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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 00:32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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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 00:31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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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로서 사진


 





글사진 현린


 

0 흔히들 실제 사냥과 전쟁에 나설 일이 없어진 후에 쓸모없어진 총 대신 메고 다니는 것이 사진기라고들 한다. 요란하게 무장하고 나서지만,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호랑이 가죽이 아니라 고작 호랑이 사진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사진의 유치함과 비겁함을 비아냥대는 말들로 한마디로 “놀고 있다”는 소리다. 진지하게 사진에 임하는 사람에게, 더구나 놀이란 저열한 것이라 아는 사람에게, 이는 분명 모욕이니, 놀이라면 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을 사냥에 비유한다고 해서 또는 놀이라 놀린다 해서 놀라거나 눌릴 필요 없다. 개도 할 수 있는 것이 놀이라고 해서 놀이 자체가 저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도 놀지만 인간도 논다. 다만 인간은 인간답게 논다. 게다가 바야흐로 엔터테인먼트와 퍼니즘(Funnism)의 시대, 사냥의 또 다른 잔재라 알려진 쇼핑(Shopping)도 놀이와 재미라는 차원에서 재발견되고 재발굴되고 있는 마당에, 슈팅(Shooting)만 유독 유치한 놀이라고 놀림 받을 이유가 없다. 가죽을 찢건 사진을 찍건, 중요한 것은 제대로 노는 것이다. 그러니 놀이로서 사진을 부정하기보다는 놀이로서 사진이란 무엇인지 묻고 제대로 즐기는 편이 낫다.

1 호이징하(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1938)에 따르면 인간이란 오직 놀이 속에서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상 노는 존재다. 개보다 우등한 인간은 개도 한다는 그 놀이를 통해 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스포츠와 학문, 예술 그리고 경제와 정치까지 아우르는 일체의 문화를 창조해 왔다. 심지어 사냥과 전쟁 또한 놀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사냥과 전쟁의 모조품이 놀이인 것은 아니다. 개처럼 네발로 바닥을 기고 뒹굴며 까르르 웃던 아이가 세련된 놀이를 즐기며 자람으로써 나중에는 쓰디쓴 전쟁의 패배에도 썩소일망정 웃을 줄 아는 전사가 되는 것이다. 놀이가 단순히 과잉 에너지의 방출이나 긴장의 해소에 불과하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놀이가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 형식과 규칙이라는 틀을 따르는 질서 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그 재미란 것 역시, 놀이에 필요한 탈을 쓰고 기꺼이 그 틀을 따르는 과정에 몰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진지한 재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작은 개마저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였으나, 그 끝은 인간만이 즐길 수 있는 놀이이고 재미로 발전한다. 반면 새로운 놀이 질서를 창조하지도 않으면서 기존 놀이 질서를 파괴할 때, 놀이만이 아니라 문화까지 타락한다.

그런데 퍼니즘의 선지자인 호이징하가 보기에 인류 문화는 화려했던 로코코 양식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 타락해 왔다. 산업주의에 물든 일하는 인간들의 잿빛 의상, 상업주의와 실용주의에 물든 예술과 학문, 대중매체의 발전과 함께 달아오른 스포츠 그리고 신사도를 망각하고 개싸움이 되어버린 비열한 전쟁 등등. 사치와 장식의 귀족 문화가 사라진 후 찾아온 대중들의 편한 세상이 호이징하에게는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천박한 것들의 더러운 세상일 뿐이다. 험담과 기만 역시 놀이라고 하더니 형식과 내용의 구별이라는 지극히 모던했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급기야 놀이에서 성스러움을 찾기까지 한다. 놀이의 자율적 형식을 강조하던 그가 고대의 단순한 놀이에서 근대의 복잡한 놀이로 접근하면서는 그 다양한 형식의 경합과 교합을 놀이의 진화로 인정하기보다 타락이라 개탄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놀이의 형식은 불변하는 닫힌 형식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열린 형식이며, 그래서 놀이와 놀이가 경합하기도 하고 놀이와 놀이가 교합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한 탓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호이징하는 사진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설령 사진에 관심을 기울였던들, 놀이다운 질서와 재미를 찾을 수 없다며 단순한 붓질을 놀이로 인정하길 주저했던 그가, 대량생산된 사진기의 단순한 셔터질을 놀이로 인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의 복고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경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문화를 타락시킨다며 사진을 비난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아무 터와 아무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아무거나 찍어대는, 그것도 잿빛 사진이 놀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퍼니즘에도 신약의 시대는 열렸으니,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 1967)에서 카이와(Roger Cailois)는 호이징하보다 더욱 엄격한 형식주의를 고수하면서도 놀이의 진화를 고려함으로써 놀이의 폭을 더욱 확장시킨다. 그래서 호이징하와는 반대로 설령 문화를 파괴할지라도 놀이는 놀이일 뿐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때문에 놀이로서 사진에 대한 자문을 얻고자 한다면, 이제 더 엄격해서 더 관대한 카이와를 찾는 편이 낫겠다. 그 역시 사진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는 쿨하다.



