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11. 02:28 from 레크레이션
1933년 출판업자 알베르 스키라 (Albert Skira)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주 호화로운 잡지의 출판을 꿈꾸고 있었다. 호화롭다는 말은 잡지의 값비싼 장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잡지의 편집과 내용을 위해 참여한 예술계 인사들 역시 호화 인사여야 했다. 대중들의 혹은 문화계 속물들의 값싼 인기나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계 예술계의 기반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그야말로 빛나는 인사들이 잡지의 편집에 기여해야 했다.
스키라는 잡지이름을 정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 바로 곁에 작업실이 있는 25세 연상의 피카소와 상의를 했다. 피카소는 기존 예술계를 일신하려는 스키라의 의도에 ‘깃털 비 (Plumeau)’라는 잡지명이 적합하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로제 비트락 (Roger Vitrac)이 나중에 제안한 ‘미노타우로스’가 덜 가볍다고 판단하고 스키라와 피카소는 이것을 잡지 이름으로 정한다.
이 잡지의 편집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한 그룹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었다.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공산주의 혁명과 비합리적, 비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개발하려는 초현실주의 혁명 사이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1935년에 자살한 르네 크르벨 (Rene Crevel)을 통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알게 된 스키라는 서구 문화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이들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피카소, 마티스와 더불어 잡지의 편집에 적극 끌어들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교황’ 혹은 ‘마법사’의 역할을 행한 앙드레 브르통 (Andre Breton), 시인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 운동에 세례를 받은 철학자 로제 카이우아 (Roger Caillois), 미셸 레리스 (Michel Leiris) 등은 정기적으로 「미노타우로스」에 그들의 글들을 기고했고,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후앙 미로 (Juan Miro) ,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달리 (Dali), 쟈코메티 (Giacometti) 와 같은 예술가들도 글이나 그들의 작업을 수시로 게재했다. 그리고 브랏사이 (Brassai), 만 레이 (Man Ray), 라울 위박 (Raoul Ubac)은 잡지의 사진 도판을 담당한 사진가들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만 레이의 <미노타우로스>는 1935년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 7호의 안표지를 장식한다. 머리가 어둠 속에 묻혀버린 한 여자 혹은 남자의 상반신은 강력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속에 있다. 남녀의 구별을 용이하게 하는 머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미노타우로스는 팔과 가슴의 애매한 근육구조와 풍성한 겨드랑이 털, 그리고 그림자 속에 잠겨버린 복부 때문에 남녀양성적 존재, 혹은 성의 특색이 없는 존재로 제시된다. 이러한 재현양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를 초현실주의적으로 개작한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몸과 황소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해괴망측한 탄생의 이야기를 갖는다.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재물로 바치기로 한 신탁 황소를 재물로 바치지 않는다. 포세이돈은 이에 대한 징벌로서 미노스의 아내, 파지파에가 이 황소를 겉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파지파에는 황소에 대한 욕정을 풀기 위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장인인 다이달로스에게 실물과 똑같은 암소를 만들게 한 후, 그 뱃속에 들어가 사랑에 빠진 황소와 수간을 한다. 이 교접을 통해 미노타우로스는 태어나고, 분격한 미노스는 다이달로스가 건축한 미궁에 이 반인 반수를 가둔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미노스는 해마다 혹은 9년마다 7명의 청년과 7명의 처녀를 넣어 주게 되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아리안의 실’이라는 이야기가 비롯된다. 영웅 테세우스는 아리안이 건네준 실뭉치의 실을 풀면서 깜깜한 미궁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의 어둠을 빠져 나온다.
