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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9.09 수잔 손탁(Susan Son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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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09.07 cell in the city
  10. 2011.09.07 cell in the city

cell in the city

2011. 9. 9. 18:34 from 사진













어떤 양식으로 어떤 의도에 의해 작업했느냐는 물음으로부터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물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는 지평을

옮기는것 역시 이런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하는 한 방법일수 있을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세상을 끝없는 거울로 이루어진 방으로

신디셔먼의 그것처럼 우리가 아는 모든것들이 이미지인 그런곳으로 받아들인다

진짜의 경험이 있다고 믿을수있는, 개별 예술가의 신성한 시각이 있다고,

천재와 독창성이 있다고,믿을수있는 근거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것은 지상의 모든사상은

다 소모되었고 현재의 우리는 줄의 끝에 서있으며 우리 모두는

우리가 이미 본것의 포로라는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불안케하고 혼란하게하며

급진적인 생각임에 틀림없는데 이미지에 대한 무차별의 생산자라 할수있는

사진이야말로  이런 현상에 큰 부분을 기여했다는 사실 역시 쉽게 알수있다

 

                                             -앤디 그룬버그 [사진과모더니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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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 in the city

2011. 9. 9. 18:25 from 사진












디즈니랜드는 그 자신은 상상의 것으로 들어나면서 우리로 하여금 디즈니랜드 바깥의 것들이

실재인것으로 믿도록한다 하지만 실상 로스엔젤레스나 그밖의 마국땅 어디든 이제는 더이상

실재가 아니라 일련의 초실재 혹은 모조품이 되어있다 이제 실재에대한 그릇된 재현이

문제가 아니라 실재가 더이상 실재가 아니게 된것을 감추는것이 문제가 된것이다

                                                  

                                                                                -장 보드리야르-



















 

Posted by stormwatch :





인권과 문화를 위해 싸운 지성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1.28~2004.12.28)


“사진은 무엇인가, 신기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경우에서만 충격을 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름을 할 때 판돈이 자꾸 올라가는 것처럼, 충격을 담은 사진이 자꾸 퍼져 나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전율을 느끼지 않게 된다.”(1977년 수잔손탁 저서 ‘사진론’ 중)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2003년 수잔손탁 저서 ‘타인의 고통’ 중)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비평가인 수잔손탁(Susan Sontag)이 지난해 12월 28일 향년 71세의 나이로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30여년간 암과 싸워왔으며, 이 과정에서 질병이 대중문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기술한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1978년)을 펴내기도 했다.
수잔손탁은 프랑스의 롤랑 바르트와 독일의 발터 벤야민과 더불어 사진에 관한 비평서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사진론’(On Photography)과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을 펴낸 저자이다. 또한 소설가이자 수필가, 영화제작자, 무대연출가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문화 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사회 제반의 문제에 명료한 해석을 제시해왔다. ‘On Photography’는 한국에 ‘사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에 소개되고, 90년대에는 롤랑 바르트의 글과 함께 ‘사진론’이라는 제목으로 재번역되어 출간돼, 사진 철학의 담론서로 읽혀져 있다. 88년 미국 펜클럽 회장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국제 펜대회에 참석하기도 한 그녀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구속 중이던 김남주, 이산하 시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월간사진은 수잔손탁의 죽음을 전한 외신을 인용해, 그의 생전 활동과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한다. <편집자>


 


수잔손탁은 1933년 1월28일 뉴욕에서 태어나 1966년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가하는 복수이다”라는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와 69년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 등 두권의 비평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전미도서비평가상을 받은 ‘사진론’(On Photography)과 2000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인 ‘미국에서’(In America)를 비롯해 4권의 평론집과 6권의 소설 그리고 수종의 에세이, 영화 시나리오, 희곡 등 수많은 화제작을 집필했다. 그녀의 책은 현재 전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읽히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 작가들이 사회 문제에 제 목소리 내지 않을 때 수잔손탁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남길 원했다. 수잔손탁의 현실참여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1966년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백인은 인류에 암적인 존재다.”, “미국은 대량 학살 위에 세워졌다”처럼 베트남전의 허구와 미국의 은폐된 역사를 고발했다. 또 911테러 이후에는 부시행정부를 비판하고 미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는 되지 말자’는 뉴요커지 기고를 통해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이 강하다는 건 누구도 의심 않는다.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며 일방주의를 맹비난했다. 또한 그녀는 이같은 말도 덧붙였다. “문화와 문명, 자유세계에 대한 비열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동맹 관계에 대한 세계의 분명한 자기 방어이다.”, “(도덕적인 일반적 가치의)용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테러를 가한)그들은 학살자일진 몰라도 겁쟁이는 아니다.” -AP통신


