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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1.08.30 다이안 아버스 : 망각된 존재의 추적
  9. 2011.08.30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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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30. 20:04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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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30. 19:48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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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혹은 육교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초라하고 측은한 모습들 특히 오늘날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불구를 강조하며 구걸하는 소위 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거의 반 폭력적인 행위들,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에 관해 우선 부정적이다.
 
이와 같이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경우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 혹은 부속적인 걸림돌로 간주되며 결국 우리에게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는 우월과 열등이라는 부등호의 원칙이 성립하는데 오랫동안 이러한 원칙에서 소위 가진자의 “동정”이라는 우월적인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동정이라 함은 예컨대 구걸하는 맹인에게 동전을 적선한다든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등과 같은 선의적인 제스처들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소외된 자에 대한 의도적인 배려는 사실상 집단과 전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편견과 불평등의 신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행위는 거의 상징적으로 “인본주의”의 명분 아래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강압적인 원칙에 복종되어 있다. 이러한 원칙에는 두 가지 교묘한 지배 논리가 있다 : 하나는 “평등”이라는 집단 우선적인 개념이고 또 하나는 “정상”이라는 모든 대상에 대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원래 평등과 정상은 관용(똘레랑스 tolerance)① 이 아닌 불관용(앵똘레랑스 intolerance) 즉 특정한 집단 이기주의를 위한 마스크이고 계몽의 이성이 낳은 과학적 사고(합리와 경험)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근대 국가 지배 개념의 산물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해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대상들은 그 대상이 훈련된 우리의 인식으로 의식할 수 있든 없든 여하간 “그냥 있는 그대로” 즉 서로 절대 가치의 우위를 측정할 수 없는 불평등한 존재로 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원래 존재는 “그대로의 출현”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평등을 빙자한 “민주”와 보편 타당성을 원칙으로 하는 “정상” 다시 말해 어떠한 불순도 허용하지 않는 획일성 혹은 통일성이 강요하는 절대적 흑백 논리는 오직 집단을 위한 이성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앞세우는 사변적 폭력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물질 사회 속에서 특히 유일하게 자본주의만 부화된 한국의 물질만능의 현실에서는 오직 민주와 평등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할 뿐이다. 마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 볼 때 콜롬부스는 침략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부스는 언제나 발견자 혹은 정복자(또한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가 되듯이 자신과 다른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정상과 비정상만 인정하는 흑백 논리의 세상 그것은 바로 평등과 민주에 대한 맹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원래 진보는 소수를 위한 개념적 포용이지 다수를 위한 논리적 반전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러한 개념을 언급해 보자. 