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프랭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9.02 윌리엄 클라인 : 거리의 풍속화가
  2. 2011.08.26 로버트 프랭크 :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정보 매체의 엄청난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며 또한 소위 생중계라는 방식으로 사건과 거의 동시에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과 백 여 년 전 19세기 당시 어떤 사건에 대한 시각적 전달은 1839년 사진 발명 이후 사진이 전달 매체로서 지속적인 발전(사진 엽서, 신문 삽화의 자료로 활용되는 사진① , 과학적 자료집이나 도감 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보도사진에 비교해 볼 때 사실상 거의 실험 단계에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전달적 역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에서 일종의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한 유랑 풍속화가(peintre d'moeu-rs)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들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생생한 사건과 풍물을 그림으로 전해주는 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을 “거리의 풍속화가”라고 하며 또한 그들의 그림을 “풍속화(peinture d'moeurs)”라고 했다.
 
특징적으로 그들이 재현하는 대상은 단순한 풍경(대부분 픽토레스크)이나 풍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당시 사회의 여론이나 불만 혹은 억압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풍자화였는데 이는 한 마디로 단순한 시각적 전달이 아닌 사회적 진실을 위한 정신적 폭로인 셈이었다. 당시 보들레르는 그들이 “현재의 미를 들추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현재의 본질적인 질”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진실의 폭로자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②

  그러나 사진 발명 이후 점진적으로 보도사진과 기록 영화는 이러한 풍속화를 대신하게 되었고 풍속화가들 역시 거의 사라졌다. 20세기 전반기, 보다 엄밀히 말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까지 보도사진의 시각은 특이한 사건 혹은 결정적 순간과 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상주의적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언제나 범 우주적이고 객관적이고 사건 중심적이었는데 거기서 모든 형식은 사진 미학의 전통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었고 어떠한 주관적 풍자나 고발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의 절대 객관적 기록성을 앞세우고 있었다.
 
보도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

  그러나 처음으로 1950년대 윌리엄 클라인(로버트 프랭크 역시)이 던지는 “전통적 규범의 이탈”은 그때까지 정형화된 보도 사진의 개념을 전복하면서 보도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탈은 단지 틀이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측면에서 현실의 이면에 감추어진 내재적 진실의 폭로에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라인과 같은 소위 “거리의 사진가(The street photographer)”는 더 이상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전달적 의도가 아닌 우리들 사회와 문화 그리고 풍속의 진실한 전달자,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사라진 19세기 풍속화가들의 역할을 다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들 특히 그의 뉴욕(New York, 1955년)에서 보여진 사진들은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빗나간 사생아 혹은 터무니없는 상식 밖의 사진들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사진들은 매체의 전달적 목적에서 포착된 전통적 보도사진으로 읽혀졌기 때문인데 이는 사진을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이나 결과론(혹은 형상론)적 관점에서 본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진들은 정 반대로 지극히 주관적 사진 즉 자신의 눈에 비친 물질 문명 세계를 고발하는 일종의 “부조리 연극”으로 간주된다. 모든 해석과 이해를 사진이 보여주는 결과물에서 출발한다면 이미지들은 우선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동시에 당시 사회의 모든 활동적 양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종의 유형학적 사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을 있게 한 원인적인 측면 다시 말해 촬영 당시 작가가 가진 어떤 존재론적 본질이나 충동에 의한 자국 혹은 인덱스로 이해될 것이다. 그럴 경우 클라인 사진을 특징짓는 많은 신기한 것과 이상한 것 혹은 괴기스러운 것 등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암시하는 하나의 문화적 신호(signes de culture)로서 나타난다 : 신호는 그 본질인 동체를 예측하게 하는 지시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통 현실에서 볼 수 없는(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심지어 초감각적인 것들까지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사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클라인의 사진에서 주제임과 동시에 소재가 되며 이러한 사진을 “사인-사진(signe-photo)”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인은 자신의 감각을 통한 물질적 사인에 대한 일종의 암호 해독자인 셈이다. 거리의 갱들이 활보하는 뉴욕의 광란, 토쿄의 이데오그램, 소련의 군사 문화, 로마의 종교 문화 등 50년대 이후 후기 정보 사회의 물질(소비 사회)과 정신(문화와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무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단편들(사인들)로 추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은 결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혹은 편견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에서가 아닌 자신의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클라인의 뉴욕에서 보여진 거리 이미지들은 전통과 결별하는 새로운 독창성을 창조함과 동시에 당시 실존주의 계열의 부조리 연극과 현대 물질 문명을 비판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도시의 신화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제스처로 간주된다. 이미지는 그때 일종의 조롱적이고 풍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사물화 현상”에 대한 사진적 재현으로 간주되며 대부분의 사진은 “사물화 된 인간과 물질이 대치”되어 나타나는 병치 효과 다시 말해 들뢰즈의 용어로 “문화와 자연이 충돌하여 그 표면에 발생하는 사건(evenement)”에 관계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번민 고독 소외 통속 유행 속물 등을 암시하는 당시 1950년대의 문화적 신조어(의미의 생성)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들이기도 하다.
 
