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콘'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9.18 포토그램과 사진의 모더니즘
  2. 2011.09.12 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사진잡지「다스 도이츠 리히트빌트 Das Deutsche Lichtbild」의 1927년 창간호에는 랭거-파츠의 에세이 <목적>과 라즐로 모홀리-나기의 에세이 <전례 없는 사진>이 동시에 실렸다. 18세기 중반에 출간된 레싱(Lessing)의 『라오콘(Laocoon)』이 설파한 장르의 독자성, 매체의 특수성의 구현이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내용이라면, 타 매체와 구분되는 사진의 독자성, 사진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을 주장하는 이 두 글은 사진의 모더니즘을 통보하는 글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특히 모홀리-나기의 글은 사진에 있어서 모더니즘과 1920년대 유럽을 풍미한 아방가르드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글로 보인다. 레싱의 모더니즘 미학을 자신의 사진적 실험을 정당화하는 묵시적 근거로 삼으면서, 사진을 현재와 다가올 시대의 주역 매체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 글의 말미를 제외한 전 부분을 읽어보기로 하자.
  사진이 가야 할 길과 목표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모든 글들과 논의는 그릇된 자취를 좇아왔다. 되풀이해서 사진이 접근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지적된 문제는 미술과 사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현실을 기록하는 한 방법으로 분류되느냐, 과학적 탐구의 한 매체로 분류되느냐, 혹은 사라지는 사건들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여겨지느냐, 복제를 위한 기본 프로세스로 여겨지느냐 혹은 “예술”로 분류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증대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특성들 중 단 하나를 예로 든다면,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이다. 거기에는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사진의 주제는 무한히 더 많은 것을 연루시킨다. 오늘날 사진 작업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로부터 비롯되는 종합적인 사진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정확한, 때로는 부정확한 사진 언어를 발전시킨 후에야 진정으로 재능 있는 사진가가 사진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리라!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우리는 허황된 과장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 달성되면 사진에 대해 모두가 훌륭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그러한 탐구는 대개는 분리된 방식이지만 이미 진행 중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이다.
  여전히 연구돼야 할 영역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진적 실천의 새로운 요소들에 맞춰 수립될 수 있다.

1.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
2.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해 정상적인 광경에 익숙한 관계를 바꾸거나 그것들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왜곡시키기. (오목, 볼록 거울 혹은 요술거울을 사용하는 촬영 등등은 제1 단계들이다.) 이러한 촬영은 기계적 상상력이라는 모순된 말을 야기한다.
3. 한 장의 원판 위에 대상을 완전히 커버하는 이미지 ( 스테레오 사진의 발전된 양상).
4. 새로운 종류의 카메라 설계. 원근법의 단축효과의 회피.
5. 사진의 사용에 반원근법적이며 물체를 투과하는 X-레이 사진의 적용.
6. 감광면 위에 빛을 투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사진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진들.
7. 색에도 진정으로 감광되는 사진
 
 이러한 모든 요소들과 최대한 상호관련을 맺으며 종합하는 작업만이 진정한 사진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사진의 발전은 여러 곳에서 이미 고도로 계발된 새로운 빛의 문화로부터 강력한 동력을 얻고 있다.
  금세기는 빛의 세기이다. 사진은 빛의 전환된 형태로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거의 추상적 형태로나마 빛을 촉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제1의 수단이다.
  영화는 더 멀리 간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영화에서 정점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각경험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의 개발은 영화를 통해 보다 더 훌륭하게 성취되었다.
  그러나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다. 이렇게 하여 스승이 학생에게서 교시를 받는 특별한 상호관계가 수립된다. 이 둘은 상호 공동 연구소이다. 사진은 영화를 위한 탐구영역으로서 기능하며,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사진은 전례가 없는 이미지
 