그런데 파지파에와 황소의 엽기적 사랑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도 아주 특이한 존재로 남는다.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반인 반수는 사람의 머리와 짐승의 몸체를 갖는 반면, 오직 미노타우로스만이 짐승의 얼굴과 인간의 몸을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노타우로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반인 반수들은 인간의 머리로 사고하고 짐승의 몸으로 행동하는 반면, 미궁의 괴물은 짐승의 머리로 사고하고 인간의 몸으로 행동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노타우로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황소에 대한 정욕에 미쳐버린 그의 어미처럼 그는 이성의 통제, 합리적 계산, 논리적 사고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이다. 그는 동물로서 욕망하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존재의 표상이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로제 비트락이 스키라에게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연계를 기대하며 새로운 잡지의 이름을 ‘미노타우로스’로 추천한 것은 따라서 우발적인 것도, 단순한 기지의 산물도 아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로트레아몽 (Lautre amont 1846-1870)의 『말도로르의 노래 Chants de Maldoror』에 나오는 환상적인 동물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있었고, 동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인간의 야수성의 탐구는 초현실주의의 일반적 주제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성을 수행하는 신체기관이 황소머리로 대체된 미노타우로스를 자신들의 예술적 활동의 표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구를 지배한 이성주의, 합리주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머리가 사고하는 이성과 논리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욕망과 광기의 화신이었다.
서구는 17세기와 더불어 철학, 심리학, 정신의학 등 제 학문의 영역에서, 그리고 사회를 조직하고 경영하는 기술에 있어서 오직 이성의 언어, 합리적 행동만을 존중하고, 광기의 행동과 무의식의 언어를 무시하고 탄압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광기는 철저하게 일반의 시선에서 격리되고 감금되었으며, 무의식에서 발원하는 욕망은 추잡하고 위험한 것으로 금기시 되었다. 그리고 이성의 합리주의와 논리적 사고로 해명될 수 없는 인간 활동의 영역, 사고체계는 미신으로, 거짓으로 사회에서 추방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이 완성되자, 서양의 문화사, 서구의 사회사의 전개는 합리적 이성의 제국주의가 꿈, 욕망, 무의식, 광기의 세계를 억압하는 양상으로 철저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적 사고와 논리중심주의는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르주아 계층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와 맞물려 있었다. 데카르트적 이성중심주의가 모든 비이성을 문화의 영역 밖으로 추방해 버리고, 반이성의 입을 봉쇄하는 권력으로 자리잡는 것과 병행하여, 합리주의적 사고, 논리적 추론을 신봉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유럽의 경제적, 사회적 지배를 점진적으로 확고히 해나갔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의 지배를 정치적, 군사적 통치권으로 연결시키는 급진적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 계층에 의한 유럽의 지배는 역사적 기정 사실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지배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심각한 위협은 언제나 일시적이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1914-1918)은 많은 지식인, 젊은 예술가들에게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야기했고, 이성 중심적 서양문명의 한계를 근본적인 시각으로 되 돌이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의 사회지배를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체를 부각시켰다. 여기에서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전통적 서구문명의 위기와 몰락의 가능성을 보았고, 인간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인습적 사고의 틀을 파괴하고자 했다. 합리적 이성과 논리에 기반을 둔 모든 부르주아 사회의 규범을 거부하고, 인간의 삶을 새롭게 갱신할 사고, 예술, 제도를 암중모색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심판관’이라 불린 앙드레 브르통에게 있어서 인간의 새로운 삶을 보장해줄 메시아적 메시지의 보고(寶庫)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과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인 사상과 이상에 대하여 차원 높은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트로츠키 (Trotski,1879-1940)가 쓴 『레닌』이었다. 프로이드는 부르주아의 사회가 규정한 인간관을 일거에 전복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논리와 이성이 억압한 성적 충동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결코 이성이 지배하는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부조리한 욕망의 존재이다. 프로이드가 확립하는 새로운 인간관에 자극 받아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자들은 기존의 부르주아 사회가 규정한 ‘현실 원칙’에서 벗어나 ‘쾌락의 원칙’에 몰두하고자 꿈과 무의식의 세계, 충동의 세계를 탐색했다. 현실 원칙의 근간을 이루는 합리주의적 이성과 논리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17세기의 합리주의적 세계관 이전의 미신적, 마술적 세계관을 탐구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이성과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 원칙과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인 이미지, 우연의 사고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심리적 상태를 선호했다. 프로이드가 의식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행동들의 무의식적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발명한 자유 연상을 허용하는 최면 상태, 반수상태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개발하고자 몰두했다. 전제주의적인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날 때만이 ‘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초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프로이드가 기성의 윤리와 규범,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논리, 이성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면, 다시 말해 인간을 ‘현실’로부터 해방시켜 ‘초현실’에 도달할 분명한 이론을 부여했다면, 트로츠키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허구적이고 위선적인 부르주아 사회를 타개할 이데올로기로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비쳐졌다. ‘진정한 삶’을 위한 인간 사고의 변혁을 ‘초현실주의 혁명’이 담당한다면, 진정한 삶을 위한 세계의 변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이 행할 것이라고 브르통을 위시한 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믿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집권과 트로츠키의 실각으로 인한 소련의 전제주의적 노선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의 혁명에 대한 의구심과 갈등을 심화시켰다. 공산당의 입당과 탈당, 마르크스주의의 지지와 회의 등 1930년대 이후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혁명을 향한 노선은 지리멸렬해진다.
