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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20 유형학적 사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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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10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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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 강좌 1주: 유형학적 사진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 진동선 http://howphoto.net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 루프>를 중심으로
1. 유형학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혹은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구성 요소들의 형과 타입의 집합이다. 그것은 또한 그룹핑으로서 식물학적, 도감적 종, 속, 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사이에는 차이를 드러내는 혹은 유사성을 드러내는 경계와 변별력이 있다. 유형학은 특별한 시리즈로서 타입(type)이고 모듈(module)다. 그러나 스타일(style)은 부차적인 것이다.
2. 유형학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유형학적 요소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를 구축하는(social construct) 것이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업, 건축, 의상, 장식, 초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 잠재된 이데올로기로서 유형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
3. 사진의 유형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진에서는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앗제, 잔더, 베허에서 보여지는 유형성은 기술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가령 베허부부가 1957년에 시작한 오늘의 유형학의 모습은 기술적 구조였다. 그래서 그들의 첫 번째 전시명이 였다.
4. 베허 스쿨의 유형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숨겨진 이데올로기(concealed ideology on industry's part)"를 찾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유형성은 드러난 어떤 꼴과 타입을 말하는데 있지 않았다. 역사, 문명, 문화, 사회의 숨겨진 정보, 숨겨진 기능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들이 바로 숨겨진 사회적 기능 혹은 역사적 구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유형학적 사진은 정보(information)로서 특징이 강했다.
5. 유형학적 요소는 도구인가? 장치인가?
두 가지를 아우른다고 본다. 도구로서 대형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시각적 장치로서 형태(shape), 크기(size), 장소(location), 물질(materials), 날자(date), 다이얼로그(dialog)를 들 수 있다. 도구는 유형적 구조를 기술하기 위한 기능적(function) 측면이며, 장치는 시각적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것이다.
6.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는 배허 스쿨에서 좀 특이한 작가이다. 1978-1981년까지 에센에서 먼저 오토 슈타이너트에서 사진을 배웠고, 그리고 나서 1981-1987년에 뒤셀도르프 베허 스쿨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토마스 루프나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과 다를 뿐 아니라 유형학적 요소들도 다르다. 구르스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이 있다.
2. 일상의 심미주의적(everyday aesthetics) 경향이 있다.
3. 자연, 소도시, 공장, 증권거래소, 관중 등 여러 가지 소재를 취하고 있다.
4. 자연과 기술, 인간과 기술의 <관계(relationship)>을 강조한다.
5. 강력한 추성성과 기하학적 요소, "all over" 회화적 양식을 선호한다.
6. 현대사회와 문화에서 특히 <소비사회(consumer world)>에 관심을 둔다.
7. 다른 베허 스쿨 작가들보다 사회적 리얼리티에 천착한 편이다.
7.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우선 먼저 지각(perception)과 소통(communic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에서 도시로 그리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적인 시점을 견지한다. 그래서 그의 유형학적 요소는 구체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반사(reflection)/굴절(refraction)을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하학적 수평과 수직적 요소들이 그의 사진에 많은 것, 시점(point of view), 앵글(angle)이 다양한 것도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의 사진이 최근 회화적 모습으로 더 나아가고 있는 것도 그의 시선과 형식이 이제 내용 구조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거의 미세구조(micro structure)를 찾아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진도 다른 베허 스쿨 작가처럼 전혀 인간의 웃음도, 감정도, 개성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현실을 그린 그림의 사진(a picture of a picture of reality)"을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8.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스트루스는 1976-80년까지 베허 밑에서 공부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보다는 먼저이다. 그러나 그도 베허에 앞서 같은 대학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에게서 페인팅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처음부터 회화적 요소들이 컸다. 그의 초기 포트레이트는 리히터의 <48 Portrait 1971-72>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허의 영향에 따라 곧 거리사진, 건축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앗제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는 퍼스펙티브를 강조했으며, 특히 빌딩들간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했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그의 대표작 "뮤지엄 사진(Museum Photographs)"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사와 인간, 건축과 사회, 공간과 공간, 장소와 장소 등 이중적인 역사적, 사회적 네트워크 및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말하는데 전력했다.
