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phenomene)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식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하여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흔히 앎(“보이는 세계”)이라고 하고 철학 용어로 외재적 형상(Forme)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이와 반대로 어떤 현상의 분명한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러한 비 구체적인 무엇을 말한다. 흔히 이것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안 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존재론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alite immanente)① 이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우선 전자의 경우는 산 하늘 강 집 사자 코끼리 등과 같은 자연적 형태는 물론이고 사랑, 평화, 동정, 소외, 부조리, 도덕적 고발, 삶과 생명의 예찬, 인본주의 등과 같이 관념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읽혀지는 보편적 앎(코드나 일반적인 상식)을 지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물질적이든 관념적이든 언제나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는 객관적인 인식 대상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러한 인식 대상들이 아니라 이성과 논리 영역밖에 존재하는 그러나 이미 그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후자의 경우이다. 예컨대 꿈이나 환상, 예수의 형상(신의 산재성), 음악의 인상, 작가의 예술적 직감 등은 가장 전형적인 내재적 형상들이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갑자기 돌출하는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나 충동, 굳이 예를 든다면 오랫동안 같이 생활해 온 배우자나 가족에게 느끼는 갑작스런 혐오감, 첫사랑의 이미지 혹은 첫인상에 느끼는 강렬한 애정, 변질된 성적 욕구, 엄마 품을 떠난 아이가 느끼는 엄청난 공포와 같은 아주 익숙한 곳에서 아주 낯선 이상함, 어떤 자극에 의해 불현듯 솟아오르는 레미니센스와 멜랑콜리 그리고 그 순간의 도취나 자살 충동 등도 역시 상황(특히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들이다. 이것들은 특징적으로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 되고 추상화 된 형태를 가지면서 잠정적이고 예언적인 또한 예견치 않은 무엇(라틴어 : numen)을 말한다”.② 또한 이것들은 주관적이고 비 구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상상적이고 초현실적인 무형의 존재들 다시 말해 흔히 우리가 현실이라고 간주하는 인식 영역에서 이성과 논리로 규명 불가능한 것들(시뮬라크르 / 음영)로 대부분의 경우 단지 어떤 사건(ev enement)이나 상황에 대한 비 구체적인 원인으로만 감지되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이다. 사실상 이러한 무형의 존재들은 오랫동안 위대한 예술가의 근본적인 재현 대상이 되어 왔고 특히 오늘날 현대 미술의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일상과 시뮬라크르)를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존재에 대한 시각적 재현은 흔히 창작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제스처로 간주되는 추상과 표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③ 그러나 일종의 시각적 번역으로 간주되는 그림과는 달리 과거 사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재현만을 허락하는 사진의 경우 특히 사진의 기록성과 그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보도사진에서 앞서 언급한 내재적 형상들은 사진의 재현 대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진은 내재적 형상을 재현하는데 있어 그 어떤 전달 매체보다도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진적 사실주의④의 개념적 활용은 현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담화로 나타났고 또한 사진은 소위 시뮬라크르(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도용, 혼혈, 잡종 그리고 저항과 자아상실 등)의 재현에 있어 필수적인 예술적 표현 도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거의 대부분 상황 속에서 은닉되고 암시되기 때문인데 이때 사진은 상황 설정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활용된다. 정상적인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내재적 형상은 일반적으로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절대적 사실주의(analogon)로부터 즉각적인 감각 즉 아우라, 탈코드, 푼크툼 등의 형태로 발산된다. 특히 앗제나 빌 브란트와 같은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는 많은 작가들의 사진에서 포착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분위기나 인상은 이러한 초감각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관객이 가지는 즉각적인 인상은 사진의 단편적 상황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내재적 형상은 단편적 상황이 아닌 특히 시퀀스 방식과 같은 사진의 연속적 상황에서도 암시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70년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바로 이러한 연속적 상황 설정을 위해 동원된 일종의 논리적 배경들이고 궁극적으로 그의 사진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일상 생활에 은밀히 감추어진 감각적 메시지들이었다. 이때 관객이 가지는 감정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반사되는 의미적인 무엇이 아니라 마치 영화나 연극에서 상황이 끝난 후 은밀히 남는 잔여 감정과 같은 것이다. 