클라인은 팝아트의 선구자


  클라인의 사진들은 단순히 현대사진의 역사적이고 진화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사진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재현 의도(사물화 현상)는 단지 사진의 영역뿐만 아니라 1960년대 예술의 거대한 폭풍을 가지고 올 팝 아트의 전반적인 주제가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클라인의 사진은 팝 아트를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며 오늘날 역사적 관점에서 몇 몇 비평가들(1980년대 이후)은 클라인을 팝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물질 속으로 정신(인간)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허무”를 조형적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팝 아트의 본질적 의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클라인의 간판, 광고, 글씨, 이데오그램 등의 문화적 신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사물화를 재현하는 팝 아트의 전조로 간주된다.
 
클라인의 모든 사진들 특히 뉴욕의 사진들과 그의 단편 영화(예를 들면 “Broadway by night”)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뭔가 암시적인 은밀한 알파벳이 있다 :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도시에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네온사인, 현란한 광고 글씨 그리고 많은 소비 문화의 조짐들과 같은 클라인의 “거리의 언어들”은 팝아트의 출현보다 무려 5년③ 이나 앞서 나타난다. 도시를 소재로 잡은 뉴욕의 사진에서 클라인은 강렬하고 폭로적인 그리고 조롱적인 이데오-상업적(ideologico-commerciale) 선전을 강조하고 있다 : 특히 네온사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도시에 불고 있었던 열풍 같은 문화의 새로운 것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의 여자들, 밤의 감시자들, 은행과 영화, 간판 슬로건 뒤에 갇힌 계산원, 밀려오는 군중, 열광하는 관객들 등은 궁극적으로 소비 문화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 더미와 인간 소외 혹은 경찰 몽타주의 상품화 된 인간유형과 같은 인간의 사물화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거의 정확히 1960년대 유령 같은 먼로, 무한히 반복되는 돈이나 콜라, 자동차 사고 등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그림(일종의 사진-그림)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클라인을 당시 “어떠한 화가도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aucun peintre n'avait jamais fait ca)”을 처음으로 실행한 진정한 팝아트의 선구자④ 로 간주할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전통과의 단절 혹은 반-사진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개념적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기술적 측면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사진의 개념적 특징들은 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새로운 문화적 통념(코드)에 관계하고 있다. 클라인 자신이 “사진적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는 수 백 개의 사물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순간을 포착하는 황홀한 순간이다”라고 언급하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남”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사진 작업은 그때까지 촬영 방식을 지배한 “연극적인 비밀의 자물쇠 구멍(렌즈)”을 통한 순간 포착 즉 미리 계산된 조준사격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들의 다발, 다시 말해 무차별 난사식 사격을 통해 거의 직감적인 한 장의 장면을 선택(암실 안에서)하는 감각적 만남에 관계하였다.
 
 이러한 만남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증폭된 우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클라인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의 단면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코드로서 정확히 “객관적 우연”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클라인의 사진에는 언제나 엉뚱하고 이상한 무엇(푼크툼)이 출현하는데 이는 특징적으로 한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러한 만남들은 사진에서 무모하고, 통속적이고, 저속하고, 뻔뻔스럽고, 강렬하고, 거칠고 동시에 난잡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적절히 말해 자연과 문명의 교차 면에서 발생하는 예술적 형태로서의 무모성이나 무질서에 대한 사진적 추적으로 간주되다. 또한 인간은 거기서 일종의 물질의 장식품이나 부속물로 간주되고 도시 생활의 질식과 우글거림, 혼란, 뒤죽박죽, 와글와글한 군중들의 떼 등과 같은 것들은 현대 사회의 다량 유통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설적으로 흔히 자신이 역사적 증인으로서 직접 군중 속에 합류하면서 촬영하였는데 거기서 자신이 확인하려 한 것은 우리 모두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였다.
 
