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크툼? 그것은 바르트의 사진 읽기에서 분리된 두가지 요소 중의 하나가 아닌가? 두가지 요소?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말이다. “스투디움은 나른한 욕망, 잡다한 흥미, 분별없는 취향 따위의 지극히 넓은 영역이다...스투디움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사진가의 의도와 마주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의도와 조화를 이루고, 찬성하든가 혹은 반대하든가 하는 행위인데, 그러나 언제나 내 자신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따져보는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란(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계약이기 때문이다.”(“조”. 32-33쪽)
그러면 푼크툼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르트는 푼크툼이 스투디움을 파괴하기 위해 또는 그것과 박자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nctum. 라틴어로 點을 뜻하는 말-역주)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홈이며 또한 주사위 놀이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또한 나를 상처입히고 주먹으로 때리는) 이 우연이다...늘 단일한 공간에서, 때로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참으로 드물게) 하나의 ‘하찮은 것’이 바로 (나를 찌르는) 푼크툼이다...그것이 선명한 윤곽을 갖건 혹은 그렇지 않건간에 하나의 추가(supplément)라는 것이다. 푼크툼은 내가 사진에 덧붙이는, 그러나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조”. 32, 46, 58쪽)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의 사례로 이영준이 안동 하회마을의 돌담길을 찍은 주명덕의 『경북 안동』(1968)에서 “사진 앞 아래쪽에서 왼쪽 위로 난 자전거 바퀴 자국”을 들 수 있겠다(근데 이영준의 목소리는 케르테츠A. Kertesz의 『바이얼리스트의 발라드』(1921)를 읽은 바르트의 목소리를 닮았다. 물론 그 사진에 나타나는 도로의 결은 바르트가 읽었던 단지 수많은 (인간의) 발길로만 다져진 도로로 국한되기보다, 이영준이 주명덕의 『경북 안동』을 보면서 말했던 자전거 바퀴 자국 그리고 마치나 자동차 바퀴 자국도 겹쳐져 있다). 이영준은 “자신의 신체를 그 사진의 공간 속에 이입”시켜 그 자전거 바퀴 자국을 “권 대감은 버석거리는 포도자락을 휘날리며 ‘이런 고얀지고’하며 돌담의 저쪽으로 사라졌다는 식으로” 해석한다.(“이”. 109쪽)
그 이영준의 해석마저도 바르트의 목소리와 닮았다: “흙투성이 도로에 파여진 결들은 나에게 중부 유럽에 와 있다는 것을 확신을 준다. 이 사진을 보면(여기에서, 사진은 참으로 자신을 넘어선다. 그것이 이 예술의 유일한 표지가 아닐까? 마치 靈媒처럼 자신을 無化시키고 이미 하나의 기호가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 예전에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여행할 때 지나갔던 작은 마을들을 나의 온 육체로 알아보는 것이다.”(“조”. 48, 51쪽)
바르트가 케르테츠의 사진 속에 자신의 온 육체를 이입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이영준은 자신의 신체를 주명덕의 사진 속에 이입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말하자면 이영준이 사진의 공간에 권 대감을 등장시켜 자전거 바퀴 자국을 인간의 의미를 위한 해석으로 차용하듯이, 바르트 또한 자신의 주관적인 기억을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이다. 그들은 사진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고자 한다. 『바이얼리스트의 발라드』나 『경북 안동』은 하찮은 것들과 동거하면서 “언제나 하나의 모습을 갖도록 강요”(“조”. 19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꼴(形)로 열려져 있다.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푼크툼은 무엇일까?
