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정보 매체의 엄청난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며 또한 소위 생중계라는 방식으로 사건과 거의 동시에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과 백 여 년 전 19세기 당시 어떤 사건에 대한 시각적 전달은 1839년 사진 발명 이후 사진이 전달 매체로서 지속적인 발전(사진 엽서, 신문 삽화의 자료로 활용되는 사진① , 과학적 자료집이나 도감 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보도사진에 비교해 볼 때 사실상 거의 실험 단계에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전달적 역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에서 일종의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한 유랑 풍속화가(peintre d'moeu-rs)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들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생생한 사건과 풍물을 그림으로 전해주는 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을 “거리의 풍속화가”라고 하며 또한 그들의 그림을 “풍속화(peinture d'moeurs)”라고 했다. 특징적으로 그들이 재현하는 대상은 단순한 풍경(대부분 픽토레스크)이나 풍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당시 사회의 여론이나 불만 혹은 억압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풍자화였는데 이는 한 마디로 단순한 시각적 전달이 아닌 사회적 진실을 위한 정신적 폭로인 셈이었다. 당시 보들레르는 그들이 “현재의 미를 들추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현재의 본질적인 질”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진실의 폭로자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② 그러나 사진 발명 이후 점진적으로 보도사진과 기록 영화는 이러한 풍속화를 대신하게 되었고 풍속화가들 역시 거의 사라졌다. 20세기 전반기, 보다 엄밀히 말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까지 보도사진의 시각은 특이한 사건 혹은 결정적 순간과 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상주의적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언제나 범 우주적이고 객관적이고 사건 중심적이었는데 거기서 모든 형식은 사진 미학의 전통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었고 어떠한 주관적 풍자나 고발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의 절대 객관적 기록성을 앞세우고 있었다. 보도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 그러나 처음으로 1950년대 윌리엄 클라인(로버트 프랭크 역시)이 던지는 “전통적 규범의 이탈”은 그때까지 정형화된 보도 사진의 개념을 전복하면서 보도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탈은 단지 틀이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측면에서 현실의 이면에 감추어진 내재적 진실의 폭로에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라인과 같은 소위 “거리의 사진가(The street photographer)”는 더 이상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전달적 의도가 아닌 우리들 사회와 문화 그리고 풍속의 진실한 전달자,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사라진 19세기 풍속화가들의 역할을 다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들 특히 그의 뉴욕(New York, 1955년)에서 보여진 사진들은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빗나간 사생아 혹은 터무니없는 상식 밖의 사진들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사진들은 매체의 전달적 목적에서 포착된 전통적 보도사진으로 읽혀졌기 때문인데 이는 사진을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이나 결과론(혹은 형상론)적 관점에서 본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진들은 정 반대로 지극히 주관적 사진 즉 자신의 눈에 비친 물질 문명 세계를 고발하는 일종의 “부조리 연극”으로 간주된다. 모든 해석과 이해를 사진이 보여주는 결과물에서 출발한다면 이미지들은 우선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동시에 당시 사회의 모든 활동적 양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종의 유형학적 사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을 있게 한 원인적인 측면 다시 말해 촬영 당시 작가가 가진 어떤 존재론적 본질이나 충동에 의한 자국 혹은 인덱스로 이해될 것이다. 그럴 경우 클라인 사진을 특징짓는 많은 신기한 것과 이상한 것 혹은 괴기스러운 것 등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암시하는 하나의 문화적 신호(signes de culture)로서 나타난다 : 신호는 그 본질인 동체를 예측하게 하는 지시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통 현실에서 볼 수 없는(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심지어 초감각적인 것들까지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사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클라인의 사진에서 주제임과 동시에 소재가 되며 이러한 사진을 “사인-사진(signe-photo)”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인은 자신의 감각을 통한 물질적 사인에 대한 일종의 암호 해독자인 셈이다. 