전통적 규범에서 이탈, 틀의 자유성 추구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사진들은 그때까지 통용된 전통적 규범을 더욱 더 분명히 이탈하고 있다.⑤ 우선 “틀의 자유성”을 추구하는 잘려지고 불안정한 화면 구성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왜곡을 야기 시킨다. 또한 가능한 화면을 꽉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35 mm 광각 렌즈의 사용과 대상을 겨냥하지 않고 바로 코앞에 바짝 붙여 촬영하는 근접촬영(close up)은 결과적으로 대상을 착각과 환상적 효과 속에서 괴물⑥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1). 영화의 시퀀스와 사진과의 접맥에서 나온 많은 사진적 표현들(순간 동작, 제스처, 찰나 등) 역시 이러한 강렬한 특징을 더 해주고 있다. 게다가 움직임의 자국을 남기는 오픈 플래쉬(open flash)의 활용은 살아있는 생명 혹은 생동감의 효과로서 이용하였는데 클라인은 이러한 효과를 특히 80년대 초 자신의 패션사진에 하나의 특수 효과로 이용하였다.
  클라인의 많은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별한 구성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는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시선들이 마치 물수제비 뜨기처럼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선의 다각화(사진 2)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비정함 그리고 불신과 멸시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여하간 화면 구성에서 흔히 촬영 당시 누군가 렌즈를 쳐다(훔쳐)보는 시선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하나의 평면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늘형식으로 병치시키는 공간 구성의 극대화(사진 3)이다. 이러한 구성은 우선적으로 광각 렌즈의 집단적 효과에 그 이유가 있지만 언제나 피사체의 분명한 공간성과 그 움직임을 강조하는 거의 1/125초의 노출 속도와 대략 15도 각도로 약간 굽어보는 낮은 앵글을 활용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에도 그 원인이 있다.⑦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인간 존재를 벽면에 부조된 기념물이나 건축적 장식물로 간주하려는 예술적 의도⑧  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는 비교적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사진에 비해 유달리 독특하고 이상하고 별난 것(푼크툼)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 이후 소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 하여 밝혀낸 독특함(sing -ularite)과 증거성(attestation) 그리고 지칭성(designation)으로 정의되는 사진의 특성에 관계하고 있다. 소위 사진-인덱스는 전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사진-관객의 주관적 관점(사진적인 것)을 가지며 그때 외시된 이미지는 단지 자국 혹은 징후일 뿐이다. 알다시피 바르트는 자신의 이론적 입지를 위한 배경 혹은 모델(탈-코드)로서 사진 이미지를 도입했는데 특별히 여기 보이는 유명한 두 장의 사진(밝은 방)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진 읽기의 실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사진 4)으로 우선 여기서 문제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할머니이다 : 할머니는 찍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중앙에 있는 할머니를 겨냥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여섯 인물들은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찍혀졌고 각각은 사진기 앞에서 조롱, 불안, 멸시  등 다양한 심리적 기질들을 보여 주고 관객들 역시 이러한 감동적인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바르트가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자료이다 : 예컨대 여기 1959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모자를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머리를 잘랐는지 등의 사실적 자료들이다. 한 마디로 사진 읽기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언급한 사실들에 관해 “내가 놀란 것은 사진가의 어떤 의도를 알려는 관심에 대한 그의 거절이다”라고 진술했다. 마치 사진을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로 간주하듯이 ...⑨

  또 한 장의 사진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이라는 제목의 사진(사진 5)이다. 클라인은 거리에서 우연히 이 가족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기분 좋게 가족은 그들 스스로 알아서 (포즈를 위해) 그룹을 만들었다. 아이의 권총을 가진 엄마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아이의 눈은 자신의 엄마 쪽으로 돌려 웃었고 자신의 손은 엄마의 손으로 가져갔다. 큰 누나는 렌즈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한방의 사진 .... 거기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윌리엄 클라인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의 젊은 아이들을 찍었다. 그것은 감동적이다 ...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계속 보게 되는 것은 이 개구쟁이의 썩은 이빨들이다”⑩ 결국 바르트가 몰두한 것은 문화적으로 약속된 주제 즉 촬영자의 의도(스투디움) ⑪가  아니라 푼크툼(punctum)이었다. ●
 
주요 참고 도서
William Klein, New York, , Edition du Seuil, Paris, 1956.
William Klein, texte de Christian Caujolle, coll. Photo Poche, C.N.P., Paris, 1985.
Close up, Thames & Hudson, London, Paris, New York, 1989.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Michel Nuridsany, “William Klein : la cam ra visible”, Art Press, n 69, avril 1983, p. 4-7.
 
