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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15 보이는 것을 넘어서





1895년 뢴트겐 (Wilhelm Conrad R ontgen)은 독일 남부의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1879년에 발명된 크루즈(Crookes) 음극선관을 실험하던 중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음극선관을 작동시킬 때, 형광물질이 칠해진 판 위에서 희미한 빛의 존재를 발견했고, 그의 손을 음극선관 앞에 세우자 판 위에는 그의 손뼈 마디들이 그림자 형태로 나타났다. 실험실은 완전히 밀폐되어 있었고, 음극선관은 흑색 판지로 에워싸여졌기 때문에 그곳에는 어떠한 가시광선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빛이 음극선관에서 나와 그의 손을 투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살은 투과하여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반면 뼈는 투과하지 못해 그림자를 투사한 것이었다.
  물체의 성질에 따라 투과의 정도가 다른 이 미지의 광선의 존재와 작용을 사진감광판에 기록하기 위해 뢴트겐은 우선 그의 연구실의 문을 찍었다. 문의 나무는 투명하게 나타났고, 금속 손잡이와 납연 페인트 자국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어서 그는 그의 아네 버타 (Bertha)의 반지 낀 손을 X 레이 사진으로 찍었다. 광선이 통과하지 못하는 손마디의 뼈와 반지는 사진감광판 위에 그림자로 자신을 기록했고, 광선이 통과하는 피부살은 투명하게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신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X 레이 사진은 그 발명이 공표되자 과학계와 의료계의 즉각적이고도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외계의 현실을 손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 정확히 기록한 다게레오타입의 경이로움이 평이한 일상적 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19세기의 끝에서, X 레이 사진은 다시 한번 사진의 마술적 경이로움을 촉발시켰다. X 레이 사진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닫힌 상자의 내부와 신체의 내부를 속속드리 꿰뚫어 보는 마법적 혜안을 구현한 것으로 국제적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광선이 꺼풀을 드리운 사물과 신체의 내부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쾌거는 사진의 경이로운 위력을 세상에 다시 한번 알리는 것이었다.
   X 레이 사진의 국제적 수용은 신속했다. 프랑스의 경우, 신문 「르 마텡 Le Matin」과 「릴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은 1896년 1월 21일과 25일 양일에 거쳐 “새로운 빛”의 발견에 대한 보고서를 게재했다. 파리의 살페트리에 (Salpetri-ere) 병원의 사진부장인 알베르 롱드 (Albert Londe)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X 선에 대한 최초의 보고가 행해진지 3주만에, 그러니까 1896년 2월 10일, X 레이 사진 촬영요령에 대한 보고서를 꿩의 날개를 찍은 사진을 첨부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그는 X 선의 의학적 사용과 연구를 위해 그의 사비를 들여 프랑스 최초로 살페트리에 병원의 사진부 부설로 X선 연구소를 설립했다. 곧이어 정부의 지원금을 받은 그는 1898년, 「X선 촬영과 검사 개론, 그 기술과 의학적 적용 Trait -epratique de radiographie et de radioscopie. Techniques et applications medicales」을 출판했다.
   X 레이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의학사진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환자들의 관상학적 특징, 병리적 증세의 기록, 연속사진을 통한 신체동작의 생리학적 연구에만 소용되었던 의학사진은 이제 오히려 그것들보다도 X 레이 사진을 의학사진의 본령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육체의 내부를 드러내는 이 보이지 않는 빛의 사진을 신체구조의 보다 정밀한 연구와 질병연구에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의학계는 사용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X 선의 충격과 그 여파는 의학과 물리학의 영역, 과학적 연구와 의학적 적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불투명한 물체의 속을 보여주는 이 ‘미지의 빛’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심령학, 영매학과 같은 의사(擬似)과학, 사이비과학의 기상천외한 연구를 북돋았다. X 레이와 더불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체의 속을 찍게 되자, 심령학, 영매학에 실증가능한 증거물을 첨부하려는 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혼, 영기(靈氣)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피부와 살에 가려진 뼈와 장기를 X 레이로 손쉽게 보게 되자, 의사과학자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 영혼과 심령, 신비의 실체를 사진적 방법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사진적 기록은 일반 도상이 갖지 못하는 재현대상의 실재성을 증거하므로, 다시 말해 사진이 기록한 대상은 상상력이나 환상이 꾸며낸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로 존재함을, 존재했음을 실증하는 까닭에, 19세기 끝의 심령학자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심령의 세계, 신비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어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과학적 해설에 언제나 뒷걸음질치는 심령학, 신비학은 사진이라는 과학적 증거물을 학계에 제출하여 과학적 학문의 권리와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이폴리트 바라딕 (Hippolyte Baraduc)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살페트리에 병원의 수장, 샤르코(Charcot) 학파의 일원으로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병리학 연구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고, 부인과 의사였던  바라딕은 뢴트겐이 X 레이를 발견한 이듬해, 그러니까 1896년에 「인간 영혼의 움직임과 그 빛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유체의 도상학 L'ame humai-ne, ses mouvements, ses lumieres et l'iconogr-