나모, 2009

학교라고 하면 감시나 체벌 같은 불행한 추억만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릴 적 그들을 포함한 세계의 대다수 아이들에게 여전히 학교만한 놀이터가 없다. 학교가 아니라면 여지없이 거리로 나가 관광객들에게 사진엽서를 팔거나 구걸을 해야 하는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레스토랑과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로 운영되는 학교가 없었다면, 글이나 춤의 근사한 재미 따위를 이 아이들이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답게 놀지 못하고 인간답게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2 카이와에 따르면 놀이는 일반적으로 아래 여섯 특성 중 다섯 가지를 갖는다. 첫째 강요 없는 자발적인 활동이다. 둘째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셋째 그 전개도 그 결과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넷째 비생산적 활동이다. 다섯째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규칙이 있다. 여섯째 현실에 비하면 명백히 비현실적, 허구적 활동이다. 모든 놀이는 다섯째와 여섯째 둘 중에선 하나만을 갖는다. 달리 말해 각각의 놀이는 승패를 가릴 수 있는 동시에 허구일 수는 없다. 이 기준에 따라 취합한 모든 놀이는 크게 다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권투나 육상경기처럼 기량의 탁월함을 다투는 아곤(Agon), 주사위 놀이나 도박처럼 운명을 시험하는 알레아(Alea), 회화나 연극처럼 모방 또는 모의하는 미미크리(Mimicry), 회전목마나 번지점프처럼 현기증을 즐기는 일링크스(Ilinx)가 그것이다. 일단 놀이로서 사진을 전제한다면, 카이와가 분류한 네 놀이 집단 중 사진이 속하는 놀이 집단이 어떤 것인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네 가지 놀이 집합들끼리는 그 질서나 재미의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 예컨대 아곤의 질서가 일링크스의 질서보다 낫다고 할 수 없고, 알레아의 재미가 미미크리의 재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질서의 극단인 루두스(Ludus)와 무질서의 극단인 파이디아(Paidia)를 양극으로 하는 축을 따라, 동일한 놀이 집합에 속하는 놀이들끼리는 그 질서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곤 중에서도 권투는 루두스에 가깝고 이른바 개싸움은 파이디아에 가깝다. 둘째 놀이는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다른 종류의 놀이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컨대 흑돌과 백돌을 가지고 노는 바둑은 그 규칙을 바꿈으로써 오목으로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바둑판이 오목판이 되고, 바둑알은 오목알이 된다. 셋째 실제의 놀이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집합에 동시에 속할 수 있다. 예컨대 카드놀이는 알레아와 아곤에 동시에 속하고, 관중이 지켜보는 대개의 스포츠는 아곤과 미미크리에 동시에 속한다. 요컨대 실제의 많은 놀이들은 잡종이고 앞으로 더욱 잡종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복잡다변한 놀이의 특성 때문에 실제에서는 하나의 놀이 집합에만 속하는 놀이를 찾기 힘들다. 그러니 사진도 여러 놀이 집합에 그것도 동시에 속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선, 조준해서(Aim) 사격하고(Shoot) 포획한다(Take)는 사냥과 유사한 특성을 고려하면 사진은 분명 아곤에 속한다. 여기에 경쟁이 있다면, 그 상대는 촬영 중인 피사체이거나 동일한 피사체를 겨누는 다른 사진가들이다. 어느 경우건 게임의 승패는 탐색과 조준, 사격과 포획 과정에서 발휘하는 사진가의 기량에 달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승패를 기량이 아니라 운에 맡길 때 사진은 알레아에 속한다. 극단적인 경우 뷰파인더를 보지도 않고 무엇이건 일단 낚은 후에 골라낸다. 기실, 노출 시간 동안엔 피사체는 물론이고 사진기도 사진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러니 적어도 이 순간, 사진기는 바닥에 구르는 주사위와 같다. 한편, 회화의 재현술을 발전시킨 것이 사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진은 미미크리에 속한다. 너무 쉽고 너무 진짜 같아서 주저스럽다면, 더 적당한 예로 피사체를 만들어 찍는 이른바 연출사진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촬영 장비와 촬영 행위 자체를 볼거리로 만드는 경우도 미미크리에 속한다. 여기서 관심의 대상은 피사체가 아니라 관객이고 촬영장은 하나의 무대가 된다. 사진기라는 자동화된 상품을 매개로 슈팅과 쇼핑이 만나 하나의 놀이(Play), 하나의 연기(Play)가 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일링크스인데,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촬영을 하면서 현기증 혹은 의식 불명 상태에 이르는 광적인 경우가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이 항목은 일단 비워둬야겠다.




