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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9 수잔 손탁(Susan Sontag)





인권과 문화를 위해 싸운 지성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1.28~2004.12.28)


“사진은 무엇인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경우에서만 충격을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름을 할 때 판돈이 자꾸 올라가는 것처럼, 충격을 담은 사진이 자꾸 퍼져 나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전율을 느끼지 않게 된다.”(1977년 수잔손탁 저서 ‘사진론’ 중)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2003년 수잔손탁 저서 ‘타인의 고통’ 중)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비평가인 수잔손탁(Susan Sontag)이 지난해 12월 28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30여년간 암과 싸워왔으며, 이 과정에서 질병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기술한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1978년)을 펴내기도 했다.
수잔손탁은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와 독일의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사진에 관한 비평서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사진론’(On Photography)과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펴낸 저자이다. 또한 소설가이자 수필가, 영화제작자, 무대연출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문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회 제반의 문제에 명료한 해석을 제시해왔다. ‘On Photography’는 한국에 ‘사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에 소개되고, 90년대에는 롤랑 바르트의 글과 함께 ‘사진론’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출간돼, 사진 철학의 담론서로 읽혀져 있다. 88년 미국 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하기도 한 그녀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 중이던 김남주, 이산하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월간사진은 수잔손탁의 죽음을 전한 외신을 인용해, 그의 생전 활동과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수잔손탁은 1933년 1월28일 뉴욕에서 태어나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이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와 69년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 등 두권의 비평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은 ‘사진론’(On Photography)과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미국에서’(In America)를 비롯해 4권의 평론집과 6권의 소설 그리고 수종의 에세이, 영화 시나리오, 희곡 등 수많은 화제작을 집필했다. 그녀의 책은 현재 전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작가들이 사회 문제에 제 목소리 내지 않을 때 수잔손탁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남길 원했다. 수잔손탁의 현실참여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1966년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백인은 인류에 암적인 존재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처럼 베트남전의 허구와 미국의 은폐된 역사를 고발했다. 또 911테러 이후에는 부시행정부를 비판하고 미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는 되지 말자’는 뉴요커지 기고를 통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강하다는 건 누구도 의심 않는다.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며 일방주의를 맹비난했다. 또한 그녀는 이같은 말도 덧붙였다. “문화와 문명, 자유세계에 대한 비열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동맹 관계에 대한 세계의 분명한 자기 방어이다.”, “(도덕적인 일반적 가치의)용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테러를 가한)그들은 학살자일진 몰라도 겁쟁이는 아니다.” -AP통신


 


세 번의 암을 이겨낸 후 수잔손탁은 93년 여름 전쟁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서 그녀는 전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앞서 베트남전쟁의 찬반양론이 날카롭게 맞서는 동안 그녀는 대담하게 하노이를 찾았고, 911 이후에는 테러범은 ‘겁쟁이는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같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을 받아왔다. 시카고대 데보라 넬슨 교수는 “나는 그녀가 가장 훌륭한 비평가로 기억되리라 확신한다”며 “그녀의 저서는 30년, 40년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깨우침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감각과 장르 묘사에 탁월한 힘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수잔손탁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똑같이 진지함과 통찰력을 갖고 연구했다. 넬슨교수는 “전문화 시대에 그녀는 최정점에 선 전문가였다. 그녀는 예술가, 비평가, 실천가, 정치적인 좌와 우 어디에도 속하길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녀는 떠났지만 인류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와 아방가르드예술을 보는 방법을 남겼다”고 전했다. -시카고 마룬


 


그녀의 가장 최근 저서인 ‘타인의 고통’은 전쟁과 재앙 이미지에 관한 장편 비평집으로 지난해 출판됐다. 또 지난해 쓰여진 단편 비평문인 ‘타인의 고문’은 아부그라비 수용소에 갇힌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에 관한 글이다. 수잔손탁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전후 비평주의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의의를 남겼다. 그녀는 예술연구에 감각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고, 내용 보다는 심미적인 형태를 옹호했고, 고급 저급 문화 사이의 경계를(대단히 파괴적으로) 흐물어 뜨렸다. 사려 깊고, 사색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그녀의 글쓰기는 들쑥날쑥한 경계와 필연적인 주제를 안고 있는 현대예술의 소외와 절망을 선험적으로 탐구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단토 교수는 “그녀는 우리 시대 인간 삶의 깊은 문제에 문학과 철학적인 지성으로 종사했다”며 “그녀는 냉정하거나 객관적인 비평가라기보다, 모두에게 의미를 갖는 이슈에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너무 엄숙한 지성인과 달리 수잔손탁은 직접적이고 시의적절한 그리고 도발적인 문장과 발언, 그리고 영상시대에 적합한 외모 등으로 대중적인 유명인이었다. -뉴욕타임즈


 


다섯 살에 부친이 중국에서 죽었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잔손탁은 2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녀는 연극과 영화를 연출했으며, 미국의 세계 침략을 맹렬히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병과 싸워야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자랐으며,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보는 것처럼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수잔손탁은 26세에 뉴욕으로 돌아와 60년대 문화비평 특히 도발적인 에세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96년까지 보스니아 내전이 극점에 달할 때 사라예보에 머물며 국제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1960년대에는 목소리 높여 베트남전쟁을 반대한 편에 섰으며, 미군의 폭격이 절정에 달하던 68년 5월 하노이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같은 해 쿠바를 방문해 쿠바의 인권문제에도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1950년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줄곧 혼자 지내왔으며, 작가로 알려진 아들 데이비드만이 유일한 혈육이다.
-AFP통신


(월간사진 2005년 2월호 게재)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이미지를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에 적용해본다면 이 주장은 그럴 듯하지 않다. 사진이 지닌 이중적 힘, 즉 기록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각예술 작품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서로 상충된다는 주장이 있다. 고통을 묘사해 놓은 사진이 아름다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은 원래 그대로의 피사체에 가야 할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매체 자체에 관심을 쏟게 만들어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진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이런 사진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한편으론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 얼마나 장엄한 장관인가’라고 외치는 것이다.(타인의 고통 중)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이 재현된 예술품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 격렬한 것이다. 이런 욕망 안에서 고통의 재현물은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못한다.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성질의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순간을 쪼개내어 그것을 정착시킴으로써 모든 사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사진은 허구화한 연재이며 부재의 증거이다.(사진론 중)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 중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 한때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의 유럽 수도들에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은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얇게 져며낸 조각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공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도와준다. 휴가 중이거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사진론 중)









Posted by stormwat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