만 레이, 브랏사이, 라울 위박, 작크 앙드레 부아파르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은 1920년대 이후 간행된 수많은 초현실주의 저작물, 정기 간행물에서 그들의 사진을 통해 초현실주의 텍스트를 도해하고 설명했다. 특히 만 레이 (1890-1976)는 1921년 파리에 도착하여 마르셀 뒤샹의 소개로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인물과 빠르게 교류하면서, 초현실주의가 탐구하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 성적 충동의 세계를 작가들의 텍스트에 의거하여, 초현실주의 이론의 여파 속에서 여러 사진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시각화했다.
만 레이의 작업 중에서 우선 특기할만한 작업은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여섯 번째 노래의 한 구절이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초현실주의가 애호한 이질적 이미지의 병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사랑스러운”
그러니까 이 시는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이 전혀 논리적, 인과적 상호 연관성이 없이 서로 함께 마주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제 1 선언>>에서 1918년에 발표된 피에르 르베르디 (Pierre Reverdy)의 글을 인용하면서 초현실주의가 애호하는 이미지를 분명히 했다.
“이미지는 (...)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키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접근된 두 개의 현실의 관계가 보다 거리가 멀고 적절한 것일수록 이미지는 보다 강력해질 것이며, 더 한층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즉 “수술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상호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을 접근”시킬 때 초현실주의가 기대하는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띤” 이미지가 태어난다. 만 레이가 예술을 반이성, 비이성을 구체화하는 행위로 규정한 다다이즘의 주동자, 트리스탕 차라의 서문과 함께 1922년 출간한 포토그램 사진집, 『감미로운 평원 Les Champs d licieux』은 그러한 예의 전형으로 남는다.
두 번째로 만 레이의 사진작업을 특징짓는 것은 일상성 속에 내재한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이미지를 포착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남녀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사물들을 적절한 각도에서 잡아내어 불합리한 성적 충동이 꿈틀대는 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성에 대한 억압된 충동이 우리의 일상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명시한다. 세 번째는 기존의 윤리와 인본주의적 사고를 초현실주의의 이념에 비춰 비웃는 작업이다. 자살을 유머로써 예찬하기도 했고, 항문에 손을 얹은 여인의 엉덩이를 클로즈업한 후 <기도>라는 제목을 붙여 종교적 경건주의를 냉소했다. 솔라리제이션을 통해 체액을 방사하는 듯한 여인의 누드를 형상화 한 후 <사고에 대한 물질의 우위>를 선언하기도 했다.
189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만 레이는 파리에 도착한 30세 이후,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유명 예술가들과 적극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성가를 최고도로 높인다. 1976년 그가 파리에서 죽은 후, 여러 미술사가들은 그의 작업이 초현실주의의 핵을 형성하는 작업임을 인식하게 된다. 해서 장인적 노고가 결여된 유희적이고, 경박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그의 사진작업은 빠른 속도로 높은 컬렉션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가짜 눈물을 붙인 한 여인의 눈을 클로즈업한 <유리 눈물> (1930-33 경)은 1993년 19만 3천 불에 경매되었고, 1995년에는 26만 6천 5백 불에 경매되었는데, 최근에는 100만 불에 팔리는 기록을 남겼다. ●
글·최봉림(사진역사학 박사)
만 레이, <미노타우로스, Minotaure>, 잡지 「미노타우로스」, 1935, No. 7의 속표지 사진.