인용한 글은 내용상 세 문단으로 나뉜다. 첫 문단은 사진적 재현의 특수성,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 문단은 ‘전례 없는 이미지’의 생산을 위한 여러 제안들을 열거하며, 셋째 문단은 사진이 ‘빛의 세기’의 제1의 기초를 이루는 재현 매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모더니즘은 분명 레싱의 미학론에서 자양분을 길러내고 있었다. 후자의 『라오콘』에 따르면, 시와 회화는 분명한 경계와 자기 영역을 지니고 있다. 시는 언어의 선조성(linearity) -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발화되는 언어의 특성을 말한다 -에 종속된 매체이므로 시간에 따른 행동과 상태의 변화 양상을 기술할 수 있다. 반면, 회화는 재현양상을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계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체를 동시적으로 (simultaneously) 보여주는 평면예술인 까닭에, 재현 대상의 변모 양상을 시간에 의거하여 묘사할 수 없다. 회화는 특정 순간의 동작, 상태만을 묘사할 수밖에 없는 재현의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서구를 지배한 매너리즘 미학이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 다시 말해 “회화는 말을 하지 않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회화”라는 슬로건은 매체의 특성, 순수성을 무시한 미학 강령이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따르면, 시는 회화처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야 하며, 회화는 시로 대표되는 문학의 소재를 이야기서술(narration)의 원칙에 의거하여 묘사하여야 한다.
  레싱은 이러한 매너리즘 미학의 매체 특성의 혼용을 시와 회화의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시에 내재된 기호학적 특성에 의거하여 생산될 때만 가장 시적일 수 있으며, 회화는 회화에 본질적인 기호양상에 충실할  때 가장 회화적일 수 있다.
  모홀리-나기가 글의 시작을 “이전에 알려진 시각매체들은 사진 프로세스의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다”라고 단언하고, “빛의 현상을 포착하는 빛과 어둠의 미세한 계조 영역”을 사진만이 갖는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진이 이전의 여하한 시각 재현매체와는 다른, 새로운 재현특성을 지닌 시각매체임을 고지하고자 하는 의도의 발현이다. 레싱에 충실한 모홀리-나기의 모더니즘에 따르면, “사진은 사진만의 가능성에 의지할 때”, 즉 사진의 재현적 특징에 전념할 때, “어떠한 전례도 갖지 않는” “사진의 결과 역시 전례 없는 것이 된다”. 사진적 본성에 충실할 때, 어떤 촉각적인 ‘물질성’을 드러내는 데생, 회화, 조각과는 달리, 사진은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가시화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작업을 행할 때만이, 그의 말을 다시 빌면, 사진이 아닌, “어떠한 전통적 재현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 될 때만이, 사진도 레싱의 모더니즘에 부합하는 ‘예술’이 될 수 있다. 첫 문단의 말미를 장식하는 흥분된 어조는 레싱의 모더니즘을 전도하는 자의 설교에 다름 아니다. “사진은 이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옛 회화든, 오늘날의 회화든 사진이 행할 수 있는 독특한 효과와 견줄 수 없다. 왜 “회화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가? 왜 렘브란트 혹은 피카소를 모방하는가?”
  모홀리-나기는 이어 “순수하게 사진적인 방법들”에 의거하여 “거의 비물질적인 것의 발산처럼 보이는 것”을 생산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종류의 시각적 힘을 수립”하는 사진적 ‘실험들’을 열거하는 바, 그것들은 1910년대 후반 이후 기존의 시각 재현양상, 재현 이데올로기를 거부, 전복하고, 새로운 시각질서를 구축하고자 한 유럽의 아방가르드들이 사진을 통해 성취한 성과들이다. 1번의 경우, 다시 말해 “사진기를 대각선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위치시킴으로써 만들어지는 낯선 광경들”은 모홀리-나기의 청년기를 인도했던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가 부르주아적이고, 귀족적인  미술 아카데미즘이 선호한 원근법과 조화, 균형, 통일이라는 구성원칙을 전복하기 위해 개발한 파격적인 사진 구도들이다. 2번의 “여러 다양한 렌즈들의 실험”을 통한 왜곡상은 1920년대 후반, 모홀리-나기와 마찬가지로 헝가리 출신이면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의 누드 시리즈에 의해 예술적 성과를 이룩한 사진적 재현양상이다. 3번은 분명 초광각 렌즈, 혹은 어안렌즈의 이미지의 양상이며, 4번과 5번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각 재현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원근법과 이것의 파생양상인 단축효과를 내재화한 일반 사진기의 암상자(camera obscura)를 파기하여, 사진을 통해 ‘전례 없는 이미지’를 얻으려는 시도의 표현이다. 6번은 1920년대 아방 가르드 사진의 표상인 포토그램이다. 이것은 원근법에 의거하여 외부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기의 매개 없이 이루어지는 빛의 이미지이다. 감광판이나 감광지 위에 사물들을 직접 올려놓고 빛을 쏘이면 사물의 투명도에 따라 음과 양의 그림자를 남기는 포토그램은 1919년 경 화가인 크리스티앙 샤드(Christian Schad)와 1921년 경 만 레이(Man Ray)가 즐겨 행했던 빛의 이미지로 모홀리-나기와 더불어 ‘포토그램’이란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샤드와 친했던 다다이즘의 수장인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샤드를 포토그램의 발명자로 여기고 ‘샤도그래피’라 불렀고, 만 레이는 스스로를 발명자로 자청, ‘레이요그램’이라 불렀지만, 이것은 결코 그들의 발명이 아니었다. 1910년대 이미 여러 사진잡지들은 포토그램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사진을 발명한 탈보트 역시 많은 양의 식물 포토그램을 남겼다. 모홀리-나기가 포토그램을 선호한 것은 이것이 “사진 자체로 세운 목표들”이라고 그가 규정한 양태, 즉 “빛과 어둠, 즉 밝은 빛의 능동성, 어둠의 수동성의 의식적 활용, 양화상과 음화상 관계의 도치, 보다 강한 콘트라스트의 도입, 다양한 재료의 질감과 모양새, 짜임새의 사용, 알려지지 않은 형태들의 재현 등”을 포괄하는 까닭이었다.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매체는
사진과 영화
 