미셀 푸코(M. Foucault)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 대한 자신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여운을 “사고-감정(pensee-emotion)”⑤이라고 언급했다. 다시 말해 일상 생활에서 비논리적으로 잠재된 존재(안 보이는 세계)의 누설을 위해 마이클스는 대부분의 사진 구성에서 시퀀스(sequence) 방식을 도입하여 의도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논리적 상황을 설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관객 스스로의 사고-순환을 위해 도입된 시퀀스 방식은 마치 홍당무로 당나귀를 유인해 함정에 빠뜨리는 경우와 같다. 왜냐하면 내재적 형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대상들로 단지 사건이나 상황의 불확실한 원인으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재적 형상의 추적에 관하여 마이클스는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 “사진은 단지 암시적 출현을 목적으로 하고 모든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된다. 특히 생의 고민 번뇌 욕망 등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함축한다”⑥ 이 말은 결국 진정한 사진의 재현 대상은 보이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 안 보이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때 사진은 사진이 외시하는 상황 설정(픽션)을 통해 안 보이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한다. 좀 더 구체적인 메시지의 전달 과정을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 작가의 의도와 서술적 상황 설정 그리고 관객의 이미지 읽기. 우선 작가가 표현하려는 예술적 의도나 메시지는 일상 생활의 은밀한 주제들이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앎의 영역에서 객관적 의미와 명분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경험(내적 관찰)을 통해 포착된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외부 대상이나 장면의 재현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측면(l'aspect de soi-meme)에 대한 시각화로 간주된다”.⑦ 이와 같이 포착된 감각적 음색에 대한 사진적 재현을 위해 작가는 “사진을 경험적 전달체로 이용한다”.⑧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설정에 한계를 가지는 전통적 방식(한 장의 단편적 상황)을 탈피하여 시퀀스 방식을 통한 서술적 상황을 전개시킨다. 이때의 상황은 작가의 주관적 상황 묘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우리 모두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공유된 주관성”에 관계한다. 미셀 푸코는 이러한 상황에서 “사진들의 경험은 나를 유혹한다. (...) 사진들이 마이클스의 경험에 빚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상) 그의 경우인지 나의 경우인지 스스로 자문해 본다”.⑨ 라고 언급하고 있다. 결국 마지막 단계의 관객의 입장에서 본 사진은 “유일한 의미와 유일한 도덕 혹은 유일한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자 각자의 관점이나 경험에 따라 번역되는 사건이나 상황의 연속으로 이해된다”.⑩ 위와 같이 작가의 주관적 경험으로부터 포착된 내재적 형상은 관객 스스로의 경험적 연상에 의해 전달된다. 그때 관객의 사고-순환을 유도하는 상황 설정은 단지 응시자 각자의 경우로 환원시키는 수레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역할을 위해 마이클스는 방법적으로 영화적 시퀀스를 도입하고 또한 분명한 상황 설정을 위해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한다. 이런 경우 사진은 더 이상 장면 묘사의 시각적 전달체가 아니라 상황 전달을 위한 일종의 설치 역할을 한다. 원래 사진은 전통적으로 생생한 현실을 재생하는 자료적 혹은 복사적 기능을 가지며 반대로 그림은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비 현실을 암시하는 “재현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서 마이클스는 사진의 기능을 그림의 기능으로 전이시키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작가는 사진적 매체가 가지는 재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 속에서 사진의 전통적 관습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진의 연속 장면들은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 시퀀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세기부터 몇몇 사진가들은 연속적인 재현 방식을 도입하였다 : 단순한 서술이나 알레고리를 위한 피터 로빈슨(P. Robinson)의 합성 사진들, 동작과 움직임의 재현을 위한 뮈브리츠의 연속 사진들이나 20세기 초 미래주의자들의 사진들 혹은 다양한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잡힌 입체파 양식의 사진들, 이러한 사진들은 비록 영화적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하간 역사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연속 사진들이었다. 이때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시간의 지속성과 공간의 형태 변화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시퀀스가 의도하는 것은 이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서술 구성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장면이나 혹은 어떤 특정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퀀스 방식을 동원하여 관객이 “서술적 논리”를 야기시키려는 의도를 가진다. 거기서 관객은 스스로 자신의 함정을 파면서 상황적 울타리 뒤편에 은닉된 무엇(생성)을 발견할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의 기억은 언제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러한 기억의 동공을 보완하려는 심리적 현상 즉 “논리적 기억”을 작동시킨다. 