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번째 테마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사람이 살다보면 뭔가 남기고 싶고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라든지, 어떤 상황이 인상적일 때 혹은 괴로울 때 흔히 일기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때의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또한 오랫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히 시(詩)적 형식을 빌리지 않는 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왜냐면 뭔가 남기고 싶은 대상들이 아쉬움이나 애석함, 무기력하고 허탈한 일종의 공허함, 갑작스런 충동 혹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거나 당해야하는 상황 등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음색(tonalite)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같이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들을 언어 대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다소 미술에 소질이 있을 경우 화폭에 자신의 심경을 재현(특히 추상적 방법으로)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번역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사실상 자신도 그러한 표현적 번역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추상적인 것이지만 뭔가 재현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존재의 형이상학적 대상)인데, 그것은 현상학적으로 말할 때 장님이 추리하는 코끼리의 실체 혹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미술에 소질이 없어 카메라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 알다시피 특별한 소질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카메라로 대상을 녹음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인화도 해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방법은 어렵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 아니 황당하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최소한 찍는 순간만큼은 어떠한 번역도 허락하지 않는 너무나 단순한 기계이면서 동시에 일단 결정된 대상에 대하여서는 무차별하게 기록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작가의 번역 방법은 사실상 파인더로 들어오는 대상의 선택적 방법 외에는 없다.1) 그러나 시각적 재현이라는 장르에서 사진은 오랫동안 그림의 형식에 동화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진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타인에게 내 보일 때 전시, 카탈로그, 서명, 판매 등의 최소한 외형적으로 사진을 그림화 하고 또 그러한 사진 작품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림의 양식에 따라 작품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적절한 해설(분명한 정답 ?)을 찾는다. 사진 비평 역시 마치 손으로 그려진 그림 이미지에 대한 분석적 담론을 행하듯이 거의 정확히 그림의 비평 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사진은 근본적으로 미술과 다른 매체다. 우선 그 진행 과정에서 그림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재현하려고 할 때 마치 베틀에서 한 올 한 올 엮어 직조를 하듯이 혹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붓 터치의 확산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림을 이루는 최소 단위를 “조형적 세포”라고 할 때 사진의 경우는 “광자(光子)적 세포”라고 한다.2)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을 이루는 세포들은 빛에 의해 동시에 생성되고 또한 동시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림적 사실주의와 사진적 사실주의3)는 본원적으로 서로 다른 출현 조건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에 결국 의미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적 사실주의는 세포의 확산에 따른 작가의 필연적인 “번역”을 허락한다. 회화의 극사실주의가 말해주듯 작가가 아무리 대상과 똑같이 모사한다 하여도 완성된 그림 이미지에는 최소한의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메시지가 객관적 의미를 가지든 혹은 무의미(탈 의미 즉 음영의 불특정 의미)를 암시하든 재현되는 대상 위에서 적어도 의도적인 번역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고, 그때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완성된 이미지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림은 비교적 분명한 회화적인 메시지를 이미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작가의 예술적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작품에 첨부되는 비평문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비평은 원칙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로부터 번역된 작품(그림적 사실주의) 사이에서 작품이 표명하는 메시지에 대한 일종의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광자적 세포를 갖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 혹은 번역을 그림처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의 절대적 모사(caaete)뒤에서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은 번역적 재현이 아닌 함축적 재현이다. 그래서 재현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그림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언제나 이미지의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혹은 공시, connotat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절대적 닮음(analogon)만을 갖는 사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그림의 분명한 “일 대 일”의 시각적 번역과는 달리 언제나 찍혀진 대상이 상징하거나 암암리에 객관적으로 약속된 의미 즉 코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그림 역시 상징적 메시지를 표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은 근본적으로 그 절대적 외시(denotation)로부터 “무엇을 뜻한다” 혹은 “무엇을 상징한다”라는 의미적 코드(symbol)에 묶이게 된다.4) 달리 말해 사진적 메시지는 처음부터 상징이라는 우회적인 틀 속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흔히 작가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분명히 인정되는 함축성 즉 공동체적 코드에 동화시키기도 하며, 반대로 관객 역시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코드 속에서 공통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과 달리 사진이 쉽게 진부하고 판박이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판박이 혹은 붕어빵의 형상(form)들은 사진이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그리고 구경꾼 같은 관객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된 메시지(studium)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판박이의 주제는 언제나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왜냐면 아무리 과거에 드물고 특이한 사진 주제라도 오늘날 이미 보편화된 주제(앎)라면 그것은 하나의 