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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다큐-NewYork

2011. 10. 5. 20:40 from 레크레이션








공허와 열정이 공존하는 도시 


 



 


 하늘이 높아지고 쾌청한 바람이 불 때면 대책 없이 방치해 두었던 향수병처럼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상쾌한 공기 냄새만으로도 그리워지는 그것은, 푸르름과 웅장한 경치를 자랑하는 절경도 아니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시원한 바닷가도 아니다. 높은 빌딩숲의 대명사이자 맨하탄을 품고 세계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뉴욕이 바로 그것이다. 너무 아름다워 영화 속 배경으로 많이 등장하는 뉴욕의 가을과 겨울은 아직 경험도 못 해봤지만 내 머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뉴욕의 이른 봄, 공기 냄새는 그것만으로도 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곤 한다. 뉴욕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일 정도로 세계의 대표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9.11사태 이후 더욱 더 주목 받게 되었지만 까다로운 미국 비자의 발급과 입국 심사로 인하여 뉴욕행 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뉴욕은 뉴욕이다


뉴욕행 일정이 잡히고 이런저런 자료를 모아 공부하며 여행 준비를 했으나 막상 뉴욕에 도착하고 나니 거대한 도시의 에너지와 엄청난 공간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빌딩들이 숲을 이루는 큰 도시였지만 공기는 맑았고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한 거리에 뉴욕에서의 첫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우선 업 타운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미드타운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브로드웨이라는 거리의 이름은 쇼비지니스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나 뉴욕의 북쪽인 할렘지역에서부터 세계무역센터가 있었던 남쪽의 로어맨하탄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리의 이름이다. 브로드웨이의 도로 중앙에 있는 화단에는 꽃과 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있고 화단 아래 지하에는 지하철이 다닌다. 거리와 교차되는 곳마다 설치된 벤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커피나 샌드위치를 즐기며 자유롭게 여가를 즐기고, 허공에 줄로만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신호등이 불안하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한산한 거리를 낡은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스냅 촬영을 해 가며 거리 풍경을 즐겼다. 유명 명소만을 바삐 몰려다니며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딱딱하게 움직여야 하는 스타일의 여행을 싫어해서인지 내 의지로 갈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었다. 이국적인 거리 풍경 하나하나는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큰 빌딩 숲이 전부인지 알았던 도시의 내면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피상적인 이미지는 조금씩 깨어지고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들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다양한 문화의 공존은 뉴욕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주었다. 다운타운의 어느 유명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겉보기에도 도시와는 잘 섞이지 못할 것같이 순박해 보이는 커플은 한 눈에 보아도 미국의 소도시에서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경이로워하는 모습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온 나 만큼이나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는 것이 표정에 숨김없이 드러났다. 그만큼 뉴욕은 특별했다. 두 번째 뉴욕에 다녀와서야 느낀 것이지만 뉴욕에서는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뉴욕은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 속의 도시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 민족들이 재창조해 만들어낸 복합적 문화를 지닌 코스모폴리탄 도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뉴욕은 어떤 한 나라에만 국한시킬 수 없는 국제적 독립 도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4달러에 팔려진 섬


뉴욕은 브루클린, 퀸스, 스테이튼섬, 브롱크스 그리고 맨하탄 등 크게 다섯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뉴욕은 주요 관광지와 빌딩들이 모여있는 맨하탄이다. 뉴욕은 1602년 인도무역을 위한 항로 개척하고 있던 네델란드인 헨리 허드슨에 의해 발견되었고, 1626년 당시 네델란드의 총독인 피터 미누이트는 원주민인 인디언으로부터 옷감 등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주고 맨하탄섬을 사드렸다. 이 역사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던 장소가 로어맨하탄에 있는 배터리파크이다. 1664년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맨하탄은 영국에게 넘어갔으며 당시 국왕 찰스2세의 동생 요크공의 영주 식민지가 되면서 ‘뉴욕’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그뒤 100여년이 더 지난 뒤인 1781년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787년 미합중국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취임했던 당시의 수도가 뉴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번영과 대공황을 거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된 뉴욕은 미국의 경제, 금융, 문화의 중심이며, 세계의 수도라 불리고 있다.