그래서 마이클스가 만든 장면들을 보는 관객은 “자신의 논리적 기억을 동원해서 자신의 어떤 이야기를 꾸미고 싶어한다”.⑪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서술 구성은 관객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서술 공간으로 열려져 있는데 이는 연속적 사건의 점진적 전개를 가지는 영화의 지속성과 분명히 구별된다. 듀안 마이클스 사진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텍스트를 사진에 첨가하는 행위이다. 이미 60년대 말부터 마이클스는 자신의 사진에 단어나 문맥을 기입하여 더욱 더 이미지의 서술적 측면을 풍부히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의 도입 이유는 근본적으로 한 장의 사진으로 작가의 사고를 표현하는데 불충분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거의 신성 불가침으로 간주된 전통적 사진의 순수 이미지에 일종의 신성 모독이 되었다. 그러나 텍스트와 사진 이미지의 조합은 70년대 이후 특히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예술적 전략(이미지-텍스트)이 되었다. 원래 사진의 텍스트 첨가는 특히 광고 사진에서 사진이 내포하는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connotation)를 축소하여 사진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이클스의 텍스트 첨가는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적 항해를 유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때 도입된 텍스트는 비록 작가의 주관적 관점에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 자신의 주관적 상상 속에서 상황적인 사고-순환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은 자신(작가)의 경우를 다른 사람(관객)의 경우로 바꾸는 “주객 전도의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작가와 관객의 “교차된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⑫ 결국 마이클스의 사진 활용은 외적 대상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일상 생활에 은닉된 내재적 형상의 재현에 있다. 방법적으로 시퀀스를 이용한 서술적 상황 전개와 의도적인 연출사진 그리고 미지의 비 현실적 세계로의 열린 공간 구성(사진 1) 등은 당시 그 누구도 가지지 않았던 탁월한 작가의 상상력을 말해준다.⑬ 특히 작가가 만드는 시퀀스의 소재들은 신비, 환영, 기적, 불가사의, 공포, 동성애⑭ 종교, 천국, 예수 등과 같이 거의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의 형이상학적 대상들(초현실적이고 신비적이고 환상적인)이다. 거기에 작가는 자신이 카톨릭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물질 사회와 집단 사회의 지배 도구로서 이용된 종교적 억압과 폭력을 조롱적 방식으로 은밀히 채색하고 있다(사진 2 시퀀스). 오늘날 합리주의와 과학적 논리 그리고 그 절대적 이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멀리 추방된 수많은 존재들, 그것들은 의심할 바 없이 언제부터인가 집단 통제를 위해 원천적으로 말살된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망각들이다. ● <주요 참고 도서> *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 Duane Michals, Texte de Renaud Camus, Photo Poche, C.N.P., Paris, 1988. * Mi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 Changements, Photographies et textes de Duane Michals, Edition Herscher, Paris, 1981. * Vrais Reves, Editions du Chene, Paris, 1977. 주) ① Henri Van Lier, Histoire de la photographie, cahier du cinema, Paris, 1990, p. 여기서 "내재적(內在的 immanente)"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형상(forme)이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외재적(外在的)"이라는 의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 밑에 잠재된 비구체적인 상태를 말한다. ② Ibid. ③ 니콜라 스타엘, 폴 클레, 알베르토 자코메티, 장 뒤뷔페, 프란시스 베이컨, 앤디 와홀 또한 크리스티앙 볼탄스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전통적 코드의 이탈과 전복을 말하는 비정형의 “형상 이탈”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내재된 형상의 시각적 재현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대상의 재현은 더 이상 사실주의가 아닌 개념이나 표현에 관계한다. ④ 단지 인화지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물질로서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천 유리 모니터 프로젝트 등 모든 물질 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이전의 비 물질적인 사진을 말하는데 손으로 그려진 사실주의와 반대로 렌즈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사실주의를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 / Le realisme photographique)라고 할 수 있다. ⑤ 관객의 논리적 사고 순환 후 발생하는 돌발적인 감정을 말한다. Texte de Mlchel Foucault, "La pensee, l'emotion", Duane Michals, photographies de 1958 a 1982, cat. 