한 모습들 특히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불구를 강조하며 구걸하는 소위 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반 폭력적인 행위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에 관해 우선 부정적이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 혹은 부속적인 걸림돌로 간주되며 결국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부등호의 원칙이 성립하는데 오랫동안 이러한 원칙에서 소위 가진자의 “동정”이라는 우월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라 함은 예컨대 구걸하는 맹인에게 동전을 적선한다든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과 같은 선의적인 제스처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소외된 자에 대한 의도적인 배려는 사실상 집단과 전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편견과 불평등의 신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행위는 거의 상징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강압적인 원칙에 복종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에는 두 가지 교묘한 지배 논리가 있다 : 하나는 “평등”이라는 집단 우선적인 개념이고 또 하나는 “정상”이라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원래 평등과 정상은 관용(똘레랑스 tolerance)① 이 아닌 불관용(앵똘레랑스 intolerance) 즉 특정한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마스크이고 계몽의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사고(합리와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국가 지배 개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그 대상이 훈련된 우리의 인식으로 의식할 수 있든 없든 여하간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서로 절대 가치의 우위를 측정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존재로 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원래 존재는 “그대로의 출현”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등을 빙자한 “민주”와 보편 타당성을 원칙으로 하는 “정상” 다시 말해 어떠한 불순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성 혹은 통일성이 강요하는 절대적 흑백 논리는 오직 집단을 위한 이성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는 사변적 폭력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물질 사회 속에서 특히 유일하게 자본주의만 부화된 한국의 물질만능의 현실에서는 오직 민주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콜롬부스는 침략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부스는 언제나 발견자 혹은 정복자(또한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가 되듯이 자신과 다른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만 인정하는 흑백 논리의 세상 그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에 대한 맹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진보는 소수를 위한 개념적 포용이지 다수를 위한 논리적 반전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자. 종교적 전도라는 명목으로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멀쩡한 외모를 가진 어느 독실한 교인의 침튀기는 설교, 오직 기존 정권의 전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야당 인사의 정치적 폭력, 북한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노동 파업과 그 연대 투쟁, 이러한 명분과 주장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식에서 마치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같이 비정상적 존재의 돌출로 간주되며 또한 사실상 거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은 단지 정상이 의도적으로 구획해 놓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진자 혹은 기득권자의 지배논리로 이해되는 동정이 아니라 또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변적 “공존”이다. 이러한 공존은 정상과 비정상, 강자와 약자, 혹은 다수와 소수의 존재론적인 일치(관용 혹은 포용)를 말하고 있다 : 예컨대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듯이 정치에서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적이 되며 좌파의 관점에서 우파 역시 적이 된다. 또한 심지어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온건파나 중도파의 노선은 오히려 억압되고 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인데 후설은 “우리는 언제나 중성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의 상황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누설하는 은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존” 혹은 “관용”에 있다. 그녀의 많은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외시하는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은 이러한 사변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서 선별되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 그녀의 사진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표로서의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사진이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면서 또 다른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정이나 인본주의적 명분을 앞세우는 계몽적 사진은 더욱 더 아니다. 더욱이 우울증이나 강박관념과 같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성향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나 불행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녀에게 모델로서 장애인은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누락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출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지 의도적으로 또한 노골적으로 이러한 “존재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아버스의 사진들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출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예 : 사진 2). 이성에 의해 규정된 “정상”의 세계(보이는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안 보이는 세계)를 병치하면서 소위 괴물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신체 불구자, 거인과 난쟁이, 정신박약, 동성연애자, 성전환자 등 마치 생물학적 도감을 보듯이 공통적으로 뭔가 엉뚱한 괴물로 나타난다. 정면으로 출현한 이들은 장애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마치 누군가(조물주) 만들어 놓은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존재로 규정된다(사진 1, 3, 4). 이를 위해 그녀의 촬영방식(거의 50mm 표준 렌즈 / 초기에는 소형 카메라, 60년부터 6 x 6 필름을 사용)은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단순한 방식을 하고 있고 또한 그 구성에서도 대칭성과 정면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방법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시에 대조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그녀가 포착한 것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음의 존재들(ombres)이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이고 산발적(소수)이고 또한 징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주 밖의 괴물, 기형, 히피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 즉 프리크(freaks)들로만 나타난다. 