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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4. 12:50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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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우물에 빠진 날


 







글사진 현린



0 어느 날 새끼 낙타가 어미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발은 왜 이렇게 뭉퉁해요?” “그야, 사막의 모래 위를 걷기 편하라고 그런 거지.” “그럼, 우리 등에 혹은 왜 있는 거죠?” “그건,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려면 양분을 저장할 곳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우리 눈썹은 왜 또 이렇게 길죠?” “그건, 사막의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고.” “그렇구나. 그런데 엄마, 우리 지금 동물원에서 뭐하는 거죠?” 그러게. ‘뒷모습’(Vues de dos, 1981)이라는 책에서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일종의 ‘아나토피즘’(anatopisme)이다. 특정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대상이 그 시간에 등장하는 것을 두고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e)이라 하듯, 특정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대상이 그 공간에 등장하는 것은 ‘아나토피즘’이라는 것. 이른바 ‘발견된 오브제’들로서 수집되어 한 곳에 모인 그 대상들의 고향을 고려하면 분명 그렇다. 하지만 제국의 맥락에서 볼 때 동물원은 자본과 권력의 상징으로서, 박물관과 백화점, 갤러리와 쇼핑몰과 함께 제국주의 시대 제국의 수도라는 지극히 동일한 시공간에서 탄생한다. “아놔, 므슈!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고!” 쩝, 이 녀석의 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투르니에는 ‘황금 구슬’(La Goutte d''''or, 1985)이라는 소설을 썼나 보다. 모든 것은 사하라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시작되었으니, 그날은 낙타가 우물에 빠진 날이기도 했다.

1 오아시스 마을 타벨발라의 목동 이드리스는 그날 아침도 염소와 양떼를 몰고 나왔다. 곧 따분해졌고 뭔가 흥미 있는 것이 없을까 해서 반(半)유목 부족인 샴바족의 외눈 낙타지기 이브라힘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브라힘을 찾던 중에 사륜구동 랜드로버를 타고 온 검은색 안경을 쓴 금발머리 여자와 마주친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금발머리는 뽀얀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고, 카키색 반팔 블라우스의 목둘레는 깊게 파여 있었으며, 바지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짧았다. 그녀의 첫마디는, “어이 꼬마! 너무 움직이지 마. 널 찍을 거야.” 차 안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무례함을 지적했지만, 여자는 막무가내로 이드리스와 양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댔다. 이드리스가 사진을 달라고 하자, 그녀는 파리에 도착하면 보내주겠다고 하고선 돌아갔다. “이제 내 사진도 생기겠군.” 소년은 타벨발라에서 제 사진을 소유한 두 번째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볼거리가 정말 많은 날인 모양. 랜드로버를 보내고 나서 찾아낸 이브라힘은 곧 낙타 한 마리가 새끼를 낳을 거라며 따라 오라 한다. 그러나 출산 중일 낙타가 있는 우물가로 갔더니, 갓 낳은 새끼는 보이는데 어미가 보이질 않는다. 새끼를 낳고서 목을 축이려다 20미터 깊이의 우물에 빠진 것. 설상가상 다리까지 부러졌다. 농경 부족민들의 낙타를 돌봐주고 그 젖 전부와 새끼의 절반을 챙기는 부족의 일원답게 이브라힘의 계산은 빨랐다. 그는 우물 바닥에서 주저 없이 낙타의 도살을 시작했고, 해체된 고기를 이드리스에게 건네며 우물 밖에 쌓도록 했다. 마침내 작업을 끝낸 이브라힘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우물 가로대 위로 올라섰을 때, 긴장과 피로와 한낮의 태양에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그는 마치 사자처럼 부르짖으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지끈, 가로대가 부러졌다. 이브라힘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우지끈, 이번엔 우물 내벽을 지탱하던 가로대가 부러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진동했고, 우물은 이브라힘과 함께 완전히 매장되었다.

