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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 강좌 1주: 유형학적 사진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 진동선 http://howphoto.net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토마스 루프>를 중심으로
1. 유형학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혹은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구성 요소들의 형과 타입의 집합이다. 그것은 또한 그룹핑으로서 식물학적, 도감적 종, 속, 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들의 사이에는 차이를 드러내는 혹은 유사성을 드러내는 경계와 변별력이 있다. 유형학은 특별한 시리즈로서 타입(type)이고 모듈(module)다. 그러나 스타일(style)은 부차적인 것이다.
2. 유형학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유형학적 요소들은 우리 삶의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사회를 구축하는(social construct) 것이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업, 건축, 의상, 장식, 초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시적인 모습일 뿐 잠재된 이데올로기로서 유형성이 더 많이 존재한다.
3. 사진의 유형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사진에서는 테크니컬한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앗제, 잔더, 베허에서 보여지는 유형성은 기술적인 문제가 우선이었다. 가령 베허부부가 1957년에 시작한 오늘의 유형학의 모습은 기술적 구조였다. 그래서 그들의 첫 번째 전시명이 였다.
4. 베허 스쿨의 유형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산업화 시대의 숨겨진 이데올로기(concealed ideology on industry's part)"를 찾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유형성은 드러난 어떤 꼴과 타입을 말하는데 있지 않았다. 역사, 문명, 문화, 사회의 숨겨진 정보, 숨겨진 기능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것들이 바로 숨겨진 사회적 기능 혹은 역사적 구조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유형학적 사진은 정보(information)로서 특징이 강했다.
5. 유형학적 요소는 도구인가? 장치인가?
두 가지를 아우른다고 본다. 도구로서 대형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시각적 장치로서 형태(shape), 크기(size), 장소(location), 물질(materials), 날자(date), 다이얼로그(dialog)를 들 수 있다. 도구는 유형적 구조를 기술하기 위한 기능적(function) 측면이며, 장치는 시각적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것이다.
6.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는 배허 스쿨에서 좀 특이한 작가이다. 1978-1981년까지 에센에서 먼저 오토 슈타이너트에서 사진을 배웠고, 그리고 나서 1981-1987년에 뒤셀도르프 베허 스쿨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토마스 루프나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과 다를 뿐 아니라 유형학적 요소들도 다르다. 구르스키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이 있다.
2. 일상의 심미주의적(everyday aesthetics) 경향이 있다.
3. 자연, 소도시, 공장, 증권거래소, 관중 등 여러 가지 소재를 취하고 있다.
4. 자연과 기술, 인간과 기술의 <관계(relationship)>을 강조한다.
5. 강력한 추성성과 기하학적 요소, "all over" 회화적 양식을 선호한다.
6. 현대사회와 문화에서 특히 <소비사회(consumer world)>에 관심을 둔다.
7. 다른 베허 스쿨 작가들보다 사회적 리얼리티에 천착한 편이다.
7.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우선 먼저 지각(perception)과 소통(communic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에서 도시로 그리고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립적인 시점을 견지한다. 그래서 그의 유형학적 요소는 구체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반사(reflection)/굴절(refraction)을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기하학적 수평과 수직적 요소들이 그의 사진에 많은 것, 시점(point of view), 앵글(angle)이 다양한 것도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의 사진이 최근 회화적 모습으로 더 나아가고 있는 것도 그의 시선과 형식이 이제 내용 구조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거의 미세구조(micro structure)를 찾아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의 사진도 다른 베허 스쿨 작가처럼 전혀 인간의 웃음도, 감정도, 개성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현실을 그린 그림의 사진(a picture of a picture of reality)"을 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8.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스트루스는 1976-80년까지 베허 밑에서 공부했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보다는 먼저이다. 그러나 그도 베허에 앞서 같은 대학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에게서 페인팅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처음부터 회화적 요소들이 컸다. 그의 초기 포트레이트는 리히터의 <48 Portrait 1971-72>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허의 영향에 따라 곧 거리사진, 건축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앗제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는 퍼스펙티브를 강조했으며, 특히 빌딩들간의 "관계"를 드러내려고 했다. 이러한 관계의 문제는 그의 대표작 "뮤지엄 사진(Museum Photographs)"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사와 인간, 건축과 사회, 공간과 공간, 장소와 장소 등 이중적인 역사적, 사회적 네트워크 및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말하는데 전력했다.