 


도심 속 오아시스


두 번째 방문이어서 그런지 익숙한 길거리 곳곳의 낯익은 풍경이 반갑기만 했다. 뉴욕은 도시계획이 잘 돼 있다.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은 도로인 에비뉴와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도로인 스트릿이 바둑판처럼 교차하고 있어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쉽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마다 에비뉴라는 이름과 몇 번째 거리인지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잘 정리되어 있어 표지판만 보며 걷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치장된 도시의 겉모습 보다는 도시 안쪽의 평범한 길거리의 풍부한 표정들과 뉴요커들의 평범한 생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 업타운 쪽의 거리를 몇 번씩 반복해 걸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곳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맨하탄은 남북으로 길게 생긴 섬이다. 동쪽으로 이스트강과 서쪽으로 허드슨강, 북쪽은 할렘강 남쪽은 대서양이다. 지도 없이 처음 맨하탄을 걷게 되더라도 반드이 만나게 되는 엄청난 규모의 공원이 있다. 바로 유명한 센트럴 파크이다. 황폐한 쓰레기처리장이었던 그곳을 남북 4킬로미터, 동서 1킬로미터 규모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들이 녹음을 이루고, 곳곳에 호수와 연못들이 있어 도심 속 오아시스 역할을 하고 있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는 자유롭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연인들과 가족들로 넘쳐났고 산책로에는 조깅하는 사람이나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뤄 여유로움과 자유가 한층 더 느껴졌다. 가끔 운이 좋을 때면 소년들의 야구게임을 볼 수 있는 등 다양한 종류의 인종들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곳이나 인적이 뜸한 곳은 조심해야 한다. 하루는 공원 안에서 휴식을 취하다 굵은 소나기가 갑자기 내려 공원을 빠져나와 비를 피했었는데 그날 저녁 식사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뉴스에선 그 날 오후 센트럴파크에서 있었던 강간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뉴욕은 가시를 지닌 장미처럼 향기로운 매력 속에 돌발적인 위험을 내포한 도시라는 생각을 다시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영원한 이방인 뉴요커


시간은 어느덧 한 달이 흘러 뉴욕생활에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나게 되는 관광객들이 재미있어질 때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똑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녔는데, 얼마전까지 나 자신도 저런 표정으로 돌아다녔을 생각을 하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관광객과 뉴요커들이 구분이 되고 거리의 풍경들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때, 뉴욕을 사진에 담고자 했었던 처음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엇을 찍어야 할지 점점 고민만 깊어가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보이는 맨하탄의 빌딩들은 멋있지만 그것 자체가 더 이상의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그때 즈음 도시 자체가 호흡처럼 내뿜는 느낌들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뉴요커, 먼 곳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 다시 돌아가기엔 어쩌면 너무 멀리 떠나온 사람들에 의해 재건설된 인공적인 고향. 그들이 하루하루 일상을 묻고 꿈을 꾸고 혹은 꿈을 접고 살아가는,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에너지들이 넘쳐나는 다민족 공동체의 작은 별나라 뉴욕. 그곳은 내겐 경이로웠지만 생각해 보면 이유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화려한 네온사인들도 하늘을 찌를 듯한 스카이라인 때문도 아닌, 크고 화려한 도시가 내뿜는 알 수 없는 공허감과 함께 공존하던 열정 때문은 아닐까? 뜨거움과 차가움, 삶의 열정과 삶의 공허, 자유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도시. 꿈이 잠들지 못 하는 도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내뿜는 호흡들이 그들과 그들의 별을 잊고 쳇바퀴처럼 일상에 젖어 살아가는 나를 가끔씩 뒤흔드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사진 이창석 (월간사진 2005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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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4. 16:31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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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3. 18:33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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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 14:21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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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 14:20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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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가 탔던 열차는 어디로 갔을까


 





글사진 현린


 

1 “다음 역은 그랜드 센트럴입니다.” 안내 방송에 눈을 떴다. “잠시 정신이 멍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어쩌다 이 통근열차를 타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니. 이럴 수는 없어. 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나는 이 통근열차를 타고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른 아침 출근길 열차 안에서 졸다 깨어나 멍한 눈으로 황망히 주변을 살피는 일이야 흔하다. 역을 지나쳤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고, 열차를 잘못 탔다면 다른 열차로 갈아타면 된다. 물론 그저 다른 열차가 아니라 바른 열차로. 그런데 열차 한번 잘못 탔다고 유난을 떨던 이 남자, 몇 주 후 사망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다. 원인은 대서양에서 요트 화재 및 폭발. 이런, 타고 싶은 게 열차가 아니라 요트였나 보다. 그런데 불까지 타버렸나 보다. ‘블루칩’이라는 요트와 함께 불타고 만 그는 38세의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법률회사 신탁유산 파트에서 일해 왔다. 가장 한직이랄 수 있는 이 파트에서 그가 받는 연봉은 자그마치 31만 5천 달러. 과연 통근열차를 탈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기사의 마지막 세 단어가 눈에 뛴다. ‘뛰어난 아마추어 사진가.’ 이런, 아까운 사진들도 함께 탔겠다. 그는 어쩌다 통근열차를 타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리고 또 어쩌다 블루칩과도 같았던 그의 인생에 불을 질렀을까?

