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사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9.07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와 사진 형식의 혁명






로드첸코(Alexandre Rodtchenko, 1891-1956)는 전방위 예술가였다. 화가, 조각가, 사진가였으며, 문자, 포스터, 가구, 실내 디자이너인 동시에 연극무대의 장식가였다. 그의 전 예술활동은 이른바 ‘러시아 구성주의(Russian Constructivism)’를 선도했다. 러시아 구성주의를 이끈 또 다른 선도자들인 엘 리시츠키(El Lissitsky)와 한스 아프(Hans Arp)의 정의에 따르면,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세계를 테크닉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며 (...) 구성주의는 수학과 예술, 예술대상과 기술 발명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을 확정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예술과 테크닉의 긴밀한 협동”을 추구한 시각예술 운동이었다.
  기술공학적 요소를 예술작업에 도입하는 로드첸코의 작업은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공학 설계의 기본도구인 자와 콤파스를 사용한 기하학적 비구상 작품을 생산하면서, 말레비치(Malevitch)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순수 기하학적 추상 미술에 합류했다. 회화의 공간에 테크닉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현실의 재현이라는 리얼리즘 원칙의 완벽한 포기, 간단 명료한 선과 도형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귀결되었다. 특히 로드첸코는 선에 구성의 중요성을 부여했는데, 그에 따르면, “선은 구성하고 (construct) 창조하는 데 있어서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형태, 색, 모양새에 의존함 없이 선만으로 공간구성을 실현한 회화인 <선들로 이루어진 구성>을 제작하고, 이러한 양상을 조각 분야에도 적용하여, 1920년을 전후로 선에 매달린 구조물들을 제작한다. 받침대가 없는 그 단순 명료한 기하학적 형상들은 전통적 조각의 질량감을 거부하고,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모빌의 양상을 보여준다.
  러시아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로드첸코의 전통 파괴적 회화, 조각 작업을 부추긴 것은 무엇보다도 1차 세계대전 (1914-1918)으로 표명된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과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킨 1917년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미술의 형식적 제 양상들을 전복하면서, 사회주의 이념으로 새롭게 탄생한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들이 보기에 타도해야 할 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만이 아니었다. 그 하부구조를 바탕으로 생성된 미술형식, 이념도 마땅히 파기해야 할 대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생산하고 소비한 회화와 조각의 생산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은 원근법과 이에 의거한 현실 환영주의였다. 원근법은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현실 공간을 사물의 거리와 크기에 따라, 수학에 의거하여 현실의 환영을 재현하는 원칙으로 근대 미술 생산의 핵심사안이었다. 원근법은 근대 회화와 조각이 보여주는 현실 환영주의, 즉 회화와 조각이라는 재현을 바라보면서, 실제 현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려는 원칙을 생산한 원인인 동시에, 또 재현에 실제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시도의 결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현실 환영적 재현을 위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인 동시에 조각과 회화의 현실 환영주의를 본격화시킨 결정적 요소였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의 근대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귀족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점진적 혹은 급진적 잠식의 역사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의 서구사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지배권의 확립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그 이후의 서구의 역사를 부르주아 계층의 정치, 경제적 지배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근대의 주요한 문화 생산과 소비의 역사 역시 계급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귀족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완벽한 지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문화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것은 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발생한 다다이즘, 러시아 구성주의와 같은 급진적인 전위 예술운동이었다.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 생산의 주도권은 아닐지라도, 그것의 소비는 일반 대중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예술의 제 형식들을 타파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일반 대중에 접근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구성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예술생산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제 원칙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양상을 띠었다. 다시 말해 고답적인 예술의 생산을 위해 준수하는 미학적 제 규범, 부르주아 예술을 구성하는 제 형식들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시각 예술의 경우,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이 가장 중요한 생산 원리로 삼았던 것은 이미 말한 것처럼 르네상스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원근법과 이에 의거한 현실 환영주의였고, 짜르의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에 참여한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이 원근법과 현실 환영주의를 타락한 귀족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현실재현 규범으로 파악하고, 이것을 새로운 재현의 영역에서 몰아내고자 했다.  그들은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의 취향에 부합하는 내용을 배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환영주의와 관련을 맺는 원근법까지도 송두리째 거부했던 것이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은 부르주아 사회의 산물일 뿐이었다. 대신 그들은, 로드첸코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 타트린(Tatline)의 슬로건을 빌면, “삶 속의 예술”을 목표했다. 사회적 공리성, 현실적 실용성을 천박한 것으로 간주하고 오직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서구의 근대 미술을 거부하고, ‘삶을 위한 예술’, 사회주의 건설에 봉사하는 예술을 지향했다. 로드첸코가 문자, 포스터, 가구, 실내 디자인 그리고 연극무대 디자인을 행한 것은 바로 ‘삶 속의 예술’을 실천하는 양상이었다. 흔히 실용미술, 응용미술이라 불리는 이러한 디자인 작업은 서구의 근대 미술의 위계질서 속에서는 실용성, 현실적 유용성에 봉사한다는 이유로 하위장르를 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상한 미의 이상, 미의 순수성을 포기한 채,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천박한 기예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이 정치, 경제의 제반 질서를 전복시켰듯이, 러시아 구성주의자들도 혁명의 여파 속에서 전통적 미술의 위계질서를 뒤집고자 했다. 서구의 부르주아 사회가 기계적 예술, 천박한 기예로 여겼던 것을 그들 예술생산의 주요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미술 생산제도의 위계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기를 원했다.