그의 포토그램에 관한 애착은 유별난 것이었다. 1929년에 발표된 <포토그램과 인접 기술>에 따르면, “빛의 직접적 형상화”인 포토그램은 “미래의 시각적 창조의 관건”이며, “빛을 물질적이고, 조잡하게 형상화하고, 빛을 간접적으로 물질화하는 옛 사진을 폐기한다”. 그는 ‘옛 사진’ 다시 말해, 사진기에 내재된 원근법에 의거하여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을 “현실모사에만 헌신하는 평이하고, 빈약한 사진”으로 규정했고, 포토그램을 “사진작업의 본질인 빛의 글쓰기, 빛의 데생의 구사”로 여겼다. 그리고 사진기의 매개 없이 빛을 직접적으로 투사하여 생겨나는 포토그램을 그가 ‘빛의 세기’라고 규정한 시대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이미지로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보기에 ‘빛의 세기’를 주도하는 시각 매체는 사진과 영화였다. 빛을 고정시키며, 빛을 형상화하는 사진과 빛의 형상을 투사하여 빛의 움직임을 창출하는 영화는 1923년 모홀리-나기를 바우하우스에 초빙하고, 1928년 모홀리-나기와 함께 자신이 설립한 바우하우스를 떠난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말을 빌면,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통합’하는 전형적 매체였다. 그에게는 과거의 여하한 시각매체의 재현방법과 단절을 꾀하는 사진과 영화만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감수성, ‘빛의 시대’의 시각경험을 수용하는 매체로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통적 현실모사의 기계적 재현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비전을 탐구하는 매체로 사용한다면, 테크놀로지에서 상상력을 길러내며, 기하학적 추상화에 몰두하는 아방가르드 미학을 선도할 수 있다고 모홀리-나기는 확신했다.
  모홀리-나기가 생각하는 사진과 영화의 관계는 상호 보조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다. “정(靜) 사진에 의해 이룩된 기초작업은 영화의 발전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영화는 사진을 부추기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한다면, 사진은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를 점하고, 영화는 상부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하부구조가 일방적으로 상부구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영화라는 상부구조 역시 사진이라는 하부구조를 자극하고, “부추긴다”. 그러나 ‘빛의 문화’ 속에서 하부구조로서의 사진의 기능과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진이라는 ‘기초작업’이 없이는 “영화는 더 멀리” 갈 수 없다. 사실, 영화는 ‘빛의 문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진 없이는 ‘빛의 문화’는 있을 수 없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을 홀대하는 에르노 칼라이의 1927년 글, <회화와 사진>에 대한 답변에서 사진을 ‘빛의 문화’의 하부구조로 설정하는 유명한 말을 했다. “오늘날 사진은 모든 분야에서 열광적으로 추구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사진에 어떠한 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문맹이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가올 시대에는 사진은 읽기, 산수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기본과목이 될 것이다. 오늘날 사진애호가들이 갖는 모든 바람들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앞으로는 누구나 배워야 하는 제2의 천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모홀리-나기의 사진에 관한 본질론은 사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사진의 정수(essence)일 수도 없으며, 또 그가 사진의 특수성, 독자성이라고 간주한 사항만이 사진의 특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그의 주장이 오늘날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사진을 기계적 복제, 복사 수단으로 여기거나 혹은 사진이미지를 회화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본 당시 예술계의 일반인식을 불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데 있다. 당시 미학의 이론의 중심에 자리잡은 레싱의 매체와 장르의 독립성, 특수성에 관한 주장을 자기의 미학적 논지로 삼으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당시의 시각문화의 주체로 승격시키려는 모홀리-나기의 정열은 사진역사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없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라즐로 모홀리-나기, <포토그램>, 1925-192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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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 개념의 축소를 위한 소고
최봉림


 

 

I. 들어가면서
아방가르드 avant-garde라는 용어는 현대 미학과 예술 비평의 영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키워드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정의와 평가는 필자들에 따라 너무나 굴곡과 편차가 심하다.  발음 속에 내재된 필자들의 억양, 그리고 의도에는 아방가르드의 외연마저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 그 진화의 양상에는 공통된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그 임의적 정의, 미학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기가 일쑤다. 필자의 미학적 취향,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것을  ‘유일무이한 진정한’ 예술로 상찬하거나, 혹은 ‘소외된 데카당스’ 예술로 비난한다. 그러나 논리적 수미일관성, 실증적 자료, 필자의 예술관의 피력을 동반한 그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는 단 하나만의 객관적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미학과 비평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다. 문제는 가치판단을 행하는 필자들이 대상으로 삼는 아방가르드의 범주 규정이 특정 운동, 인물을 일시적으로 거명한다 할지라도 이 어사의 미학적 기원과는 달리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들이 정의하는 아방가르드의 경계, 안과 밖이 너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특정 문예사조들, 특정 문예그룹들, 혹은 특정 문예운동들과는 달리, 공시적으로 그리고 통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처럼 그 전성기를 일정 시기로 국한할 수 있는 시대적 미학개념이라기 보다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도래할 초시대적 개념이면서, 산업 부르주아 사회의 성립과 낭만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생겨난 역사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관점에 따라 낭만주의, 심지어는 자연주의 혹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를 포섭할 수 광의적 미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그 정의와 적용이 임의적일 경우, 그것은 미학과 비평의 역사를 오도하거나, 근대와 현대의 예술적 상황에 대한 혼돈만을 야기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역사적 문맥, 그 어의의 역사적 변이를 고려치 않고, 단지 그것을 자신의 비평적 판단, 미학적 분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아방가르드’는 임의적 비평, 이분법적 분류를 위한 프로쿠루테스의 침대로 사용될 수 있다.