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Paris, 1982. ⑥ Marco Livingstone, Duane Michals, Photographe de l'invisible, Edition de La Martiniere. Paris, 1998. ⑦ Ibid. ⑧ Ibid. ⑨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⑩ Marco Livingstone, op., cit. ⑪ Texte Michel Foucault, op. cit. ⑫ Marco Livingstone, op., cit. ⑬ 비록 듀안 마이클스의 사진들이 지나치게 담백하고 솔직한 감성으로 재현되고 가끔씩 어설픈 표현들을 가진다고 비난받음에도 불구하고 사진들은 오늘날 현대 미술(개념 미술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차갑고 냉정하고 무기력한 측면과는 반대로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을 던지면서 대중과의 강렬한 교감을 주고 있다. 70년대 개념 사진의 선두주자로 간주되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은 거의 모든 재현 예술에서 형식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념적인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현대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연속(시리즈)이나 이미지와 문맥의 조합(이미지-텍스트)은 이러한 시퀀스 사진의 영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⑭ 동성애는 듀안 마이클스 사진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의도는 종교에 의해 추방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단지 이성만 선택되고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카톨릭 종교와 집단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는데 있다. 역시 동성연애자였던 미셀 푸코(1984년 에이즈로 사망)는 자신의 책 ‘성의 역사’에서 “과거에 남색은 일시적 이탈이었으나 이제 동성애는 하나의 인간 유형이다”라고 폭로하고 있다. 원래 동성애는 정상적인 인간 본성의 한 유형이었는데 집단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해 오랫동안 억압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농경 사회에서 인구 증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중요시하는 계급 사회에서 종교와 관습은 일부 일처제를 강압적으로 법제화하였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동성애는 추방되고 억압되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빛을 발하는 남자, 1969 년 (사진 2) 시퀀스, 뉴욕에 나타난 그리스도 텔레비전에서 종교 위선자가 된 그리스도 무허가 낙태 수술실에서 죽은 젊은 여자를 보고 슬퍼하는 그리스도 동성연애자를 보호하는 그리스도 브루클린가에 사는 우크라이나 출신 할머니와 함께 개 먹이 통조림을 먹는 그리스도 강간당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뒷골목 어느 미친놈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두 번째 강생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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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테마 사진과 글의 따로 국밥 사람이 살다보면 뭔가 남기고 싶고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진을 찍는 경우라든지, 어떤 상황이 인상적일 때 혹은 괴로울 때 흔히 일기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때의 심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흔하고 또한 오랫 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별히 시(詩)적 형식을 빌리지 않는 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왜냐면 뭔가 남기고 싶은 대상들이 아쉬움이나 애석함, 무기력하고 허탈한 일종의 공허함, 갑작스런 충동 혹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거나 당해야하는 상황 등 대부분의 경우 사실상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음색(tonalite)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같이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들을 언어 대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다소 미술에 소질이 있을 경우 화폭에 자신의 심경을 재현(특히 추상적 방법으로)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표현은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번역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사실상 자신도 그러한 표현적 번역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비록 추상적인 것이지만 뭔가 재현할 대상이 있었다는 사실(존재의 형이상학적 대상)인데, 그것은 현상학적으로 말할 때 장님이 추리하는 코끼리의 실체 혹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미술에 소질이 없어 카메라로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할까 ? 알다시피 특별한 소질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카메라로 대상을 녹음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인화도 해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방법은 어렵다.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 아니 황당하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최소한 찍는 순간만큼은 어떠한 번역도 허락하지 않는 너무나 단순한 기계이면서 동시에 일단 결정된 대상에 대하여서는 무차별하게 기록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작가의 번역 방법은 사실상 파인더로 들어오는 대상의 선택적 방법 외에는 없다.1) 그러나 시각적 재현이라는 장르에서 사진은 오랫동안 그림의 형식에 동화되어 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진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타인에게 내 보일 때 전시, 카탈로그, 서명, 판매 등의 최소한 외형적으로 사진을 그림화 하고 또 그러한 사진 작품이 출현했을 때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림의 양식에 따라 작품의 제목과 주제 그리고 적절한 해설(분명한 정답 ?)을 찾는다. 사진 비평 역시 마치 손으로 그려진 그림 이미지에 대한 분석적 담론을 행하듯이 거의 정확히 그림의 비평 양식을 따른다. 그러나 사진은 근본적으로 미술과 다른 매체다. 