9.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아마도 <뮤지엄 사진>에 그것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다분히 이중적인 모습을 띈다.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는데, 가령 뮤지엄 사진에서 사람이 관찰되고, 그림이 관찰되는 이중의 <관찰>, 그림의 응시와 관람객의 응시가 드러나는 <응시>, 그림 속의 사람과 그림 앞의 사람의 <존재, 부재>,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로서 <역사적 시간성>,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통로로서 <소통> 등 그의 사진이 유형학적 요소는 문화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들이 예술과 뮤지엄, 그림과 관객, 사진과 그림 등 두 개의 모순되고 충돌되는 세계에서 보여지는 두 개의 유형적 타입과 꼴을 통해 나타나는데 예컨대 그것들은 그림 속의 옷과 관객의 옷에서, 그림 속의 현실과 전시장에서의 현실을 유형적으로 대비시킨다. 즉 페인팅 속의(in the painting) 공간과 페인팅 앞의(in front of the painting) 공간의 유형성을 찾는다.
10. 토마스 루프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토마스 루프는 1977년에 베허 스쿨에 들어갔다. 스트루스와 함께 작업을 했던 배허 스쿨의 적자이다. 그 역시 인물, 건축, 풍경 등 다양하게 작업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포트레이트>야말로 베허 스쿨의 유형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다. 그의 포트레이트는 198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에는 나이, 계층, 인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진의 깊이보다는 표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극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인물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진과 최근 밤 사진에서는 그 특징들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포트레이트 사진이 너무 뛰어났는지 최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에 비해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것 같다.
11. 토마스 루프의 유형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포트레이트 경우 잔더의 백과사전식 포트레이트를 확장한 개념이다. 그의 인물 사진도 메마르고, 감정이 없으며, 개성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배허스쿨의 유형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감성을 배제하는 방식이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건축 사진은 유형적 요소를 지키고 있으나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적인 모습, 구성적 요소에 천착하는 듯 보인다. 마치 배허 스쿨의 냄새를 지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매특허인 포트레이트 사진에서만큼은 유형성은 가히 교과서적이다.
사진사 150년-1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 |
1989년 사진예술이 세상에 공표된지 꼭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에 창간호를 내게 된 ‘사진예술’ 에서는 창간특집으로 세계 사진사 150년을 요약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기획으로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를 준비한 본지에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사진사상 한 전기를 이룬 사건들과 그 뒷 이야기를 연재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특집에는 프랑스의 통신사 시그마에서 기사와 사진제공을 해 주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 |
니엡스박물관 앞에 있는 니엡스동상 | |
사진의 발명가인 니엡스의 초상(왼쪽) 사진을 공동발명한 루이스 다게르의 초상(오른쪽) | |
1839년 1월 7일 파리에서는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인 프랑스와 아라고에 의해 굉장한 뉴스가 발표되었다. 바로 사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세계는 사진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갖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프랑스 문화성이 개최하는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관심을 끈다. 이미 일반적으로 루이스 다게르에 의해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믿어온 터에 새삼스럽게 던져지는 이 물음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은 누구에 의해 발명되었는가? 프랑스 통신사인 시그마(SYGMA)가 제공하는 대답은 이러하다. 사진의 탄생을 알리는 뉴스가 발표된 1839년 8월 7일 역시 아라고에 의해 요셉니세포르 니엡스가 만들고 루이스 다게르가 개량한 발명품의 세부자료들이 발표되었다. 이와함께 프랑스 정부는 제작자로부터 그 발명품을 구입하고 즉시 전인류에게 그 발명품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는 사실 1839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에 이미 니엡스는 그의 동생 클라우드와 함께 사진술로 이루는 최초의 결과를 얻어냈다. 감광판에 새겨진 사진이 암실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불안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클라우드는 그의 연구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니엡스는 연구를 계속해 1816년 5월 28일에 기적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진을 만든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니엡스 가족이 살던 아름다운 고장인 Domaine De Gras에서 일어났다. 니엡스는 그의 암실 카메라를 창가에 놓아두었는데 몇시간 동안 햇빛이 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질산으로 만든 염화은 인화지에 그의 첫번째 이미지를 고정시켰는데 그 이미지가 최초의 네가티브였다. 그리고 6년 후인 1822년에 마침내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 첫 번째 포지티브였다. 화학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엡스는 어려운 분야를 탐구하였고 유태 아스팔트 물질을 이용, 그 연구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유태 아스팔트는 보통 라벤더유와 오일 속에 잘 녹지만 햇빛을 받은 후에는 녹지 않는다. 따라서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이 아스팔트를 고르게 칠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상 첫사진을 만들어냈고 여기에 ‘Set Table' 이란 제목을 붙였다. | |