 


세 번의 암을 이겨낸 후 수잔손탁은 93년 여름 전쟁 중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곳서 그녀는 전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하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다. 앞서 베트남전쟁의 찬반양론이 날카롭게 맞서는 동안 그녀는 대담하게 하노이를 찾았고, 911 이후에는 테러범은 ‘겁쟁이는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같은 극단적인 정치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을 받아왔다. 시카고대 데보라 넬슨 교수는 “나는 그녀가 가장 훌륭한 비평가로 기억되리라 확신한다”며 “그녀의 저서는 30년, 40년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깨우침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감각과 장르 묘사에 탁월한 힘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수잔손탁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똑같이 진지함과 통찰력을 갖고 연구했다. 넬슨교수는 “전문화 시대에 그녀는 최정점에 선 전문가였다. 그녀는 예술가, 비평가, 실천가, 정치적인 좌와 우 어디에도 속하길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그녀는 떠났지만 인류에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와 아방가르드예술을 보는 방법을 남겼다”고 전했다. -시카고 마룬


 


그녀의 가장 최근 저서인 ‘타인의 고통’은 전쟁과 재앙 이미지에 관한 장편 비평집으로 지난해 출판됐다. 또 지난해 쓰여진 단편 비평문인 ‘타인의 고문’은 아부그라비 수용소에 갇힌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미군의 고문에 관한 글이다. 수잔손탁의 글쓰기는 전통적인 전후 비평주의를 근본적으로 파괴한 의의를 남겼다. 그녀는 예술연구에 감각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했고, 내용 보다는 심미적인 형태를 옹호했고, 고급 저급 문화 사이의 경계를(대단히 파괴적으로) 흐물어 뜨렸다. 사려 깊고, 사색적이고 때로는 도발적인 그녀의 글쓰기는 들쑥날쑥한 경계와 필연적인 주제를 안고 있는 현대예술의 소외와 절망을 선험적으로 탐구했다. 컬럼비아 대학의 단토 교수는 “그녀는 우리 시대 인간 삶의 깊은 문제에 문학과 철학적인 지성으로 종사했다”며 “그녀는 냉정하거나 객관적인 비평가라기보다, 모두에게 의미를 갖는 이슈에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너무 엄숙한 지성인과 달리 수잔손탁은 직접적이고 시의적절한 그리고 도발적인 문장과 발언, 그리고 영상시대에 적합한 외모 등으로 대중적인 유명인이었다. -뉴욕타임즈


 


다섯 살에 부친이 중국에서 죽었고, 알콜중독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잔손탁은 2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또한 그녀는 연극과 영화를 연출했으며, 미국의 세계 침략을 맹렬히 공격하는 한편 자신의 병과 싸워야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자랐으며, 월반을 거듭해 16세에 시카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소르본 대학과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보는 것처럼 나는 책 읽기를 사랑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수잔손탁은 26세에 뉴욕으로 돌아와 60년대 문화비평 특히 도발적인 에세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96년까지 보스니아 내전이 극점에 달할 때 사라예보에 머물며 국제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1960년대에는 목소리 높여 베트남전쟁을 반대한 편에 섰으며, 미군의 폭격이 절정에 달하던 68년 5월 하노이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같은 해 쿠바를 방문해 쿠바의 인권문제에도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1950년 사회심리학자인 필립 리프와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줄곧 혼자 지내왔으며, 작가로 알려진 아들 데이비드만이 유일한 혈육이다.
-AFP통신