2011. 9. 11. 02:20 from 레크레이션
열번째 테마 사진적 재현과 형상이탈
앞서 언급된 아홉 가지 테마 내용들은 사진적 재현에 관하여 대체로 객체에서 주체로, 코드에서 탈코드로, 혹은 논리 중심에서 감각 중심으로의 사변적 이동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공통된 맥락은 한 마디로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의미적 규명으로부터 “탈퇴”를 말하는데, 이는 모더니즘의 “형상이탈(deconstruction de Forme)”1)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종의 “계열적(패러다임) 이탈”로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20세기 후반 소위 후기구조주의라는 사변적인 운동에 있어 가장 분명한 개념적 변화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한 “이성”에 대한 일종의 탈-구조주의적인 혹은 탈-계몽적인 사변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을 보는 관점 즉 철학을 크게 양과 음의 두 양대 산맥으로 나누어 볼 때(물론 이러한 구별은 엄밀히 말해 사실상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사회와 집단사회를 지배해 온 인식론(양의 세계)과 정신과 개체를 우선으로 하고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대상까지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는 존재론(음의 세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후기구조주의는 약간의 담론적인 모순이 있지만 구조주의의 개념적인 지주로서 간주되는 인식론적 사고로부터 이탈 즉 존재론적 사고로의 이동에 관계된다. 흔히 말하는 개혁이나 혁신은 과거에 규정된 의미의 탈당 쉽게 말해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모더니티)을 말하는데 이는 르네상스 이후 계몽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유효한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또 그러한 형상이탈의 연속에서 역사의 발전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이탈”은 분명히 지금까지의 진보적 이탈의 연속 즉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사변적(존재론적) 경향을 후기구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똑 같은 모더니즘 이탈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이성의 영역 밖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의미와 형상의 옷을 요구하는 인식론적 혹은 형상론적 관점(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에서 볼 때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탈을 탈-모더니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엄밀히 말해 인식론적 용어이며, 동시에 가장 최근에 양식과 의미의 옷을 수여 받은 새로운 모더니즘 개념인 셈이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의미로 하나의 예술적 양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정신)은 거시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존재론에 관계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몇 세기 전부터 (과학적 사고의 맹신으로 인하여) 단지 망각되고 소외된 존재의 재발견 혹은 그러한 인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록 과학적 인식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존재론(형이상학)을 오랫동안 철학의 큰 줄기로 간주하는 유럽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사변적 급변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반(anti)-구조주의 즉 후기구조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변적 이동은 과학적 논리를 기초로 한 인식론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종의 극복으로 이해되며 존재론적 관점(특히 유럽의 프랑스 철학)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대상들은 사실상 그간 오랫동안 인식론에서 무시되었던 비 인식적, 말하자면 비 상식적 대상들(음영들 ombres)이다. 그래서 의미와 논리에 익숙한 규명론자(말하자면 인식론자)들은 이러한 음의 실체를 “포스트”라는 새로운 의미의 옷을 입혀 흔히 또 다른 양식의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유럽의 존재론자들은 소위 포스트모던한 대상들을 단지 의미의 생성-변전(devenir-forme)에서 한 단계의 존재로 이해할 뿐이지 엄밀히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대상(실존 existence)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변적 대상을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을 상상으로의 복귀 혹은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 말할 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인식론적 관점)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탈-코드의 존재적 재발견은 흔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상”으로 이해되고 그 명칭도 당연히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념적 이해와 설명은 모더니즘과 전혀 다른 위치에 있는데 흔히 오랫동안 물질사회에서 소외된 (생성 혹은 질료)존재론적 개념으로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예술(창조)적 맥락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또한 당연히 존재론적 설명을 우선으로 하고 이론적으로 과학적 지식이 아닌 설화적 지식을 그 배경(장 프랑수아 료타르,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 1984)으로 하고 있다. 