더글라스 케네디(Douglas Kennedy)의 소설 ‘빅 픽처’(The Big Picture, 2003)의 주인공 벤의 엄청난 실수란, ‘빅 픽처’ 대신 ‘빅 머니’를 선택한 것이었다. 증권회사 중역이었던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성공이란 곧 ‘빅 머니’라고 아는 인간들과 함께 계급 사다리를 타기는 했다. 하지만 벤에게 성공이란 언제나 ‘빅 머니’가 아니라 ‘빅 픽처’였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브라우니를 선물 받은 여섯 살 적부터 카메라 뒤에 몸을 숨기고 뷰파인더라는 틈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좋았다. 어머니에게 라이카를 선물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엔, 로버트 카파 같은 사진가를 꿈꾸며 케이트와 함께 파리에도 갔었다. 처세에 뛰어난 케이트는 곧 사다리 하나를 올라탔다. 하지만 벤은 그러지 못했다.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게 없다.” 아버지로부터 한 푼도 받을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던 벤은, 결국 두 달 만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 후 카메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런저런 신문사와 잡지사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반응은 늘 똑같았다.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아버지가 이번엔 회유책을 썼다. 돈이 곧 자유다. 로스쿨이나 MBA 코스를 밟는 데 필요한 학비와 생활비는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 먼저 성공해서 돈을 벌어라. 그런 다음 그 돈으로 사진가의 자유를 맘껏 누려라. 벤은 시험에 들었다. 좋아, ‘빅 픽처’를 위해 필요한 ‘빅 머니’를 벌 때까지만.

원했던 사진에서와 달리, 원하지 않은 법률에서는 너무 쉽게 인정을 받았다. 아버지 인맥 덕에 취직도 쉽게 했다. 자신보다 법률지식에 더 밝은 25년 경력의 비서 에스텔이 다 해놓은 일을 자신의 졸업장과 자격증이라는 ‘빅 네임’으로 포장하는 것만으로 ‘빅 머니’도 벌었다. 그러나 사진가의 자유는 없었다. 버는 만큼 쓰기 마련, ‘빅 머니’를 위한 시간은 더 늘어났고, ‘빅 픽처’를 위한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빅 머니’로 얻은 자유는 ‘빅 픽처’를 맘껏 찍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기껏해야 ‘빅 카메라’를 맘껏 살 수 있는 자유였다. 열차 안에서 유난을 떨었던 그날 오후에도 3천 달러어치의 신형 카메라와 렌즈 하나를 더 구입했다. 보도사진용으로 완벽해 보이는 그 카메라는 반드시 필요하다 싶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빅 픽처’를 찍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그러나 한때 같은 꿈을 꾸었던 케이트와 선배 변호사 잭의 현실은 벤의 이러한 자기기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위선적인 케이트는 CNN 종군기자가 되어 시체들이 나뒹구는 보스니아에서 대량학살 소식을 전하고 있고, 한때 화가를 꿈꾸었지만 평생 남의 유산을 관리하며 그림을 뒷전에 두었던 잭은 위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두 사람의 열차 모두 타인의 죽음을 연료로 해서 달리지만, 영악한 케이트의 그것과 달리 잭의 열차의 종착지는 쓰린 속을 위장약이나 술로 달래는 벤 자신의 죽음이기도 했다. 가엾은 벤, 그는 정말 열차를 잘못 탔던 것이다.