Varanasi, 2008

세계란 신의 놀이, 환영(幻影)일 뿐이라고 설명하는 힌두이즘이야말로 퍼니즘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제 노는 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리하여 빛의 도시 바라나시는 힌두이즘의 성지이자 퍼니즘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하는 포토퍼니스트(Photofunnist) 순례자라면 꼭 찍고 가야 하는 곳이 바라나시다. Welcome to the Photo Funny World!


3 투박한 스케치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사진의 면면이 놀이하는 인간의 면면만큼이나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놀이가 다종다양한 만큼 그 많은 놀이들을 모두 사진으로 일일이 담아내며 놀기에도 바빠 보이고, 그 놀이들과 교합하여 새로운 사진 놀이를 만들 가능성도 무궁무진해 보인다. 놀이는 특정한 터와 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아무 곳 아무 때나 아무나 아무거나 찍고 놀 수 있다는 것이 놀이로서 사진의 장점 아닌가. 어느 곳에서건 사진기를 꺼내 드는 순간, 아니 사진적 태도를 갖는 순간, 이미 이 놀이는 시작된다. 더구나 포니(Pony)를 생산하며 뒤늦게 포디즘(Fordism)인지 포니즘(Ponism)인지의 시대에 합류했던 이 나라도, 이제는 퍼니즘(Funnism)의 시대를 열고 사방에서 쇼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니 가히 아니 찍고는 아니 놀지는 못하는 것이리라. 세계 자체가 사진을 위한 터이고 때인 듯 보이니, 유토피아(Utopia)는 모르겠으나 포토퍼니즘(Photofunnism)의 궁극, 포토피아(Photopia)는 실현된 듯 보인다. 하지만 전부(全部)는 곧 전무(全無)이기도 하니, 불행하게도 실제로는 찍을 터와 때라고 공인된 곳에서 조장된 것만 찍고 논다. 그러니 포토피아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 우리가 노는 이곳은 사방에서 쇼를 하는 놀이동산, ‘포토 퍼니 월드’(Photo Funny World)일 뿐이다. 채우지 못하고 비워둔 마지막 항목 일링크스는 아마도 이런 사진을 위한 것인지 모른다. 놀이동산을 가득 채운 달콤한 현기와 향긋한 광기.<월간사진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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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30. 16:02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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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30. 16:01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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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생명보다 셔터’ 비난에 자살? ‘발췌의 함정’

퓰리처상 받은 ‘소녀 노리는 독수리’
뉴스사진 윤리 따질 때 최우선 인용 사례
일방적 매도와 오류 법원판결문까지 등장

2005년 초에 이 글을 처음 썼습니다. 불우하게 삶을 마친 한 사진기자의 생과 사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는데 1차적으로는 나 자신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이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보니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더 큰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갈수록 흐려져 울컥

그 무렵에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열에 여덟 내지 아홉은 출처가 어딘지 모르는 일방적인 주장이 확대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무려 10년이 더 지난 사안인데도, 글보다 쉽사리 기억되고 주목되는 사진이란 속성 때문에 이야기의 전달력이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흔하게 퍼져나가던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단 남부에 들어간 카터가 아요드의 식량센터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것은, 굶주림으로 힘이 다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소녀가 쓰러지면 쓰러진 소녀를 먹이감으로 삼으려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셔터를 누른 후 그는 바로 독수리를 내 쫓고 소녀를 구해주었다. 이 사진은 발표와 동시에 전세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뒤 일부에서 촬영보다 먼저 소녀를 도왔어야 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결국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상 3개월 뒤인 1994년 7월 28일에 친구와 가족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비판이 일었다. 결국…목숨을 끊었다”가 결정적인 논리적 비약

후에 제가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본 끝에 내린 결론에 따르면 위의 이야기 자체엔 오류가 없었습니다. 다만 많은 생략에 의한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들어있고 그에 따라 글을 읽고 재해석한 분들에게 큰 오류의 여지를 제공했습니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서 늘 도사리고 있는 독사의 아가리같은 함정이 여기 숨어있습니다. 필요한 인과관계와 그 설명을 뺀 채 적당히 발췌해서 사실을 늘어놓으면 결국 사실을 호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본문에 앞서 문제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 2월이었고 최초로 지면에 게재된 것은 3월 23일치 뉴욕타임즈였으며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1년이 더 지난 1994년 4월이었다.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아프리카의 기아에 대해 그 전부터 취재해왔고 더 심한 사례도 목격했었던 기자였습니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고민해온 문제이며 사진을 찍고 난 직후에도 인간적 슬픔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수상한 뒤 비난에 직면하자 더욱 힘들어했을 수 있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란 것이며 자살의 더 큰 계기로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수상결정이 된 이후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비판이 일었다" 라는 문장 직후에 "결국 케빈 카터는 ….목숨을 끊었다" 라고 연결시킨 것이 결정적 오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 글을 읽으면 비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김없이 카터가 불려나와 매 맞아