보다 더 정확한 사변적 이해를 위하여 우선 모든 대상을 논리와 의미 즉 과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의 철학적 개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모더니티(modernity / modernite)라고 하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중세 라틴어 “모데르누스(modernus)” 에서 유래하며 과거와는 다른 신식 혹은 새로움이라는 의미로 5-6세기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용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도입하였는데 한편으로 그 용어의 절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modernism) 혹은 모더니티(modernity)는 르네상스 이후 정확히 말해 1453년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과학의 진보 등 일련의 근대적 사건과 특히 18세기 계몽시대의 이성(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사고의 인식론)을 중심으로 세워진 가치관에 관련한다. 그래서 “모던”은 연대적으로 흔히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적 구분으로서 “근대(modern)”를 지칭하고 또한 개념적으로도 크게 계몽시대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사실상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 물질 중심의 사변적인 큰 패러다임을 말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 볼 때 상대적인 용어로 도입된 경우인데 그 개념적인 측면에서 “모더니티”는 각 시기마다 그 시대의 전통(규명된 형상)과는 다른 뭔가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마치 “신구 논쟁”처럼 언제나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한다. 즉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상대적인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 이때의 용어는 “현대”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전통적인 형상(Form)에 도전하고 혁신을 이루어 내려는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형상이탈” 혹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진보나 혁명”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모더니즘 관점에서 19세기의 현대성과 20세기의 현대성은 분명히 따로 있으며 오랫동안 구조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각각의 새로운 정신들, 다시 말해 일련의 “형상이탈”들을 시간적으로 일종의 계단식 발전을 거처 궁극적으로 총체적 역사발전을 이루게 하는 사변적인 진보들로 간주하였고 또한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모더니즘의 역사성은 그처럼 상대적인 의미에서 마치 고대는 새로운 탄생의 토대가 되고 새로움은 언제나 또 다른 새로움을 위한 출발이 되듯이 언제나 미래지향성을 갖는다. 이는 곧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본질 즉 끝없는 새로움을 향한 발전적 역사성을 말한다. 그래서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의 유토피아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이나 기술적 발전에 있으며 여기서 진보라는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양식 혹은 공리(모더니즘의 역사성)를 말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이러한 진보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형상이탈들은 20세기를 접어들면서 일어나는데 예컨대 인상주의로부터 입체파, 다다, 구성주의, 표현주의 등을 생각할 수 있고 더욱이 아방-가르드의 표명은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로 간주된다. 이러한 진보적 사고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컴퓨터의 지속적인 기술 발전과 같이 유토피아를 향한 진보와 혁신 그리고 의미의 새로움에 관계한다.2) 그러나 형이상학에 대한 지나친 멸시와 지나친 물질 숭배 사상으로 인한 인간주체의 상실과 삶의 질적 문제에서 이러한 사고는 50년대 이후 분명한 사변적인 착각으로 나타난다 : 이성에 대한 지나친 맹신3),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켜 인간이 무한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과학적 사고(대표적으로 자연을 인간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시킨 산업혁명) 그리고 평등을 빙자한 자유 지상주의와 획일성, 진보의 필연성과 무한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4)과 같은 것들은 결과적으로 진보 사상과 자연지배 사상이 결합된 오늘날 모더니즘 정신 즉 과학적 사고의 배경을 이룬다. 결국 인간의 유한한 측면(나약함)을 제거하여 인간을 의도적으로 절대화한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화는 결국 20세기 후반 실패한 모험으로 끝나는데 이러한 모더니즘의 한계와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알다시피 1950년대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천명한 그의 모더니즘 공리5)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은 중세의 “신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을 “인간(이성) 절대주의”로 대치하여 당시 새로운 사변적 패러다임을 세웠는데 이는 오늘날 물질에서 정신으로 지향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이탈(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로 이성과 물질을 향한 전통적 형상에 대한 계열적 이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근본적인 특징은 흔히 현실의 재현성(repr esentativite), 의미를 갖는 목적성(signification), 새로움을 말하는 독창성(originalite), 작가의 주관성(subjectivite)을 들 수 있고 모더니즘적 작품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특징에 의해 인정된 모든 “상징적 미적인 작품”을 말하기도 한다. 