9. 토마스 스트루스 사진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아마도 <뮤지엄 사진>에 그것들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그의 유형학적 요소들은 다분히 이중적인 모습을 띈다.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벗겨 내는데, 가령 뮤지엄 사진에서 사람이 관찰되고, 그림이 관찰되는 이중의 <관찰>, 그림의 응시와 관람객의 응시가 드러나는 <응시>, 그림 속의 사람과 그림 앞의 사람의 <존재, 부재>, 현실과 가상, 실재와 허구로서 <역사적 시간성>,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통로로서 <소통> 등 그의 사진이 유형학적 요소는 문화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들이 예술과 뮤지엄, 그림과 관객, 사진과 그림 등 두 개의 모순되고 충돌되는 세계에서 보여지는 두 개의 유형적 타입과 꼴을 통해 나타나는데 예컨대 그것들은 그림 속의 옷과 관객의 옷에서, 그림 속의 현실과 전시장에서의 현실을 유형적으로 대비시킨다. 즉 페인팅 속의(in the painting) 공간과 페인팅 앞의(in front of the painting) 공간의 유형성을 찾는다.
10. 토마스 루프 사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토마스 루프는 1977년에 베허 스쿨에 들어갔다. 스트루스와 함께 작업을 했던 배허 스쿨의 적자이다. 그 역시 인물, 건축, 풍경 등 다양하게 작업했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포트레이트>야말로 베허 스쿨의 유형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다. 그의 포트레이트는 198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에는 나이, 계층, 인종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사진의 깊이보다는 표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지극히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인물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진과 최근 밤 사진에서는 그 특징들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포트레이트 사진이 너무 뛰어났는지 최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에 비해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확고히 하지 못하는 것 같다.
11. 토마스 루프의 유형적 요소들은 어떻게 말해지는가?
포트레이트 경우 잔더의 백과사전식 포트레이트를 확장한 개념이다. 그의 인물 사진도 메마르고, 감정이 없으며, 개성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배허스쿨의 유형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감성을 배제하는 방식이 특징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건축 사진은 유형적 요소를 지키고 있으나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적인 모습, 구성적 요소에 천착하는 듯 보인다. 마치 배허 스쿨의 냄새를 지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매특허인 포트레이트 사진에서만큼은 유형성은 가히 교과서적이다.
알퐁스 베르티옹, <인체측정사진>, 1885년경, 파리경시청.
1882년 알퐁스 베르티옹(Alphonse Ber-tillon,1853 - 1914)은 파리 경시청에 범죄자 신원확인부 (le Service d'identite judiciaire)를 창설하고 사진을 활용한 인체측정술을 도입했다. 이제 모든 용의자는 그들의 신체를 샅샅이 측정하고 조사하는 신상파악에 관련된 일련의 작업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발, 전박과 중지의 길이, 머리둘레가 측정되었고, 몸의 상처자국, 문신 등이 기록되었다. 코의 형태적 특징, 눈과 머리칼의 색깔도 이견이 뒤따랐지만 상세히 기록되었고, 특히 세월에 따른 변화에 가장 둔감하다고 파악된 귀에 대한 묘사는 각별한 주의가 뒤따랐다. 이러한 시각적 묘사를 완결 짓는 것은 일정한 거리에서 동일한 조명과 동일한 포즈의 조건 속에서 실물의 7분의 1의 크기로 촬영된 정면과 측면의 증명사진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범죄자 신상기록 카드에서 활용되는 정면과 측면에서 찍은 코드화된 증명사진을 병치시키는 방법은 알퐁스 베르티옹의 발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1855년에서 1870년까지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의 사진사로 활동한 필립 포토 (Philippe Potteau)가 파리에 거주하는 외국 원주민과 1862년 알제리 여행시 토착인의 인종학적 연구를 위한 자료를 생산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고안한 방식이었다. 