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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테마 사진과 아우라 현상
 
 
 
 
사진 용어에는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이 용어는 사진에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존재론(음의 세계)적 용어이다. 이때 용어의 개념은 앎과 이성을 초월하는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의 신비에 가까운 감정의 음색(tonalite)으로 의미의 영역밖에 존재(플라톤 동굴의 어둠)하는 비논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응시자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느날 오래된 사진첩을 뒤지다가 발견한 돌아가신 어머님의 사진을 보았을 때 웃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가에 고이는 눈물이라든지, 시골 대청 마루 위에 걸려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에서 유령같이 모여 있는 어느 가족, 연도가 1951년이라고 적힌 낡은 사진에서 웃고 있는 익명의 군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 가로등만 훤히 켜진 아무도 없는 대도시의 야경 사진에서 느끼는 왠지 모를 오싹한 공포감, 혹은 지하철 광고 사진에 흐리게 잡힌 어느 소녀의 옆모습이 주는 어떤 아쉬운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공통적으로 그러한 감정들은 모두 보여진 대상으로부터 “나” 즉 “경험적인 연상”과 관계한다. 특히 찍혀진 인물의 운명(과거 속의 미래)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이러한 사진적 현상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결코 단순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틴어 어원을 갖는 아우라는 그 사전적 정의를 참조해 보면 종교적 후광, 무리(halo) 등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감싸는 정신적인 분위기로, 사진의 어떤 객관적 의미보다는 주관적인 가치를, 또한 물질적이라기보다 신비적인 측면을 갖는다고 한다. 이는 또한 “미적이고 의미적인 방식에서 절단된 낡은 타원이 가끔씩 쬐는 수증기 같은 원에 비유하고 또 그것은 일종의 가벼운 원(기체)이다. 그 속에서 훈영(후광)을 보지 못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마치 토스칸과 옴브리(이탈리아)의 옛 거장들이 일상생활에서 기적을 수행하고 있는 성인들 얼굴 주위에 그려 넣는 금관과 같은 것이다.”1)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우라를 상기할 때 우선 모델의 “성스러운 것” 혹은 “이미지의 유일성”과 연관시켜 흔히 이미지 그 자체에서 또 다른 의미나 구체적인 사실이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초상은 아우라의 마지막 피난소이고 그 아우라가 인간의 얼굴 위에 최후의 불똥을 던진다”라고 1930년대 당시 재생 이미지의 문화적 가치에 대하여 탈 신성화와 세속화(아우라의 상실)를 주장했다.
 
 이러한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아우라는 일종의 사진 이미지 그 자체에 실질적으로 이미 함축되어 있는(전혀 응시자와 관계없이) “신성한 이미지” 혹은 그러한 실체를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객관적 논리만을 수용하는 양의 세계(모더니즘)에서 볼 때 “아우라”는 흔히 복제된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작품의 개성이나 독창적인 분위기를 지칭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단지 지나치게 구조화된 기호-논리에 의한 비유적인 수사학에 불과하다. 아우라는 결코 실체론적 대상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비록 이러한 현상이 언어의 역사와 사진 물리학 혹은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설명된다 하여도 사실상 아우라의 정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단지 의미의 과잉을 말하는 푼크툼의 비논리적 영역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의 상실”은 대량 복제로 인하여 이미지 그 자체에서 분실된 “오리진”의 독창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미 함축되고 의미화된 대상에 대한 응시자의 무반응 혹은 무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아우라의 현상을 다소 비현실적인 형태로 사진이 은닉한 또 다른 고유한 이미지로 생각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오랫동안 우리가 의미적인 분석에 너무 익숙해 왔기 때문이다. 아우라는 사진에서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사진의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응시자의 주관적 기억 연상에 관계할 뿐이다. 역으로 창작자의 입장에서 작가가 포착하려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전염된 아우라의 음색(대표적으로 초현실적인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된 사진 이미지(사진적인 것)는 다시 한번 더 언급하지만 대상에 이미 본원적으로 내포된 장면의 재현(미술의 경우)이 아니라 사실상 작가도 모르는 전혀 불확실한 감각적인 재현(사진의 징후)일 뿐이다.
 
왜냐면 사진기는 번역적인 도구가 아닌 내면으로 향한 일종의 더듬이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작가가 감지한 아우라를 흔히 자신만이 감지하는, 극히 주관적인 감각적인 “느낌(sens)” 또는 “기분(humeur)”3), 쉽게 말해 “직감(intuition)”이라 할 수 있다.