어쨌든 2005년에 제가 글을 쓸 무렵엔 위의 내용이 여러가지 논란과 사례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뉴스사진의 윤리를 따질 때 가장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사진보도중 어느것이 더 우선인가?’ 라는 주제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케빈 카터가 불려나와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논란을 지켜보면 꼭 등장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예술은 없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는(특히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나 필름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딜레마겠죠. 아무개 선생님이 제게 그런 질문을 하셨을 때, 한참을 고민하다가, “찍고 구하러 가면 안되요?” 그랬다가 혼난 적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 목적이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요, “지금도 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고민입니다. 아직 인간이 덜 된 거겠지요"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습니다. 

방송기자 에세이집에는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며 왜곡까지

저도 사진강의를 하는 사람이고 뉴스사진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땐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목숨에 우선하는 뉴스가치는 없다"

그렇지만 케빈 카터의 사례는 경우가 다르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곽윤섭의 사진 곳간' 을 여는 첫 글로서 케케묵은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그 후로 지금껏 스스로에게도 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아직도 그 오류가 청산이 되지 못한 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는 2007년 10월 한 야당의 부대변인 성명서에서도 케빈 카터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사례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면 한 방송기자의 에세이집에도 오류로 범벅이 된 채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고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독수리를 쫓아버렸을 땐 이미 늦었다. 결국 소녀는 죽고 말았다."  소녀는 죽지않고 구호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2005년 처음 글을 쓰게 된 직접 계기가 되었던 것은 한 일간지의 법원 판결문 재인용에 등장한 케빈 카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존중의 태도 견지하지 못했다’ 포장

"인격권의 주체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제3자에 대하여 폭넓은 보호를 요구할 지속적 기반을 확보 할 수 있다고 할 것인 점(단적인 예로 케빈 카터라는 작가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독수리가 굶주려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는 보도사진을 촬영하여 1994년 퓰리쳐상을 수상하였으나 1994년 7월 이 사진에 대한 비난과 이로 인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판결문답게 어렵게 포장이 되었지만 케빈 카터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였다고 읽힙니다.

이를 근거로 그 일간지의 기자는 "사진보다 사람목숨이 우선이었어야 한다는 비난이 고통스러웠던지 예술가는 상처받고 죽어갔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가져야 표현의 자유도 확보된다. 그것을 몰라 불행했던 예술가를 잊지 마라"고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수의 일반 네티즌들이 오류를 확대재생산해서 전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고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또한 정치인, 기자, 판사 등 사회 각층의 전문가들조차 저지르는 무책임한 재인용도 오류의 확대, 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 자꾸 희미하게 변색되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처음 글 썼을 때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 많이 늘어 다행

그래도 2007년 11월 현재 포털에서 검색해본 결과 2005년에 제가 처음 이글을 쓰려던 당시보단 사실에 근접하는 내용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어떤 분은 "구글에서 검색하니 쉽게 찾았다"고 했지만 꽤 조사를 많이 해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이제 제가 다시 이 글을 올림으로 해서 조금이라도 사실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에 힘을 더 보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하부터 본문입니다. 예전의 글이 장황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일부 첨가하고 대폭 요약했습니다.


[케빈 카터를 위한 변명]

케빈 카터는 1961년에 태어나 1994년에 사망한 사진기자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아파르트헤이트(분리)정책으로 소요가 극심하던 시절 다른 동료 세명과 함께 Bang Bang Club 으로 불리던 사진가 집단의 일원으로 일했다.

총탄 살해 방화 현장 누비는 실력 빵빵한 ‘방방클럽’

Bang Bang Club은 총탄이 난무하고 연일 살해와 방화가 이어지는 전쟁터같은 현장에서 두려움없이 그리고 가끔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취재현장을 파고든다는 평판 때문에 남아공화국에서 일하던 다른 외신 기자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뒤에 다시 등장하는 마리노비치도 이 Bang Bang Club의 일원이며 1991년에 퓰리처상(스폿사진부문)을 수상한 바가 있다. 한 마디로 실력 빵빵한 사진가들의 모임인 셈이다.

뉴스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사진기자라고 부른다. 사진기자들 가운데서 극히 일부만이 분쟁지역에서 취재를 한다.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은 누구나 목숨을 걸고 일을 한다. 보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좋은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인류가 빚어낸 최악의 자기 혐오인 전쟁(혹은 분쟁)을 취재하는 것은 그 비극과 참상을 지구상의 나머지 인류에게 알려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숭고한 의지 때문이다.