붕어빵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왕따”라는 개념은 이미 보편화된 사진적 주제 즉 판박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아직 인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현실에서 징후로서만 나타난(말하자면 음의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거 시대에는 의심할 바 없이 특별한 사진의 주제였을 것이고 아마도 당시 위대한 사진작가(장님)는 자신의 감각적 지팡이로 이미 이러한 개념을 재현했을 것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그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초보적인 현시 광고의 첫 조건은 텍스트를 동원하여 최대한 사진 이미지의 내시를 극소화하는 것인데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조건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이다.5) 왜냐하면 광고는 그 속성상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지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하면 할수록 사진은 결국 광고와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한 사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익히 약속된 메시지는 사진의 형식적인 측면(조형성, 기술성, 솜씨 등)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작품성을 가질지는 몰라도 사실상 우리에게 감동은 주지 않는다.6)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이 빈약한 매체라는 사실은 보다 엄밀히 말해 예술적 표현 방식에 있어 사진적 사실주의는 극히 제한된 매체라는 사실에 관계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재현된 이미지가 함축하는 의미와의 관계가 사실상 “일대다수”의 관계를 갖는다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림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고 있지만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인 외시적 메시지 외에 어떠한 시각적 번역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함축적으로 모호한 다수의 번역 가능성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붉은 사과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파란 사과로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단지 붉은 사과만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붉은 사과는 함축적으로 찍혀지는 상황이나 조건 혹은 첨부된 텍스트(주제, 설명, 비평 등) 그리고 관객의 주관적인 관점(지시론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혀 질 수 있다. 예컨대 신문에 실리는 많은 보도 사진은 편집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조합에 의해 하나의 의미만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편집된 종속 사진인데,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사진 메시지가 전혀 다른 메시지로 둔갑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특수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은 그 자체의 외시 만으로 정확한 전달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코드화(codific -ation)된 형식, 달리 말해 함축적 의미를 최소화시키는 보조적 장치(대표적으로 텍스트의 첨가)가 필요하다(Roland Barthes). 그래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조작과 왜곡 혹은 인위적인 의미 변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사진을 도용하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과 관객을 이어주는 사진 비평은 마치 신문사의 편집장이 사진이 가진 다변적 의미들 중 자의든 타의든 그의 의도에 가장 적절한 의미만을 노출시키기 위한 편집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진 비평은 그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관객으로의 의미적 전달에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일단 사진과 텍스트가 조합되면 사진의 기록성과 증거성 앞에서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는 텍스트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진은 본원적으로 모호한 전달 매체이기 때문에 비평은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코드화 작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적으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경우 사진과 글의 관계는 따로 국밥이다. 또 다른 따로 국밥의 원인은 사진이 작가의 근원적 메시지 즉 음영의 “무의미 혹은 탈 코드”로부터 재현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코드화된 비평”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함축적 번역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텍스트(비평)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가 코드화된 의식(틀)에서 올수록 비록 그 메시지가 사진의 함축적인 장치 속에 은닉되어 있다 하더라도 비평가나 관객의 의미적인 눈에 그것이 쉽게 읽혀 질 수 있다. 그러나 코드의 영역을 떠난 음의 대상들은 객관적 논리로 코드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특별한 작가의 주관적 해설이나 정확한 비평가의 설명 없이는 사실상 의미적인 코드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진은 절대적인 대상과의 닮음 이외에 어떠한 번역적 재현(그림에서는 가능한)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비논리적인 메시지는 더욱 더 은닉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광고나 보도사진 혹은 대중사진과 같이 코드화된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런 비평에 익숙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사진 읽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자신의 고향인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사진 작가가 대도시의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정 넘치는 시골 노인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카메라로 재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고향 노인들을 찍어온 사진들이 있다(도판1). 우선 오늘날 우리들의 객관적인 코드에서 짐작해 볼 때 흔히 노인의 웃는 모습이나 거기서 보이는 몇 남지 않은 이빨과 주름살,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은 할아버지의 남루한 차림새와 때묻은 골동품 같은 물건, 금방이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할머니의 자연스런 제스처 등에서 풍기는 소박한 이미지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즉각적으로 “노심(老心)”이라는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 즉 하나의 분명한 의미적 코드가 읽혀 질 것이다. 또한 이때 조합되는 비평은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코드화된 비평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고향 노인들과 만나 느낀 것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시골노인의 소박한 인간미가 아닌 뭔가 잘못된 노인들의 비정한 눈초리나 경계의 시선(?)