(주)
① 신문 삽화로서 사진의 도입은 19세기 말 사진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도사진으로서의 역할은 사실상 20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사진 제작에 있어 많은 사진적 기술이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단지 삽화를 위한 자료로서 오랫동안 신문 삽화로 이용된 석판화를 대신하지 못했다.

② 참조,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③ 물론 영국의 초기 팝 아트 운동은 콜라주를 중심으로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또한 로첸버그의 콤바인 페인팅과 존스의 그림 역시 50년대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팝아트의 시작(1958-1968)은 워홀와 로젠퀴이스트 등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광고 이미지의 출현 즉 1960년대를 기다려야 한다.

④ 엄밀히 말해 윌리엄 클라인 이전 1949년 레이몬드 하인즈 (Raymond Hains)는 광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사진적 작품으로 만든 첫 사진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전한 사진이 아닌 일종의 꼴라주 방식을 하고 있다 : 사진과 영화의 형식을 도입하여 만든 게시광고물로 일종의 레디-메이드이다. 여하간 클라인과 하인즈는 서로서로 팝의 선구자들로 간주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광고와 글씨의 사진적 조합에 있었다.

⑤ 여기서 비평가들은 실질적으로 전문적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던 클라인의 사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당시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대상을 왜곡시키는 상식 이하의 촬영 기법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의 기술적 무지에서 왔다고 한다. 사실상 클라인은 파리 체류시 자신의 회전 광고 사진 확대 기술을 위해 처음으로 사진을 이용했는데 당시 그는 화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작가가 생존하는 오늘날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⑥ 몇몇 비평가는 이러한 왜곡된 형상들을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망투(Mantoue)의 테(Te) 성에 줄 로맨(J. Romain)이 조각한 괴물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⑦ 참고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⑧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나의 사진들은 어떤 고전주의를 들추어낸다. 아마 사진들이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Piero della Francesca를 참조하였는데 사진에 있어 나의 항구적인 의도들 중 하나는 1/125 초의 속도로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난 의도적으로 기념비와 벽화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자신의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프레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의 “인본주의”에 관계한다. 레제의 그림은 도시 사회의 저속성과 현대 산업 사회와 물질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면서 인간의 사물화를 추상 기하학적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⑨ 참고,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p. 30.

⑩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gique, Cahier du Cinema / Gallimard / Seuil, 1980, p. 7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군중 속에서, 뉴욕가 5번지, 1955년
(사진 3)롤링스톤 공연, 파리, 1982년
(사진 2)추수 감사절 행렬, 뉴욕, 1959년
(사진 4)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
(사진 5)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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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특히 시각예술에서 생산된 작품은 일종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부구조로서 출현하는 지표(인덱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부구조로서 부재하는 그 원인성(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출현한 지표는 그 배경(fond)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고 물리적 원인 관계로 이해되는 이들 두 관계에서 본질(최초의 동기)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지표(시각적 출현)에 앞선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린 유명한 검은 초상은 모델의 검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모델을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을 자신의 감각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또한 폴 클레의 그래픽적 색 나열 역시 현실의 대상이 아닌 음악의 순수함으로부터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검은 얼굴과 색 그래픽은 시간적으로 작가가 과거 상황이나 대상과의 경험에서 포착된 감각의 음색(impression/timbre) 혹은 생성(genese)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이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음색(철학적으로 내재적 형상)들은 단지 작가의 직감(intuition)에 의해서만 포착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탈-코드/시뮬라크르)들이다. 그와 같이 작품은 이러한 존재의 신호들을 색과 선, 면 등의 조형적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조형적 언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 더 정확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경우 그 재현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 특성상 사진은 대상에 대한 그 어떠한 인위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조형적 번역(연출사진)을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사진에서 본질은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만약 클레가 카메라를 이용했다면 그가 바이올린 음에서 감지한 음색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파스텔과 같은 색과 선의 조형적 번역이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의 상황적 재현에만 가능하지 않는가 ?
 
