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테마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사람이 살다보면 뭔가 남기고 싶고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라든지, 어떤 상황이 인상적일 때 혹은 괴로울 때 흔히 일기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때의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또한 오랫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히 시(詩)적 형식을 빌리지 않는 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왜냐면 뭔가 남기고 싶은 대상들이 아쉬움이나 애석함, 무기력하고 허탈한 일종의 공허함, 갑작스런 충동 혹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거나 당해야하는 상황 등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음색(tonalite)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같이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들을 언어 대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다소 미술에 소질이 있을 경우 화폭에 자신의 심경을 재현(특히 추상적 방법으로)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번역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사실상 자신도 그러한 표현적 번역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추상적인 것이지만 뭔가 재현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존재의 형이상학적 대상)인데, 그것은 현상학적으로 말할 때 장님이 추리하는 코끼리의 실체 혹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미술에 소질이 없어 카메라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 알다시피 특별한 소질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카메라로 대상을 녹음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인화도 해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방법은 어렵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 아니 황당하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최소한 찍는 순간만큼은 어떠한 번역도 허락하지 않는 너무나 단순한 기계이면서 동시에 일단 결정된 대상에 대하여서는 무차별하게 기록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작가의 번역 방법은 사실상 파인더로 들어오는 대상의 선택적 방법 외에는 없다.1) 그러나 시각적 재현이라는 장르에서 사진은 오랫동안 그림의 형식에 동화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진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타인에게 내 보일 때 전시, 카탈로그, 서명, 판매 등의 최소한 외형적으로 사진을 그림화 하고 또 그러한 사진 작품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림의 양식에 따라 작품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적절한 해설(분명한 정답 ?)을 찾는다. 사진 비평 역시 마치 손으로 그려진 그림 이미지에 대한 분석적 담론을 행하듯이 거의 정확히 그림의 비평 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사진은 근본적으로 미술과 다른 매체다. 우선 그 진행 과정에서 그림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재현하려고 할 때 마치 베틀에서 한 올 한 올 엮어 직조를 하듯이 혹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붓 터치의 확산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림을 이루는 최소 단위를 “조형적 세포”라고 할 때 사진의 경우는 “광자(光子)적 세포”라고 한다.2)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을 이루는 세포들은 빛에 의해 동시에 생성되고 또한 동시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림적 사실주의와 사진적 사실주의3)는 본원적으로 서로 다른 출현 조건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에 결국 의미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적 사실주의는 세포의 확산에 따른 작가의 필연적인 “번역”을 허락한다. 회화의 극사실주의가 말해주듯 작가가 아무리 대상과 똑같이 모사한다 하여도 완성된 그림 이미지에는 최소한의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메시지가 객관적 의미를 가지든 혹은 무의미(탈 의미 즉 음영의 불특정 의미)를 암시하든 재현되는 대상 위에서 적어도 의도적인 번역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고, 그때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완성된 이미지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림은 비교적 분명한 회화적인 메시지를 이미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작가의 예술적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작품에 첨부되는 비평문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비평은 원칙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로부터 번역된 작품(그림적 사실주의) 사이에서 작품이 표명하는 메시지에 대한 일종의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광자적 세포를 갖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 혹은 번역을 그림처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의 절대적 모사(caaete)뒤에서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은 번역적 재현이 아닌 함축적 재현이다. 그래서 재현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그림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언제나 이미지의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혹은 공시, connotat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절대적 닮음(analogon)만을 갖는 사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그림의 분명한 “일 대 일”의 시각적 번역과는 달리 언제나 찍혀진 대상이 상징하거나 암암리에 객관적으로 약속된 의미 즉 코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그림 역시 상징적 메시지를 표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은 근본적으로 그 절대적 외시(denotation)로부터 “무엇을 뜻한다” 혹은 “무엇을 상징한다”라는 의미적 코드(symbol)에 묶이게 된다.4) 달리 말해 사진적 메시지는 처음부터 상징이라는 우회적인 틀 속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흔히 작가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분명히 인정되는 함축성 즉 공동체적 코드에 동화시키기도 하며, 반대로 관객 역시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코드 속에서 공통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과 달리 사진이 쉽게 진부하고 판박이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판박이 혹은 붕어빵의 형상(form)들은 사진이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그리고 구경꾼 같은 관객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된 메시지(studium)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판박이의 주제는 언제나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왜냐면 아무리 과거에 드물고 특이한 사진 주제라도 오늘날 이미 보편화된 주제(앎)라면 그것은 하나의 붕어빵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왕따”라는 개념은 이미 보편화된 사진적 주제 즉 판박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아직 인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현실에서 징후로서만 나타난(말하자면 음의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거 시대에는 의심할 바 없이 특별한 사진의 주제였을 것이고 아마도 당시 위대한 사진작가(장님)는 자신의 감각적 지팡이로 이미 이러한 개념을 재현했을 것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그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초보적인 현시 광고의 첫 조건은 텍스트를 동원하여 최대한 사진 이미지의 내시를 극소화하는 것인데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조건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이다.5) 왜냐하면 광고는 그 속성상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지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하면 할수록 사진은 결국 광고와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한 사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익히 약속된 메시지는 사진의 형식적인 측면(조형성, 기술성, 솜씨 등)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작품성을 가질지는 몰라도 사실상 우리에게 감동은 주지 않는다.6)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이 빈약한 매체라는 사실은 보다 엄밀히 말해 예술적 표현 방식에 있어 사진적 사실주의는 극히 제한된 매체라는 사실에 관계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재현된 이미지가 함축하는 의미와의 관계가 사실상 “일대다수”의 관계를 갖는다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림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고 있지만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인 외시적 메시지 외에 어떠한 시각적 번역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함축적으로 모호한 다수의 번역 가능성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붉은 사과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파란 사과로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단지 붉은 사과만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붉은 사과는 함축적으로 찍혀지는 상황이나 조건 혹은 첨부된 텍스트(주제, 설명, 비평 등) 그리고 관객의 주관적인 관점(지시론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혀 질 수 있다. 