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뒤샹'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9.18 존 하트필드와 포토몽타주
  2. 2011.09.11 미노타우로스와 초현실주의





독일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포토몽타주 (photomontage)와 더불어 처음으로 사진 매체와 조우했다. 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다다이스트들은 기존의 사회이념, 전통적 예술형식을 전폭적으로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에 포토몽타주를 접합시켰다. 절단한 사진들로 작품의 전체를 혹은 작품의 일부분을 콜라주 방식으로 접합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포토몽타주는 1910년대 말, 그러니까 소련의 볼셰비키가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유럽이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 시점에서 도래했다. 다시 말해 포토몽타주는 서구 부르주아 문명의 허구성과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전쟁이라는 파괴적 양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이 새로운 사회건설의 모델로 비치는 역사적 순간에 태어났다. 시각예술작업과 문학작업에서 공히 행해진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 작업은 잡지, 신문, 포스터, 사전, 광고 카탈로그 등에서 부분적으로 떼어낸 이미지 혹은 텍스트들을 본래 문맥과는 상관없이 특정 공간에 임의적으로 결합, 조립 - 이것이 몽타주의 본래 뜻이다 - 하면서, 새로운 텍스트의 공간,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만드는 기법으로, 그것은 그 형식 자체 속에 이미 부르주아 사회의 합리주의,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를 파산시키려는 욕망을 담고 있었다. 그 파산, 파괴 위에서, 아직은 그 형태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혁명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다다이즘의 몽타주 기법이었다. 간단히 말해 베를린 다다의 몽타주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폭로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파편적 이미지, 절단된 텍스트로 내재화하고,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혁명을 통해 암중모색하는 혼돈의 양상을 내면화했다. 부르주아 문명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낸 자리에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사회를 대체할 모델로 떠오른 자리에서 포토몽타주 기법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의 포토몽타주는 분명 1910년대 초반 피카소 (Picasso), 브라크(Braque), 후앙 그리(Juan Gris)가 종이들을 붙이고 과슈나 유화물감으로 채색하는 방식과 19세기 후반의 유럽이 카드엽서의 도안과 유머러스한 이미지의 생산을 위해 행한 시도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형태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혼돈의 양상은 새로운 형태미, 새로운 미학질서를 탐구하는 큐비즘의 미학적 시도, 19세기의 장식적이고 유희적인 포토몽타주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다다이스트들의 사진을 활용한 충격적이고 거친 형상은 작업방식에 있어서는 큐비즘의 종이 붙이기와 19세기 포토몽타주와 거의 동일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반 조형적, 반 미학적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전통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베를린 다다에는 포토몽타주를 행하는 4명의 주역이 있었다. 한편으로 사진의 단편들의 조합을 통해 키리코(Chirico)적인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사진과 낱말들의 결합을 시도한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과  기계부속들 혹은 거리의 광경에 인간신체들을 결합한 한나 회(Hannah Hoch)가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절대적 자유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를 신봉하여, 그들의 포토몽타주는 자의적인 무질서와 결코 확고히 고정시킬 수 없는 의미작용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잡지의 표지 작업을 포토몽타주로 행하고, 그래픽적인 수채화에 사진의 단편들을 통합시킨 게오르그 그로츠 (George Grosz)와 그의 친구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1891-1968)가 있다. 이 둘은 1919년 독일 공산당이 창당되자마자 당원이 되었고, 사회비판과 혁명에 봉사하는 사회참여적 포토몽타주를 행했으므로 그들의 시각적 구성과 메시지는 단순하고 명확했다. 
  존 하트필드의 본명은 헬무트 헤르츠펠트 (Helmut Herzfeld)였지만 1916년 독일의 국수주의와 영국혐오증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식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의 별명은 ‘Monteurdada’, 즉 ‘다다의 조립공’이었는데, 이는 그가 다다를 대표하는 포토몽타주 작가라는 뜻이 아니라 하트필드가 전통적 예술가의 고답적 이미지를 거부하기 위해 엔지니어, 조립공의 복장을 즐겨 입었던 까닭이었다.