에서 감지되는 형용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비교적 교육의 기회와 문화와 접촉이 잦은 대도시의 노인들에게서 오히려 순수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 오늘날 시골 노인들의 가치관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긴 하루의 고독을 메우는 수단과 또 그들에게 세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채널은 사실상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 뿐이다. 몇몇 사회적 치부가 단지 우리 사회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사회 전체의 단면인양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엄청난 뉴스와 고발기사의 홍수는 결국 획일화 된 맹목적인 믿음과 잘못된 판단, 물질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숭배 또 그것을 위한 지나친 자기 방어와 타인에 대한 경계 등 변질된 가치관을 그들에게 고착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늘날 대도시의 정신적 병폐 현상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이성적 구조에서 시골 노인의 왜곡된 가치관은 쉽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대도시와 시골이 역전된 듯한 다소 황당하고 모순된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의 눈에 비친 시골 노인의 얼굴은 괴물이었고 이러한 괴물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마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사진처럼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엉뚱하고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사진은 진짜 괴물 같은 노인이 아니라 단지 이상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다. 왜냐면 미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괴물의 재현은 역사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인간 유형의 변태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인간 실존의 왜곡된 모습과 같이 분명한 시각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특별히 조형적인 요소(조형 사진)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실체인 괴물의 사진적 재현은 단지 현실의 자국인 징후(index)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자국의 재현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를 재현한 사진적 이미지를 객관적인 코드의 눈으로 보면 사진은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고, 또한 징후로서 암시된 사진적 메시지를 코드화된 비평으로 설명한다면 사진과 글의 관계는 분명히 따로 국밥이다. 결국 이 작가가 재현하고자 한 괴물은 코드가 없는 하나의 징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코드화된 정태적 의미가 아닌 진화적인 “동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진의 대상인데 이때 그 존재의 출현을 철학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e immanente)의 재현”이라고 한다. ● 주) 1)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비평가들은 사진을 그림과 비교하여 “빈약한 사진(La photogra -phie pauvre)”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은 그 조형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한계를 가진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외시적으로 절대 빈약한 표현 매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Dominique Baque, La photographie plasticienne, Regard, Paris, 1998, chapitre I. 2)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1987 에서 인용된 용어. 3) 사진(The photograph)은 분류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흔히 물질(특히 인화지)에 관계하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는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적 방법에 의해 생산된 총괄적인 복사 이미지를 말한다. 예컨대 캔버스에 복사적으로 나타난 사진 이미지나 혹은 디지털 화면에 출현한 사진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라고 언급해야 한다. 이는 손에 의해 복사된 그림적 사실주의와의 분명한 구별을 위한 개념적 용어이다. 그러나 사진과 사진적 사실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비물질적인 실체의 출현은 언제나 종이, 천, 캔버스, 화면 등 물질적인 것을 동반하고 있다. 4) 사진을 대다수의 19세기 사진과 같이 그림을 위한 대상의 복사적 기능(icon)으로 보는 관점은 제외하고 5) Roland Barthes, L’obtus et l’obvie, Cahier de la photographie,Paris, 1977 참조 6) 엄밀히 말해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창조적 의미에서 볼 때 작품성과 예술성은 이론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술은 발견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추적이기 때문이다(존재론). 감동은 반복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움에서 온다. 감동을 주는 것 혹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은 진정한 작가의 예술적 의도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모든 사진 이미지들을 예술사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령 광고지 귀퉁이에서 발견되는 푼크툼는 단지 찍혀진 대상과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에서만 이해될 뿐이지 작가의 의도에 의한 모두에게 공유된 메시지는 아니다. 영상 이미지에서 푼크툼과 작가의 예술적 의도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김선희, 낯선 초상 시리즈 중,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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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거리에서 혹은 육교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초라하고 측은한 모습들 특히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불구를 강조하며 구걸하는 소위 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반 폭력적인 행위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에 관해 우선 부정적이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 혹은 부속적인 걸림돌로 간주되며 결국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부등호의 원칙이 성립하는데 오랫동안 이러한 원칙에서 소위 가진자의 “동정”이라는 우월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라 함은 예컨대 구걸하는 맹인에게 동전을 적선한다든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과 같은 선의적인 제스처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소외된 자에 대한 의도적인 배려는 사실상 집단과 전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편견과 불평등의 신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행위는 거의 상징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강압적인 원칙에 복종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에는 두 가지 교묘한 지배 논리가 있다 : 하나는 “평등”이라는 집단 우선적인 개념이고 또 하나는 “정상”이라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원래 평등과 정상은 관용(똘레랑스 tolerance)① 이 아닌 불관용(앵똘레랑스 intolerance) 즉 특정한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마스크이고 계몽의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사고(합리와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국가 지배 개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그 대상이 훈련된 우리의 인식으로 의식할 수 있든 없든 여하간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서로 절대 가치의 우위를 측정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존재로 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원래 존재는 “그대로의 출현”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등을 빙자한 “민주”와 보편 타당성을 원칙으로 하는 “정상” 다시 말해 어떠한 불순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성 혹은 통일성이 강요하는 절대적 흑백 논리는 오직 집단을 위한 이성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는 사변적 폭력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물질 사회 속에서 특히 유일하게 자본주의만 부화된 한국의 물질만능의 현실에서는 오직 민주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콜롬부스는 침략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부스는 언제나 발견자 혹은 정복자(또한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가 되듯이 자신과 다른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만 인정하는 흑백 논리의 세상 그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에 대한 맹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진보는 소수를 위한 개념적 포용이지 다수를 위한 논리적 반전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자. 종교적 전도라는 명목으로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멀쩡한 외모를 가진 어느 독실한 교인의 침튀기는 설교, 오직 기존 정권의 전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야당 인사의 정치적 폭력, 북한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노동 파업과 그 연대 투쟁, 이러한 명분과 주장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식에서 마치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같이 비정상적 존재의 돌출로 간주되며 또한 사실상 거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은 단지 정상이 의도적으로 구획해 놓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진자 혹은 기득권자의 지배논리로 이해되는 동정이 아니라 또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변적 “공존”이다. 이러한 공존은 정상과 비정상, 강자와 약자, 혹은 다수와 소수의 존재론적인 일치(관용 혹은 포용)를 말하고 있다 : 예컨대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듯이 정치에서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적이 되며 좌파의 관점에서 우파 역시 적이 된다. 또한 심지어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온건파나 중도파의 노선은 오히려 억압되고 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인데 후설은 “우리는 언제나 중성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의 상황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누설하는 은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존” 혹은 “관용”에 있다. 그녀의 많은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외시하는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은 이러한 사변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서 선별되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 그녀의 사진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표로서의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사진이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면서 또 다른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정이나 인본주의적 명분을 앞세우는 계몽적 사진은 더욱 더 아니다. 더욱이 우울증이나 강박관념과 같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성향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나 불행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녀에게 모델로서 장애인은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누락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출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지 의도적으로 또한 노골적으로 이러한 “존재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아버스의 사진들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출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예 : 사진 2). 이성에 의해 규정된 “정상”의 세계(보이는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안 보이는 세계)를 병치하면서 소위 괴물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신체 불구자, 거인과 난쟁이, 정신박약, 동성연애자, 성전환자 등 마치 생물학적 도감을 보듯이 공통적으로 뭔가 엉뚱한 괴물로 나타난다. 정면으로 출현한 이들은 장애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마치 누군가(조물주) 만들어 놓은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존재로 규정된다(사진 1, 3, 4). 이를 위해 그녀의 촬영방식(거의 50mm 표준 렌즈 / 초기에는 소형 카메라, 60년부터 6 x 6 필름을 사용)은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단순한 방식을 하고 있고 또한 그 구성에서도 대칭성과 정면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방법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시에 대조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그녀가 포착한 것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음의 존재들(ombres)이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이고 산발적(소수)이고 또한 징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주 밖의 괴물, 기형, 히피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 즉 프리크(freaks)들로만 나타난다. 원래 어원학적으로 프릭크는 알려지지 않은, 불명의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을 지칭하고 그들은 본원적으로 ‘이상한 혹은 엉뚱한 것(oddity)’ 즉 부등의, 부조화의, 기수의, 짝이 맞지 않는, 비스듬한, 삐딱한, 만사가 신통치 않은 불완전한, 부족한 등 공통적으로 어떤 비정상(imparite)에 관계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조물주의 동등한 작품으로 원래 정상적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획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어 ‘비정상’으로 치부된 것들이다.