우선 그 진행 과정에서 그림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재현하려고 할 때 마치 베틀에서 한 올 한 올 엮어 직조를 하듯이 혹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붓 터치의 확산에 의해 완성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림을 이루는 최소 단위를 “조형적 세포”라고 할 때 사진의 경우는 “광자(光子)적 세포”라고 한다.2)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을 이루는 세포들은 빛에 의해 동시에 생성되고 또한 동시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처럼 그림적 사실주의와 사진적 사실주의3)는 본원적으로 서로 다른 출현 조건으로부터 생성되기 때문에 결국 의미적으로도 분명히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림적 사실주의는 세포의 확산에 따른 작가의 필연적인 “번역”을 허락한다. 회화의 극사실주의가 말해주듯 작가가 아무리 대상과 똑같이 모사한다 하여도 완성된 그림 이미지에는 최소한의 자신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메시지가 객관적 의미를 가지든 혹은 무의미(탈 의미 즉 음영의 불특정 의미)를 암시하든 재현되는 대상 위에서 적어도 의도적인 번역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고, 그때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완성된 이미지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일 대 일” 대응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림은 비교적 분명한 회화적인 메시지를 이미 표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작가의 예술적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작품에 첨부되는 비평문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래서 비평은 원칙적으로 작가의 의도와 그 의도로부터 번역된 작품(그림적 사실주의) 사이에서 작품이 표명하는 메시지에 대한 일종의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광자적 세포를 갖는 사진적 사실주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의도 혹은 번역을 그림처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의 절대적 모사(caaete)뒤에서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사진은 번역적 재현이 아닌 함축적 재현이다. 그래서 재현된 사진적 사실주의에서는 그림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의 의도가 언제나 이미지의 모호한 함축적 의미 즉 내시(혹은 공시, connotation)의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대상의 절대적 닮음(analogon)만을 갖는 사진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그림의 분명한 “일 대 일”의 시각적 번역과는 달리 언제나 찍혀진 대상이 상징하거나 암암리에 객관적으로 약속된 의미 즉 코드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그림 역시 상징적 메시지를 표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진은 근본적으로 그 절대적 외시(denotation)로부터 “무엇을 뜻한다” 혹은 “무엇을 상징한다”라는 의미적 코드(symbol)에 묶이게 된다.4) 달리 말해 사진적 메시지는 처음부터 상징이라는 우회적인 틀 속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흔히 작가들은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분명히 인정되는 함축성 즉 공동체적 코드에 동화시키기도 하며, 반대로 관객 역시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코드 속에서 공통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림과 달리 사진이 쉽게 진부하고 판박이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판박이 혹은 붕어빵의 형상(form)들은 사진이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그리고 구경꾼 같은 관객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된 메시지(studium)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판박이의 주제는 언제나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왜냐면 아무리 과거에 드물고 특이한 사진 주제라도 오늘날 이미 보편화된 주제(앎)라면 그것은 하나의 붕어빵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왕따”라는 개념은 이미 보편화된 사진적 주제 즉 판박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아직 인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현실에서 징후로서만 나타난(말하자면 음의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거 시대에는 의심할 바 없이 특별한 사진의 주제였을 것이고 아마도 당시 위대한 사진작가(장님)는 자신의 감각적 지팡이로 이미 이러한 개념을 재현했을 것이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내시는 이미지가 지시하는 외시의 조건에 달려 있다 : 함축적 메시지인 내시가 증폭되면 사진 메시지는 모호해지고 반대로 축소되면 그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초보적인 현시 광고의 첫 조건은 텍스트를 동원하여 최대한 사진 이미지의 내시를 극소화하는 것인데 내시를 무력화시키는 사진적 조건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그리고 쇼크 사진이다.5) 왜냐하면 광고는 그 속성상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즉각적으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카메라에 담겨지는 함축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하면 할수록 사진은 결국 광고와 같이 어떤 목적을 위한 사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익히 약속된 메시지는 사진의 형식적인 측면(조형성, 기술성, 솜씨 등)에서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작품성을 가질지는 몰라도 사실상 우리에게 감동은 주지 