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현대미술관 (The Museum of Modern Art)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feller)를 위시한 대부호 3명의 자금출연으로 1929년에 문을 열었다. 초대관장은 독일의 전위적 예술운동과 형식주의 미학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알프레드 바(Alfred Barr, 1902-81)였고, 그는 1943년까지 관장직을 맡으면서 “현대미술의 연구를 고무, 발전시키며, 현대미술을 산업과 실제생활에 적용시키며, 대중교육을 행하는” 예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의 재임기간 중, 뉴욕 현대미술관은 사진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기획을 했다. 그 첫 번째는 1937년에 기획된 사진 발명의 공표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였으며, 다른 하나는 1940년 11월, 미술관 사상 세계 최초로 ‘사진부(Department of Photography)’를 설립한 것이었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전시회, ‘사진 1839-1937’을 기획한 사람은 뷰먼트 뉴홀 (Beaumont Newhall)이었다. 뉴홀의 사진과 관련된 이력은 다음과 같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폴 삭스(Paul J. Sachs)의 지도하에 1931년 미술사 석사를 취득한다. 삭스 교수는 또한 알프레드 바의 스승이었으며, 금융 대부호, 골드만 삭스(Goldm -an Sachs)의 아들로 미술관 운영에 개인과 기업의 후원제도의 도입과 이를 위한 기부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또한 관객들을 일종의 고객으로 상정하는 경영 시스템을 적극 교육한 미술사학자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뉴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잠시 일한 후, 다시 하바드로 돌아와 폴 삭스를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에 등록한다. 1926년 이후 사진작업과 사진역사에 입문한 그는 박사과정 중 당시로는 대단히 생경한 미술사의 대상인 사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 결과 1932년과 1935년 사이에 그는 사진 발명의 경위와 19세기의 미술과 사진과의 관계를 다룬 한 편의 에세이와 사진에 관한 세 편의 서평, 그리고 한 편의 전시회 리뷰를 쓰게 된다. 뉴홀은 경제 사정으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1935년 스승이 상임이사로 있고, 알프레드 바가 관장으로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서로 취직한다. 그리하여 그는 1936년에 알프레드 바가 기획한 전시회, ‘큐비즘과 추상예술 (Cubism and Abstract Art)’의 전시도록에 들어갈 444권에 달하는 참고문헌을 조사, 작성한다. 뉴욕 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은 1927년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웰레슬리(Wellesley) 대학의 교수 시절부터 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근, 현대 미술사 교과과정을 개정하면서 사진과목을 포함시켰고, 1927년과 1928년의 유럽 여행 당시에는 사진을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여긴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를 방문했고, 쾰른에서 열린 국제 보도사진전, ‘프레사(Pressa)’를 참관했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929년 뉴욕 현대미술 관장직을 수락하면서 작성한 ‘취지서’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 여기에서 그는 이미 ‘사진부’의 개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바는 1936년 뉴홀에게 1937년에 있을 초대형 사진 전시회의 기획을 제안한다. 사진 발명의 공표와 관련된 이 전시회는 ‘큐비즘과 추상예술’, ‘환상미술, 다다와 초현실주의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1936) 그리고 1938년에 있을 전시회,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28)’와 더불어 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획전이었다. 1839년에 발명이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에서 1937년까지의 사진의 역사를 포괄하는 전시회, ‘사진 1839-1937’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29년 독일의 스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영화와 사진(Film und Foto)’이라는 전시회였다. 독일, 프랑스, 미국, 소련의 사진들을 망라한 이 국제사진전은 무엇보다도 사진만의 고유한 재현 특성에 전념한다고 여겨지는 사진, 다시 말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섬세한 디테일과 심도를 구현하는 사진이나 혹은 빛에 반응하는 사진의 특성에 의거하여 새로운 시각적 형상을 계발하는 사진, 그리고 순간포착을 활용하여 사진만의 고유한 시각을 발굴하는 사진들에 전적으로 할애되었다. 또한 이 전시회는 이른바 '예술사진'만의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사진이 적용되고 활용되는 다양한 분야들을 망라하여, 사진이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재현매체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전시회의 기획 전반을 주도한 인물은 ‘뉴 비전’의 모홀리-나기였고, 소련 사진의 경우는 엘 리시츠키, 프랑스의 작가선정은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가 주도했다. 