II. 상반된 아방가르드 : 모더니티 혹은 키치
아방가르드라는 어사의 의미작용을 설득력 있게 조작하면서 19세기 후반 이후의 예술적 상황을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분할, 비평하는 두 전략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자신의 미학적 주장을 아방가르드라는 광의적 용어에 투사하면서 현대 예술의 주요 양상들을 지지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들에 있어서 역사적인 동시에 초시대적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근, 현대예술에 포괄적 접근을 허용하는 용어로 기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예술의 주요 양상은 ‘아방가르드’로 정의되며, 아방가르드는 근, 현대예술의 긍정적 상황과 부정적 양상을 가르는 경계 개념이 된다. 그 경계선 이편에는 아방가르드를 통해 현대 예술의 새로운 긍정을 보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있고, 저편에는 그것을 통해 현대 미술의 불모성을 보는 장 클레르 Jean Clair (1940- )가 있다. 20세기 중반부 미국 미술비평을 주도한 전자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우리가 현재 소유하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문화를 형성하며”주1)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리 피카소 미술관장을 역임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 비평가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근대성의 우스꽝스런 희화일 뿐이다.”주2)그들은 한편으로 예리하게 설정한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통해 20세기 미술 전반을 조망하는 혜안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의적으로 규정한 아방가르드의 정의, 그 비평적 사용을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역사적, 미학적 개념의 이해에 적지 않은 혼선을 야기한다.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중요한 에세이는 「Partisan Review」의 1939년 가을 호에 실린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 그리고 동일 잡지의 1940년 7-8월 호에 실린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 Towards a Newer Laocoon>>이다. 이 둘의 글에서 미국의 평론가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을 개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학의 두 특성을 설파한다. 그 첫째는 예술을 사회로부터 분리, 격리시켜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정신 활동영역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며, 둘째는 각 예술 매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는 순수시 pure poetry, 추상 abstract 혹은 비구상 nonobjective 미술을 ‘아방가르드’로 옹호하기 위한 그린버그의 알리바이다.
그린버그는 최초의 아방가르드를, 예술사의 정설에 따라, 낭만주의에 침윤된 보헤미아 그룹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당시 부르주아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예술의 절대성과 순수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도래한 대중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부르주아의 범속성, 그들의 진보에 대한 맹신 그리고 이상을 모르는 실리적 태도에 저항하면서, 예술로의 도피,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꿨다. 부르주아 사회의 세속적 가치관과 절연된 순수한 예술, 사회적 잔재가 배제된 절대적 예술을 추구했다. “공중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아방가르드 시인 혹은 예술가는 예술을 엄격히 규정하고, 상대적이고 모순적인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논외가 되는 그런 절대의 표현으로 고양시키면서 그들 예술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가 나타나고, 그 결과 주제 혹은 내용은 역병처럼 기피의 대상이 된다.”주3)
그린버그가 말하는 아방가르드의 ‘주제 혹은 내용의 기피’는 부르주아 사회의 범속적 일상의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까닭에, 예술은 세속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정신활동의 영역이 된다. 현실의 재현을 기피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시’의 여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통 미학과 아카데믹한 예술형식의 부정을 동반한다. 현실의 재현을 지향하는 ‘모방 imitation’ 이론은 물론이고, 미술의 경우, 문학적 ‘주제 혹은 내용’을 재현하는, 다시 말해 문학성을 모방하는 미술 아카데미의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ut pictura poesis’주4) 역시 거부의 대상이 된다. 범속한 사회 현실과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추구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현실의 사실주의적 모방은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현실보다 우월한 실체적 현실의 모방과도 단절한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는, 실체적 본질 God조차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모방하지 않는다.  아방가르드는 미술과 문학의 창조 규율들과 창조 과정의 절차들 그 자체를 결국 모방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추상 abstract’ 예술의 탄생한다.”주5)             
그린버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이후 서구 회화의 질적 저하는 문학성을 재현의 모델로 삼은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에 기인한다. 회화의 본질, 순수성을 저버리고 문학을 전범으로 삼아, 이야기 historia의 재현을 모색한데서 비롯된다. 아카데미 회화라 통칭되는 이 조류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이라는 문학적 담론에 의거한 이야기 서술 narration에 전념했고, 선 원근법 linear perspective의 제도화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삼차원적 효과를 이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려는 기예들에 몰두했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문학과 조각과 같은 여타 매체의 재현효과를 모델로 삼은 아카데미 회화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라는 예술들의 혼용 confusions of arts 경향의 전형적 희생양이다. 따라서 회화 장르에 있어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현실 환영주의 효과 illusionist effects에 사로잡혀, 회화 매체의 본질과 순수성을 저버린 해묵은 아카데미즘을 극복한 일군의 화가들이 된다. 따라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의 총체적 정의는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매체의 특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여타의 예술 매체들의 방법, 수단, 절차와의 단호한 단절을 꾀하는 예술가 집단이다. 아방가르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작업하는 특정 매체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그 매체의 독자성, 순수성, 자율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물성 materiality, 작업 과정들에 전념하면서, 타 매체들의 특성에 영향 받고, 타 매체들의 속성들이 개입되는 것을 청교도적으로 금기시한다. “(...) 아방가르드 예술들은 지난 50년 동안 그들 활동 영역의 순수성과 영역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성과를 성취했으며, 그것은 전 문화사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것이다.”주6) “피카소, 브라크, 몬드리안, 미로, 브랑쿠지, 클레, 마티스, 그리고 세잔느조차 그들의 영감은 그들이 작업한 매체로부터 연유한다. 그들의 예술이 주는 흥미로운 감동은 거의 전부, 공간의 발명과 배열, 평면, 형상, 컬러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순수한 우려와 이러한 요소들에 필연적으로 연루되지 않는 여타의 것들을 배제하는데 있는 듯하다.”주7)       
<<보다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는 각 예술 매체에 고유한 특성과 순수성의 탐구를 보다 강조하는 아방가르드를 지지하는 에세이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글은 1766년에 출간된 레싱 Gotthold E. Lessing (1729-1781)의『라오콘 혹은 회화와 시의 경계들』의 현대적 후속편에 해당한다. 레싱의 글은 18세기 후반, 한편으로는 그 당시를 지배한 ‘시는 회화의 말하는 방식이며, 회화는 말없는 시의 양상’이라는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예술 상호간의 화합, 예술 매체간의 상호 혼용을 선구적으로 비판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예술 매체의 차이,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매체들에 고유한 질서와 규율 속에서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는 모더니티을 예고했다. 그러니까 그린버그의 글은 모더니티의 태동을 위한 레싱의 주장을 ‘아방가르드’의 전투적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다 새로운’ 모더니티를 위한 주장이다.
당연히 조형미술에 종사하는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는, 레싱의 주장을 본받아, “문학성과 주제를 강력히 배제하며” “여러 예술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확립하려 시도”한다.주8) 그리고 각 매체에 고유한 특성, 순수한 본질을 따른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회화의 역사는 회화 매체의 저항에 점진적으로 승복하는 역사다. 회화 매체의 저항은 주로 사실주의적 원근법 공간 (재현)을 위해 회화의 (지지체인) 평면에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 to hole through’ 노력들에 대한 회화면의 저항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승복을 행하면서 회화는 (외계 현실의) 모방과 아울러 ‘문학성’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사실주의적 모방과 상관관계를 맺는 회화와 조각의 혼용을 제거한다. (한편 조각은 돌, 금속, 나무 등과 같은 재료들을 그 특성과는 무관한 형상들로 만들려는 예술가의 노력에 그 재료들이 저항하는 양상을 강조한다.) 회화는 명암 대조법과 음영 부조법을 포기한다. 붓질 brush strokes은 대부분 붓질 그 자체를 위해 분명히 드러난다.”주9)
이제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를 간략히 정의 내려도 될 듯싶다. 그의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 자족성 속에서 각 예술 매체의 본질적 특성을 구현하는 작가 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조형예술의 경우, 매체의 순수성 속에서 추상, 비구상을 추구하는 작가들이다. 이 아방가르드들이, 그의 가치판단을 인용한다면, 예술 생산에 있어서 ‘현재의 최상 present supremacy’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린버그의 키치는 간단명료하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와 모방 이론에 침윤된 아카데미 회화, 사실주의적 모방이론을 보듬으며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을 저버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상업 예술이다. 그것들 모두는 모더니즘, 그린버그 용어로 애기한다면, 아방가르드 미학의 바로 옆에, 저편에 있으면서 아방가르드와 대립한다.
반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 표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가 키치로 규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 상동물 structural homologue이다. 그 구조적 등가성은 무엇보다도 예술 완성의 시간성에 있다. 둘 모두는 우선 현재를 부정하면서, 예술 완성의 시간을 미래로 지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

