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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05 cell in the city
- 2011.09.05 마리오 자코멜리 : 구조화된 추상과 풍경
- 2011.09.05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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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02 윌리엄 클라인 : 거리의 풍속화가
![]() ![]() ![]() ![]() 상대적으로 유럽의 사진가들은 미국의 경우처럼 매체사진의 순수성을 그들의 전통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술적 매체로서 표현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점진적으로 사진 매체의 순수성을 거부하고 오히려 매체에 인위적인 조형성을 부여하면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을 우선으로 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진을 더 이상 객관적 사건의 전달 매체가 아닌 붓이나 잉크와 같이 개인적인 표현을 위한 표현 도구로 간주하면서 또 다른 조형적인 활용을 시도했다. 사진의 영역에서 이러한 새로운 지형을 개척한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하나는 이탈리아인 마리오 자코멜리(Mario Giacomelli)였다. 비록 유럽 사진작가 대부분이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사진의 큰 영향력에 가려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마리오 자코멜리는 이미 1960년대부터 거의 유럽을 대표하는 서정 음유시인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특징적으로 그의 사진적 테마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대지와 생명과 같이 자신을 둘러 싼 진솔하고 담백한 일상생활의 서정들이며 그 이면에 인간의 내적 본성에 대한 존재론적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 마리오 자코멜리는 1925년 8월 1일 이탈리아 중동부에 있는 마르케주 세니갈라(Senigallia)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줄곧 그 곳 리비에라(Riviera)③ 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의 나이 9살 되던 1934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 아이들의 생계를 댈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양로원 세탁소에서 고된 노동을 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일하는 양로원에 자주 갔고, 일찍부터 그 곳 노인들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 생명의 시작만큼이나 삶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죽음은 어둠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3살 되던 해 그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경험이 되는 인쇄소에서 일하였는데, 거기서 (기술자가 아닌) 소년 직공으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차원적인 자음과 모음의 식자글씨와 이상한 형상들에 유혹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인쇄소의 주주로서 인쇄 일을 시작하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삶과 생명에 대한 시적 영감이었다. 그후 그는 은밀하게 시를 적기 시작하였고 점진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삶에 있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그는 한 번도 사진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그는 8포즈 대신 10 포즈를 가능하게 하는 필름 6 x 9 사이즈를 개조하였고 그의 집 돌 세탁장 구석을 개조하여 암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행위를 독립된 예술 장르의 창작 행위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진을 그림이나 데생으로 간주하여 최종적인 인화 과정에서도 자신의 표현에 적합한 흑백 종이를 선택하여 사진들을 현상했다. 왜냐 하면 그에게 있어 창조의 원초적인 힘은 자신이 체험한 시적 영감에 있었고 사진은 이러한 영감과 직감을 위한 시적 언어로만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코멜리는 그의 사진 인생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고 또한 자신의 예술적 기질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데, 그 인물은 고향 세니갈리아의 변호사임과 동시에 “라뷔솔라(La Bussola)”라는 아마추어 사진모임의 회장인 귀세프 카발리(Guiseppe Cavalli)였다. 카발리의 탁월한 지적 능력과 구상 미술의 박식함은 젊은 자코멜리를 강하게 유혹했고 그의 영향으로 표현상의 추상적 형태와 조형성 그리고 현대미술 특히 추상 표현주의의 강렬한 매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진 행위로 연결되었다. ④ 물론 카발리의 요청으로 그는 라뷔솔라 그룹에 들어가지만 곧 그는 아주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견해 차이로 즉각적으로 탈퇴한다. 그는 그때부터 결정적으로 아마추어 문화로부터 거리를 가지면서 깊은 고독 속에서 끈질긴 개인적 탐구를 계속한다. 마리오 자코멜리의 사진들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적 본성에 대한 서정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정은 당시 전후의 암울하고 혼란스런 시대가 만든 작가의 깊고 원초적인 심리학적 충동과 자신의 특수한 성장 배경으로부터 형성된다 : 어린 시절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개인적인 고통, 전쟁으로 황폐된 재건 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분쟁으로 야기된 나라의 집단적 위기의식, 외래 문화와 전통과의 혼동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작가로 하여금 거의 반사적으로 인간의 내적 본성에 대한 탐구와 인간적 연대 욕구를 발산하게 했다. 게다가 50년대 이태리 지방은 급속히 산업화되고 문명화된 도시와는 달리 아직도 내부적으로 많은 전통 종교와 우상 숭배적인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코멜리는 50년대 당시 이태리를 지배한 전통적 매체사진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일상의 서정을 농축시킨 삶의 흔적들과 특히 인간의 땀과 노동을 용해시키는 땅의 껍질과 주름(항공사진)을 통해 사랑과 일, 젊음과 늙음, 생명과 죽음 등의 보다 본질적인 주제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거기서 이미지들은 더 이상 현실의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닌 일종의 시적 언어로서 추상적인 형태를 가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러한 이미지들은 크게 두 가지 철학적 배경을 가진다. 우선 작가가 초기 사진부터 줄곧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자연과 문화의 조화”이다. 그것은 마치 음유시인이 읊는 가락과 같이 작가의 경험적인 체험과 내면적인 직감이 빚어내는 감정의 음색, 쉽게 말해 삶의 진실과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거기서 사진들은 언제나 감각 이전의 내재된 초월성 ⑤ 즉 형태들의 생산 이전 단계로 거슬러 존재하는 내재적 생성 또는 구조화된 추상 이미지로 나타난다. 