예컨대 신문에 실리는 많은 보도 사진은 편집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조합에 의해 하나의 의미만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편집된 종속 사진인데,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사진 메시지가 전혀 다른 메시지로 둔갑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특수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은 그 자체의 외시 만으로 정확한 전달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코드화(codific -ation)된 형식, 달리 말해 함축적 의미를 최소화시키는 보조적 장치(대표적으로 텍스트의 첨가)가 필요하다(Roland Barthes). 그래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조작과 왜곡 혹은 인위적인 의미 변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사진을 도용하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과 관객을 이어주는 사진 비평은 마치 신문사의 편집장이 사진이 가진 다변적 의미들 중 자의든 타의든 그의 의도에 가장 적절한 의미만을 노출시키기 위한 편집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진 비평은 그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관객으로의 의미적 전달에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일단 사진과 텍스트가 조합되면 사진의 기록성과 증거성 앞에서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는 텍스트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진은 본원적으로 모호한 전달 매체이기 때문에 비평은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코드화 작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적으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경우 사진과 글의 관계는 따로 국밥이다. 또 다른 따로 국밥의 원인은 사진이 작가의 근원적 메시지 즉 음영의 “무의미 혹은 탈 코드”로부터 재현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코드화된 비평”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함축적 번역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텍스트(비평)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가 코드화된 의식(틀)에서 올수록 비록 그 메시지가 사진의 함축적인 장치 속에 은닉되어 있다 하더라도 비평가나 관객의 의미적인 눈에 그것이 쉽게 읽혀 질 수 있다. 그러나 코드의 영역을 떠난 음의 대상들은 객관적 논리로 코드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특별한 작가의 주관적 해설이나 정확한 비평가의 설명 없이는 사실상 의미적인 코드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진은 절대적인 대상과의 닮음 이외에 어떠한 번역적 재현(그림에서는 가능한)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비논리적인 메시지는 더욱 더 은닉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광고나 보도사진 혹은 대중사진과 같이 코드화된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런 비평에 익숙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사진 읽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자신의 고향인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사진 작가가 대도시의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정 넘치는 시골 노인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카메라로 재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고향 노인들을 찍어온 사진들이 있다(도판1). 우선 오늘날 우리들의 객관적인 코드에서 짐작해 볼 때 흔히 노인의 웃는 모습이나 거기서 보이는 몇 남지 않은 이빨과 주름살,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은 할아버지의 남루한 차림새와 때묻은 골동품 같은 물건, 금방이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할머니의 자연스런 제스처 등에서 풍기는 소박한 이미지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즉각적으로 “노심(老心)”이라는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 즉 하나의 분명한 의미적 코드가 읽혀 질 것이다. 또한 이때 조합되는 비평은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코드화된 비평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고향 노인들과 만나 느낀 것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시골노인의 소박한 인간미가 아닌 뭔가 잘못된 노인들의 비정한 눈초리나 경계의 시선(?)에서 감지되는 형용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비교적 교육의 기회와 문화와 접촉이 잦은 대도시의 노인들에게서 오히려 순수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 오늘날 시골 노인들의 가치관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긴 하루의 고독을 메우는 수단과 또 그들에게 세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채널은 사실상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 뿐이다. 몇몇 사회적 치부가 단지 우리 사회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사회 전체의 단면인양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엄청난 뉴스와 고발기사의 홍수는 결국 획일화 된 맹목적인 믿음과 잘못된 판단, 물질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숭배 또 그것을 위한 지나친 자기 방어와 타인에 대한 경계 등 변질된 가치관을 그들에게 고착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늘날 대도시의 정신적 병폐 현상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이성적 구조에서 시골 노인의 왜곡된 가치관은 쉽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대도시와 시골이 역전된 듯한 다소 황당하고 모순된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의 눈에 비친 시골 노인의 얼굴은 괴물이었고 이러한 괴물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마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사진처럼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엉뚱하고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사진은 진짜 괴물 같은 노인이 아니라 단지 이상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다. 왜냐면 미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괴물의 재현은 역사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인간 유형의 변태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인간 실존의 왜곡된 모습과 같이 분명한 시각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특별히 조형적인 요소(조형 사진)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실체인 괴물의 사진적 재현은 단지 현실의 자국인 징후(index)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자국의 재현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를 재현한 사진적 이미지를 객관적인 코드의 눈으로 보면 사진은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고, 또한 징후로서 암시된 사진적 메시지를 코드화된 비평으로 설명한다면 사진과 글의 관계는 분명히 따로 국밥이다. 결국 이 작가가 재현하고자 한 괴물은 코드가 없는 하나의 징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코드화된 정태적 의미가 아닌 진화적인 “동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진의 대상인데 이때 그 존재의 출현을 철학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e immanente)의 재현”이라고 한다. ● 주) 1)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비평가들은 사진을 그림과 비교하여 “빈약한 사진(La photogra -phie pauvre)”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은 그 조형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한계를 가진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외시적으로 절대 빈약한 표현 매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Dominique Baque, La photographie plasticienne, Regard, Paris, 1998, chapitre I. 2)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1987 에서 인용된 용어. 3) 사진(The photograph)은 분류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흔히 물질(특히 인화지)에 관계하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는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적 방법에 의해 생산된 총괄적인 복사 이미지를 말한다. 