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테마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사람이 살다보면 뭔가 남기고 싶고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라든지, 어떤 상황이 인상적일 때 혹은 괴로울 때 흔히 일기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때의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또한 오랫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히 시(詩)적 형식을 빌리지 않는 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왜냐면 뭔가 남기고 싶은 대상들이 아쉬움이나 애석함, 무기력하고 허탈한 일종의 공허함, 갑작스런 충동 혹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거나 당해야하는 상황 등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음색(tonalite)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같이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들을 언어 대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다소 미술에 소질이 있을 경우 화폭에 자신의 심경을 재현(특히 추상적 방법으로)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번역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사실상 자신도 그러한 표현적 번역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추상적인 것이지만 뭔가 재현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존재의 형이상학적 대상)인데, 그것은 현상학적으로 말할 때 장님이 추리하는 코끼리의 실체 혹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미술에 소질이 없어 카메라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 알다시피 특별한 소질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카메라로 대상을 녹음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인화도 해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방법은 어렵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 아니 황당하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최소한 찍는 순간만큼은 어떠한 번역도 허락하지 않는 너무나 단순한 기계이면서 동시에 일단 결정된 대상에 대하여서는 무차별하게 기록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작가의 번역 방법은 사실상 파인더로 들어오는 대상의 선택적 방법 외에는 없다.1) 그러나 시각적 재현이라는 장르에서 사진은 오랫동안 그림의 형식에 동화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진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타인에게 내 보일 때 전시, 카탈로그, 서명, 판매 등의 최소한 외형적으로 사진을 그림화 하고 또 그러한 사진 작품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림의 양식에 따라 작품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적절한 해설(분명한 정답 ?)을 찾는다. 사진 비평 역시 마치 손으로 그려진 그림 이미지에 대한 분석적 담론을 행하듯이 거의 정확히 그림의 비평 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사진은 근본적으로 미술과 다른 매체다. 우선 그 진행 과정에서 그림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재현하려고 할 때 마치 베틀에서 한 올 한 올 엮어 직조를 하듯이 혹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붓 터치의 확산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림을 이루는 최소 단위를 “조형적 세포”라고 할 때 사진의 경우는 “광자(光子)적 세포”라고 한다.2)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을 이루는 세포들은 빛에 의해 동시에 생성되고 또한 동시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림적 사실주의와 사진적 사실주의3)는 본원적으로 서로 다른 출현 조건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에 결국 의미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적 사실주의는 세포의 확산에 따른 작가의 필연적인 “번역”을 허락한다.
 
