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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6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1









 

첫번째 테마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말할 때 언제나 반쪽 세상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가 방아 찧는 달의 앞면만 보고 ‘저게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달의 뒷면은 인공위성을 동원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앞면에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은 단지 상상과 추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세상에는 가시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달의 뒷면과 같이 은닉된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펴면 세상 모든 일이 두 눈에 들어오고, 하루종일 우리의 눈과 귀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뉴스와 심지어 지하철 잡지 가판대 유리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잡지기사들까지도 믿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무차별한 정보 입력을 강요한다. 이러한 세상 정보들은 우리의 의식 구조를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자동 입력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리고, 결과적으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이러한 정보 밑에서 모든 주관적 판단 기준과 감각력을 무효화시키는 소위 자아상실의 시대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오늘날 모든 상품 구매는 거의 유행이나 브랜드에 의한 수동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자신의 의향이나 주관은 사실상 진리 혹은 정답이라는 타인의 객관적 기준 혹은 물질적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19세기 합리주의의 산물인 사진의 진술은 오늘날 법정에서 진술하는 증인의 말보다 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객관 타당한 지식놀이(J.-F. Lyotard) 속에서 모든 것은 실증되어야 믿게 되는 현실이 되었다.

 

반대로 어떠한 사실이 일단 검증되거나 명백히 논리화(대표적으로 법과 제도)되면 그것은 일종의 수학적 공리가 되면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이러한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민간설화 혹은 기운(氣)이나 직감 그리고 운명 등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많은 설화적 지식(J.-F. Lyotard)을 감각과 징후의 맥락 속에서 믿었다. 이때의 믿음은 현상에 대한 진실 혹은 본질의 추적에 관계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맹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맹신은 누군가 파놓은 “논리”라는 거대한 함정을 말한다.


  이 함정에는 과학적 사고를 중심으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수많은 대상(ta noeta)들이 있는데, 각각의 대상은 언어로 표기할 수 있는 고유의 의미(진리 혹은 정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함정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대상들은 점진적으로 의미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그것들은 감각적 대상이 된다. 인식의 한계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함정의 영역을 말하는데 함정의 주변부를 완전히 벗어나면 인식 밖의 영역으로, 그 속의 대상들은 마치 달의 뒷면이나 칠흑 같이 어두운 곳에서 위치하는 그 무엇처럼 단지 대상이 발하는 일종의 우주파와 같은 미세한 감각적 진동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그 존재(existence)가 전달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의식에 나타나는 것은 단지 본질의 징후(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세상은 사유를 말하는, 빛에 의해 밝혀진 대상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인식계는 오히려 어둠의 세계인 음영계 (ombres)를 배경으로 세워진 극히 부분적인 세계라 볼 수 있다.1) 이와 같이 빛의 세계를 만드는 배경으로서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담론을 인식론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존재론(ontolo-gie)이라고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의 현실 즉 존재론적인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 구조에서 설명된다. 즉 음의 세계는 양의 세계, 규명된 형상(forme) 혹은 이성(raison)의 영역 주변에서 언제나 배경(fond)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존재론적 철학에서 흔히 “자연”이라는 것은 이러한 양과 음의 이중구조 전체를 말하고 있다.


  현실의 이중구조는 또한 플라톤 동굴 우화(국가론 제 7권, 티마이오스 편)에서 동굴 안의 이중구조로 된 감각(현상)계로 설명되어진다. 아직도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탁월한 모델로 간주되는 이 우화는 비록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의 굴곡을 가졌지만 근본적으로 현실을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세계 즉 동굴 속에서 존재하는 불확실한 대상(억견 doxa)으로 비유하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다소 해석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감각세계를 앎의 단계에서 두 단계로 나누고 있다. 한편으로는 대상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사유 대상의 세계(쉽게 말해 인식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지 이데아(Idea)에 대한 모사, 즉 신빙성을 말할 뿐이다. 단지 이 단계에서 존재하는 대상들은 동굴 밖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 동굴 내부 벽에 비쳐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가능한 대상들의 영역을 인식계라고 할 때, 인식계는 빛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포함된 대상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언제나 억견으로만 되어 있다. 왜냐면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죄인들은 동굴 밖의 눈부신 빛 때문에 자신의 이데아(참 모습)는 볼 수 없고 언제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최상 계급인 철학자의 역할을 그들에게 진정한 자신들의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이데아를 전통적으로 진리 혹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대상의 세계를 말한다.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동굴의 하부 혹은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비 인식 대상들은 단지 감각에 의해 추측되거나 감지될 뿐이며 언제나 어둠의 세계(ombres)에 있다. 사실상 이들은 동굴에 존재하는 대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에는 결코 출현하지 않으며 어떠한 뚜렷한 형상(forme)도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우리들의 의식에 하나의 징후로서 출현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빛과 그림자, 현실의 이중구조, 허위와 진실