이영준은 주명덕 사진의 짙은 어두운 톤을 푼크툼으로 간주한다. 주명덕은 숲이나 꽃들 혹은 풀들을 찍지만, 그 각각의 풍경은 어둠 속에 �혀있다. 그러나 노출이 숲이나 꽃들 혹은 풀들이라고 말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이 가시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출은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어느 곳에 시선을 둘지 망설인다. 당신은 여러 곳에 시선을 흩뿌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 주명덕의 풍경-사진에는 중심(원근법)적 시점이 부재한다. 그것은 당신의 시선을 사방팔방으로 산재케 하는 펼쳐진 풍경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신정아의 시선은 엇갈리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고 평행을 이루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유혹자가 말했듯이, “그것은 순수한 의미를 찾고자 하는 당신에게 유령처럼 나타나 당신의 머리를 공백으로 채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유령은 꼴(形)/뜻(象)이라는 대립 구조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유령은 그런 대립 구조보다 선행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령의 놀이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다.” 유령의 놀이?
“...단순한 풍경사진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자연은 피사체에 불과할 뿐, 작가들이 바라보는 것은 자연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카메라에 잡힌 자연 풍광들을 통해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취를 보게된다. 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 평면을 보게 된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예술가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예술가의 눈길에 의해 강간되고 길들여진 야생의 자연,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의 처연함, 이 모든 것의 인식이 주는 독특한 미적 체험이 이 전시회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패러독스이다.”(『모노크롬-자연과 영혼-에 부쳐』김혜경. 출저: monochrom : natura & soul. Gallery Artbeam. 1997. 쪽수 기입 부재)
풍경 사진은 풍경이 아니다. 이 너무 명확한 말은 사진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진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사진의 풍경이란 말인가? 왜냐하면 실재의 풍경이 사진화 되었을 때, 그 사진은 이미 자연의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풍경-사진은 그 자연의 풍경을 회복할 수 없단 말인가? 노출은 지나가면서 김종태의 진술을 빌려 실경산수화가 진경산수화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김종태는 정선의 산수화를 실경산수화 안에 진경의 의미가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정선의 산수화는 실경 속에 진경의 의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허다한 평론가와 미술사학가들이 정선의 그림을 평가할 때 실경과 진경을 혼돈하여 설명하였다. 정선의 그림이 특출한 것은 사실이고 감탄할 만한 요소가 가득차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왜 그의 화풍이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키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구도가 어떻고 표현이 어떻고 왼편의 윤택한 산이 있고 수직으로 된 암산이 있고 오른편이 어떻고 하는 소리는 겸재의 그림을 오욕되게 할 뿐이다. 겸재의 근본적인 회화사상은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심오한 진경의 의미를 깨달은 데에 있다.”(“김”. 186쪽)
하지만 정선의 그림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그가 도가철학과 불교철학을 깊이 이해한 화가라는 진술만으로 그의 그림이 진경이라고 단정내릴수는 없지 않은가? 김종태는 정선의 진경산수에 대한 적절한 논의로 최완수의 진술을 인용한다: “인왕산 특유의 잘 생긴 백색 암벽들이 마치 음화인 양 겸재의 대담 장쾌한 묵찰법(墨擦法)에 의해 검은 바위로 표현되어 있는데 묵백의 상반된 색채 감각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백색 화강암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감을 그대로 인지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나무의 표현도 둥치 거친 붓으로 속도 있게 처리함으로써 일체의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제하였는데 그것이 가지는 우람하고 장대한 기품이 우리 주변에서 보는 수묵의 특징을 너무도 잘 반영해 준다. 특히 이곳에서 보이는 버드나무․소나무․전나무․느티나무 등 노거수의 거친 표현은 바로 그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재현해 낸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이것이 모두 겸재가 60평생을 사생으로 일관하면서 터득해 낸 진경의 묘리다.”(“김”. 187쪽)