“그런데,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와 형태의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동시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의 도식, 동일한 목적론적 비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과거 신고전주의 미학을 주재했던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드라마 축을, 아방가르드는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축으로 대체했다.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아방가르드의 전범들을 보유한다 (...) 그런데 찬란한 미래가 완성될 전범들의 수탁자가 되리라는 이 사고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착상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종말론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 사회주의적 종말론은 기독교가 영원한 구원을 설정했던 지점에, 인류의 미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반 자체를 설정했던 것이다.” 주10)

서구의 아방가르드와 공산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구조적 동일성은 완성의 시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식 미술의 생산과 유통을 지배하는 구조도 등가적이다. 차이점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공식 미술로 삼는 서구의 경우, 그 지배구조가 현대 미술관들의 프로그램 전략 혹은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과 같은 대규모 미술행사들을 통해 예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 공산당의 강령을 통해 명시적으로 작용하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둘 모두 그 공식 미술을 각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존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간단히 말해,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각 사회가 요구하고 수용하는 기대지평에 순응하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규범들의 대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화가들이 서구의 화가들에 비해 ‘뒤쳐졌다고’ 말하는 것은 미학적 층위에서 무의미하며 터무니없는 애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구의 회화나 소련의 회화나 공공연하게 혹은 음험하게 제시한 전범에 눈에 보이지 않게 혹은 눈에 띄게 순응한다는 것이다. 회화는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회화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바에 복종해야만 한다.” 주11)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구조적으로 등가적인 아방가르드는, 잘 클레르에게 있어서, “인간 드라마가 배척되고, 현실이 쫓겨나고, 너무나 손쉽고 편안하며, 아울러 그 다양한 표명들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미술과 유사한 것이 되었다.”주12)  더욱이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구 미술계의 지적 조야함, 비평의 악취미, 수많은 기관장들의 교양과 취향의 결핍”에 기대는 “일찍 꺼져버리는 즐거운 예술의 거품”주13) 이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장 클레르의 아방가르드는 그린버그가 키치라 명명한 현대의 저급한 미술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 비평가에게 있어서 키치는 진정한 문화의 저급하고 공식화된 모상들을 simulacra 원재료로 사용하여 진정한 예술에 무감각한 자들의 몰취미를 부추기고 가꾸면서, 그것을 이익의 원천으로 삼기 때문이다.주14)  결국, 그린버그가 현대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켰던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장 클레르와 더불어 등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모더니티, 아방가르드/키치라는 도식을 사용했다면, 장 클레르는 아방가르드=그린버그의 키치라는 등식을 사용한 셈이 되었다.