거리의 갱들이 활보하는 뉴욕의 광란, 토쿄의 이데오그램, 소련의 군사 문화, 로마의 종교 문화 등 50년대 이후 후기 정보 사회의 물질(소비 사회)과 정신(문화와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무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단편들(사인들)로 추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은 결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혹은 편견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에서가 아닌 자신의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클라인의 뉴욕에서 보여진 거리 이미지들은 전통과 결별하는 새로운 독창성을 창조함과 동시에 당시 실존주의 계열의 부조리 연극과 현대 물질 문명을 비판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도시의 신화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제스처로 간주된다. 이미지는 그때 일종의 조롱적이고 풍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사물화 현상”에 대한 사진적 재현으로 간주되며 대부분의 사진은 “사물화 된 인간과 물질이 대치”되어 나타나는 병치 효과 다시 말해 들뢰즈의 용어로 “문화와 자연이 충돌하여 그 표면에 발생하는 사건(evenement)”에 관계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번민 고독 소외 통속 유행 속물 등을 암시하는 당시 1950년대의 문화적 신조어(의미의 생성)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들이기도 하다. 클라인은 팝아트의 선구자 클라인의 사진들은 단순히 현대사진의 역사적이고 진화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사진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재현 의도(사물화 현상)는 단지 사진의 영역뿐만 아니라 1960년대 예술의 거대한 폭풍을 가지고 올 팝 아트의 전반적인 주제가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클라인의 사진은 팝 아트를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며 오늘날 역사적 관점에서 몇 몇 비평가들(1980년대 이후)은 클라인을 팝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물질 속으로 정신(인간)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허무”를 조형적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팝 아트의 본질적 의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클라인의 간판, 광고, 글씨, 이데오그램 등의 문화적 신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사물화를 재현하는 팝 아트의 전조로 간주된다. 클라인의 모든 사진들 특히 뉴욕의 사진들과 그의 단편 영화(예를 들면 “Broadway by night”)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뭔가 암시적인 은밀한 알파벳이 있다 :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도시에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네온사인, 현란한 광고 글씨 그리고 많은 소비 문화의 조짐들과 같은 클라인의 “거리의 언어들”은 팝아트의 출현보다 무려 5년③ 이나 앞서 나타난다. 도시를 소재로 잡은 뉴욕의 사진에서 클라인은 강렬하고 폭로적인 그리고 조롱적인 이데오-상업적(ideologico-commerciale) 선전을 강조하고 있다 : 특히 네온사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도시에 불고 있었던 열풍 같은 문화의 새로운 것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의 여자들, 밤의 감시자들, 은행과 영화, 간판 슬로건 뒤에 갇힌 계산원, 밀려오는 군중, 열광하는 관객들 등은 궁극적으로 소비 문화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 더미와 인간 소외 혹은 경찰 몽타주의 상품화 된 인간유형과 같은 인간의 사물화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거의 정확히 1960년대 유령 같은 먼로, 무한히 반복되는 돈이나 콜라, 자동차 사고 등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그림(일종의 사진-그림)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클라인을 당시 “어떠한 화가도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aucun peintre n'avait jamais fait ca)”을 처음으로 실행한 진정한 팝아트의 선구자④ 로 간주할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전통과의 단절 혹은 반-사진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개념적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기술적 측면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사진의 개념적 특징들은 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새로운 문화적 통념(코드)에 관계하고 있다. 클라인 자신이 “사진적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는 수 백 개의 사물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순간을 포착하는 황홀한 순간이다”라고 언급하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남”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사진 작업은 그때까지 촬영 방식을 지배한 “연극적인 비밀의 자물쇠 구멍(렌즈)”을 통한 순간 포착 즉 미리 계산된 조준사격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들의 다발, 다시 말해 무차별 난사식 사격을 통해 거의 직감적인 한 장의 장면을 선택(암실 안에서)하는 감각적 만남에 관계하였다. 