1822년 니엡스가 아스팔트의 용해로 만든 사진 ‘A Set Table' | |
1816년 니엡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사진 | |
한편 니엡스는 당시 같은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던 루이스 다게르와 오랫동안 서신교환을 하다가 그와 연계하여 공동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니엡스는 그의 발명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다게르와 공동연구를 했지만 다게르는 사업에 대한 직감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곧 그가 유일한 사진의 창시자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니엡스는 이미 사진술의 공식적인 탄생이 이루어지기 6년전에 죽었고 따라서 다게르의 이름만이 언급되어졌던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판매되는 최초의 사진기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바로 다게레오 타입(Daguerreo Type)이었다. 불운한 천재 니세포르 니엡스는 1765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이 진정한 천재는 생전에 그가 가치를 두고 연구했던 업적을 모두 잃어버렸을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그의 명예를 회복받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도 니엡스에게는 그의 명예를 위해 동상 하나 설립하는 것조차 거절했었다. 프랑스에는 다게르의 이름과 관련된 거리가 수없이 많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기에 차있지만 니엡스라는 이름은 쓸쓸하게 남아있다. 사실 니엡스는 사진술 이전에도 여러 가지를 발명해낸 발명가였다. 즉 나폴레옹의 적에 의한 봉쇄선으로 프랑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설탕이 부족하였었다, 그때 니엡스는 으깬 Zucchini로부터 설탕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사탕무우에서 뽑아낸 설탕을 더 선호했다. 또 정부가 말리 근해의 물을 끌어올리려 할 때 그는 그의 ‘내연식 엔진’을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모터가 대신 선택되었다. 법정에 그가 발명자로서의 우선권을 제출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발명한 엔진은 여러해 뒤에 자동차산업이 채택하여 사용한 연료분사장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 |
나다르가 사용했던 기계들 | |
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카메라 종류들 | |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걸작품인 사진술의 발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이스 다게르의 책략에 넘어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루이스 다게르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색가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 여자들 때문에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다게르는 은판 위에 수은이 가득든 숟가락을 놓아 둔 것을 잊고 자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깜짝 놀랐다. 여성이 현상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이 결과 사람들은 한 시간이 아니라 단지 20분만에 사진을 현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법이 보강되었기 때문에 다게르는 연약한 이시도르 니엡스(니엡스의 아들)에게 계약에 있어 그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니엡스가 사후에 당한 또한번의 패배였다. 파리 근교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진박물관을 설립한 Jean Fage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고 기술이고 예술인 사진을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가장 먼저 기록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한 몇몇 천재적인 인물중 한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중 하나인 혁명의 창시자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 옛적에 한 천재가 살았었다. 150년 그 이전에. (사진 기사제공/ Sygma, 번역/강용석) | |
니엡스의 최초의 카메라. 물론 세계 최초의 사진 장비이다. 프랑스 사진박물관의 관장이며 큐레이터인 Jean Fage와 Andre' Fage. 1855년부터 1895년까지의 스튜디오 장비들(시계방향으로) | |
1889년 Ducos De Hauron에 의해 쓰였던 Melanochromsocope(왼쪽사진) 1900년의 것으로 1/5000초에 작동하는 ‘Sigriste' (왼쪽)와 Star Streo cham 1022.(오른쪽 사진) | |