예컨대 캔버스에 복사적으로 나타난 사진 이미지나 혹은 디지털 화면에 출현한 사진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라고 언급해야 한다. 이는 손에 의해 복사된 그림적 사실주의와의 분명한 구별을 위한 개념적 용어이다. 그러나 사진과 사진적 사실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비물질적인 실체의 출현은 언제나 종이, 천, 캔버스, 화면 등 물질적인 것을 동반하고 있다. 4) 사진을 대다수의 19세기 사진과 같이 그림을 위한 대상의 복사적 기능(icon)으로 보는 관점은 제외하고 5) Roland Barthes, L’obtus et l’obvie, Cahier de la photographie,Paris, 1977 참조 6) 엄밀히 말해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창조적 의미에서 볼 때 작품성과 예술성은 이론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술은 발견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추적이기 때문이다(존재론). 감동은 반복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움에서 온다. 감동을 주는 것 혹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은 진정한 작가의 예술적 의도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모든 사진 이미지들을 예술사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령 광고지 귀퉁이에서 발견되는 푼크툼는 단지 찍혀진 대상과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에서만 이해될 뿐이지 작가의 의도에 의한 모두에게 공유된 메시지는 아니다. 영상 이미지에서 푼크툼과 작가의 예술적 의도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김선희, 낯선 초상 시리즈 중,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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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혹은 육교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초라하고 측은한 모습들 특히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불구를 강조하며 구걸하는 소위 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반 폭력적인 행위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에 관해 우선 부정적이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 혹은 부속적인 걸림돌로 간주되며 결국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부등호의 원칙이 성립하는데 오랫동안 이러한 원칙에서 소위 가진자의 “동정”이라는 우월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라 함은 예컨대 구걸하는 맹인에게 동전을 적선한다든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과 같은 선의적인 제스처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소외된 자에 대한 의도적인 배려는 사실상 집단과 전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편견과 불평등의 신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행위는 거의 상징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강압적인 원칙에 복종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에는 두 가지 교묘한 지배 논리가 있다 : 하나는 “평등”이라는 집단 우선적인 개념이고 또 하나는 “정상”이라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원래 평등과 정상은 관용(똘레랑스 tolerance)① 이 아닌 불관용(앵똘레랑스 intolerance) 즉 특정한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마스크이고 계몽의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사고(합리와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국가 지배 개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그 대상이 훈련된 우리의 인식으로 의식할 수 있든 없든 여하간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서로 절대 가치의 우위를 측정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존재로 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원래 존재는 “그대로의 출현”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등을 빙자한 “민주”와 보편 타당성을 원칙으로 하는 “정상” 다시 말해 어떠한 불순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성 혹은 통일성이 강요하는 절대적 흑백 논리는 오직 집단을 위한 이성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는 사변적 폭력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물질 사회 속에서 특히 유일하게 자본주의만 부화된 한국의 물질만능의 현실에서는 오직 민주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콜롬부스는 침략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부스는 언제나 발견자 혹은 정복자(또한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가 되듯이 자신과 다른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만 인정하는 흑백 논리의 세상 그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에 대한 맹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진보는 소수를 위한 개념적 포용이지 다수를 위한 논리적 반전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자. 종교적 전도라는 명목으로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멀쩡한 외모를 가진 어느 독실한 교인의 침튀기는 설교, 오직 기존 정권의 전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야당 인사의 정치적 폭력, 북한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노동 파업과 그 연대 투쟁, 이러한 명분과 주장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식에서 마치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같이 비정상적 존재의 돌출로 간주되며 또한 사실상 거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은 단지 정상이 의도적으로 구획해 놓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진자 혹은 기득권자의 지배논리로 이해되는 동정이 아니라 또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변적 “공존”이다. 이러한 공존은 정상과 비정상, 강자와 약자, 혹은 다수와 소수의 존재론적인 일치(관용 혹은 포용)를 말하고 있다 : 예컨대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듯이 정치에서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적이 되며 좌파의 관점에서 우파 역시 적이 된다. 또한 심지어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온건파나 중도파의 노선은 오히려 억압되고 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인데 후설은 “우리는 언제나 중성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의 상황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누설하는 은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존” 혹은 “관용”에 있다. 그녀의 많은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외시하는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은 이러한 사변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서 선별되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 그녀의 사진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표로서의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사진이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면서 또 다른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정이나 인본주의적 명분을 앞세우는 계몽적 사진은 더욱 더 아니다. 더욱이 우울증이나 강박관념과 같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성향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나 불행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녀에게 모델로서 장애인은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누락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출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지 의도적으로 또한 노골적으로 이러한 “존재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아버스의 사진들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출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예 : 사진 2). 