  이와 같이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1980년대초 현대미술에서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보여준 설치 작품 “그림자 연극(Le theatre d’ombres)”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이중구조를 개념적 문맥에서 보여주는 가장 좋은 경우로 간주되고 동시에 자신의 사진 설치 작품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8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벤스터(Ven-ster) 화랑에서 전시된 그의 “그림자 연극”은 사방이 막힌 어두운 공간(카메라 암실의 은유)에 설치되는데 작품은 일종의 세상 만평과 같은 풍자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작가는 방의 중앙에 환등기를 설치하고 그 앞에 철사와 종이로 조잡스럽게 인간모양이나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의 형상들을 만들어 관객에게 환등기 빛에 의해 한쪽 벽에 투영되는 많은 그림자를 보게 한다. 게다가 환등기 옆에 선풍기를 동원해 왜곡된 그림자들을 더욱 더 불안하고 불확실하게 만든다. 인도네시아 그림자 연극을 흉내내 설치한 이 작품은 플라톤 동굴 우화의 은유로, 궁극적으로 작품이 시사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한편으로 볼 때, 벽에 투영된 그림자들은 동굴 속 죄인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 즉 오늘날 우리들이 인식하는 대상을 말하는데, 이런 대상들은 진실이 아닌 왜곡된 환상이나 허상으로만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비평가 디디에 스멩(Didier Semin)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허위와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풍자로 오늘날 정보 홍수(특히 대중 매체의 뉴스)에 의해 야기되는 우리들의 변별력과 판단력의 상실, 다시 말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대상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말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볼 때, 더 이상 “이성”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누설은 역설적으로 그의 시리즈 제목인 “어둠의 교훈(Les lecons des tenebres)”이 암시하듯이 또 다른 존재의 세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내포하는 초점 흐린 초상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음의 세계에 대한 사진적 번역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빛과 어둠의 이중세계(시각이 아닌 개념)를 이해하기 위하여, 가령 우리가 우리들의 현실인 플라톤의 동굴에 직접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또 이때 확실한 증거를 위하여 동굴의 모든 개념적인 대상들을 담을 수 있는 특수 카메라를 동반한다고도 가정해보자. 우선 동굴입구에서 빛(인식 혹은 앎의 비유)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까지의 영역 즉 양의 세계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형상(forme)이라는 분명한 그들의 정체를 보이는데 공통적으로 객관적 논리(logos)와 이성(raison)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데카르트의 cogito). 특히 동굴입구로 나올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욱 두드러져 입구에서 수학과 과학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만나게 된다. 이 영역에서 볼 때,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경험과 결과 그리고 물질적 가치에 있고 그러한 판단에 의해 각각의 현상에 “정태적인 의미” 즉 학문을 이루는 진리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자연현상까지)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단지 생성 변전 과정에서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또한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다(니체의 생기 존재론). 예를 들어 수학적 공리나 과학적 법칙 혹은 사회 현상의 많은 논리들을 동굴 입구에서 만날 때 좀 더 멀리서는 기호나 통계 또는 해석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관념적인 담론(구조주의)들을 만날 수 있다. 크게 보아 물질 중심의 담론들이 바로 이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을 촬영한다면 사진들은 과학적 분석이라는 일종의 보고서나 혹은 상호간의 약속된 코드나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술이 될 것이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심연을 만난다. 이 영역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사실상 대부분의 우주를 구성하지만 마치 달의 뒷면처럼 단지 우리들의 직감이나 추측과 같은 순수 감각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감지되는 대상들이다. 암흑 속에 있는 대상들은 공통적으로 동태적이고 비논리적인 특징을 가지며 마치 만물이 변전을 위해 이제 막 생성(genese)한 무엇처럼 대상들은 어떠한 특정한 의미나 객관적 코드와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갖지 않는다.2) 혹은 단지 생성을 위한 시원적인 질료(matiere)3)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원천적인 대상들을 우리가 가지고 들어간 카메라로 촬영한다면 사진은 우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특정한 시적 의미 혹은 푼크툼(punctu-m)이나 아우라(aura)와 같은 탈코드(sans code)의 형태로 나타난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야기되는 황당한 사건이나 엉뚱한 현상 혹은 비록 평범하고 의미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예견치 못하는 인상(impression)이나 묘한 음색(tonalite)에 대한 실체나 본질을 보여 줄 것이다. 빛의 세계에 나타난 대상이 언제나 언어와 의미를 동반하는 진술체계(구조주의)에서 이해된다고 한다면,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신호(signe)체계에서 단지 징후(특히 퍼스 Peirce의 기호론)로서만 출현한다. 대상을 존재론적 혹은 질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달리 말해 현상적 사물보다 내면적 실재를 우선으로 하는 담론(니체철학, 실존철학 또는 후기 구조주의적 담론 등)들이 여기에 관계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대상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질료에서 형상으로 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러한 두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특징을 가지고 우리의 거대한 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마치 발굴된 몇몇 로마의 유적과 묻혀있는 폼페이의 엄청난 익명의 유적들, 눈으로 볼 수 있는 숲의 외형과 그 밑의 수많은 음지식물들, 빙산의 일각과 침수된 거대한 빙산의 하부처럼... 그러나 두 세계의 경계는 극히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의 조화에서 진정한 사진의 대상은 어둠에 있다. ●

 

<주>

1) 여기서 빛의 세계, 즉 인식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나 사건 등의 모든 관념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2) 질 들뢰즈의 ‘운동 이미지’ 개념 참조


3) 이때 작가들이 감지하는 어떤 무엇(질료)을 재현한 작품(figure)은 단지 시각적인 결과물 혹은 징후(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형적이고 동태적인 징후를 객관적인 형상(forme)으로 설명하는 것은 언어와 의미만을 앞세운 인식론적 사고에 관계한다. 이와같이 인식의 영역을 넘어 시원적인 질료로부터 현상(작품)들을 설명하는 담론을 일반 형이상학과 비교하여 “질료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새해부터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사진예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중앙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이경률 박사가 열가지 테마로 열어보는 또 다른 반쪽 세상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6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사진평론가 진동선 선생의 ‘사진비평’이 63회로 끝을 맺음에 따라 이경률 박사가 독자들의 ‘사진이론’ 공부를 돕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론공부는 어렵고 딱딱하기 마련이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사진이야기를 해나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글·이경률
(파리 1대학 미술사 박사)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그림자 연극”, 벤스터 화랑, 네덜란드 로테르담,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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