그렇다면 ‘뛰어난 아마추어 사진가’ 벤의 ‘빅 카메라’는 카파의 ‘빅 픽처’ 같은 것을 담고 있었을까? 한때 소설가가 꿈이었으나 이제는 남편의 ‘빅 머니’로 18세기 가구 수집으로 소일하는 아내 베스는 벤의 사진들을 두고 ‘비정상 인간 전시회’ 같다며 질색을 한다.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앞에서 구걸하는 양다리가 없는 애꾸눈의 걸인. 바워리 가 쓰레기통에서 반쯤 먹다 버린 빅맥을 꺼내는 부랑자. 과연 질색할 만하다. 사실 벤이 통근열차를 타게 된 것은 뉴욕에서 뉴잉글랜드의 중산층 거주지인 뉴크로이든으로 이사를 한 뒤부터다. 3년 전 만취한 한 걸인이 다가와 “한 푼 줍…”이라고 말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들 애덤의 머리 위에 토사물을 쏟아내는 변을 당한 적이 있다. 그 후 질색할 만한 ‘병균’들을 피해 ‘멋진 이웃’들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런데 ‘병균’들이 더럽고 위험해 가까이 할 수 없다며 교외로 이사까지 해버린 그가, 수천 달러짜리 카메라 뒤에 숨어서 그 ‘병균’들을 즐겨 찍었다? 벤에게 그들은 낯설고 기이한 그러나 더럽고 위험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니 그 걸인이 구토를 할 만도 했다. 사진가에게 구역질이 났던 것이다. 그의 사진은 행여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처럼 ‘빅 픽처’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때 그의 우상이었던 카파의 ‘빅 픽처’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카파야말로 벤이 멀리하고자 하는 바로 그 ‘병균’이었기 때문이다.



India, 2009

2 카파는 그의 ‘굿 픽처’로 인해 ‘빅 픽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굿 픽처’를 원한다면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알렉스 커쇼(Alex Kershaw)가 쓴 ‘로버트 카파’(Blood and Champagne, 2002)를 보면, 훗날 ‘밥’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카파는 ‘병균’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자신이 ‘병균’이었다. 1913년 10월 22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카파는 한량이나 부랑자에 가까운 아버지의 기질과 함께 지독한 가난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처음에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중에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박멸해야 마땅한 ‘병균’ 취급을 받았다. 1931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망명을 하면서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기회를 잡긴 하지만, 벤의 부모와 달리 찢어지게 가난했던 밥의 부모는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벤과 달리 밥은 대학 공부를 버텨내지도 못했다. 결국 개밥을 몰래 훔쳐 먹다 들켜 하숙비마저 떼어 먹고 달아난 밥은 이후 거리에서 살다시피 했다. 다행스럽게도, 베를린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있던 고향 친구 에바 베슈뇌 덕에 밥은 데포트에서 일하게 되고 라이카를 다루는 법도 배운다. 그리고 1932년 11월27일, 코펜하겐에서 레온 트로츠키의 마지막 대중연설 취재를 맡으면서 비로소 사진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밥은 여전히 가난했고, 베를린에서 ‘병균’을 박멸하려는 파시즘은 절정에 달했다.

밥은 다시 파리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게르다 타로가 없었다면, 밥은 거리를 떠돌다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일에 바빠 사진을 못 찍는 벤과 달리 밥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했으나 일을 구할 수 없었고, 수천 달러짜리 금고에 보관된 벤의 라이카와 달리 밥의 라이카는 늘 전당포 신세를 져야 했다. 숙박비를 떼먹으며 싸구려 호텔들을 떠돌거나 노숙을 하고 센 강에서 낚시를 해서 연명하곤 했던 밥은 영락없는 부랑자였다. 그런데 유대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타로가 이렇듯 부랑자 기질과 가난에 허덕이던 밥을 로버트 카파라는 어엿한 사진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36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가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카파는 타로와 함께 즉시 전선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If your pictures aren''''t good enough, you''''re not close enough.” ‘병균’ 같던 카파에게는 프랑코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인민전선과 국제여단 전사들의 이상이 다만 ‘그들’의 이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었고, 그래서 동지들과 함께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든 카파는, 단순히 ‘좋은 사진’이 아니라 ‘옳은 사진’인 ‘굿 픽처’로써 싸우고자 했고, ‘굿 드림’을 가진 ‘굿 피플’이 싸우고 죽어가는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열차를 탔던 것이다.