종교적 전도라는 명목으로 지하철 안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멀쩡한 외모를 가진 어느 독실한 교인의 침튀기는 설교, 오직 기존 정권의 전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야당 인사의 정치적 폭력, 북한 사회주의 관점에서 본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사회를 전복하려는 과격한 노동 파업과 그 연대 투쟁, 이러한 명분과 주장들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식에서 마치 지하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인과 같이 비정상적 존재의 돌출로 간주되며 또한 사실상 거의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은 단지 정상이 의도적으로 구획해 놓은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진자 혹은 기득권자의 지배논리로 이해되는 동정이 아니라 또한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획일화되지 않는 다양한 사변적 “공존”이다. 이러한 공존은 정상과 비정상, 강자와 약자, 혹은 다수와 소수의 존재론적인 일치(관용 혹은 포용)를 말하고 있다 : 예컨대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외눈박이 세상에서 장애인이 되듯이 정치에서 우파의 눈에는 좌파가 적이 되며 좌파의 관점에서 우파 역시 적이 된다. 또한 심지어 우리가 흔히 위험하다고 하는 소수의 극좌파 혹은 극우파의 지배 이데올로기 안에서 온건파나 중도파의 노선은 오히려 억압되고 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인데 후설은 “우리는 언제나 중성인 것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것의 상황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다이안 아버스의 사진들이 누설하는 은밀한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공존” 혹은 “관용”에 있다. 그녀의 많은 사진들이 공통적으로 외시하는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은 이러한 사변적인 징후를 암시하는 가장 좋은 모델로서 선별되었을 뿐이다. 쉽게 말해 그녀의 사진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회적 지표로서의 다큐멘터리도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사진이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면서 또 다른 사진의 사회적 역할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정이나 인본주의적 명분을 앞세우는 계몽적 사진은 더욱 더 아니다. 더욱이 우울증이나 강박관념과 같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성향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나 불행한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녀에게 모델로서 장애인은 흔히 우리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누락된 존재의 가장 확실한 출현이기 때문에 사진은 단지 의도적으로 또한 노골적으로 이러한 “존재적 진실”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아버스의 사진들은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출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예 : 사진 2). 이성에 의해 규정된 “정상”의 세계(보이는 세계)와 “비정상”의 세계(안 보이는 세계)를 병치하면서 소위 괴물이라고 간주되는 비정상적인 존재들의 출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신체 불구자, 거인과 난쟁이, 정신박약, 동성연애자, 성전환자 등 마치 생물학적 도감을 보듯이 공통적으로 뭔가 엉뚱한 괴물로 나타난다. 정면으로 출현한 이들은 장애인 이전에 하나의 인간 유형으로 마치 누군가(조물주) 만들어 놓은 피조물로서의 숙명적인 존재로 규정된다(사진 1, 3, 4). 이를 위해 그녀의 촬영방식(거의 50mm 표준 렌즈 / 초기에는 소형 카메라, 60년부터 6 x 6 필름을 사용)은 일반적이고 도식적인 단순한 방식을 하고 있고 또한 그 구성에서도 대칭성과 정면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폭로는 방법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시에 대조적인 수법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그녀가 포착한 것은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음의 존재들(ombres)이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성의 눈으로 볼 때 공통적으로 비정상적이고 산발적(소수)이고 또한 징후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것들은 사회가 규정한 범주 밖의 괴물, 기형, 히피와 같은 비정상적인 존재들 즉 프리크(freaks)들로만 나타난다. 원래 어원학적으로  프릭크는 알려지지 않은, 불명의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을 지칭하고 그들은 본원적으로 ‘이상한 혹은 엉뚱한 것(oddity)’ 즉 부등의, 부조화의, 기수의, 짝이 맞지 않는, 비스듬한, 삐딱한, 만사가 신통치 않은 불완전한, 부족한 등 공통적으로 어떤 비정상(imparite)에 관계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조물주의 동등한 작품으로 원래 정상적인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획일성과 보편성 그리고 타당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에 의해 소외되고 억압되어 ‘비정상’으로 치부된 것들이다.
 