분쟁 시달리는 남아공 태생으로 아프리카 참상 찍으며 아픔 함께

케빈 카터는 지역의 작은 언론에서 시작해 후에 로이터, 시그마 포토 등에서 프리랜스 사진기자로 일했다. 보도사진가의 대부분은 늘 가난하게 살고 있고 케빈 카터도 생활고에 시달렸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현장에서 늘 목도하게 되는 참상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아프리카, 특히 그가 태어난 남아공화국에선 그 당시 분쟁으로 날이 지샜고 총과 칼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피비린내가 가득한 지옥같은 상황을 수도 없이 마주쳐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를 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이나 마찬가지인 한국에서도 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하나가 비쩍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 아닌가.

퓰리쳐상의 피쳐 사진 부문에서 상을 받게 된 이 사진을 찍은 것은 1993년이다. 케빈 카터는 일하고 있던 매체에 휴가를 내고 항공료를 빌려 당시 기아가 극심했던 수단으로 향했다.

아요드란 곳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기아로 인한 희생자를 찍기 시작했다. 굶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조의 손길이 미치길 갈망하며 넓은 숲으로 이동했다.

완성도 높은 순간 기다려 찍고 독수리 쫓아…울먹이며 "하느님~"

그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게 되면 더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기다렸다. 이윽고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독수리는 살아있는 생물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 그 어린 소녀는 다시 급식센터로 향하는 어려운 발걸음을 이었다.

케빈 카터는 나무아래에 주저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하느님~"하고 중얼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수단 취재 여행에 동행했던 동료 실바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 후 계속 침통해 했고 딸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리고 순식간에 아프리카 참상 상징 아이콘으로

이 사진은 수단의 사진을 찾던 뉴욕타임즈로 보내졌고 1993년 3월 26일자에 실렸다. 그리고 전세계에 사진이 전파되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사진이 아프리카의 참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유명해 졌지만 일하던 매체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일을 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이듬해 4월 12일에 퓰리처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 4월 18일 그를 포함한 Bang Bang Club의 동료들은 요하네스버그에서 10마일 떨어진 토코자 마을로 향했다. 폭력사태의 발발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정오가 되기 직전 좋은 사진을 찍기엔 햇빛이 너무 강렬해 카터는 시내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라디오에서 동료 켄 오스터브록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또 다른 동료 마리노비치는 중상이란 소식도 함께. 케빈 카터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폭력사태가 더 격화되었음에도 다시 토코자에 뛰어 들었다. 훗날 그는 "켄이 아니라 내가 총알을 맞았어야 했다"라고 술회했다. 퓰리쳐상을 받으면서 그는 많은 비난의 목소리도 접해야 했다.

동료 취재현장 사망에 충격…평소에도 보도사진가 딜레마 고민

케빈 카터 자신도 자주 고통스럽게 보도사진가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시각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주검을 프레임에 꽉 채우기 위해 줌인을 하기도 한다. 죽은 자의 얼굴은 약간 회색빛이 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마음 내면의 세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일을 할 시간이며 나머지 일은 (사진을 찍은) 다음에 처리해야 한다고 되뇌이곤 했다. 내가 이 일을 할 자신이 없으면 사진기자란 직업을 관두어야 한다."

현역 최고의 뉴스사진가중 한명인 제임스 나치웨이는 카터의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진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일은 계속하기가 아주 어려운 직업이다."

“절망적…돈이 없다…살육과 시체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유서

그해 7월 27일 케빈 카터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호스를 연결해 둔채 차안에서 자살했다. 수많은 참상을 지켜본 카터는 남아공에선 흔하기 짝이 없는 마리화나를 자주 피웠고 친구 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마약에 기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세상을 뜨면서 악몽과 불길함 따위로 범벅이 된 유서를 남겼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집세도 없고...양육비...빚갚을 돈...돈!!이 없다...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쫓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쏘는 미친 사람, 경찰, 살인자, 처형자등의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이 말도 남겼다. "내가 운이 좋다면 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독수리가 살아있는 사람 공격 않는다는 건 상식

이제 케빈 카터에 대한 변명을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위에 나열한 상황에서 논점은 크게 두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케빈 카터가 한 행동이 비난받아야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또 하나는 케빈 카터가 자살한 것이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이었는지의 여부입니다.