‘사악한 시선’의 저주가 벌써 시작된 것일까? 타벨발라에 사는 베르베르인들은 사진을 찍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사악한 시선’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드리스도 이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 초래한 위험 앞에 떨고 있었다. 사진기에 노출되자마자, 처음엔 낙타가, 다음엔 이브라힘이 우물에 빠져 죽었다. 하지만 열다섯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낙타 조각에 열심이고, 유목민 이브라힘을 동경하는 이드리스의 바깥세상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사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참석한 결혼식에서 보게 된 놀이꾼들의 공연은 이드리스의 열망에 더욱 불을 질렀다. 공연이 절정에 이를 무렵 빨간 너울을 두르고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고 등장한 흑인 여자 제트 조베이다. 이 검은 무희는 처음엔 자신에게 마련된 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더니, 점차 주변의 모든 음악과 춤을 모아 자신 안에 응축시키려는 듯 서서히 원의 중심으로 다가가며 움직임의 폭을 줄였다. 마침내 그녀가 조각상처럼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오직 그녀의 배만이 장신구들을 흔들며 낭랑한 소리를 냈다. 장신구들 대부분은 하늘이나 땅, 사막의 동물이나 바다의 물고기를 본뜬 것이었는데, 가죽끈에 매달린 채 홀로 빙글빙글 도는 황금구슬만은 예외였다. 삼라만상을 품은 듯 간결한 완성미를 갖춘 그 구슬은 이미지 없는 세계의 발현체로서, 모든 음악과 춤을 응축시킨 순수기호이자 절대형상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드리스는 제트 조베이다를 다시 보기 위해 놀이꾼들의 천막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대신 모래 속에서 그녀의 황금구슬을 주워 목에 걸었다. 제트 조베이다와 함께 황금구슬은 자신의 사진을 찍은 금발머리 여자에 대한 해독제, ‘사악한 시선’에 맞서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기다리던 사진은 결국 오지 않았다. 파리에서 우편물 하나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봉투에서 나온 것은 이드리스가 아니라 이빨을 드러낸 당나귀 사진이었다. 이드리스는 분노의 눈물을 삼켰다. 사진을 받으러 파리로 가야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타서 돌아온 ‘오아시스의 영웅’이자, 이드리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주기도 한, 무엇보다도 마을에 한 장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진의 주인공인 삼촌에 따르면, 이드리스는 반드시 사진을 찾아야 했다. 전쟁 중 어느 종군기자가 찍어서 인화해준 그 사진 속에는 삼촌을 포함해 세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그 사진을 받지 못한 나머지 두 사람은 다음 전투에서 전사했다. 따라서 삼촌에 따르면, 문제는 사진 찍히고 말고가 아니라 찍힌 사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다. “자기 사진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 하는 거야. 사진을 내돌리면 안 돼!” 이드리스는 북쪽으로 떠나야 했다. 사진만이 아니라, 일자리, 돈, 금발여자, 이 모두가 속한 세계, 타벨발라와는 정반대인 그 세계로 떠나야 했다.





Namo, 2009.



2 자신의 사진을 찾아 떠난 길에서 이드리스가 처음 사진을 발견한 곳은 베니 아베스의 사하라 박물관. 그곳에는 자신과 자신들 부족의 일상이 박제되어 유리상자 안에 갇힌 채 전시되고 있었다. 함께 전시된 사진 속의 사람들은 이름을 대라면 댈 수 있을 만큼 낯익은 사람들이었으니, 바깥세상에서 이드리스는 살아 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였다. 베샤르에서는 ‘사진예술가 무스타파’의 스튜디오에 잠깐 머무는데, 그에 따르면 사하라에 직접 가서 찍어오는 컬러사진은 아마추어들의 관광사진일 뿐, 자고로 프로의 예술사진이란, ‘페르시아 시장에서’ 같은 음악과 ‘이상화된 사하라’ 풍경화를 배경으로 ‘영감’을 받고 ‘정화’된 채 찍은 흑백사진이다. 항구도시 오링에서 여권을 만들기 위해 즉석사진부스에서 생애 두 번째로 찍은 사진에는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이 찍혀 있었다. 지중해를 건너 바르세유에 도착해서는 홍등가에서 또 다른 금발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를 만지기 위해 황금구슬이라는 비싼 화대를 치르고 확인한 것은 그 금발이 가짜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긴 열차여행 후에 금발여자처럼 눈부시게 화려한 도시, 파리에 도착한다. 하지만 파리는 화대 없는 빈털터리에게는 결코 만질 수 없고 볼 수만 있는 도시, 그래서 손이 아니라 오직 눈을 위한 도시, 또 하나의 거대한 유리상자였다. 이드리스 손의 몫은 따로 있었다. 눈 혼자서는 눈 자체는커녕 볼거리도 만들 수 없는 법, 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값싼 노동자의 거친 손. 이드리스도 다른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파리 18구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그리고 “늘 저 자신의 배설물에 묻혀 질식해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쓰레기를 빨리빨리 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파리에 널린 기름진 종이와 개똥을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하수시설을 청소하는 미화원이 되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백화점의 도시인 파리의 눈이 방금 사막에서 도착한 이 신선하게 살아있는 화석을 놓칠 리 없었다. 이드리스는 도로에서 비질을 하다가 주변에서 ‘하수구에서 건진 향기로운 붉은 장미’를 소재로 영화를 찍던 감독 눈에 띄어 즉석에서 미화원으로 캐스팅된다. 작업복을 사러 의류매장에 갔다가는 윈도우 디스플레이어의 눈에 띄어 말 그대로 몸 자체가 캐스팅되어, 소년의 마네킹만을 수집하는 어느 별난 사진가에 따르면 더 들여다 볼 내면 따위 없다는 마네킹의 원본이 된다. 이곳에서도 그는 찍히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돈을 받았다는 것. 그러던 중 마침내 금발여자를 찾았다. 한 카페에서 만화잡지를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 자신과 금발여자의 만남이 재현되고 있었다. 만화는 두 이방인이 이드리스를 떠난 후 나눈 얘기까지 들려주었다. “솔직히 말해봐. 당신은 쟤한테 사진을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난 말이야, 당신이 내 사진을 숱하게 찍었지만 한 번도 사진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 그녀는 프로모델이었고, 그러니 자신의 사진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남자가 찍은 사진은 그녀를 위한 사진이 아니라 그 사진에 돈을 지불하는 고객들을 위한 것이므로. 굳이 사하라의 모래언덕이나 종려나무 숲까지 찾아갔던 것도, 프랑스인이나 아랍인이나 모두 이국정취 속 금발여자의 사진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좋아하겠지. 사진에 찍힌 금발머리 노예를 빼고는 말이야.” 그녀 역시 이드리스와 마찬가지로 ‘사악한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은 아무데나 돌아다녀.” 그리고 이드리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두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 이드리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달아나자고 한다. 하지만 이드리스를 알아보지 못하는 여자는 기겁을 한다. 결국 괴한으로 몰려 경찰에 체포된 이드리스는 또 찍혔다. 이번엔 범죄자 사진.

