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브레쏭(Henri Cartier-Bresson, 1908- )은 섬유제조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15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6년에서 1928년까지 그는 예리한 비평과 강의로 유명한 앙드레 로트 (1885-1962)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줄곧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가 사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31년, 사진을 데생의 편리한 대체물로 여기면서였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라이카(Leica)를 사용한지 3일만에 그는 사진에 대한 구성감각을 깨우쳤다. 오만처럼 들리는 이 자랑은 그러나 큰 허세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뉴욕의 유명한 사진전문화랑인 줄리앙 레비(Julian Levy)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고, 지금도 여러 책에 수록된 1932년도에 생산된 사진들은 분명히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 중년사내가 <셍-라자르 역 뒤에서> 포스터의 무희와 흡사한 동작으로 물이 고인 거리를 뛰어가는 사진은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시작한지 1년만에 찍은 ‘명작’이다. 그는 이후 신문사와 화보잡지사의 의뢰에 응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진을 찍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진과 영화를 담당하는 육군하사로 근무하다가 그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두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세 번째에 성공하여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인생의 유위전변은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의 큐레이터, 뷰먼트 뉴홀의 오해를 부르게 된다. 뉴홀은 그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위로 끝나자, 독일군의 포로였던 카르티에-브레쏭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그의 ‘유작(遺作)’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세이무어(David Seymour)의 주선으로 뷰먼트 뉴홀을 접촉하게 된 카르티에-브레쏭은 「하퍼스 바자 Harp- er's Bazaar」가 의뢰한 작업을 행할 겸 뉴욕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1947년, 300점의 작품을 전시할 개인전을 준비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는 뷰먼트 뉴홀과 친분을 쌓았고, 뉴홀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작업 방식을 숙지하게 되었다. 뉴홀이 「Popular Photography」의 1947년 1월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그 당시 카르티에-브레쏭은 밝기 f.1.5의 콘탁스(Contax) 렌즈를 라이카 카메라에 장착해서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싱글 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는 달리,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도 뷰 파인더 윈도우를 통해 피사체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레인지 파인더(range finder)식 라이카는, 촬영 순간에 완벽한 사진을 기획하는 카르티에-브레쏭의 작업방식에 정확히 부합했다. 그야말로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가에게, 셔터를 누르는 ‘결정적 순간’에 어둠의 공백을 만드는 리플렉스 카메라는 적합하지 않았다.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결정적 순간’은 피사체의 표정, 작가의 의도, 주변상황이 사진 프레임 속에서 완벽하게 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사진작가의 전 능력이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따라서 그는 촬영 이후의 암실작업을 작가의 의도, 감성이 개입될 수 없는 상황, 피사체의 조건을 수정, 보완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작가의 관찰, 감정이입, 상황판단은 ‘결정적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끝난다고 그는 단정했다. 이러한 그의 사진에 대한 견해는 그의 사진 스타일을 결정했다. ‘결정적 순간’을 도모하는 촬영의 순간을 신성화하는 그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생성되는 네거티브 이미지에 절대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가 보기에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는 네거티브 이미지에서 무엇인가를 빼고 보탠다는 것은 ‘결정적 순간’을 완벽하게 포착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행위다. 따라서 네거티브 이미지를 절단하면서 재구성하는 트리밍(trimming)은 그의 사진 원칙에서 배제된다. 네거티브 이미지는 가감 없이 인화되어야 한다. 카르티에 - 브레쏭에 대한 뉴홀의 말의 들어보자. “현대미술관에서 곧 있을 개인전 사진들의 거의 대부분은 네거티브 이미지 전체를 인화한 것이다. 인화 구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영역은 프레임의 맨 끝 가장자리까지이다.” 