사진의 영역에서 예를 든다면 20세기 사진을 외형적으로 하나의 코드화된 메시지 혹은 함축적인 상징(현실의 변형으로서 사진, 뒤봐)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이러한 보편적 의미와 과학적 논리를 배경으로 하는 모더니즘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스투디움(studi-um)은 이러한 논리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특히 오랫동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사진을 읽는 일종의 암호(코드)로 간주되었다. 또한 지금까지의 사진의 역사에서 역사의 나열은 단순한 논리적 사고에서 마치 퍼즐과 같은 짜집기 형식으로 인위적인 의미 부여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더니즘의 새로움은 우선 시간의 역사성과 의미 창출 특히 예술에 있어 매체 고유의 형식에 있으며 이러한 논리 속에서 모더니즘은 끝없이 새로운 형상을 위한 현재의 형상이탈에 모든 발전의 토대를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탈은 모더니즘의 형상이탈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 이탈이다. 쉽게 말해 형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재현성, 의미성 그리고 독창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총체적인 규칙과 과학적 지식들의 근거를 이루는 보편적 의미와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탈은 오랫동안 우리의 논리적 의식(상식)에서 소외되고 망각된 존재들(음영) 이를테면 무의미, 탈-코드, 동성애, 직감, 특히 사진에 있어 푼크툼(punctum)과 같은 비인식적이고 비상식적인 것들의 추적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러한 형상이탈은 르네상스 이후 모든 역사적 패러다임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계몽주의적 계열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이해된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극복, 비판, 진보, 개혁, 혁명)이라는 의미로서의 “포스트”(예를 들자면 후기인상주의 혹은 후기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그 자체로부터 정 반대 방향을 갖는 큰 형상이탈의 의미로서 포스트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급하자면 “탈 모더니즘적 현상들에 관한 사상적 포착”을 말한다. 또한 “인간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인간의 유한성과 역사적 구속성을 수용) 속에서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인 혹은 개체와 집단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유한성의 철학”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인간 유한성의 수용은 그간 소외되었던 많은 형이상학적인 것들, 즉 이성과 인식이 도달치 못하는 음영(ombres)에 대한 학문적 이해와 추적으로 간주된다.
그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본적인 정신은 현대 계몽주의자가 전제하는 인간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현재 무한한 가능성으로 착각하는 인간의 내재적 능력에 대한 우리의 거만한 태도를 다시 인간의 유한한 공간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의도로도 이해된다 : 오늘날 이성 절대주의의 물질사회에서 생태학적 위기, 인간성 상실, 자아상실, 주체와 주제의 증발 등은 냉철한 과학적 사고와 논리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만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한 증거임과 동시에 파멸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획일화된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무한한 새로움의 환상과 절대적 맹신을 축출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도를 갖는다. 그러한 정신을 “포스트모더니즘 상태(etre/esprit)”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계급적 개념을 탈피하고 그 정신적인 측면에서 “문화적 자유성(La liberte de la culture)”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정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일종의 형이상학의 회귀 혹은 망각된 존재(음영)의 정신적 추적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적은 어떤 새로운 의미 즉 양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근본적으로 무의미와 탈-코드에 대한 사변적인 추구임과 동시에 규명할 수 없는 존재의 발견과 제스처에 관계(오늘날 프랑스 철학의 가장 중심된 담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기구조주의자들(특히 생성 존재론자들)은 이러한 사변적 경향을 아주 더물게 포스트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닌)라고 언급하고 또한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적어도 유럽에서 좁은 의미로 단지 오늘날 물질사회에서 나타난 미국식 표현적 예술 양식(대표적으로 제프 쿤, 신디 셔먼, 낸 골딘 등)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들 의식에 오랫동안 익숙한 모더니즘적 혹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마치 또 하나의 모더니즘의 형상(물질적 형식이나 유행으로서 “후기”-모더니즘 ?)