여기서 구조화(structuralisation)란 무엇을 말하는가 ? “그것은 이태리적인 영감을 말하는데, 그 의미는 현대 이태리어 “struttura”에서 아직 남아있는 라틴어 어원인 “structura”에서 암시되는데, 이 말은 뼈나 돌과 같이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여하간 모든 건설에 공통적인 무엇을 말하는 특수한 단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일종의 구성적인 근본이고, 모든 특별한 실현 그 이전에 일반적인 원칙 다시 말해 자연과 문화에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일종의 선험적(transcendantal)인 디자인이다 - 그러나 이것은 “초월적(transcendant)”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주 “내재적(immanant)”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예를 들어 독일 특히 헝가리의 바우하우스 디자인은 인공물 속으로 게다가 디지털 속으로 자연을 빨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이것(선험적 디자인)은 자연에서 문화로 가는(즉 문화 혹은 인공물이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 예 자연의 형태에 조화를 이루는 우리 나라의 초가집 경우) 것이다.” ⑥ 그래서 구조화라는 말은 구체적인 형태나 의미로 구성된 수많은 문화들이 사실상 형태가 없는 동일한 골격으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문화의 관점에서 자연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단지 자연의 표면일 뿐이고 구조를 말하는 배경에서 형태로 돌출된 구성(construction)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화와 자연의 조화임과 동시에 형태 없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구조화된 추상이다. 가령 산허리를 가로지르고 산을 관통하여 만든 거대한 동맥의 고속도로, 지도를 바꾸는 엄청난 간척공사, 방대한 인간 조직과 그 집단 활동 등은 문화에 자연을 흡수하면서 언제나 구체적인 문화를 구성한다. 그때 자연과 문화는 별개의 것이 된다. 그러나 대지의 품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땀과 노동은 자연에 흡수되어 구조(본질화)화 된 문화가 된다. 거기서 우리는 문화와 자연의 조화를 볼 것이며 형태와 의미 이전의 본질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연에 대한 시적 영감과 직감은 문화를 자연 속에서 이해하는 구조화(조직화)된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그때 시적 영감의 이미지는 단지 추상적인 형태만을 가질 것이다. 마리오 자코멜리는 자신의 풍경 사진들에 대해 “그것은 추상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본질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소위 “메타”라고 언급할 수 있는 정상적인 형태로부터 이탈된 그의 사진들(리터칭 된)이 단순히 시각적으로 변형된 풍경이 아니라 자신의 시적 영감에서 구조화된 본질적인 풍경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코멜리 사진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내적인 개념은 삶과 죽음 그리고 대지의 순환을 말하는 “생성-형성(devenir-forme)의 시적 재현”이다. 그는 “모든 역사는 세계가 진행하고 있는 역사(진화)를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틀 내부에서 이해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들이 암시하는 어떤 순환적인 리듬과 반복은 일종의 무의식적인 제식화로 나타나는데, 이는 대지로부터 탄생하여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동양의 윤회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대지와 생명,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등과 같이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지는 사진의 테마들은 마치 웅장한 서사시에 적용되는 후렴구처럼 언제나 반복과 리듬을 가진다. 언제나 위대한 문학가나 시인들을 유혹한 것은 특별한 영적 신비 의식(초월성)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 은닉된(내재성) 삶과 죽음의 순환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코멜리를 유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진실이었다. 그를 유명하게 한 양로원(사진 1), 어린 신학생들(사진 2), 스카노(사진 3) 등과 같은 매혹적인 사진 시리즈들은 어떤 신비론적이고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아주 강한 흑백 콘트라스트와 거친 입자 그리고 무차별한 인공 빛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통적으로 우리 일상의 어떤 존재론적인 내재성을 지시하고 있다. 특히 삶의 종착역인 “양로원의 삶”을 들추어내는 묵시론적인 이미지들은 무기력하게 던져진 고통과 죽음의 상처 그리고 이러한 자국들 뒤에서 미리 사후의 세계를 예견하듯이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연속적인 시간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 존재와 대지와의 관계는 언제나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 그것은 자연, 들판의 일, 축제, 어느 젊은 커플의 열렬한 포옹, 웃음, 노래, 미소,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춤이다. 삶의 원초적인 제스처와 유머로 가득 찬 대지의 역사들은 우상숭배의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관능으로부터 시적인 모든 상상에 적절한 환기적이고 서정적인 긴장을 진동시킨다.” ⑦ 엄마 손길과 같은 천성적 대지, 풀밭 위 젊은이들의 열애, 식사와 노동, 마르케의 땅, 거기로부터 나온 시(詩)적 영감이 바로 사진이고 그때 사진가는 음유시인이 된다. 대지와 생명을 노래한 1950-60년대 자코멜리의 풍경 사진 시리즈(사진 4)는 최고의 모상 즉 대지에 공헌된 한 편의 서사시로 간주된다. 비행기(큰 소리를 내는 모터 달린 조립형 경비행기)에서 포착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밭고랑의 운각으로 나누는 분절과 앵글 속에서 보잘 것 없는 하찮은 것 소위 의미 없는 “무 - 기표(insignifiant)”의 존재를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풍경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지형의 모사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구조화) 조화의 풍경을 말한다. 다시 말해 풍경들은 모든 원근법적이고 피토레스크적인 규범들을 비우면서 땅, 밭고랑, 나무 그리고 땀(노고)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종속이상 더 이상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풍경의 본질적이고 거시적인 재구성을 보여준다. 결국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한 번도 경작 안 된 황무지를 보여주는 단순한 지형적 탐색이 아니라 거기에 남긴 밭고랑, 구획, 들판의 자국들 즉 인간의 노동(문화)이다. 자코멜리 사진이 가지는 구성상의 특징들(탈-형식주의, 항공사진, 거친 입자, 강한 콘트라스트, 리터칭, 영화화된 장면 등)은 궁극적으로 표현적인 조형성을 우선으로 하는 탈 - 형식주의(anti - formalisme)경향을 가진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순수사진들이 전통적으로 표명하는 형식주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거의 직감적인 음 - 양(clair-obscur) 이미지, 구상 예술의 전통적 양식과 형식주의로부터 이탈, 구성상의 자유로운 흐름 등 특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적인 측면을 암시하는 극단적인 콘트라스트와 의도적으로 필름과 인화지에 직접 실행하는 모델라주(modelage /리터칭)는 작가의 표현주의적 의도를 잘 말해줌과 동시에 형태들(formes)의 생산 이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화된 추상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그가 사진을 통해 재현하려는 이미지는 구조(골격)화 된 이미지였다. 이를 위해 우선 기복이 심한 이태리 풍경에서 의도적으로 선들을 굵게 하기도 하고 자세한 부분을 지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와 지움은 “어떤 형이상학적 의문을 놓는 것이다. 즉 배경(fond)이 무엇이고 형태(forme)가 무엇인가 ? 자연(nature)이 무엇이고 문화(culture)가 무엇인가 ? (...) 