피사체의 상황, 표정, 움직임에 작가의 관점, 구성감각을 투사하고, 작가의 의도에 피사체가 수렴되는 ‘결정적 순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관찰할 수 없는 우발적 상황, 작가의 시야를 벗어나는 우연성은 피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의 눈으로 발견한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바라본 현실의 포착이다. 간단히 말해, 사진의 주체는 작가이지, 결코 카메라가 아니다. 뉴홀의 카르티에-브레쏭에 대한 해설을 또 다시 인용하면, “그는 카메라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이 찾아낸 것을 기록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직접적인 플래시 광을 싫어한다. 피사체에 보조조명을 써야만 촬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그는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백열 텅스텐 광을 선호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그의 구성에 들어오지 않는 우연은,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실패는 아닐지라도, ‘결정적 순간’에 집중하지 못한 일종의 실수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의 카르티에-브레쏭은 194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미국의 스냅 사진작가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위지(Weegee)가 되었건, 리젯 모델 (Lisette Model)이 되었건, 더 나아가 윌리암 클라인(William Klein)이 되었건,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되었건 미국의 거리사진 작가들은 작가의 미학적 감성과 의지에 종속된 장면보다는, 카메라가 우발적으로 포착하고 드러내는 현실의 양상을 애호했다. 촬영 당시 작가가 보지 못했던 세부양상, 혹은 노출의 과부족, 흔들림 현상에 의해 작가도 예측할 수 없었던 현실이 폭로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그들은 절제된 구성, 기하학적 구도가 완성되는 최상의 시점을 포기하고, 사진의 우연성, 사진의 자동생성에 기대어 작업을 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카메라는,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영화 카메라처럼, “의식적인 인간행동 대신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을 포착하고 (...) 우리에게 무의식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열어 보인다. 마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충동의 경험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반면 카르티에-브레쏭에게 있어서 카메라는 현실의 무질서를 정리하고, 우발적 상황을 통제하고, 그것들에 미학적 의미작용을 부여하는 방책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조형감각, 예리한 세부관찰을 덧없이 변화하는 현실만큼 빠르게 수용하는 도구였다. 순간의 우연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우연의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그 예를 위에서 인용한 사진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이 사진을 특징짓는 것은 짝을 이룬 대칭구조이다. 우연의 일치처럼 사진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은 쌍을 이루며 나타난다. 맨 위의 석조 난간은 대칭을 이루면서 반복되며, 그 아래 여인상주(女人像柱) 역시 쌍둥이처럼 서있다. 처마 밑 문짝도 색깔은 다르지만 대칭을 이루며 반복되고,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도 동일한 걸음걸이, 엇비슷한 얼굴 그리고 복장을 반복하면서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왼쪽 가장자리의 대문은 열려진 부분과 다시 대칭을 이룬다. 사실 아테네의 한 오래된 건물이 간직하고 있는 대칭구조는 카르티에-브레쏭이 모색하는 ‘결정적 순간’일 수 없다. 아테네의 한 거리에 그것은 언제나 그렇게 있기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는 용모가 흡사한 두 여인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칭을 이룬 가게문을 배경으로 두 여인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거의 정면의 위치에서 사진작가가 포착했다는 사실에서 ‘결정적 순간’은 태어난다. 사진의 대상과 작가의 시선이 우연처럼 만나는 이 완벽한 순간에, 이 허름한 거리는 그리스의 아테네에 대해, 삶에 대해 언술 언어로 명확히 확정할 수 없는 여러 의미들을 발설한다. 회칠이 벗겨지고 코니스(cornice)가 심하게 깨어진 건물은 과거의 영광과 부귀가 유적의 자취로만 남은 아테네를 의미한다. ‘영원한 미’를 추구했던 그리스문명은 여인상주가 머리에 이고 있는 코니스가 보여주듯이, 머지않아 허물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이렇게 회복할 수 없는 노쇠의 징후를 그곳을 지나는 여인들이 반복한다. 그녀들의 무거운 몸과 활력을 잃은 걸음걸이, 상복처럼 어두운 복장은 노쇠한 그리스를 또다시 표상한다. 이 사진의 의미작용은 그리스의 과거와 현실의 표상작용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생물학적 시간을 아울러 보여준다. 영원한 젊음을 구가하는 여인상주는 시간의 파괴작용에 쇠진하여 저 늙은 여인들의 무거운 몸으로 추락한 듯 보인다. 영원 불변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그리스 문명이 세월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몰락했듯이, 결코 시들지 않을 듯한 젊음을 간직한 여인상주 역시 시간과 함께 퇴색한 것이다. 