  신랄하게 정치를 풍자하는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가 본격화된 것은 그의 형, 빌란트 (Wieland)가 설립한 출판사의 책표지와 공산당 기관지들을 디자인하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30년 『Arbeiter-Illustrierte Zeitung』, 즉 '노동자 화보잡지'의 정기기고자가 되면서 정치현실을,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그의 포토몽타주는 절정에 도달했다.『AIZ』에 게재된 그의 250점에 달하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 정치 선동적인 명료한 텍스트를 결합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인 사회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나치의 이데올로기의 호전성을 공격하고 그의 포토몽타주를 계급투쟁의 도구로 삼는 것이었다. 1930년 그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홍보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 신문들로 얼굴을 감싼 한 인물을 몽타주한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배추 머리를 가졌는데, 그 이파리를 읽어보았는가? 부르주아 신문들을 읽는 사람은 눈이 멀고 귀가 먼다.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지겨운 허풍들!” 1932년 제네바 국제연맹 앞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위노동자들이 기관총에 쓰러지자, 그는 이렇게 포토몽타주한다. “국제연맹 건물 전면에 파시스트의 총검에 꿰뚫린 평화의 비둘기를 배치했고, 백십자기 대신 나치표장을 새겨 넣었다.” 위에서 인용한 포토몽타주는『AIZ』의 1934년 10월 4일자 특별호로 ‘반파시스트, 행동통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며, “주먹을 움켜쥐고 하나가 되어, 파시즘에 본때를 보여주자! 인민의 주먹들이 프랑스와 자르란트에서 보여주었던 것을 보여주자. 반파시스트 지지자들은 어디서나 단일 전선을 이룩하여야 한다.”라는 텍스트를 포토몽타주 곁에 삽입했다.
 
  『AIZ』는 1926년에 창간된 화보지로 부르주아 계층을 독자로 하는 잡지들과 편집형식은 물론이고 판매 부수에 있어서도 경쟁을 벌인 시사주간지였다. 이 잡지는 한 작가의 말을 빌면, “정신을 사로잡기 위한 최상의 무기”인 사진을 공격적으로 사용했다. 브레히트(Brecht)의 찬사에 따르면, 부르주아 보도사진가들의 객관성을 포장한 거짓들을 견제하는 “『AIZ』의 작업은 진리에 봉사하며 사태를 정확히 재정립하고자 하는 까닭에 엄청나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 잡지는 그것을 경이롭게 실현하고 있는 듯하다.” 브레히트가 생각하는 시대의 ‘진실’은 반파시스트운동, 노동자의 계급투쟁 그리고 전통적 예술형식의 파격적 혁명이었던 까닭에, 그는 원근법, 균형, 조화, 통일이라는 기존의 전통미학원리를 파격적으로 분쇄하는 포토몽타주와 ‘노동자-사진가’의 사진을 선호하면서, 반나치, 반부르주아 운동에 앞장선 『AIZ』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AIZ』의 사진과 관련한 활동 속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포토몽타주의 전투적 사용 외에도 노동자들이 찍은 시사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현실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잡지에 게재되는 사진자료를 배타적으로 관리하고 유통시키는 자본주의적 사진 통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AIZ』는 1926년 3월 독자들에게 대대적인 협조를 구한다. 부르주아적인 사진통신사들이 유통과정 속에서 의도적으로 눈감아버리거나 배제하는 사진들을 독자들 자신들이 잡지에 제공해줄 것을 호소한다. 『AIZ』가 요구한 노동자 사진의 종류를 인용하면, “1. 노동계의 혁명운동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2. 노동계의 사회적 상황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들, 3.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전체적 국면에서 정확히 재현하는 종류의 사진들, 4. 노동의 조건들과 장소들을 분명하게 이해시키는 노동현장 사진들, 5. 현대 기술과 그것의 형태들, 산업구조물과 제조방식들을 도해하는 사진들”이었다. 이러한 협력요청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몇 달 후에는 ‘노동자-사진가’ 모임이 발족되고 공식 기관지, 『노동자-사진가 Arbeiter-Fotograf』까지 발행하게 된다. 