이성에 의해 규정된 “정상”의 세계(보이는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안 보이는 세계)를 병치하면서 소위 괴물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신체 불구자, 거인과 난쟁이, 정신박약, 동성연애자, 성전환자 등 마치 생물학적 도감을 보듯이 공통적으로 뭔가 엉뚱한 괴물로 나타난다. 정면으로 출현한 이들은 장애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마치 누군가(조물주) 만들어 놓은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존재로 규정된다(사진 1, 3, 4). 이를 위해 그녀의 촬영방식(거의 50mm 표준 렌즈 / 초기에는 소형 카메라, 60년부터 6 x 6 필름을 사용)은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단순한 방식을 하고 있고 또한 그 구성에서도 대칭성과 정면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방법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시에 대조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그녀가 포착한 것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음의 존재들(ombres)이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이고 산발적(소수)이고 또한 징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주 밖의 괴물, 기형, 히피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 즉 프리크(freaks)들로만 나타난다. 원래 어원학적으로 프릭크는 알려지지 않은, 불명의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을 지칭하고 그들은 본원적으로 ‘이상한 혹은 엉뚱한 것(oddity)’ 즉 부등의, 부조화의, 기수의, 짝이 맞지 않는, 비스듬한, 삐딱한, 만사가 신통치 않은 불완전한, 부족한 등 공통적으로 어떤 비정상(imparite)에 관계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조물주의 동등한 작품으로 원래 정상적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획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어 ‘비정상’으로 치부된 것들이다.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 가령 모두가 왼손잡이인 집단에서 오른손잡이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기형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또한 키 작은 난쟁이 집단에서 키 큰 사람 역시 기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에서 이성의 결혼은 물론 금지될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은 단지 한 집단이 선별적으로 규정한 편견에 의한 것이다.”② 그래서 아버스의 인물들은 단순한 장애인의 유형학적 진술이 아니라 소외된 존재의 누설로 간주된다. 역설적 방법으로 매조키즘(피학대 음란증)적인 비관주의적 시각에서 세상의 ‘추함’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것은 일종의 불행의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별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활용한 과도한 플래쉬는 모델을 더욱 더 경직스럽고 인위적이고 순진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낮보다 밤에 오히려 더 많은 기형(oddity)를 생산한다는 유태인의 사고에서 온 논리이기도 하다. 1971년 여름 그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신경안정제인 바르비투스산제를 먹고 동맥을 끊고 자살하기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보이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산보 중인 사람들을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별한 시각은 사회학적 관점 이전에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아버스의 사진은 정상적인 우리들의 이성의 눈(코드)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응시자의 눈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시각의 개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형인, 늙은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비정상인은 사실상 정상인과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집단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보편적 기준에서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로서 나타난 그들의 출현은 열등한 종족의 괴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추어진 우리의 ‘이중적인 얼굴’임(Norbert Bernard)과 동시에 오랫동안 망각된 존재의 진실 즉 우리 모두의 ‘증세와 기념비’(Henri Van Lier)가 된다.”③ 근본적으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집단 사회(특히 물질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패션사진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빈부차이나 물질 만능사회에 대한 체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을 대표로 하는 집단사회가 통일된 지향성을 위해 규정해 놓은 미(넓은 의미에서)적 가치에 대한 편파적 기준이다 : 오랫동안 우리는 이성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불행, 비극, 추함 혹은 소외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인간조건의 이상적인 조화와 긍정적인 시각에 익숙하여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우상이나 모델을 위한 강압적인 규범으로 사실상 반쪽 세상의 불관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행의 신호로 간주되는 비 정상인을 모델로 하여 그녀가 생물학적 관상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추함과 불행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억압된 존재의 폭로로 볼 수 있다.”④ 그것들은 이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시뮬라크르임과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 <주요 참고 도서>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김희숙 정보라 옮김, 똘레랑스, 길, 2000. (참고 : 임지현 평, 동아일보) Doon Arbus, Diane Arbus, Aperture, New York, 1972. Regis Durand, La part de l'ombre, Essais sur l'experience photographique, La Diffrence, Paris, 1990.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La photographie comme destruction, Universite de Provence, Arles, 1993. Diane Arbus Sans Titre, Aperture/Edition de La Martiniere, New York/Paris, 1995. Diane Arbus, Photoraphe de presse, Aperture/Herscher, New York/Paris, 1984. 주) ①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경률,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비평, 2001년 가을호, 타임스페이스, 서울. ② 같은 책. ③ 같은 책. ④ 다시 말해 그들의 흑백논리에서 이러한 소외된 존재들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물질과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양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대상들을 정상이라 규정하고 역으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의 비정상적인 대상들을 괴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편견적 사고를 불관용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용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을 인정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공존 즉 존재의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전자의 시각을 통일된 하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존재의 획일성”에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discontinuite)”이라고 하며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세계를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한다는 의미에서 “연속(continuit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르주 바타이유)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도 한다(마르틴 하이데그). (집단사회가 강요한 미적 추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추의 예찬”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복개(couvering)”작업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호텔 방에서 타올을 덮은 멕시코인, 1970 (사진 2) 뉴욕 브루클린 젊은 가족의 일요일 나들이, 1966 (사진 3) 뉴욕 100번지 거실의 러시아 난쟁이들, 1963 (사진 4) 뉴욕 20번지 집에서 파마를 한 젊은이, 1966 |