III.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의 의미론
어떻게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예술의 모더니티와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것은 서구 현대 미술의 부정적 조류, 경향으로 통칭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용어는 그린버그에게 있어서는 쿠르베에서 피카소, 한스 아르프 Hans Arp까지 감쌀 수 있으며, 장 클레르에게 있어서는 말레비치, 마리네티, 몬드리안에서 앤디 워홀, 이브 클렝 Yves Klein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미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정시켜 놓고 검토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오늘날 예술 비평에 이르기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에 결부된 급진적이며 체제 부정적이라는 정치적 무게를 털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가의 정치 성향, 미학적 취향에 따라 아방가르드는 ‘선험적으로’ 부정적,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역사적 출현과 그 용례의 역사적 변화를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그 개념과 범주를 한정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와 관련된 미학적 해석, 비평적 논의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한 미술사학자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의 출현은 앙리 드 생-시몽 Henri de Saint-Simon 백작이 1815년에 출간한 선집,『문학과 철학 그리고 산업에 대한 견해 Opinions littéraires, philosophiques et industrielles』에서 부터이다. 산업에 의한 사회의 부흥 그리고 인간애와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열정에 불탄 이 사회주의자는 예술가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부대 avant-garde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사회에 대해 긍정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게 공리주의적 이상 사회의 도래를 위한 ‘성직자적 임무’, ‘계몽자’의 역할을 촉구했다.주15) 이러한 논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푸리에주의자인 가브리엘 데지레 라베르당 Gabriel-Désiré Laverdant의 1845년의 책,『예술의 의무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하여 De la mission de l`art et du rôle des artistes』에서 되풀이된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가장 높은 비상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표명한다. 예술은 선구자이며 계시자이다. 따라서 예술이 그 고유한 임무를 선창자에 걸맞게 완수하고, 예술가는 진정으로 전위부대 avant-garde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류의 운명은 어떠한지를 알아야만 한다 (...) 행복의 찬가와 함께, 슬프고 절망적인 시가와 함께 (...) 우리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을 거친 붓으로 폭로해야 한다.”주16)
바로 여기에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범주에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한 개념이 태동한다. 아방가르드 의미론의 기원에 위치하는 까닭에, 언제나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명백히 드러난다. 아방가르드는 이상적 미래를 위해, 아방가르드의 본래 의미인 전위부대처럼 앞장서서 길을 트는 예술가 집단이다. 미래에 도래할 이상적 사회에 열광하고, 인류의 진보를 계시하는 존재들이다. 예술을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는 전투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작가들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정의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계시하는 ‘성직자적 임무’와 인류의 운명을 선도하려는 ‘계몽가’의 의지로 무장한 예술가 진영을 고려하는 역사적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20세기 초엽, 예술의 형식과 내용의 전반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 사회 제도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심지어는 전통적 풍습, 윤리, 의식구조까지 송두리째 변혁하려 했던 두 예술운동을 알고 있다. 새로운 ‘이상적 도시’, 파시즘을 위해 광적인 선동자 역할을 담당한 이태리의 미래주의 Futurism와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엔지니어의 기능을 담당한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는 결코 성직자나 계몽 철학자의 면모는 아니었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해 소환한 아방가르드와 그 사회적, 정치적 역할에 있어서 일맥상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위한 ‘계몽가’로 주창한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은 아방가르드의 정의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시사적인 발언을 했다.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포괄하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에서주17)  회화 장르에만 국한한다면, 그들은 이상적 미래 사회에 걸 맞는 디오라마 Diorama와 파노라마 Panorama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극사실적 회화로 완벽한 현실의 환영감을 주는 새로운 무대미술 장치인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그들이 보기에 공리주의적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이미지였다. 1831년 5월 12일자「Le Globe」를 통해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 기술적 technique 관점에서 우리는 회화에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디오라마는 아직은 무척 불완전하다. 그것은 아주 최신의 발명이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 (...) 예술가들은 바로 이렇게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주18)
 새로이 도래할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발명을 촉구하는 이 발언은 아방가르드를 새로운 매체,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시도하고 탐색하는 예술가들로 규정하게끔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제언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전혀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새로움은 관객들이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커다란 무대화를 보는 색다름이었고, 후자의 새로움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높이와 길이 100m에서 120m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벽화의 새로움, 그리고 그 무대화를 위에서 아래로 관람하는 특이함이었다. 반면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의 화풍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비판한 신고전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주19)  재현의 주제 혹은 소재도 거의 전적으로 미술 아카데미즘이 애호한 역사화, 종교화의 범주에서 길어온 것이었고,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내러티브에 집착했다. 아카데미 회화를 강력한 스펙터클과 오락을 환호하는 대중사회에 걸맞게 매머드로 개작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주창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환호한 ‘새로운 회화 예술’의 전범인 디오라마가 언제, 어떻게 ‘기술적 관점에서’ 완성되는지를 알고 있다.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창시자인 작크 다게르 Jacques Daguerre는 1836년 사진이라는 광화학적 기록의 발명을 통해 ‘완전한’ 현실의 재현을 이룩하며, 어둠 속에서 조명을 통해 비춰지는 ‘불완전한 디오라마’의 착시효과는 19세기 말, 뤼미에르 Lumière 형제의 활동‘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완전한’ 무대화로 완성된다. 그런데 아방가르드 개념의 주창자들에게 ‘새로운 회화 예술’로 비쳤던 디오라마, 그리고 그것의 온전한 완성인 사진과 활동사진의 재현 모두는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원칙인 선 원근법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현실 환영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1839년에 그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이나 정지한 낱장의 사진을 움직이는 연속사진으로 발전시킨 활동사진의 현실의 모사는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한 선 원근법의 편리한 재현도구로 쓰였던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오라마, 사진, 활동사진 모두는 재현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이자 재현의 원칙인 선 원근법, 현실 환영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회화의 아방가르드 형식으로 천거한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는 ‘새로운 회화 예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갱신된 아카데미 회화, 혹은 대중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점증하는 강도로 확인되는 산만한 오락”주20) 의 원칙에 부응하는 상업적 아카데미즘에 지나지 않았다.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은 젊게 치장한 복고주의, 상업적 아카데미즘을 아방가르드 회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보들레르는 1860년대 중반에 작성한 그의 단상 초고집인『내 마음을 벌거벗고 Mon cœur mis à nu』에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아방가르드를 조롱으로 비난했다.