스그마통신이 제공한 앞에서의 글은 150년전 사진술발명 초기 니엡스와 다게르간의 미묘한 갈등에서 야기된 실상을 오늘날 이 시점에서 재검토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보려는 배려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당시 약화된 니엡스의 공적을 다시 높이려는 운동으로 간주할수 있다. 그래서 지난날 이미 발표된 사진사중에서 사진술 발명초기의 사실의 일부를 여기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려 한다. 다게르의 사진술에 대한 연구실험은 1831년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실마리를 잡는 단계로 발전했다. 즉 니엡스가 헤리오 그래피의 개량에 심혈을 쏟고 있을 때 다게르는 한발 앞서고 있었다. 다게르의 초창기 사진술에 대한 연구는 니엡스와 동일한 은을 바른 동판과 영상을 고정시키는 옥도를 사용한 실험이었다. 1831년에 그는 은맥기한 동판에 옥도의 증기를 쪼여서 만든 옥화은이 높은 감광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광이 되어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날 정도의 강한 감광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게르는 감광성을 높이는데 그 연구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옥화은판을 가지고 갖가지 연구를 시도해 보고 또한 노출을 여러 가지로 조정해 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요컨대 니엡스나 다게르는 ‘현상’이라는 개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광선을 쪼여서 그대로 화상을 나타나게 하는 연구에다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적이 일어났다. 다게르는 여느때와 같이 옥화은판을 검은상자속에 넣고 노광을 시켜봤지만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노광을 시킨 은판을 연마해서 한번 더 사용할 목적으로 그날은 그것을 그대로 화학약품을 보관 하는 장속에 넣어두었다. 몇일 후에 그판을 꺼내어보니 넣어 둘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옥화은판위에 선명한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다게르는 깜짝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지만 왜 화상이 나타났는가에 대한 원인은 몰랐다. 또 다게르는 노광을 시킨 옥화은판을 약품이 들어있는 장속에 넣고 수일후에 꺼내보니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분명히 장속의 약품에 의한 작용이라고 생각한 다게르는 매일같이 약품을 조사해 봤지만 같은 결과로 영상이 나타났다. 마지막 시험으로 수은이 든 병만을 남겨놓고 다른 약품은 모두 제거해 봐도 결과는 동일했다. 그리고 장속에서 수은이 든 병을 꺼내고 옥화은판을 넣어두었는데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게르는 영상을 나타나게 하는 에너지는 수은의 증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어 잠상이 현상에 의해 나타난다는 현대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잠상에서 현상처리에 의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프로세스의 발견은 니엡스가 고민하던 장시간노출의 결점을 해결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래 수시간이 걸렸던 노출은 20분 내지 30분정도로 단축되었으며 옥화은 대신에 추화은을 사용하므로 해서 노출은 1분에서 5분정도로 단축되었다. 또한 다게르는 이 프로세스가 최종적으로 영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염의 포화용액으로 영상을 보호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이것은 지금의 정착방법으로 다게르는 현상과 정착이라는 두가지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 |
1925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라이카 N228 24×36mm형이다.(왼쪽) 마이크로 스파이카메라. 크기는 4.5×6mm(오른쪽) | |
니엡스가 역사상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낸 Dumaine De Gras의 자택. 문제의 2층 창문이 열려져 있다. | |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을 때 니세포르 니엡스는 벌써 4년전에 사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니세포르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시돌에게 인계되었기 때문에 10년간의 기한부계약은 파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게르는 아들 이시돌을 감언이설로 계약의 일부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진술의 발명은 디세포르와 다게르의 약속으로 두 사람의 공동연구의 성과이기 때문에 완성의 공로는 당연히 두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일방적으로 다게레오 타입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천문대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라고박사는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의의와 그 성능을 인정하고 1839년 1월7일 과학 학사원에서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아라고박사는 프랑스정부에게 사진술 발명의 권리를 매수하도록 권장했다. 1월 14일에는 다게르와 이시돌 니엡스의 두사람과 당시의 내무장관 듀카딜과의 사이에 가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15일에는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은 이 발명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댓가로 다게르는 종신연금 6천프랑, 니엡스의 아들에게는 동일하게 4천프랑이 지급되게 하고 두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망인이 각기 그 반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하는 내용의 법안이 기초되어 의회에 회부되었다. 이 법안은 프랑스 하원을 7월 3일 통과하고 7월30일에는 상원을 통과했다. 특히 아라고박사는 7월3일 하원에서의 강연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특질과 효용성을 역설했다. 사진의 장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정확한 기록성, 신속성 그리고 진실성이라는 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용성을 예건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
출처 - 사진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