두 번째 테마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 우리들의 세상 혹은 현상계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동굴은 하나의 우주이고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하나의 풍선이라고 할 때 동굴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원소로 되어있는 풍선 속의 공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하나의 원소 뿐이다 : 인식의 영역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나 현상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관념적인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 B이고 B가 C이기 때문에 A는 C다”라는 수학적인 공리라든지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적으로 ... 을 의미한다”라는 보편적 사실, 혹은 보다 추상적으로 볼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러한 개념적 대상들은 논리와 일반 그리고 객관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언제나 의미와 이성의 범주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코드(진리, 상징, 슬로건 등 최소한 타자와 객관적으로 의미화된 개념 혹은 정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플라톤 동굴에서 빛에 의해 인식되는 양의 세계(인식계)를 말하는데, 이러한 범주 속에서 사진의 대상을 찾아 재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규명된 의미에 대한 일종의 진술이나 확인일 것이다. 예컨대 시골 농부의 순수한 표정에서 읽혀지는 농심,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동심, 인본주의, 자연보호, 생태계 혹은 생명력을 암시하는 대상들,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달력풍의 이미지들, 소외와 고독 그리고 자아상실과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진적 테마들은 사실상 오늘날 익히 알고 개념(code)적 현상에 대한 시각적 확인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테마들로 “앎”이라는 문화적인 지식에서 온 하나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엄밀히 말해 이러한 사진에는 언어와 같은 진술로서의 작품성(언어로서의 사진)은 있어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예술성(사진으로서 사진)은 사실상 부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공간을 이루는 또 다른 구성원소는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 인식 영역, 즉 음(蔭)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현상계에서 언제나 그 본질이나 진실이 수수께끼나 신비로 나타나면서 변화무쌍한 현상으로만 출현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징후로만 감지할 뿐이다. 마치 감기의 징후로 몸에서 열이 나듯이 여기서 본질은 객관적 의미를 갖지 않는 불확실한 “그 무엇”(감기와 같은 원인성)을 말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존재적 대상)이다. 예컨대 보험금을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건, 고층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여중학생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보이는 차갑고 괴물 같은 인상, 젊은이들의 엽기열풍,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서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애착감 등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순되고 황당한 경우나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건이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직감이나 갑작스런 충동 등은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징후적인 현상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언제나 논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고 어떤 공통된 특징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이고 미스테리한 지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대상이 언제까지나 음의 영역에서 수수께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능력의 확장에 따라 그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현재의 절대적 가치로 규명해 놓은 진리 역시 시간과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변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들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물 즉 현상을 본질로 보는 물질중심적 담론과는 달리, 단지 현상을 일종의 징후로 보고 그 원인이나 실체를 추적하는 본질규명학을 현상학(La phenomenologie)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예술론으로 볼 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언제나 징후로부터 그 본질을 재현하는 고독한 작업의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예술적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현상학적 추적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오늘날 이러한 추적의 중요한 예술적 매체로 간주되고 이때 사진을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하고, 또한 그 재현을 “음영의 재현(La representation des omb-res)”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음, 애수, 불안, 허무, 음색, 인상, 부조리 등 형이상학적 대상이며 그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추적은 사실상 현상학적인 방법을 동반하고 있다. 흔히 이러한 방법론은 장님과 코끼리의 이야기로 설명되는데, 음의 대상들은 빛(우리의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능력) 혹은 예술가의 의식을 대상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비유하고 또한 본질을 코끼리로 비유한다.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장님은 자신의 지팡이(즉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 궁극적으로 카메라의 역할)를 이용하는데, 지팡이가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실체의 부분적 사실들, 즉 징후로서 출현하는 현상들일 뿐이다. 방법적으로 볼 때, 이는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파악하는 일종의 추론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예컨대 장님이 감지하는 코끼리 다리는 굵은 고목나무로, 긴 코는 고무호스로, 꼬리는 굵은 밧줄로 이해될 것이며 또한 몸통은 거대한 고무풍선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모든 현상계의 징후들로부터 추리적 방법으로 파악된 사실은 적어도 코끼리와 유사한 감각적 실체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실체는 결코 언어나 어떤 객관적 의미로 규명할 수 없는 실체이고 단지 색, 선, 점 등 감각적 표현(회화의 경우)에 의해서만 암시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말한다. 그러나 본질의 정확한 규명은 마치 여명의 지평선 밑에 숨겨진 영원히 뜨지 않는 태양처럼(메를로 퐁티의 “지평선적 시각계의 개념”)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때 본질은 지평선 위에 감지되는 수많은 여명의 신호들(“생성의 신호들” Les signes de genese)에 의해 암시될 뿐이다. 그때 본질의 재현은 현상계에서 본질의 부분적 징후를 반사하는 일종의 거울(작가의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사실상 그 시각적 재현은 단지 본질의 닮음꼴 혹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만 나타난다. 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불가능한 닮음”이나 폴 클레의 “시간의 그래픽적 재현”은 이러한 본질의 재현에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현상계에 출현하는 현상들은 단지 징후에 불과하며 예술가가 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바로 이러한 징후로서 나타나는 비논리적인 “현상의 외관”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현은 우리를 둘러 싼 수많은 신호들로부터 단지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논리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구체적인 진술이나 규명(구조주의)에 의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말은 달리 말해 “객관 타당한 코드 혹은 약속”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약속된 의미는 예컨대 장님들(작가들)이 지팡이로 느끼는 감각의 실체들이 코끼리와 비슷한 실체들 혹은 전혀 다른 실체들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하나의 공통분모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정확히 똑같은 붕어빵을 만들기 위해 만든 붕어 모양의 틀(형상 : forme/fo-rm)과 같이 논리적으로 객관 타당하다고 인식된 “앎(connaissance/knowledge)”을 말하고 있다. 인식론자들 쉽게 말해 의미론자들(특히 형상론자들)은 바로 이렇게 규명된 수많은 형상들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단지 틀에 의해 찍혀져 나온 붕어빵 같은 현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는 수많은 틀과 또 그 틀들에 의해 다변화된 모습(figure)들을 가진 무한한 현상들로 가득찼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의 똑같은 틀에 의해 찍혀 나왔다고 인식되는 많은 붕어빵들조차도 그 하나하나는 역시 각자 다른 모습을 갖는다. 