사실상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 가령 모두가 왼손잡이인 집단에서 오른손잡이의 출현은 상대적으로 기형의 분류에 속할 것이고 또한 키 작은 난쟁이 집단에서 키 큰 사람 역시 기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혼을 원칙으로 하는 집단에서 이성의 결혼은 물론 금지될 것이다. 그와 같이 비정상은 단지 한 집단이 선별적으로 규정한 편견에 의한 것이다.”② 그래서 아버스의 인물들은 단순한 장애인의 유형학적 진술이 아니라 소외된 존재의 누설로 간주된다. 역설적 방법으로 매조키즘(피학대 음란증)적인 비관주의적 시각에서 세상의 ‘추함’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는 것은 일종의 불행의 신호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별히 그녀가 의도적으로 활용한 과도한 플래쉬는 모델을 더욱 더 경직스럽고 인위적이고 순진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낮보다 밤에 오히려 더 많은 기형(oddity)를 생산한다는 유태인의 사고에서 온 논리이기도 하다.

  1971년 여름 그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신경안정제인 바르비투스산제를 먹고 동맥을 끊고 자살하기 얼마 전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창가에서 보이는 뉴욕 센트럴 파크를 인간 동물원이라고 규정하고 거기서 산보 중인 사람들을 마치 각기 다른 동물들의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특별한 시각은 사회학적 관점 이전에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아버스의 사진은 정상적인 우리들의 이성의 눈(코드)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가 자신의 고유한 표현이 있으며 또한 이를 위해 응시자의 눈에 원칙적으로 이러한 시각의 개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형인, 늙은이, 정신박약자와 같은 비정상인은 사실상 정상인과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인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집단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다수의 보편적 기준에서 그들을 예외적인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호로서 나타난 그들의 출현은 열등한 종족의 괴물이 아니라 모두에게 감추어진 우리의 ‘이중적인 얼굴’임(Norbert Bernard)과 동시에 오랫동안 망각된 존재의 진실 즉 우리 모두의 ‘증세와 기념비’(Henri Van Lier)가 된다.”③
 
  근본적으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집단 사회(특히 물질사회)가 규정한 획일적인 가치기준에 대한 의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경험했던 패션사진 작업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빈부차이나 물질 만능사회에 대한 체제적인 모순이 아니라 도덕과 관습을 대표로 하는 집단사회가 통일된 지향성을 위해 규정해 놓은 미(넓은 의미에서)적 가치에 대한 편파적 기준이다 : 오랫동안 우리는 이성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불행, 비극, 추함 혹은 소외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인간조건의 이상적인 조화와 긍정적인 시각에 익숙하여 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우상이나 모델을 위한 강압적인 규범으로 사실상 반쪽 세상의 불관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불행의 신호로 간주되는 비 정상인을 모델로 하여 그녀가 생물학적 관상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추함과 불행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앞서 말한 억압된 존재의 폭로로 볼 수 있다.”④ 그것들은 이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날 시뮬라크르임과 동시에 하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
 
<주요 참고 도서>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김희숙 정보라 옮김, 똘레랑스, 길, 2000. (참고 : 임지현 평, 동아일보)
Doon Arbus, Diane Arbus, Aperture, New York, 1972.
Regis Durand, La part de l'ombre, Essais sur l'experience photographique, La Diffrence, Paris, 1990.
Henri Van Lier, Histoire photographique de la photographie, Cahier de la photographie, Paris, 1987.
La photographie comme destruction, Universite de Provence, Arles, 1993.
Diane Arbus Sans Titre, Aperture/Edition de La Martiniere, New York/Paris, 1995.
Diane Arbus, Photoraphe de presse, Aperture/Herscher, New York/Paris, 1984.
 
주)
① 똘레랑스(tolerance, 라틴어 tolerare)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무엇을 “지탱한다 혹은 감수한다(supporter)”라는 뜻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관용”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 흔히 관용은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베푸는 너그러움이나 자선이라는 다소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동양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단어이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어떠한 억압된 상황에 묶인 무엇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개념인 “앵똘레랑스(불관용, intolerance)”는 일반적으로 지배적이고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보다 엄밀한 단어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외래어(불어)인 “똘레랑스”는 우리의 전통적 계급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관용”의 개념과는 다소 의미적인 차이를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의 가부장적 사고에서 특히 유교문화의 미덕이라는 개념에서 이해되는 동양의 관용은 우선 가진자 혹은 지배자를 말하는 베푸는 주체와 그 수혜자인 객체와의 분명한 계급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부처님이 베푸는 자비, 주인이 죄지은 하인이나 구속된 자들에게 주는 사면, 혹은 가진자들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빈민구제 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동양의 “관용”은 절대자 혹은 지배자의 선행이 피지배자에 대한 “동정”으로 행하는 일방적인 진행을 가지며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불평등적인 계급체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서양의 똘레랑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사고방식 혹은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행동의 자유를 “존중한다”라는 뜻이며 적용되는 두 개체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물론 “불관용”은 이와 반대로 언제나 타자와의 구별 속에서 자신의 주체를 모든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는 절대적인 개념이다 :  일반적으로 서양의 입장에서 발견자로 기록되는 콜롬부스가 당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상대적 입장에서는 침략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니체의 상대적 이론)은 이러한 관용의 상대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개체 사이의 똘레랑스 개념은 계급관계가 아니라 평등관계 즉 동등한 두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그 철학적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소외된 개체의 존재론적 인정(승인)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두 개체 사이의 계급관계에서 야기되는 동정이나 자선 혹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미덕이 아니라 동등한 수평관계에서 이해되는 “상호 존재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경률, “똘레랑스와 사진”, 사진비평, 2001년 가을호, 타임스페이스, 서울.