(월간사진 2005년 2월호 게재)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이미지를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그러나 카메라에 찍힌 이미지에 적용해본다면 이 주장은 그럴 듯하지 않다. 사진이 지닌 이중적 힘, 즉 기록을 할 수 있는 힘과 시각예술 작품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이 서로 상충된다는 주장이 있다. 고통을 묘사해 놓은 사진이 아름다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은 원래 그대로의 피사체에 가야 할 눈길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매체 자체에 관심을 쏟게 만들어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진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이런 사진이 보내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한편으론 이런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 얼마나 장엄한 장관인가’라고 외치는 것이다.(타인의 고통 중)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이런 고통이 재현된 예술품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 격렬한 것이다. 이런 욕망 안에서 고통의 재현물은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못한다. 의도했든 안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또는 사물)의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성질의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순간을 쪼개내어 그것을 정착시킴으로써 모든 사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사진은 허구화한 연재이며 부재의 증거이다.(사진론 중)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 중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 한때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와 아시아인들은 런던, 파리 그밖의 유럽 수도들에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대중에게 공개되곤 했다.(타인의 고통 중)   


사진은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을 얇게 져며낸 조각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해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공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도록 도와준다. 휴가 중이거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사진론 중)









Posted by stormwatch :





아홉 번째 테마 사진과 관객 그리고 푼크툼의 확장
 
  우리 세상은 수많은 신호(sign)들로 가득 차있다. 또한 우리의 삶 역시 끝없는 신호의 연속에 있다. 여기서 삶이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 현상만이 아닌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흔히 신호라고 하면 비를 알리는 먹구름의 출현이나 감기의 증세로서 두통과 같은 자연현상은 물론이고 교통표지판, 출발을 알리는 깃발, 컴퓨터 모니터의 아이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초인종, 개 짖는 소리 등과 같은 일상적 신호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는 것들로 일반적으로 학습과 약속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신호들이다. 사실상 이런 경우에는 신호라고 말하기보다 어떤 분명하고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는 일종의 문화적 코드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어떤 신호들은, 특히 상황 속에 나타나는 신호들은 그 지시대상이 일반적인 코드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다소 불확실하고 모호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의 신호 개념은 단순한 코드로서의 신호가 아닌 무엇을 암시하는 상황적인 신호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이유와 원인이 분명한 하나의 약속이나 메시지로서 신호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리고 뭔가 불확실한 원인이나 본질을 암시하는 현상들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현상들 또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 예컨대 경제위기를 알리는 환율의 폭등, 교육의 위기를 알리는 조기유학과 사교육의 열풍과 같은 사회적 현상들, 심지어 어떤 상황에 대한 불길한 징조나 직감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신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하는 신호의 개념은 단지 통신수단으로서 신호만이 아닌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특히 정신적 현상을 중요시하는 철학적 개념으로 본 일종의 존재론적인 “현상”(자연현상)1)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라는 같은 용어를 언급하더라도 위와 같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신호 즉 코드와 약속에 관계되는 신호(양의 세계)와 단지 불확실한 본질에 대한 일종의 암시로서 나타나는 신호(음의 세계)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자의 경우는 발신자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신호(발신 신호)인 반면 후자의 경우는 언제나 발신자의 불확실한 의미를 가지면서 수신자의 경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신호(수신 신호)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사실주의 형태로 출현하는 사진은 그 지시대상이 분명한 코드에 관계하든 불확실한 어떤 대상을 암시하든 여하간 그 자체가 신호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모든 기호학적 현상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또한 기호학적 논리(구조주의)로 사진의 모든 미학적 현상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사진을 기호학적인 분석에서 하나의 신호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진적 사실주의만이 가지는 특수성, 즉 현실에 대한 “절대적 복사(analogon)”와 그로 인한 “신빙성(Ca a ete/ 과거사실의 절대적 증거)” 쉽게 말해 사진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실에 존재하는 신호의 증거로 인식(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 발명 이후 몇몇 이론가들 특히 심리학이나 언어학에 관계하는 연구자들은 사진을 자신들의 이론적 모델로서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진의 개념은 대부분의 경우 전달적 매체로서 신호가 아니라 무의식이나 기억과 같은 사실상 인간의 형이상학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암시적인 신호에 관계하였다(이럴 경우 사진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이론적 은유로 간주된다). 또한 벤야민의 아우라의 발견에서부터 앙드레 바쟁의 자동생성 그리고 바르트의 집요한 사진적 추적 혹은 뒤봐의 “사진적 행위”나 클라우스의 “사진적인 것” 역시 사진을 “존재의 암시적 신호”로 간주하는 조건을 달고 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신호로서의 사진을 분석하기 위해 우선 기호학적 견지에서 신호의 일반 체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신호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부재 속의 존재의 암시”를 말한다. 어떤 대상의 출현과 부재의 관점에서 볼 때 흔히 지금 우리가 감지하는 무엇(제스처, 오브제, 사건이나 사실)이 거기에 있다(in praesentia)라고 하는 것은 출현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감지할 수 없고 부재하는 것에 대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무엇”이 있다(in absentia)라고 할 때 “알려주는 무엇”은 출현이 아닌 존재의 신호다. 라랑드(Lalande) 철학 사전에서 신호의 일반적 진술은 “하나의 신호는 감지 불가능하거나 부재하는 사물의 자리에 있는 정신적인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호는) 어떤 작동을 실행하기 위하여 다른 신호들과 결합할 목적으로 이용되는 하나의 물질적인 형태(figure) 혹은 감지할 수 있는 오브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퍼스(C.S. Peirce)가 제안한 신호의 일반적 정의에서도 “하나의 신호는 어떤 관계 혹은 어떤 명목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대신하는 무엇이다”2)라고 진술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정의들은 공통적으로 부재하는 무엇(지시대상 ref erent)을 알리기 위한 무엇(지시 혹은 참조 ref erence / 지시소 deictique)을 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신호는 홀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며 언제나 그물망과 같이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에 의해 통합된 신호 체제 속에 있다.3)