않는다.6)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감동을 주는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보다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진이 빈약한 매체라는 사실은 보다 엄밀히 말해 예술적 표현 방식에 있어 사진적 사실주의는 극히 제한된 매체라는 사실에 관계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예술적 의도와 재현된 이미지가 함축하는 의미와의 관계가 사실상 “일대다수”의 관계를 갖는다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림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분명한 의도를 외시적으로 표명하고 있지만 사진적 사실주의는 이미지 그 자체인 외시적 메시지 외에 어떠한 시각적 번역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함축적으로 모호한 다수의 번역 가능성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는 붉은 사과를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파란 사과로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단지 붉은 사과만 재현할 뿐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재현된 붉은 사과는 함축적으로 찍혀지는 상황이나 조건 혹은 첨부된 텍스트(주제, 설명, 비평 등) 그리고 관객의 주관적인 관점(지시론적 관점)에 따라 달리 읽혀 질 수 있다. 예컨대 신문에 실리는 많은 보도 사진은 편집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조합에 의해 하나의 의미만을 갖도록 인위적으로 편집된 종속 사진인데, 어떤 경우에는 원래의 사진 메시지가 전혀 다른 메시지로 둔갑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특수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사진은 그 자체의 외시 만으로 정확한 전달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코드화(codific -ation)된 형식, 달리 말해 함축적 의미를 최소화시키는 보조적 장치(대표적으로 텍스트의 첨가)가 필요하다(Roland Barthes). 그래서 사진은 근본적으로 조작과 왜곡 혹은 인위적인 의미 변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사진을 도용하는 현대미술의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사진과 관객을 이어주는 사진 비평은 마치 신문사의 편집장이 사진이 가진 다변적 의미들 중 자의든 타의든 그의 의도에 가장 적절한 의미만을 노출시키기 위한 편집과 같은 역할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진 비평은 그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관객으로의 의미적 전달에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한다. 더구나 일단 사진과 텍스트가 조합되면 사진의 기록성과 증거성 앞에서 우리들의 “논리적 사고”는 텍스트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진은 본원적으로 모호한 전달 매체이기 때문에 비평은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는 코드화 작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적으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경우 사진과 글의 관계는 따로 국밥이다. 또 다른 따로 국밥의 원인은 사진이 작가의 근원적 메시지 즉 음영의 “무의미 혹은 탈 코드”로부터 재현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코드화된 비평”으로부터 온다. 사진은 함축적 번역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텍스트(비평)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가의 사진적 메시지가 코드화된 의식(틀)에서 올수록 비록 그 메시지가 사진의 함축적인 장치 속에 은닉되어 있다 하더라도 비평가나 관객의 의미적인 눈에 그것이 쉽게 읽혀 질 수 있다. 그러나 코드의 영역을 떠난 음의 대상들은 객관적 논리로 코드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특별한 작가의 주관적 해설이나 정확한 비평가의 설명 없이는 사실상 의미적인 코드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진은 절대적인 대상과의 닮음 이외에 어떠한 번역적 재현(그림에서는 가능한)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비논리적인 메시지는 더욱 더 은닉되어 있다. 이는 오랫동안 광고나 보도사진 혹은 대중사진과 같이 코드화된 사진 이미지 그리고 그런 비평에 익숙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사진 읽기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래 전에 자신의 고향인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살고 있는 어떤 사진 작가가 대도시의 냉정하고 비정한 인간 관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정 넘치는 시골 노인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카메라로 재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고향 노인들을 찍어온 사진들이 있다(도판1). 우선 오늘날 우리들의 객관적인 코드에서 짐작해 볼 때 흔히 노인의 웃는 모습이나 거기서 보이는 몇 남지 않은 이빨과 주름살, 문화의 옷을 입지 않은 할아버지의 남루한 차림새와 때묻은 골동품 같은 물건, 금방이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상기시키는 할머니의 자연스런 제스처 등에서 풍기는 소박한 이미지일 것이고, 또한 거기서 즉각적으로 “노심(老心)”이라는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 즉 하나의 분명한 의미적 코드가 읽혀 질 것이다. 또한 이때 조합되는 비평은 이러한 사진적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코드화된 비평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정작 고향 노인들과 만나 느낀 것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시골노인의 소박한 인간미가 아닌 뭔가 잘못된 노인들의 비정한 눈초리나 경계의 시선(?)