② 같은 책.

③ 같은 책.

④ 다시 말해 그들의 흑백논리에서 이러한 소외된 존재들은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결국 물질과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양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보편적 대상들을 정상이라 규정하고 역으로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소수의 비정상적인 대상들을 괴물로 간주하여 억압하고 멸시하고 소외시키는 편견적 사고를 불관용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관용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것들을 인정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공존 즉 존재의 다양성을 원칙으로 하는 포괄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전자의 시각을 통일된 하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존재의 획일성”에 관계된다는 의미에서 “불연속(discontinuite)”이라고 하며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보이는 세계를 관통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한다는 의미에서 “연속(continuite)”이라고 말하기도 하고(조르주 바타이유)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망각된 존재의 추적”이라고도 한다(마르틴 하이데그). (집단사회가 강요한 미적 추종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는 “추의 예찬”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눌프 라이너(Arnulf Rainer)의 “복개(couvering)”작업에서 분명히 설명된다) 같은 책.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사진 1) 호텔 방에서 타올을 덮은 멕시코인, 1970
(사진 2) 뉴욕 브루클린 젊은 가족의 일요일 나들이, 1966
(사진 3) 뉴욕 100번지 거실의 러시아 난쟁이들, 1963
(사진 4) 뉴욕 20번지 집에서 파마를 한 젊은이,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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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테마 장님과 코끼리 그리고 지팡이
 
우리들의 세상 혹은 현상계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동굴은 하나의 우주이고 동시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상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하나의 풍선이라고 할 때 동굴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대상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원소로 되어있는 풍선 속의 공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은 하나의 원소 뿐이다 : 인식의 영역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나 현상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관념적인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가 B이고 B가 C이기 때문에 A는 C다”라는 수학적인 공리라든지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적으로 ... 을 의미한다”라는 보편적 사실, 혹은 보다 추상적으로 볼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이러한 개념적 대상들은 논리와 일반 그리고 객관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언제나 의미와 이성의 범주 속에서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코드(진리, 상징, 슬로건 등 최소한 타자와 객관적으로 의미화된 개념 혹은 정태적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곧 플라톤 동굴에서 빛에 의해 인식되는 양의 세계(인식계)를 말하는데, 이러한 범주 속에서 사진의 대상을 찾아 재현한다면 그것은 어떤 규명된 의미에 대한 일종의 진술이나 확인일 것이다.
 
 예컨대 시골 농부의 순수한 표정에서 읽혀지는 농심,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동심, 인본주의, 자연보호, 생태계 혹은 생명력을 암시하는 대상들,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달력풍의 이미지들, 소외와 고독 그리고 자아상실과 개인주의 등과 같은 사진적 테마들은 사실상 오늘날 익히 알고 개념(code)적 현상에 대한 시각적 확인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테마들로 “앎”이라는 문화적인 지식에서 온 하나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엄밀히 말해 이러한 사진에는 언어와 같은 진술로서의 작품성(언어로서의 사진)은 있어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예술성(사진으로서 사진)은 사실상 부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공간을 이루는 또 다른 구성원소는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 인식 영역, 즉 음(蔭)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들이다. 이것들은 우리들의 현상계에서 언제나 그 본질이나 진실이 수수께끼나 신비로 나타나면서 변화무쌍한 현상으로만 출현한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징후로만 감지할 뿐이다. 마치 감기의 징후로 몸에서 열이 나듯이 여기서 본질은 객관적 의미를 갖지 않는 불확실한 “그 무엇”(감기와 같은 원인성)을 말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존재적 대상)이다.
 