  아우라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을 해보면 철학적으로 실체론과 존재론의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이론들은 인식(陽  pist mologie)과 비인식(ontologie / 음영 蔭映 ombres) 혹은 실체와 존재의 철학적인 대립 속에서 서로 공존하여 왔다. 실체론적으로 본 아우라는 보다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아우라는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대상이 흐리고 불확실한 실체 혹은 그러한 효과가 만들어 내는 심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근본적으로 사진의 흐린 효과(레미니센스의 은유)에 직접적으로 관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 라틴어에서 아우라는 그 첫 의미로 가벼운 입김, 안개, 바람 그리고 공기와 대기까지 지칭한다. 또한 생리학적 용어로 어떤 신체, 어떤 실체의 방출을 지칭하는데 이렇게 만질 수 없는 유동 즉 입김은 신체와 실체에 의해 생산된다. 사진에서 아우라의 물리적 실체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효과에 빚지고 한다.

  한편으로 아우라는 사진의 부드러운 중간 톤을 말하는 메조-틴토(mezzo-tinto)로부터 야기된다. 원래 이것은 연속판인 동판(부식)에서 색조의 “연속(continuit )”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의 절대적인 연속적 색의 변이를 말하는데 여기서 중간 색조는 시각적으로 아주 부드러운 효과(거의 환상적)를 준다. 이러한 효과는 전통적 그림의 대기 원근 효과, 즉 “스푸마토(sfumato)”처럼 그림의 중요한 “환기적 효과”와 동일시되었는데, 한때 19세기의 많은 사진들(특히 초상사진들)에 있어 이러한 심리적인 효과(비현실적인 초상)를 위해 메조-틴토를 의도적으로 선호했다. 게다가 제작 과정의 긴 노출시간과 기술적 문제로 당시에는 이것을 하나의 효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딱 한 장만 존재하는 거의 모든 다게레오타입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중간 톤은 모델을 유령과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로 재현하였다.5)
 
그때 그 극단적인 부드러움 속에서 언제나 인물을 감싸는 무엇을 발견하는데 이것을 아우라로 보았다. 사실상 1930년대 벤야민의 텍스트에 예로서 언급된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마치 동판 위에서의 메조-틴토처럼 극도로 부드러운 흐린 안개 효과에 관계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아우라는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사진에 직접 출현한다. 아우라 현상은 사진적인 실험에서 정확히 물리적 현상으로 실재하는데 그것은 무리(halo)이다. 무리(달, 해의 무리와 같은)는 예를 들어 창에 의해 아주 강하게 비친 실내를 촬영할 때 또 카메라를 창으로 향하게 하여 촬영할 때 특별히 생기는 빛의 방사로 나타난다 : 그때 인화 작업에서 창가들은 마치 빛에 의해 먹혀진 것과 같이 흐려지고 불확실하게 나타나는데 일종의 후광(aureole)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현상은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외로 단순하게 설명된다. 물론 근본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오랫동안 유리판으로 작업한 19세기 많은 사진가들이 애착을 가진 것은 밀착 인화에서 유리판의 부드러운 입자(연속적인 중간 톤)로 인하여 사진에서 나타나는 비현실적인 현실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극도로 선명한 입자(pique)도 아니고 더욱이 칼로타입에서 종이의 거친 입자가 주는 흐린 효과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 이는 광학적으로 빛이 표면의 감광층을 지나 유리판을 통과할 때 유리판의 두께로 인하여 생기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인화에서 시각적으로 가벼운 무리현상을 일으킨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표적으로 으젠 앗제의 많은 유리판 사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같이 아우라는 벤야민의 존재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진 그 자체에서 하나의 물리-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유일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기입하는 사인처럼 자신의 독창적인 사진적 효과로 간주되었다. 특히 논리와 의미를 기반으로 하는 모더니즘 관점에서 볼 때, 아우라는 어떤 작품의 존재적인 유일성을 보장해 주는 필요조건 즉 독창성(authenticite)이라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되었다. 모더니즘은 그처럼 아우라의 실체론적 개념에 의미적인 옷을 입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론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우라는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 즉 빛의 굴절이나 경계면의 흐린 효과 혹은 빛 바랜 세피아 색으로부터 야기되는 물리-심리적 효과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더구나 20세기에 들어 와서 렌즈와 음화의 급속한 질적 향상은 사실상 아우라에 대한 관심을 실체론적인 분석(인식론)에서 수수께끼와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 정신 현상으로 이동시켰다. 왜냐하면 아우라 현상은 단지 흐린 효과에서만 유발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선명한 사진에도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유동적이고 주관적이고 또한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처럼 대상과 응시자의 쌍방적인 정신현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처음으로 초월적인 사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무리(halo) 혹은 그림에서 성인의 후광으로 이미 알려진 “아우라”라는 용어를 차용한 발터 벤야민은 사실상 아우라 현상을 앞서 언급한 실체론적 방법으로 밝히지 않는다 : 벤야민은 힐과 아담슨, 으젠 앗제, 오귀스트 잔더 등의 사진을 분석하면서 사진을 사진 그 자체에서 발하는 비현실적 출현을 직접 기술하고 있다.
 