그는 장식적 배경을 제거한 후, 상정할 수 있는 모델의 무표정의 상태에서 “언제나 동일한 거리에서 정면과 측면 순으로 자세를 취하게” 한 후, 동일한 결과물을 양산하는 일련생산 방식으로 그들의 상반신을 기록했다. 사진기는 중성적 배경 앞에서 균일한 산광을 받으며 무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는 동양인과 북아프리카인들을 정면과 측면에서 고정시켰던 것이다. 어떠한 변화도 용인하지 않는 이 규격화된 촬영방식은 바야흐로 식민지 경영에 소용될 ‘미개인’, ‘야만인’의 인종학적 특성의 비교와 검토, 분류를 위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정면사진과 측면사진의 병치가 인종학 연구를 위한 필립 포토의 독창적 발명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병치한 예는 인간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을 연구하기 위해 이미 1854년 경, 신경생리학자인 뒤센느 드 불로뉴 (Duchenne de Boulogne)의 지도 하에 펠릭스 나다르의 동생, 아드리엥 투르나숑이 「인간 신경생리학의 기제 Me canisme de la physionomie humaine」라는 저술을 위한 자료 초상작업을 행한 바 있었다. 이들 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배경 앞에서 균일한 채광을 사용해 한 볼품없는 ‘구두수선공’의 얼굴에 드러나는 이런저런 감정표정에 따른 안면근육의 유형을 정면과 측면의 얼굴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그들은 ‘감정표정의 신경생리학’의 양태를 드러내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일정한 거리에서 동일한 채광 조건 속에서 정면 사진을 보조하는 선에서 측면 사진을 간헐적으로 사용했다. 물론 뒤센느 드 불로뉴와 아드리엥은 정면과 측면의 병치를 필립 포토처럼 체계적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필립 포토에 앞서 약호화된 정면과 측면의 증명사진을 시도했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사실, 누가 최초로 어떤 형식을 발명했고, 그 형식의 기원이 누구에게서 발원한다고 주장하는 실증주의적 연구의 대부분은 그 탄생에 관련된 복잡다단한 역사적 조건을 묵과하는 폐단을 갖는다. 어떤 재현 형식 혹은 어떤 발명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비롯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거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관점, 혹은 친족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거나 혹은 과장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편견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조차, 그 ‘최초’의 귀속은 또 다른 역사의 ‘발견’에 의해 갱신되고, 수정되는 것이 역사의 일반적 양상이다. 사실, 정면과 측면의 인물사진을 병치시키는 예는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840년대 인종학적 연구자료에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필립 포토, 혹은 뒤센느 드 불로뉴를 정면과 측면 초상을 병치하는 방법의 기원으로 상정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형식를 가능하게 한 시대의 재현체계, 학문체계를 규명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기록하여 ‘열등’ 인종의 형태학적 특성을 규명하고, 각 감정의 표현에 고유한 안면근육의 변화양태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18세기의 박물학 (natural history)을 지배했던 분류학 (taxonomy)의 여파인 유형학(typology)이다. 식물과 동물의 학문적 분류에 소용되었던 분류학은 19세기의 학문적 사고체계를 지배한 유형학으로 발전하여 19세기의 서구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제 현실을 도식과 도표적 형태로 간편 명료하게 분류하여 통제, 지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인간과 자연의 제반 연구대상들은 각 부분의 특징적인 유형에 따라 비교, 검토되었다. 분류를 위해 선택된 부분이 동질적인 형태적 혹은 기능적 특성을 발현할 경우 동일 그룹에 묶이고, 차이를 보일 경우 다른 그룹에 할당되었다. 인종학의 경우, 피부색의 동일성과 차이는 분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판별단위를 이루었고, 피부색이 하얀 유태인을 다른 백인종과 구분하기 위해서는 변별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얼굴부위를 선택한 후, 일반 백인종과 비교했다. 감정 표현의 분류학의 경우, 눈썹 근육의 수축 여부, 이마 주름살의 전개 방향 등이 각 감정의 유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판별단위였다.