1963년 스카노의 거리에서 검은 외투의 부인들과 어린 소년의 등장인물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구조화(textural 짜여진)된 추상에 의해 내재되어 있다” ⑧ 구조화된 추상 이미지, 그것은 작가의 시적 영감과 직감에 대한 사진적 재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현실을 떠난 초월적(au-del )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심연(ombres)에 존재하는 내재적(en-de a)인 감성의 음색이다. ● 주요 참고 서적 Ennerry Taramelli, Mario Giacomelli, Contrejour 1992/Nathan 1998, Paris, 1998. Enzo Carli, Giacomelli, cat., Charta, Milano, 1995. L'echappe europenne, L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Paris, 1992. Mario Giacomelli, cat., Centre Regional de la Photographie Nord-Pas-de-calais, Douchy, 1987.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① 여러 번 언급되는 말이지만 영상사진의 “영상”은 외래어인 이미지(image)를 번역하여 만든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 의미는 코드화(양식화) 할 수 없는 혹은 그 이전의 존재론적 대상을 내포하는 그러한 사진을 말한다. 이는 언어로서의 사진이 아닌 사진 그 자체로서의 언어를 가지는 사진을 말한다. 필립 뒤봐는 이러한 사진을 포괄적으로 말해 현실의 변형(상징, 코드, 의미, 관습, 약속, 문화 등)이 아닌 “지표로서의 사진(La trace du reel)”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사진적 장치(dispositif)”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대략 1970년대 후반부터 점진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논리와 의미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영상이라는 순수한 어원적인 단어(텍스트가 없는 시각적인 이미지)로 인해 영상사진을 흔히 텍스트 없이 서술화 된 사진 이미지(스토리 사진 ?)로 오해한다. 결국 "영상"이라는 뜻을 앞서 말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기표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존재의 자국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② 프랭크 이후 1970년대 아버스나 아베돈과 같은 거의 대부분의 현대 사진가들이 실행한 억압되고 망각된 존재들(음영, 시뮬라크르, 탈-구조 등)에 대한 사진적 탐색을 말한다. 이때 사진들은 코드가 아니라 영상 언어들이다. ③ 그는 몇 번의 외국 여행과 전시 그리고 외국의 단기 체류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기는 하였지만 거의 줄곧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거기에 살고있다. ④ 그러나 리터칭과 덧칠 같은 조형성을 허락하는 이러한 사진 행위는 오늘날 1980년대 이후 연출사진이나 구성사진과 같은 조형사진 계열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의 조형성은 단지 표현을 위한 사진적 방식 또는 강조로 간주되며 그의 사진은 조형사진이 아니라 순수 서정 사진으로 이해된다. ⑤ 철학에서 “초월”이라는 용어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스콜라 철학에서 초월은 보통 사고의 범주 이상의 것으로 초감각적인 것 즉 “지적 직관”을 말한다. 두 번째로 칸트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초월 용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에서 이해된다. 먼저 “초월적 (transcendant)”이라는 것은 인간의 지식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 지식 외부에 있다는 의미로 인간의 실천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초(영혼불멸, 신)로 간주한다.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경험 불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이지 않다. 반면 “선험적 (transcendantal)”이라는 것은 “초월적”과 같은 어원이지만 이것은 인간 지식의 성립 기초로 이해된다. 그래서 인식론적으로 경험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immanent) / 내재성(immanence)”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의 “내재성”은 신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범신론 관점에서 본 것이다. 끝으로 실존주의 철학에서 유신론적 관점에서 초월의 용어는 키에르케고르 신이나 야스프스의 포괄자가 보는 성스러운 초월을 말하며, 무신론적 관점에서 볼 때 특히 하이데그 사르트르 철학에서 실존이 그 존재방식으로서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어 가는 것을 “초월한다”라고 한다(참조, 철학 용어 사전, 동녘).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초월은 인식론적으로 경험 가능한 범위에서 칸트의 선험적 초월인 “내재성(immanent)”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떤 존재가 실재 밖의 비현실적인 상부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실재한다는 설명을 위해 칸트의 “내재적”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사실상 이 말은 우리의 경험과 인식이 도달하지 못하는 심연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이고 비인식적인 무엇을 지칭한다. 이러한 심연의 영역이 원래의 “초현실주의” 개념인 것이다. 고로 초현실주의의 대상들은 단지 내부적 혹은 보이지 않는 현실일 뿐이고, 작가가 감지하는 영감이나 직감 또는 대상과의 교감에서 포착되는 감성의 음색은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현실에 분명히 실재하는 내적 대상인 것이다. ⑥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p. 162. ⑦ Ennerry Taramelli, Mario Giacomelli, Contrejour 1992/Nathan 1998, Paris, 1998, p. 18. ⑧ Henri Van Lier, op. cit., p. 16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양로원 시리즈 중 1955-1968 (사진 2) 어린 신학생들 시리즈 중, 1961-1963 (사진 3) 스카노 시리즈 중 1957-1959 (사진 4) 풍경 시리즈 중 1955-1970 |
여섯 번째 테마 사진은 비어 있는 의미 공간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 인간의 기억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진 정신적 현상은 없다. 아무리 생리학이나 의학이 발달해도 우리의 기억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적 사고는 보편적 진리의 타당성을 위해 오래 전부터 형성되었고 특히 19세기말부터 합리론과 경험론 특히 실증주의의 명분 아래 더욱 가속화되어 발전된 것으로 오늘날 거의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되고 있다. 분명한 논리를 앞세우는 과학적 사고는 물질 중심의 많은 철학적 유파들과 20세기초 구조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사변적 배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정신적 현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과학적인 철학(형이상학)도 당시 과학 지상주의(양의 세계) 시대에 또 다른 큰 줄기(음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의식의 발견과 심리학의 지속적인 발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그 차체를 실증하는 물리적 혹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니체와 베르그송의 반-과학주의 사고 그리고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철학에 있어 사실상 주체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예로 인간의 “기억”이라는 정신적 현상을 볼 때 기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생리학적인 관점으로 기억 현상은 의학과 그 첨단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더 이상 신비한 신체의 생리 현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기억 현상은 소뇌와 대뇌의 유기적 관계에서 어떤 분비물의 작용으로 우리가 기억하거나 혹은 망각이나 치매현상을 일으킨다고 설명된다. 