이때 각자 다른 모양의 붕어빵들은 하나의 의미화된 틀, 즉 정형화된 붕어빵을 만들게 하는 배경(fond)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 혹은 위대한 사진작가가 재현하는 예술적 생산물은 결코 획일적인 붕어빵이 아닐 것이며, 진정한 비평가는 작가의 감각적 생산물을 하나의 틀(말하자면 의미의 틀)에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모든 대상은 언제나 생성에서 변전으로의 동태적 의미를 가질 뿐이며, 외관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언제나 변전의 과정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의 발견은 흔히 진리나 정태적 의미(code)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사유 한계를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이러한 발견은 징후의 포착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을 추적하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이 함축하는 의미(connotation)로부터 분석된 해설이나 혹은 그 의미의 틀로부터 포착된 사진적 재현은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대로 찍혀 나오는 붕어빵 논리에 가깝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미 의미화 되어 있는 현상이나 일반적 사실의 틀로부터 재현된 사진의 주제,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 생태계의 파괴나 퇴색된 인간미의 고발, 강인한 생명력과 대자연의 예찬등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암암리에 약속된 일종의 의미적 코드(판박이의 정의)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studium)를 재현한 사진은 근본적으로 감각이 아닌 우리들의 문화적 앎에서부터 출발된 사진적 재현이고, 비록 의미의 진술을 위해 형식상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작품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상 진정한 창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이미 코끼리와 같은 실체가 밝혀진 인지 대상 혹은 장님이 아닌 정상인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논리적 확인이나 보고서로 간주 될 수 있다. 사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재현 대상은 시각적인 이상함과 특이함인데 예컨대 우리는 사진에서 언제나 정상적인 모양새보다 정상적이지 않는 모양이나 조형적 형태, 혹은 엉뚱한 대상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같은 방법으로 생각해 볼 때, 의미의 벽을 넘는 첫 단계 역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다. 사실상 우리는 의미가 부여된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서도 정상보다도 비정상적인 논리에 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 진정한 사진가의 예술적 재현은 일반적인 의미-코드로 쉽게 설명되어지지 않으며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정상적인 논리의 뒷면에 있다. 이때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denotation)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 될 뿐이다. 사진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림과 같은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 진정한 예술사진은 의미 이전에 징후(결과적인 흔적)를 재현하면서 그 본질(본원적 원인이나 동기)을 추적하는데, 이때 본질은 이미 정형화된 의미가 아닌, 의미의 영역 밖의 의미를 갖는다. 카메라는 장님의 지팡이가 되며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다. 프랑스의 사진 비평가 질 모라(Gilles Mora)는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지팡이 사진(도판 1)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감각의 논리”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사진을 한마디로 “반 - 의미적” 사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이나 초월 혹은 과잉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객관적 의미가 아닌 비논리적인 주관적 의미(sans code, signifiance, punctum, obtus 등)에 보다 가깝다. 그와 같이 음영 세계의 대상들은 의미의 생성과 과잉을 동시에 가지면서 진정한 창조의 대상 ③ 이 된다. 그래서 단순히 의미론적 시각으로 읽는다면 깁슨의 사진들은 적어도 내용상으로 우리를 혼동시키는 하나의 암호나 수수께끼로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시(예술사진)를 잡지기사(다큐멘터리 사진)를 읽을 때처럼 단어 하나 하나가 진술하는 논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왜냐면 그의 사진은 공통적으로 더 이상 서술이나 상징과 같은 이미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무의미 즉 시적 언어인 “생성적 의미”만을 갖기 때문이다. 이때 생성이라는 것은 의미로의 진화과정에서 시원적인 출발점, 혹은 싹을 말하는 것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들의 의식으로부터 망각된 대상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카메라로 재현하는 것은 단지 지팡이로부터 전해오는 감각의 재현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 영역 밖에서 비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코끼리라는 본질적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와 같이 사진의 진정한 창조는 더 이상 확실한 의미의 진술이 아닌 불확실한 감각의 재현, 즉 “망각된 존재의 추적”(Martin Heid-egger)에 있다. ● 주) ① 이러한 비유는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L'oeil et l'esprit)”과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Le visible et l'invisible)”에서 차용된 개념적 설명이다. 궁극적으로 안 보이는 세계는 음의 세계를 말하며 본질의 실재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시각계에서 보이는(인식되는) 대상들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외관들만 가지며 그 본질들은 외관에 항상 은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 가지들에 의해 나무의 동체가 추리되듯이 본질의 추적은 우리들의 감각계(특히 시각계)에서 출현하는 색, 점, 선과 같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적 재현은 이때 대상의 본질을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나무 가지 혹은 거울(index)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②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함축적인 의미(connotation)를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의 징후(index)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진을 언어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은 사진이 내포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징후로서의 사실주의가 나타나는데 이는 사진을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징후 혹은 자국으로 보는 견해이기도 하다 (차후의 테마, 사진 인덱스론 참조). ③ 여기서 창조의 의미는 의식에 내재된 존재적인 실체의 발견을 말하며, 다시 출현하게 한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재현(representation)”은 이러한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말한다. 그래서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곧 이미 존재하는 (음의)실체에 대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샌프란시스코” 시리즈, 1960 - 63. |
창작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대상이나 상황으로부터 포착된 자신의 감각을 재현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의 생산물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작품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언제나 그 작품이 있게 한 본질적인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이때 특히 시각예술에서 생산된 작품은 일종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진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상부구조로서 출현하는 지표(인덱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부구조로서 부재하는 그 원인성(본질)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시각적으로 출현한 지표는 그 배경(fond)으로 간주되는 본질을 부재의 형태로 은닉하고 있고 물리적 원인 관계로 이해되는 이들 두 관계에서 본질(최초의 동기)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지표(시각적 출현)에 앞선다. 