  이 월간지는 『AIZ』가 탄생시킨 새로운 형태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기술적으로 이념적으로 교육시켜, 그들을 효율적이고 의욕적인 사진기자로 만들기 위한 잡지로 기능을 수행했다. 『노동자-사진가』의 필자들은 프롤레타리아 사진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매스 미디어들이 의식적으로 주입시킨 부르주아의 취향을 거부하고, ‘계급적 시각’을 습득하도록 교육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의 계급적 관계와 착취의 징후들을 포착하여 가차없이 그것들을 비판하도록 학습시켰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러한 사진 실천은 기대한 수준에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이론가들이 비판한 부르주아의 취향을 상당수 답습했기 때문에 『AIZ』는 기존의 사진통신사의 사진들을 완전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AIZ』가 계발한 아마추어 사진가 모임의 전략을 모방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아마추어 사진가의 모임을 조직적으로 부추겼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게 되자 잡지, 『노동자-사진가』는 폐간하게 되며, 존 하트필드는 『AIZ』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하여 1938년까지 반나치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하트필드의 현실참여적 포토몽타주는 그 생산량에 있어서나 그 강도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것이었지만, 분명 그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포토몽타주의 독자적 발명을 주장한 소련의 클루트시스(Klutsis)와 로드첸코 (Rodtchenko)는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 『레프 Lef』를 통해 소련의 혁명정부가 직면해야 했던 이념홍보와 교육에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프로파간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로 미술사가 분류하는 이들의 작업은 정치적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포토몽타주의 여러 가능성들을 실험하고 실천했다. 로드첸코는 1923년 출판되는 마이야코프스키(Maikovski)의 시집 『이곳에서』의 삽화를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제작했고, 엘 리시츠키(El Lissitscky)는 1928년 독일의 쾰른에서 열린 국제 사진전시회 ‘프레사(Pressa)’의 소련전시장을 포토몽타주 기법을 동원하여 대형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독일에서도 포토몽타주를 활용하는 여러 양상들이 나타났다. 도멜라 (Domela)는 그것을 광고에 활용했고, 모홀리-나기는 백색 평면에 사진들을 잘라 붙이고, 직선을 반복적으로 가미하여 포토몽타주의 예술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그 기법을 이용해 부조리하고 기이한 이미지의 연상체계를 구현했다.
  나치의 집권과 더불어 프라하로 망명한 하트필드는 체코가 독일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1938년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거기에서 1950년까지 린드세이 드루몬드(Lindsay Drummond) 출판사의 일을 하면서 활동을 계속한다. 1950년 이후에는 동베를린에 정착하여 무대장식과 전시 포스터의 제작을 행한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와 관련된 작업은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분류된다. 첫째는 자본주의와 파괴적 권력이 공모하여 인민을 탄압하는 양상이며, 둘째는 전쟁의 잔인함을 폭로하는 양상이다. 셋째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대한 희망의 도식화이며, 넷째는 인종주의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다. 그는 절단된 사진 이미지들을 단순하고 엄격한 시각적 구성을 통해 짜깁기했고, 여기에 선동적인 메시지의 텍스트를 삽입시킴으로써 대중을 향한, 인민을 위한 예술이라는 희귀한 예를 예술사에 남겼다. 그는 현실과 분리된 예술, 대중이 접근할 수 없는 고답적 예술에 항거하면서, 아울러 과거의 판에 박힌 예술적 형식과 과감한 단절을 꾀한, 한 마디로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예술가였다.