이는 흔히 일반적으로 과학적 사고에 의한 기억의 실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기억은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거대한 형이상학적 창고에서 어떤 외부조건에 의해 혹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의식에 돌출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정신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서로 다른 의식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이는 마치 육안으로 보이는 빙각의 일산이 침수된 빙하의 거대한 하단을 이끌고 있듯이 우리의 정신은 단지 의식에 표출된 기억이나 인식 현상을 말하는 상부구조(혹은 양의 세계)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배경(fond)이 되는 흔히 심리학에서 무의식(혹은 철학적으로 비인식)이라는 거대한 하부구조(음의 세계)와 함께 이중으로 된 구조를 가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무의식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델을 설정하는데 그 중에서 사진의 잠상을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시각적으로 출현한 사진을 의식이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흔히 “사진을 기억의 은유”로 규정(Philippe Dubois)하기도 한다. 그와 같이 표출된 기억은 거대한 하부구조 안에서 그 원인적인 것(현상학에서 본질)과 관계를 가지고 또한 연속적으로 서로 상관관계(대부분의 경우 원인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이러한 연쇄적인 반응을 연상1)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식하는 기억(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은 언제나 그 의식의 원인성을 갖는 무의식(비인식)의 세계와 관계하며 이때 상부에 나타난 기억들은 일종의 징후로 간주된다.2) 그러나 과학적 인식은 단지 표출된 징후로부터 보편 타당한 하나의 가설이나 원칙을 세워 혹은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그 징후의 본원적인 실체를 논리적 혹은 의미적으로 밝히는 것(이와 같이 가설적으로 밝혀진 본질을 “형상 form”이라고 한다)을 우선으로 하는 사고이다. 그래서 과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 가능한 대상(의미의 틀을 갖는 형상)으로부터 제외된 현실의 많은 징후들(의미의 영역 밖의 비인식의 대상들)은 그들 역시 가설적인 형상들을 가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예외적인 영역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학문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플라톤 동굴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대상들로 단지 무의식의 세계(혹은 하부세계)에서 잠정적인 존재로만 남게된다(생성 존재론). 가령 어떤 현상이 비록 누구에게나 감지되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보편 타당하지 않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은 단지 징후로만 출현할 뿐이다. 구조주의자들의 공통적인 방법론은 상부구조에 출현한 대상들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논리와 의미의 타당성을 그 근거로 대상을 분석하는 방식 즉 코드화 된 징후들의 체계적인 분석에 기본을 둔다고 할 때 후기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의미와 코드의 옷을 입지 않은 많은 징후들의 비논리적인 대상(시물라크르 figure)으로부터 하부구조의 그 원인적인 생성을 추적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물질 중심의 편협적인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무시된 정신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거시적인 관점의 이동(대표적으로 예술의 포스트 모더니즘)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70년대 말부터 구조주의자들은 과학적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분석적 방법론(대표적으로 기표 signifiant와 기의 signifie 의 소쉬르 기호학)의 한계로부터 또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였는데 우선 그들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19세기 말 미국의 철학자이자 기호 논리학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신호체계(논리적 실용론)에서 징후로만 존재하는 현실의 많은 대상들을 새롭게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의 출발점이면서 또한 그 이론적인 모델이 되었다. 특히 퍼스의 인덱스 개념은 후기 구조주의 개념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쉬르의 기호체계에서 현실에 출현하는 기호는 두 가지 형태로 파악되는 것과는 달리, 퍼스는 현실의 신호체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퍼스는 자신의 책 “신호 체계의 서술 Logic as semiotic ; the theory of Signes (1895-1902)”에서 그 첫 기호 유형으로 아이콘(icon 도상)을 들면서 아이콘은 마치 교통표지판의 신호나 화장실의 성별 구별을 위한 그림처럼 “대상이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특징을 근거로 하여 단순히 아이콘이 외시하는 대상으로 보내는 신호”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신호로 상징(symbol)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상징이 외시하는 대상에 보내는 신호로 이러한 대상은 참조에 의한 상징적 번역을 결정하게 하는 어떤 법칙 혹은 평범하고 일반적인 연상을 근거로 한다.” 예컨대 사랑을 의미하는 하트, 평화를 뜻하는 비둘기 혹은 특히 현시 광고에서 보여지는 많은 의미적인 제스처나 대상들은 바로 이러한 신호체계에 속한다. 그와 같이 상징은 가장 보편적인 우리들의 지적인 앎과 이성 즉 문화적인 코드(사진에서 스투디움)에 관계한다. 퍼스는 이러한 아이콘과 상징이 다소 분명한 그 지시대상들을 가지는 것과는 반대로 단지 불특정한 지시대상을 지시하는 또 다른 신호체계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징후 혹은 인덱스(index)로 발자국이나 연기 등과 같이 “지시대상과 실질적인 연결 혹은 물리적 연상에 의한 원인적 관계를 가지는 신호를 말한다.” 징후 즉 인덱스의 특수성은 앞서 말한 두 신호체계에서 보여지는 지시대상과의 유사성 혹은 상징성(의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인성”에 있고 언제나 일 대 다수의 지시대상을 갖고 있다. 19세기 말 퍼스는 이러한 인덱스를 설명하기 위해 프로이드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언급하였는데 프로이드가 사진(양화)을 무의식으로부터 상부구조에 표출된 의식(기억)이라고 비유하는 것과는 달리 빛과 그림자로 찍혀진 사진은 발자국이나 연기와 같이 하나의 자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 퍼스의 이러한 설명은 단순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진을 언급했고 그의 징후론은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객관 타당한 의미의 부재와 대상의 불확실성의 이유로 사실상 기호학적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약 70년 후인 1970년대 말 당시 비평가들 특히 기호- 구조주의자들(후기 구조주의로의 이동)은 퍼스가 언급한 인덱스의 개념을 다시 인용하면서 사진을 더 이상 필연적 유사성에 의한 이미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 사진 영상(특히 스냅사진)은 “절대적 닮음이라는 이유에서 단순한 아이콘이나 보편적인 상징이 아닌 개인적인 대상과 기억이나 의미와의 물리적 접촉에 의한 상황적 원인성을 갖는 하나의 신호”라고 규정하고 또한 “이러한 닮음은 자연에 한 점 한 점 관련되도록 물리적으로 강요된 상황 속에서 생산된 사진에 의거하고 있다”3). 그와 같이 “사진은 어떤 상황들 이상 생각할 수 없다”4)라고 설명된다. 쉽게 말해 사진에서 재현된 대상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발자국과 같은 자국으로 이러한 발자국이 있게 한 원인성 즉 그러한 상황만을 말하고 있다. 