  신호들의 분류와 체제는 신호를 보는 관점에 따라 혹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신호는 공통적으로 어떤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신호를 앞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신호의 세계 즉 신호 체계는 신호와 그 지시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비에 대한 구름과 같이 지극히 자연적인 신호에서부터 심지어 어떤 자극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직관적인 신호들까지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예컨대 일반적인 분류에서 의도적인 신호들(생명의 신호, 우정의 신호)을 비의도적인 신호들(감기에 대한 열 혹은 피곤에 대한 창백)로부터 구별한다. 언어 소통에 따른 신호의 구별도 있는데 무언(sourds-muets)의 신호가 있는가 하면 다른 것들은 말(langage parle)로 언급되는 신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신호의 분류는 신호와 그 지시대상과의 작동(기능)적인 측면에서 본 신호의 정의 즉 논리적 관계에 따른 분류다.4) 이와 같이 상황적인 의미과정에서 본 신호의 정의는 “하나의 신호는 우선 그것이 행하는 것인데 이는 그 신호의 의미다”5)라고 정의한 19세기말 퍼스의 유형학적인 분류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퍼스는 신호들을 유사성에 의한 도상(icon)과 문화적 코드에 관계하는 상징(symbol)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특별한 신호인 지표(index)로 나누고 있는데(퍼스의 유형학적 분류) 오늘날 가장 일반적인 신호체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퍼스의 유형학적 분류는 20세기 초 당시 새로운 학문이었던 기호학(semiologie)이 형성될 때부터 70년대 말까지 당시 지배적이었던 소쉬르(P. Saussure)의 기표와 기의로 대변되는 구조주의 관점 즉 신호의 이원론적 관점으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비주류)되었다. 그때까지 단지 신호의 특수한 유형으로만 인식되었던 퍼스의 존재론적 신호의 발견 즉 인덱스 재발견은 당시 70년대 말 코드와 의미 그리고 이데올로기 분석에 몰두했던 기호 - 구조주의자들을 소위 후기 구조주의의 삼원론적 신호체제(기표 기의 지표)로 이동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엄밀히 말해 이는 70년대 물질과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갖는 구조주의자들이 그들의 분석적인 모순과 한계 속에서 그때까지 구조주의의 지배적인 관점인 코드와 이데올로기의 논리적이고 의미론적인 분석을 넘어 오랫동안 잊혀졌던 존재론적 대상(음의 세계)의 추적의 가장 좋은 이론적 배경으로서 퍼스의 지시론적 개념을 도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진적 사실주의(사진과 영화의 영상 이미지)는 그때 많은 연구자들(대표적으로 바르트와 에코)의 이러한 추적에 있어 가장 좋은 이론적 모델이 되었다.6)