  사진 매체에 로드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1923년부터 다른 사람의 사진들로 몽타주와 콜라주 기법으로 포스터와 마이아코프스키(Maiakovski)의 시집과 같은 삽화 디자인 그리고 예술좌파전선이라는 의미의 잡지인 「레프 Lef」의 표지 디자인을 시작하면서였다. 1921년 이미 “예술 타도, 테크닉 만세”를 부르짖으며, 예술 생산에 있어서 기술공학의 중요성을 과장적으로 강조했던 로드첸코는 사진에서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보았다. 게다가 사진은 그 직접적 가독성(可讀性)으로 말미암아 홍보와 프로파간다와 같은 사회적 유용성에 특히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곧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사진들로 몽타주, 콜라주 작업을 행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라이카로 직접 찍은 사진들로 몽타주, 콜라주를 행했다. 1924년에는 조폐공사의 노동자들의 작업과 화폐 작업공정에 관한 사진 르포르타주를 실행했다.
  로드첸코의 사진작업은 초상, 도시의 정경, 건축물, 농업과 산업 활동에 관한 르포르타주, 군 생활에 대한 보도사진, 서커스와 스포츠 사진 등 사진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있지만, 결코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사진을 공리적 실용성의 관점에서 접근했던 그는 전적으로 출판을 위해서만 사진을 생산했다. 즉 책의 삽화, 책 커버 디자인 혹은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하는 포스터에 사용하거나 「건설중인 소련」과 같은 잡지의 보도용으로 이용하였다.
  로드첸코의 사진은 분명한 형식적 특성을 갖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귀족적이고 부르주아 미술의 전통적 구도, 구성방식을 전적으로 부정했다. 원근법을 해체하는 대각선 구도, 극단적인 부감과 앙각 촬영 그리고 과감한 클로즈 업과 비대칭적 구도는 그가 애호한 사진 형식이었다. 
  1934년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은 로드첸코의 사진 스타일을 해제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우선 사진가는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앙각으로 바라보면서 대각선 구도의 좌측 상단부에 위치시킨다. 지평선과 어떠한 소실점도 상정하기 곤란한 이와 같은 구성은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현실을 보고 있다는 환영감을 심어주는 원근법을 해체한다. 다시 말해  2차원의 화면에 3차원의 깊이감을 부여하는 소실점이 부재하는 까닭에, 사진 이미지는 3차원의 공간감보다는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한다. 원근법에 의한 시각적 재현이 부르주아가 태동한 르네상스의 발명인 동시에, 귀족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근대 미술이 철두철미하게 신봉한 재현원칙이라면, 로드첸코의 원근법의 부인은 볼셰비키 혁명이 부정한 부르주아 사회의 재현원칙을 거부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채광 간막이 벽이 만들어내는 좌측 중심부의 대각선 그림자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각형 무늬는 반 자연주의적(anti-naturalistic)이며, 반 원근법적인(anti-perspective) 모자이크 구조를 상기시킨다. 모자이크 기법이 현실 환영적 재현을 원칙으로 삼은 서구 근대사회의 이전, 다시 말해 중세 시대의 재현양상인 동시에 서구와 대립되는 동방의 재현형식이라면, 로드첸코가 선호한 포토몽타주, 콜라주 혹은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의 중심 없는 이산적(離散的) 구조는 반 르네상스적이며, 탈 서구적이다. 그것은 가상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근대 이후의 서구의 시각적 재현을 일탈, 거부하는 재현구조이다.