예를 들어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그린 유명한 검은 초상은 모델의 검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모델을 인간이라는 대상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간의 부정적인 본성을 자신의 감각대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또한 폴 클레의 그래픽적 색 나열 역시 현실의 대상이 아닌 음악의 순수함으로부터 시각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 검은 얼굴과 색 그래픽은 시간적으로 작가가 과거 상황이나 대상과의 경험에서 포착된 감각의 음색(impression/timbre) 혹은 생성(genese)으로부터 시각적으로 전이된 결과물이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최초의 음색(철학적으로 내재적 형상)들은 단지 작가의 직감(intuition)에 의해서만 포착되는데 현실적으로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규명 불가능한 존재(탈-코드/시뮬라크르)들이다. 그와 같이 작품은 이러한 존재의 신호들을 색과 선, 면 등의 조형적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조형적 언어가 아닌 사진이라는 매체 더 정확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를 이용하는 경우 그 재현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 특성상 사진은 대상에 대한 그 어떠한 인위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조형적 번역(연출사진)을 하지 않는 한 언제나 사진에서 본질은 시각적으로 “부재”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 만약 클레가 카메라를 이용했다면 그가 바이올린 음에서 감지한 음색들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파스텔과 같은 색과 선의 조형적 번역이 아닌 단지 있는 그대로의 상황적 재현에만 가능하지 않는가 ? 그럴 경우 클레는 자신이 포착한 감각의 음색을 암시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바이올린 악보 피아노 공간 등 그 음색을 유발시킨 오브제나 상황을 찍을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음색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이면에 부재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고 그때 시각적인 출현은 이러한 부재를 은닉한 인덱스로서 음색 혹은 분위기를 위한 재현 이미지 이외 그 어떠한 언어학적 의미적 번역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존재론적 사진을 소위 “영상사진”이라고 한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재현 체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이나 대상으로부터 반사적으로 방출된 작가의 주관적 인상을 은닉한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들 특히 거의 현존하는 신화로 간주되는 그의 사진집 “미국인(The Americans)”은 현대 영상사진의 결정적 조건을 짓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당시 객관적 사실성과 사건 중심의 보도사진의 흐름에서 프랭크 이후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그의 주관적 이미지를 하나의 모델로 추종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미국인”의 출간은 적어도 외관적으로 현대사진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① 게다가 프랭크의 사진은 최근(특히 80년대 이후 유럽) 후기 구조주의적 분석과 사진 인덱스적 관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이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와 사진 혹은 사진과 사회와의 객관적 관계나 역할에서 코드-의미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분석(현실의 변형)에서 볼 때 다소 생소하기도 하다. 프랭크의 사진은 단순한 코드 분석을 넘어 두 가지 주관적 관점에서 동시에 관찰된다 : 하나는 사진을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음색의 재현(영상사진)으로 보는 관점과 또 하나는 사진을 모두에게 공유된 현실의 주관적 경험 혹은 공통된 내적 인상으로 이해되는 관객의 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다 함축적인 방법으로 프랭크의 몇 몇 사진들을 모델로 하여 출현과 부재의 인덱스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가 “미국인”을 만든 때는 1955-56년이다. 당시 50년대 전반은 공화국의 회귀, 냉전,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상 생활 정상화와 안정과 균형 그리고 경제 발전을 목표로 정치 사회적 관계가 적절히 유지되던 시대였다. 여하간 50년대 미국 사회는 엄청난 물질적 확장과 미래의 풍요로움이 기대되던 시대로 모든 중요한 사항은 공통된 아이디어와 함께 명분과 이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도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중 의식 속에서 그 동안 억압된 상태로 있었던 분쟁의 에너지는 경제발전의 명목 하에 지속적인 경제적 추진력으로 전이되었고 경제는 또 그렇게 실패 없이 발전했다. 프랭크의 의도는 정확히 당시 긍정적인 대중 의식에 거역하는 반-이미지 즉 지나치게 코드화 되고 상징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파괴하는 일종의 우상파괴였다. 의심할 바 없이 당시 그가 재현한 반-이미지들은 흔히 소외와 빈곤 허무 등과 같은 반 물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들이었는데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규명하지 못한 존재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프랭크의 “미국인” 사진집은 결정적으로 전통적 사진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반 - 사진” 즉 탈선(형상 이탈)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 대중의 눈에 비평적인 시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인데 반-사진적인 이탈은 근본적으로 대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즉 주체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은밀하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유럽적 시각에 관계하는 것으로 미국에 이민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경우를 재현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이러한 주관적 재현은 장 콕도가 그의 사진을 “반사하는 거울”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대상이나 상황에서 포착한 “순수 직감”으로부터 재현된 사진 이미지로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영화 혹은 소설 시나리오와 같은 3인칭 역사가 아닌 단지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1인칭 자화상이었다. ② 이는 곧 일반적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적인 독백으로의 전환 즉 재현에 있어 주체의 변화를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것에 상응하는 주제의 변화와 조형적 형태와 구성에서 전통적 규범의 이탈(불규칙, 대칭, 절단, 동요, 흐림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들은 사실상 현대 사진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조건들로 간주되는데 가장 좋은 예로 미국 남부의 이국적 풍경을 보여주는 프랭크의 사진(사진 2)과 이와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1930년대 워크 에반스의 사진(사진 3)과의 비교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공통적으로 두 사진은 당시 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인 차를 소재로 하고 있고 그 재현 방식에서도 거의 같은 정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두 사진 모두 삶의 방식으로 간주된 차를 소재로 미국의 자연적이고 “내부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지만 프랭크의 사진은 에반스가 재현한 객관적 보고로서의 사회적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오늘날 초가집과 주유소가 병치된 시골 풍경과 같이 단지 자연과 인공의 병치에서 발생하는 대상의 엉뚱하고 야릇한 인상을 재현한 이미지일 뿐이다. 다시 말해 에반스의 차는 부의 상징인 사회적 지표로 나타나고 프랭크의 차는 일종의 인간과 물질 사이의 부조화에서 암시되는 괴물 즉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전자는 “사물 위에서(sur) 의미의 재현”인 반면 후자는 “사물에 반하는(contre) 섬광 혹은 인상의 재현”이다(Henri Van Lier). 당시 사람들은 사실상 프랭크의 사진이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인 지극히 주관적인 접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진을 에반스의 사진과 같이 삶의 방식이나 사회학적인 보고서로서 일종의 사회적 비난으로 믿었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의 사진이 다시 1930년대 F.S.A의 사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이와 같이 프랭크의 사진은 사물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그것들에 반사된 음색의 재현이다. 이러한 재현은 그림의 경우와는 반대로 마치 심벌즈의 한방처럼 찍는 순간 동시에 이러한 사진적 음색이 자동으로 생성된다(자동생성). 이는 곧 퍼스의 유형학적 의미로 인덱스화 된 것(indexation)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que)”이다. 오늘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유형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중요한 하나의 이론적인 모델로서 재조명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음색의 재현에 있고 또한 필립 뒤봐가 “사진과 함께 이미지는 우리에게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행위 밖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라는 사진적 결론 역시 이미지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프랭크 자신의 순수 직감 즉 생성에 관계하고 있다. 