이러한 만남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증폭된 우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클라인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의 단면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코드로서 정확히 “객관적 우연”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클라인의 사진에는 언제나 엉뚱하고 이상한 무엇(푼크툼)이 출현하는데 이는 특징적으로 한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러한 만남들은 사진에서 무모하고, 통속적이고, 저속하고, 뻔뻔스럽고, 강렬하고, 거칠고 동시에 난잡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적절히 말해 자연과 문명의 교차 면에서 발생하는 예술적 형태로서의 무모성이나 무질서에 대한 사진적 추적으로 간주되다. 또한 인간은 거기서 일종의 물질의 장식품이나 부속물로 간주되고 도시 생활의 질식과 우글거림, 혼란, 뒤죽박죽, 와글와글한 군중들의 떼 등과 같은 것들은 현대 사회의 다량 유통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설적으로 흔히 자신이 역사적 증인으로서 직접 군중 속에 합류하면서 촬영하였는데 거기서 자신이 확인하려 한 것은 우리 모두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였다. 전통적 규범에서 이탈, 틀의 자유성 추구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사진들은 그때까지 통용된 전통적 규범을 더욱 더 분명히 이탈하고 있다.⑤ 우선 “틀의 자유성”을 추구하는 잘려지고 불안정한 화면 구성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왜곡을 야기 시킨다. 또한 가능한 화면을 꽉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35 mm 광각 렌즈의 사용과 대상을 겨냥하지 않고 바로 코앞에 바짝 붙여 촬영하는 근접촬영(close up)은 결과적으로 대상을 착각과 환상적 효과 속에서 괴물⑥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1). 영화의 시퀀스와 사진과의 접맥에서 나온 많은 사진적 표현들(순간 동작, 제스처, 찰나 등) 역시 이러한 강렬한 특징을 더 해주고 있다. 게다가 움직임의 자국을 남기는 오픈 플래쉬(open flash)의 활용은 살아있는 생명 혹은 생동감의 효과로서 이용하였는데 클라인은 이러한 효과를 특히 80년대 초 자신의 패션사진에 하나의 특수 효과로 이용하였다. 클라인의 많은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별한 구성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는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시선들이 마치 물수제비 뜨기처럼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선의 다각화(사진 2)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비정함 그리고 불신과 멸시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여하간 화면 구성에서 흔히 촬영 당시 누군가 렌즈를 쳐다(훔쳐)보는 시선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하나의 평면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늘형식으로 병치시키는 공간 구성의 극대화(사진 3)이다. 이러한 구성은 우선적으로 광각 렌즈의 집단적 효과에 그 이유가 있지만 언제나 피사체의 분명한 공간성과 그 움직임을 강조하는 거의 1/125초의 노출 속도와 대략 15도 각도로 약간 굽어보는 낮은 앵글을 활용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에도 그 원인이 있다.⑦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인간 존재를 벽면에 부조된 기념물이나 건축적 장식물로 간주하려는 예술적 의도⑧ 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는 비교적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사진에 비해 유달리 독특하고 이상하고 별난 것(푼크툼)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 이후 소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 하여 밝혀낸 독특함(sing -ularite)과 증거성(attestation) 그리고 지칭성(designation)으로 정의되는 사진의 특성에 관계하고 있다. 소위 사진-인덱스는 전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사진-관객의 주관적 관점(사진적인 것)을 가지며 그때 외시된 이미지는 단지 자국 혹은 징후일 뿐이다. 알다시피 바르트는 자신의 이론적 입지를 위한 배경 혹은 모델(탈-코드)로서 사진 이미지를 도입했는데 특별히 여기 보이는 유명한 두 장의 사진(밝은 방)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진 읽기의 실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사진 4)으로 우선 여기서 문제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할머니이다 : 할머니는 찍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중앙에 있는 할머니를 겨냥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여섯 인물들은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찍혀졌고 각각은 사진기 앞에서 조롱, 불안, 멸시 등 다양한 심리적 기질들을 보여 주고 관객들 역시 이러한 감동적인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바르트가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자료이다 : 예컨대 여기 1959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모자를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머리를 잘랐는지 등의 사실적 자료들이다. 한 마디로 사진 읽기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언급한 사실들에 관해 “내가 놀란 것은 사진가의 어떤 의도를 알려는 관심에 대한 그의 거절이다”라고 진술했다. 마치 사진을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로 간주하듯이 ...⑨ 또 한 장의 사진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이라는 제목의 사진(사진 5)이다. 클라인은 거리에서 우연히 이 가족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기분 좋게 가족은 그들 스스로 알아서 (포즈를 위해) 그룹을 만들었다. 