aphie de l'invisible fluidique」을 출간했다. 물론 X 레이의 발견에 의거한 연구는 결코 아니었지만 - 그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연구는 뢴트겐의 발견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 보이지 않는 신체의 내부를 찍은 X 레이 발견에 힘입어, 그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는 신념을 굳건히 했음에 틀림없다. 뢴트겐의 쾌거 덕분에 널리 퍼진 과학계와 세간의 사진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제것으로 삼아 그는 ‘인간 영혼’의 세계를 사진으로 입증하려 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이나, 신경질환을 앓는 여성, 종교인들의 영혼은 대단히 “민감하여 감광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어느 날 바라딕은 그의 아들을 사진찍었다. 아이는 그때 그의 작은 손에 방금 전에 죽은 꿩을 들고 있었다. 바라딕은 이 사진에서 어떤 미지의 빛이 바람에 휘날리는 돛의 모양으로 사진찍혀져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영혼의 빛”이라 믿었고, 그는 이것을 발터 벤야민이 훗날 애호하게 될 신비주의적 미학개념과 동일한 용어인 아우라(aura)라 명명하였다. 아우라가 사진에 의해 처음으로 계시된 이 날 이후 바라딕은 아우라의 전모를 밝히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사진에 그 흔적을 남기는 형상에 의거하여 아우라를 분류하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의적인 어떤 작용, 신비한 영상, 후광 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설명에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는 사진이라는 증거물을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치, 칸트, 뉴톤 등의 과학이론을 엉성하게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과학적 설득력을 부여하려 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어느 특정한 순간에 사진적 재현으로 볼 수 있는 “영혼의 빛”은 한마디로 사진 촬영의 오류, 현상과 인화의 그릇된 과정에서 비롯되었지만, 심령의 세계를 종교적 신념으로 믿는 자의 눈에는 그것은 “영혼의 움직임”, “삶의 베일”, “생명력”의 기록이었다. 한편으로 심령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과학주의에 홀린 자의 신념에 따르면, “오늘날 사진 원판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감춰진 힘을 잠시 보게 해준다. 그리하여 신비적인 것을 거부할 수 없는 통제에 놓이게 하며 그것을 실험 물리학의 영역인 자연계로 되돌아가게 한다.” 신비주의적 심령의 세계를 믿으면서 그것을 이성과 과학의 ‘통제’에 놓으려는 바라딕의 이러한 발언은 신비주의와 과학주의의 어설픈 결합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먹혀들었던 19세기 서구 학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진이라는 과학적 실증 수단과 당시 서구를 지배한 권위있는 과학용어와 개념을 어설프게 도입하면서 전근대적인 신비주의적 사고를 해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19세기 후반의 지적 풍토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사한 그러나 보다 더 신비주의와 관련된 또 다른 예가 있다. 그것은 이태리 북부 토리노 시의 과리니 (Guarini) 성당에 보존된 성해포(聖骸布)의 사진적 검증이다.
  토리노의 성해포는 십자가에 못 받혀 죽은 예수의 몸을 감싼 것으로 여겨지는 수의포로, 약간의 피 얼룩이 남아있는 커다란 사지포이다. 이것의 한쪽 면은 붉은 명주로 대어져 있고 은으로 된 성 유물함에 넣어져 과리니 성당의 돔형 지붕 아래에 있는 제단 속에 엄정히 보관되어 있다. 성당은 이 성 유물을 성당 밖에서 현시를 행하는 적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므로 순례자들은 보통 제단에 상감되어져 안에서 조명을 주는 실물크기의 네거티브 슬라이드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네거티브 상을 양화상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네거티브 상 그대로 전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화상의 경우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예수의 얼굴이 음화상태에서는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해포의 이 음화상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1898년 5월에 행해진 토리노 성당의 성해포의 공개는 수많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를 계기로 법조인이자 사진사인 세콘도 피아 (Secondo Pia)는 성해포의 사진 복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노출부족으로 적절한 사진원판을 얻지 못하던 그는 5월 28일과 29일 밤사이에 또 다시 네거티브를 현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것이 생겨남을 보았다. 예수의 얼굴이었다. 육안으로 성해포를 볼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예수의 얼굴이 사진의 네거티브 상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네거티브의 ‘계시’, 사진의 ‘현시’였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몸 속을 뢴트겐의 X 레이 사진이 보여주었듯이, 그리고 일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바라딕은 사진으로 포착했다고 믿었듯이, 세콘도 피아는 피흘리며 죽어간 예수를 감쌌던 성해포에는 ‘하나님 아들’의 영이 배어있었고, 그 ‘영혼의 빛’이 보이지 않는 빛을 발하여 그가 찍은 네거티브에 예수의 얼굴이 감광되었다고 믿었다. 바라딕과 피아 모두는 인간의 영혼은 빛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해묵은 상상력을 빛에 감광반응을 보이는 사진적 재현을 통해 증명했다고 믿었다.