예컨대 보험금을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사건, 고층 아파트 위에서 뛰어내리는 어린 여중학생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보이는 차갑고 괴물 같은 인상, 젊은이들의 엽기열풍,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서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애착감 등 일상생활의 상황에서 일어나는 모순되고 황당한 경우나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사건이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상황일지라도 자신이 느끼는 직감이나 갑작스런 충동 등은 일반적으로 그 원인이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징후적인 현상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언제나 논리적인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고 어떤 공통된 특징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이고 미스테리한 지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대상이 언제까지나 음의 영역에서 수수께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 능력의 확장에 따라 그 실체가 밝혀지기도 하고 반대로 현재의 절대적 가치로 규명해 놓은 진리 역시 시간과 가치의 상대성에 따라 변한다. 이와 같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들을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물 즉 현상을 본질로 보는 물질중심적 담론과는 달리, 단지 현상을 일종의 징후로 보고 그 원인이나 실체를 추적하는 본질규명학을 현상학(La phenomenologie)이라고 한다. 존재론적 예술론으로 볼 때,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언제나 징후로부터 그 본질을 재현하는 고독한 작업의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예술적 방법은 의심할 바 없이 현상학적 추적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오늘날 이러한 추적의 중요한 예술적 매체로 간주되고 이때 사진을 “사진적 장치(Le disposi-tif photographique)”라고 하고, 또한 그 재현을 “음영의 재현(La representation des omb-res)”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경우 죽음, 애수, 불안, 허무, 음색, 인상, 부조리 등 형이상학적 대상이며 그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추적은 사실상 현상학적인 방법을 동반하고 있다. 흔히 이러한 방법론은 장님과 코끼리의 이야기로 설명되는데, 음의 대상들은 빛(우리의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암흑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인식(능력) 혹은 예술가의 의식을 대상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비유하고 또한 본질을 코끼리로 비유한다. 코끼리라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장님은 자신의 지팡이(즉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 궁극적으로 카메라의 역할)를 이용하는데, 지팡이가 전달하는 것은 사실상 실체의 부분적 사실들, 즉 징후로서 출현하는 현상들일 뿐이다. 방법적으로 볼 때, 이는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파악하는 일종의 추론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예컨대 장님이 감지하는 코끼리 다리는 굵은 고목나무로, 긴 코는 고무호스로, 꼬리는 굵은 밧줄로 이해될 것이며 또한 몸통은 거대한 고무풍선으로 이해될 것이다. 이와 같이 파악된 모든 현상계의 징후들로부터 추리적 방법으로 파악된 사실은 적어도 코끼리와 유사한 감각적 실체일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실체는 결코 언어나 어떤 객관적 의미로 규명할 수 없는 실체이고 단지 색, 선, 점 등 감각적 표현(회화의 경우)에 의해서만 암시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말한다. 그러나 본질의 정확한 규명은 마치 여명의 지평선 밑에 숨겨진 영원히 뜨지 않는 태양처럼(메를로 퐁티의 “지평선적 시각계의 개념”) 사실상 불가능하며, 이때 본질은 지평선 위에 감지되는 수많은 여명의 신호들(“생성의 신호들” Les signes de genese)에 의해 암시될 뿐이다. 