아이의 권총을 가진 엄마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아이의 눈은 자신의 엄마 쪽으로 돌려 웃었고 자신의 손은 엄마의 손으로 가져갔다. 큰 누나는 렌즈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한방의 사진 .... 거기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윌리엄 클라인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의 젊은 아이들을 찍었다. 그것은 감동적이다 ...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계속 보게 되는 것은 이 개구쟁이의 썩은 이빨들이다”⑩ 결국 바르트가 몰두한 것은 문화적으로 약속된 주제 즉 촬영자의 의도(스투디움) ⑪가 아니라 푼크툼(punctum)이었다. ● 주요 참고 도서 William Klein, New York, , Edition du Seuil, Paris, 1956. William Klein, texte de Christian Caujolle, coll. Photo Poche, C.N.P., Paris, 1985. Close up, Thames & Hudson, London, Paris, New York, 1989.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Michel Nuridsany, “William Klein : la cam ra visible”, Art Press, n 69, avril 1983, p. 4-7. (주) ① 신문 삽화로서 사진의 도입은 19세기 말 사진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도사진으로서의 역할은 사실상 20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사진 제작에 있어 많은 사진적 기술이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단지 삽화를 위한 자료로서 오랫동안 신문 삽화로 이용된 석판화를 대신하지 못했다. ② 참조,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③ 물론 영국의 초기 팝 아트 운동은 콜라주를 중심으로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또한 로첸버그의 콤바인 페인팅과 존스의 그림 역시 50년대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팝아트의 시작(1958-1968)은 워홀와 로젠퀴이스트 등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광고 이미지의 출현 즉 1960년대를 기다려야 한다. ④ 엄밀히 말해 윌리엄 클라인 이전 1949년 레이몬드 하인즈 (Raymond Hains)는 광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사진적 작품으로 만든 첫 사진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전한 사진이 아닌 일종의 꼴라주 방식을 하고 있다 : 사진과 영화의 형식을 도입하여 만든 게시광고물로 일종의 레디-메이드이다. 여하간 클라인과 하인즈는 서로서로 팝의 선구자들로 간주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광고와 글씨의 사진적 조합에 있었다. ⑤ 여기서 비평가들은 실질적으로 전문적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던 클라인의 사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당시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대상을 왜곡시키는 상식 이하의 촬영 기법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의 기술적 무지에서 왔다고 한다. 사실상 클라인은 파리 체류시 자신의 회전 광고 사진 확대 기술을 위해 처음으로 사진을 이용했는데 당시 그는 화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작가가 생존하는 오늘날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⑥ 몇몇 비평가는 이러한 왜곡된 형상들을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망투(Mantoue)의 테(Te) 성에 줄 로맨(J. Romain)이 조각한 괴물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⑦ 참고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⑧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나의 사진들은 어떤 고전주의를 들추어낸다. 아마 사진들이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Piero della Francesca를 참조하였는데 사진에 있어 나의 항구적인 의도들 중 하나는 1/125 초의 속도로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난 의도적으로 기념비와 벽화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자신의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프레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의 “인본주의”에 관계한다. 레제의 그림은 도시 사회의 저속성과 현대 산업 사회와 물질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면서 인간의 사물화를 추상 기하학적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⑨ 참고,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p. 30. ⑩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gique, Cahier du Cinema / Gallimard / Seuil, 1980, p. 7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군중 속에서, 뉴욕가 5번지, 1955년 (사진 3)롤링스톤 공연, 파리, 1982년 (사진 2)추수 감사절 행렬, 뉴욕, 1959년 (사진 4)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 (사진 5)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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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02 윌리엄 클라인 : 거리의 풍속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