그런데 노출에게 그 최완수의 진술은 도교의 철학적인 이념이 들어 있는 자연의 풍경화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실경을 토대로 하여 작가의 예술적 재량과 재질에 의하여 산수화를 이룬 실경산수화로 들릴 뿐이다. 그러면 김종태 자신이 진술한 정선의 그림에 관한 해석을 들어보자: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의 「금강전도」는 “구도면에 있어서 전면을 꽉 채우는 구도법을 택하였으며, 또 주봉을 정하지 않고 여러 군봉(群峯)을 실경대로 그리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그 필법이 예리하고 빠르며 수림이 별로 없고 대부분 암산의 표현이 양광(陽光)으로 표현되어 실경 그대로의 운치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더구나 골짜기와 좌편의 수림은 겸재 초기의 숙련된 필법인 미불점법(點法)으로 처리하여 겸재 특유의 의경을 표현하였다.”(“김”. 앞의 쪽수)
정선의 「금강전도」에 관한 김종태의 해석 또한 최완수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실경을 토대로 하여 작가의 예술적 재량과 재질에 의하여 산수화를 이룬 실경산수화로 들린다. 그들의 진술은 구도가 어떻고 표현이 어떻고 왼편의 윤택한 산이 있고 수직으로 된 암산이 있고 오른편이 어떻고 하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아니다. 김종태는 정선의 그림에 자연의 신비사상과 도가의 유명(幽冥)사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언급했다:
정선의 “작품 속에서는 표현의 강약이 살아 있는데 이것은 일찌기 노자가 말한 우주 생성의 원리인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 원리를 이용하여 청나라 초기의 화가 석도는 1획론을 창안하였는데 정선의 그림 속에는 강약이 맞는 리듬이 있으며, 하나를 강하게 그리고 그 밑에 약한 미불점법이 뒤따른 것으로 보아 석도의 1획론을 잘 이해한 것 같다.”(“김”. 188쪽)
아니, 정선의 그림에 표현된 강약이 어떻게 석도의 일획론과 관계하며 더욱이 노자의 우주 생성 원리와 관계한단 말인가? 주명덕의 풍경시리즈는 어두운 톤으로 가득한 숲이나 나무들 그리고 꽃들이나 풀들 등의 풍경을 찍은 것이다. 하지만 김혜경은 노출에게 그것을 단순한 풍경사진으로 오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물론 당신은 한 점의 사진작품을 보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고자 할 것이다. 그 의미는 김혜경이 말했듯이 작가 주명덕이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마치 그 점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을 달리 생각해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의 욕망의 흔적(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인 인간적 자취)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읽(보)고 싶은대로만 읽(보)고자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노출이 앞에서 말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에 주명덕 자신의 주관적인 옛 향수가 지독하리만치 제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노출의 진술 또한 노출이 읽(보)고 싶은대로만 읽(보)고자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출은 노출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노출이 본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그가 가능한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있는 그대로와 표현에는 피치못할 간극이 있다. 왜냐하면 풍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표현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출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는 문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즉 이미 의미로 오염된 시각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자연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에는 절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절제는 다름아닌 주체의 의미에 대한 절제이다. 노출은 그것을 주명덕이 찍은 장소로 언급했다. 말하자면 주명덕은 흔히 아름다운 혹은 특별한 풍경을 찍고자 하는 것과는 달리 노출이 손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불특정한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노출의 시각에 덜 길들여진 것이라고 노출은 생각한다(특정한 장소,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장소는 우리의 의미들로 대리되어 버리기까지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노출은 그 사례로 사람들이 흔히 주명덕의 풍경사진을 보고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나 그 풍경사진에 말이 사라졌다는 이영준의 진술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노출이 몇 평론가의 글을 인용했듯이, 그들은 그 주명덕의 풍경사진을 그들의 시각으로 길들이게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은 김혜경이 말한 패러독스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문제는 그것을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출이 김종태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정선의 산수화를 진경산수화로 부르는가 하면 때로는 실경산수화로 부르기도 한다.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뜻하(지 않)는가? 