 그는 사진에 출현하는 현재적인 이미지와 그 출현 속에 지나간 과거의 여운(reste) 혹은 향수(nostalgie)가 발한다고 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과거 사실의 출현 주위를 맴도는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예리한 감정, 이러한 감정을 “아우라”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이것은 그림이나 다른 예술에서는 볼 수 없고 유일하게 사진에서만 출현하는데 응시자의 내부에서 은밀하고 주관적이고 무의식적인 자리를 만든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독창성이 있다고 한다.6) 벤야민은 모든 것이 괴상하고 모조적으로 나타나는 카프카(Franz Kafka)의 젊은 사진(옛날 사진들)에서 또한 뉴 해븐(New Haven) 항구의 어부들을 보여주는 힐과 아담슨(Hill and Adamson)의 사진에서 아우라의 탁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아주 정확한 사진기술은 손으로 그려진 어떠한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어떤 마술적인 것을 누설하고 있다.
 
사진사의 노련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색한 모델의 포즈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은 슬그머니 사진과 유사한 이미지 속에서 자신 스스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튀는 일종의 불똥을 찾게 된다. (...)”7) 여기서 말하는 불똥은 어떤 이상함, 회고적인 시각, 멜랑꼴리 등과 같은 응시자의 경험과 체험에 관련되는 지극히 주관적인 음색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진 그 자체에서 응시자로 전염된 존재론적인 출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라에 대한 벤자민의 존재론적 발견은 당시 인정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사진적 현상이라는 구조주의의 실체론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그후 이러한 존재론적인 재발견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자동 생성(La genese automatique)”을 거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참조주의까지 무려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아우라는 신비적이고 회고적이고 또한 역사적인 문맥으로 축소되면서 더 이상 실체론적인 의문을 달지 않을 확실한 어떤 사진적 공리가 된다 : 푼크툼. ●
 
1) Alain Buisine, Eugene Atget ou la melancolie en photographie, Edition Jacqueline Chambon, Paris, 1994, p. 118.

2) 아우라는 원래 사진의 대상과 응시자의 관계에서 주관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용어의 진화에 따라 모든 예술작품에 함축된 “오리진” 혹은 “독창성”과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실체론적 관점에서 아우라는 대상을 흐리게 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회고적인 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일종의 환기적 효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3) 이러한 용어들는 “나”라는 이성의 범주 즉 주관적 관념론(칸트)의 범위를 벗어나 거의 신비론과 유신론에 가까운 번역 불가능한 존재론적 용어들이다. 유사한 용어로는 강렬한 인상, 도취, 황홀, 절정, 기질, 음색, 멜랑콜리 (독/stimmung, gemut, 불/tonalite , impression, temperament ...) 등의 개념을 들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추적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창작의 원동력이다. 참조. Alain Bonfand, Paul Klee, L'oeil en trop, Edition de la diff erence, Paris, 1988. 그때 아우라는 사진적 매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이론적 용어(1930년대)이다.

4) 엄밀히 말해 이것은 착각이다. 결코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사진은 기억”이다(Philippe Dubois)라는 명제에서 흐린 사진을 기억의 쇠약 혹은 망각으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우리들의 “논리적 기억(la m emoire logique)” 때문이다. 참고, 앙리 베르그송의 “무시간적 기억 회상”(La matiere et la memoire).

5) 유령과 같은 이러한 초상은 손으로 직접 그려진 사실주의 초상화(예로 현대미술에서 게랄트 리히터의 “48명의 유명 초상”)를 상기시킨다.
  
6) 사진이 그림과 달리하는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최초의 존재론적 발견으로 약 15년 후 앙드레 바쟁이 언급하는 “자동생성(일종의 무의식적 연상)”과 같은 문맥을 가진다.

7) W. Benjamin, “La petit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Poesie et revolution, Danoel, paris, 1971.
 
글·이경률
(미술사 박사)
 
으젠 앗제, 브로카 길 41번지,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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