  여하간 그때부터 사진을 이해하는 관점에 분명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상징과 코드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단순한 자국으로만 이해되는 특수한 매체로 생각하는 관점 이는 곧 의미론적 관점에서 지시론(혹은 존재론)적 관점으로의 개념적인 이동을 말한다. 가령 어떤 작가가 장미를 찍은 사진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진은 어떠한 조작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장미를 재현하고 있을 때 기호학적 측면에서 읽을 수 있는 경우는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재현된 장미는 도상(icon)으로서 그 재현대상과 분명한 유사관계 속에서 대상의 절대적 복사물(현실의 거울로서의 사진 P. Dubois)로 인식되는 관점이 그 첫번째이고  두번째 관점은 찍혀진 장미의 해석학적인 측면이다. 즉 장미는 문화적 상징(symbol)으로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정열이나 사랑과 같은 공통된 의미를 던지는 하나의 코드로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의미론적인 관점(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 P. Dubois)은 언제나 작가와 재현된 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사진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때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나 주관적 견해와는 전혀 상관없는 거의 일방적인 사진 메시지(의미의 폭력)를 부여받는 결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을 하나의 인덱스로 볼 때 찍혀진 장미는 모래 위의 남겨진 발자국처럼 단지 사진적 장치7)에 의해 생산된 자국(trace)으로 출현한다(현실의 자국으로서 사진 P. Dubois). 이때 장미는 마치 모래 위의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규정할 수 없듯이 특별히 사진의 경우 작가가 왜 찍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사실상 전혀 알 수 없다. 즉 이것은 특정한 “의미의 상실”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진은 작가의 번역이 아니라 대상의 선별에 의한 절대적 복사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작가가 재현한 장미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름다움 사랑 정열과 같은 공통된 코드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경험과 주관적 인상을 배경으로 하는 통속이나 속물 혹은 환상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상에 대한 재현일 수 있다.
 
그때 재현된 대상 즉 주제로서 선별된 장미는 산 위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같이 단지 암시적인 신호나 징후에 불과할 뿐이고 그 지시대상은 대부분의 예술사진에서 대중의 코드를 초월한 무의미의 메시지를 은닉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심벌이나 상징적 문화적 코드로만 이해될 것이고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만약 재현된 장미를 문화적 상징의 상용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비평가(텍스트)로부터 강요당한다면 장미는 사실상 판박이 이상 읽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찍혀진 장미는 재현된 상황 속에서 사진의 신빙성이 유발시키는 사진의 “실용성(pragmatique)” 즉 “푼크툼의 확장”에 의해 관객의 논리와 의미 사이의 공백을 뚫고 작가의 진정한 예술적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은 의미와 의미 사이에 은닉된 바로 이러한 탈코드의 추적에 있다. 그것은 벤야민의 아우라의 발견 이후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누명으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탈코드 메시지에 대한 존재론적 재발견인 셈이다.    