미국 사진가의 선정은 스트레이트 사진의 기수, 에드워드 웨스톤과, 예술사진에서 광고와 초상사진까지 섭렵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담당했다. ‘영화와 사진’ 전시회가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기획전에 미친 여파는 무엇보다도 뉴홀로 하여금 사진의 본질, 사진의 특질을 고려하면서 전시사진을 선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관의 사서는 ‘영화와 사진’ 전시회처럼 모더니즘 미학에 충실한 사진들을 전시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뉴홀은 스투트가르트의 사진전이 그랬듯이 전시사진을 ‘예술사진’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영화와 사진’처럼 천문학 사진, 엑스레이 사진, 광고사진, 보도사진들을 포함시켰다. 마지막으로 ‘사진 1839-1937’은 ‘영화와 사진’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사진전의 전시디자인을 돈독히 참조했다. 전시디자인을 담당한 스위스인 헤르베르트 마터 (Herbert Matter)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전시장 입구를 ‘영화와 사진’의 포스터 사진과 유사하게 사진가를 의외의 각도에서 대각선 구도로 포착한 대형사진으로 장식했다. 스투트가르트의 ‘영화와 사진’ 그리고 뉴욕의 ‘사진 1839-1937’의 직접적 연관성은 전자를 기획한 모홀리-나기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후자를 위한 명예 자문위원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뉴욕 현대미술관이 1937년에 기획한 전시회가 사진의 역사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이 때 뉴홀이 집필한 전시도록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게 될 「사진의 역사, 1839년에서 현재까지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1949, 1964, 1982)의 초벌 원고가 되는 까닭이다. 전시도록은 90 페이지의 분량이었고, 시대 순서에 따라 90점의 사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작가, 제목, 프로세스를 명기하는 것이었다. 시대구분은 초기사진 (1839-1851), 근대사진(1851-1914), 현대사진 (1914- )으로 구분되는 바, 1851년은 콜로디온타입이 사진계에 도입된 해이며,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이다. 그러니까 뉴홀의 시대구분은 한편으로 사진기술공정의 중요한 변화를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상황의 격변을 고려했다. 사진역사의 시대구분을 사진의 기술적 여건의 변모에 연동시키는 전자의 경우는 뉴홀 이전의 ‘사진의 역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시대구분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인, 요셉 에더 (Josef Maria Eder,1855-1944)가 1905년에 저술한 「사진의 역사 Geschichte der Photographie」이다. 이것은 1932년, 2권의 책으로 개정 증보되고, 뉴홀이 기획하는 전시회 1년 전인 1936년에 영어로 번역된다. 이 영어본은 1945년, 1976년 재판을 거듭한다.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 젤라틴 브로마이드로 이어지는 기술공정에 의한 사진의 역사는 여전히 시효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불어로 된 사진기술 진화의 역사는 조르쥬 포토니에 (Georges Potonni) 가 1925년에 쓴 「사진 발명의 역사 Histoire de la deouverte de la photographie」이며, 이것은 1935년에 영어로 번역됐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사를 시대구분의 좌표로 삼는 일반 미술사의 한 경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의 전시회와 전시회 카탈로그가 드러낸 폐단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적 감정이 전시 작가의 선정 뿐 아니라 도록에 실리는 작가의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 사진전의 기획방식과 전시디자인에 큰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진가는 단지 15명만이 전시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독일 모더니즘 사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신 객관주의(Neue Sachlichkeit)의 대표작가, 알버트 렝거-파츠와 아우구스트 잔더가 제외됐다는 사실이다. 반면 미국인은 84명이 전시되고 52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영국인은 27명이 전시에 선정되고 17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프랑스인은 87명이 전시되고 27명이 도록에 수록된다. 전시작가와 작품과의 접촉의 편의성, 작품대여의 가능성,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국가에 따른 ‘편파적’ 선정의 불가피한 이유로 고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주의적 편파성은 그리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1949년에 출간되는「사진의 역사」초판의 인덱스에 나타난 독일인은 13명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사진기술의 진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사진 1839-1937’은 뉴욕 전시회가 끝난 후 미국 10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진의 개괄적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보전된 사진대가들의 예술적 면모를 알렸다. 그리고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은 초대 관장이 1929년의 취지서에서 예고했듯이, 세계 최초로 ‘사진부’를 설립하여 사진을 현대 예술의 한 분과로 공식 승인했다. 복제예술의 수집과 전시를 담당했던 미술관의 ‘판화부(Print Department)’에서 분리된 사진은 이제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예술매체로서 활동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사진부의 위원장은 프린스턴 대학 출신인 데이비드 맥알핀(David McAlpin)이었다. 