에서 감지되는 형용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비교적 교육의 기회와 문화와 접촉이 잦은 대도시의 노인들에게서 오히려 순수한 인간미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 오늘날 시골 노인들의 가치관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긴 하루의 고독을 메우는 수단과 또 그들에게 세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채널은 사실상 대중 매체 특히 텔레비전 뿐이다. 몇몇 사회적 치부가 단지 우리 사회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이 사회 전체의 단면인양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엄청난 뉴스와 고발기사의 홍수는 결국 획일화 된 맹목적인 믿음과 잘못된 판단, 물질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숭배 또 그것을 위한 지나친 자기 방어와 타인에 대한 경계 등 변질된 가치관을 그들에게 고착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늘날 대도시의 정신적 병폐 현상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이성적 구조에서 시골 노인의 왜곡된 가치관은 쉽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대도시와 시골이 역전된 듯한 다소 황당하고 모순된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의 눈에 비친 시골 노인의 얼굴은 괴물이었고 이러한 괴물을 재현하기 위해 그는 마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사진처럼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엉뚱하고 이상한 노인의 모습을 찍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현된 사진은 진짜 괴물 같은 노인이 아니라 단지 이상한 노인의 모습일 뿐이다. 왜냐면 미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괴물의 재현은 역사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인간 유형의 변태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인간 실존의 왜곡된 모습과 같이 분명한 시각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지만 사진에서는 특별히 조형적인 요소(조형 사진)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번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실체인 괴물의 사진적 재현은 단지 현실의 자국인 징후(index)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자국의 재현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를 재현한 사진적 이미지를 객관적인 코드의 눈으로 보면 사진은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고, 또한 징후로서 암시된 사진적 메시지를 코드화된 비평으로 설명한다면 사진과 글의 관계는 분명히 따로 국밥이다. 결국 이 작가가 재현하고자 한 괴물은 코드가 없는 하나의 징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코드화된 정태적 의미가 아닌 진화적인 “동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진정한 사진의 대상인데 이때 그 존재의 출현을 철학적 용어로 “내재적 형상(La figure immanente)의 재현”이라고 한다. ● 주) 1)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오늘날 비평가들은 사진을 그림과 비교하여 “빈약한 사진(La photogra -phie pauvre)”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은 그 조형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한계를 가진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외시적으로 절대 빈약한 표현 매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Dominique Baque, La photographie plasticienne, Regard, Paris, 1998, chapitre I. 2)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1987 에서 인용된 용어. 3) 사진(The photograph)은 분류적이고 일반적인 용어로 흔히 물질(특히 인화지)에 관계하는 반면, 사진적 사실주의(The photographic realism)는 비물질적인 실체로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적 방법에 의해 생산된 총괄적인 복사 이미지를 말한다. 예컨대 캔버스에 복사적으로 나타난 사진 이미지나 혹은 디지털 화면에 출현한 사진 이미지는 사진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라고 언급해야 한다. 이는 손에 의해 복사된 그림적 사실주의와의 분명한 구별을 위한 개념적 용어이다. 그러나 사진과 사진적 사실주의는 넓은 의미에서 사실상 동의어로 이해된다. 특징적으로 이러한 비물질적인 실체의 출현은 언제나 종이, 천, 캔버스, 화면 등 물질적인 것을 동반하고 있다. 4) 사진을 대다수의 19세기 사진과 같이 그림을 위한 대상의 복사적 기능(icon)으로 보는 관점은 제외하고 5) Roland Barthes, L’obtus et l’obvie, Cahier de la photographie,Paris, 1977 참조 6) 엄밀히 말해 이러한 유형의 사진은 예술이 아니다. 창조적 의미에서 볼 때 작품성과 예술성은 이론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적어도 예술은 발견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감각적 추적이기 때문이다(존재론). 감동은 반복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로움에서 온다. 감동을 주는 것 혹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것은 진정한 작가의 예술적 의도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모든 사진 이미지들을 예술사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가령 광고지 귀퉁이에서 발견되는 푼크툼는 단지 찍혀진 대상과 관객과의 주관적 관계에서만 이해될 뿐이지 작가의 의도에 의한 모두에게 공유된 메시지는 아니다. 영상 이미지에서 푼크툼과 작가의 예술적 의도는 사실상 별개의 문제이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김선희, 낯선 초상 시리즈 중,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