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 가령 모두가 왼손잡이인 집단에서 오른손잡이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기형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또한 키 작은 난쟁이 집단에서 키 큰 사람 역시 기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에서 이성의 결혼은 물론 금지될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은 단지 한 집단이 선별적으로 규정한 편견에 의한 것이다.”② 그래서 아버스의 인물들은 단순한 장애인의 유형학적 진술이 아니라 소외된 존재의 누설로 간주된다. 역설적 방법으로 매조키즘(피학대 음란증)적인 비관주의적 시각에서 세상의 ‘추함’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것은 일종의 불행의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별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활용한 과도한 플래쉬는 모델을 더욱 더 경직스럽고 인위적이고 순진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낮보다 밤에 오히려 더 많은 기형(oddity)를 생산한다는 유태인의 사고에서 온 논리이기도 하다. 1971년 여름 그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신경안정제인 바르비투스산제를 먹고 동맥을 끊고 자살하기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보이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산보 중인 사람들을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별한 시각은 사회학적 관점 이전에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아버스의 사진은 정상적인 우리들의 이성의 눈(코드)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응시자의 눈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시각의 개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형인, 늙은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비정상인은 사실상 정상인과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집단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보편적 기준에서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로서 나타난 그들의 출현은 열등한 종족의 괴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추어진 우리의 ‘이중적인 얼굴’임(Norbert Bernard)과 동시에 오랫동안 망각된 존재의 진실 즉 우리 모두의 ‘증세와 기념비’(Henri Van Lier)가 된다.”③ 근본적으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집단 사회(특히 물질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패션사진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빈부차이나 물질 만능사회에 대한 체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을 대표로 하는 집단사회가 통일된 지향성을 위해 규정해 놓은 미(넓은 의미에서)적 가치에 대한 편파적 기준이다 : 오랫동안 우리는 이성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불행, 비극, 추함 혹은 소외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인간조건의 이상적인 조화와 긍정적인 시각에 익숙하여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우상이나 모델을 위한 강압적인 규범으로 사실상 반쪽 세상의 불관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행의 신호로 간주되는 비 정상인을 모델로 하여 그녀가 생물학적 관상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추함과 불행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억압된 존재의 폭로로 볼 수 있다.”④ 그것들은 이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시뮬라크르임과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 <주요 참고 도서>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김희숙 정보라 옮김, 똘레랑스, 길, 2000. (참고 : 임지현 평, 동아일보) Doon Arbus, Diane Arbus, Aperture, New York, 1972. Regis Durand, La part de l'ombre, Essais sur l'experience photographique, La Diffrence, Paris, 1990.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La photographie comme destruction, Universite de Provence, Arles, 1993. Diane Arbus Sans Titre, Aperture/Edition de La Martiniere, New York/Paris, 1995. Diane Arbus, Photoraphe de presse, Aperture/Herscher, New York/Paris, 1984. 주) ①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경률,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비평, 2001년 가을호, 타임스페이스, 서울. ② 같은 책. ③ 같은 책. ④ 다시 말해 그들의 흑백논리에서 이러한 소외된 존재들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물질과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양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대상들을 정상이라 규정하고 역으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의 비정상적인 대상들을 괴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편견적 사고를 불관용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용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을 인정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공존 즉 존재의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전자의 시각을 통일된 하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존재의 획일성”에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discontinuite)”이라고 하며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세계를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한다는 의미에서 “연속(continuit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르주 바타이유)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도 한다(마르틴 하이데그). (집단사회가 강요한 미적 추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추의 예찬”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복개(couvering)”작업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호텔 방에서 타올을 덮은 멕시코인, 1970 (사진 2) 뉴욕 브루클린 젊은 가족의 일요일 나들이, 1966 (사진 3) 뉴욕 100번지 거실의 러시아 난쟁이들, 1963 (사진 4) 뉴욕 20번지 집에서 파마를 한 젊은이, 1966 |