19세기 유형학의 범위는 너무나 폭넓은 것이어서 초상을 활용한 예만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초반의 정신병리학은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편집광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형태론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 (Th. Gericault, 1791-1824)에게 1822년경 그들의 초상을 의뢰했다.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유형학은 19세기 후반의 지도학문으로 자리잡는 생물학과 결부되어 편집광적 양상을 띠었다. 19세기 후반의 유형학은 ‘선천적 범죄자’, ‘선천적 정신병자’, 그리고 유태인의 전형적 유형을 사진초상을 활용해 정립하려 시도했다. 인간의 얼굴을 정면과 측면에서 포착하여 이 양자를 병치하는 형식은 따라서 어떤 부류의 전형, 유형(type)을 보다 인지하기 쉽도록 도해하려는 한 시대의 유형학적 사고의 결과물이지, 한 개인의 독창적 발명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 사법부가 범죄자의 신원확인을 위해 사진의 활용에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1832년 범죄자의 몸에 낙인을 찍는 야만적 법령이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자기의 신분을 끊임없이 숨기고 위장하는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에 1839년 발명이 공표된 사진을 간헐적으로 응용하고자 했다. 1850년대 경에는 알퐁스 베르티옹에 의해 1880년대에 완벽을 기하게 되는 신원확인 방법의 초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실행은 회의적인 경찰 수뇌부에 의해 계속 미루어졌다. 경찰 사법부가 사진초상의 효용을 결정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1870년 보-불 전쟁의 패배와 그로 인한 사회혼란의 귀결인 1871년의 파리 코뮌 (Paris Commune)이라는 좌익 혁명 정권의 출현과 함께였다. 파리 서쪽, 베르사이유에 자리잡은 제3공화국의 의회와 정부는 좌파 세력이 장악한 파리를 무력으로 탈환해야 했다. 파리는 피로 물들었고 혁명정부는 72일만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파리 코뮌의 주동자 색출을 위한 증빙자료는 무엇보다도 혁명의 흥분 속에서 가담자들이 뽐내며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파리를 점령한 베르사이유의 경찰 사법부는 파리 코뮌을 이끈 정치, 군 지도자들을 색출하는데 수없이 찍혀진 이 기념사진을 이용하였다. 소설가, 플로베르 (G. Flaubert)와 함께 이집트 유적지를 탐사했던 사진가이자 작가이며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인 막심 뒤 캉 (Maxime du Camp)은 「파리의 발작」(1878-1880)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판화상이나 문구상들의 진열창은 코뮌의 위원, 시 대표자, 군 지도자, 한마디로 말해 반란군의 수령들이 종종 아주 우스꽝스런 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들로 뒤덮였다. 그들은 뽐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말단 배우들처럼 그들은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출세한 그들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했다. 그것은 아주 심한 경거망동이었다. 이러한 사진은 전부 파리에만 있지 않았다. 많은 사진이 베르사이유로 넘어갔고 후에는 몸을 숨긴 많은 죄인과 불운한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소용되었다. 아마도 스스로 자신들을 그렇게 공개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
경찰로서는 이러한 경험은 전혀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시기에 경시청에는 사진실이 설치되었고, 이곳은 죄인들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신원파악을 가능하게 했다.” 베르사이유 경시청의 사진사는 으젠느 아페르 (Eugene Appert)였고, 그는 검거된 수백명의 파리 코뮌 가담자들의 초상을 찍었다.