“군사적 메타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랑과 편애에 대하여. 이 모든 메타포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전투적인 문학
돌파 지점에 있다.
깃발을 높이 들다.
(...)
군사적 메타포들을 더 첨가하면,
투쟁 시인들.
아방가르드 문학인들.
이러한 군사적 메타포를 사용하는 습관은 전투적인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다시 말해 순응적인, 하인으로 태어난, 오직 사회집단 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벨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리킨다.”주21)

사실 19세기의 프랑스가 ‘전위부대’를 지칭하는 아방가르드와 같은 군사용어를 미학적 용어로 전용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프랑스 혁명이 야기한 전반적인 삶의 정치화의 귀결이다.”주22) 프랑스 혁명이후 계속 되풀이된 정변 속에서 아방가르드라는 군사용어는 사회적, 정치적 색채를 띠고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예술을 연계시키는 사고를 대변했다. 보들레르가 아방가르드를 조롱한 것은 바로 사회의 진보에 예술이 ‘하인’으로 종속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아닐지라도, 예술을 숭고한 정신활동으로 신봉하고, 예술을 통한 유한한 삶의 구원을 믿었던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사회의 진보에 봉사하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자율성과 자족성을 부인하는 태도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그가 혐오하는 속물적인 부르주아들은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처럼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대한 맹신 속에서 언제나 사회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고, 현실 환영주의적 디오라마와 파노라마, 그리고 다게레오타입에 열광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아방가르드는 당시를 지배한 상투적 사고체계에 저항하는 ‘전투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정신’이었다. 보들레르의 조롱 섞인 글이 보여주듯이,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이 주창한 예술의 아방가르드는 그 용어가 회자되는 만큼 역사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빈약한 영향력과 예술적 성과 때문에,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개념의 명료성을 상실한 채 임의적이고 유동적인 다의적 어휘로 변색되었다.
소명을 부여 받은 아방가르드가 미술사에서 아무런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린버그가 상찬한 아방가르드, 즉 ‘모더니티’의 태동에 기여하지 못한데 있는 듯하다. 모더니티에 참여하기는커녕, 디오라마와 파노라마에서 ‘새로운 회화 예술’을 찾은 예가 보여주듯이, 갱신된 복고주의에 머문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생시몽, 푸리에주의의 전성기가 19세기 초반부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미술 아카데미의 규범이 여전히 시효를 상실하지 않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회화 예술’의 ‘열린 방향’을 모더니티에서 탐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의 모더니티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제2제정과 더불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토피아적 이상 사회의 도래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받은 아방가르드가 회화에 본질적인 형식의 제 문제, 회화의 순수한 물리적 조건에 침잠한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적이었을 것이다. 




IV. 나가면서 혹은 제언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는 고립된 창조적 개인이 아니라 그룹이며, 이들은 새로운 예술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혁명적인 작업들로 그것을 ‘실험하고’, 이 작업들을 아카데미즘, 전통, 질서에 충실한 반대자들의 비방으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자들이다. 그 대표자들은 제 형식들을 바꿔야 한다는 필연성을 천명하고, 현 예술 생산이 의존하고 있는 사상과 원칙을 폐기하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의 비전’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아방가르드 정신은 예를 들면, 관습, 일반적으로 선호되는 작업방식들에 대한 패러디를 극단으로 몰고 가면서, 이른바 부르주아 예술을 비웃는다.”주23)  아방가르드에 대한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모순되게도 생시몽과 푸리에주의자들이 전파했던 사회진보에 대한 믿음이 환멸로 바뀌고, 새로운 사회를 향한 향도로서의 예술가 지위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게 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론을 일정 부분 수렴하지만, 중요한 다른 부분에서는 남용, 일탈하는 미학적 해석, 비평적 평가들이 쇄도했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윤색되었고, 마르크시즘은 그것을 데카당한 서구예술로 간주했다. 미술상 역시 이 용어를 남용하면서 장사 속을 챙겼고, 큐레이터, 작가들도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홍보의 언어로 활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들을’ ‘성직자의 임무’로서 표명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디오라마와 같은 ‘새로운 회화 예술’을 추구해야 하는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개념은 상당 부분 부식되었다.
언어의 의미작용은 언제나 시대와 더불어 변형되고, 추가되고, 탈락되어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평의 용어가, 살아 있는 미학적 개념이 이데올로기, 미학적 취향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 속에서 자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은 비평의 효율성, 논쟁의 성과, 의사소통의 실질성에 부득불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효율적 비평, 성과 있는 논쟁, 실질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한 언어의 탄생에 관계된 역사적 문맥, 본원적 의미에 대한 공통된 이해가 따라야 한다. 무절제한 전략적, 편의적 사용에 의해 어사의 내포 connotation는 무한정 확대되는 반면, 그 외연 denotation은 계속 줄어들어 의사전달에 장애를 초래하는 현상은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사태임에 틀림없다.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라는 어휘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은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장 클레르가 상정한 아방가르드의 완성의 시간도식은, 그의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원의 역사적 의미작용을 포괄하는 혜안이다. 이 탁월한 안목을 변화된 문장으로 다시 한 번 인용하기로 하자.