첫번째 테마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빛과 어둠으로 비유되는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개념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빛이 없으면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없는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리들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사진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철학적 은유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거기에는 빛의 그림자라는 논리적 설명이 있다. 마치 동굴의 빛이 점진적으로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듯이 인식의 영역은 지금도 확장하고 있다. 예컨데 오늘날 많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이 그러한 사실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감각은 언제나 어둠의 세계에 있고 창조는 미지의 광맥에서 금을 캐는 고독한 작업이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을 말할 때 언제나 반쪽 세상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가 방아 찧는 달의 앞면만 보고 ‘저게 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달의 뒷면은 인공위성을 동원하지 않는 한 언제나 앞면에 가려져 있어 그 모습은 단지 상상과 추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세상에는 가시적이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 외에도 달의 뒷면과 같이 은닉된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반대로 어떠한 사실이 일단 검증되거나 명백히 논리화(대표적으로 법과 제도)되면 그것은 일종의 수학적 공리가 되면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이러한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되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적어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민간설화 혹은 기운(氣)이나 직감 그리고 운명 등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많은 설화적 지식(J.-F. Lyotard)을 감각과 징후의 맥락 속에서 믿었다. 이때의 믿음은 현상에 대한 진실 혹은 본질의 추적에 관계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은 과학적 지식에 대한 절대적 맹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맹신은 누군가 파놓은 “논리”라는 거대한 함정을 말한다.
우리의 세상은 사유를 말하는, 빛에 의해 밝혀진 대상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인식계는 오히려 어둠의 세계인 음영계 (ombres)를 배경으로 세워진 극히 부분적인 세계라 볼 수 있다.1) 이와 같이 빛의 세계를 만드는 배경으로서 어둠의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담론을 인식론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존재론(ontolo-gie)이라고 하고, 이러한 관점에서의 현실 즉 존재론적인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 구조에서 설명된다. 즉 음의 세계는 양의 세계, 규명된 형상(forme) 혹은 이성(raison)의 영역 주변에서 언제나 배경(fond)을 이루고 있다. 아울러 존재론적 철학에서 흔히 “자연”이라는 것은 이러한 양과 음의 이중구조 전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지 이데아(Idea)에 대한 모사, 즉 신빙성을 말할 뿐이다. 단지 이 단계에서 존재하는 대상들은 동굴 밖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 동굴 내부 벽에 비쳐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가능한 대상들의 영역을 인식계라고 할 때, 인식계는 빛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포함된 대상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언제나 억견으로만 되어 있다. 왜냐면 이데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죄인들은 동굴 밖의 눈부신 빛 때문에 자신의 이데아(참 모습)는 볼 수 없고 언제나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최상 계급인 철학자의 역할을 그들에게 진정한 자신들의 이데아를 상기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이데아를 전통적으로 진리 혹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식의 영역을 넘어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대상의 세계를 말한다. 빛이 도달하지 못하는 동굴의 하부 혹은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하는 비 인식 대상들은 단지 감각에 의해 추측되거나 감지될 뿐이며 언제나 어둠의 세계(ombres)에 있다. 사실상 이들은 동굴에 존재하는 대상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의식에는 결코 출현하지 않으며 어떠한 뚜렷한 형상(forme)도 가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우리들의 의식에 하나의 징후로서 출현하여 자신들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자연현상까지)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단지 생성 변전 과정에서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이고 또한 상대적인 진리일 뿐이다(니체의 생기 존재론). 예를 들어 수학적 공리나 과학적 법칙 혹은 사회 현상의 많은 논리들을 동굴 입구에서 만날 때 좀 더 멀리서는 기호나 통계 또는 해석과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관념적인 담론(구조주의)들을 만날 수 있다. 크게 보아 물질 중심의 담론들이 바로 이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을 촬영한다면 사진들은 과학적 분석이라는 일종의 보고서나 혹은 상호간의 약속된 코드나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진술이 될 것이다.
이러한 원천적인 대상들을 우리가 가지고 들어간 카메라로 촬영한다면 사진은 우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특정한 시적 의미 혹은 푼크툼(punctu-m)이나 아우라(aura)와 같은 탈코드(sans code)의 형태로 나타난다. 흔히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서 야기되는 황당한 사건이나 엉뚱한 현상 혹은 비록 평범하고 의미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예견치 못하는 인상(impression)이나 묘한 음색(tonalite)에 대한 실체나 본질을 보여 줄 것이다. 빛의 세계에 나타난 대상이 언제나 언어와 의미를 동반하는 진술체계(구조주의)에서 이해된다고 한다면,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신호(signe)체계에서 단지 징후(특히 퍼스 Peirce의 기호론)로서만 출현한다. 대상을 존재론적 혹은 질료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견해, 달리 말해 현상적 사물보다 내면적 실재를 우선으로 하는 담론(니체철학, 실존철학 또는 후기 구조주의적 담론 등)들이 여기에 관계하고 있는데, 공통적으로 대상은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질료에서 형상으로 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주> 1) 여기서 빛의 세계, 즉 인식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이나 사건 등의 모든 관념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새해부터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사진예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중앙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이경률 박사가 열가지 테마로 열어보는 또 다른 반쪽 세상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6년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사진평론가 진동선 선생의 ‘사진비평’이 63회로 끝을 맺음에 따라 이경률 박사가 독자들의 ‘사진이론’ 공부를 돕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론공부는 어렵고 딱딱하기 마련이지만 이론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사진이야기를 해나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글·이경률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그림자 연극”, 벤스터 화랑, 네덜란드 로테르담,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