1880년, 파리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 조치령이 내려질 때까지, 프랑스 경찰의 주요 일거리의 하나는 코뮌 가담자들의 추적검거와 추방자들의 입국 금지였다. 이를 위해서 경찰서에는 아페르가 찍은 초상사진들이 비치되었고, 감시 목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진에는 모든 가담자들에 대한 신원정보가 수기로 표기되어 있었다. 1874년부터 파리 경시청은 공식적으로 사진부의 창설을 인준했고, 혐의자와 범죄자들의 초상은 알파벳 순서와 죄질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었다. 1888년, 파리 경시청 사진부의 수장이 되는 베르티옹은 정면, 측면사진을 병치시키고 이에 눈, 코, 귀, 머리 등에 대한 묘사를 글로 기입하는 ‘말로 된 초상 (portrait pa-rle)’을 첨부하는 베르티옹 신원확인법 (bertillon -nage)을 체계화했다. 1892년, 그의 신원확인법은 무정부주의자 라바숄 (Ravachol)의 검거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그와 동시에 검거자가 이전에 코에니그스텐이라는 이름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베르티옹 신원확인법의 정확도와 신뢰도에 대한 인정은 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베르티옹은 드레퓌스 사건에 연루되어 용의자의 필적 감식에 관여하면서 그의 명성은 오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 대위는 군사정보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에게 넘겨준 혐의를 받고 있었고, 베르티옹은 필적감식을 통해 드레퓌스가 범인이라고 판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판정은 반유태주의의 ‘의도적’ 오류였음이 1899년 드러나게 되자 그의 명성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베르티옹 신원확인법은 신체측정과 ‘말로 된 초상’을 작성하는 복잡다단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차이를 변별하는데 있어서 찰스 다윈의 조카인 인류학자 프란시스 갈톤 (Francis Galton)이 1892년에 쓴 「지문 Finger Prints」이라는 저술이 증거하는 ‘지문채취법’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서서히 입증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영국 정부는 “사소한 소홀함이나 실행하는 데에 있어 조금이라도 틀리게 하면 관찰의 정확성이 감소되고 계속된 측정에 영향을 미치면서 인체측정 묘사의 신원확인적 가치가 거의 전무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는” 베르티옹의 신원확인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1902년에는 베르티옹조차 지문 감식 방법만으로 도둑 쉐페르 사건을 해결한다. 프랑스에서는 베르티옹의 인간적 영향력 하에서 그의 신원확인법이 계속되지만, 1918년, 의학, 약물학, 탄도학, 생물학, 화학 등을 통합하는 과학 수사연구소가 발족되고 지문 채취와 감별이 일반화됨에 따라 베르티옹의 방법은 정면과 측면 사진의 병치법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폐지된다.
인간의 상징적 표상인 얼굴을 어떠한 우회 없이 냉정하게 재현하는 19세기 다큐멘터리 초상의 억압적 성격이 그 절정에 이르는 베르티옹의 정면, 측면 증명 사진은 전통적인 초상의 기능과 극단적 단절을 꾀한다. 그것은 인종학적, 의학적 다큐멘터리 초상과 더불어, 어떤 실제 개인을 재현하는 수 천년 초상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현상을 수립한다. 인종학적 자료 초상사진에서 그 재현 형식을 빌어온 경찰 자료로서의 이 초상은 전통적 초상이 간직한 영생과 사후 구원에의 염원과 같은 종교적 문맥은 물론이고 한 개인의 형상, 삶을 기념하고 보전하려는 의도마저 배제된 초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 멸시와 비난을 초래하는 이 감시와 처벌의 초상은 한 인물을 이상화하고 유미화시키는 전통적 초상의 기능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은 이러한 다큐멘터리 초상을 세계의 중심, 즉 서유럽에서 배제되고 정복된 인종들 -유태인, 식민지인- 이나, 부르주아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규범에서 벗어난 유형의 인간들 -정신병자, 범죄자 - 을 엄정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그러나 20세기와 더불어, 정확히 거명하면, 아우구스트 잔더 (August Sander)와 더불어, 19세기 다큐멘터리 초상의 객관적 엄격함은 재현 인물과 그의 시대의 가식 없는 실체에 도달하려는 사진작가들의 형식적 접근방식으로 차용되었다. 사진에 고유한 객관적 현실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하는 19세기 후반의 다큐멘터리 초상이 확립한 형식코드를 잔더 이후 온전히 참조하기 시작한 작가들은 그러나 그 접근 형식을 주변부의 인물, 비정상적이고 소외된 인물에 적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상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계층에게도 감시와 처벌은 아닐지라도 엄격한 시각적 비교와 검토를 위해 19세기가 발명한 다큐멘터리 초상의 형식을 냉정하게 적용했다. 「미 서부에서 (In the Ameri -can West)」의 리차드 아베든(Richard Avedon), 토마스 루프 (Thomas Ruff)의 대형 증명사진 작업은 그 대표적 위업이다. 반면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는 소외되고 주변적이고 비정상적인 개인들의 기록에 집착했다는 점에서 19세기가 발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초상의 유형학적 작업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
최봉림 (사진역사, 홍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