보여진 발자국은 사실상 어떤 특정한 대상(발자국의 주인 즉 의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의 경험과 주관적인 경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발자국(사진)의 의미는 사실상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을 의미가 아닌 징후(index)로 간주하는 개념은 오랫동안 사진을 의미와 코드의 분석적 대상으로 간주해 온 당시 기호- 구조주의 학자들5)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곧 후기 구조주의의 결정적인 이론적 형성에 중요한 축을 세우게 했다.6) 또한 모더니즘의 탈당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론적 배경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인덱스 개념 즉 로잘린 클라우스(Rosalind Krauss)가 70년대 말부터 집요하게 추적한 “사진적인 것”의 개념이었다. 사진을 인덱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침수된 빙하(하부구조)를 끌고 있는 빙각의 일산(상부구조)을 말하는 것으로 하부에 존재하는 본질(작가의 본원적인 의도)과의 유사관계가 아닌 원인관계에서 출현한 징후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찍혀진 모래 위의 발자국에 특정한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강압적으로 부여하는 분석적인 구조주의자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존재론적인 개념이다. 벤야민의 아우라 발견 이후 처음으로 사진에서 이러한 탈-의미의 개념을 언급한 이는 앙드레 바젱(Andre Bazin)인데 그는 그의 “자동생성(la genese automa-tique)”에서 그것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 “처음으로 외부 세계의 이미지는 엄격한 규범에 따르는 인간의 창조적인 중재 없이 자동으로 형성된다. (...) 모든 예술이 인간의 출현 위에서 세워지지만 유일하게 사진은 인간의 부재에서 출현한다. 사진은 우리에게 마치 꽃이나 눈의 결정처럼 “자연적”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꽃과 눈의 아름다움은 식물이나 자연현상의 오리지널들과 분리할 수 없다.(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7) 여기서 찍혀진 꽃이나 눈은 아름다움이라는 하부구조의 본질을 재현하기 위해 단지 징후로서 선별된 대상일 뿐이지 사실상 일반적인 꽃이나 눈에 관한 상징이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림의 경우와 같이 작가가 감지한 본원적인 음색을 재현하고자 할 때 의도적인 자신의 번역이 가능하지만 사진의 경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진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선별한다. 그런데 그 대상은 원인적인 관계에서 단지 징후를 말하는 일종의 신호탄이나 유도체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멀리 산 넘어 피어나는 연기와 같은 것으로 그 연기(사진)의 객관적 의미를 규명하기에는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완전한 수수께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황의 원인성”인데 분명한 것은 그 원인이 하부구조를 말하는 산 넘어 존재한다는 사실(사진의 신빙성으로부터)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응시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관련된 의식(연상의 경향)을 가지게 된다 : 예컨대 농부는 산불을 생각할 것이고 군인은 전쟁을 생각할 것이다. 이때 연기에 비유되는 사진은 이러한 연상을 갖도록 하는 일종의 연상 유도체(conduct-eur)역할을 하며 그때 사진을 “생성”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라고 한다. 결국 사진적인 것(index)의 지시대상은 하부구조에 은닉된 본원적인 음색(작가의 창작적 생성)이라고 할 수 있다.8) 창작의 관점에서 사진작가들이 재현하려는 것은 앞의 여러 테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보편 타당한 의미나 언어로서 표현 가능한 상황들이 아니라 의미의 옷을 입지 않은 내재적 상황이나 음색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사진적 재현은 대부분의 경우 징후로만 가능하며 그때 징후로서 상부에 표출된 대상들은 하부구조의 동체(본질)를 암시할 수 있는 그 동체의 “상황적인 단편들”인 경우가 많다. 그때 이러한 징후들을 마치 얼굴사진으로 그 사람을 대변하듯이 “얼굴화 된(visagefiee) 형상들”9)이라고 한다. 가장 좋은 예로 포도주를 찍은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사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포도주는 어떤 문화적인 코드로서 축제나 파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연기나 발자국처럼 각자 포도주와 연관된 기억의 환기에 관계하는 인덱스 즉 얼굴화 된 본체의 단편(혹은 푼크툼)이다. 사진은 그때 텅 빈 의미 공간(반-의미적인 사진)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순간 응시자는 보여진 포도주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억의 연상적 확장(푼크툼의 환유적 확장)을 경험할 것이다. 텅 빈 공간은 곧 바로 응시자의 의식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동생성의 순간이고 타인의 경우가 자신의 경우가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거기서 사진의 위대한 힘을 확인할 것이다. 왜냐면 마치 자극된 뇌관에 의해 내향성 폭발이 일어나듯이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으로부터 감정의 연쇄적 돌출은 곧 감동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아무리 위대한 사진이라 할지라도 응시자의 체험적인 의식이 투영되지 않은 이미지에서는 그 어떠한 자극에도 우리는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은 의미적으로 텅 빈 사진이다. ● <주> 1) 연상에는 현재에서 과거로 하강하는 수직 연상과 그 수직 연상 이후 과거의 거대한 기억 창고에서 일어나는 수평 연상이 있는데 그때의 연상은 시간적인 전후가 없는 무시간적인 연상이다(Henri Bergson의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의 무시간성). 2) 기억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외부의 자극에 의해 의식에 표출되는데 그 중 시각적인 자극이 가장 중요하다. 3) 퍼스 신호체계에 관한 위의 몇몇 인용구는 C.S. Peirce, Ecrits sur le signe, Paris, Seuil, L’ordre philosophique, 1978, cite par Philippe Dubois, L’act photographique, Natan, Paris, 1990, pp.58 - 63에 관계한다. 4) Philippe Dubois, 앞의 책 5) 당시 기호 구조주의자(semio-structuralisme)는 크게 전통적 기호학자 분석가(메츠, 에코, 바르트, 렝드켄 등)들과 이데올로기 비평가들로 나누어지는데 후자는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 첫 부류는 감각 심리학에서 본 이론가들로 1965년 프랑스 구조주의 이전의 구조주의자들이고, 둘째 부류는 아른하임 바젱, 다미슈, 보드리, 부르디으 등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을 갖는 구조주의자들이다. 마지막 부류는 사진의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구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된다. 6) Philippe Dubois, 앞의 책. 7) Andre Bazin, Ontologie de l’image photographique, (1945) in Qu’est-ce que le cinema?, Tome I, Ed. du Cerf, Paris, 1975, pp.11-19. 그러나 바쟁은 퍼스의 인덱스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1950년대 당시 퍼스의 이론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고려해 보면 자신의 자동생성 개념은 기호학적 추론이 아닌 사진의 존재론적 개념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된다. 8) “생성”은 원점, 제로 상태, 출발점으로서 시작을 말한다. 