대학생시절 렘브란트의 동판화를 수집했고, 1936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한 사진 갤러리, ‘미국인의 광장(An American Place)’에서 안젤 아담스(Ansel Adams)의 사진 8점을 구입했던 그는 독립적인 큐레이팅 기관으로서의 사진부의 목표와 전략을 총괄했다. 그리고 사진부의 초대 큐레이터는 당연히 ‘사진 1839-1937’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해낸 뷰먼트 뉴홀이었다. 부위원장은 f.64 그룹의 대표작가, 안젤 아담스(Ansel Adams)였다.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의 청교도적 발전 양상인 f.64 그룹의 대표자가 ‘사진부’의 위원장과 큐레이터의 자문 역할을 수행한 부위원장의 직책을 수행한 것은 결코 정실(情實)에 따른 임명이 아니었다. 사진이 미국의 현대 미술에 있어서 독자성, 자율성을 인정받는데 있어서 f. 64 그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1910년을 전후로 미국사진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 혹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유럽 사진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한다. 사진의 특수성, 자율성을 구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소묘예술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은 1920년대 들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권위 있는 공공 미술관(Museum of Fine Arts)의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특질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f. 64 그룹과 더불어 미국의 사진은 18세기 후반 서구 사회가 확립한 모더니즘 미학이 요구하는 예술의 두 조건, 즉 세속적 유용성과 경제적 이해추구의 산물이 아닌 고상한 정신성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그리고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자신의 특질을 구현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전자, 즉 정신성의 구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예술’, ‘예술 사진’을 위한 청교도적 엄격함을 계승함으로써 이루어지며, 후자, 즉 사진의 자율성은 사진 매체에만 적용되고, 오직 사진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사진 결과의 예시(previsualization) 규범인 동시에 완벽한 촬영과 완벽한 프린트를 허용하는 존 시스템이라는 사진적 재현체계를 통해 획득된다. 사진예술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의 완벽주의는 사진가-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사회에 인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존 시스템은 데생과 구도, 구성이라는 회화적 규범에 사진기예의 습득을 의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진적 규범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f.64 그룹과 더불어 모더니즘 미학의 두 요구조건을 만족시킨 미국의 예술사진은 모더니즘 미학을 수호하는 제도적 장치인 한 대형 미술관에 의해 현대 미술의 한 분야로서 공식 인정받으며, 그 대표자를 분과의 핵심 일원으로 자리잡게 했던 것이다. 1942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인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양시키고자,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기획 하에 ‘승리로 가는 길(Road to Victory)’이라는 사진전을 개최한다. 센세이셔널한 전시디자인과 강력한 승전 메시지로 범사회적 호응을 얻어낸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1945년 또 다시 애국주의적 사진전, ‘태평양에서의 힘(Power in the Pacific)’을 기획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사진의 사회적 호소력, 사진의 공공적 활용에 눈을 돌린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모더니즘 미학에 의거한 사진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관객동원을 하면서 여론의 주목과 뉴욕 현대미술관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하여 회화주의 사진가에서 상업사진가로 변신하여 커다란 부를 누린 스타이켄은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으로 임명된다. 사진예술을 위한 규범적 기예, 존 시스템을 개발한 안젤 아담스와 사진의 역사에 정통한 뷰먼트 뉴홀은 이에 반발하여 현대미술관을 떠난다. 1948년 뉴홀은 사진의 제국주의적 기업인 코닥사가 설립한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 사진 박물관(Inter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의 초대관장으로 자리 잡으며, 그 이듬해 「사진의 역사」의 초판본을 출간한다. 3천 부의 초판본이 완전히 팔리는 데는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1964년에 나오는 「사진의 역사」의 개정판 3천 부는 출판 몇 개월만에 매진된다. 이후 뉴홀의 저서는 재판의 재판을 거듭하여 어떠한 「사진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적 인기를 누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사진역사가 곧 세계 사진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그러나 분명하게 진술하는 뉴홀의 「사진의 역사」가 세계의 사진가, 작가지망생, 사진에 문외한인 미술사가들에게 사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뷰먼트 뉴홀의 초상>, 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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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21 뷰먼트 뉴홀과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