원래 어원학적으로 프릭크는 알려지지 않은, 불명의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을 지칭하고 그들은 본원적으로 ‘이상한 혹은 엉뚱한 것(oddity)’ 즉 부등의, 부조화의, 기수의, 짝이 맞지 않는, 비스듬한, 삐딱한, 만사가 신통치 않은 불완전한, 부족한 등 공통적으로 어떤 비정상(imparite)에 관계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조물주의 동등한 작품으로 원래 정상적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획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어 ‘비정상’으로 치부된 것들이다.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 가령 모두가 왼손잡이인 집단에서 오른손잡이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기형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또한 키 작은 난쟁이 집단에서 키 큰 사람 역시 기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에서 이성의 결혼은 물론 금지될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은 단지 한 집단이 선별적으로 규정한 편견에 의한 것이다.”② 그래서 아버스의 인물들은 단순한 장애인의 유형학적 진술이 아니라 소외된 존재의 누설로 간주된다. 역설적 방법으로 매조키즘(피학대 음란증)적인 비관주의적 시각에서 세상의 ‘추함’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것은 일종의 불행의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별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활용한 과도한 플래쉬는 모델을 더욱 더 경직스럽고 인위적이고 순진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낮보다 밤에 오히려 더 많은 기형(oddity)를 생산한다는 유태인의 사고에서 온 논리이기도 하다. 1971년 여름 그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신경안정제인 바르비투스산제를 먹고 동맥을 끊고 자살하기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보이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산보 중인 사람들을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별한 시각은 사회학적 관점 이전에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아버스의 사진은 정상적인 우리들의 이성의 눈(코드)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응시자의 눈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시각의 개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형인, 늙은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비정상인은 사실상 정상인과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집단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보편적 기준에서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로서 나타난 그들의 출현은 열등한 종족의 괴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추어진 우리의 ‘이중적인 얼굴’임(Norbert Bernard)과 동시에 오랫동안 망각된 존재의 진실 즉 우리 모두의 ‘증세와 기념비’(Henri Van Lier)가 된다.”③ 근본적으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집단 사회(특히 물질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패션사진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빈부차이나 물질 만능사회에 대한 체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을 대표로 하는 집단사회가 통일된 지향성을 위해 규정해 놓은 미(넓은 의미에서)적 가치에 대한 편파적 기준이다 : 오랫동안 우리는 이성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불행, 비극, 추함 혹은 소외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인간조건의 이상적인 조화와 긍정적인 시각에 익숙하여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우상이나 모델을 위한 강압적인 규범으로 사실상 반쪽 세상의 불관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행의 신호로 간주되는 비 정상인을 모델로 하여 그녀가 생물학적 관상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추함과 불행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억압된 존재의 폭로로 볼 수 있다.”④ 그것들은 이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시뮬라크르임과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 <주요 참고 도서>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김희숙 정보라 옮김, 똘레랑스, 길, 2000. (참고 : 임지현 평, 동아일보) Doon Arbus, Diane Arbus, Aperture, New York, 1972. Regis Durand, La part de l'ombre, Essais sur l'experience photographique, La Diffrence, Paris, 1990.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La photographie comme destruction, Universite de Provence, Arles, 1993. Diane Arbus Sans Titre, Aperture/Edition de La Martiniere, New York/Paris, 1995. Diane Arbus, Photoraphe de presse, Aperture/Herscher, New York/Paris, 1984. 주) ①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경률,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비평, 2001년 가을호, 타임스페이스, 서울. ② 같은 책. ③ 같은 책. ④ 다시 말해 그들의 흑백논리에서 이러한 소외된 존재들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물질과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양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대상들을 정상이라 규정하고 역으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의 비정상적인 대상들을 괴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편견적 사고를 불관용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용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을 인정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공존 즉 존재의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전자의 시각을 통일된 하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존재의 획일성”에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discontinuite)”이라고 하며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세계를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한다는 의미에서 “연속(continuit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르주 바타이유)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도 한다(마르틴 하이데그). (집단사회가 강요한 미적 추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추의 예찬”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복개(couvering)”작업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호텔 방에서 타올을 덮은 멕시코인, 1970 (사진 2) 뉴욕 브루클린 젊은 가족의 일요일 나들이, 1966 (사진 3) 뉴욕 100번지 거실의 러시아 난쟁이들, 1963 (사진 4) 뉴욕 20번지 집에서 파마를 한 젊은이, 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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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8.30 다이안 아버스 : 망각된 존재의 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