본원적 음색의 사진적 재현이 자국으로서 사진이고 다시 말해 출현된 사진은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생성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그 지시대상으로 한다. 좀 더 확장적으로 말해 거의 모든 예술의 시공간적 출현은 이와 같은 사진의 인덱스의 원리에서 하나의 징후(사진적인 것)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개념의 변화(물질이 아닌 정신적 관점) 속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9) 얼굴화 된 것은 곧 인덱스화 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표현적 움직임(Le movement d’expression!)”라고 하는 존재론적 감정들을 끌고 있다(들뢰즈의 용어, “단편미학”에 관계한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를 또한 “탄착 impacts”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감각과 행위가 사라졌을 때(부동의 진술) 남는 잔여 찌꺼기(잔류전기)로 마치 감정의 여운(흔히 사진에서 아우라, 푼크툼과 유사)이 어떤 얼굴(표면, 탄착) 위에 남아 물결쳐 지나가고 반사하는 이미지들(무의미, 탈코드)을 말한다. Gilles Deleuse, Cinema, L’image-movement, Minuit, 1983 글 .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프랑스 역사” 시리즈 중 |
![]() ![]() ![]() ![]()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정보 매체의 엄청난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며 또한 소위 생중계라는 방식으로 사건과 거의 동시에 우리에게 전달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과 백 여 년 전 19세기 당시 어떤 사건에 대한 시각적 전달은 1839년 사진 발명 이후 사진이 전달 매체로서 지속적인 발전(사진 엽서, 신문 삽화의 자료로 활용되는 사진① , 과학적 자료집이나 도감 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보도사진에 비교해 볼 때 사실상 거의 실험 단계에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전달적 역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에서 일종의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한 유랑 풍속화가(peintre d'moeu-rs)들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들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생생한 사건과 풍물을 그림으로 전해주는 화가들이었는데 이들을 “거리의 풍속화가”라고 하며 또한 그들의 그림을 “풍속화(peinture d'moeurs)”라고 했다. 특징적으로 그들이 재현하는 대상은 단순한 풍경(대부분 픽토레스크)이나 풍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당시 사회의 여론이나 불만 혹은 억압과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풍자화였는데 이는 한 마디로 단순한 시각적 전달이 아닌 사회적 진실을 위한 정신적 폭로인 셈이었다. 당시 보들레르는 그들이 “현재의 미를 들추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현재의 본질적인 질”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진실의 폭로자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② 그러나 사진 발명 이후 점진적으로 보도사진과 기록 영화는 이러한 풍속화를 대신하게 되었고 풍속화가들 역시 거의 사라졌다. 20세기 전반기, 보다 엄밀히 말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까지 보도사진의 시각은 특이한 사건 혹은 결정적 순간과 같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인상주의적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궁극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언제나 범 우주적이고 객관적이고 사건 중심적이었는데 거기서 모든 형식은 사진 미학의 전통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었고 어떠한 주관적 풍자나 고발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의 절대 객관적 기록성을 앞세우고 있었다. 보도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 그러나 처음으로 1950년대 윌리엄 클라인(로버트 프랭크 역시)이 던지는 “전통적 규범의 이탈”은 그때까지 정형화된 보도 사진의 개념을 전복하면서 보도 사진의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탈은 단지 틀이나 구성과 같은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측면에서 현실의 이면에 감추어진 내재적 진실의 폭로에 관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라인과 같은 소위 “거리의 사진가(The street photographer)”는 더 이상 객관적 대상에 대한 전달적 의도가 아닌 우리들 사회와 문화 그리고 풍속의 진실한 전달자, 다시 말해 그들은 이미 사라진 19세기 풍속화가들의 역할을 다시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들 특히 그의 뉴욕(New York, 1955년)에서 보여진 사진들은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빗나간 사생아 혹은 터무니없는 상식 밖의 사진들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사진들은 매체의 전달적 목적에서 포착된 전통적 보도사진으로 읽혀졌기 때문인데 이는 사진을 단순히 기능적인 측면이나 결과론(혹은 형상론)적 관점에서 본 시각이기도 하였다. 그의 사진들은 정 반대로 지극히 주관적 사진 즉 자신의 눈에 비친 물질 문명 세계를 고발하는 일종의 “부조리 연극”으로 간주된다. 모든 해석과 이해를 사진이 보여주는 결과물에서 출발한다면 이미지들은 우선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동시에 당시 사회의 모든 활동적 양태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일종의 유형학적 사진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미지들은 그것들을 있게 한 원인적인 측면 다시 말해 촬영 당시 작가가 가진 어떤 존재론적 본질이나 충동에 의한 자국 혹은 인덱스로 이해될 것이다. 그럴 경우 클라인 사진을 특징짓는 많은 신기한 것과 이상한 것 혹은 괴기스러운 것 등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암시하는 하나의 문화적 신호(signes de culture)로서 나타난다 : 신호는 그 본질인 동체를 예측하게 하는 지시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보통 현실에서 볼 수 없는(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심지어 초감각적인 것들까지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사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클라인의 사진에서 주제임과 동시에 소재가 되며 이러한 사진을 “사인-사진(signe-photo)”이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인은 자신의 감각을 통한 물질적 사인에 대한 일종의 암호 해독자인 셈이다. 거리의 갱들이 활보하는 뉴욕의 광란, 토쿄의 이데오그램, 소련의 군사 문화, 로마의 종교 문화 등 50년대 이후 후기 정보 사회의 물질(소비 사회)과 정신(문화와 이데올로기)의 혼돈과 무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단편들(사인들)로 추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적은 결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혹은 편견적이고 일반적인 사고에서가 아닌 자신의 예리한 관찰과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클라인의 뉴욕에서 보여진 거리 이미지들은 전통과 결별하는 새로운 독창성을 창조함과 동시에 당시 실존주의 계열의 부조리 연극과 현대 물질 문명을 비판하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현대 도시의 신화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제스처로 간주된다. 