하지만 밥은 카메라만이 아니라 총까지 차고 다녔던 타로를 내전 중에 잃고, 패전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굿 드림’과 ‘굿 피플’까지 잃는다. 1940년에는 그가 사진가로서 처음 취재했던 트로츠키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불타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밥은 남은 삶을 제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고, 곧 술과 피에 중독되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했고, 술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피가 튀는 전쟁이 필요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는 전쟁이 이제는 유일한 진통제가 되고 만 것이다. 밥은 여전히 최전선에 뛰어들어 ‘빅 픽처’를 찍고 ‘빅 네임’을 얻지만, 그가 가까이 가려고 했던 ‘굿 드림’과 ‘굿 피플’과는 점점 멀어진다. 여자와 도박과 술을 위한 돈과 피가 필요했던 밥은, 심지어 타로의 이상을 ‘빨갱이’의 광기로 취급하던 ‘라이프’지에 실을 사진을 위해서, 1954년 프랑스 제국군이 베트남 인민들을 상대로 벌이는 침략전쟁에까지 종군한다. 그리고 5월25일, 다름 아닌 타로의 동지들이 설치했을 지뢰를 밟고서, 벤이나 케이트가 ‘빅 픽처’감으로 좋아할 만한 왼쪽 다리를 잃은 시체가 되어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다. 돌이켜보면, 스페인 내전의 패전과 함께 전 세계가 제국들 사이의 전쟁으로 불타기 시작했을 때, 타로와 함께 카파가 탔던 그 열차도 불타버렸다. 가엾은 밥, 그는 열차를 잃어버린 것이다. 

요컨대, 벤의 우상인 밥은 실제로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은 그의 ‘병균’이었다. 게다가 벤은 자신이 타지 못한 다른 열차를 꿈꾸지만, 밥이 탔던 열차는 그저 ‘다른 열차’가 아니라 ‘바른 열차’였다. 그것은 비록 더럽고 위험하지만 다르고 낯선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아니라,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세계의 변혁이라는 정치적 이상을 위한 전쟁터로 가는 열차였다. 그리고 패전과 함께 ‘굿 드림’과 ‘굿 피플’을 잃고 살아남은 밥은 전쟁의 상처에 고통 받다가 결국엔 술값을 구하는 다리 잃은 ‘병균’이 되고 말았다. 반면 벤은 ‘병균’도 아니고, 지켜야 할 ‘굿 드림’도 ‘굿 피플’도 없으며, 그래서 잃어버리고 말고 할 왼쪽 다리도 없다. 벤이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는 케이트의 뉴스와 마찬가지로 벤의 사진에도, 그저 잔혹한 자극과 가엾은 희생자들만 있을 뿐 헌신할 만한 정치적 이상이나 동지는 없다. 벤에게 ‘우리’가 아닌 ‘그들’은 동지는커녕 이웃으로도 함께 살 수 없는 더럽고 위험한 ‘병균’일 뿐이다. 벤이 꿈꾸는 밥의 열차는, ‘빅 머니’를 가진 부모 아래서 자라며 얻은 ‘빅 네임’으로 죽은 자들이 남긴 ‘빅 머니’를 관리하며 ‘빅 머니’를 버는 그로서는 결코 탈 수 없는 열차였던 것이다. ‘빅 네임’으로 포장하는 것만으로 버는 ‘빅 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빅 머니’로 마련한 집에 갇혀 누리는 깨끗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렇게 자신의 ‘블루칩’을 태워버리지 않는 한.



Mayday, 2005

3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발적 사고로 ‘블루칩’은 타고 만다. 유명사진가들과 친분이 있다고 떠들며 예술가 행세를 하고 다니지만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게리 서머스라는 무명사진가가 화근이었다. 게리 역시 ‘병균’ 사진을 즐겨 찍지만, 부모의 유산이 없었다면 결코 이곳에 살 수 없었을, 그야말로 ‘멋진 이웃’에 침투한 ‘병균’이었고, 베스 역시 그를 싫어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집을 자꾸 비우기 시작한 베스가 게리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허세를 부리긴 하지만 사진가가 되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나. 신형 카메라 덕에 베스와 게리의 불륜 현장을 찍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만 찍으면 될 것을, 게리의 목까지 찍은 것이 문제였다. 삼류 주제에 감히, 사진가가 수동적인 관객이어선 안 된다고 속을 긁고, 베스가 섹스를 끝내주게 잘 한다고 속을 뒤집더니, 급기야 넌 꿈을 이루지 못한 일개 사원일 뿐이라며 속에 불을 지른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는 깨진 술병이 들려 있었고, 이번엔 ‘병균’의 토사물 대신 ‘병균’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벤은 또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사로 해결할 수 없었다. 대신 게리의 시체를 ‘블루칩’과 함께 태워버리고, 자신은 게리가 타던 찌그러진 MG에 올라탔다. 변호사 벤이 아니라 사진가 게리로 살기로 한 것이다. 이제 ‘빅 머니’ 대신 쥐꼬리만한 게리의 유산으로 살아야 하지만, 여하튼 다른 열차를 타기는 했다. 그렇다면 다음 역은 ‘빅 픽처’? 그건, 직접 가서 보셔야겠다.<월간사진 2010년 10월호>














Posted by stormwat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