회화의 극사실주의가 말해주듯 작가가 아무리 대상과 똑같이 모사한다 하여도 완성된 그림 이미지에는 최소한의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메시지가 객관적 의미를 가지든 혹은 무의미(탈 의미 즉 음영의 불특정 의미)를 암시하든 재현되는 대상 위에서 적어도 의도적인 번역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고, 그때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완성된 이미지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림은 비교적 분명한 회화적인 메시지를 이미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작가의 예술적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작품에 첨부되는 비평문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비평은 원칙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로부터 번역된 작품(그림적 사실주의) 사이에서 작품이 표명하는 메시지에 대한 일종의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광자적 세포를 갖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 혹은 번역을 그림처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의 절대적 모사(caaete)뒤에서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은 번역적 재현이 아닌 함축적 재현이다. 그래서 재현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그림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언제나 이미지의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혹은 공시, connotat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절대적 닮음(analogon)만을 갖는 사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그림의 분명한 “일 대 일”의 시각적 번역과는 달리 언제나 찍혀진 대상이 상징하거나 암암리에 객관적으로 약속된 의미 즉 코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그림 역시 상징적 메시지를 표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은 근본적으로 그 절대적 외시(denotation)로부터 “무엇을 뜻한다” 혹은 “무엇을 상징한다”라는 의미적 코드(symbol)에 묶이게 된다.4) 달리 말해 사진적 메시지는 처음부터 상징이라는 우회적인 틀 속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흔히 작가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분명히 인정되는 함축성 즉 공동체적 코드에 동화시키기도 하며, 반대로 관객 역시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코드 속에서 공통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과 달리 사진이 쉽게 진부하고 판박이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판박이 혹은 붕어빵의 형상(form)들은 사진이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그리고 구경꾼 같은 관객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된 메시지(studium)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판박이의 주제는 언제나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왜냐면 아무리 과거에 드물고 특이한 사진 주제라도 오늘날 이미 보편화된 주제(앎)라면 그것은 하나의 붕어빵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왕따”라는 개념은 이미 보편화된 사진적 주제 즉 판박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아직 인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현실에서 징후로서만 나타난(말하자면 음의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거 시대에는 의심할 바 없이 특별한 사진의 주제였을 것이고 아마도 당시 위대한 사진작가(장님)는 자신의 감각적 지팡이로 이미 이러한 개념을 재현했을 것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그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초보적인 현시 광고의 첫 조건은 텍스트를 동원하여 최대한 사진 이미지의 내시를 극소화하는 것인데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조건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이다.5) 왜냐하면 광고는 그 속성상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지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하면 할수록 사진은 결국 광고와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한 사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익히 약속된 메시지는 사진의 형식적인 측면(조형성, 기술성, 솜씨 등)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작품성을 가질지는 몰라도 사실상 우리에게 감동은 주지 않는다.6)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이 빈약한 매체라는 사실은 보다 엄밀히 말해 예술적 표현 방식에 있어 사진적 사실주의는 극히 제한된 매체라는 사실에 관계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재현된 이미지가 함축하는 의미와의 관계가 사실상 “일대다수”의 관계를 갖는다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림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고 있지만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인 외시적 메시지 외에 어떠한 시각적 번역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함축적으로 모호한 다수의 번역 가능성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붉은 사과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파란 사과로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단지 붉은 사과만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붉은 사과는 함축적으로 찍혀지는 상황이나 조건 혹은 첨부된 텍스트(주제, 설명, 비평 등) 그리고 관객의 주관적인 관점(지시론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혀 질 수 있다.
 
 예컨대 신문에 실리는 많은 보도 사진은 편집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조합에 의해 하나의 의미만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편집된 종속 사진인데,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사진 메시지가 전혀 다른 메시지로 둔갑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특수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은 그 자체의 외시 만으로 정확한 전달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코드화(codific -ation)된 형식, 달리 말해 함축적 의미를 최소화시키는 보조적 장치(대표적으로 텍스트의 첨가)가 필요하다(Roland Barthes). 그래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조작과 왜곡 혹은 인위적인 의미 변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사진을 도용하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과 관객을 이어주는 사진 비평은 마치 신문사의 편집장이 사진이 가진 다변적 의미들 중 자의든 타의든 그의 의도에 가장 적절한 의미만을 노출시키기 위한 편집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진 비평은 그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관객으로의 의미적 전달에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일단 사진과 텍스트가 조합되면 사진의 기록성과 증거성 앞에서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는 텍스트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진은 본원적으로 모호한 전달 매체이기 때문에 비평은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코드화 작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적으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경우 사진과 글의 관계는 따로 국밥이다.