  이와 같이 사진을 자국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오늘날 사진을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사진 읽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을 놓고 있는데 그것은 “사진은 본질적으로 발신신호가 아니라 수신신호라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가 사진 이미지의 개념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볼 때 사진적 장치의 모든 진술은 어떤 이미지든 여하간 인간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사진은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 개념적 본질에서 이해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날로그(analogue)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digital)이다. 우선 아날로그적인 본질은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과의 유사관계에서 사진을 이해하는 개념(도상) 혹은 어떤 메시지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시각적인 작품으로서 이미지를 생각하는 개념(상징)이다. 다시 말해 어떤 양식 혹은 규정된 의미로부터 재현에 일치하는 모든 것을 사진 예술로 이해하는 사고들을 말한다 : 사진 이미지는 기술적 계열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단지 코드화 되어질 뿐이라는 사고, 사진 읽기에 있어 모든 기호의 기능적인 측면을 우선으로 하는 언어학적인 사고 방식 혹은 우연과 특이함에 대한 발견의 즐거움. 이와 같은 사고들은 유사(analogue)와 재현을 동일시하는 개념으로 간주되는데 인식론적 측면에서 사진과 그림의 구별(특히 조형적인 측면)을 모호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방식에 의한 모든 사진적 분석은 결과물로부터 방출되는 의미적인 “발신”에 있는데 그럴 경우 사진의 대상은 거의 대부분 특이함과 이상함에만 관계한다. 그때 사진은 신호와 그 지시대상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 속에서 일방적인 발신신호가 된다.

  그러나 사진을 수신신호로 보는 것은 사진의 디지털(지시 혹은 지침)적인 본질에 관계하며 사진의 이해와 분석을 작가와 사진의 관계가 아닌 사진과 관객의 관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관점의 변화는 사진만이 갖는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개념 즉 한편으로 퍼스의 기호학적 카테고리의 인덱스와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수신신호의 특징인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해된다(P. Dubois). 사진 이미지는 어떤 메시지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단순히 화학-물리적인 결과 즉 “자국”으로 이해되는 개념으로 작품의 결과로서 메시지의 표현이 아니라 실질적 사건이나 사실의 지표(index)로서 지시적인 이미지(흔히 표상이라고도 한다)일 뿐이다. 그 점에 관해 필립 뒤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 “사진적 이미지는 그 사진이 있게 한 행위 그 자체 이상 생각할 수 없다 (...) (재현된 사진 이미지의) 지시적인 상황과 분리될 수 없는 일종의 절대적 행위-이미지로 간주되는 사진은 그것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실용적인 본성을 단언하는데 결국 사진은 우선 그 지시에서 의미를 찾는다”8).
 
다시 말해 사진은 사진적 행위의 결과로서 출현한 자국 위에서 우선적으로 객관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 자국의 상황(연기 발자국 혹은 장미 등의 인덱스)에 관련된 관객의 주관적 의미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예 도판 1). 그래서 사진 이미지 그 자체는 사실상 메시지가 아니며 의미적 관점(해석이나 번역)에서 사진은 텅 비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의미적으로 텅 빈 자국은 즉각적으로 관객의 주관적 의미로 채워질 것이다. 그때 사진 이미지는 관객의 연상 유도체 역할을 하는 셈인데 이는 사진적 사실주의의 신빙성이 관객에게 강요하는 “실용적인 유연성”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찍혀진 자국의 실용적 차원은 사진적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관객으로의 일방적인 방출이 아닌 수신자의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수신신호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진적 신호를 방출적 차원에서 정의하는 기호학적 틀(구조주의)에서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를 정확히 분석한다는 것은 사실상 모순이고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영상 이미지의 출발점이 되는 사진은 본원적으로 그 절대적 신빙성으로 인하여 관객의 주관적 해석 즉 자신의 경험과 경향을 통하여 연상의 환유적 확장(푼크툼의 확장)을 갖게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진 이미지를 더 이상 일방적인 메시지의 방출이 아닌 수신 신호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흔히 우리가 사진의 제한된 프레임에서 재현된 대상이 주는 사진의 연속성도 결국 관객의 주관적 연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은 특징적으로 환유적 확장(주관적 “경향”)을 가지는데 흔히 대중매체 (특히 현시광고)가 관객에게 강요하는 연상의 은유적 확장(의미와 상징의 연속 : 일방적인 의미전달의 폭력과 조작을 동반하는데 이는 오늘날 주체상실 혹은 자아상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과는 대조를 이룬다(움베르토 에코). 지하철 안 광고사진이 보여주는 지극히 평범한 대상이나 전혀 특이함이 없는 제스처라 할지라도 거기에 관객의 체험적 의식이 투영되는 순간 자신의 회한과 아쉬움에 눈물을 적시기도 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관객의 주관적 연상의 폭발 즉 푼크툼의 확장에 빚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수신신호로서 사진을 예술적 매체로서 보다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메시지로 만들고 있다. 