  불어의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전초병’이라는 뜻으로 그 쓰임새는 군사적 용도에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삶의 전 영역이 정치적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자 예술도 이에 초연할 수가 없었다. 예술의 영역도 이 정치, 군사적 용어를 차용하여 특정 예술가군을 지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치, 군사 용어인 아방가르드를 특정한 예술적 성향을 지향하는 예술가 부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 예술가군은 예술의 발전을 사회의 진보와 관련시키는 성향을 표출하는 자들로 사회의 현실문제에 자신들의 예술로써 대응하고 응답하고자 했다. 인류의 개선적 발전을 예술의 기본토대로 간주하는 까닭에 그들은 당대의 정치, 사회 문제에 자기들의 의견을 작품,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따라서 19세기적 의미에서 예술분야의 아방가르드는 20세기가 뜻하는 바처럼 ‘현재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꾀하는 예술가군’이라는 의미와는 현격한 의미론적 차이를 보였다. 19세기의 아방가르드 개념으로 살펴볼 때 새로운 형식을 과격하게 추구한 큐비즘의 작가들이나, 마르셀 뒤샹은 아방가르드일 수 없다. 오히려 전통적 예술형식을 존중하면서, 인류의 진보, 사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고, 보다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예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갔던 쿠르베 (Courbet)가 19세기가 의미한 아방가르드 입장에 부합한다. 어쨌든 존 하트필드는 19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20세기적 의미에 있어서나 혹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나 그 개념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그의 포토몽타주라는 파격적인 형태탐구 작업은 당시의 ‘예술생산이 기대고 있는 형식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는 또한 ‘사회의 진보, 인류의 삶의 발전’이라는 진보적 관점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수색대의 전초병, 즉 군사적 의미의 아방가르드처럼 나치와 부르주아의 개량 사회주의의 탄압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계급투쟁의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선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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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출판업자 알베르 스키라 (Albert Skira)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호화로운 잡지의 출판을 꿈꾸고 있었다. 호화롭다는 말은 잡지의 값비싼 장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잡지의 편집과 내용을 위해 참여한 예술계 인사들 역시 호화 인사여야 했다. 대중들의 혹은 문화계 속물들의 값싼 인기나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예술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그야말로 빛나는 인사들이 잡지의 편집에 기여해야 했다.
  스키라는 잡지이름을 정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바로 곁에 작업실이 있는 25세 연상의 피카소와 상의를 했다. 피카소는 기존 예술계를 일신하려는 스키라의 의도에 ‘깃털 비 (Plumeau)’라는 잡지명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제 비트락 (Roger Vitrac)이 나중에 제안한 ‘미노타우로스’가 덜 가볍다고 판단하고 스키라와 피카소는 이것을 잡지 이름으로 정한다.
  이 잡지의 편집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그룹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었다.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공산주의 혁명과 비합리적, 비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개발하려는 초현실주의 혁명 사이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1935년에 자살한 르네 크르벨 (Rene  Crevel)을 통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알게 된 스키라는 서구 문화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이들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잡지의 편집에 적극 끌어들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교황’ 혹은 ‘마법사’의 역할을 행한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시인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 운동에 세례를 받은 철학자 로제 카이우아 (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 (Michel Leiris) 등은 정기적으로 「미노타우로스」에 그들의 글들을 기고했고,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후앙 미로 (Juan Miro) ,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달리 (Dali), 쟈코메티 (Giacometti) 와 같은 예술가들도 글이나 그들의 작업을 수시로 게재했다. 그리고 브랏사이 (Brassai), 만 레이 (Man Ray), 라울 위박 (Raoul Ubac)은 잡지의 사진 도판을 담당한 사진가들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만 레이의 <미노타우로스>는 1935년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 7호의 안표지를 장식한다. 머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한 여자 혹은 남자의 상반신은 강력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속에 있다. 남녀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미노타우로스는 팔과 가슴의 애매한 근육구조와 풍성한 겨드랑이 털, 그리고 그림자 속에 잠겨버린 복부 때문에 남녀양성적 존재, 혹은 성의 특색이 없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러한 재현양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초현실주의적으로 개작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해괴망측한 탄생의 이야기를 갖는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재물로 바치기로 한 신탁 황소를 재물로 바치지 않는다. 포세이돈은 이에 대한 징벌로서 미노스의 아내, 파지파에가 이 황소를 겉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파지파에는 황소에 대한 욕정을 풀기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에게 실물과 똑같은 암소를 만들게 한 후, 그 뱃속에 들어가 사랑에 빠진 황소와 수간을 한다. 이 교접을 통해 미노타우로스는 태어나고, 분격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건축한 미궁에 이 반인 반수를 가둔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미노스는 해마다 혹은 9년마다 7명의 청년과 7명의 처녀를 넣어 주게 되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아리안의 실’이라는 이야기가 비롯된다.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안이 건네준 실뭉치의 실을 풀면서 깜깜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의 어둠을 빠져 나온다.