그럴 경우 클레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음색을 암시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악보 피아노 공간 등 그 음색을 유발시킨 오브제나 상황을 찍을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음색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이면에 부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그때 시각적인 출현은 이러한 부재를 은닉한 인덱스로서 음색 혹은 분위기를 위한 재현 이미지 이외 그 어떠한 언어학적 의미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진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재현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방출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을 은닉한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 특히 거의 현존하는 신화로 간주되는 그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현대 영상사진의 결정적 조건을 짓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당시 객관적 사실성과 사건 중심의 보도사진의 흐름에서 프랭크 이후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그의 주관적 이미지를 하나의 모델로 추종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인”의 출간은 적어도 외관적으로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① 게다가 프랭크의 사진은 최근(특히 80년대 이후 유럽)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진 인덱스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이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와 사진 혹은 사진과 사회와의 객관적 관계나 역할에서 코드-의미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분석(현실의 변형)에서 볼 때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한 코드 분석을 넘어 두 가지 주관적 관점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 하나는 사진을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음색의 재현(영상사진)으로 보는 관점과 또 하나는 사진을 모두에게 공유된 현실의 주관적 경험 혹은 공통된 내적 인상으로 이해되는 관객의 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다 함축적인 방법으로 프랭크의 몇 몇 사진들을 모델로 하여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가 “미국인”을 만든 때는 1955-56년이다. 당시 50년대 전반은 공화국의 회귀, 냉전,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상 생활 정상화와 안정과 균형 그리고 경제 발전을 목표로 정치 사회적 관계가 적절히 유지되던 시대였다. 여하간 50년대 미국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확장과 미래의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로 모든 중요한 사항은 공통된 아이디어와 함께 명분과 이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 의식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된 상태로 있었던 분쟁의 에너지는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지속적인 경제적 추진력으로 전이되었고 경제는 또 그렇게 실패 없이 발전했다. 프랭크의 의도는 정확히 당시 긍정적인 대중 의식에 거역하는 반-이미지 즉 지나치게 코드화 되고 상징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였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그가 재현한 반-이미지들은 흔히 소외와 빈곤 허무 등과 같은 반 물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들이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규명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프랭크의 “미국인” 사진집은 결정적으로 전통적 사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반 - 사진” 즉 탈선(형상 이탈)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대중의 눈에 비평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반-사진적인 이탈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은밀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유럽적 시각에 관계하는 것으로 미국에 이민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주관적 재현은 장 콕도가 그의 사진을 “반사하는 거울”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대상이나 상황에서 포착한 “순수 직감”으로부터 재현된 사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영화 혹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3인칭 역사가 아닌 단지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1인칭 자화상이었다. ②  이는 곧 일반적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적인 독백으로의 전환 즉 재현에 있어 주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주제의 변화와 조형적 형태와 구성에서 전통적 규범의 이탈(불규칙, 대칭, 절단, 동요, 흐림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들은 사실상 현대 사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간주되는데 가장 좋은 예로 미국 남부의 이국적 풍경을 보여주는 프랭크의 사진(사진 2)과 이와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1930년대 워크 에반스의 사진(사진 3)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두 사진은 당시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차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재현 방식에서도 거의 같은 정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사진 모두 삶의 방식으로 간주된 차를 소재로 미국의 자연적이고 “내부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에반스가 재현한 객관적 보고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 초가집과 주유소가 병치된 시골 풍경과 같이 단지 자연과 인공의 병치에서 발생하는 대상의 엉뚱하고 야릇한 인상을 재현한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반스의 차는 부의 상징인 사회적 지표로 나타나고 프랭크의 차는 일종의 인간과 물질 사이의 부조화에서 암시되는 괴물 즉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전자는 “사물 위에서(sur) 의미의 재현”인 반면 후자는 “사물에 반하는(contre) 섬광 혹은 인상의 재현”이다(Henri Van Lier).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프랭크의 사진이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인 지극히 주관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에반스의 사진과 같이 삶의 방식이나 사회학적인 보고서로서 일종의 사회적 비난으로 믿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의 사진이 다시 1930년대 F.S.A의 사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프랭크의 사진은 사물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반사된 음색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은 그림의 경우와는 반대로 마치 심벌즈의 한방처럼 찍는 순간 동시에 이러한 사진적 음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자동생성). 이는 곧 퍼스의 유형학적 의미로 인덱스화 된 것(indexation)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que)”이다. 오늘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유형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중요한 하나의 이론적인 모델로서 재조명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음색의 재현에 있고 또한 필립 뒤봐가 “사진과 함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사진적 결론 역시 이미지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프랭크 자신의 순수 직감 즉 생성에 관계하고 있다.