  또 다른 따로 국밥의 원인은 사진이 작가의 근원적 메시지 즉 음영의 “무의미 혹은 탈 코드”로부터 재현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코드화된 비평”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함축적 번역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텍스트(비평)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가 코드화된 의식(틀)에서 올수록 비록 그 메시지가 사진의 함축적인 장치 속에 은닉되어 있다 하더라도 비평가나 관객의 의미적인 눈에 그것이 쉽게 읽혀 질 수 있다. 그러나 코드의 영역을 떠난 음의 대상들은 객관적 논리로 코드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특별한 작가의 주관적 해설이나 정확한 비평가의 설명 없이는 사실상 의미적인 코드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진은 절대적인 대상과의 닮음 이외에 어떠한 번역적 재현(그림에서는 가능한)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비논리적인 메시지는 더욱 더 은닉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광고나 보도사진 혹은 대중사진과 같이 코드화된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런 비평에 익숙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사진 읽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자신의 고향인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사진 작가가 대도시의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정 넘치는 시골 노인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카메라로 재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고향 노인들을 찍어온 사진들이 있다(도판1). 우선 오늘날 우리들의 객관적인 코드에서 짐작해 볼 때 흔히 노인의 웃는 모습이나 거기서 보이는 몇 남지 않은 이빨과 주름살,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은 할아버지의 남루한 차림새와 때묻은 골동품 같은 물건, 금방이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할머니의 자연스런 제스처 등에서 풍기는 소박한 이미지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즉각적으로 “노심(老心)”이라는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 즉 하나의 분명한 의미적 코드가 읽혀 질 것이다. 또한 이때 조합되는 비평은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코드화된 비평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고향 노인들과 만나 느낀 것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시골노인의 소박한 인간미가 아닌 뭔가 잘못된 노인들의 비정한 눈초리나 경계의 시선(?)에서 감지되는 형용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비교적 교육의 기회와 문화와 접촉이 잦은 대도시의 노인들에게서 오히려 순수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 오늘날 시골 노인들의 가치관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긴 하루의 고독을 메우는 수단과 또 그들에게 세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채널은 사실상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 뿐이다. 몇몇 사회적 치부가 단지 우리 사회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사회 전체의 단면인양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엄청난 뉴스와 고발기사의 홍수는 결국 획일화 된 맹목적인 믿음과 잘못된 판단, 물질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숭배 또 그것을 위한 지나친 자기 방어와 타인에 대한 경계 등 변질된 가치관을 그들에게 고착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늘날 대도시의 정신적 병폐 현상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이성적 구조에서 시골 노인의 왜곡된 가치관은 쉽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대도시와 시골이 역전된 듯한 다소 황당하고 모순된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의 눈에 비친 시골 노인의 얼굴은 괴물이었고 이러한 괴물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마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사진처럼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엉뚱하고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사진은 진짜 괴물 같은 노인이 아니라 단지 이상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다. 왜냐면 미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괴물의 재현은 역사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인간 유형의 변태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인간 실존의 왜곡된 모습과 같이 분명한 시각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특별히 조형적인 요소(조형 사진)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실체인 괴물의 사진적 재현은 단지 현실의 자국인 징후(index)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자국의 재현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를 재현한 사진적 이미지를 객관적인 코드의 눈으로 보면 사진은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고, 또한 징후로서 암시된 사진적 메시지를 코드화된 비평으로 설명한다면 사진과 글의 관계는 분명히 따로 국밥이다. 결국 이 작가가 재현하고자 한 괴물은 코드가 없는 하나의 징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코드화된 정태적 의미가 아닌 진화적인 “동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진의 대상인데 이때 그 존재의 출현을 철학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e immanente)의 재현”이라고 한다. ●

주)
1)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비평가들은 사진을 그림과 비교하여 “빈약한 사진(La photogra -phie pauvre)”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은 그 조형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한계를 가진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외시적으로 절대 빈약한 표현 매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Dominique Baque, La photographie plasticienne, Regard, Paris, 1998, chapitre I.

2)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1987 에서 인용된 용어.

3) 사진(The photograph)은 분류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흔히 물질(특히 인화지)에 관계하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는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적 방법에 의해 생산된 총괄적인 복사 이미지를 말한다. 예컨대 캔버스에 복사적으로 나타난 사진 이미지나 혹은 디지털 화면에 출현한 사진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라고 언급해야 한다. 이는 손에 의해 복사된 그림적 사실주의와의 분명한 구별을 위한 개념적 용어이다. 그러나 사진과 사진적 사실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비물질적인 실체의 출현은 언제나 종이, 천, 캔버스, 화면 등 물질적인 것을 동반하고 있다.

4) 사진을 대다수의 19세기 사진과 같이 그림을 위한 대상의 복사적 기능(icon)으로 보는 관점은 제외하고 

5) Roland Barthes, L’obtus et l’obvie, Cahier de la photographie,Paris, 1977 참조

6) 엄밀히 말해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창조적 의미에서 볼 때 작품성과 예술성은 이론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술은 발견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추적이기 때문이다(존재론). 감동은 반복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움에서 온다. 감동을 주는 것 혹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은 진정한 작가의 예술적 의도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모든 사진 이미지들을 예술사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령 광고지 귀퉁이에서 발견되는 푼크툼는 단지 찍혀진 대상과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에서만 이해될 뿐이지 작가의 의도에 의한 모두에게 공유된 메시지는 아니다. 영상 이미지에서 푼크툼과 작가의 예술적 의도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김선희, 낯선 초상 시리즈 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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