그때 본질의 재현은 현상계에서 본질의 부분적 징후를 반사하는 일종의 거울(작가의 감각)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사실상 그 시각적 재현은 단지 본질의 닮음꼴 혹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만 나타난다. ①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불가능한 닮음”이나 폴 클레의 “시간의 그래픽적 재현”은 이러한 본질의 재현에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현상계에 출현하는 현상들은 단지 징후에 불과하며 예술가가 품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바로 이러한 징후로서 나타나는 비논리적인 “현상의 외관”에 관계한다. 다시 말해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현은 우리를 둘러 싼 수많은 신호들로부터 단지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며, 논리를 중심으로 분석되는 구체적인 진술이나 규명(구조주의)에 의해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적 사실주의에서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한다”라는 말은 달리 말해 “객관 타당한 코드 혹은 약속”에 관계한다. 이와 같이 약속된 의미는 예컨대 장님들(작가들)이 지팡이로 느끼는 감각의 실체들이 코끼리와 비슷한 실체들 혹은 전혀 다른 실체들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정해 놓은 하나의 공통분모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정확히 똑같은 붕어빵을 만들기 위해 만든 붕어 모양의 틀(형상 : forme/fo-rm)과 같이 논리적으로 객관 타당하다고 인식된 “앎(connaissance/knowledge)”을 말하고 있다. 인식론자들 쉽게 말해 의미론자들(특히 형상론자들)은 바로 이렇게 규명된 수많은 형상들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단지 틀에 의해 찍혀져 나온 붕어빵 같은 현상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 수 없는 수많은 틀과 또 그 틀들에 의해 다변화된 모습(figure)들을 가진 무한한 현상들로 가득찼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하나의 똑같은 틀에 의해 찍혀 나왔다고 인식되는 많은 붕어빵들조차도 그 하나하나는 역시 각자 다른 모습을 갖는다. 이때 각자 다른 모양의 붕어빵들은 하나의 의미화된 틀, 즉 정형화된 붕어빵을 만들게 하는 배경(fond)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 혹은 위대한 사진작가가 재현하는 예술적 생산물은 결코 획일적인 붕어빵이 아닐 것이며, 진정한 비평가는 작가의 감각적 생산물을 하나의 틀(말하자면 의미의 틀)에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모든 대상은 언제나 생성에서 변전으로의 동태적 의미를 가질 뿐이며, 외관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언제나 변전의 과정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의 세계의 발견은 흔히 진리나 정태적 의미(code)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사유 한계를 고려할 때 일반적으로 이러한 발견은 징후의 포착으로부터 존재의 본질을 추적하는 현상학적 방법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이 함축하는 의미(connotation)로부터 분석된 해설이나 혹은 그 의미의 틀로부터 포착된 사진적 재현은 그러한 문맥에서 볼 때 몇몇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대로 찍혀 나오는 붕어빵 논리에 가깝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미 의미화 되어 있는 현상이나 일반적 사실의 틀로부터 재현된 사진의 주제,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어린이들의 티없이 맑은 동심의 세계, 생태계의 파괴나 퇴색된 인간미의 고발, 강인한 생명력과 대자연의 예찬등은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암암리에 약속된 일종의 의미적 코드(판박이의 정의)일 뿐이다. 이러한 주제(studium)를 재현한 사진은 근본적으로 감각이 아닌 우리들의 문화적 앎에서부터 출발된 사진적 재현이고, 비록 의미의 진술을 위해 형식상 전통적으로 우리가 인정하는 작품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상 진정한 창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그것은 이미 코끼리와 같은 실체가 밝혀진 인지 대상 혹은 장님이 아닌 정상인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대한 일종의 논리적 확인이나 보고서로 간주 될 수 있다.
 