  그런데 파지파에와 황소의 엽기적 사랑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남는다.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반인 반수는 사람의 머리와 짐승의 몸체를 갖는 반면, 오직 미노타우로스만이 짐승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반인 반수들은 인간의 머리로 사고하고 짐승의 몸으로 행동하는 반면, 미궁의 괴물은 짐승의 머리로 사고하고 인간의 몸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노타우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황소에 대한 정욕에 미쳐버린 그의 어미처럼 그는 이성의 통제, 합리적 계산, 논리적 사고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이다. 그는 동물로서 욕망하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존재의 표상이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로제 비트락이 스키라에게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연계를 기대하며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미노타우로스’로 추천한 것은 따라서 우발적인 것도, 단순한 기지의 산물도 아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로트레아몽 (Lautre amont 1846-1870)의 『말도로르의 노래 Chants de Maldoror』에 나오는 환상적인 동물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인간의 야수성의 탐구는 초현실주의의 일반적 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 황소머리로 대체된 미노타우로스를 자신들의 예술적 활동의 표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구를 지배한 이성주의, 합리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머리가 사고하는 이성과 논리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욕망과 광기의 화신이었다.
 
  서구는 17세기와 더불어 철학, 심리학, 정신의학 등 제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를 조직하고 경영하는 기술에 있어서 오직 이성의 언어, 합리적 행동만을 존중하고, 광기의 행동과 무의식의 언어를 무시하고 탄압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광기는 철저하게 일반의 시선에서 격리되고 감금되었으며,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욕망은 추잡하고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이성의 합리주의와 논리적 사고로 해명될 수 없는 인간 활동의 영역, 사고체계는 미신으로, 거짓으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완성되자, 서양의 문화사, 서구의 사회사의 전개는 합리적 이성의 제국주의가 꿈, 욕망, 무의식, 광기의 세계를 억압하는 양상으로 철저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논리중심주의는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와 맞물려 있었다. 데카르트적 이성중심주의가 모든 비이성을 문화의 영역 밖으로 추방해 버리고, 반이성의 입을 봉쇄하는 권력으로 자리잡는 것과 병행하여, 합리주의적 사고, 논리적 추론을 신봉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를 점진적으로 확고히 해나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치적, 군사적 통치권으로 연결시키는 급진적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유럽의 지배는 역사적 기정 사실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심각한 위협은 언제나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은 많은 지식인, 젊은 예술가들에게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야기했고, 이성 중심적 서양문명의 한계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되 돌이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사회지배를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체를 부각시켰다. 여기에서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전통적 서구문명의 위기와 몰락의 가능성을 보았고, 인간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인습적 사고의 틀을 파괴하고자 했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에 기반을 둔 모든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을 거부하고, 인간의 삶을 새롭게 갱신할 사고, 예술, 제도를 암중모색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심판관’이라 불린 앙드레 브르통에게 있어서 인간의 새로운 삶을 보장해줄 메시아적 메시지의 보고(寶庫)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과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인 사상과 이상에 대하여 차원 높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트로츠키 (Trotski,1879-1940)가 쓴 『레닌』이었다. 프로이드는 부르주아의 사회가 규정한 인간관을 일거에 전복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논리와 이성이 억압한 성적 충동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결코 이성이 지배하는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부조리한 욕망의 존재이다. 프로이드가 확립하는 새로운 인간관에 자극 받아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가 규정한 ‘현실 원칙’에서 벗어나 ‘쾌락의 원칙’에 몰두하고자 꿈과 무의식의 세계, 충동의 세계를 탐색했다. 현실 원칙의 근간을 이루는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17세기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이전의 미신적, 마술적 세계관을 탐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원칙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이미지, 우연의 사고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심리적 상태를 선호했다. 프로이드가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행동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발명한 자유 연상을 허용하는 최면 상태, 반수상태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개발하고자 몰두했다. 전제주의적인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만이  ‘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초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드가 기성의 윤리와 규범,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논리, 이성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을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초현실’에 도달할 분명한 이론을 부여했다면, 트로츠키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를 타개할 이데올로기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비쳐졌다. ‘진정한 삶’을 위한 인간 사고의 변혁을 ‘초현실주의 혁명’이 담당한다면, 진정한 삶을 위한 세계의 변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 행할 것이라고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트로츠키의 실각으로 인한 소련의 전제주의적 노선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의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공산당의 입당과 탈당,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와 회의 등 1930년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혁명을 향한 노선은 지리멸렬해진다.