혹시 그것은 김종태가 말했듯이 정선의 실경 속에 진경이 표현되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진동선이 구분했던 진경/실경이라는 대립구조는 형이상학적 담론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진동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풍경(실경)은 김혜경에게 자연 자체보다는 인간의 자취, 즉 황폐한 문명, 억눌린 욕망, 슬픔, 도피, 꿈 그리고 추상적 평면으로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예술가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예술가의 눈길에 의해 강간된다고 김혜경은 냉정하게 단정내린다. 하지만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자연의 풍경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진의 풍경을 폭로(révélation)한다는 점에서 자연을 강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 김혜경은 사진의 요술적인 힘을 함정이 아니라 운명으로 착각한 것 같다. 때문에 그녀가 의도하지는 않았다 해도, 자연에 대한 관람자의 우위와 인간정신의 강력한 파워가 관람자의 눈길에 의해 강간될 수도 있다는 점을 스스로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주명덕이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일듯 말듯 흐려 놓는다고 신정아는 중얼거린다. 이영준은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나타나는 검은 톤이 그 자체로 무엇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말을 피하는 그만의 방식으로 간주한다. 그는 그것을 지우기에 비유한다. 그러나 당신이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주명덕의 풍경-사진은 숲이나 꽃이나 풀 등이 완전히 지워진 검정-모노크롬(black-monochrome)은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흑․백-사진(monochrome)이지만 다양한 묵(墨)의 색처럼 폴리크롬(polychrome)이다. 이영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뭔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같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사라진다. 그와같은 묘한 분위기를 이영준은 마치 지우려는 힘과 지워지지 않으려는 힘이 맞서고 있는 대치 상태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아니다. 그것은 서로 맞대하여 버티는 것(對峙) 혹은 서로 마주 놓음(對置)이라는 대립적인 관계라기보다 오히려 변화를 뜻한다.
그러면 그것은 하이데거(M. Heidegger)가 존재문제(Seinfrage)를 탈-구축(De-struction)하기 위해 존재(Sein)라는 문자에 삭제표시를 한 것처럼 풍경(존재)에 삭제표시를 한 것인가? 이를테면 그것은 이전의 개념이 변화했기 때문에 혹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지운 것이지만,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삭제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삭제한 것이라고 말이다(따라서 그것은 이영준이 말한 “사라짐의 저항”이라기보다 차라리 사라짐의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것은 지금 스스로 현전하는 것이라고 단정내릴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러면 그것은 지금 현전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교부된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그것은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를 유보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 그것은 나타남-사라짐(Erscheinen-Verschwinden)이라는 존재론적 차이에 사라지는(zu verschwinden)을 덧붙인, 즉 나타남-사라짐의 사라지는(Erscheinen-Verschwinden zu verschwinden)이 아닌가?(혹시 주명덕의 풍경-사진에서 드러나는 어두운 톤이 다름아닌 존재와 부재 사이에 삽입시킨 사라지는의 기능을 떠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왜 데리다는 존재론적 차이를 유보시키는 것일까? 유영미(you young me)는 『책보다 표지가 더 좋다』에서 그 이유를 관념적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관념적 위험? 그/녀는 그 문구의 옆에 괄호를 위치시키고, 그 괄호 안에 거세의 동어반복(Topologie der Kastration)이라고 삽입했다. 그러면 존재론적 차이의 유보는 거세의 동어반복에 처할 위험에서 이탈하는 것이란 말인가?
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 사진미학을 구분하는 잣대로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스투디움(studium)'이란,
대상에 대한 호의와 맥락적 관심은 있으나 특별한 강렬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감정을 의미한다.
즉 '외부 여진 문화적 앎?'을 전제로 한 가장 일반적인 사진감상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라틴어로 '점'을 의미하는 '푼크툼(punctum)'은 순간적으로 꽂히는 어떤 강렬함을 의미한다.
즉 사진의 세부적인 구성요소 등을 통해 감상자나 뇌리 속으로 불현듯 찾아오는 정서적 울림이 바로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푼크툼은 보편적이고 분석적인 맥락 이전에 감상자의 개인적 취향이나 경험, 잠재의식 따위와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이다. 따라서 푼크툼을 관통하는 미학적 특성은 논리성이라기보다는 우연성이다.
롤랑 브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은 위험한 것이지만, 스투디움은 대상을 코드화시킴으로서 사회와 화해시킨다.
푼크툼은 세부,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대상이다.
이 하찮은 세부가 사진에 관한 나의 시선을 흥분시킨다.
그것은 관심의 격렬한 변화, 하나의 섬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