  사진적 음색은 의미나 상징을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 지표를 말하는 환유로 간주된다. 거의 대부분의 프랭크 사진들은 재현된 어떤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라는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조짐을 보인다”라는 상황적 인상만 누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멕시코 286번 국도(US 286 New Mexico)”사진이나, “뉴욕가 34번지”(사진 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나타나는 도로와 선은 의미적 관점으로 볼 때 사실상 수수께끼이다. 이것들은 단지 응시자에게 황량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무엇을 상기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부재의 인덱스일 뿐이다. 또한 작가인 프랭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사진은 그가 도로를 달리다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잡은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감 ③ 에 따라 단지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사진적 행위의 “잔여물”로서 남게 된 이미지, 달리 말해 물질적 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부재이외 사실상 의미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사진, 말하자면 프랭크 사진 유형은 의미나 논리 밖에서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나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기억의 연상에 의해 환원된다. 이때 기억적 확장은 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처럼 지극히 주관적 확장을 한다. 출현과 부재가 섞여 만들어진 “분위기 혹은 인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인상이나 과장된 인상이 아닌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공통된 우리들의 단순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또한 자신의 집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험”(Henri van Lier)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기억적인 이중인화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예컨대 A라는 해변은 B라는 교회 위에 겹쳐 있고, 그 교회는 C라는 얼굴 위에 겹쳐 있고 또 그 얼굴은 ... 이러한 주관적 확장은 또한 동일한 대상 위에서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는 연상의 개인적 “경향”과 같은 맥락(인덱스의 확장)을 가진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을 자르는 결정적 순간이나 유일한 사건을 만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의 부동의 진술과 부재의 출현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재현하는 프랭크 사진에서 보여지는 탁월한 미학이다.

  로버트 프랭크는 그 자신이 반 - 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 쉽게 말해 그가 미국을 주파하면서 느낀 단순한 인상들이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작크 크루악이 “주 - 박스가 장례식 관보다도 더 슬픈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듯이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사진 1)는 비어 있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직감은 바로 이러한 끝없는 신호들을 잉태한다. 또한 그 신호들의 지시대상들은 의미와 논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
 
(주)
①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을 “내적 형상의 재현”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진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앗제와 브레송의 사진을 잇는 두 분수령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영상사진은 거의 완전한 정신적 재현으로 현대 사진의 결정적인 방향을 세운다.

②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사실상 프랭크의 전 사진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 - 소설”인 동시에 “사진가의 생생한 체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서술화된 “스토리 사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독백으로 간주되는 “미국인”은 물론이며 영화 플로라이드 흑백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취향은 분명하다. 특히 1978년 흑백 폴로라이드 사진에서 두 장의 자신의 모습을 붙여 만든 “Selfportrait, at 55, It is like me”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랭크의 많은 사진에서 “그것은 나와 같다(It's like me)”라고 기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전혀 나르시즘과 관계가 없다.

③ 단순한 개인적 심경으로 들뢰즈의 용어로 하나의 사건(evenement) 혹은 표면 효과(les effets de surface)로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Les Americains, texte de Jack Kerouac, Delpire, Paris, 1958, reimp., 1985.
Robert Frank, texte de Rudy Wurlitzer, Delpire, Paris, 1976.
Robert Frank, la photographie, enfi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n  11/12, Paris, 1984.
Michel Frizot, "Robert Frank, ailleurs et maintenant", Cliches n  25, 1986 pp. 48-53.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파리 1949년
(사진 4) 뉴욕가 34번지, 1949년
(사진 2) 로버트 프랭크, 캘리포니아 롱비치, 1955-1956년
(사진 3) 워크 에반스, 농장,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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