 사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재현 대상은 시각적인 이상함과 특이함인데 예컨대 우리는 사진에서 언제나 정상적인 모양새보다 정상적이지 않는 모양이나 조형적 형태, 혹은 엉뚱한 대상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같은 방법으로 생각해 볼 때, 의미의 벽을 넘는 첫 단계 역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다. 사실상 우리는 의미가 부여된 추상적인 주제에 관해서도 정상보다도 비정상적인 논리에 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 진정한 사진가의 예술적 재현은 일반적인 의미-코드로 쉽게 설명되어지지 않으며 사진이 던지는 메시지는 언제나 정상적인 논리의 뒷면에 있다. 이때 사진이 외시하는 사실주의(denotation)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단지 하나의 징후로서 어떠한 조짐을 보이는 상황적 신호, 즉 “사진적인 것(The photographic)”이 될 뿐이다. 사진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림과 같은 번역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② 

  진정한 예술사진은 의미 이전에 징후(결과적인 흔적)를 재현하면서 그 본질(본원적 원인이나 동기)을 추적하는데, 이때 본질은 이미 정형화된 의미가 아닌, 의미의 영역 밖의 의미를 갖는다. 카메라는 장님의 지팡이가 되며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다.

  프랑스의 사진 비평가 질 모라(Gilles Mora)는 랄프 깁슨(Ralph Gibson)의 지팡이 사진(도판 1)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감각의 논리”를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의 사진을 한마디로 “반 - 의미적” 사진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것은 흔히 인식론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는 무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이나 초월 혹은 과잉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객관적 의미가 아닌 비논리적인 주관적 의미(sans code, signifiance, punctum, obtus 등)에 보다 가깝다. 그와 같이 음영 세계의 대상들은 의미의 생성과 과잉을 동시에 가지면서 진정한 창조의 대상 ③ 이 된다. 그래서 단순히 의미론적 시각으로 읽는다면 깁슨의 사진들은 적어도 내용상으로 우리를 혼동시키는 하나의 암호나 수수께끼로 이해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시(예술사진)를  잡지기사(다큐멘터리 사진)를 읽을 때처럼 단어 하나 하나가 진술하는 논리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왜냐면 그의 사진은 공통적으로 더 이상 서술이나 상징과 같은 이미 규명된 의미가 아닌, 단지 무의미 즉 시적 언어인 “생성적 의미”만을 갖기 때문이다. 이때 생성이라는 것은 의미로의 진화과정에서 시원적인 출발점, 혹은 싹을 말하는 것으로 이성이 지배하는 우리들의 의식으로부터 망각된 대상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발견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카메라로 재현하는 것은 단지 지팡이로부터 전해오는 감각의 재현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식 영역 밖에서 비구체적이고 추상적인 코끼리라는 본질적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그와 같이 사진의 진정한 창조는 더 이상 확실한 의미의 진술이 아닌 불확실한 감각의 재현, 즉 “망각된 존재의 추적”(Martin Heid-egger)에 있다. ●
 
주)
① 이러한 비유는 메를로 퐁티의 “눈과 정신(L'oeil et l'esprit)”과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Le visible et l'invisible)”에서 차용된 개념적 설명이다. 궁극적으로 안 보이는 세계는 음의 세계를 말하며 본질의 실재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시각계에서 보이는(인식되는) 대상들은 관점에 따라 혹은 시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외관들만 가지며 그 본질들은 외관에 항상 은닉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무 가지들에 의해 나무의 동체가 추리되듯이 본질의 추적은 우리들의 감각계(특히 시각계)에서 출현하는 색, 점, 선과 같은 “존재의 은유나 생성”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적 재현은 이때 대상의 본질을 추리할 수 있게 하는 나무 가지 혹은 거울(index)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② 엄밀히 말해 사진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직접적인 번역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기 때문에 본원적으로 함축적인 의미(connotation)를 내포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의 징후(index)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사진을 언어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사진은 사진이 내포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징후로서의 사실주의가 나타나는데 이는 사진을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실체에 대한 하나의 징후 혹은 자국으로 보는 견해이기도 하다  (차후의 테마, 사진 인덱스론 참조).

③ 여기서 창조의 의미는 의식에 내재된 존재적인 실체의 발견을 말하며, 다시 출현하게 한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는 “재현(representation)”은 이러한 실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말한다. 그래서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곧 이미 존재하는 (음의)실체에 대한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랄프 깁슨, “샌프란시스코” 시리즈, 1960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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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l in the city

2011. 8. 30. 19:38 from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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