사진적 음색은 의미나 상징을 말하는 은유가 아니라 지표를 말하는 환유로 간주된다. 거의 대부분의 프랭크 사진들은 재현된 어떤 상황이 “무엇을 뜻한다”라는 객관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의 조짐을 보인다”라는 상황적 인상만 누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뉴멕시코 286번 국도(US 286 New Mexico)”사진이나, “뉴욕가 34번지”(사진 4)를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이미지의 출현으로서 나타나는 도로와 선은 의미적 관점으로 볼 때 사실상 수수께끼이다. 이것들은 단지 응시자에게 황량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무엇을 상기시키는 어떤 형이상학적 부재의 인덱스일 뿐이다. 또한 작가인 프랭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사진은 그가 도로를 달리다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잡은 의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직감 ③ 에 따라 단지 이미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사진적 행위의 “잔여물”로서 남게 된 이미지, 달리 말해 물질적 출현과 그것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부재이외 사실상 의미적으로 해석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유일하게 개인의 상황적 인상으로만 이해되는 사진, 말하자면 프랭크 사진 유형은 의미나 논리 밖에서 일종의 “신호의 순수 서정시”나 혹은 사진가 자신의 “헛소리”로 간주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경험적인 영역에서 기억의 연상에 의해 환원된다. 이때 기억적 확장은 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처럼 지극히 주관적 확장을 한다. 출현과 부재가 섞여 만들어진 “분위기 혹은 인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초월적 인상이나 과장된 인상이 아닌 누구나 경험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 동시에 공통된 우리들의 단순한 경험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또한 자신의 집 소파에서 커피를 마시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험”(Henri van Lier)이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저서에서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기억적인 이중인화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예컨대 A라는 해변은 B라는 교회 위에 겹쳐 있고, 그 교회는 C라는 얼굴 위에 겹쳐 있고 또 그 얼굴은 ... 이러한 주관적 확장은 또한 동일한 대상 위에서 응시자의 경험에 따라 각자 달리 해석되는 연상의 개인적 “경향”과 같은 맥락(인덱스의 확장)을 가진다. 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일한 순간을 자르는 결정적 순간이나 유일한 사건을 만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의 부동의 진술과 부재의 출현 그리고 평범한 일상을 재현하는 프랭크 사진에서 보여지는 탁월한 미학이다. 로버트 프랭크는 그 자신이 반 - 미학적인 직감적 사진가로 자처한다. 그는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반응 쉽게 말해 그가 미국을 주파하면서 느낀 단순한 인상들이다 : “나는 사진들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은 내가 느낀 것들이고 완전히 직감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생각한 것이 없었다.” 작크 크루악이 “주 - 박스가 장례식 관보다도 더 슬픈지 알 수 없다”고 말하듯이 부재는 우리 모두의 죽음을 암시한다. 도로, 식당, 호텔의 침실, 이발소의 의자 혹은 공원의 의자(사진 1)는 비어 있다. 출현은 곧 부재의 신호이며 직감은 바로 이러한 끝없는 신호들을 잉태한다. 또한 그 신호들의 지시대상들은 의미와 논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것과는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는 존재의 시뮬라크르들이다. ● (주) ① 그러나 프랭크의 사진을 “내적 형상의 재현”이라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최초의 사진이 아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오히려 20세기 앗제와 브레송의 사진을 잇는 두 분수령에서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의 영상사진은 거의 완전한 정신적 재현으로 현대 사진의 결정적인 방향을 세운다. ②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사실상 프랭크의 전 사진들을 통해 볼 때 그의 예술을 결정짓는 중요한 개념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진 - 소설”인 동시에 “사진가의 생생한 체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을 서술화된 “스토리 사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독백으로 간주되는 “미국인”은 물론이며 영화 플로라이드 흑백 사진 등의 다양한 매체로 나타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에서도 이러한 취향은 분명하다. 특히 1978년 흑백 폴로라이드 사진에서 두 장의 자신의 모습을 붙여 만든 “Selfportrait, at 55, It is like me”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프랭크의 많은 사진에서 “그것은 나와 같다(It's like me)”라고 기입한 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적 취향은 전혀 나르시즘과 관계가 없다. ③ 단순한 개인적 심경으로 들뢰즈의 용어로 하나의 사건(evenement) 혹은 표면 효과(les effets de surface)로 볼 수 있다. 주요 참고 도서 Les Americains, texte de Jack Kerouac, Delpire, Paris, 1958, reimp., 1985. Robert Frank, texte de Rudy Wurlitzer, Delpire, Paris, 1976. Robert Frank, la photographie, enfin,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n 11/12, Paris, 1984. Michel Frizot, "Robert Frank, ailleurs et maintenant", Cliches n 25, 1986 pp. 48-53.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파리 1949년 (사진 4) 뉴욕가 34번지, 1949년 (사진 2) 로버트 프랭크, 캘리포니아 롱비치, 1955-1956년 (사진 3) 워크 에반스, 농장, 193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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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림 | |||||||
랄프 깁슨은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 세부를 ‘결정’하는 것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Cartier Bresson의 ‘결정적 순간’처럼 작가의 대상에 대한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 등이다. 그런데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대부분 파격적이다. 대상을 과감하게 절단하거나, 예기치 않은 각도에서 다가선다. 그 결과 파편적 형상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연시킨다. 작가가 부여한 제목을 보고, 주어진 이미지의 형상과 문맥을 해독한 후에 랄프 깁슨의 카메라 앵글,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를 추측한 후, 이미지의 상황을 유추해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 찍는 작가의 사진적 정황, 피사체의 환경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인지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피사체의 전모와 작가의 카메라 워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들은 대개 랄프 깁슨의 B급 사진일 뿐이다. 그의 걸작들은 거의 대부분, 피사체의 정체성과 사진적 상황을 파악하려는 욕구를 혼돈에 빠뜨린다. 해답 없는 의문, 불확실한 대답을 연장시키면서 논리적 이성을 기능 장애에 이르게 한다. 그의 탁월한 이미지들은 피사체의 의미와 이미지의 상황을 이해 불능은 아닐지라도, 불확실의 상태로 만드는 파편의 이미지이며, 확실한 의미를 지향하는 이성을 불안하게 만드는 트라우마 trauma의 이미지인 것이다. 의미의 불확실성, 우리의 인식능력에 불안감을 안겨주는 랄프 깁슨의 극단적인 클로즈업, 파격적인 카메라 워크는 그러나 결코 일탈의 자유, 무질서한 프레이밍에 휩쓸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결정적 세부는 즉흥적 감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전주의적 규범, 현실을 엄정하게 바라보는 기하학적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일탈적인 구도, 예외적인 구성을 사진의 목표로 삼지만, 그의 프레이밍은 기하학적 균형, 엄격한 공간구획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우연에 내맡긴 일탈적 구도, 사물의 우발적 포착은 결코 랄프 깁슨을 규정하는 어사가 될 수 없다.
어둠과 깊은 그림자에 대한 집착,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피사체를 그 정체성이 애매모호할 때까지, 그러나 기하학적 균형에 도달할 때까지 압박하는 그의 경향은 그의 칼라작업에서도 계속된다. 랄프 깁슨은 칼라사진에서도 거의 언제나 ‘결정적 세부’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 세부의 구획은, 흑백사진처럼 작가의 직관력, 섬광처럼 빛나는 구성감각, 빛과 어둠의 효과에 대한 순간적 판단에 의존한다. 강렬한 흑백의 대립이 화려한 색상의 대비로 바뀌었을 뿐, 세부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일상의 현실을 낯선 새로움으로 바꾸는 랄프 깁슨의 프레이밍은 칼라사진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의 흑백사진 삼부작에서 보여줬던 사진적 특성들은 칼라사진에서도 그렇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