  사실, 로드첸코가 라이카로 실험한 극단적 부감촬영과 앙각촬영 역시 원근법에 의거한 귀족적, 부르주아적 재현형식을 거부하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선택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겨냥하고, 아래에서 위로 치켜올려 찍는 촬영은 현실대상을 압착시키고 낯설게 만들면서, 자연주의적, 현실 환영주의적 재현을 무화시킨다. 이 두 기법은 대각선 구도와 함께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시점을 거부하면서,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창출해낸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관점에 의한 신생 러시아 인민 공화국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잠재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유도해낸다. 노동자, 청소년은 앙각 촬영에 의해 극적으로 고양된다. 사회주의 이념은 그들을 숭상한다는 점을 파격적인 앙각 촬영이라는 형식의 힘을 빌어 선포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도심 풍경, 노동 현장, 운동 장면을 과격한 대각선 구도로 로드첸코가 포착하는 것은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역동성을 드러내려는 의도의 형식적 양상이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는 인민들의 에너지를 구성이라는 형식적 요소 속에 내재화시키려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로드첸코의 극적인 대각선 구도, 극단적인 앙각과 부감 촬영과 같은 기법은 정적이고, 균형 잡힌 회화적 구성(composition)을 거부한다. 그것들은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본래 어의에 부합하는 건설, 구축, 구조(construction)와 같은 역동성을 본질로 삼는다. 그런데 로드첸코의 이러한 역동주의는 무엇보다도 라이카라는 사진기의 기동성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어느 상황에서나 다루기 편리한 라이카의 발명이 없었더라면, 로드첸코가 보여준 그 파격적 역동성과 기동성은 획득될 수 없었다. <라이카를 멘 젊은 여자>와 같은 일상의 시각을 파기하는 구성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라이츠 카메라(Leitz Camera)의 합성어인 Leica는 오스카 바르낙(Oscar Barnack)에 의해 1910년대 초반부터 개발에 들어가, 1925년 최초로 시판된다. 커튼 방식의 셔터막,  뷰 파인더를 통해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거리계를 갖춘 라이카는 금속 매거진 속에 감겨져 있는 24 x 36 mm 영화필름을 사용했다. 40 컷을 연속 촬영할 수 있는 조작이 간편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이 카메라는 첫 해에는 약 1.000대가 팔리고, 1929년에는 약 15.000대가 판매된다. 1933년에는 1.000분의 1초의 셔터 스피드에 도달하여, 거의 모든 장면의 순간 촬영을 허용한다. 필름감도 ASA 4에서 50에 이르는 값싸고 좋은 화질을 보장하는 필름의 개발을 가속화시킨 라이카는 포토저널리스트는 물론이고, 최상의 시점(vantage point)을 천재적으로 개발한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tz), 카르티에 브레송(Cartier Bresson)의 작업을 가능하게 한 매체였다.
  라이카를 통해 파격적인 화면구성, 역동적인 러시아의 사회상을 구축했던 로드첸코의 사진작업은 1930년대 후반 이후 소련 예술계에서 점진적으로 소외된다. 서구의 전통적 재현형식인 원근법과 현실 환영주의를 파기한 그의 아방가르드적 성향은 탄압적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스탈린의 정책에 맞물려 “프로레탈리아 계급에 이질적인 취향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예술생산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1933년에서 1941년까지 잡지 「건설중인 소련」에 소련사회를 홍보하는 사진작업을 10회에 걸쳐 담당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부르주아적 서구 사회가 확립한 보수적 재현 형식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상투적으로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산당의 강령으로 자리잡자, 그의 혁신적 형태탐구의 작업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예술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는 예술의 제 형식까지도 혁명적으로 일신하려 했던 진보주의적 예술운동이 보수 회귀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에 의해 배척되는 실증적 예의 하나를 로드첸코의 작업은 예술사에 남기고 있는 셈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라이카를 멘 젊은 여인>, 1934










Posted by stormwat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