따라서 이 거리사진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의 한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연의 순간 속에 존재하는 형상들에게서 이처럼 의미론적 혹은 형태론적 유사성 혹은 대립을 발견해내는 양상은 분명 카르티에-브레쏭의 트레이드마크이다. 그러나 거리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절묘하게 포착하는 사진은 카르티에-브레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헝가리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앙드레 케르테츠(Andre Kert esz)는 카르티에-브레쏭에 앞서서 일상 현실의 순간들을 탁월한 조형감각으로 포착해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혹은 그에 뒤이어, 로베르 두와노(Robert Doisneau), 이지스(Izis), 빌리 로니스(Willy Ronis), 에두아르 부바 (Edouard Boubat)와 같은 유럽의 작가들은 일상의 거리에서 삶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컬한 삶의 순간들을 절묘한 사진감각으로 채집했다. 그런데 거리의 삶, 서민들의 일상에 시선을 집중하는 양상은 사진만의 경향이 결코 아니었다. 1930년대 이후의 전반적인 유럽 문화는 거대하고 장중한 서사적 주제에서 벗어나, 비천하고 일상적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웅대하고 영웅적인 소재를 멀리하고, 평범한 인간집단 속에 내재된 실존적 진실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유럽 예술계의 한 양상이었다. 네오 리얼리스트 계열의 영화들, 진부한 현실을 일상의 언어로 정제한 작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의 시학은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들과 더불어 일상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유럽 문화의 한 경향을 대변했다. 카르티에 - 브레쏭이 관심을 가진 것은 비근한 일상의 현실뿐이 아니었다. 그는 1947년,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Georges Rodger)와 더불어 각각 400불씩을 공동 출자하여 조합의 성격을 띤 사진통신사 매그넘(Magnum)을 창설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서사적 현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49년을 전후하여 그는 장개석 국민당 정권의 패퇴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현장을 거의 1년에 걸쳐 취재했고, 1950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냉전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1954년에는 서방 최초로 소련에 입국한 사진가가 되었다. 사진 저널리즘의 융성과 사진의 예술적 지위 향상으로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군에 포함된 카르티에-브레쏭은 1970년 파리의 그랑 팔레(Grand Palais)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갖게 된다. <프랑스에서>라는 타이틀의 이 전시회는 1976년까지 프랑스 전국은 물론이고, 미국, 소련, 유고슬라비아, 호주, 일본 등을 순회하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사진의 예술적 역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사진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군에 기입된 그는 1974년 이후 돌연 사진작업을 그만 두고 데생에 전념한다. 그의 예술적 신비를 더하는 알 수 없는 결단이지만, 이런 저런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그의 “사진의 비밀은 바로 집중하는 데 있다”라고 공언한 것에 비추어, 나이와 함께 찾아온 ‘집중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의 ‘결정적 순간’은 빠른 순간에 확보하는 최상의 시점이 필수적이고 보면, 육체의 노쇠는 이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두 번째는 데생에 대한 그의 강박 관념적 애착 때문이다. 사실, 그의 가장 큰 기쁨은 데생화가로서 존경받는 일이라고 그는 고백한 터였다. 화가의 꿈을 접고 사진으로 전향한 청년 카르티에-브레쏭의 콤플렉스가 세기의 사진작가로 공인 받은 뒤에도 계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사진이 발명되자 19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많은 실패한 화가들이 사진을 그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고자 전향을 시도했었다. 여담으로 글을 맺기로 하자. 카르티에-브레쏭의 사진이 작년에 열린 한국 최초의 사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에 낙찰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사진을 수집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그의 사진을 구입하기 전에 필히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찍은 사진의 필름은 모두 파기했고, 종전 후에 찍은 필름은 모두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 전에 찍은 사진의 프린트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진은 그가 또 다시 필름을 파기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인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진의 경매가는 당연히 전자가 아마도 몇 배는, 심지어는 수십 배는 더 높을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