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그러한 획일적 유행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이해를 무의미와 비 인식으로 대변되는 존재론적 음영의 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사회와 집단 그리고 모더니즘의 본질을 담고 있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아직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모더니즘적 “의미적 수용”을 하기 때문이다. 최근 예술적 장르에서 선구자들이 표현적 대상으로 개척한 탈-모더니즘의 특징들 예컨대 자아상실, 주체의 증발, 도용, 모작, 혼용, 잡종 등과 같은 이슈들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물질사회의 한계와 모순으로부터 출현하는데 이것들은 일종의 자본주의의 병폐와 배설물에 대한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예술적 메시지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존재의 추적은 사실상 애초에 의미화 되지 않은 무의미 혹은 탈-코드의 “음영”이였는데 이때의 탈-코드적 추적은 모더니즘에 대한 정신적 이탈로 간주되고 동시에 그러한 정신적 행위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상태라는 문화적 예술적 가치를 수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 말(그러나 점진적으로 60년대 초부터) 예술의 전반적인 영역에 적용된 예술적 공통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대체로 1980년대를 돌면서 모더니즘에 익숙한 눈으로 볼 때 외형상으로 마치 모더니즘을 거부하는 것처럼 혼란과 혼동 그리고 다변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엄격한 현대성(모더니즘)과 결별하면서 형식의 자유(다양성)와 절충주의(혼용과 잡종) 그리고 환상주의(연출)적인 특징을 갖는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고갈되어 그 위기가 도래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적 표현 양식이나 형태 속에 보다 넓은 모더니즘의 재 번역과 전통적 요소와 절충을 행한다”(사전적 정의들, 라루스 사전). 이러한 재 번역과 절충은 모더니즘의 또 다른 의미의 형상으로 말하는데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에 대한 모더니즘적 번역인 셈이다. 왜냐하면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 없는 명분과 논리 없는 대상은 없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이러한 탈-코드들이 일단 음지에서 양지로 들어오면 다시 말해 일단 객관적으로 의미의 옷을 입고 나면 그때부터 탈-코드는 즉각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형상(형식)이 되어 평범과 진부를 향한 하나의 양식(bon sens)혹은 패러다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론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체는 단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형식으로만 보일 뿐이고 언제나 그것을 양식적 관점에서 모더니즘의 형상이탈로만 간주할 것이다.
그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미적 측면에서 그리고 조형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에서 모더니즘의 최신 유행이나 양식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표현양식과 기법이 아닌 자아상실, 동성애, 여성해방과 같은 최근에 유행하는 예술적 명분이나 슬로건 위에 첨단 기법이나 구성상의 획기적인 기술로 제작된 사진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적 행위는 사진을 음악으로 간주할 때 최신 대중가요 따라 부르기와 뭐가 다른가 ?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본 존재론적 테마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내용상의 의도는 사진적 행위에 있어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분명한 규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 혹은 정의라고 하는 진술도 사실상 “설득”이 아닌가 ? 다시 말해 이러한 것을 이렇게 찍어야 한다, 그러한 분류의 대상은 사진의 재현 대상이 아니다, 혹은 반드시 이러한 논리와 형태로 찍어야 한다라는 것들은 진리가 아니라 설득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명성은 흔히 즉각적으로 혹은 이미 또 다른 논리와 의미의 규칙(형상이탈 이후)을 만들기 때문인데 이는 양의 세계에서 끝없는 인식의 확장 즉 의미의 새로움과 규칙의 연속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재현의 대상을 그와 같이 분명하고 정언적인 형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개념에서 전위적인 새로운 규명에 관계하거나 혹은 특정한 대책이나 대안 없이 제시하는 비구체적인 진보에 관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언제나 시간적인 전후를 가지는데 가령 어느 시점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앞과 뒤는 신구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서로 역사적인 상관 관계가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분명한 역사성과 논리성을 갖고 또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양식(유행, 스타일, 방식 등)”을 동반하지 않는가 ?