몇가지 팩트가 있습니다.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을 모은 사진집에 나온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서 일하던(취재하던) 사진기자들은 사람들을 만지지 말도록 지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전염병을 옮길 위험이 있다" 는 이유였습니다. 이 명분만으로 케빈 카터가 마음이 편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는 그 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기아와 전쟁의 참상 때문에 괴로워하던 휴머니티가 강한 뉴스사진가였습니다. 게다가 독수리는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뉴스사진가였고 그의 일에 충실했으며 그가 남긴 사진이 아프리카의 기아를 세계에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전쟁 참상에 대한 회의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

종군(혹은 분쟁지역전문) 사진기자들은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는 일이며 인간의 죽음 앞에서 전쟁으로 촉발된 일련의 참상에 대한 회의를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반전단체에 직접 뛰어들어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아돕기 운동을 하는 자원봉사 활동가가 되지는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만 뉴스사진기자들의 임무는 따로 있고 그 임무 또한 숭고하고 지난하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하진 못하실 것입니다.

케빈 카터가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했다는 주장은 어떨까요? 그는 마음이 여렸고 어려운 직업 탓에 가정의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더 굳건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했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했던 모양인데 주변의 정황으로 봐서 꼭 그 사진에 대한 비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 여렸고 가정환경 열악…비난이 카터 괴롭히는 데 일조 했을 것

"모든 분쟁지역 사진가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다른 현장에서 부닥치는 것보다 훨씬 심한 윤리적 걸림돌과 자주 직면한다. 전쟁사진은 다른 뉴스사진 분야보다 본질적으로 비참한 장면을 담게 되어 있다. 게다가 매시간, 매일 열악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고 스트레스와 공포가 아드레날린과 짬뽕이 되어 어떤 사진을 마감해야 하는 지에 대해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뉴스사진가 피터 호위의 말입니다. 말년의 케빈 카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급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사진에 대한 비난이 케빈 카터를 괴롭히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사려 깊지 못한 자들의 가벼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번 호도된 팩트를 제대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난 2005년에 실감했었습니다. 이 번엔 한결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속에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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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 in the city

2011. 9. 29. 20:24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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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29. 20:23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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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방, 향수

2011. 9. 29. 20:22 from 레크레이션





 

필름의 향: AURA No˚ 5


 





글사진 현린



1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영화보다 사진을 사랑했다. 영화 역시 수많은 낱장의 사진들로 이뤄진 것이지만, 그가 보기에 영화의 스크린(screen)과 스토리(story)는 사진의 ‘정수’(精髓, essence)를 가리고 흐리기 때문이다. 사실 스크린은 그 위에 투사된 영상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스크린 아래를 가린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가리개이기도 하다. 스크린 위의 스펙터클(spectacle)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크린 아래의 현실은 무시하게 된다. 우리의 시각은 스크린 위와 아래를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크린 위에 투사된 본래 낱장의 사진들은 초당 무려 24장씩, 심지어 30장씩의 빠른 속도로 점멸하며 흐른다. 우리의 시각은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스크린 위에 머물다 사라지는 낱장의 사진들을 포착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사진들의 잔상(殘像)이 만들어내는 스토리에 몰입하게 된다. 이때 이 스토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내장된 코드들을 해독(解讀)함을 의미한다. 해독의 대가였던 바르트에게 이는 코드에 길들여짐을 의미했고, 이는 스크린과 스토리에 가려지고 흐려진 사진 고유의 정수를 놓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곳에서 영화보다는 스틸(still) 사진을 좋아한다고 밝혔고, 급기야 ‘밝은 방’(La Chambre Claire, 1980)에서는 길들여진 ‘좋은 사진’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미친 사진’을 사랑한다고 밝힌다.