이미지는 그때 일종의 조롱적이고 풍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사물화 현상”에 대한 사진적 재현으로 간주되며 대부분의 사진은 “사물화 된 인간과 물질이 대치”되어 나타나는 병치 효과 다시 말해 들뢰즈의 용어로 “문화와 자연이 충돌하여 그 표면에 발생하는 사건(evenement)”에 관계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번민 고독 소외 통속 유행 속물 등을 암시하는 당시 1950년대의 문화적 신조어(의미의 생성)들 즉 시대의 시뮬라크르들이기도 하다. 클라인은 팝아트의 선구자 클라인의 사진들은 단순히 현대사진의 역사적이고 진화적인 맥락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이미 보았듯이 이러한 사진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재현 의도(사물화 현상)는 단지 사진의 영역뿐만 아니라 1960년대 예술의 거대한 폭풍을 가지고 올 팝 아트의 전반적인 주제가 된다.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클라인의 사진은 팝 아트를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며 오늘날 역사적 관점에서 몇 몇 비평가들(1980년대 이후)은 클라인을 팝 아트의 선구자로 간주한다.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물질 속으로 정신(인간)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허무”를 조형적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팝 아트의 본질적 의도임을 고려해 본다면 클라인의 간판, 광고, 글씨, 이데오그램 등의 문화적 신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사물화를 재현하는 팝 아트의 전조로 간주된다. 클라인의 모든 사진들 특히 뉴욕의 사진들과 그의 단편 영화(예를 들면 “Broadway by night”)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뭔가 암시적인 은밀한 알파벳이 있다 :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도시에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히 반복되는 네온사인, 현란한 광고 글씨 그리고 많은 소비 문화의 조짐들과 같은 클라인의 “거리의 언어들”은 팝아트의 출현보다 무려 5년③ 이나 앞서 나타난다. 도시를 소재로 잡은 뉴욕의 사진에서 클라인은 강렬하고 폭로적인 그리고 조롱적인 이데오-상업적(ideologico-commerciale) 선전을 강조하고 있다 : 특히 네온사인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당시 전 세계 자본주의 도시에 불고 있었던 열풍 같은 문화의 새로운 것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의 여자들, 밤의 감시자들, 은행과 영화, 간판 슬로건 뒤에 갇힌 계산원, 밀려오는 군중, 열광하는 관객들 등은 궁극적으로 소비 문화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간 더미와 인간 소외 혹은 경찰 몽타주의 상품화 된 인간유형과 같은 인간의 사물화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거의 정확히 1960년대 유령 같은 먼로, 무한히 반복되는 돈이나 콜라, 자동차 사고 등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그림(일종의 사진-그림)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클라인을 당시 “어떠한 화가도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aucun peintre n'avait jamais fait ca)”을 처음으로 실행한 진정한 팝아트의 선구자④ 로 간주할 수 있다.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전통과의 단절 혹은 반-사진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개념적 측면에서 또 한편으로는 기술적 측면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사진의 개념적 특징들은 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새로운 문화적 통념(코드)에 관계하고 있다. 클라인 자신이 “사진적 행위는 동시에 일어나는 수 백 개의 사물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순간을 포착하는 황홀한 순간이다”라고 언급하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만남”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사진 작업은 그때까지 촬영 방식을 지배한 “연극적인 비밀의 자물쇠 구멍(렌즈)”을 통한 순간 포착 즉 미리 계산된 조준사격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들의 다발, 다시 말해 무차별 난사식 사격을 통해 거의 직감적인 한 장의 장면을 선택(암실 안에서)하는 감각적 만남에 관계하였다. 이러한 만남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증폭된 우연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클라인의 만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의 단면 즉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코드로서 정확히 “객관적 우연”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클라인의 사진에는 언제나 엉뚱하고 이상한 무엇(푼크툼)이 출현하는데 이는 특징적으로 한 부분으로 전체를 짐작하게 하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결국 이러한 만남들은 사진에서 무모하고, 통속적이고, 저속하고, 뻔뻔스럽고, 강렬하고, 거칠고 동시에 난잡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적절히 말해 자연과 문명의 교차 면에서 발생하는 예술적 형태로서의 무모성이나 무질서에 대한 사진적 추적으로 간주되다. 또한 인간은 거기서 일종의 물질의 장식품이나 부속물로 간주되고 도시 생활의 질식과 우글거림, 혼란, 뒤죽박죽, 와글와글한 군중들의 떼 등과 같은 것들은 현대 사회의 다량 유통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설적으로 흔히 자신이 역사적 증인으로서 직접 군중 속에 합류하면서 촬영하였는데 거기서 자신이 확인하려 한 것은 우리 모두 살아있는 “생명의 존재”였다. 전통적 규범에서 이탈, 틀의 자유성 추구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사진들은 그때까지 통용된 전통적 규범을 더욱 더 분명히 이탈하고 있다.⑤ 우선 “틀의 자유성”을 추구하는 잘려지고 불안정한 화면 구성은 의도적으로 화면의 왜곡을 야기 시킨다. 또한 가능한 화면을 꽉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35 mm 광각 렌즈의 사용과 대상을 겨냥하지 않고 바로 코앞에 바짝 붙여 촬영하는 근접촬영(close up)은 결과적으로 대상을 착각과 환상적 효과 속에서 괴물⑥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1). 영화의 시퀀스와 사진과의 접맥에서 나온 많은 사진적 표현들(순간 동작, 제스처, 찰나 등) 역시 이러한 강렬한 특징을 더 해주고 있다. 게다가 움직임의 자국을 남기는 오픈 플래쉬(open flash)의 활용은 살아있는 생명 혹은 생동감의 효과로서 이용하였는데 클라인은 이러한 효과를 특히 80년대 초 자신의 패션사진에 하나의 특수 효과로 이용하였다. 클라인의 많은 사진에서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별한 구성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 하나는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시선들이 마치 물수제비 뜨기처럼 서로 관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시선의 다각화(사진 2)이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현대 사회의 냉정함과 비정함 그리고 불신과 멸시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여하간 화면 구성에서 흔히 촬영 당시 누군가 렌즈를 쳐다(훔쳐)보는 시선이 나타난다. 또 하나는 마치 “프레스코 벽화”처럼 하나의 평면에 수많은 사람들을 비늘형식으로 병치시키는 공간 구성의 극대화(사진 3)이다. 이러한 구성은 우선적으로 광각 렌즈의 집단적 효과에 그 이유가 있지만 언제나 피사체의 분명한 공간성과 그 움직임을 강조하는 거의 1/125초의 노출 속도와 대략 15도 각도로 약간 굽어보는 낮은 앵글을 활용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에도 그 원인이 있다.