결국 양식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은 분명한 사변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 : 전자의 경우는 모더니즘 시각에서 본 물질적인 실체이고 후자는 후기구조주의 혹은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사변적인 이해인 것이다. 예컨대 존재론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마치 숲 속에서 숲이 어디냐고 묻는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우리들의 테마들이 묻는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에 대한 답을 굳이 밝히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식 주위를 떠도는 수많은 의미 없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의미와 논리의 눈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어두운 동공(ombres)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
1) 여기서 말하는 “이탈”은 우선 어원적으로 파괴 혹은 분해(deconstruction)라는 전복적인 용어에서 번역상 의역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현재의 형상(가치관, 규명된 것, 인식, 유행 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없애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반대로 현재의 형상 위에서 보다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형상을 위한 사고의 이탈(소위 모더니티 즉 현대성)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은 흔히 말해 새로운 유행이나 패러다임 혹은 모든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데 모더니즘 계열에서 공통적으로 역사성과 미래지향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2) 인상파 그림들의 공통점은 전통 미술과는 달리 당시의 근대화된 사회의 특성(변화와 유동성, 도시의 삶에 있어 인상적인 것)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다. 살롱 아카데미의 역사화 같은 전통적 주제와 규범을 거부하고 순수한 색채와 자유로운 회화적 표현을 우선으로 하면서 그 소재들은 농촌이나 들의 풍경보다 도시의 다양한 모습에 관계한다. 마네의 경우 자연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하는 터전으로서 자연이었다(자연주의 사실주의 역시 상상이 아닌 인간 생활과 사실에 관한 주제를 화폭에 담는다). 물체의 경중이나 색조의 조절로 물체를 조절했고 변화무쌍한 반사광을 표현하여 고정된 외관이 아닌 일시적이며 순간적인 근대의 삶을 표현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이러한 정신은 20세기 전반기 아방가르드들의 새로움을 위한 “형상을 위한 형상이탈”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결국 1950년대 소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공리를 보게된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의 형상이탈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아닌 탈-모더니즘의 새로운 계열적 이탈(포스트모더니즘)이 된다.
3) 인간이 직접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의식은 곧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다시 말해 “신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 전환(종교개혁과 종의 기원)”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의 확립은 인간 내면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인식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히 주어지지만 스스로 개발하지 않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 결국 계몽사상은 인간에게 인간 이성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절대적 맹신을 야기 시킨다.
4) 현대의 계몽주의는 좋아지기 위해서 변해야 한다는 또는 사회가 변하면 좋아진다는 무조건적인 믿음. 무엇 때문에 사회와 인간이 변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기술 물질 만능시대에 기술 개혁과 새로움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을 추구하는 진보들은 사실상 현 계몽주의(이성, 물질, 과학지상, 집단 획일주의자) 체제를 정당화하는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다.
5) 하나의 원칙 즉 “각각의 예술에서 유일한 고유의 영역은 그 매체의 천성(특수성)이 유일한 것을 갖는 모든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또한 하나의 방법 즉 “각 예술은 다른 예술에서 빌려진 효과와 방법들을 제거함으로써 순수정화(purification) 된다”라고 미국의 비평가 그린버그가 천명한 예술적 공리를 말한다. 결국 이러한 순수정화는 예술 창작에 있어 차후 엄격한 분석을 가지고 왔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모더니즘은 그림, 조각, 사진 등 각 예술의 어떤 근본적인 존재(essence)를 믿었는데 이는 결국 각 매체의 고유의 양식과 스타일이라는 분명한 형상의 발전(모더니즘의 형상이탈)으로 간주했다.
글·이경률
(사진이론 박사)
이번호로 이경률 박사의 연재가 끝나고 새해부터 이경률박사의 새 기획물로 독자 여러분과 만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도판 :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그림자 (동판, 초) 1985년.
2011. 9. 11. 02:16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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