물론, 사진 역시 코드화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길들여진 그것에 바르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을 기계적으로 재현한 것이 사진인 까닭에, 우리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은, 그래서 코드화되지 않은 그 무엇을 사진에서 만날 수 있다. 바르트는 그것에 푼크툼(punctum)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처음 그가 주목한 것은 사진 속 공간에서 자신만이 주목하고 찾아내는 세부(detail)였다. 하지만 이러한 푼크툼은 너무나 특수해서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반면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그가 발견한 또 다른 푼크툼은 사진의 정수라 하기에 부족함 없이 보편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가 본 적 있을 리 만무한 다섯 살 소녀 시절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가 돌연 깨달은 것은, 사진 속에서는 그녀가 존재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곧 부재하리라는 사실, 즉 그녀의 죽음이었다. 모든 사진은 비록 과거의 사건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미래의 사건, 도피하고 망각하려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부의 확인으로서의 공간적 푼크툼과 구별되는, 죽음의 확인으로서의 시간적 푼크툼이다. 바르트는 이 필멸의 진리가 선승(禪僧)들이 가리키는 달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엄연히 자신만의 스토리인 이 경험은 스토리라 하지 않고 대신 ‘사토리’(satori) 즉 선승들이 말하는 돌연한 깨달음이라 불렀다.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의 이러한 특성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보다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에서 더 잘 드러난다. 사진은 바늘구멍을 통과해 어두운 상자 한쪽에 맺힌 단일한 영상이 아니라, 불투명한 프리즘을 통과한 후 거울에 반사된 상과 종이 위에 그려나가는 상이 동시에 맺히는 이중의 영상이라는 것이다. 그 불투명한 프리즘 덕에 더욱 모호하고, 두 영상이 겹쳐진 덕에 더욱 애매한 ‘부드러운’ 영상은 과연 유령다웠으니, 급기야 바르트는 사진이라는 매체(medium)를 유령과 접신하는 영매(medium)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스크린이건 종이건 그 가면을 찢고 나오는 그녀만의 ‘분위기’(stimmung) 곧, 그녀의 ‘영혼’을 그는 사진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진의 정수는 어느새 그녀의 정수가 되고, 사진이 가리킨다고 그가 믿었던 달(Luna)은, 그가 그토록 자부하듯, 사랑과 연민으로 정신을 잃은 광기(lunacy)가 된다. 요컨대, 바르트는 스토리의 영화와 스투디움의 ‘좋은 사진’과 달리 코드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토리와 푼크툼의 ‘미친 사진’에서, 사진의 정수와 그녀의 정수를 찾는다. 선승들이 말하는 사토리란 것이 실제로는 영혼이나 정수 따위란 없음을 깨닫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르트의 사토리는 사이비임이 분명한데, 여하튼 한 장의 정지된 사진 위에서 펼쳐진 어머니에 대한 그의 스토리는 이런 식으로 끝을 맺는다. 미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영사기는 꺼지고 한 장의 사진, 그 스크린은 곧 어둠에 묻힌다. 하지만 어두운 방에 바르트가 남기고 간 광기는 여전히 남는다. 달이 저물지 않은 탓이 아니라 달이 저물고도 남는 그 향 탓이다.



Varanasi, 2008

향을 피우는 종교의식은 상징적인 정화나 성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향이라는 지극히 실제적인 질료로 후각적 공간을 건축하는 과정이다. 그 성은 오랜 세월 견고하게 축적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까닭에 더욱 성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이 코드화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외지인이 해독하지 못할 뿐. 시각과 언어와 거리가 먼 후각 역시 엄연히 코드화되어 있어서,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후각적 지도라는 것이 있을 정도다. 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독의 결과로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 잘 알려져 있다시피, 특정 코드를 야만시하거나 또는 신비화하는 것이다.

2 장-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는 영화도 사진도 아닌 향수를 사랑했다. 그래서 어두운 방은 이제, 역시 어머니 때문에 미쳐버린 그르누이의 몫이다. 패트릭 쥐스킨트(Patrick S?skind)의 ‘향수’(Das Parfum, 1985)에서 어머니의 정수는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그녀의 향기에 있다. 바르트의 말대로 만약 사진이 그녀의 정수를 담고 있다면, 이 역시 사진에 남겨진 그녀의 영상이 아니라 사진에 남겨진 그 향기 때문이다. 빠르건 느리건 그 많은 사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만큼 진하게 그녀의 향기가 밴다. 그러니 그르누이로서는 영화와 사진을 차별할 필요가 없다. 영화가 상영되건 사진이 펼쳐지건 무관하게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름거릴 것이다. 눈을 감은 그에게 스크린은 배경도 가리개도 될 수 없다. 사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점멸하며 흐를 때 바르트가 사진의 정수들을 잃는다면, 사진들이 쏟아질수록 그르누이는 그 정수들에 오히려 더 흠뻑 젖어든다. 다만, 그의 후선(嗅線)은 영상이 쏟아지던 스크린이 아니라 영상을 쏟아내던 영사기를 향할 것이다.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식어가는 저 필름릴이야말로 유일한 달이다. 정수는 스크린이 아니라 영사기 안에서 데워진 필름에서 발향(發香)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태어난 1738년 7월의 파리에는 영화는커녕 사진도 없었다. 그러니 그에게 어머니의 사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사랑하고 말고 할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후각적 사진이랄 수 있는 향수에 더욱 미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르누이는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8백 년 동안 시체가 썩어가던 묘지 위에 세워진 장터에서도 악취를 내뿜는 생선더미 아래에 마치 배설이라도 하듯 그를 낳은 어머니는, 앞선 네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 다섯째 아이 역시 죽게 내버려둘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울음 때문에 죄가 발각되어 그녀는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는 살아남았다. 억척스럽게 태어난 그는 이후의 삶도 억척스럽게 이어간다. 여느 아이들처럼 달콤한 향은커녕 냄새 자체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돈벌이에 유용함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탓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재능이자 행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후각적 감각과 쾌락이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열다섯 살 무렵에 그가 하던 일은 악취를 참아내며 가죽을 손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들 불꽃놀이에 넋을 잃고 있던 어느 축제일, 그의 삶에도 마침내 구원의 빛이 아니, 구원의 향이 나게 되니, 그것은 그의 천재적인 후각적 감각이 찾아냈으나 그의 기형적인 도덕적 무감각이 무참히 꺾어버린, 이제 막 꽃을 피우던 여체의 신비로운 향이었다. 그는 그 향의 재생에 나머지 삶을 바치기로 하고, 마침 대량생산의 길에 들어선 향수업계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를 복제하며 입문해 도제생활을 시작하고 나중엔 향수의 도시 그라스로 유학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데 고산 동굴에서의 수년간의 칩거가 보여주듯, 그의 여행의 목적지는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그가 재생하려는 향이란 그 자궁의 향에 다름 아니었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정수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면, 그르누이는 코로 확인하고자 했던 셈이다.