  토리노의 성해포의 ‘계시’는 지표 (index)의 기호학적 특성과 사진의 ‘현상’ 과정을 이중으로 담보하고 있었다. 우선 성해포에 흩어져 있는 얼룩 반점은 죽음으로 쓰러져간 예수의 흔적이다. 고통 속에 죽어간 ‘인간의 아들’의 육체가 사지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만든 비정형의 형상이다. 찰스 퍼스 (Charles Peirce)의 대상과 그 재현기호의 관계에 따른 분류를 인용한다면, 성해포의 얼룩들은 지표이다. 그것은 발자국이나, 지문처럼 물리적 접촉 (physical contact)에 의해 생겨난 기호이다. 지표는 발자국이나 지문 혹은 데드 마스크 (dead mask)처럼 재현대상과 유사성, 닮음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직접 접촉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지만, 성해포의 얼룩처럼 비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성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기호의 한 범주로서의 지표, 인덱스는 재현 대상과 그 형상이 유사할 수도 혹은 상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재현대상과 형태의 유사성은 지표의 본질적 특성일 수 없다. 지표가 다른 기호범주들, 즉 상징 (symbol - 이것은 의사소통을 위해 사회적 관습, 규약이 임의적으로 생산한 기호로 언술 언어는 그 대표적 예이다)과 도상 (icon - 이것은 재현대상과 유사성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기호로 그림, 데셍, 지도 등이 대표적 예이다)과 구별되는 변별적 특성은 물리적 접촉이 그 생성의 기원에 있다는 점이다. 눈 위에 새겨진 토끼의 발자국은 토끼가 그곳을 지났다는 증표이며, 유리창에 지문이 새겨졌다면 누군가 그것을 만졌다는 증거이다. 데드 마스크는 죽은 자의 얼굴에 석고를 직접 접촉시키지 않고는 생성될 수 없는 지표이다. 성해포의 반점들은 피흘린 예수의 몸이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면 생겨날 수 없는 기호이다. 따라서 지표는 생성된 기호대상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때 거기에 재현대상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성해포의 반점은 ‘예수가 그때 이 수의포 위에서 피흘리며 죽었음’을 증거하는 지표이다. 그런데 사진적 재현 역시 기호론적 관점에서 보면 지표이다. 재현대상과 완벽한 닮음, 유사성의 관계를 유지하는 인덱스이다. 사진에서 ‘물리적 접촉’에 관여하는 요소는 사물이 발산하는 반사광이다. 이 반사광을 통해 사진원판과 재현대상은 ‘물리적으로 접촉’한다. 반사광에 의한 ‘물리적 접촉’이 없다면 사진적 재현은 불가능하다. 지표로서의 사진은 재현대상이 감광판의 시계 속에 있었음을, 혹은 감광판에 직접 접촉했음을 증언한다.
  예수의 피흘리는 몸과 직접 접촉하여 생성된 성해포는 세곤도 피아의 ‘계시’와 더불어 일종의 잠상 (latent image)이 되었다. 성해포에 예수의 얼굴은 잠상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가 피아의 네거티브 현상액 속에서 현현한 셈이었다. 현상(現像)된 예수의 얼굴로 토리노의 성해포는 전대미문의 전시가치와 숭배가치를 동시에 획득했지만 사기라는 불경스런 비난도 끊임없이 뒤따랐다. 1931년 움베르토 (Umberto)왕의 결혼식을 계기로 이를 검증하는 일련의 사진촬영이 다시 행해졌고, 사진작업은 보다 정밀한 예수의 얼굴을 네거티브로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1988년에 행해진 수의포의 연도 테스트는 그것이 중세에 만들어졌다고 판정했다. 현대과학은 성해포의 예수의 얼굴이 신의 현현을 보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우회적으로 선언했다. “영혼의 빛”을 보려는 바라딕의 심령주의적 시선의 욕망 곁에 피아의 종교적 신념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판정했던 것이다. 뢴트겐의 발견에서 가속화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신비주의적 욕망이 과학적 검증과 다시 한번 반목하는 판정이었다. ●
 
최봉림 (사진역사,  홍익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캡션:빌헬름 뢴트겐, <뢴트겐 부인의 손, X 레이 사진>,1895년 12월 22일, Deutsches Museum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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