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표현의 계보
도 시
도시의 경관을 찍었던 사진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찍었던 사진의 두가지 흐름
에드워드 스타이켄, The Flatiron, 1906
1987년 초여름, 시카고의 사진가들이 술렁거린 일이 있었다. 수집가이자 조직책인 잭 제페가 발기인이 되어 시카고 미술관, 자연박물관, 역사자료관, 공립도서관, 현대사진미술관 등 사진관계기관이 협찬하여 변해가는 시카고를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기획서와 작품의 포트폴리오 제출에 모인 작가는 170명, 그중에서 대표적인 40대를 중심으로 33명의 사진가가 선출되었고 1년 정도의 제작기간이 걸렸다.
데이빗 트라비스, 케네스 백허드, 데니스 미러 클라크 등의 큐레이터와 <세계사진사>의 필자인 로젠블럼 부부가 초대되어 편집된 것이 <변모하는 시카고 Changing Chicago>라는 사진집이고, 1989년에 앞에서 언급한 다섯 군데의 장소에서 사진전이 동시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도시를 촬영하는 이런 다큐멘터리는 옛날부터 많았다.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하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시의 경관을 찍은 것이다.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곳이 새로운 시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했던 샤를 마르필의 시도는 으젠느 앗제에 의해 절정에 도달했다. 19세기 말부터 대략 30년정도 파리를 배회하며 촬영했던 앗제의 파리는 기록이라고 하는 행위를 철저히 함으로써, 기록이라는 그 목적 자체를 초월해 버렸던 사진이다.
앗제의 사진에 찍힌 것은 옛 파리의 외관 뿐만이 아니라, 그곳이 사진 아우라(Aura)이다. 앗제의 사진은 배우에 뜻을 두었지만 좌절했던 그의 ‘극장’이었고, 막이 오르기 전의 정적과 무대라고 하는 제단(祭壇)에서 펼쳐진 신화의 여운이 감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사진을 ‘신화’의 영역에까지 올려놓았다.
‘상상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자발적 융합이며, 예술작품을 창조한다고 하는 의식작용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위치의 시적 차원과 초현실에의 도달’을 지향하는 초현실주의자가 앗제의 작품에 심취하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으젠느 앗제
앗제의 시선을 이어받아 도시의 경관을 찍은 사진가들
앗제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작가를 손꼽으려면 한이 없다. 그러나 굳이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역시 앗제를 발견해 낸 장본인인 베르니스 애보트일 것이다. 만 레이의 조수를 하고 있던 에보트는 앗제의 작품을 세계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변모하는 뉴욕>으로 이름지은 뉴욕의 도시풍경을 찍은 작품으로 그의 스타일을 답습하였다. 변해가는 뉴욕의 외관을 통해서 도시의 고동을 강하게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베르니스 애보트
도시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사진가들
앞에서 말했듯이 도시를 촬영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19세기의 사진가들은 우선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주목하고 그곳에서의 사진의 역할을 생각했다. 사진을 사회개량의 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뉴욕의 빈민가의 상황을 호소했던 제이콥 A.리스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미성년 노동자나 이민상황을 찍은 루이스 W.하인의 사진은 사회의 시스템마저 변화시킬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다.
19세기의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미지를 가정에까지 끌어들인 것은 지금처럼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나 책에서 사진의 홍수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현대에서 보면 감상주의(Sentimentalism)나 낭만주의(Romanticism)로 보여질 수 있는 이런 사진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는 이러한 접근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기관이나 포토리그(Photo League)*②등의 많은 사진가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질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능가한 것은 역시 FSA 프로젝트*③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사회적 이상이 존재하고, ‘현실의 거울’로서의 사진의 기능을 역시 믿게 만들었던 획기적인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상징되었던 사회적 모순의 표출시대를 체험했던 사진가는 자신의 카메라의 정의를 우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사체로서 선택된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 사이에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다양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도시 속의 복잡하게 얽혀진 미로와 같은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항상 의식하면서 다가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60년대 사진가들은 19세기의 사회를 개선코자 한 사진가들과 주제를 같이 하면서도, 정의를 내세워 자신의 사진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오만함은 보이지 않는다. 뉴욕의 동부 할렘에 있는 히스패닉 거주지의 사람들이나 지하철의 승객을 촬영한 브루스 데이비슨(Bruce Davidson)도, 중서부의 모터 사이클족이나 텍사스의 수형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던 대니 라이언(Danny Lyon)도 깊이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냉철한 눈으로 셔터를 누른 그 작품에서는 억지로 강조된 듯한 가치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도시의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찍었다는 점에서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하나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변모하는 시카고>의 사진집을 보고 놀란 것은 인간관계에 관심을 둔 사진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사체와 자신과의 거리와 관계를 항상 생각하면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눈을 향하고 있다. 도시라고 하는 곳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도, 모순도, 문제도, 환희도 그리고 그것을 나타낸 사진의 시각적 뒤섞임도, 좋든 나브든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안되는 절실함과 바로 정면에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진을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이 오래된 것만으로 단번에 옛것으로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속단이다.
대니 라이언 브루스 데이비슨
*②1936년부터 1951년에 걸쳐서 뉴욕에서 활동을 한 다큐멘터리 사진가 집단으로 당대의 가장 정치적인 참여 집단이었다. 사진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세계에 대한 참된 이미지를 기록하는 것이 사진연맹의 창설 목적이었듯이 그들은 외부 세계를 심오하고 냉정하게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응용하였다. 비록 정치적 성향을 지니고 출발하였지만 - 사진연맹의 원래 명칭은 ‘영화와 사진연맹’(Film and Photo League)으로, 1930년에 좌익성을 띤 국제노동자구원협의회의 문화활동의 일환으로 결성되었다. 1936년에 영화제작자들과 결별하면서 사진연맹으로 개칭하였다. - 뛰어난 많은 사진가들의 작업과 작품집을 통해서 사회적 다큐멘터리(Social Documentary)의 접근방법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아론 시스킨드를 중심으로 할렘을 탐색하는 집단적인 계획을 세워 실업과 빈곤에 처한 도시 노동자들을 낭만적이리만치 동정적인 시각으로 촬영하였다.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루이스 W.하인, 시드 그로스만, 솔 립손, 헬렌 레빗, 아론 시스킨드 등을 들 수 있다.
*③ F.S.A(Farm Security Administration;농업안정국)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사회전체의 복지를 목표로 시행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공황에 처한 농민의 구제와 정착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국(局)의 명칭.
대공황 속에서 날씨의 불순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농민들 중에서 중소의 자영농민은 소유지를 매각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5년 이들을 강제적으로 정부 소유의 농장으로 이주시킬 목적으로, 농업안정국의 전신인 재이주 행정국(Resetlement Administration)이 창설되었고, 설립책임자로서 콜롬비아대학의 경제학자인 터그웰(Rexford Guy Tugwell)이 선임되었다. 터그웰은 설립 당시의 보수적인 의회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즉, 농민이 처한 궁핍한 상황을 일반사회에 알릴 필요성에 따라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사람으로서 콜롬비아 대학의 동료교수인 스트라이커(Roy Stryker)를 초빙하였다. 스트라이커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적절한 수단인 사진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자료부문의 스텝으로서 우수한 사진가들을 모집하였고, 이들 사진을 민중을 설득하는데 사용하였다.
김남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