문제는, 바르트와 달리 그르누이는 자신이 찾는 것이 어머니의 정수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직접 찍는다는 점이다. 사진과 달리 향수는 단지 빛을 매개로 한 대상의 흔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상의 일부다. 상대의 정수를 얻기 위해서는 셔터를 끊는 대신 둔중한 몽둥이로 상대의 정수리를 내리쳐서 숨을 끊어야 한다. 그런 후에, 형태에서는 스크린과 닮았지만 기능에서는 필름과 쏙 빼닮은, 유지(油脂)를 바른 하얀 천으로 사체를 덮어 싸서 향을 추출(distillation)한다. 그런데 향수를 위한 이 스크린 또는 빈 필름을 감아 들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는 그르누이는 자신이 찍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정수 대신 애꿎은 여인들의 정수리만 내려찍고 다닌다. 결국 그는 어디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름 ‘그르누이’(grenouille, 개구리)가 의미하듯 아누라(Anura, 양서류)처럼 경계에서 갈팡질팡한다. 지고지순한 향에 몰입하기 위해 올라간 고산에서는 타자의 악취보다도 더 무서운 자신의 무취에 경악하고, 자신만의 향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려온 도시에서는 자신이 제조한 아로마(Aroma)에 발정하여 바지를 내리고 치마를 걷어 올리는 그들의 무지를 경멸한다. 무취 때문에 있어도 없는 듯했던 존재가 이제는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하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듯하다는 신비한 존재, 바람과 숨의 여신인 아우라(Aura)의 화신이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후각적 몽타주의 효과일 뿐임을 그 자신만은 아는 까닭이다. 결국 악취의 고향인 파리의 묘지로 돌아온 그는, 아이의 그것보다 달콤한 그 향을 바른 자신의 몸을 굶주린 자들을 위한 양식으로 내놓는다.



Marakesh, 2005

모로코 무두공장의 풍경을 영상으로만 볼 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재미있는 선과 면의 구성과 울긋불긋한 색채가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현지의 공장 담을 넘어섰을 때, 그 얄팍한 시각적 환상을 찢고 들어온 양피의 역한 냄새라는 후각적 현실은 호흡을 줄일 것을 강제할 정도였다. 바로 저 가죽 냄새를 없애는 과정에서 근대 향수산업이 발전했는데, 그 냄새는 결코 양피만의 것이 아니라 인피의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과연 인피에서 아름답고 순수하고 신비로운 아우라란 것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스럽다. 물론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비누와 향수가 팔리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런 아우라란 오히려 비누와 향수 광고사진의 작품이 아닐까.


3 태내에서의 감각과 기억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어머니의 향기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어머니의 정수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바르트가 찾았던 것은 오히려 그르누이만이 찍어낼 수 있는 향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가 말하는 카메라 루시다가 실제로는 두 개의 영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영상과 어머니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그가 말하는 시각적 푼크툼이란 실제로는 지극히 후각적 스투디움이었던 것이다. 다만 시각과 후각을 구별하지 못했기에 그 역시 자신이 찾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분위기나 유령이란 어머니의 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기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든다. 그르누이의 향수도 재생이 아니라 재현이었을 뿐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가죽의 자취거나 체취일 뿐 결코 가죽을 찢거나 투과하는 정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바르트는 죽은 자의 사진에 산 자의 삶까지 묻고 애도했고, 그르누이는 죽은 자의 향수를 위해 산 자의 삶까지 꺾고 우울해 하지 않았던가. 바르트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향수와 그르누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던 양수, 그 둘을 모두 닮은 달의 향이라도 뿌린다면 모를까, 삶의 정수가 아닌 죽음의 정수에 눈과 코를 들이댄 이상 그 애도와 우울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 듯하다. 그러니 눈과 귀로 다만 고정하고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와 함께 몸으로 살아내는 삶의 정수에 고개를 돌리는 편이 나을 듯싶다. 그곳의 향기는 어떠냐고? 글쎄, 이름은 들어 보셨을라나? AURA No˚ 5라고.<월간사진 201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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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9. 28. 22:10 from 사진















































 



cereb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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