  만 레이, 브랏사이, 라울 위박, 작크 앙드레 부아파르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은 1920년대 이후 간행된 수많은 초현실주의 저작물, 정기 간행물에서 그들의 사진을 통해 초현실주의 텍스트를 도해하고 설명했다. 특히 만 레이 (1890-1976)는 1921년 파리에 도착하여 마르셀 뒤샹의 소개로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인물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초현실주의가 탐구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성적 충동의 세계를 작가들의 텍스트에 의거하여, 초현실주의 이론의 여파 속에서 여러 사진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시각화했다.
 
  만 레이의 작업 중에서 우선 특기할만한 작업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여섯 번째 노래의 한 구절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사랑스러운”
  그러니까 이 시는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이 전혀 논리적, 인과적 상호 연관성이 없이 서로 함께 마주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 1 선언>>에서 1918년에 발표된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의 글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가 애호하는 이미지를 분명히 했다.
  “이미지는 (...)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키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접근된 두 개의 현실의 관계가 보다 거리가 멀고 적절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며, 더 한층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즉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킬 때 초현실주의가 기대하는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띤” 이미지가 태어난다. 만 레이가 예술을 반이성, 비이성을 구체화하는 행위로 규정한 다다이즘의 주동자, 트리스탕 차라의 서문과 함께 1922년 출간한 포토그램 사진집, 『감미로운 평원 Les Champs d licieux』은 그러한 예의 전형으로 남는다.
  두 번째로 만 레이의 사진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일상성 속에 내재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남녀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사물들을 적절한 각도에서 잡아내어 불합리한 성적 충동이 꿈틀대는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성에 대한 억압된 충동이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세 번째는 기존의 윤리와 인본주의적 사고를 초현실주의의 이념에 비춰 비웃는 작업이다. 자살을 유머로써 예찬하기도 했고, 항문에 손을 얹은 여인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한 후 <기도>라는 제목을 붙여 종교적 경건주의를 냉소했다. 솔라리제이션을 통해 체액을 방사하는 듯한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 한 후 <사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선언하기도 했다.
  189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만 레이는 파리에 도착한 30세 이후,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유명 예술가들과 적극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성가를 최고도로 높인다. 1976년 그가 파리에서 죽은 후, 여러 미술사가들은 그의 작업이 초현실주의의 핵을 형성하는 작업임을 인식하게 된다. 해서 장인적 노고가 결여된 유희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그의 사진작업은 빠른 속도로 높은 컬렉션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가짜 눈물을 붙인 한 여인의 눈을 클로즈업한 <유리 눈물> (1930-33 경)은 1993년 19만 3천 불에 경매되었고, 1995년에는 26만 6천 5백 불에 경매되었는데, 최근에는 100만 불에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만 레이, <미노타우로스, Minotaure>, 잡지 「미노타우로스」, 1935, No. 7의 속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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