“아방가르드 운동은 예술의 완성을 더 이상 현재에서 과거로 이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그 과거를 미래로 이전시키기를 주장하면서, 현재 예술의 진중한 판단을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넘겨버린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상주의를 ‘밑바닥에서’ 다시 세우려했을 때 사회학에서 행했던 바와 동일한 재건을 행하려 했다. 그러나 예술의 완성이 현재의 앞에 있건 혹은 역으로 뒤에 있건, 그것은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남는다. 아방가르드는 황금시대를 과거에서 상상하지 않고, 미래로 투사했다. 과거의 노스탤지어에 매몰되는 정신이 아니라, 미래의 진보에 몽롱해진 정신이기를 원했다. 진보의 사고는 잃어버린 낙원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이론은 방향이 바뀐 노스탤지어일 뿐이었다. 시간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예술의 완성을 투사했던 것이다.” 주24)

“사회의 기저에 있는 모든 야만과 모든 더러움”이 사라지는 미래, ‘불완전한 디오라마’가 완성되는 미래 등, 미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저를 이룬다. 따라서 장 클레르의 지적처럼 아방가르드의 범주는 사회적, 미학적 완성의 시간축이 현재에서 미래로 향하는 미학적 시도의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린버그가 옹호한 아방가르드, 즉 매체의 문제에 전념한 ‘순수한’ 모더니즘 작가들이 그들 예술의 완성을 미래에서 구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아울러 장 클레르가 아방가르드로 규정한 몬드리안, 이브 클렝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기원에서 살펴본 의미론의 핵심 사안을 이루는 사회적 진보를 위한 현실참여 engagement를 행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디오라마를 ‘열린 방향 속에 있는 새로운 회화 예술’로 간주한 생시몽, 푸리에주의자들의 경솔하고 깊이 없는 미학 의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야만성, 모든 오물을’ 전통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폭로하여야 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만이 아방가르드의 역사적 의미론에 충실한 예들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행 아방가르드의 사전적 정의와 너무나 상충되어, 현실적 용례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상적 미래의 도래를 위해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열린 방향 속에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탐구한 작가와 예술집단만을, 그러니까 마리 

네티 Marinetti의 미래주의나 알렉산더 로드첸코 Alexander Rodchenko, 엘 리시츠키 El Lissitzky의 러시아 구성주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혹은 한스 학케 Hans Haacke, 앨런 세큘러 Allan Sekula  등등만을 아방가르드의 개념, 범주로 축소해 고려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본원적 의미론에 부합하면서 보다 효율적인 비평, 보다 생산적인 미학적 논의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정도의 작가 군들로만 아방가르드의 개념과 범주를 축소, 제한한다 해도, 아방가르드 연구의 볼륨은 만만치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회자되지만 혹은 너무 회자되어 아방가르드와 유사한 의미의 혼란에 빠진 미학과 비평의 용어 하나를 거명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즘.




1) Clement Greenberg,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I,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11.

2) Jean Clair,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p. 71.

3) Clement Greenberg, art. cit., p. 8.

4) ‘시는 회화와 같고, 회화는 시와 유사하다’는 말로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연유하며, 문학 담론에 의거한 아카데미 회화의 재현특성을 지칭한다.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의 역사적 전개와 이론에 대해서는 W. Lee Rensselaer,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을 참조할 것.

5) Ibid.

6)Clement Greenberg,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John O`Brian (ed.), op. cit., p. 32.

7)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9.

8) <<Towards a Newer Laocoon>>, art. cit., p. 23.

9) Ibid., p. 34. 괄호안의 어사는 필자가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첨가한 것이며 ‘구멍을 내고 바라보는’의 의미는 선 원근법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한 외계현실의 재현을 의미한다.

10) Jean Clair, op. cit., p. 77.

11) Ibid., p. 91.

12)  Ibid., p. 87.

13)  Ibid., pp. 79-80.

14) Cf. <<Avant-Garde and Kitsch>>, art. cit., p. 12.

15) Cf. André Chastel,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p. 79.

16) Renato Poggioli,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p. 9에서 재인용.

17) 생시몽은 아방가르드에 화가, 조각가 상징의 창조자 즉 문학인을 포함시켰다. 

18) Nicos Hadjincolau,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p. 52에서 재인용.

19)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결코 두 학파를 절충하지 않는다. 우리는 낡은 학파, 즉 고전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새로운 학파, 즉 낭만주의적 경향은 완전한 예술로서 삶의 진정한 기호들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1831년 5월 2일자「Le Globe」, ibid에서 재인용. 

20)  Walter Benjamin,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p. 169.

21)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pp. 634-635.

22)  Francis Haskell,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 107.

23) Etienne Souriau,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p. 209.

24) Jean Clair, op. cit., p. 35.


<참고문헌>

Baudelaire (Charles), Œuvres complètes, Paris, Aux Editions du Seuil, 1968.

Benjamin (Walter),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on mécanisée>>, in Ecrits français, Paris, Gallimard, 1991.

Chastel (André), <<Nouveaux regards sur le siècle passé>>, Le Débat, No. 44, mars-mai 1987.

Clair (Jean), Considérations sur l`état des beaux-arts, Critique de la modernité, Paris, Gallimard, 1983.

Greenberg (Clement), <<Avant-Garde and Kitsch>> (1939), in The Collected Essays and Criticism Vol. 1, Perceptions and Judgements 1939-1944, John O`Brian (ed.),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Greenberg (Clement), <<Towards a Newer Laocoon>> (1940), in Ibid.
Hadjincolau (Nicos), <<Sur l`idéologie de l`avant-gardisme, Histoire et critique des arts, No. 6, juillet 1978.

Haskell (Francis), <<L`Art et le langage de la politique>>, Le Débat, op. cit.

Poggioli (Renato), The Theory of the Avant-Garde (eng. tr.), New York, Evanston, San Francisco, London,  Harper & Row, 1968.

Rensselaer (W. Lee), Ut Pictura Poesis, Humanistic Theory of Paiting, W. W. Norton and Company Inc., 1967.

Souriau (Etienne), Vocbulaire d`esthétique, Paris, P.U.F., 1990.

 

출처:『미술평단』, 제90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2008, pp.187-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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