  결국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사진적 메시지는 의미와 의미의 연속적 조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들 사이의 어두운 동공에 은닉된 존재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의 “밝은 방”에서 어두운 동공(음영의 존재들)을 환히 비추는 것 역시 주관적 연상에 의한 감정의 폭발이며 또한 필립 뒤봐는 “사진적 행위”에서(80년대 보다 발전적인 문맥에서) 사진은 사진 촬영에 있어 전후 그리고 촬영 순간의 모든 조합에 의해 형성되는 “의미의 증거(une preuve de sens)”가 아니라 단지 “존재의 증거(une preuve d'existence)”라고 언급하고 있다. ●
 
<주>
1) 인공의 개념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자연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볼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물질중심의 양의 세계에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적 현상으로만 파악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산 강 바다 비 바람 홍수 가뭄 등과 같은 물질적 대상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리와 인식을 벗어난 음의 세계까지도 인정하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의 개념은 단지 물질적 대상 뿐만 아니라 어떤 현상의 속성 혹은 천성과 같은 본질적인 것 심지어 절대자로서의 신, 영감, 직관 혹은 통찰력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대상까지도 자연으로서 간주하는 보다 거시적인 정신적 개념이다(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 신스콜라주의자들과 같은 존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개념은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단순한 물질적인 자연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개념은 현상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원칙에서 이해되는데 이는 논리와 실증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고 현상을 본질과 동일시하는 유물론자들의 자연개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2) C. S. Peirce, Ecrits sur le signe, Seuil, Paris, 1978.

3) Martine Joly, Introduction a  l'analyse de l'image, Nathan, coll., Paris, 1993 / Martine Joly, L'image et les signes, approche s miologique de l'image fixe, Nathan, coll., Paris, 1994, Chapitre I 참조

4) 예컨대 “신호는 그 두 개의 안면 사이의 서로 다른 논리적인 관계들을 놓고 있는데 에코의 예를 빌리자면 이러한 관계들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 x = x 이다는 일치(identificate)관계 / 붉은 깃발 + 반달 모양의 낫 + 망치 = 공산주의라는 동등(equivalence)관계 / 불이 있기 때문에 연기가 있다는 연역(deduction)관계 / 혹은 총이 있기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귀납(induction) 혹은 추론(inf erence)관계.” Umberto Eco, Semiotique et philosophie du langage, trad, fr., PUF, Paris, 1988.

5) 같은 책

6) 사실상 퍼스는 지표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사진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이론적 모델인 지표적 속성(index)을 위해 도입한 것이지 사진이 함축한 존재론적 이론이나 의미를 초월하는 무의미(non sens)를 설명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70년대 말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사진을 그들의 이론적 모델로서 도입한 것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본 사진의 지표적 속성 그 자체의 분석이 아니라 그것이 함축하는 존재론적인 메시지 즉 "탈코드"의 추적이었다. 그래서 사진-인덱스론은 퍼스의 인덱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사진적 사실주의를 하나의 기호체제(사진은 모든 신호의 유형을 포함한다)로 보았을 때 인덱스의 지시론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이해하고 읽는 관점을 말하고 있는데 결국 사진은 마치 산 위에서 피어나는 연기에 비유되고 그 지시대상은 재현된 신호와의 관계에서 일치와 동등이 아닌 다수의 원인성을 이끄는 연역이나 귀납적인 추론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의 해석을 하나의 정답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각자의 경험적인 경우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7) 이때 사진기는 인간 행위의 수단으로 단순한 기계적 역할과 구분하기 위해 “사진적 장치”라는 용어를 쓴다, Jean-Marie Schaeffer, L'image precaire, du dispositif photographique, Edition du Seuil, Paris, 1987.

8) Philippe Dubois, L'acte photographique, Nathan, paris, 1990, chapitre II
 
글·이경률
(사진이론 박사)
 
도판 1 : 로버트 프랭크, US 285 New Mex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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