⑦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은 근본적으로 작가가 인간 존재를 벽면에 부조된 기념물이나 건축적 장식물로 간주하려는 예술적 의도⑧ 에 관계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클라인의 사진을 특징짓는 또 다른 요소는 비교적 다른 동시대 작가들의 사진에 비해 유달리 독특하고 이상하고 별난 것(푼크툼)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1980년 이후 소위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 하여 밝혀낸 독특함(sing -ularite)과 증거성(attestation) 그리고 지칭성(designation)으로 정의되는 사진의 특성에 관계하고 있다. 소위 사진-인덱스는 전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사진-관객의 주관적 관점(사진적인 것)을 가지며 그때 외시된 이미지는 단지 자국 혹은 징후일 뿐이다. 알다시피 바르트는 자신의 이론적 입지를 위한 배경 혹은 모델(탈-코드)로서 사진 이미지를 도입했는데 특별히 여기 보이는 유명한 두 장의 사진(밝은 방)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진 읽기의 실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라는 제목을 가진 사진(사진 4)으로 우선 여기서 문제는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는 할머니이다 : 할머니는 찍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클라인은 중앙에 있는 할머니를 겨냥했다. 그러나 나머지 다른 여섯 인물들은 작가를 알아보지 못한 채로 찍혀졌고 각각은 사진기 앞에서 조롱, 불안, 멸시 등 다양한 심리적 기질들을 보여 주고 관객들 역시 이러한 감동적인 다양성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바르트가 보기를 원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자료이다 : 예컨대 여기 1959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또 어떤 모자를 썼는지, 어떻게 그들의 머리를 잘랐는지 등의 사실적 자료들이다. 한 마디로 사진 읽기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바르트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언급한 사실들에 관해 “내가 놀란 것은 사진가의 어떤 의도를 알려는 관심에 대한 그의 거절이다”라고 진술했다. 마치 사진을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로 간주하듯이 ...⑨ 또 한 장의 사진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이라는 제목의 사진(사진 5)이다. 클라인은 거리에서 우연히 이 가족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기분 좋게 가족은 그들 스스로 알아서 (포즈를 위해) 그룹을 만들었다. 아이의 권총을 가진 엄마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갖다 대었다. 아이의 눈은 자신의 엄마 쪽으로 돌려 웃었고 자신의 손은 엄마의 손으로 가져갔다. 큰 누나는 렌즈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한방의 사진 .... 거기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윌리엄 클라인은 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의 젊은 아이들을 찍었다. 그것은 감동적이다 ... 그러나 내가 끈질기게 계속 보게 되는 것은 이 개구쟁이의 썩은 이빨들이다”⑩ 결국 바르트가 몰두한 것은 문화적으로 약속된 주제 즉 촬영자의 의도(스투디움) ⑪가 아니라 푼크툼(punctum)이었다. ● 주요 참고 도서 William Klein, New York, , Edition du Seuil, Paris, 1956. William Klein, texte de Christian Caujolle, coll. Photo Poche, C.N.P., Paris, 1985. Close up, Thames & Hudson, London, Paris, New York, 1989.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Michel Nuridsany, “William Klein : la cam ra visible”, Art Press, n 69, avril 1983, p. 4-7. (주) ① 신문 삽화로서 사진의 도입은 19세기 말 사진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도사진으로서의 역할은 사실상 20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당시 사진 제작에 있어 많은 사진적 기술이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단지 삽화를 위한 자료로서 오랫동안 신문 삽화로 이용된 석판화를 대신하지 못했다. ② 참조, Alain Jouffroy, “William Klein : un portrait”, Zoom, n 19, Paris, juillet 1974, p.33-57. ③ 물론 영국의 초기 팝 아트 운동은 콜라주를 중심으로 보다 일찍 시작되었고 또한 로첸버그의 콤바인 페인팅과 존스의 그림 역시 50년대 후반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팝아트의 시작(1958-1968)은 워홀와 로젠퀴이스트 등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광고 이미지의 출현 즉 1960년대를 기다려야 한다. ④ 엄밀히 말해 윌리엄 클라인 이전 1949년 레이몬드 하인즈 (Raymond Hains)는 광고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사진적 작품으로 만든 첫 사진가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완전한 사진이 아닌 일종의 꼴라주 방식을 하고 있다 : 사진과 영화의 형식을 도입하여 만든 게시광고물로 일종의 레디-메이드이다. 여하간 클라인과 하인즈는 서로서로 팝의 선구자들로 간주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대조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공통점은 광고와 글씨의 사진적 조합에 있었다. ⑤ 여기서 비평가들은 실질적으로 전문적 사진 교육을 받지 않았던 클라인의 사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에 의하면 당시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대상을 왜곡시키는 상식 이하의 촬영 기법은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의 기술적 무지에서 왔다고 한다. 사실상 클라인은 파리 체류시 자신의 회전 광고 사진 확대 기술을 위해 처음으로 사진을 이용했는데 당시 그는 화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작가가 생존하는 오늘날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⑥ 몇몇 비평가는 이러한 왜곡된 형상들을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망투(Mantoue)의 테(Te) 성에 줄 로맨(J. Romain)이 조각한 괴물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⑦ 참고 Gabriel Bauret, “Des fresques au 1/125 de seconde”, Zoom, avril, 1981, p. 92-99, 127. ⑧ 클라인은 자신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 “나의 사진들은 어떤 고전주의를 들추어낸다. 아마 사진들이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난 Piero della Francesca를 참조하였는데 사진에 있어 나의 항구적인 의도들 중 하나는 1/125 초의 속도로 일종의 프레스코 벽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난 의도적으로 기념비와 벽화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자신의 예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프레낭 레제(Fernand Leger, 1881-1955)의 “인본주의”에 관계한다. 레제의 그림은 도시 사회의 저속성과 현대 산업 사회와 물질 사회의 병폐를 폭로하면서 인간의 사물화를 추상 기하학적 방식으로 풍자하였다. ⑨ 참고, Roland Barthes et la photo : le pire des signes, Cahiers de la photographie, Contrejour, Paris, 1990, p. 30. ⑩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gique, Cahier du Cinema / Gallimard / Seuil, 1980, p. 74.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군중 속에서, 뉴욕가 5번지, 1955년 (사진 3)롤링스톤 공연, 파리, 1982년 (사진 2)추수 감사절 행렬, 뉴욕, 1959년 (사진 4)1959년 5월 1일 노동절, 모스크바 (사진 5)뉴욕 이탈리아인 거주지, 1954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