“아놔, 므슈! 왜 자꾸 인간들 얘기만 해? 대체 낙타 얘기는 언제 하냐고!” 아, 아직 대답이 안 되었나? 그렇다면 아주 쉬운 예 하나. 그러니깐, 이드리스를 처음 영화에 캐스팅한 감독은 광고야말로 영화예술의 극치라고 아는 CF감독이기도 했는데, ‘종려나무 숲’이라는 음료수가 주인공이고 사막이 배경인 광고에 이드리스를 낙타지기로 출연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이드리스와 함께 연기한 서커스단에서 헐값에 사온 늙은 숫낙타는 촬영이 끝난 후 쓸모없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브라힘처럼 계산에 빠른 ‘광고예술가’는 이드리스에게 낙타를 도살장으로 끌고 가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아나토피즘의 절정이 펼쳐지니, 사막에서 올라 온 한 소년이 낙타를 몰고서 에펠탑 아래와 센 강변의 아스팔트 위를 걷게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도살장에서 소와 양의 가죽을 벗기던 사람들은 낙타의 도살을 거부한다. 그래서 또 헤매다가 발견한 것이 동물원이었다. 마침 암낙타 한 마리가 다가왔고, 마치 두 낙타는 영화 포스터 속의 연인들처럼 서로를 애무했다. 그래서 이드리스는 도살장 대신 동물원에 늙은 숫낙타를 두고 왔다. 이봐, 어린 낙타. 혹시 아빠 나이가 많지 않아?

3 존 버거(John Berger)의 ‘본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 1980)에 실린 글들 중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와 ‘프랜시스 베이컨과 월트 디즈니’에 따르면, 동물들을 구경거리로서 동물원 우리에 가두면서, 인간들은 동시에 도시 자체를 동물원으로 만들고 자신들마저 구경거리로 만든다. 그 거대한 유리상자 안을 채운 다종다양한 ‘발견된 오브제’들과 섞여 있는 인간은, 새끼 낙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노예의 삶을 살던 낙타도, 낙타를 도살하던 사자도, 이제는 디즈니 만화처럼 반복해서 부활하고, 차라투스트라가 기대했던 아이는 초록색 거인과 당나귀 장난감을 손에 쥐고서 그들의 너스레에 까르르 넘어갈 뿐이다. 또는 기껏해야 “인간은 자신이 불행한 원숭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불행한 원숭이”라고 냉소할 뿐이다. 이드리스는 달랐다. 비록 금발여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만이라도 ‘사악한 시선’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하여 늙은 이주노동자 선배를 통해 만난 아랍 서예가에게서 이미지를 듣고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자동차들을 잠재울 지하 주차장 건설을 위한 굴착 공사를 하러 방돔 광장에 갔을 때, 이드리스는 보석가게에 진열된 황금구슬과 재회한다. 구슬은 유리상자 안에 갇혀 있었고, 이드리스는 망치를 들고 있었다. 공기해머의 몸체를 자신의 배에 밀착시키고, 도시의 검은 가죽 아래로 해머의 날을 박아 넣은 이드리스는 해머의 전원을 올렸다. 공기해머의 진동에 몸을 싣고 이드리스가 제트 조베이다처럼 춤을 추는 동안, 아스팔트와 함께 유리 역시 깨져 나갔다.<월간사진 2011년 1월호>



Varanasi,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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